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사적

 

1981. 5. 20. 수요일 새벽

 

본문 : 창세기 5: 21 - 24, 6: 9 - 12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장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기록해 주셨고 또 6장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5장과 6장을 지난번에 배웠습니다.

에녹이 산채로 승천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한 그것만 죽지 아니하고 영생하는  것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 6장에 온 천하의 사람들이 다 멸망을 받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멸망받지 아니하고 미래에 대한 경고하심을 받아 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행해서  준비를 하였으므로 홍수의 멸망을 피했습니다. 이것은 믿는 성도들이 땅위에 살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기서만 자기의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게  되고 또 여기에 대한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되고 또 자기의 행복된 길을 알게  되고 행복된 은혜를 입을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문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루어지고 일시 이 세상 문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대에서만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이 두군데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기에서만 세상에 있는 나를 찾아오는 모든  화를 내가 피할 수 있고 하나님의 주시는 온갖 그 축복의 평강을 얻을 수 있고  또 이뿐만 아니라 영원무궁한 세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만 그 길도 알고  또 은혜도 입고 해서 이루어지지 이 동행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금생과 내세에 우리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혼자 움직이는 것은 임시 세상에서 어떻게 크고  영화로운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 한 일은 금생에도 자기에게 해가 되고 유익이  없고 영원한 세계도 자기에게 해만 되고 유익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모든 해를 방어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우리에게 오고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첫째로 우리가 전력을  전심 전력을 기울일만한 중요한 일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겠고 또 그 다음에는  당장에는 안되는 이 어려운 일이나 이렇게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자기가  깨달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어려워도 배우게 될 것이고 또 차차  익숙해지게 될 것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선천적 그 지능은 달라서 어떤 사람은 이 길로 준비하고 저  길로 준비하고 자기 타고난 그 요소에 맞은 준비를 하기 때문에 이 준비 저  준비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데에는 이 준비 저 준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 이 한길뿐입니다. 이 길이 아닌 길을 걸은 사람은 모조리 창세기  5장에 보면 전부다 죽고 망하고 끝났습니다. 또 6장에 보면 이 길로 안 걸은  사람들이 그때도 제 각각 자기의 소질대로 필요한 길들을 다 걸어서 유명  유명했지만 마지막 이 길을 걷지 아니하고 걸은 자로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에 다  홍수 속에 매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렵지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렵지만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다른 길이 없고 영원도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이 길  하나밖에 없는 이 유일한 길인 것과 이 길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자기에게 모든 역량이 있는 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주력을 하게 될 것인 것입니다.

마치 죽음의 함정에 빠진 사람이 힘없으니까 날러 올라오지는 못할지라도 자기  힘있는 대로는 거거서 벗어날라고 버득 거리다가 끝을 마치지 않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사실을 알면 자기 힘 있는대로는 이 일을  배울 것이고 또 이것을 연습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이 동행이 자라가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이렇게 귀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사망의 원인되는 모든 죄악이 서서히 제거됩니다.

인간이 아무 결심을 하고 아무리 의지가 굳다 할지라도 자기는 이 면에는 의지가  굳었지만 다른 면에 눈이 어두워서 그 면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이분과 동행하는 것을 힘쓰는 것은 완전을  향하는 것이요 온전을 향하는 것이요. 또 완전과 온전의 그분의 은혜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원만하게 동글동글하게 그 사람이 어리든지 장성하든지 자라가는  그 길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참 노벨상을 받고 인간을 널리 사랑하는 박애자라 이렇게 칭함을  받을찌라도 받았을찌라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한 사람으로 그렇게 된 것은  인간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나 자기의 박애의 그렇게 칭송을 받은 그것이 자기가  범죄한 그 인간의 해를 끼친 그 값을 다 물지 못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좋은 것도 하나님과 동향했습니다. 모든 몹쓸 것이 제거되는  것도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은 어떤 것인가? 어려운 것 아닙니다. 무식해도 못나도  병신이라도 병중에서라도 다 할 수 있는 동행입니다. 이분은 능하신 분인데  이분이 날라가는데 우리가 따라서 날라가는 것 같으면 하지만 이분과 동행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처지에서라도 동행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은 첫째가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제  마음에 좋다 싶어서 그 일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고 또 하나님의  뜻이지만 제가 너무 그대로 살기에 싫으니까 살아야 될 줄 알면서도 어정어정  하는 것은 하나님 뒤에 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인줄 알지마는 다른 어떤 그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잠시 달려가고 하나님의 뜻은 그대로  둬두는 것은 하나님을 두고 딴데로 도망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행하는 하나님을 모시도 하나님이 뜻대로 하는 것이 이것이  동행인데 하나님의 뜻을 받지 아니하고 제 주관대로 어떤 의로운 일을 한다고  날뛰는 것은 하나님보다 앞는 것이고 뜻인줄 알면서도 자기가 그것을 즉시  행하지 아니하고 슬슬 미뤄붙이는 것은 하나님을 앞서가게 하시고 저는  뒤떨어지는 것이고 뜻을 알고도 다른데 누가 꼬우든지 좋은 것이 있든지 급하고  바쁜것이 있다든지 뭐 어떤 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든지 간에 그리가고 하나님  뜻을 버리는 것을 동행하다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 동행하는 데에 앞서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되고 또  두고 자기가 하나님을 버리고 달아나지 아니하도록 주의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모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자가기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도 우리의 심령이 어리지 영안이  어둡지 이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보다 우리 앞에 접한 모든 것보다 더 강하게 우리와 밀접하게 접해  가지고 계시지마는 우리가 영안이 어두우니까 육안으로 보이는 것 이것만을  인정하고 또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이것을 인정하고 멀리 크게 이런 것들은  생각지를 못합니다.

그런고로 어디서든지 나는 이 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이분을 보시고  살아야 된다 하는 것을 자기가 자꾸 배우는 것입니다. 자꾸 배워서 자기 감각에  가득차고 자기 기억성에 가득히 차고 자기의 그 활동성에 가득차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안 계신다고 아무리 할라고 해도 안 계신다 인정이 되지를  않고 부인할 수가 없고 잊어버릴 수가 없고 하도록 하나님을 자기가 인식해서  자기와 함께 계시니 이분을 내가 모시고 살아야 되야 이분 또 모시고 내가 이분  슬하에서 이분 눈앞에서 이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자꾸 인식시킵니다. 그것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점점 자기에게 이 지식이 확고 부동하게 되고 강하게 되는 것은 이  지식이 자라는 것이요 또 이 행위가 점점 성장되어서 숙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는 분인데 이분이 어떤 분으로 알고 우리가 함께  계시는 분으로 이렇게 인식을 할 것이나 세 가지로만 생각하면 간단하게  좋습니다. 첫째는 이분이 제일 크신 이분이 크심에 대해서 자꾸 자기가 공부를  합니다. 이분은 크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제가 들으니까 ‘주여 주의 크심을 나에게 알려  주십니시요’하는 것을 그 사람이 약 두 시간 계속 합디다. ‘주의 크심을  나에게 아려 주옵소서!’그러고 나서 주님이 자존하시며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신다 하는 것을 그가 배워 깨닫고 또 하나도 존재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 그분이 직접 만들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어 이렇게 크신  분이십니다.

또 지금은 뭐 소련 미국 중공 이북을 두려워하지마는 그것 다 지으신 분이  이분이시요. 이분이 그 세계를 거머쥐고 두렵게 움직이는 그 사람의 생명을  이분이 딱 부르면 그시로 가버립니다. 그 시로 죽습니다. 이분이십니다. 아무리  떠들고 해도 흥수로 멸한 것처럼 당장 이 시간에 개적으로도 그 생명 부르면  그만 죽어야 됩니다.

또 계속적으로 그의 그 생명의 근원이 되 가지고 이렇게 힘을 주고 있는데 그만  지금 바들 바들 하면 그 사람의 정신이 혼혼 하면 그 사람에게 총명이 완전히  제거 되어지면 되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분이 크신 분이 신데 이분의 크심을  자꾸 공부를 합니다. 배웁니다. 이분은 지극히 크신 분이라. 아 내 눈앞에  보이지 보이지 않는 것 이 모든 이것을 다 당신 혼자 주권하시 가지고 당신이  혼자 운영하고 계십니다.

제가 어제도 시골 사람이 왔기 때문에 금년에 그 연사가 어째 됐노? 보리 시절이  어찌 됐으며, 벼농사의 그 희망이 어떤가? 들으니까 밭 보리는 가물어서  헛일했고 논 보리는 얼어 죽어서 씨가 없고 또 모자리는 추워서 비니루 하우스로  이래 해 놓으면 그게 그 안에서 또 약해서 안 되지 배끼면 또 얼어죽지 이래서  이거 참 벼 농사도 금년에 많이 걱정이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내 묻는 것은 흉년이 들면 뭐 굶어 죽을 터인데 찍해야 죽는 긴데 그것  때문에 내가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거는 섞임이 없이 당신 혼자 하는 것입니다. 섞임없이 흉년 들고 풍년  당신 혼자 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기 때문에 이거는 인간의 공력이 가감이  아니고 그분이 하기 때문에 그분이 좋아 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그게 두렵다 그  말이오.

또 들을 때에 우리가 신문보고 그거 뭐 똑똑히 모르지만은 그래 외국의 그  소식을 들어봐도 세계적으로 자꾸 이렇게 지금 모든 것이 부조리라 자연이  이러니까 하나님이 이 땅위에 벌써 끝을 자꾸 가까이 맺고 이는 기 아닌가 하는  그 두려움이 생겨진다 말이요. 무엇이든지 이분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걸 보다가  아무리 이기 좋아도 내가 무슨 이분이 어떻게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변해질런지  그러기에 하나도 볼 때에 이분만이 확고 부동하지 이분 외에 것은 확고부동한  것이 하나도 없어.

무엇이 그 사람들의 가정이 어떻다고 이렇게 해도 참 이거는 폭풍 앞에 촛불  써놓은 것보다 더 근거가 없고 힘이 없고 이분이 모든 것을 주권하시지 이분이  지극히 작은 것 개미 쉬엄 하나 움직이는 것도 이분이 다 전부 섭리하셔 가지고  우리 몸에 터러기 하나 자라고 이 세포가 움직이는 모든 가죽 껍데기가 이렇게  작용하는 이 이런 것도 다 생명 하나의 힘으로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  하나의 힘으로 그 생명이 언제 그게 바빠서 그렇게 전부 그거 어쩌든지 생명  하나 힘으로 가지고 그 모든 것이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이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이 작용되는  것입니다.

그 보면 만물이 다 그렇게 다 지어져 가지고 있다 그기요. 그런데 이분의 크심을  우리가 배워야 됩니다. 이분의 크심을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모신 분은 이렇게  크신 분이라는 것을 자기가 무식해서 그렇지 자꾸 알고 알고 배우고 또 자기  연구학고 또 성령에게 배우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분의 사랑을 우리가 배워야  됩니다.

이분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 이분이 나를 사랑하셔서 아무것도 있기 전에  나를 사랑하시기로 당신의 사랑이 발동해 가지고 사랑의 대상을 만들려고 한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없는데 당신의 사랑의 대상을  만드실려고 사랑의 대상이 될말한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이것을 작정을  하시고 일을 위해서 모든 걸 예정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설리하시고 또 친히 도성인신해 오시고 또 사활의 대속을 하시고 지금도 성령은  당신의 영이 성령입니다. 진리는 당신의 뜻이 진리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은  당신이 친히 와 가지고 속량하신 것이요.

이렇게 사랑하시 가지고 모든 지은 만물을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여기에  이용하실라고 만물을 지으셨고 이렇게 순서를 이루어난 것이 일하고 보니까 이  일해야 되겠다는 기 아니라 영원 전 당신이 영원의 것을 단시에 단시에 예정하신  이 전지하신 분이신데 우리에게 알던 모르던 이 모든 움직이는 모든 순서가 이를  위해서 당신이 예정하신 순서로 그대로 차각 차각 되어졌가니 이분의 광대하신  섭리 이분의 구속에 대해서 광대 넓기가 얼마나 넓으며 깊이가 얼마나 깊으며  높기가 얼마나 높으며 길기가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이 광대심. 이분의 두려우심 이분이 성경에 보면 사람마다 그의 일생 동안에  마음에 뜻을 감찰하시는 자니라 우리에게 말했는데 우둔한 우리에게 말할 때에  당신 안에는 어데까지의 이것이 되어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데  말씀하시기를 각자의 언행심사의 행동한 그것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그  행동록에 기록한대로 심판 받는다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벌로 알고 말하고 벌로 알고 생각하고 일시의 인간에게 인기나  끌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분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이분의 이 세밀하심이  영원한 복수가 있는데 영원히 원수같는 복수를 말했습니다. 복수의 정의를  말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제거하지 않고  공평되게 갚아 주겠다는 그 공의의 하나님의 그 공의를 말씀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아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시고 애썼지마은 봐서 쓸모가 없을 때에 노아  때에 쏵 다 쓸어서 전멸을 시키면서도 그 뭐 여덟 식구 의인 있는 것을 그까짓거  보잘 것 없다 하지만은 아 우리가 한 서너 가마니 되는 그 흙속에 쌀이  귀하지만은 쌀 한낱 들었다 하면 우리가 쌀 한낱 그 할라고 그 그 흙을  나비겠습니까.‘아이구 그까짓거 쓸어버리라’하지만은 하나님은 그 수많은  숫자에 비해서 여덟 식구는 극히 작은 수지만은 그 여덟 식구를 같이 멸하지  아니했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에 오십 있으면 마지막에 의인  열이 있으면 의인 열 그 악인들과 함께 멸하시랍니까 안 그라겠다 하신 이  하나님이 이렇게 행한대로 갚으시는 이 하나님이 노아 때 보면 애끼지 않고  멸하셨지 소돔 고모라 성도 봤지 앞으로 영원히 모든 요소를 다 불태운실  분이시지 당신이 복수하되 영원한 지옥이 있지 영원한 하늘나라 있지 이분이  아무리 두려워도 이분보다 두려운 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크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두려우신 하나님 이러다가 나중에 신앙이  장성해 가면 크신 하나님 두려우신 하나님 그 다음에 사랑의 하나님 자연히  바꾸어집니다. 이분이 이분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차차 자기가 인식해서  알게 될 때에 이분이 두려워서 거슬리는 일을 못하는 것이 제일 많습니다.

어릴 때는 화를 받을까 복을 받지 못할까 어떻까 하지만은 이분의 그 이분에게  거슬려서 모든 불의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고 또 내가 이러면 상을 받고  하늘나라의 뭐 어떻게 영광을 얻고 무슨 축복을 그게 아니라 이분의 크심을  이분의 두려우심을 이분의 사랑하심을 점점 깨달아 가면 이분이 한 분  좋아하시는 것 이분이 기뻐하시는 것 이분의 비유에 거슬리지 않는 것 그게  어떻게 더한지 우리가 이분을 모시고 이분의 뜻대로 행하는 이것이 동행인데  이것은 큰 데서부터 시작은 절대 안됩니다. 이 일을은 큰 데서부터 시작은 절대  안됩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평소에 사소한 일 보통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일하고 자고 하는  거기에서 아주 사소한 거기에서 이분을 모시고 이분의 뜻대로 해도 지장이  없는데 말이요. 이분을 모시도 지장이 없고 이분의 뜻대로 해도 지장이 없는  거기에서부터 연습하고 배워나가야 되지 이분을 모시면 당장에 모가지가  끊어진다 이분의 뜻을 행할라 하면 당장에 자기에게 절단이 난다 여기에서  부텀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되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 일 사소한 일 평소에 우리는 사소한 생각 말 이것을 마움대로  이렇게 마구 깨뜨려서 노아 때에 그 사람들과 모든 생명들이 다 패괴됐다 패괴라  말은 다 부서졌다 말이요. 또 괴자는 흙덩이가 깨져서 깨진 흙덩이 같답니다.

흙덩이 깨지듯 깨져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다시는 동행 못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연습하고 배우고 이러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성이기 때문에 속에 그게 있어서 이기 제거  되니까 싫어합니다. 이래서 이렇게 주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것이 취미보다도  피곤해집니다. 피곤해져도 차차 노력하면 거기에서 모든 안된 것이 다  제거되어지고 좋은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피곤해서 이분 동행하는 것을  저버리면 저버리고 보면 만구에 아무것도 좋은 기 없고 자기에게 불가내서 다시  이분을 모시고 동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수십 번 수백 번 중복해 가지고 이분과 동행이 아니고는 허젓해서 못살고  이분과 동행하지 않고는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두려워서 이분은 넓은 분이시기  때문에 넓은 범위에서 우리를 멸망시키니까 멸망인 줄 모르고 모든 사람이  튼튼하다 멸망하는 그 시간까지 튼튼하다 했지만은 눈에 멸망이 척 보일 때에는  벌써 소용이 없습니다.

홍수가 내리고 있는데 그때 제가 맡고서 무슨 그 대책을 해야 소용 있습니까?  이분은 지능이 크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과 유식한 사람이 둘이 대결할 때에  무식한 범위에서 이래 하기 때문에 대항하는 줄도 모르게 난중에 나중에  마지막에 꼼작도 못하게 붙들려 져버렸습니다. 인가도 그런 것입니다. 이런 긴데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그런고로 이분을 동행하지 않고는 두려워 못 견디고, 이분은 동행하지 않고는  허젓해 못견디고, 이분을 동행하지 않고는 너무 모든 것이 허무합니다. 지극히  크신 이분을 두고서 무엇을 의지하고 바라봐도 눈을 뜨고 보니까 너무 허무하다  말이요. 너무 이거는 썩은 작데기만 못하고 불탄 참 실오랭이 불탄 실오랭이  같은 그걸 의지하고 있어. 다른 게 아니라.

그러므로 이분 동행하는 것을 우리가 노력합시다. 이분과 동행하는 것을 우리가  어쩌든지 힘써 배우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천하고 이래서 아래도 주님과 동행이  될 때에 모든 좋지 못한 것이 제거 되어지고 한 것만치 동행할 때에 이것이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가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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