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988. 6. 8. 수새.

 

본문: 갈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게 신약 교회가 창설되던 초기 곧 사도의 시대입니다. 그랬는데 이 사도  바울이 구약 교회 유대교가 신약 교희로 지금 개혁되는 그때 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교회나 신약 이스라엘 교회나 하나는 혈육적이고 하나는  신령적으로 차이 있고 속에 내부는 구약에 속한 아벨의 신앙이나 에녹의  신앙이나 또 그후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모든 구약의 신앙의 사람들, 또 그 당시  유대교에도 사가랴라든지 엘리사벳이라든지 마리아라든지 요셉이라든지 또  시므온이라든지 안나라든지 나다나엘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의 신앙은 신약 신앙과  꼭 같았습니다.

 이래서, 그들이 대망하고 있는 메시야가 왔는데 정작 메시야가 오니까 메시야를  정죄해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 또 그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렸지마는 실은 자기들대로의 그 주관이 도가 됐고 자기들이 왕이  된 악으로 되어 있는 그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저 말로는 이렇게 소망하고  했지마는 실상의 구세주가 오니까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깨달을 만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 주셨으나 귀가 복이 없고  눈이 복이 없어 그렇습니다. 귀와 눈이 복이 없다 말은 하나님께서 볼 수 있게  해 주시지 아니하셨고 들어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지 안했기 때문에 그들은 듣고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원 전 예정대로 된 것이고 또 외부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다 육체가 됐기 때문에, 육체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그들과 같이 할 수 없다 창세기 6장에, 말씀하신대로 그들이 속에 영은 배반해  버리고 영은 죽여 버리고 순전히 심신이 주가 돼 가지고서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들 중심으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들어도 모르고 또 보아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대로 그래 된 것이지마는  외부적으로 피상적으로 보면은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구원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증거하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구원이 오니까 원수가  돼 가지고 대적을 하고 정죄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가? 그 이유는 속에  이제 악이 중심이 돼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가 다릅니다. 구약 교회는 중생이 소망적이고 중생이  그들에게는 내적으로 와서 있지 안하고 하나의 객관의 능력이 와서 그저 접선을  하고 접촉을 해서 영감될 때는 영감되고 영감 없을 때는 없고 이렇게 그  중복적이었지마는 신약 예수님의 대속이 완료된 후에 이렇게 중생된 신약 교회의  중생은 이미 중생이 된 자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가 그 속에  내주해 가지고 중생시켰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깨닫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 언제든지 제가 방종해서  만나지 못하고 접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지 저만 힘을 쓰면은 이미 저의 영 안에  와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구약 교회의 성도들은 내주해 계시지 안하고 아직까지 예수님의 대속이  미래적이요 다만 그 하나의 표적으로 하나의 그 예약 그 대용 표시로 짐승의  제사로 가지고서 대속을 받는 것이니까 소망하는 것은 다 소망할 수 있고 또 그  은혜를 하나님이 필요할 때에는 그에게 주어서 영감 역사를 할 수 있으나 또  끊어질 때는 끊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에 속한 선지자들이 영감 생활한 것을 보면 그들의 영감  생활과 신약 사도 이후에 영감 생활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약에 속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랬지마는 어떤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내나 신약 교회와 꼭 같았습니다. 대제사장 사가랴도 사도들의 그  신앙이나 같았고 또 그 아내 엘리사벳도 그랬고 동정녀 마리아의 신앙도 그랬고  요셉의 신앙도 그랬고 또 목자들의 신앙도 그랬고 시므온이니 안나니 하는 그런  사람들의 신앙도 타 같아서 예수님이 벌써 오신다는 소식도 꼭 같이 들었고 또  탄생했을 때에 목자들도 와서 찬양을 하고 동방박사들도 와서 예물을 드리고 한  그들은 꼭 같이 바라봤지마는 한 사람들은 메시야를 죽였고 한 사람들은  메시야를 영접했습니다.

 메시야를 죽인 자도 구약 성경을 따라서 죽였고 또 메시야를 영접하는 사람들도  구약 성경을 따라서 그 성경을 좋아서 성경대로 해서 메시야를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 차이는 어데서 생겼느냐 하면은 곧 그들의 중심이 달라졌습니다. 중심이  달랐고 중심이 다른 인간 행위에 근거 두지 안하고 중심이 다른것은 하나님께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했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게 뭘로 나타났느냐? 자기중심의 사람으로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탄생할 때는 몰라도 예수님이 이제 사생활을 끝내고  공생활을 시작해서 모두 다 널리 전파하고 이럴 때에 예수님의 그 교훈을 듣고  그들이 다 유식하기 때문에 들어 깨달아서 놀라기도 하고 이상타고도 하고 또  그들이 다 왕으로 모실라고도 했습니다.

 오병이어 표적을 나타낸 후에는 예수님을 억지로 그들이 생각하는대로 왕으로  모실라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교훈한 것이 저거들의 교훈과 다른 것을 듣고 놀랐으나 그들이  자기야 죽든지 살든지 영원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짜든지 이거 옳은 교훈 듣고  옳은 복음을 들어서 영원을 준비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보다도 이 세상에 있어서  자기 위치, 자기 지위, 자기 권위, 사람들에게 대우받는 그 대우, 말하자면 세상  것을 하늘나라의 것보다도 앞세웠고 또 주님보다도 하나님보다도 저희들을  앞세웠기 때문에 결국 저희들이 하나님에게 이용을 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저희들 가르치는 것과 달라서  교훈이 달라졌습니다. 교훈이 달리 나타났고 또 신앙의 그 사상이 달리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완전히  비어 종의 형상을 가져, 종의 형체 가지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아버지 그분에게,  보내신 그분에게 전적 피동되어서 완전히 자유는 박탈된 자요 자유는 하나도  없고 그분에게 절대 복종자고 완전히 자유는 그에게 빼앗기고 아버지가 자유하고  아버지의 자유에 종으로서 피동됐습니다.

 그라시면서 또 그분이 하신 것을 보면은 모든 신약 교회 사도들이나 문도들이나  모든 성도들에게 하는 걸 보면은 껍데기 보면은 사람에게 그분이 다, 타협하고  이렇게 순종하고 사람을 얻기 위해서 따라 가는 것 같이 따라 다니면서 강변으로  가면 강변으로 따라갔고 또 바다로 가면은 바다로 따라갔고 산으로 가면 산으로  따라간 것같이 보이지마는 가만히 깊이 보면은 그분은 피동이 없었습니다. 피동  안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해서 생명까지 바쳐 줬지마는 그들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아버지에게만 피동됐고 또 사람들 주권적으로 지배했지 거게 피지배를  당한 일이 없습니다.

 게네사렛 호수가에서도 배 타고 거게서 전할 때에 배를 타고 갔으니까 선주  베드로에게 따라서 간 것 같지마는 거게서 ‘배를 조금 띄워라’ 조금 띄우라  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똑똑히 정질 정색대로 주님은 아버지에게 피동, 모든  사람들은 주님에게 피동 요렇게 피동적이고 위에서는 독재적으로 한 분의  자존하신 한 분의 그분의 뜻을 주권의 뜻을 그대로 펴 나갔고,  저 보면은 영원 자존하신 한 분 그분이 그분의 뜻을 쫙 펴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앞으로는 다 충만해서, 당신의 뜻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충만해서 그 한 뜻으로 충만해서, 타락 후에 마귀가 만든 것은 뜻이 억억만도  넘은데 단일의 의사입니다.

 하늘나라는 전부 성질도 하나 마음도 하나 뜻도 하나 생각도 하나 전체  하나니까 누가 양보를 하고 누구의 것을 따라갔느냐? 그분 한분의 것을 다  따라갔고 그분 한 분의 것을 펴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꼭 그겁니다.

 이래서, 그때에 유대교들도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그들이 교훈을 들을 때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을 딿지 못한 것은 자기네들의 지위와 권위와  대우 그것이 깨어지기 때문에 그놈 깨기 싫어서 알았지마는 달게 받아 들이지를  못했습니다.

 이라다가 예수님에서, 죽이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신단다고 이래서 군대들을 누가 속이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을 예수님의 그  유해를, 시신을 딴데로 도적해 가고 살아났다 이랄까 그런 염려 때문에 군인들을  세워서 특별히 지켰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천사가 와 가지고 그들이 다 기절하는 그런 두려움을 봤고  예수님께서 살아난 것을 그들이 봤습니다. 이래서 도망쳐 가저고 와서 예수님이  부활했다 하는 것을 그걸 증거하니까 부활했으면 부활한 메시야가 분명한데  메시야를 그들이 주장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돌로 맞아  죽을 것이라 말이오.

 전부이 서기관들 이 제사장들 이런 자들이 다 돌에 맞아 죽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처음에 복음 들을 때는 지위 문제였지마는 이제는 생명의 문제기  때문에 그들이 확실하기는 확실하지마는 지금 만일 그가 메시야라고 우리가  인정을 하고 따르면은 우리는 돌에 맞아 죽을 터이니까 생명이 아까와서  배신하고 그들이 믿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라면, 전자에 교훈 듣고 못 한 것도 자기중심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자기 그 중심의 생명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이 심판 때에 부활하고  난 다음에는 그들은 택한 자면 다 하늘나라 갈터이니까 그때 가서는 ‘그때  우리가 이미 죽을 놈의 걸, 이미 다 내버리고 올 것, 지위니 권세니 대우니  그까짓 게 뭐 크냐? 그 대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우하는 것은 한 없이 크고  또 이미 그 죽는 것보다는 이제 살아 있는 그거 하룻밤 나그네 같고 죽었다가  부활하고 난 후에는 영원무궁한데 왜 그래 천치 바보 노릇을 했을까?’ 가슴을  치고 후회를 하지마는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 이스라엘이 이렇게 메시야를 죽인 것이 다 뭐이냐 하면은 그 악이  들어서 죽였습니다. 원죄가 들어서 그들을 다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하게 했고 또  본죄가 들어서 영접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원죄를 우리가 가리켜서 뭐이라고  말했습니까? 원죄가 뭐입니까? 악성. 원죄가 악성입니다. 또 본죄는 악습이오.

 나는 원죄 본죄가 악성 악습하는 그것도 내가 성경 보고 기도해가지고 찾아  가지고 안 것 아니오. 나도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증거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해 줘서 악령, 악성, 악습이라고 이 처음에 그것을 저  대구에서, 대구에 뭐고? 주암산. 그 집회할 때에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 ‘이게  내가 이 말을 내가 어찌 했느냐? 이게 문제다. 이게 또 정죄받으면 어찌  되느냐?’ 이랬는데 나중에 그라고 난 뒤에 세월이 지나가며 차차 차차 이제  깨달아서 성경도 보고. 이랬을때에 확실히 깨달아진 것이 옛사람은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이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걸 확실히 알았고, 또 그  원죄가 악성이요 본죄가 악습이라 그것외 총 지휘의 발기자는 곧 악령이라 하는  것을 깨달았었습니다.

 이래서, 그들이 그거 때문에 못 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이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말한 것은 유대교를 두고서 말합니다. 유대교 그들은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 아닙니까? 섬기는 사람들이고 이랬지만 섬기지만 실상은 죽였다  그말이오.

 오늘 천주교가 다 예수교 아닙니까? 천주교가 다 예수교지 예수님 믿지 다른 거  믿습니까? 이러나 천주교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 있는 개혁교 됐욜 때에는  천주교와 개혁교의 여러 그 수십만 명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천주교가 세력을 얻어 가지고서, 천주교가 그게 뭐이 천주교 됐느냐 하면은  사도 교회가 천주교 됐는데 사도 교회는 바른 교회요. 우리가그 교회를 계대받아  가지고 믿는데 사도 교회가 타락해 가지고서 천주교회가 됐고 천주교회 돼서  완전히 이거는 기독교나 기독교가 아닙니다.

 지금은 뭐 천주교에서도 성경을 보고 또 그들이 기도를 하고 주일을 지키지마는  진짜 천주교가 아주 확실한 천주교가 됐을 때에는 성경 못 봅니다. 기도 안  했습니다. 그저 경문만 읽었어. 또 주일 지키지 안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완전히 신앙이 없도록, 완전히 세상화시켜 버리고 지금까지도  그들은 동상을 거석해 가지고서 제이계명이 아니라고 그렇게 변명하고 오만  해석을 다 붙이면서 전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미사 생활한다 하는 걸,  미사드리는 미사 생활한다는 것이 전부이 우리가 아는 대로는 우상 숭배입니다.

 좀 아주 좀 거석한 데에는 그림을 써서 이래 갖다 붙혀 놓고 거게다 대고 무릎  딱 꿇고 절하고 이렇게 해서, 내가 그때 한번 이 천주교회가 뭐인가 싶어서 저  처음에 예수 믿은지 한, 그때 한 달포인가 됐는데 김천 가 가지고 ‘이 천주교가  뭐인고 한번 가 보자’ 그래서 그 천주교회가니까, 가서 대번 보고 ‘이거는  하나님의 도가 아니다. 이거는 완전히 변질된 속화도다.’ 하는 것을 느꼈고,  그라고 난 다음에 천주교에 대한 그런 서적을 약간 좀 봤고 이래 부산 와 가지고  저 용두산공원 있는데 거게 천주교회 있는 데 가 봤습니다. 가서 내가 보니까  칠십 몇 개라. 우상이 칠십 몇 개라. 그러니까, 보니까 아침에 와서 성의 있는  사람은 칠십 몇 번을 절을 하고 갑디다.

 이렇지마는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지금 천주교나 기독교는 같다. 그 수십만  명이 순교를 당한 것은 뭣 때문에 당했으며 이랬는데 이래 가지고서 합동 번역을  했는데 이 성경을 합동 번역하니까 뭣 때문에 그들이 합동 번역 하자 합니까?  여게서는 성서공회에서 그 속에 도둑놈들이 들어 가지고서 막 성서공회 돈 꽉  찼습니다. 지금 돈이 너무 많이 모였습니다. 온 세계적으로 말이오.

 세계의 성서공회는 하나인데 이것이 천주교의 돈을 끌어서 거석하기 위해서  합동 번역을 시작해서 천주교는 어떤 한 교리 번역을 하면은 천주교에서는  천주교 저거 신앙 사상과 교리에 맞도록 번역할라 하고 개혁교는 개혁교 대로  할라 하니까 시비가 납니다.

 시비가 나 가지고는 나중에 가서 그러면 너거 하나하고 우리 하나하고 반반이  그렇게 양보해서, 우리의 선배들이 바로, 그대로 번역을 정확하게 했다 해도  그거 번역 보고만 하면은 헛일입니다. 온 성경 전체를 보면 성경은 단일성을  가졌기 때문에 성경 전부를 보면 뭐 한 절, 두절, 한 권 두 권 빠져 없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다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이랬는데, 이 합동 번역으로 그래  가지고 있어서 합동 번역을 안볼라고 애를 쓰고 또 그 틀린 게 뭐이냐 이렇게  찾을라고 애를 쓰고 거게 대해서 합동 번역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선포한  사람은 OOO목사님이 그때 팜프렛을 내 가지고서 그 가난하고 없는 사람이 전국에  돌렸습니다. 전국 교회 다 돌렸는데 삐쭉거리고 말고 그걸 아무도 들어서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죽었습니다. 얼마전에 죽었다고서 저한테  소식이 전달로 왔읍디다. 그거 편지로 안 오고 전달로 왔어,  전달로 왔는데 그분이 그전에는 여기 올 때는 내가 꼭 그랬는데. 박사학위 받고  난 다음에 그 뒤에 한 번만 왔지 그 뒤에는 다시는 오지도 안했고 와 봐야 또  내가 강단에 세우지도 안하고 그랬었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악이 주장이 돼 가면 언제 변질돼도 변질돼서  변질된다는 것을 나타내게 됩니다.

 유대교는 그렇게 거게서 움터 나온 것이 신약 교회요. 이런데 여게 ‘다른  복음은 없나니’ 하는 것은 바울이 지금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을 지금 말을 하고  구약에도 대속의 구원을 말을 하고 이래 하지마는 그들은 하나의 의식과 제도와  형식에 중점을 두고 그 속에 들어 계시는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만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안하고 자기네들을 왕으로 세워 놓고서 하나 의식제도 이 형식은 그걸  가지고서 자기네들이 왕되는 방편, 그것들이 세상에 처세에 세상을 점령하는  그런 방편으로 샜지 아주 자기를 부인치 안하고 자기를 세우고 하늘나라를 주로  삼는 게 아니라 세상을 주로 삼았고 또 주님을 주인으로 주격으로 모시지 안하고  저희들이 주인이 되고, 이러기 때문에 껍데기는 같지마는 속에 알맹이는 다르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내가 구약 교회나 신약 교회가 실은 같은데 외식되고 타락해서  외식된 자 그들은 다릅니다.

 이래서, 실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하나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이 그  신관도 같고 인관도 같고 구속관도 같고 만물관도 같고 소망관도 같고 그 모든  생활 방편관도 같고 꼭 같습니다.

 같으나 껍데기는 다만 하나는 혈육적이고 또 하나는 신령적이니까 그때는  교회가 영적면으로 어리기 때문에, 어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르치시기를 그래  가르쳐서 에덴동산에서 간단한 법을 주셨는데 간단한 법을 주신 죽고 사는 법을  준 그 법은 신약 성경 전부와 꼭 같습니다. 구약 성경과 꼭 같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교인들이여 하는 것은 외식이라는 건, 뭐이 외식이냐? 외식은 그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자기를 하나님보다 사랑하고 앞세우는 그게 외식이오. 또  자기 소망에 대해서는 하늘나라보다도 세상을 앞세우는 그게 외식자입니다. 그  외식자는 화를 받을 수밖에 없어,  이런데, 이래서 다른 복음이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때 주장하고 있는 그  복음과 이 신약에 있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달랐습니다. 복음이 다르다  말은 교훈이 다르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교인들의  누룩을 삼가라’ 그말은 그 교훈을 삼가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래서 여게,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게 바울이 사람에게 대해서 저주한 것이 여기 이 갈라디아서 1장에 두 번이나  말씀을 했습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왜 여게서는 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렇게 말을 했느냐?  이 복음이라 하는 것은 교훈인데 그 교훈이 바울은 그때에 유대교에 그 교훈을  이 신약 교회의 교훈으로 세울라고 하는 이것 때문에 박해를 당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당했는데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 가서 고난 당한 것도 있고 당한 게  있지마는 제일 큰 고난 당한 것은 유대교에게 고난 당했습니다. 유대교인들에게  제일 고난을 많이 당했었어.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 채 이제 바른 구약 그 속에 알맹이를 들어서 알맹이  줄기는 에덴동산 아담 해와 때 은 그 줄기가 그대로 나와 가지고서 신약 교회  됐고 그 줄기가 그대로 하늘나라에서 무궁한 교회 곧 건설이 되는 것이지 뭐  새것이 중간에 나온 것 아닙니다. 중간에 가서 새로 돋아 나온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나 그 줄기가 계속해 나왔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해 보면은 하나님이 쭉 계속한 줄기 그거나온 그  줄기가 있는데 그 지난밤엔가 언제 인가 재독을 다 했는지 몰라도 이 가정에  대해서도 이거 줄기가 쭉 나오는데 그 줄기가 있습니다. 그 줄기에서 나오는  거지 그 줄기에 딴 줄기가 새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구원관이 없고  새로운 인생관이 없고 새로운 그 구속관도 없고 없습니다.

 다 그것이 줄기가 나와서 다만 인간의 그 유치하고 장성함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이 달랐고 그 방편이 자꾸 어린 데서부터 시발해서 이렇게 우리  객관인 우리가 달라 그렇지 하나님 당신이 달랐거나 진화가 된 거는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언제든지 계시 종교지 기독교는 연구해서 발달 돼  나가는 진화 종교가 아닙니다.

 이래서,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은 어데했느냐  하면은 사도 바울은 그 유대교를 자꾸 이같이 접촉을 해 가지고서 유대교를 이  신약의 이 교훈으로써 이렇게 자꾸 그들을 회개시켜서 개량을 시키고 회개를  시키고 또 개정을 하고 이렇게 할 수 있지마는 이 복음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유대교의 강세보다, 강세보다 이들이 약세를 가졌기 때문에 접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접하면 죽기 때문에 이제 저주를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사랑해서. 그뭐 좋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신자와 불신자, 또 부모를 죽인 원수일지라도 담을 막지  말고 헐어서 어짜든지 화평을 하고 사랑하고 이렇게 하라 이랬으나 이 교훈이 이  복음이 다를 때에는, 복음이 다를 때에는 내가 그 복음을 다른 그 사람을 인도해  가지고서 다시 옳은 복음으로 살려낼 수가 있다고 하면은 하지마는 살려낼 수가  없을 때에는 아예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래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런 것 다 많이 나왔는데 이런 것도 여호와의  증인도 그들이 지금은 보면은 이거 뭐 장로교나 뭐 감리교나 이런 교나 별로이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별로이 다르지 않습니다. 또 그들이 거의 교리와 신조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리와 신조는 같지마는 속에 볼 수 없는 알맹이는  다릅니다. ‘  사람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고 주장도 다르고 다른데 다만 처음에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거는 참 아주 뭐 아주 완전히 다른 아주  딴 것이었지마는 함께 만나는 가운데에 자꾸 그들이 속에 알맹이는 변화되지  안하고 껍데기 말은 변화하기 때문에 결국은 요새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뭐  이거 장로교나 꼭 같은데 뭐 그럴게 뭐 있느냐?’ 여호와의 증인이 이것이 참된  이 올바른 정통의 기독교와 다른 것이 없다고 할 만치 그렇게 달라졌습니다.

 다른 그것은 그들이 변화되는 게 아니고, 변화되는 게 아니고 다만 여게 것을  가지고서 유혹시킬 수 있도록 사이비하게 그들이 하나의 지금 참된 그 신약 교회  이 정통 교회를 유혹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이 방편을 이용하는 것이지 근본  여호와의 증인의 사상을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자하고 이와같이 접촉할 때에는 자꾸 그들의 교훈을 따라서  ‘자, 이것 봐라. 그러면 이게 옳으냐? 이게 이게 틀렸다.’ 틀렸다 하면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틀렸다 하면은 ‘그거 그러면 자, 이것 또.’ 틀린  것은 틀린 걸로 내비두고 딴것 말합니다.

 그리 따라가기 시작하면 나중에 자꾸 가서 그 사람들 말한 대로 그래 나는 능치  못함이 없다. 나는 성경에 대해서 참 전능이라 할 만치 성경을 많이 안다.

그러니까 너 한번 대 봐라. 또 이라면 하나 말하면 ‘그거 틀렸다’ 시비하면은  저거가 틀렸고 이쪽 옳은 게 맞다 말이오. 옳은게 나타난다 말이오.

 나타나면은 또 그 다음에 딴거 딴 교리를 내놓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어떠노?  "그거 네가 얼마든지 나타내 봐라’ 따라가면서 해석을 하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마치 그 엘리사가 그랬습니까?,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해 낸 것? 인도해  끌고 간 것처럼 이렇게 슬슬 이렇게 끌려서 결국은 그들에게 포위 돼 가치고서  자기가 망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을 접하는 것은 그저 한 성구 말하면 ‘요거는 네가 틀렸나  우리 주장이 틀렸나? 요거는?’ 그거 틀렸으면 틀렸다 소리 안 하고 ‘자,  그러면 딴걸 보자. 딴걸 말하자. 아니라. 요것부터 틀리고 옳은 것을  구별하자.’ 그러면 요거는 틀렸다. 조거는 틀렸다. 틀렸으면 ‘자, 몇 장 몇 절  요것은 네가 틀렸고, 다른 성경 보면 틀린 것 환하지 않나? 네가 틀렸고 요거는  내가 옳다. 글을 써라. 요거는 네가 틀리고 내가 말한 게 옳다. 나는 요래  말하고 너는 그래 말했는데 내가 말한 거는 옳고 네가 말한 거는 틀렸다 하는  것을 네가 사인을 해라.’ 거게 딱 사인을 할라 하면 도망을 쳐버립니다. 그만  항복하고 도망칩니다. ‘하, 이놈은 지금 우리 죽일 놈이다.’ 하고서 그만  도망쳐 버립니다. 그리 안 하고 제가 그 따라서 줄줄 하다 보면은 나중에 가서  속화되게 됩니다. 그만 여호와의 증인화 돼요.

이러기 때문에, 전하는 자에게 대해서 이렇게 아주 삼가서 멀리 하라고 저주를  한 것이고, 저주를 한 것이라. 이 저주한 거는 성령이 저주한 거 아닙니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렇게 했어. 왜  그렇게 엄격하게 말해 놓지 안하면은 자꾸 속화되게 된다 말이오.

 그런 말 다른 교훈을, 다른 교훈 그거는 아예 적으로 삼아서 저버려야되지  그것을 자꾸 용납해서 하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감염이 돼 가지고서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 그거요.

 또, 요한2서에도 보면은 10절에도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보면은 왜 이 복음을 받아 가지고 자꾸 변질이 되느냐 하면은 그 중심이 악인  것과, 그 신앙생활하는 중심이 악인 것과 하나님 중심인 것이 그것이 다르다  그말이오. 중심이 악인 그것은 접촉을 안 해야 되지, 그거 다른 거는 얼마든지  접하고 이라지마는 교훈이 다를 때에는 그 사람 벌써 교훈있으니까 저대로는  구원 이루든지 말든지 이런 것이고 이런데 그 교훈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제가 무슨 신사적으로 또 저는 아주 관용적으로 유대적으로 이래 가지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나중에 가서 그 악에게 동참하는 자가 돼 가지고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여게 가리켜서 말했습니다. 다른 천사라도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가지고 오거들랑은 그 인사를 말고 저주받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전할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어떤  악인에게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지마는 우리가 받은 바른 복음에 배치가 돼  가지고서 복음에 다른 복음이 되어 있는 배치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그  사람을 백프로 능가해서 그를, 다시 인도할 수가 있고 구원할 수가 있으면 하고  그게 벌써 그렇게 못할 완이면 내가 안 죽으면 그가 죽습니다.

 내가 안 죽으면 그가 죽기 때문에 이 교훈에 대해서는 우리가 삼가서,  여러분들이 이 우리 총공회에서 그 하는 교훈이 다른 교훈과 여러분들이  다르다는 것을 볼 줄 모르고 다른 색깔이라 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은  여러분들도 내나 아주 그겁니다.

 이래서, 이 복음대로 살라고 하면 이 복음과 다른 교훈인 그런데에 아주 자기는  신사적으로 인격적으로 참 그 위인적으로 스스로 제가 교만해 가지고 그 망령을  부려서 그런 사람하고 이래 접하게 되면은 결국 복음이 타협됩니다.

 타협되면은, 올라가는 거는 죽자고 힘을 써서 올라가도 올라가기 어렵지마는  타락하는 것은 설설 저절로 타락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거게서 이 사람을 접해 가지고서 내 신앙이 점점  뜨거워지느냐 점점 식어지느냐? 접하고 보니까 세상과 가까워지느냐 세상과  멀어지느냐? 천국이 가까와지느냐 멀어지느냐? 주님과 가까와지느냐 멀어지느냐?  제가 보면은 확실히 압니다.

 이래서, 멀어질상 바르면 아예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내가 거게  전할 필요가 없다. 안 믿는 데 전하지.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안 믿는  사람에게 가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갑니다. 그 믿는 사람에게는 나는 갈  필요가 없어. 잘 어깨 너머 가르쳐도 예수의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비두고  나는 거게다 하지 말고 지금 딴데 전할 일이지 내가 거게 자꾸 감염 돼 가지고  속화되고 신앙에 손해 갈 그런 걸 밟을 필요가 없다 그말이오. 알아 듣겠습니까?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라면 이거는 전부 배타적이고 이거는 다독선적이고,  그분들이 말하기를 독선적이라고 말하고 배타적이라고 말했는데 배타성과 독선성  요것을 버리지 안하고 보수해야 됩니다. 보수하고 그라면 그들에게 얼마든지  우리가 독선성세 대해서 회개할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그저  죽는 날까지 자꾸 잘못된것을 고쳐 나가는, 지금 발견은 죄요 행동은 고쳐  나가는 것이요 이라면 뭐 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한다 해도 우리는 독선주의도  아니고, 또 그 배타적도 아니고,  제가 처음에 나올때 OOO 목사님이 제게 대해서 명패를 붙혀 놓은것이 그게 나는  직접으로는 듣지 안했는데 설교에 대해 듣는다고서 들은 사람들이 다 와서  말하는데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 안하무인이라, 한국의 엘리야라,  유아독존자라, 뭐 배타자라, 이렇게 교만자라. 별별 이름을 다 붙였는데 그  이름이 나는 이 이름에 속에 그 성질인 그것은 내가 버리지 안하고 꼭 썩지  안하고 요대로 나가야지 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OOO OOO  목사님이 그렇게 말을 했답니다. 거게 들은 모든 학생들과 교인들이 와서 말하기  때문에 제가 들었습니다.

 이랬는데, 그런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봉사적으로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고 사업적으로도 할 수가 있고 모든 면으로 화친을 가지고할 수 있지마는  교훈에서 대해서는 엄격하게, 교훈은 내가 생사를 거게다가 바치는 교훈이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신조적으로 이런 것은 생명보다 귀합니다.

 말하기를 우리 교리 신조는 생명보다 귀하다 이래 말해도 그 말을 실감을  느끼지를 안한다 그말이오.

 왜 그러냐? 교리 신조에게 우리 생명 바치지 않습니까? 앞으로 우리는 무슨 일  당할지 몰라, 마지막에 예수 믿어 이 구원 준비 했던거 마지막으로 톡 털어서  팔아 버릴란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럴 때에는 아주 어려움이 오는데 생명을 바치는 어려움이 올 때에 그때는  그저 어데로든지 피할 길만 있으면 피할라고 애를 씁니다. 어데로 살 길만  있으면 살라고 애를 씁니다.

 그럴 때에 교리와 신조가 둘인 사람은 요 길로 가면, 요 길로 가면 죽는데 요  길로 가면 사는 그 교리와 신조기 때문에 그때에 생명을 거석해 놓고 제가  평소에 ‘이게 좋다. 이 교리보다는 이 교리가 좋다.’ 할지라도 생명을 내놓을  때에는 ‘이 교리보다 이 교리가 좋다’ 하는 교리 내비두고 ‘이 교리만  못하지만 이 교리가 또 이 교리도 괜찮다’ 그리 가 가지고서 가기 때문에  그것이 유혹의 길입니다.

 그런고로, 교훈이 다른 데에는 아예 이는 상대방을, 성령이 저주했소. 그거  내가 말은 안 할지라도, 말은 안 할지라도 그 교훈하는 사람이나그 교훈을  저주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말은 안 해도 저주하는 사람이 돼야 돼. 그를  저주하는 사람이 돼야 되고 인사도 안하고 용납도 안해야 돼.

 여게 말하기를 그래 놓지 안했어요?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오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여게 대해 교훈에 대해서는 이렇게  엄격하게 단속을 해 놨습니다.

 어제 우리가 벌써 이것이 문제가 많았었는데 ‘영 죽을 우리라 ‘영죽은  우리라’ ‘죽은’ 하는 것은 벌써 과거사라서 죽어버렸다는 것이라. 죽을 하는  거는 지금도 죽고 있다 하는 것이오. 우리가 죽고 있는 게 아니고 죽어서  끝나버렸습니다. 죽어서 끝났어. 죽은 것이, 죽은 것이 있지 죽은 시체가 있는  것이지 죽을 아직까지 생명이 남아 있는 거아니오. 영 죽은 것이오.

 그런데, 자꾸 혼돈한다 말이오. 예수님이 대속해서 우리는 영육이다 대속을  받았습니다. 영은 완전히 받았고 이 몸이라는 것은 이거는 법적으로는 받았지  실상으로는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상을 지금 우리가 받을라고서 애를 쓰는  것인데 실상 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지금 법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이게 실상으로 지금 죽느냐? 현실에서 실상으로 죽고 현실에서  완전히 살고,  우리의 이 심신이라 하는 이것은 현실을 통해서 현실에서 피와 성령과 진리를  내가 영접하면 영원히 살아 버렸고, 그 현실에서 아주 끝나 버린 거는 완전히  살았고,  자기가 현실에서 아무리 평소에 예수 믿는다 할지라도 현실에서 피와 성령과  진리에 배치된 것이면 뭐입니까? 악령, 악성, 악습 아닙니까? 악령, 악성,  악습으로 살았으면 그 산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과 진리와 영감을 버렸기 때문에  그게 옛사람의 생활이니까 옛사람의 생활로 산 것은 일 년 살았으면 일 년 산 그  심신은 영원히 멸망했습니다, 택한자라도 멸망했습니다. 성자라도 멸망했습니다.

목사라도 멸망했어.

 이러니까, 거게서 그거는 지금 죽어 가고 있는 거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아 자꾸 이거 구별을 못 하기 때문에, 자꾸 ‘어’ ‘아’ 요렇게  구별하는 게 좋은데 구별하는 요 구별하는 게 있어야 되는데, 나는 저 OOO조사님  지금 하마 목사 됐을까 생각하는데 목사 아직 안 됐어. 힘을 아마 안 쓰는  모양이라. 내가 그때 어데 내가 매력을‘보고서 내가 소망을 가졌느냐?  ‘따져라. 모든 것 구별하자.’ 그게 거룩입니다. 거룩과 진실을 거석할 때에  그때 하기 위해서 이 거룩이라 하는 것은 모든 잡탱이에서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서 하나만 되는 거게 도달하는 그것이 거룩이기 때문에 거룩은 모든  잡탱이가 온전함을 이루어 가는 그 과정까지를 합해서 말하는 그 단어가  거룩입니다. 진실이라 하는 거는 완성된 그 완성 자체만 가리켜서 말하는 게  그런 것이고.

 이러기 때문에, 그 말에 ‘어’ ‘아’가 있어야 돼. 그 말을 들을 때에 ‘저  말은 같은 것 같지마는 요렇다’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하는 그말 할 매세 그 ‘참으로’  하는 그것이 뭐이요? 그것이 그 훼방이라. 그게 하나님 훼방하는 거라, 거게  하나님 훼방이 들었어. 거게서 하나님 훼방을 하면서 ‘너희더러 먹지 말라  하더냐? 먹는 데에는 이리 된다.’ 한 그것이 벌써 훼방으로 시작해 가지고서  이간 붙힌 거라.

 하나님을 헌 것은 저 나타내기 위해서 그랬어. 결국은 하나님 헐어가지고 저  나타냈어. 사람을 접해 보면 허는 것은 자기가 환하게 알아요, 다. 아무리  한다고 해도 그걸 저거가, 믿는 사람의 자기 이상에 있는 신앙가들의 눈을  속이지 못해요. 귀를 속이지 못해.

 뭐 사람 말 그거 듣고, 그뭐 사람 말 듣고 나면 사람 접촉해서? 안들어. 사람  말 안 들어도 알아요. 사람 말 안 듣고 ‘이렇고 저렇다. 저거지금 저렇게  움직이고 있다. 뭐 있다. 그 결과는 무슨 결과가 나올 것이다.’ 환하게 다 알고  있다 그말이오. 왜 몰라? 안팎에 눈이 있는 게 성도들인데.

 이래서, 우리는 아무리 지금 이 교파 저 교파 있지마는. 사업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봉사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구원도 같이 할수 있습니다. 애배도 뭐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 다 하지마는이 교훈이 다른 데에는 교훈적으로  접하지 안하고서,  제가 옳은 교훈에 있으면 그 틀걸 교훈은 저주 받을 그 저주의 대상이라고  그만치 거리 멀어야 되고 아예 인사도 말고 영접해 들이지도 말고 이렇게 경계를  둬야 되지 이걸, 교훈에 대한 이것을 이런 경계성을 두지 안하고 하면은 결국은  재가 썩고 맙니다. 별수 없습니다.

 이러니까, 환하게 썩어지는, 내가 서울 사는 사람들 자꾸 썩어진다 하니까 서울  사람들은 막 듣기 싫어합니다. 썩습니다! 썩었습니다! 썩습니다! 썩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또 여게 사람이 미국 가면은 미국가면 썩습니다. 썩었습니다.

그래도 미국 가 가지고 썩지 안하고 그대로 온다면은 그거는 굉장한 사람이라.

 제가 볼 때 거의 다 이래 썩어지는데 그 미국 가 가지고서 썩지 안하고 미국  내음새가 안 나는 사람 있어요. 미국 갔는데 미국 내음새가 안 나는 사람들이 요  가운데 더러 있고 어떤 사람은 미국 가 가지고서 그뭐 그 한번만 퍼뜩 다녀와도  그만 미국 내음새가 나.

 그래서 여기 조수옥씨가 말하기를, 그분도 참 의인이오. 아주 여자라도 아주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미국 가거들랑 삼 년 이내에 나와야 되지 삼  년 이상되면 벌써 그 사람은 그 버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면, 미국은 좋은 사람이 없느냐? 미국 좋은 사람 있는데 그게 아니고  이거는 버려지기 때문에 아예 삼 년 이내에 와야 되지 삼 년 넘어가면 그만 그  사람 버려 버린다. 그 말이 어떻게 명담인지.

 보면 우리 O목사님하고 저 O목사님하고는 미국 갔다 온 내음새가 암만 맡아봐야  내음새 안 납니다. 아무 어데로 내음새를 맡아 봐야 내음새가 안 나. 어떤  사람은 뻐뜩만 갔다 와도 그만 내음새가 나. 그래서, 이 교훈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해. 내가 오늘 아침에는 지금 여러분들이 부활에 대한 이것을 아직까지  흐미하기 때문에, 어제 영 죽을이니 죽은 것이니 하는 이것은 그렇츰 논단이  나도 그 아직까지 뿌리가 나오지를 못하고 혁신을 못 했는데 어제는 알아졌는지  모릅니다.

 그 아는 것은 요 교훈대로 ‘저주를 받을 지어다’ 그거는 저주 대상이라. 또  ‘인사도 말고 영접도 말아라. 이라면 동참한다.’ 그 그게 뭐이냐? 그거 뽑아  보면은 그 속에 중심이 악이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말은 뭐입니까? 성령이 안에 내주해 계시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만큼 그거 다 나쁘고 그만 그거 다 안된 것으로  아느냐? 너와 접선에서는 그렇다 말이오. 자기와의 접선에서는 그런 접선의 그  결과와 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삼가야 된다는 걸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 다 멸망의 사람이냐? 멸망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  사람들대로 구원 얻지마는 너와 접선하는 그 접선에서는 네가 손해 본다  그말이오.

 이런 것도 나가서 잘못하면, 그러면 저거 뭐, 전부 총공회만 구원얻고 다른  거는 다 멸망인가? 이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속세 악이 주장하고 성령이 주장이  안 돼 그렇다 말이오. 성령이 주장하면 이 말을들을 때에 ‘과연 이렇게 그  경계는 이렇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동감이 돼 집니다. 어데 있어도 동감이  돼져요. 이 말을 들을 때에 동감이 돼지지 안하고 반발이 돼지는 거는 속에  중심이 달라 그래. 왜 아닌 것을 말할때에 아닌 것을, 아닌 것을 말할 때에 아닌  것에 대해 동정이 돼지고 자꾸 그렇게 돼지느냐? 그것은 속에 중심이 달라서  자가도 모르게 다 그렇게 돼지는 것이라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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