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실수

 

1981. 5. 29. 새벽(금)

 

본몬:창세기 9장 20절∼27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

 

천하 사람들이 멸망을 받는 가운데 겨우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 얻었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는 천하 사람들이 받는 멸망을 벗어나서 구원을 얻은  의인들입니다. 축복을 받을 만큼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자기의 둘째 아들을 저주함으로 주님 재림 때까지 그 후손들이  저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 둘째 아들 함의 자손은 흑인종이고, 장자의  자손은 황인종이고, 마지막 셋째 아들의 자손은 백인종인데 지금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저주한 것을 노아의 실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뒤에는 노아가 후회를 했을 것이고 그 일에 대해서 아주 원통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르치는 중점과 교훈은 노아의 실수에 대한 것인데 천하에서  제일 의인이라고 인정받은 노아가 이런 큰 실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들이 살펴서 그와 같은 실수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또 그런 실수의  원인을 우리도 찾아서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피에 고해서 해결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노아가 실수한 원인 중에 첫째는 무엇인가? 자기가 천하에 의인된 것은  선천으로나 자기 단독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으로 인해서 자기는 만들어졌고 그  은혜로 됐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첫째 원인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멸망 받은 것은 노아로서 잊을 만한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홍수  물이 다 빠졌을 때 시체가 가득했을 것이고, 또 그 사실을 잊을 만큼 장구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니고, 또 자기만이 흥수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잊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비록 자기는 구원 얻었으나 자기도 똑 같은 멸망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굉장한 충격이 있었을 것이고 끔찍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멸망하는 데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셔서 구원받도록 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머리가 숙여지고, 그분이 자기를 멸망 받는 데서 무엇 때문에 구원하셨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이고, ‘아, 나도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할라!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아서 저렇게 되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이 섭섭해서 멸망을  시켰으니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면 멸망한다!’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머리가 숙여지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수 후에 술에 취해서 마음대로 날뛴 것이라든지, 또 자기 아들이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저주한 것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아주  저주해서 멸망시킨 그런 큰 실수라면 실수요 죄라면 죄를 범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첫째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보고 듣고 접촉하는 멸망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꼭 같은 사람인데 다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나를 나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것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죄인을 불 때,  어리석은 자를 볼 때, 악한 자를 볼 때, 미련한 자를 볼 때 ‘나도 전적  부패했기 때문에 더러운 자요 또 계속 더러워질 자인데…’ 하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여기서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성경에도 말씀하시기를 ‘네가 누구관대 다른 사람의 몹쓸 점을  보고 논평하느냐!’ 이렇게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로 안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좋지 못한 점을 볼 때 나도 그와 꼭 같은 자요 나도 그 생애를  계속할 자인데 주님이 은혜로 나를 붙들어 일으키시기까지는 내가 몰라서 그렇지  몇 십번 거듭하시고 애타하시는 가운데서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잊어버리면 그 사람의 행동 전체는 실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아의 실수는 자기도 멸망한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도 둘째 아들 함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실수를, 이런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을 여기서 가르칩니다.

또 둘째로 가르치는 것은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났으니까 무슨 업이든지 해야  하는데 농사짓는 업을 시작했습니다.

농업 시작한 것이 잘못 아닙니다. 포도나무 심은 것도 잘못된 것 아닙니다. 또  포도주 마신 것도 나쁜 것 아닙니다. 그때는 포도주를 마시도록 물로 주어서  허락하셨는데 그만 포도주에 취해서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면 처음 말한  것처럼 자기는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이 은혜를 어떻게 입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노아 혼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앞에서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더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밝혔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어떤 것인고 하니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 손에 이끌려서 부모가 한 걸음  떼 놓으면 자기도 한 걸음 떼고, 두 걸음 떼면 두 걸음 끌려가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당신에게 피동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이 동행을 잊어버렸습니다.

노아가 동행을 잊어버린 것은 자기가 자기 된 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됐다는  것,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니면 그 은혜를 빼앗았으면 홍수 속에 매장된  사람들과 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려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농사도 좋은 것이요 포도주 먹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된 것처럼 생각하는 데서 하나님 모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업을 가지더라도 그 업에 치우치기 쉽고, 그 업이  중심이 되기 쉽고, 업에 치우쳐서 자기의 정성이나 시간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것보다도 업에 치우치기 쉽다는 말이요, 곧 우상의 제물이 되기  쉽다 말입니다.

업에 대해서 노아가 생각할 것은 멸망 받은 사람들이 영광있고 존귀하고  번쩍거리는 업을 가졌지만 홍수 속에 매장 당했고 자기는 순전히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면서 시험을 통과했던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노아가 그만 업에다  마음 다 빼앗겼고, 정성 다 빼앗겼고, 시간도 빼앗겼고, 하나님보다 업에 더  기울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큰 범죄가 나왔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멸망시키는 멸망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둘째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슨 업이든지 하나님께 기울어지는 마음보다 업에 대한 것이  앞서면 별수 없이 범죄하게 되고, 자기에게 소속한 사람들까지도 멸망 받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이 말씀은 업을 보아서 나를 알게 되는 것,  인격에 대한 상처나 생활에 대한 상처나 또 자기 후배에 대한 상처나 자손에  대한 상처를 주는 것이 자기의 업에서 나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회하는 사람에게는 목회가 업입니다. 제 경우에는 목회에 전심전력 기울인  것이 도리어 후회할 일이 생긴 적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업인 줄  알아서 관심이나 중심이나 노력을 많이 기울였던 것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토막 토막마다 사건 사건마다 큰 죄를 저질렀고 큰 실수를 했고 큰 손해를  봤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이 얼마나 좋으며 또 권찰일을 하고 목회하는 일이 얼마나  좋습니까? 인간을 구원하는 구제사업도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잘못하면 이  좋은 업에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릴 만큼 열중하다가 노아와 같은 패망의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정도 업 중에 하나인데 가정에 열중하다가 보면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에 열중하다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해와가 멸망의 길을 걸은 것도 하나님을 잊은 데서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과 나와 관계가 어떠하며,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느냐!’ 하는 생각이 해와에게 없었습니다. 하와도 아담도 앞에 닥친  배암만 생각하고 선악과만 생각했습니다. 이러니까 아담과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것이나 노아가 농업에서 범죄한 것을 보면 꼭 같은 마귀의 술책에  넘어갔습니다.

그러기에 둘째로 생각할 것은 아무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도 그 일에 열중하다가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잊어버리면 똘똘 뭉쳐서 마지막  결론은 자기 멸망과 다른 사람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노아가 포도주 안 먹었다고 못 살았겠습니까?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농업으로 멸망시키는 일만 만들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둘째로 여기서 배울  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해야지 하나님 잊어버리면 결말은  멸망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에는 목회에 열중했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불학무식이지 또 못난 사람인 나를 제일 문제 많은 부산으로  보냈습니다. 전쟁 때문에 당시로서는 부산이 제일 도시였습니다. 제일 도시에  제일 문제 많은 교회에 부임을 시켜놓으니까 어떻게 이 교회 문제를 수습하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밤낮 열중하면서 이불에 누워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목회 열중하면서 교회를 바로 세우고, 부홍을 시키고, 또 교인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전심전력 생명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기울이는 것이  선인 줄 알았고 의로 알았고 옳은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동하고 정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했지마는 너무 짐이 무겁다 보니까 그리로 치우쳐서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으로  동행해서 피동되는 것을 잊어버렸다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지 않아야 할 일도 하고, 안 낼 열심도 냈고, 또 필요없는 일도  했는데, 거창에서 신앙생활 했던 것에 비하면 부산에 와서는 죄만 지었습니다.

신앙생활에 마음에 개운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목회를 해도 뭐 마음에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가질 수 있는 개운함이 없습니다.

제가 거창에 있을 때는 한 걸음을 가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높은 재를  넘어 다니면서 목회를 할 때 내가 가면 새떼들이, 까마귀떼 까치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새떼들에게 설교를 하고 또 그들은 기뻐하면서  나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한번은 어떤 의사 한 분이 따라 왔었는데 그 재에 가니까 짐승들이 모여들고  새떼 가마귀떼가 꽉 모여드니까 ‘이게 어쩐 일이냐고?’ 하면서 놀랐습니다.

나도 기뻐하고 저들도 기뻐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마주서서 설교를 하면서  작별하고 내 갈 길로 가는데 그들이 뒤에 따라오면서 동행해주고 전송을 해주는  것을 보고 그분이 놀랬습니다.

이렇게 밤이고 낮이고 살았는데 부산에 온 뒤로는 분주한 가운데 아무리 결심을  해도 그 생활이 안됩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가르쳐야 하고, 내가 병들 것을  알고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하다가 보면, 이 사람 붙들고 이런 이야기 저  사람에게는 저런 이야기하다 보면 언제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래서 나는 부산에 온 것은 사지(死地)에 온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도 ‘이 사지에 와서 당신을 모실 시간도 없이 이  꼴입니다…’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또 그럴 때에 지금 내가 깨달은 것과 같은 깨달음을 가진 선배가 있어서 내게  충고해주었더라면 내가 그런 시험에 들지 않고 목회에만 정신없이 빠지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옳은 깨달음은 얼마나 중하며 참 자기 앞길을 바로  인도하는 선배는 하나님 다음으로 귀중한데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 밑에 후배들, 어린아이들로 말미암아 내가 깨달음을 받았지 내  위에 선배로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배울 것은 자기의 업에서 더러워진다는 것을 배웁시다.

아무리 선한 업, 옳은 업이라도 그 업에서 하나님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업이 벌써 하나님보다 자기 마음을 더 차지하면 그게 덤불 밑에 뿌린 씨입니다.

업이라 말은 자기 생애라 말과 같은데, 주부는 가정이 자기 업이니까 주부의  일에 열중하다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인데, 동행은 하나님에게 끌려간다,  하나님께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따라가는 것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  뜻을 찾아서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 모신 것이 하나님에게 붙들린  것인데 그만 여기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리고 가정 생활이나 어떤 구제사업이나  복음사업이나 기도나 목회나, 어떤 일이든지 그것은 생명도 진리도 아니요, 그  업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업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습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큰 목회, 훌륭한 목회를 했더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했으면  그는 다른 사람은 구원하고 자기는 버린 사람입니다. 이래서 바울은 ‘구원  얻도록 다른 사람에게 도를 전파한 후에 자기가 버림을 당할까 해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기를 힘쓴다’ 했습니다. 그분은 그 면에 끝까지 실수없이 자랐습니다.

어떤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 잊어버리면 멸망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니다.

신앙하기가 어렵습니다.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 되도록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기도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또 그 사람처럼 자기도 멸망할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됐다는 것을 알기도 어렵습니다.

자기 업에서 하나님 잊어버리지 않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자기  업에서 하나님 잊어버리고,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잊어버렸으면 멸망의  세력만 강해진 것이요, 심판의 날에 심판거리만 마련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문과 고형이 좋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것 됐다는 이름만  있었는데 하나님의 것 노릇하다가 없어졌으면 완성이 되니까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명이요 근원이라 했지만 실상 하나님이 나를 들어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는 이 수입이 있기 때문에 고문과 고형이 좋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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