네 청년의 신앙


선지자선교회 1982년 1월 30일 토새

 

본문 : 다니엘 1:8-9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지난밤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그 일을 3년 동안 계속 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또 자기 자체도 신앙의 사람으로 변해졌고,  그러니까 행동도 변해졌습니다. 이로 인해서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  변하게 됐습니다.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데도 충성되다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명하시고 원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하나 작정하고 그  일을 끝까지 실행을 해서 결실을 맺으려고 하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이 기도의 사람이 되게 되고 그러면 그 하나를 인해서 하나님도 차차  차차 바로 알게 되고 또 자기도 차차 바로 알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알지 못하고 과대평가를, 지나치게 좋게 크게 이렇게 평가를 하는,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나 자기 나타내는 사람이나 또 하나님에게 대해서 무식한  사람, 사물에 대해서 헛되이 담대한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이 실천의 생활이 없는  그 연고인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은  그것이 하면 할수록 자기를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에게 대해서 무식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무식하고, 인간에 대해서  무식하고, 사물에 대해서 무식해서 스스로 교만하여 멸망에 빠지는 그런 사람이  되어집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사욕적으로 무엇을 하나 정해 가지고 그것이 끝까지 잘  계속돼서 성공하면 그것이 쓸모 있는 의지로 자기는 의지의 사람인 줄로 그렇게  생각을 하지마는 그것은 정반대로 악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고, 자기중심의  사람이 확고히 되어지고, 또 이 사물에 대해서나 모든 것에 대해서 자기중심인  그것이 능숙하게 되어지기 때문에 점점 옛사람이 자라가게 되는 결과를  맺습니다.

 다니엘은 그 열조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하나님이 사랑으로 징계한 것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됐고,  또 이 반대로 관계를 바로 가졌을 때에는 하나님이 무한한 그 축복과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 뜻은 정하여지게 된 것입니다.

 지난밤에 말한 대로 우리는 자기의 닥친 그 현실을 바로 견해하는 이것이  마음의 눈이 밝은 것인데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현실에 잘못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함으로 이렇게 징계로 주셨다 하는 그것이 그만 좋고, 자기에게  무엇 하나님이 약속한 그 좋은 것이 오지 않는 것은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서  갖추지 못해서 이렇다 하는 이것으로써 단정을 짓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그런 분이 자기 몸에 찌르는 가시가 있는, 자기 몸에 어려움이  있는 그것은 하나님이 시험하시려고 하나님이 주시는 특수한 무슨 사도 바울에게  좋은 점이 있어서 그와 같이 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기 쉽지마는 결과는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것도 흠점이 있어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라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자고 해져서 시험에 들까 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사탄의 찌르는 가시를 줬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잘못되는 것, 원치 않는 일이 오는 것, 원하는 것이 다가오지  않는 것, 이것을 제 조작배기 해석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자기 과대 평가하는  것으로서 해석을 가지는 이런 것, 또 위로를 주고 받는 이런 것, 이것은 다  자기중심으로 살려는 그자의 상당한 보응의 자기 어두움으로 자기가 함정에  빠지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 작정을 하고 그 일을 이루려고 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차차 차차, 그것 하나 결심을 하려 할 때에 이 면이 모자라면  그 면을 고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저 면 이 모자라면 저 면을 고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이래 가지고 자기의 약점도 알게 되고 가기의  장점도 알게 되고, 또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시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그것도  차차 알게 돼서, 그 접하는 범위가 차차 넓어질 때에 넓어지는 것, 넓어지는  대로 하나 둘을 점령해서 이기게 되면 마지막에는 세상을 이기는 그런 사람으로  점점 성장되고 진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은 그가 뜻을 정한 것은 이런 어린 가운데에서 시작하지  아니하고 열조들이, 자기 선조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 이것을 깨달아 회개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것을 깨달아서 행하기로 그렇게 작정한 이 작정인  것입니다. 대단히 장성하고 위대한 작정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이든지 자기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다 순종 못하면  하나라도 해 봐라. 다 결실 못 하거든 하나라도 해 봐라.' 그것을 말한 것이  지난밤에 말한 것이고 오늘 아침에 첫 시간에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 일을  다 버림으로 이 징계받아 가지고 우리 민족이 이렇게 망했다.' 그런고로 이런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망하지 않을 것이요 이런 것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능력과 은혜로 채워 줄 것인 것을 그들이 바라면서 했습니다.

 이 생활을 3년 동안 계속 하는 가운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고 또  자기 자신들이라는 그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참 놀랄 만한 그런 일을  닥쳐도 그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유유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네가 아무 두려운 일에라도 놀라지 아니하면 사라의  딸이 되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더우기 어떤 일에라도 그분이  놀라는 일이 없었습니다. 놀라는 일이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요한 계시록 끝에 보면 말씀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

3년 동안에 이 사람들은 죽음이 앞에 와도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그럴 사람으로  사람들이 변화가 돼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그들의 지능도 변화됐고 또 행위도  변화됐습니다.

 그 행위가 조그만치라도 흔들리지 않고, 그 행위를 죽음이 가로 막았지마는 뭐  장정이 초지장 뚫고 나가는, 종이장 뚫고 나가는 것과 같이 아무런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죽음이 가로막아도 이 사람들의 행위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이 썩 뚫고 그대로 통과해 나갔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붙들고  일하실 수가 있어서 하나님을 그렇게 무시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나라들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이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제대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에게 대해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마는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며 선하신 분이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대해서 욕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이렇게 욕하지마는 일반은 다  그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두려워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든 두려움의 근거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두려움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면 하나님을 모든 두려움의 근거로 삼는다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인한 모든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못쓰는 사람입니다. 아 내가 남편에게  예수님 믿으라고 이렇게 전도를 하는 아내의 말을 인하여는 그 남편이  회개하지를 아니해도 아내의 그 두려움을 인해서, 두려워함을 인해서 남편이  회개한다, 여러가지 몇 가지를 말했는데 "남편의 두려워함을 인해서 회개한다"  하는 말씀을 해왔습니다.

 그러면 "아내의 두려워함을 인해서 남편이 회개한다" 했는데 그러면 그 아내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그런 것, 어떻게 하면 못 먹고 살까 그런 것 두려워하는 그런  것을 말함이 아니고 근거적 두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보니까 그 남편에게도 두려워하는 것이 '혹 잘못해 가지고 그 남편에게  거리낌을 해서 그 남편의 구원에 지장됨을 줌으로 하나님이 노여워하실까?'  보니까 남편에게 대해서, 사람에게 대해서, 일에 대해서, 책임에 대해서,  식구들에게 대해서 모두 하는 일이 낙관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고 두려워해.

이웃에게 말 한 마디를 해도 두려워 해. 그 두려움을 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인해서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혹 이 하는 것이 그분에게 거리낄까?  그분에게 노여움이 될까? 그분을 거슬림이 될까?' 이렇게 그분을 두려워함으로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이것을 보고 그 남편이 회개를 했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전생활에 하나님이, 그분이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고,  모든 것을 당신이 요구하시고, 명령하시고, 살피시고,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인데  지극히 작은 것 물건 하나를 남용을 해도 '이것 하나님이 이것을 주셨는데,  이것을 어떻게 쓰라고 주셨는데, 적절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으로 인해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그 두려움을 관련을 해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자유대로 못 하고, 자기의 사욕대로 못 하고, 그 모든  것을 멸시하고 하지를 못하는 그런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건 하나님을 모든 두려움의 근거로 두려워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을 합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근거적 사랑을 말합니다, 근거적 사랑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일을 사랑하게 되고,  "네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 그러면  그 일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근거했음으로  피곤치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그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그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근거로 이렇게 했기 때문에 피곤해지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으로, 점점 하나님을 두려움의 근거로 사랑의  근거로 또 소망의 근거로 의지의 근거로 그 순종의 근거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또 재미가 나서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저 그 하나만, 한쪽면만 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둬 두시지 않으시고 이 면으로 그것이 이루어지면 또 저 면을  들이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근거로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는  그런 것은 내비두고 그 사람에게 '네가 이런 일이 닥치면 하나님 두려움보다도  이것 두려움을 더 두려워하나, 보다 어느 걸 두려워하나? 어느 것을, 하나님  두려움을 근거로 하는 두려움을 하나 안 하나?' 그것을 닥치게 됩니다.

 그러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런 사람들에게 불미불을 앞에 닥치게  만들었고 다니엘에게는 사자굴을 닥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을 모든 두려움의 근거로 삼았고 다른  것을 근거로 삼지 않았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모든 두려움을 가지게 되다  보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으면 너희를 죽일 거다.' 하는 그런 두려움은  '하나님을 두려움의 근거로 삼느냐 또 다른 근거가 있느냐, 다른 근원이 있느냐?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그 근거가 있느냐?' 이것을 하나님이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에 길러 놓은 하나님 두려움의 그 근거가 그런 것이 나오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참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하늘에 속한 두려움을  가지다 보니까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오.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멸시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깨뜨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두려워함에 근거를 삼은 그것으로 인해서 그런 것을 아주 우습게 생각이  되어졌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이 되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조그만한 그  두려움도 없고 거기에서는 두려움이 딴 두려움이 생겨졌습니다.

 '이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을 미끄러지게 할라? 이것을 예사로 여겼다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게 될라? 또 잘못했다가 하나님이 나에게  진노하시고 나에게 징계를 하실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그 두려움의 근거를  가지고 보니까 점점 그것은 멸시해야 됩니다.

 그것은 멸시해야 되고, 그것은 업수이 여겨야 되겠고, 그것은 상관 없이 있든지  말든지 조금도 상관이 없어야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도 안 하겠고, 또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시려 하는 일을 방해도 안 하겠고, 구원하실 일을  하려고 하는데 방해도 안 하겠고, 하나님을 노엽게도 안 하겠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도 되고, 이러니까 그들은 요동이 안 됐습니다.

 이래서 사자굴이라든지 불미불이라든지 그 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움의  근거로 했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을 근거로 하지 않고 또 딴 무슨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이 있느냐?' 두려움의 일원 사상인데, 두려움의 원인을 하나로 삼는,  두려움의 일원. 일원론, 이원론, 삼원론, 기독교는 일원론입니다.

 그 사람 내가 이름을, 그분 내가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저 삼각산 기도원에  들어가면 거기에 있는데, 한장로라고, 한태동씨 아버지인 가 한태동씨인가 그것  모르겠습니다. 연세대학 교수인데. 그래 그분은 미국 가 가지고 이원론을  주장하는 그 논문을 써 가지고 박사가 됐습니다. 왜 그말 하느냐 하면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인데 그전에 박 대통령 있을 때에 그분이 그 뒤에 지도를  많이 했었습니다.

 일원, '두려움은 하나뿐이라.' 하나님을 두려움의 근원으로 삼는, 이러면  하나님께서 '자, 하나님을 두려움의 근원으로 네 두려움은 하나만 가지는,  하나만 두려워하는 이것 두려움의,' 이 두려움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러면  좀 세상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 하나를 떡 내놓으면서 '자, 이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할 때에 그 때에 이것이 바로 되지 않으면 이것도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워하게 되니까 자기가 이것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 이 두려움과 두려움이  둘이 싸워서 자기는 '이 두려움에 굴복을 할까 이 두려움에 굴복을 할까?' 이래  가지고 큰 두려움에 굴복하게 됩니다. 결국은 두려움은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는 그 모든 것은 다 근원을,  근원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그때에 "이 주인을 중하게 여기든지 저  주인을 중하게 여기든지 두 주인 중에 하나를 중하게 여기지 두 주인 다 섬기지  못한다" 그러면 첫째 중하게 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고 첫째 중하게 여기고 그  다음으로 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건 멸시 천대하는 것이고 괄시하는 것이고 모욕  주는 것이지 그건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이 말을 잘 알아야 돼요.

"환영하지 않은 자는 대적하는 자라" 하는 이것도 내나 이런 성질의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자기는 거기에 속하게 되기 때문에 그가 없을  때에는, 그 두려움이 없을 때에는 이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가지는 그런 것은  두려움을 상대하는 두려움에 음행자입니다. 그것을 종교 음행이라, 인격의  음행이라 이럽니다.

 이 두려움이, 하나님을 두려워해도 저것 두려울게 없으니까 이것 두려워하고,  또 이것 두려움이 없으니까 저것 두려워하고, 그것이 두려움의 창기입니다.

두려움의 창기. 변절. 그것이 종교적 자기 신앙적 음행이라 그거요. 이들은  두려움의 이 근거를 하나님을 근거적 두려움으로 이랬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두려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두려워하는게  많았지요. 많이 두려워하지마는 하나님 두려움 때문에 그걸 두려워합니다.

 이러니까 지극히 소자 하나에게도 제가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두려움  때문에 이제 소자 하나도 업신여기지를 못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함으로 두려움이 가득 참지요. 찼으나 하나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인해서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을 인해서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오래 돼 놔서 그 사람 내가 이름을 잊버렸는데. 앉은뱅이  70명 전도한 사람 이름이 원이라고 내가 했지? 김의근. 김의근 그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이렇게 하고 아침에 새벽기도하고 와 가지고 아침을  먹으니까, 그분은 무관 출신이라서 좀 성질이 괄괄하고 이런데, 기도하고 와서  아침을 먹으니까 어떤 거지가 하나 와 가지고 밥 좀 달라고 하되 좀 과격하게  이렇게 좀 하고 하니까 이놈 어른 진지 자시는데 못되게 그런다고 호통을 쳤다  말이오. 그러니까 또 달라고 자꾸 이러며 좀 부애를 지르니까 이놈 썩 안 물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고 거석하니까 그만 내려가니까 도망을 가서 쫓겨갔다  말이오.

 그러고 지냈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기도하러 가니까 새벽에 기도 할 때에  기도하니 그 거지가 썩 나타나면서 '내가 너에게 가서 밥 달라 할 때 네가 나를  괄시를 했다.' 이렇게 주님의 형상이 나타나 가지고 밥 얻어먹으러 왔던 그걸  말하는데 그만 깨닫고 그때에 대성통곡을 그 사람이 했다고.

 그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근거로 가졌더라면 주님을 사랑하면  주께 속한 것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의 것을 주님의  소유를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역사하시는 그 모든 역사를  사랑하게 되는데 주님을 사랑의 근거로 삼지 못한 그런 것을 인해서 회개를 하고  그분이 나서 가지고 거지 전도를 해서, 앉은뱅이를 괄시한 그것 때문에  앉은뱅이만 전도한 것이 70명이라고 그때 그런 말을 하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 사람 설교는 못 들었고. 집회하고 난 뒤에 소문을 듣고 가지  않았는가 싶어 쫓아가니까 있어서 그래 한번 만나 가지고 서로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100세 된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하는 그것은  사랑을 시험한게 아니고 사랑의 근거를 시험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근거를.

'네가 하나님만이 사랑의 근거이냐 또 다른 근거가 하나 있어서 사랑이 둘이냐?'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시험하기 위해 가지고 이삭으로 시험했을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으로 인해서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요동하지 않으니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경외하는  것 알았으면 사랑하는 것도 알았고, 바라보는 것도 알았고, 의지하는 것도  알았고, 순종하는 것도 알았고 다 바로 안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편에 서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보면 그분들이 바라는 것도, 그때에 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고의적으로 이렇게 했느냐? 혹 실수로 이랬는냐? 그러면 지금이라도' 하는 그  말은 그들을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왕이 말했던 것입니다. 이 셋  청년에게. 이랬지마는 그들은 소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명을  지킴으로 인해서 불미 속에 들어가서 불에 타 죽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  하나님의 계명은 불에 타서 죽도록 하는데 느부갓네살 왕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살려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죽음도 그들은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 안 해 줘도 좋습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지 만것이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 거기에서 살려 주려고 느부갓네살  왕이 말하고 다리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해도 그 죽음에서 다른 것이 살려 주는  그런 것도 안 받기로 작정된 사람입니다. '뭐 딴데서는 죽음에서 살려 주는 것도  만것이 주는 것은 싫다.

 하나님이 주시는 건 살려 주시는 것도 좋고, 죽는 것도 좋고, 가난한 것도  좋고, 존귀해지는 것도 좋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나는 소망한다.' 하는 그런  것을 작정하고 3년 동안 공부해 가는 가운데서 이 일을 성사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그분들은 크게 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게 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저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근원을 조금도 요동치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한 것인데  자기들에게는 그것이 시험이 된 것입니다. 자기들에게는 시험이 됐지마는,  시험이 되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이렇게  말을 해도,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는 이런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만 형편에 닥치면  뭐 소망하는 것이 바라는 것이 여러 수십 가지입니다.

 이런 형편에 가면 이런 방편만 봐도 그만 그 방괸을 바라보고 그 방편 쓰고,  이런 사람만 하나 나와도 그 사람 바라보고 그만 그 사람 접하고, 행동도  그러하고, 이래서 이것 참 창기적인, 아무 정조가 없는 창기적은 이런 신앙을  가지는 데에서 우리의 성화가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어디든지 요동치 않는  그런 사람과 행위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이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그 바라봄의 근거가 그때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이 와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딴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살  때에 오는 것이면 단 것이 나 쓰운 것이나 어떤 것이든지 내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함으로 인 해서 오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내가 받아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라보는 것, 의지하는 것, 순종하는 것, 이것을 그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해 나가는 가운데는 온갖 애로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이길 수 있는 사소한 그런 애로점에서 그것을 다 하나님에게 근거 두는 이  근거를 요동치 않고 했을 때 3 년 동안 지나고난 다음에 끄트머리 척 닥친  그것이 우리가 볼 때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하라는 그런 어려운 일, 또 그  신상에게 절하는 일, 또 하나님에게 사자굴을 두고 기도하는 일 그런 것이 그  끝을 말하니까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니까 태연합니다.

그분들은 태연하요. 아무 어렵지 않고 태연합니다.

 태연한 그 이유가 뭣이냐? 벌써 저 밑에서 밟아 올라왔기 때문에, 우리가 보면  천 미터 산이라면 대단히 높은 것으로 이래 보여지지마는 한 자욱씩 두 자욱씩  자꾸 이래 한 자욱씩 걸어 올라가서 절정에 다다라있는 그 사람들은 천  미터지마는 자기 눈 밑에 있고 코 밑에 있을 거라 그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걸음은 지극히 작은 것을 힘쓰고 조심하는 데에서  성장되어 나가는 것이지 지극히 작은 것은 그것은 아주 허수롭게 그렇게  생각하고 뭐 큰 것 굵닥굵닥한 것만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 허영자 허욕자 그  외식자는 다 실패하고 맙니다.

 식목도 보면, 이런 식물들도 원뿌리 굵은 뿌리에서는 역사를 안 합니다. 저  자잔한 눈에 보일까 말까 하는 그런 잔뿌리에서 모든 영양 섭취를 다 하고  거기에서부터 병들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이런 것을 못 하면 자기에게 무엇인가 하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나 발견해 가지고 그걸 하나 작정해 가지고 그걸 하나 살려내 보라  말이오. 그것을 신앙생활을 길러가는 그 방편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  작정해 가지고 그것을 하나 이루어 나가 봐요. 그러면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차차 알게 되고, 자기를 알게 되고, 인간을 알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고,  만물을 알게 되고, 기도를 알게 되고, 성경 읽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차차  경험이 나옵니다.

 '모든 책 중에는 성경이 제일이다'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생각하니까 성경을 읽고 보니까 다르고 설교록 읽고 보니까 다르고, 가 가지고  텔레비전 한번 보니까 그만 달라집니다. 다른 서적 한번 보니까 달라져. '이놈이  도둑놈이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마는 그런 산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도둑놈을 모른다 그말이오. 원수를 모른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런 자는 허영의  설교 허욕의 설교를 하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재미가 있고 눈이 뜨이지마는 생명  있는 사는 생명의 말씀은 말하면 들리지 않고 잠만 옵니다.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 그것은 하나님을 근거로 두고  산 사람이 그걸 알지 아무리 자기가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요 하지 않은 것이라고,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아무리 제가 말을  환하게 외우고 여러 천번 만번 말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자기가 근거로 삼은 그  일을 해 나가려고 해 보다 보니까 이제 지극히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직면된, 김의근 그분이 직면해서 가책이 돼서 그 모든 재산을 다 던져버리고  거지가 돼 가지고 거지로 더불어 같이 생활하는 그런 세상 빛의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혹 제가 아픈가 싶어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서 하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제가 요새는 식사를 하루 두 끼 하기로 고렇게 작정을 해 가지고,  몸에 치료가 좋다 하기 때문에, 그러면 좀 주의 일을 건강하게 한다 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고기 그런 것도 좀 안 먹고 해 보려고. 해로워서 그럽니다.

그래 주를 위해서 하기는 하는 것이오.

 그래서 그런데 좀 몸은 말라도 조금 힘은 납니다. 나서, 뭘 이래 거머쥐면  야물게 거머쥘 수가 있고 좀 괜찮아집니다. 이러니까 혹 아픈가 싶어서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지금 내가,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내가 지금 그런 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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