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 싸움

 

1984. 1. 30. 월새벽

 

본문: 마태복음 25장 5절∼13절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 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 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일날은 밤에 그 오전 오후 설교한 것을 다 재독을 하는데 여러분들이 그 어느  정도 깨닫고 또 거기에 서 느끼고 있는지 모르지마는 그 재독하는데 저는 한번도  그 재독을 빼지 안하고 꼭 듣습니다. 설교할 때도 물론 마음에 깨닫고 또 감동을  받지마는 재독할 때에 참 더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게 되던데 이 여러분들도  재독을 그걸 꼭 듣는게 좋을 겁니다. 어제 오전 설교를 제가 재독을 듣는데,  여러분들이 아마 그 처음에 듣고는 그 들을 때는 다 아는 말이지마는 그 무슨  말인지 설교를 듣고 나면은 아마 담겨 있지 안하고 여러분들 속에 아주 없어졌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 재독을 듣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어제 오전 설교도 내가 재독을 들으니까 그게 참 쉽고도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어려운 설교입니다. 어려운 설교고 그 설교가 내가 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  설교해 주셨는데 굉장한 설교입니다. 그 설교가 뭐 보통이 아니라 굉장한  설교입니다. 그 설교를 일반으로 들어 가지고는 그 무슨 설교인지 그렇게  별스럽지 않게 듣지마는서도 그 설교는 아주 어려운 설교요 굉장한 아주 깊은  설교입니다. 오후 설교는 다 알 수 있는 설교요 그건 또 잘 느낄 수 있는  설교지마는 오전 설교같은 그런 설교는 아주 어려운 설교입니다. 그런데 그 반사  선생님들이나 이런 권찰님들은 들어서. 그 진리를 들어서 자기가 변화를 받아야  되지. 변화되지 안하고 그저 수고만 해 가지고 나오너라 하는 그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마는서도 그러면 자기가 그 사람을 다스리는 목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라면 얼마 안 가서 꺼꾸로 돼 버립니다. 양은 목자가 되고 목자는  양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양이 목자를 기를 수가 있으며 인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권찰님들이나 반사들이 자기가 인도하는 그 양에 대해서 차차 차차  갈수록이 신임을 얻지 못하고 권위를 얻지 못하고 그리 되는 것은 다 변화받는  그것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걸 내가 많이 보는데 부득이 이 주일학교 반사와 학생의 제도 또 이  권찰과 그 식구들의 제도 이 교회 제도가 있으니까 부득이 그 제도를 무시 할 수  없어서 그 제도에 대해서 응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아주 외식 중에 외식입니다.

그 속으로 진정 자기의 목자가 되어서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주님의  대리자,-신앙 지도자는 대리자입니다.

 그러기에, 반사가 자기 맡은 학생에게 주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됩니다.

대리자와 같은 그런 존경도 받고 그렇게 신임도 받고 애호도 받고 사모도 받고  또 권찰도 자기 구역 식구들에게는 예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속속들이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사모를 받고 든든히 신임을 받는  그런데에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그 사람이 거기에 서 목회를 하면서 그 교인에게 이런 주님과 같은  대우, 사모 또 천사와 같은 그 사모와 대우를 받는 것이 그것이 정상입니다.

정상이고 그것이 그 권위있는 목회자인데 본인이 모지라 가지고서 그렇게 받지  못하고 도리어 멸시받는 그런 일도 있고 또 그 교인 자체가 어두워서 그렇게  사모하고 존대하지를 못하는 그런 식구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식구는 그것이 언젠가 그 사람이 한 번 변화를 받을 때에 또 그 식구가 환난을  만날 때에 그때에 그 사람이 돌이킵니다.

 이러니까 자기 맡은 식구에게 주와 및 천사와 같이 그렇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대우를 받는 것이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게 나쁜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데에는 자기가 다른 걸로 가지고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아는 것과 깨달아지는 것, 느껴지는 것, 그 복음의 말씀을 인해서 자기가 효력을  봐서 자기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은 구원의 비중입니다.

구원이 그보다 더 많이 이루어져 있으면 자기에게 속한 그 식구가 항상 목자로  인정하고 은혜를 계속 받을 것이고 구원이 벌써 자기가 맡은 식구보다 뒤떨어져  있으면 그럴 때는 이런 대우와 인정을 받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그저 반사들도 자기들이 열심히 심방해서 인도하는 그 일은 하고  그만 피곤해 가지고 말씀을 증거할 때는 그 은혜를 받지를 못하고 그렇게 되는  그거 참 원통한 일입니다. 농사 지어 가지고서 알맹이는 다 버리고 그 쭉정이만  주워 모아 놓은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얼마 안 가서 그 학생들에게  멸시를 당할 것이요 멸시, 남의 멸시 당하는게 아니라 소망이 없으니까 소망이  없고 얻을 것이 없고 따라갈 것이 없으니까 자연히 푸대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만 자기도 힘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자꾸 반사하는 사람이 점점  힘이 떨어지고 하는 그것은 그에게 뭐인가 준 것이 없고 맡은 그 학생들에게  멸시를 당하니까 그리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꼭 같습니다. 이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반사직을 바로하는 것, 권찰직을 바로 하는 것이것이 바로  위치에서 가지고서 존경이나 대우를 받고 하는 그것이 하늘나라의 대우요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볼 때에는 꼭 (은혜를) 받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만일 자기가 바로해 가지고서 반사 노릇했으면 자기 직장이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그 반사를 그것을 요동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만일 직장이  옮겨진다 하는 그런 직장 옮겨지는 것 가지고는 직장 버리고 많은 수입보던  사람이 적은 수입을 봤으면 봤지 내가 이 맡은 바의 양을 내가 놓고 갈 수가  없다. 또 자기가 무슨 뭐 형편이나 사정이나 그런 사회 문제나 그런 것 가지고도  그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가 결혼하는 그런 것은 참 중대한 문제인데 결혼하는  그런 문제는 그거는 문제가 되지마는서도 참말로 자기가 목자 노릇을 반사  노릇을 권찰 노릇을 바로 했다고 하면은 그 결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결혼  때문에 그것을 버릴 수 없는 그 중량이 훨씬 그보다도 더 많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목회자도 옮길 수 없는 것이 그것이  목회자입니다. 그만침 양과 목자의 사이에 밀접함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인데  밀접함이 없는 그것은 내가 그이에게 먹이던 젖이 떨어지고 또 그 아이도 벌써  먹던 젖이 떨어졌으니까 아이가 어머니에게 대한 그렇게 필요성도 희박해지고 또  어머니가 자녀에게 대한 그렇게 애착성도 차차 성글어진 것입니다. 아이들도  키우면 그렇지 안 해요? 그것이, 차차 다 되어가면은 없어지기 때문에 낳을  때보담 낳아 가지고 차차 크면은 차차 성글어지고 벌어져서 이제는 아주  성글어지고 벌어져서 뭐 그저 이성적으로 부모고 자녀라 이래 그렇지, 속에 아무  그 당기고 연결돼 있는 그 줄이 없는 것은 벌써 그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그 재독하는 걸 좀 다 들어서 꼭 은혜를 받아야  되겠는데요!  어제 오후에 주님과 우리 구속받은 성도와의 그 관계가 머리와 몸이라 하는  거기에 대해서 오후에 증거할라고 했는데 벌써 여러분들에게 알아서 느껴지고  거기에 대해서 은해를 받는 것보다는 들은 말 또 듣는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서  권태날 것이라 하는 그런 면을 인해서 오후에 그 말씀을 증거하지 안하고 다른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시요  우리는 그의 몸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아주 천박합니다. 아주  어립니다. 말로 한 것은 그 녹음기 모양으로 졸졸 외운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깊이 깨달아서 느껴져서 믿어지고 그 실상에 관계가 맺어지는 거기에  대해서는 요 얼마나 희박하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써야 그것이 차차 생겨질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 설교는 일반 그 교계에서 별로이 없는 설교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요 우리는 그의 신부라 하는 이런 설교도 별로이  없습니다. 그런 설교를 하면은 이 교계에서 오히려 오해하기 쉽고 이해 못 하고  추접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못 한다 그래 가지고 그런 설교를 잘 안 하고 또  잘 안 하는 그것은 그만큼 그 속에 그렇게 표현한 관계를 모르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25장 열 처녀 비유를 배웠는데 그저 간단하게 우리가 요 비유한  대로 밤중이 있고 초저녁도 있겠고 그러면 아직까지 밤이 되지 안 하고 햇빛인  낮이 되는 때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에 여러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면도 가지고 있고 또  사회면도 가지고 있고 또 가정면도 가지고 있고 여러 면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  면이 각각 닥치는 밤이 다릅니다. 자기 개인의 사정면도 있고. 가만히 살펴보면  요 면은 이제 내가 신앙생활을 몇 해를 했지마는서도 이 면은 내가 지금  시작하고 있다 그 시작하고 있으면 시작하고 있는 것은 차차 차차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없어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면에 대해서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없어지고 또 차차 어둠발이 들어서 어둠발이 들어지고 차차 밤이 깊어지고  그렇게 돼 가는 것을 자기가 깨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요 면은 이제  지금 시작한 이 낮이기 때문에 이 면에 대해서는 힘 안 써도 저절로 되어진다.

신앙 생찰이 그 면은 저절로 되어집니다. 아주 쉽게 되어집니다. 이라다가 차차  그 면에 신앙생활을 해서 지켜 나갈라고 하면은 차차 차차 어렵습니다.

어려워서, 그러면 아, 이제 나는 요 면이 이제는 요 면은 지금 이제 밤이 되어  가는구나 그래 가지고 자기의 직장이든지 자기의 출세든지 자기의 사업이든지  가정이든지 또 자기가 교회에서 생활하는 교회라는 그 교회의 그 분위기라든지  이런 면에 있어서 자기는 요 면은 낮이요 요 면은 지금 오후쯤이요 요 면은 지금  해가 넘어갈 쯤이요 요 면은 어둠발이 드는 쯤이요 요 면은 지금 차차 이제  어두움이 깊어가는 밤중이 되어 가는-그 점이라, 그러면 요 면은 내가 지금  앞섰고 요 면은 뒤떨어져 가지고 있다 자기 생활을 자기가 측량 해 가지고  그것을 짐작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여러 줄기가 있다 말이요. 마치 뿌리도 나무뿌리도 똑  뿌리 한 개만 있는 게 아니고 이 줄기가 나무뿌리 위에 그 가지가 여러 가지로  이렇게 벋어 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뿌리도 그렇습니다. 뿌리도 그 만침  종류가 가지가 많아서 이렇게 벋어 나가고 있는데 이 면 가지는 지금 새로  생겼고 여기는 또 요게 대한 가지는 이제 움이 텄다, 움이 텄는데 움이 그것이  자라는 동시에 그게 속한 관련된 그 뿌리도 조금씩 자라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면은 내가 어리고 이 면은 장성하다, 어리고 장성하다 그것이 두루 뭉실로  자꾸 하나로 이렇게 사람들이 구별하지 안하고 자꾸 사는 거기에 서 사람들이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자기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 건가 그것도 모르고  이래 산다 그 말이요. 그것을 그 까닭을 이래 구별해 가지고 찾는 사람은 아, 내  신앙생활 이제까지 수십 년 신앙생활 했지마는서도 요 면에 신앙생활은 내가  과거에 없었는데 요 면 신앙생활이 지금 시발한다, '지금 시발하고 있다,  시발하고 있으니까 요 면 신앙생활을 아주 용이하고 쉽다, 또 요 면에  신앙생활은 내가 한 지가 오래 됐는데 요 신앙생활을 해 나가니까 자꾸 쉬운  것이 아니요. 해 나가니까 차차 어려워진다, 요 면은 신앙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러면 자기가 오래부터 지켜 나오는 그 면은 그 신앙생활에 양심의 가책없이  지켜 나간다고 하면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어려워질 것.

 어떤 사람은 보면 그 사람이 자꾸 새로워지지 안하고 새움이 트지 안 하는 사람  있어요. 새움이 트지 안하는 사람 있고 새뿌리가 생겨지지 안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나 둘이나 이것을 가지고서 그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만 가지고 자꾸 나가고 이러니까 이게 제일이다 그게 뭐이냐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이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이것만 제일이라 이러니까 이 외에 딴 거는 무시한다 말이요. 딴 거는  무시하고 그것만 자꾸 주장하고 이래 나가기 때문에 성경을 자꾸 그 면으로만  봅니다. 성경을 봐도 다 같은 성경을 한자리 앉아서 본다 할지라도 그 성경에  대해서 그 사람의 보는 욕망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또 자기가 원하는게 다르고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사람은 이 면을 보고 이 사람은 이 면을  보고 이러니까 한 성구를 보면서도 그 보는 데에 관찰은 사람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이래 가지고서 어떤 사람은 참 그 신앙생활에 백분지 일도 안 되는 그 하나만  자기가 가지고서 신앙생활에 전부인 줄 알고 그 신앙생활이 고르지 못하고 고거  하나만 가지고 이래 하면서, 그래 그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번번 교만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머리와 몸과의 관계 이 관계가 제일 그 뜻이  깊고 관계가 깊고 강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도 되시고, 또 왕도 되시고, 또  우리의 대장도 되시고, 또 우리의 남편도 되시고, 그것보다도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이 되고, 또 주는 우리 안에 계시는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의 성전이 되고 이런 모든 관계가 맺어지는 이것이 그저 이 세상 것은  실상이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하나의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비유로 이렇게  하는게 아니고 주님과 우리와 사이가 실상이요 이 모든 세상, 이 되어 있는  자연의 제도들과 조직들과 그 존재들은 하나의 형식 계시입니다. 주님과 우리  성도들과 사이를 알려 주기 위해서 그것을 하나의 증거하기 위해서 증거물로  만든 그 증거물이요 하나의 그 계시 이용물입니다. 계시 이용물로 쓸라고 한  것입니다. 실상은 주님과 우리 사이가 실상입니다.

 그런고로 오전 오후 설교를 재독하는 이 재독을 듣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금요일날 밤에는 그 재독을 참 듣는 사람은 들을 것이고 여기에 교역자들도 와  가지고서 재독 안 듣는데 그 사람들이 재독 안 듣는 그 사람들이 다 껍데기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뭐라고 해도 껍데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녹음과 꼭 같은 그 설교의 기록 된 것은 다 가지고  갑니다. 그걸 믿고 있습니다. 그걸 믿고 있는데 그거와 이 듣는 데에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이 그 안에 있다는 그것을 자기네들이 한 번도 구경도  못하고 잡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설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자기의 유익되는 그 말하자면  나무로 비유하면은 꽃과 같은 꽃, 꽃과 같은 것도 있고 또 잎사귀와 같은 그런  것도 있고 또 열매와 같은 그런 것도 있고 또 가지와 같은 그런 것도 있고  둥치와 같은 그런 것도 있는데 제일 요긴한 것은 사람들이 무시하고서 별로이  중요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아 저거는 줄기에 속한 것이다  꽃에 속한 것이다 열매에 속한 것이다 잎사귀에 속한 것이다 저거는 지금 둥치에  속한 것이다 뿌리에 속한 것이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구별할 그 제 것만 이래  생각하고 있으니까 전부 신앙은 제가 잘하는 신앙입니다.

 이러니까, 다른 사람의 어떤 신앙이나 모든 걸 비판할 때에도 자기에게 하나  가졌으면 하나 요것만 가지고서 모든 걸 다 비판합니다. 사람의 신앙을 말할  때에는 '요거 하나 그 사람이 있나 없나 그 사람에게 없다 요 면이 보자 요 면을  맞춰 보자 그 사람이 기냐 내가 높으냐 그 사람이 크냐 내가 크냐 아, 내가  크다' 이래 가지고서 스스로 위안제를 마시는 소위 그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와  같은 그런 격으로서 자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모든 면에 구비하고 원만해야 됩니다. 구비해야 됩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이제 시작하는 지금 그 면에 지금 눈이 떴습니다. 그면에  이제까지 몰랐는데 그 면에 겨우 이제 눈 뜨고 이제 눈이 뜨여지고 그 면에  대해서 '아, 이것도 있구나' 이래 생각을 가지고서 그 면에 대한 그 신앙생활을  힘쓰는 그것이 겨우 처음으로 생겨지는 그런 것들도 많이 있다 말이요. 그게  자꾸 자꾸 갈수록이 자꾸 생겨지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선지 사도들을  통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한 그 성경을 우리가 읽을 때에 물론 그 사도들  기자도 기록했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마는서도 그분들의 느끼고 보고 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걸 봐도 그렇다 그 말이요. 이 세상에서도 다 같은 그 책을  만들어 놓은 그 저서한 그 책을 읽는 데도 그 책을 읽고서 깨닫는 것은 그  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깨달아집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저서한 그것을 알라고  하면은 저서한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안하면 그것을 모릅니다. 그 사람과  같은 그 면도 그만침 알아야 그걸 깨닫게 되지 그걸 모르면은 그 암만 읽어도  수박 겉핥기지 그 속을 모르게 된다 그거요. 그런고로, 신앙이 구비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 특별 계시, 자연 계시 그 두 가지 계시가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이 섭리. 또 인간들의 마음의 그 모든 조직, 구조 이런  것들을 합해서 그것을 자연 계시라, 자연 계시라 함은 이 자연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과 당신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 도리가 뭐이라는 것을 그런 걸 통해서 알려 주는 그것을  가리켜서 자연 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특별 계시는 성경 말씀이 알려주는  것, 그 안에 있는 내재적 성신의 감화감동 영감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 그걸  가르쳐서 특별 계시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자꾸 새로운  깨달음, 이 면은 생각도 못한 면이 깨달아지고 해서 자기 신앙이 자라가는 그  속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 성경에 대해서 자꾸 그 깨달아지는 그  깨달음 그것도 더 깨달아지지마는 그거는 이미 생겨진 뿌리가 더 굵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는 생각도 못한 새것이 자꾸 깨달아진다 말이요 자꾸 새것이  생각이 나고 새것이 깨달아집니다. 그건 새뿌리가 나는 것이고 새뿌리가 나면  반드시 새움이 틉니다. 이래서'성경을 보는 데에서도 자기가 이제까지는 그 면은  생각지 안했는데 그 면이 깨달아지고 저 면이 깨달아지고 새로운 면이 자기에게  깨달아지고 그러니까 자연히 새로운 면이 깨달아졌으니까 그 면에 대해서 자기도  힘을 쓰고 또 새로운 생활이 줄발됩니다. 그 면에는 관심이 없고 없었는데 그  새로운 생활이 출발되고 자꾸 이래 가지고서 뿌리가 넓어지고 커지고 이렇게  가지가 많아지고 이렇게 되고 그러니까 자연 계시에서도 뭐 자기가 볼 때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뭐 물론 소리가 많이 들리고 보어는 형체도 많고 소리도 많고 또  모든 닥치는 형편도 많고 많지 않습니까? 사람의 구조가 많기 때문에 사람이  조석변으로 자꾸 이래 변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 이루는 데에 크게 세밀하고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접하는 것, 이 모든 자연 계시, 하나님의  창조 이 자기가 서적에서 창조를 새로 받고 또 귀로서 새로 들었고 눈으로 새로  받고 자기가 또 이 체험으로써 또 새로 받고 하는 그런 모든 자연을 통해서 알려  주는 그런 것도 자기가 알아야 된다. 여기에서 주는 걸 내가 받아야 되겠다 이런  그 관심을 가지고 거기다가 자기가 차차 주시 하고 거기에 대해서 벌써 그 눈을  기울이게 되면 자꾸 보여집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때에는 전연히 몰랐지마는서도 그 면에  대해서 자꾸 생각 그러니까 자꾸 생각이 나지고 봐지니까 자꾸 봐집니다.

그러니까 이 자연 계시로써도 자기가 자기 구원에 대한 것을 주님이 주시기  위해서 한 것인 것을 알기 때문에 무슨 소리도 그 소리를 뜻없이 듣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뜻없이 보지 안하고 또 자기의 접하는 것을 뜻없이 접하지  안하고 자기가 무슨 이거 글로 가지고서 이런 글에 가서 지나가는 것 무슨 종이  쪼가리 한 마디 뭐 있어도 그런 걸 볼 때에 그것을 뜻없이 보지 안하고 그 본  것이 과거에 봤던 것이며 그 면에 대해서 벌써 자기는 계시를 받고 있는  것이라면은 그런 것을 그 면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하지마는서도 이제까지  계시를 받지 못하고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지 않은 것이 새것이 나왔으면  이것은 새것이라 거기에 대해서 또 자기는 새로 생각하는 데에서 그 면에 대해서  벌써 인격이 거기에 생겨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격은 한 사람의 인격이 천인 만인의 인격보다도 더 넓고 크고  구비하고 이렇게 많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단순히 한 면만 그리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창조 그 전부는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고 그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서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창조된 모든 존재에서  우리 구원을 다 배워야 되겠고 또 하나님이 그 섭리. 이렇게 섭리 하시고 저렇게  섭리하시고 자꾸 이리 저리 자꾸 이래 섭리하시는 이 모든 것을 이거 조화해  나가고서 운영해 나가고 하는 그런 것을 섭리인데 이 섭리에서 또 자기는  발견하고 보고 듣고 새로 열어 보이는-그 계시라 하는 것은 열어 보인다  말이요-새로 보여줘서 그것을 새로 보고 새로 봤으니까 또 새로 시작을 하고, 또  인간의 마음들이 인간을 접하는 데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이 이렇게 일도 하고 저렇게 일도 하고 사람이라는 이것이 제일 복잡합니다.

만물 그거는 그렇게 복잡성이 적고 사람이라는 것은 복잡성이 더 많다 그  말이요. 인간의 마음의 구조라 하는 것은 굉장하고 그것을 볼 때에 이렇게  나쁘다 좋다 그렇게만 평하지 말고 그걸 전부 우리는 이 자연 계시로 받아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지혜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그만 그걸 잊어버리면 오해하기 쉽다 말이요. 이런 이런 사람 사람에게  이런 일도 있다 할게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내 구원도  보여 주고 나도 보여 주고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 알려도 주고 있고 내가  소망하지 못하는 것 소망도 하고 있고 내가 치료하지 못할 것을 치료받을 치료로  진찰로 보여 주는 것도 있고 그 모든 것에 이 자연 계시나 특별 계시는 무한하신  분이 모아 놓은 책이요 무한하신 분이 만들어 놓은 이 자연 계시기 때문에  이것을 그렇게 단순하지 안하니까 우리는 죽는 날까지 자꾸 새로 구경하고 새로  보아도 배울 것이 많고 새로 깨달아서 거기에 대해서 내 구원을 받을 것이  그렇게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도. 이제는 다 됐다 하고서, 그렇게 할  데가 없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차차 자꾸 사람이 이 신앙 생할이라는 것은 해 나갈수록이 자꾸  모르는게 많습니다. 신앙생활해 나갈수록이 모르는게 많고 신앙생활 해  나갈수록이 시작도 안한게 많고 이러니까-시작도 안한 것-바울이 탄식하는 것은  내 마음의 자책할 것을 자책할 것이 없다 자책할 것이 없으나 이게 탈이라.

자책할 것이 없는데 지금 없어 그런게 아니라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에게 갈  터인데 지금 그분의 아는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안다는 것은 극히 그  희소하고 몇 가지 밖에 안 되고 내가 모르고 있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 한이  없다 하는 그것을 느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구원은 참 진실성을 가지고 자기가 진실성-진실성은 자기가 믿고  행하는 데에서 자기의 거짓부리 자기가 거짓되고 자기가 너무 허무하다는 것을  자꾸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이 자꾸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그 진실은 자기에게 그  거짓된 것, 허무한 것, 그 허무한 그것이 발견되어서 그 허무가 자꾸 제거돼  버리면 차차 진실이 나옵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는데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을라고서 자꾸 쓸면서 애를 쓰니까 그걸 찾았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이 모두 다 이 타락한 원죄와 본죄에 덮어 가리워  가지고서 이 보이지 안하니까 자꾸 그런 것을 쓸면은 이제 반짝 반짝한 이  드라크마가 나온다 이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 진실이라는 것은 거짓을 자꾸 그라면은 그 차차 차차 진실이  자기가 되어집니다. 또 진실이 되어지면은 제가 우쭐하고 자랑했던 그것이  추접하고 밉습니다. 미워요. 그러니까, 그 자긍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 앞에 말할  때에 내가 자긍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 자긍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 자긍이 어떻게 추접한지. 자긍이 어떻게 추접하고 참 어떻게 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말이지 예를 들면 그 아주 옆에 보는 사람도 낮이 간지러워서 볼 수 없는  그 수치스러운 그것을 저는 자랑삼아 자꾸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자랑한다는 그것이 어떻게 추접하고 더럽고 어리석은지 그러기 때문에  그게 밉고 추접해서 그런 말도 하기가 싫고 자꾸 이제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뭐이냐? 자기가 진리를 깨닫는 데에서도 되어지고 하나 하나 실행하는 가운데서  거짓부리를 자기가 발견하고 거짓부리를 발견해서 그것을 제거하고 자꾸 진실이  되어지다 보니까 무엇을 자기에게는 참 괴수 죄인이라 바울이 말한대로 그거니  거기에 발표하면 괴수 죄인, 발표 하려면 자기에게 약한 점 약점, 자기에게  외식점, 자기에게 그 불완전점 그거나 말할 것이지 딴 거는 말할 것이 없다 그  말이지.

 그런고로, 우리는 이 자연 계시에서 자꾸 받아야 되겠고 특별계시에서 자기는  자꾸 깨달아야 되겠고 시작해야 되겠고 수정해야 되겠고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열 처녀 비유에 기름 준비한 사람은 미리 준비했다. 그러기에  평상시에는 평상시 그 평소는 아무 그 어려운 그런 무슨 역경이나 그런 것이  아닌 평범한 그런 때는 뭐하는 때냐 그 광범한 때는 무엇을 하는 때라고  했습니까? 녜, 준비하는 때인데 그 준비하는 때인데 또 무슨 때라고 말했습니까?  준비하는 때인데 또 다른 말로는 뭐하는 때라 했지요? 뭐하는 때요? 준비하는 때  또? 여기 누가 말하는데 웅? 연습하는 때 녜 그 준비하는 때요 연습하는  때입니다. 연습하는 때요 또 무슨 때입니까 오늘 아침 말한 대로는, 뭐입니까?  새뿌리 내리는 때. 새움이 트는 때 새것이 발견되는 때, 새것이 발견되는 때요  또 준비하는 때요 연습하는 때라 다 같은 뜻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이 평소에도  그 뭣하는 때냐? 평소가 밤중이라는 그 밤중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준비하는  때라 그 말입니다. 평소에 밤중을 준비하는 때라.

 그러기 때문에, 내가 남권찰들과 반사들에게 자꾸 그 지역 예배 가 가지고  설교를 많이 해라 설교를 많이 하라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무엇 때문에  하느냐? 발견이 되도록 발견하는 일을 자꾸 힘을 써라 하는 그 말과같은  말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발견하는 그런 가운데에서 자꾸 발견이 됩니다.

 그러기에, 소설가가 소설가가 되면 그 소설가는 항상 소설에다가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데든지 이래 접하면은 다 뭐 있다 그렇게 무심하고 그것을 받아  그걸 이렇게 자기가 한 번 보고 느끼는 그것만이 아니요, 그걸 볼 때에는 아,  저게도 무슨 소설에 모두 기록할게 없는가 저게도 소설에 기록할게 없는가  이러니까 한 시간에 다 같은 그 환경을 접했지마는서도 그 사람은 거기에 글에다  써 가지고서 다른 사람에게 참 놀랠 만한 그런 사실을 발견해 가지고 기록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 그런 것 없이 무심하게 가는 사람 그렇게 같이 이래 동행을  하면서 무슨 관광을 간다 할지라도 관광하는 그 사람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거기에 서 광장한 새로운 계시를 받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새로 보여 주는  새로운 계시를 받은 사람 있고, 또 이 세상 그거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 서 이  세상을 바로 그대로 나타낼 그 다 같은 한 자리에서 이래 쭉 길을 걸어갔는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그 실상, 볼 수 있는 그것이면 다른 사람 무심하기  때문에 보지 못했는데 그걸 보고서 요런 것 저런 것 다 그라면 기록을 해 가지고  내 놓으면 다른 사람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그 우리가 아무데 같이 걸어갈 때에  이것을 봤다 있었다 어데 그런게 있었노? 과연 그 소리를 듣고 보니까 놀랄 만한  그 못 본 건데 자세히 읽어 보고 보니까 과연 그때 그게 있었다, 그 다. 같은  것에서도 한 자리 앉아서라도 모든 보는 것과 깨닫는 것 시각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라고 할 때에 그 증거할라고 하는  사람은 증거해야 되니까 이미 아는 것이 더 심각하게 느껴지고 또 거기에 대해서  더 구비한 새로운 자꾸 발견이 된다 그 말이요. 새로운, 새로운 발견이 되니까  평상 말해도 평상 말해도 항상 듣는 사람은 새것이니까 따라 오지를 못합니다.

항상 가르쳐도 항상 새것이요 새로 듣는 말이요 새 말이요 새것이니까 평생 봐도  배울게 있다 그 말이요. 가르칠 것이 있고, 그것이 자꾸 새움이 많이 돋으면 그  사람의 신앙이 자라가는 증거요 그사람이 깨어 있는 증거요 그것이 없으면  자라지 안하고 깨어 있지 않는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평소는 준비하는 때라 연습하는 때라 또 새로운 것을 지금  받는 때라. 그래 가지고서 우리가 현실은 뭐이냐 셋으로 말했지요? 셋으로  말했는데 하나는 뭐하는 때라고요? 죽은 것을 살리는 때, 또 하나는 있는 것을  기르는 때, 또 하나는 없는 걸 새로 받아 가지는 때 그거 다 같은 말입니다.

같은 이치의 말이라 말이요. 같은 이치의 말. 이러니까, 우리는 평소는 이  준비하는 때라.

 이러기 때문에, 평소는 준비하는 때이니까 그 준비할 것을 이 자연 계시로 보여  주기도 하고 성경을 내가 볼 때에 성경으로 보여 주기도 하고 이러니까 우리는  자꾸 받아 들여서 자꾸 깨달아야 회고 자꾸 받아야 되겠다 그말이요. 받아야  되고 또 이것을 자꾸 연습하는 때라 말이요, 연습해서 자꾸 연습해 놓으니까  연습해 보고 능숙하니까 실지로 할라 할 그때는 뭐 무난히 할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평소는 연습하는 때라. 또 새로 받는 때라. 자라는 때라 이렇게  나가니까 나중에 그 다음은. 이제 연단하는 때라 이래서 그 평소는 평소로서  요긴하니까 잘 이용해야 되고 아주 역경에 절정이라 하는 절정은 절정으로서 잘  이용해야 됩니다.

 절정에는 뭐 하는 때냐 하면은 절정은 신랑 차지하는 때입니다. 신랑을  차지하는 때라 말이요. 신랑을 맞이하는 때가, 더 사투리 말은 좀  그라지마는서도, 신랑을 차지하는 때 제 신랑으로 이제 차지하는 때라 말이요.

신랑을 차지하는 때, 한 번 따라해, 신랑을 차지하는 때! 신랑을 차지하는 때!  신랑을 뺏기는 때! 녜, 신랑을 차지한다 뺏긴다는 것은-그 신랑이 누구냐 하면은  전지자요 전능자요 완전자시요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시요 대주재시요 주권자시요  우리의 구속주신데 그분은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되신 예수님의 인성은 형체가  있지마는서도 신성은 형체가 없었습니다. 이런데 그 무형의 존재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그 완전자로 역사하니까, 아무 형체는 없는 것이 완전자로 역사  하니까-그것이 자기가 자기라 말이요-자기가 그 인정되어지고 거리끼지 안하고  필요가 있고 요긴만 합니다. 이러니까, 그 다니엘은 사자 구덩이라는 그  절정에서 신랑 차지했습니다. 그때 신랑을 차지했어. 이전에 신랑과 또 다른  신랑이라. 그 신랑은 그 신랑인데 더 관계가 달라졌다 그 말이요. 신랑을 차지한  때요, 다른 사람은 차지하지 못한 때라 그거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렇습니다. 왜정 말년 그때가 그 일본에서는 신랑을 차지한 그 신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하나도 없었어. 없었지마는서도 한국에서는 신랑을  차지한 사람들이 신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선천 고을이라하는 그 고을에, -오래 되어서 내가 지금 그 이름을 잊어  버렸는데 그 목사님 그 목사님 다 형제분이 다 목사입니다. ○○○ ○○○목사님  ○○○목사님이지요? 우리 서울에 개척 교회하는데 그 누가 기억하고 있어요? 다  잊어 버렸나? ○○○ 목사님 그 목사님, ○○○ 씨 어디 있어요? ○○○목사님  몰라요? 허허 참. ○○○ 목사님이고 ○○○ 목사님 또 동생도 목사님입니다. 그  분들이 다 선천 고을에 있는 목사님입니다. 내가 ○○○ 목사님은 우리가 서울에  개척 교회하는데 그 ○○교회개척 교회할 때에 그분이 거기에 교역자로 우리가  파송을 시켜서 그리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중앙 교회를 지금 누가 차지하고  있느냐 하면은 ○○에서 차지하고 있는데 ○○에서 뺏들어 가지고 차지하고  있습니다. 차지하고 있는데 ○○교회가 그때 서울에서 ○○교회에서는 처음  교회요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시발이였습니다. 그 시발, 우리가 개척  교회해 가지고서 ○○에서 지금 하고 있는데 그 뒤에 ○○○목사님이 거기  시무하고 아마 그 ○○교회가 지금 얼마나 어느 정도 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제일 컸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그 선천 고을에 네 집 안 믿는다 네 집안 믿는게 아니라 다  믿는다. 그 날은 그 선천고을에 시장이 없어요. 선천 군내는 시장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시장은 해야 그 시장 주일날 시장되면 그 아무도 안 간데요 주일날  표준해 가지고 하기 때문에 주일 아닌 날 매매가 되지 주일날은 다 문닫고  매매를 안 해 그 면은 또 철저하게 지켜 나가요. 다 그렇게 믿어 가지고 그 면은  믿으니까 물질면에 이 자연면에 축복을 많이 받아 가지고 그러니까 그만 그  사람들 표어가 그랬어. 예수 믿은 지 십 년 만에 부자 안 되면 그거는 예수 잘못  믿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고을 이 경제면이나 모든 면이 발달돼 가지고  굉장했는데 왜정 말년에 신사 참 배할 때에는 신사 참배 안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다 신사 참배 했어. 그러니까 신랑은 다 뺏겼다 그 말이요 신랑은 다  빼앗겼어. 이북에 사람들이 많고 이북에 신앙가들이 많고 교회가 많았지마는서도  신랑을 차지한 사람들은 이남에 많았다 신랑을 차지한 사람들은 이남에  많았습니다. 이 남도에 많았어.

 그러니까 그때에 자기를 다 같이 뭐 너도 너도 신부. 나도 진부 이랬지  마는서도 이 역경인 밤중을 통해서 신랑을 뺏기는 사람도 있고 신랑을 차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슬기 없는 다섯 처녀는 그 밤중 되기 전에는 다 동등으로  이렇게 영광도 가치도 이래 가지고 있었지먀는서도 밤중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는  그 미련한 다섯 처녀는 밤중 오기 전보다 낫습니까 못합니까? 낫소 못하요? 응?  자 여반들이 잘 알 건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 밤중을 만나기 전보다도 그 밤중을  만나고 난 다음에 미련한 처녀들은 좀 낫아졌소 못해졌소. 못해졌지 못해졌어.

그러나 그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참 혼인 잔치에 들어 갔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 역경에는 주님을 차지한다. 주님을 내주로 모실수 있는 그 역사가 역경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역경인 밤중이 어렵기는 어려운데 그 밤중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좋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신 면이라는 것은 이 사람들은 신랑 하면은 육체가  있는 육체의 부부라는 그것만 자꾸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부부라는 그것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신랑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 주저하고 부끄럽게 하고  육체의 부부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다 그 말이요, 없고 단지 뭐이냐 하면은 성경에 말한 대로 그 책임  책임성에 있어서 부부의 책임을 가집니다. 그 신부가 그 남편에게 대한 책임진  책임이 있고, 남편이 신랑에 대한 책임진 책임이 있고 그 에베소 5장에 있는 그  말씀을 결혼식할 때에 본문 읽어도 거기에 대한 그 설교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책임성, 또 소유성 소유면에 있어서 신랑의 소유가 전부 신부의 소유가 된다  말이요. 신랑의 소유가 전부 신부의 소유가 다 되요. 그러면 하나님의 소유가  우리 소유가 다 된다 그 말이요. 또 하나님은 전부 나를 책임 지시고 나는  하나님께 책임, 내가 하나님께 첵임져야 정절 부인이라. 그러면 하나님은 또  내게 대해서 다 책임을, 그분이 내게 책임지니까 내가 몇 푼어치 됩니까? 아주  이것 아무 것도 아닌 한 닢푼치도 안 되는 것 가지고 안 되는 것이 뭐 무한한  것과 서로 이제 비교가 되어 가지고서 결혼을 해서 결합이 됐으니까 우리가  손해요 그분이 손해요? 그분에게. 그분은 우리에게 다 주시니까 만족이요,  창조주요 완전자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다 받으니까 만족이라.

 그러면 책임성에 대해서. 소유성에 대해서, 권위성에 대해서. 모든 희로  애락성에 대해서 그분이 기뻐하는 기쁨에 그분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그분의  성공이 내 성공이요 그분의 부요가 내 부요요 그분의 근심이 내 근심이라.

그러니까 '주님의 근심 나도하게 해 주옵소서' 하는 그것이 주님 근심 할 때에  나도 근심하고 주님 기쁠 때 같이 기뻐해서 이런 인격으로 인격면으로  권위면으로 또 지능면으로 또 소유면으로 영광면으로 가치면으로 존귀면으로 이  면으로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된다는 이것을 가리켜서 부부니까 이 부부라는 말,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시요 우리는 그의 신부라는 말이 이 말이 다른 사람들은  자꾸 모르기 때문에 이해 못하니까 이해를 못하니까 그 말을 하면 자꾸 오해할  것이기 때문에 자꾸 말 못하지마는서도 자기 혼자로서는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를 안 할 수가 없다 말이요. 나는 주님 앞에 너무 부족한 신부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대해서 참 믿을 만하고, 아가서를 읽을 때에 눈물이 나, 하나님은  참 흠모할 만하고 참 믿을 만하고 참 맡길 만하고 의지할 만하고 참 서로 교제를  가질 만하고 지도를 받을 만하고 또 가르침을 받을 만하고 모든 것을 바라볼  만하고 뭐 그 외에 어제 오후 설교에 그 장로님이 오후 설교인가 그 성경 낭독할  때에 그 말씀을 낭독하던데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주님 외에는 사모할 이가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어.

 이러니까, 이 주님을 우리가 차지는 언제나 신랑 차지는 언제 했습니까? 낮에  했습니까 초저녁에 했습니까 밤중에 했습니까? 밤중에, 요걸 기억 해요. 요런  것은 간단하게 요 하나만 단단히 기억해 가지고 있어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합니다. 하는 그것만 꼭 잊어버리지 안하고 잡고 있어도 그  사람의 신앙이 서지더라 그 말이요. 이러니까 주님은 나의 신랑이시요 주님은  우리 가정의 신랑이시요 우리 가족의 신랑이시요 주님은 우리 교회 신랑이시요,  이 모든 모든 세계 역사에 있는 교회의 신랑이시라. 이러니까, 요것을 자꾸 자꾸  깨달아 가지고서 깊이 깊이 가져지는데 그걸 그 하늘에서는 이 육신적인  부부라는 것은 없다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그거는 천사들과 같이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이 다 있을 수가 없는 것이 그런 것 다 불완전한 것이요 그것이  또 다 쇠해지고 있다 해도 다 뭐 결혼한지 백 년되고 난 다음에는 그 결혼의 첫  사랑이라 하는 그 사랑이 있겠소 없겠소? 한 번 대답해봐? 결혼한 지 백 년 이면  웅? 응? 결혼의 첫 사랑이 있어? 결혼의 첫 사랑이 아니 육신의 결혼의 첫 사랑  말이요. 백 년 되면 벌써 썩어서, 흙이 다 돼 버렸는데 뭐 있을게 있어야지.

하나님께서 필요 있는 것은 거룩하게 신령하게 변화를 시키지마는서도 필요없는  건 변화 안 시키니까 제대로 늙어서 빠져서 다 썩어 버려서 없어져 버리고 만다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영원한 것만 남아 하나님이 변화 시켜서 영원히 가도  없어지지 안할 것, 필요한 건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것으로 이렇게  변화시키지마는서도 필요없는 것은 하나님이 변화 안 시키니까 저절로 늙어  빠져서 죽어서 썩어서 없어져 버리고 만다 말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없어지고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인격 부부, 소유 부부, 기능 부부, 소망 부부, 또  희로애락의 부부, 동거 동행의 부부 이것은 영원히 자꾸 강해지고 영원히  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에게 부부적인 면의 은혜도 있고, 또  목자와 양의 있는 면의 은혜도 있고, 대장과 부부의 면에 은혜도 있고, 머리와  몸의 면의 그 은혜도 있고, 또 왕과 백성의 면의 그 은혜도 있고 여러면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은 구비해야 되고 원만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신랑을 언제 차지하는가 신랑을  언제 차지하는가 다시 말하면 전능자를 내가 언제 차지하는가 전지자를 내가  언제 차지하는가 완전자를 내가 언제 차지하는가 주재자를 언제 차지하는가  주권자를 언제 차지하는가? 이제 그것은 요 밤중에 차지 하고 밤중에 다 뺏겨  버리고 맙니다. 밤중에 빼앗기고 밤중에 차지한다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서  그렇게 하려면 평소에 그 연습을 해야 되고 또 연단을 받아야 되고 평소에 자꾸  새로 발견해 가지고 새로 얻어야 된다 그거요.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율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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