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2가지

 

1987. 7. 5. 주일오전

 

본문:빌립보서 1장 29절∼2장 11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출하시는 대속의 공로를 설정해 주셨습니다. 이 설정해 주신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우리 구원은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이 대속해 주신 공로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려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 구원을 받는 동시에 주님의 주신 이 구원을 위해서 고난도 우리를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만 주장하고 이것만 생각하지 대속의 공로를 입었으니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의 생활을 함으로 어려움도 받아야 되는데 그 어려움은 다 받지 아니할라고 하는 기독교 안일주의가 됐기 때문에 십자가를 완전히 배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요새도 남한에 있는 기독교들은 뭐 기독교 전성기라 할 수 있고 기독교 만능시대라 할 수 있을 만치 기독교는 세력이 당당합니다. 여게서도 또 앞으로 정권을 기독자가 잡아야 이제 남한 교회가 더 권세를 가지고 활기 있게 이렇게 나가겠다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 어짜든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믿어 영생하는 구원, 영광의 하늘나라의 구원, 또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으로 부활하는 구원 이런 구원은 믿으면 얻으니까 여게서는 다 좋아해서 마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들이 모아듭니다.

서울에 순복음교회는 말 들어 보니까 오십오만 명이라 했는데 지금 육십만 명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교회마다 가뜩가뜩 차게 모아듭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은 자의 정상적인 행위를 함으로 여러 모양으로 오는 이 박해 이 어려움은 도무지 당하지 안할라고 애를 씁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안하는 이유는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라” 사도 바울이라고 우리와 다른 예수님의 구속받은 거 아닙니다. 우리와 꼭 같은 구속을 받았지마는 이 구속 받은 이 구속을 벗지 안하고 구속받은 자로서의 정상인 신앙 행위를 하고 또 이 도를 어데서든지 증거할라고 할 때에 그의 구원 받은 후의 세상 생활은 전부가 다 고난 생활이었습니다. 이러나 오늘은 고난을 피할라고 합니다.

이래서 앞으로 우리 기독교가 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 기독교 세계가 된다 해서 뭐 교회마다 울씬울씬 합니다, 기뻐서. 그러나 만일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 고난이 없고 어짜든지 평안만 돼진다고 하면 좋은 줄 알지마는 로마 나라에 기독교가 전성이 돼서 로마 나라의 황제를 교회의 교황이 총지배를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패해져서 생긴 것이 천주 교회입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어짜든지 공짜배기로 하늘나라에 이 말로도 다 할 수 없는 이 영광스러운 구원만 믿으면 얻는다 하는 이런 강도와 도적의 소망을 가지지 말고 우리가 이 구원을 받았으면 이 구원 받은 자의 행위를 세상에서 할라고 할 때에 온갖 고난 옵니다. 별별 억울한 고난도 오고, 애매한 고난도 오고, 매맞는 고난도 오고, 욕 얻어먹는 고난도 오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도 오고, 또 모든 소유를 뺏기는 고난도 오고, 멸시 천대받는 고난도 오고, 죽음의 고난도 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그리스도의 입혀 주신 이 구원을 벗지 않기 위해서, 이 구원에 모순된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서 다 이 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말하기를 “단정코 말하노니 나는 날로 죽는다” 이랬습니다.

“우리가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라는데, 어짜든지 고난만 안 받고, 고난 안 받고 평안한 예수 믿을라 하는 이거 참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고난 없는 데에서 똑똑한 예수를 믿지 못하고 그저 얼버무리면서 이렇게, 믿으나 세상 사람이나 꼭 같은 이래 아무 박해 없는 그런 생활 여게서 세상 살다가 죽게 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금을 불로 연단하는 거와 같은 이 세상 진리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온갖 박해 가운데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신앙 생활 해서 정금같이 연단받은 이런 신앙을 만들어 가지고 하늘나라로 데려가실 것이고, 우리 남한에 있는 이 기독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을 하실 것인가 하는 그것이 지금,

어떤 자는 ‘어짜든지 평안하면 좋다. 기독교 전능시대가 돼서 남한에 기독교가 다 전체가 세력을 잡고 이렇게 하면 좋다.’ 이걸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리 되면은 교회가 부패해질 터이니까 이거 참 문제다’ 하는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소련이 예수 안 믿는 사람 없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소련 그 국경을 들어가면 돈을 가지고도 밥을 못 사먹었습니다. 왜?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는 밥을 팔지 않습니다. 이렇게 전체가 기독교가 됐습니다. 그런 가운데에 속에서는 ‘기독교인들 저놈들을 다 잡아 없애야 되겠다’ 하는 죄악은 점점 강해졌고 그래 가지고 소련에 있는 혁명이 이 기독교를 박멸하자는 그 혁명이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때에 혁명이 일어날 때에 예수 믿는 교회의 간부되는 사람들은 다 하나도 두지 안하고 완전히 몰살을 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좁은 눈만 가지고 있지 말고 넓은 눈, 긴 눈, 금생과 내세, 인간과 하나님, 평안과 고난, 죽음과 삶을 우리는 다 똑똑히 한꺼번에 겸해서 봐야만 할 것입니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싸움이 무엇 때문에 싸움이 있느냐 하는 이것을 이 밑에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면 우리는 모든 일 할 때에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살면 안 되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살아야 되는 걸 가리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속을 벗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싸우는데 이 세상에는 악령과 하나님의 영 둘이 싸웁니다, 악령과 하나님의 영. 사망과 생명이 둘이 싸웁니다. 죄와 의가 둘이 싸웁니다. 옳은 것과 삐뚤어지는 것이 둘이 싸우는 세상입니다.

“너희들에게도 싸움이 있으니” 그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었으니 우리는 죄로 더불어 싸우는 의에 속한 자들입니다. 사망으로 더불어 싸우는 생명에 속한 자들입니다. 마귀로 더불어 싸우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굽은 것으로 더불어 싸우는 곧은 데에 속한 자들입니다 . 모두 다 거짓말, 거짓, 속이고 하는 이 모든 거짓된 이것으로 더불어 싸우는 참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말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살아라 그말입니다. 형편에 따라서 대속을 입어서 편리할 때는 입고, 대속을 입어서 불리할 때는 벗고, 예수님을 이용해 먹어서 유익할 때는 예수님을 이용해 먹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가 올 때는 예수님을 휘뜩 벗어버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 같지마는 세상은 하루밤 나그네와 같고 영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게 불쌍한 자요. 가련한 자요.

“그런고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권면하는 일이든지, 또 사랑으로 위로하는 일이든지, 성령으로 교제하는 일이든지, 긍휼을 베푸는 일이든지, 자비를 베푸는 일이든지 이런 것 다 선한 일이지마는, 선한 일이지마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마음을 같이 하여” 마음을 같이 하라 말은 두 마음으로 하라 말입니까 세 마음으로 하라 말입니까 한 마음으로 하라 말입니까? 한 마음으로 하라 말입니다.

그러면 한 마음으로 하면, 권면이나 사랑이나 위로나 성령의 교제나 불쌍히 여김이나 자비하는 것이나 이런 것은 열 사람이 하면 열 사람 마음이 각각 따로 있고, 백 사람이 하면 백 사람 마음이 각각 따로 있으니까 여러 마음을 가지고 하지 말고 한 마음 가지고 하라 했으니 누구 마음 가지고 해야 되겠습니까?

모든, 요 몇 가지를 들어 말했는데, 우리가 행동할 때에 이런 행동 저런 행동, 자비를 베풀어도 자비를 베푸는 마음은 천도 만도 넘습니다. 불교는 불교대로 자비 베풀고, 유교는 유교대로 자비 베풀고, 천주교는 천주교대로 자비 베풀고,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대로 자비 베풀고, 뭐 자비도 수없이 종자가 많습니다. 이런데 여게는 두 마음으로 하지 말고 한 마음으로 하라 했습니다 . 그러면 누구 마음을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누구가 마음을 양보할랍니까, 자기 마음을? 그러면 자기 마음을 내세우지 안하고 자기 마음을 양보해야 되든지 다른 사람이 양보를 하든지 그래야 한 마음 될 것 아닙니까?

자, 자기 마음 양보할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자기 마음 양보할 사람? 자기 마음 양보하기 싫은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뭐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당회를 모아도, 제직회를 모아도, 교역자회를 모아도 전부 제 맘 양보 없습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어데 제 맘을 양보한다 말입니까? 꼭 제 주장을 세우고, 이러니까 몇십 명이 모이고 몇백 명이 모여도 ‘조 사람은 내 마음과 같은 사람이로구나’ 전부 제 동무 제 찾아서, 몇 시간 회의하고 나면은 개는 개하고 모이고, 소는 소하고 모이고, 닭은 닭하고 모이고, 도야지는 도야지하고 모이고, 새는 새하고 모이고, 새도 까치는 까치하고 모이고, 까마귀는 까마귀하고 모이고, 사람은 사람하고 모이고, 그리 전부 다 제편으로 제 동무 제 찾아 다 각각 모입니다. 이게 세상 아닙니까?

그래 살라 하면 고난 없어. 그래 살라 하면 고난이 없어. 한 마음으로 살라 해야 고난이 있지. 한 마음으로 살라 하면은 어짤까요? 서부교회는, 자, 모두 그라면 마음을 양보하지 안하고 전부이 다 제 맘 가지고 살라면은 그러면 우리 서부교회는 지금 여기 오늘 주일에 한 사천여 명 모였는데 그러면 사천여 명의 마음이 각각 다르니까 싸움이 몇 개나 되겠습니까? 사천 뭉텅이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교회마다 가면 이 장로는 제 부하를 만들라고서 밑에 있는 교인을 돈도 빌려 주고, 국수도 사주고, 빵도 사주고, 웃어 주기도 하고, 손을 거머쥐고 등어리를 토닥거리기도 해 주고 그거 전부 다 제 패거리, 제 패거리, 제 맘 따라오라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 오늘 교회입니다. 이래 살면 고난 없어.

그러면 서부교회는 한 마음이 되지 안하면은 다 헛일인데, 무슨 일을 하든지 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헛일인데 누구 마음을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양보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백 목사 마음 따라올랍니까? 백 목사 마음 따라올 사람 손 들어 봐요. 그러면 누구 마음 따라갈랍니까? 녜, 네 마음도 내 마음도 다 내놔야 한 마음이 되지. 한 마음이면 누구? 대통령 마음? 박사 마음? 학자 마음? 부자 마음? 다 죽은 것이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5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 돌아가서 네 마음도 내 마음도 다 내놓고 예수님의 이 한 분의 마음을 가지고 이런 거 저런 걸 해야 되지 이거 없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저 따라오라고, 제 주장할라고, 제 편 만들라고 날뛰는 그것이 세상인데 ‘나 투표해 달라. 너 해 달라.’ 이래서 전부 제 편 만들라고 하는 그것은 세상 나라의 운동이지 하늘나라의 운동은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이런데, 내가 예수의 마음을 안 따라가고 김가의 마음, 이가의 마음, 대통령 마음, ‘오늘은 주일이지마는 신사참배 하러 가야 된다’ 하니까, 갈라 하면 문제가 없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일날 신사참배 못 갑니다’ 하면은 모가지가 짤라지든지 뭐 어떤 박해를 당하든지 하겠지.

여러분들, 자기 마음을 내놓을라고 하니까 그것이 싸움이오. 누구하고 싸우요? 자기 마음하고 싸우지, 자기 마음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라 하는 것을 자기 마음 이놈을 꺾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갈라 하니까 자기하고 자기하고 싸우는 싸움이 심히 극렬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 싸워봤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따라가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될라고서 자기 마음을 부인할라고 하니까 심한 고통이 있은 그런 고통을 겪어봤습니까? 거짓말 하지 말고, 겪어본 사람이 손 안 들면 거짓말쟁이야. 천국 못 가. 자기 마음하고 자기하고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손 뻐뜩 들어봐요.

이렇츰 귀해요? 드물어요? 저 뭐꼬 저게 광안동인가 저게 있는 ○집사님은 싸워본 일 없어요? 싸워본 일 없어요? 참 맹꽁이로구만, 그라면. 아주 생저리로구만.

이것을 가리켜서 대내전이라 그랍니다, 자기 안에 있는 전쟁이라. 자기 마음대로 할라 하고 주님의 마음을 따라갈라 하고 할 때에 이 싸움이 우리 안에 있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싸워서 이긴 자라야 예수 믿는 자지 이 싸움 싸우지 안하고서 언제든지 어데든지 제 맘대로, 신사참배 해야 유리할 상바르면은 ‘야 신사참배 해라.’ 그대로 하고, 또 신사참배 안 해도 괜찮은 때에는 또 안 하는 척하고 이렇게 제 맘대로 살라 하면 싸움 없습니다. 제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복종 예수님의 마음에 복종시킬라 하면은 이 싸움의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기 위함이다. 네가 이 싸움의 고난 안 받으면 가짜다. 싸움의 고난 받지 안하면 가짜다. 이 가짜에게 기본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이 기본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저 ○○○씨는 없습니까?

그러면 이 대내전을 하지 안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 이 대내전의 싸움을, 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갈라 하니까 제 마음이 마다고서 시비를 하는데 이 싸움을 싸우지 안하고 제 맘 하자 하는 대로 이렇게 사는 사람, 뭐 팔방미인으로 이 형편당하면 거기 들어붙고 저 형편당하면 거기 들어붙고 이렇게 사는 이 사람 이거는 창기 신앙입니다.

창기 신앙을 가진 사람, 기본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왜 지금은 드는데 아까는 안 들었어? 뻐뜩 들어 봐요. ‘뭐 어린아이들 가르치는’ 어린아이들 가르치는 거 아니라! 박사! 박박사!! 박사 대가리를 가르치는 거야!! 알고 있어. 여러분들이 땅에 속했기 때문에 몰라 그런 거라. 녜, 기본구원은 있어.

이 싸움 없는 자에게 성화구원, 건설구원, 행위구원, 부활의 영광의 구원 이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하나도 안 드네.

없는 줄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없어. 없어. 우리가 뭐할라고 믿어요? 기본구원 때문에 믿습니까? 아니오. 우리 믿는 노력은 건설구원 성화구원, 부활 영광의 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영광은, 영광은 저 좋은 것입니까 남 좋은 것입니까? 물어 봅시다. 영광은 저 좋은 것이요 남 좋은 것이요? 자기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아니야, 틀렸어. 꼬마 너도 틀렸어. 영광은 자기 좋은 게 아니라 남 좋은 거라, 남 좋은 거. 영광은 남 좋게 한 것이 영광이라. 남을 좋게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니까 그거 보고 즐거워하지. 그러면 부활의 영광이 가치가 없어요 있어요? 욕심을 낼 만합니까 욕심을 낼 가치가 없습니까? 욕심을 낼 만한 가치가 있어요.

이 싸움이 있고, 또 그다음에는 ‘야, 너 내 마음 따라오너라.’ 땅에서 예수님의 마음 말고 제 맘 따라오라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제 마음 따라오라고. 그 사람 마음을 따라가면 떡도 주고 돈도 주고 오만 거 다 주요. 친절도 주고 봉사도 주고 오만 거 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하나님의 마음과 삐뚤어진 그 마음에게 내가 안 따라갈라고 하면 목이 끊기는 일도 있습니다. 죽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여게서도, 삐뚤어진 이웃 마음, 삐뚤어진 형제 마음, 삐뚤어진 자녀 마음, 삐뚤어진 남편 마음, 삐뚤어진 아내 마음 안 따라가다가 고난 받은 사람 있습니까? 안 따라갔으면 고난 받았지. 고난 안 받았으면 반드시 따라가서 창기 신앙 가졌지.

여러분들 예수를 어째 믿어요? 똑똑히 알고 믿어야 돼요.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 ‘야, 이거 내 마음 가지고 이래 하는 것 아니가? 또, 내 기분대로 하는 것 아니가? 내 취미대로 하는 것 아니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지 안하고 자기 기분으로 자기 본성으로 본능으로, 주를 위해서 하지 안하고 얼마든지 자기 마음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 가지고 하는 거는 자기 위해 하는 것은 전부 자기 마음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껍데기는 어떤 선을 하지마는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안 알아 주면 삐꿔 돌아가요.

제가 열심히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면은 그만 내가 다른 사람이 옳게 하니까 좋아 기뻐하지 안하고 그만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다 이런 권면이나 성령의 역사나 또 사랑의 위로나 자비나 긍휼이나 화목이나 이런 것을 자기가 행하니까 이것은 다 온전한 일이다, 깨끗한 일이다 이럴 게 아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가지고 하나, 네 마음 가지고 하나? 이 한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에 피동돼 가지고 하나 예수님이야 어쨌든지 네 기분대로, 네 성미대로 네가 하나? 요 싸움을 싸우지 안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다 가짜요, 가짜.

제딴에는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 하니까 하기 쉽소. 왜? 자기 기분에도 맞고 또 자기 생각대로 하니까 일이 잘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입니다. 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 속히 됩니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집이 속히 됩니까? 풀로 짓는 집이 속히 돼. 크기는? 그 집이 더 크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할라고 하면 여게 걸리니까 또 그것도 못 하고, 더 하지도 못 하고, 덜 하지도 못하고, 기분나게 하지도 못하고 또 괴로와도 안 하지도 못 하고, 요라니까 하기가 힘듭니다.

일방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은 열심이 있지마는 전면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는 데는 요래 할라 하니 요게 걸리고, 조래 할라 하니까 조게 걸리고, 또 요래만 하면 요거 없으면 안 되고, 조거 빠지면 안 되고, 이라니까 그 가는 것이 힘이 들고 속도가 빠르지를 못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이래 하면서 ‘야 이거, 이거는 누구의 마음하고 같이 하노? 누구의 마음이고? 이거는 내 마음으로 하는 것이가 누구 마음 따라가는 것이가?’ 이래 하다가서 ‘이거, 이것은 장로님의 마음을 따라가나, 백 목사님의 마음을 따라가나, 정말로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가며 하나?’ 요것을 조사해 보라 말 아니오. “마음을 같이 하여” 그 말은 조사해 보라 말입니다. 이래 신앙 생활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이래 말하면 사람들이 안 모이요, 듣기 싫다고. ‘어짜든지 자비만 하면 그거는 다 천국 간다. 긍휼만 하면 천국 간다.’ 자비와 긍휼에도 도둑놈이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적그리스도, 거짓 그리스도가 그와같이 하는 것도 있다.

이라니까, 저 잘난 재미로 마구 돈을 들여 가지고서 이와같이 야단지기고 교회 일하던 자가 그걸 구별하니까 그만 삐꿔서 ‘목사 저거 쫓아내야 될세.’ 그래 가지고 제 비위에 맞추면 아주 교회를 저 혼자 섬기는 것같이 야단지기지마는 저의 잘못된 거짓부리를 지적하면은 그만 탈이 납니다. 그러니까 싸움 없는 목사 있고 싸움 있는 목사 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같은 사랑” 같은 사랑이라 하니까 두 사랑 가지고 해야 된다 말입니까 한 사랑 가지고 해야 된다 말입니까? 같은 사랑이니까 그 사랑의 종류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요거 가지고 해야 돼.

사랑도 정욕 사랑, 동류 사랑, 혈통 사랑, 별별 게 많이 있는데 열심히 한다 해도 정욕에만 걸려도 당장 야단입니다. 내가 보니까 마구 죽인다고 살린다고 하더니마는 하루밤 자고 나더니마는 막 뭐 그것도 아무것도 없어. 그놈의 정욕에 만족하고 나니까 그만 그뭐 싸움과 미움이 다 없어져 버렸어. 고거 다 고기덩어리에 속해 사는 것이지 다 썩을 것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예수님의 한 뜻으로 다 집합해야 합니다.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이제 밑에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마음이라니 누구 마음을 품어? “한 마음을 품어” ‘한결같이, 정월 초하루날 먹은 마음이면 섣달 그믐날까지 한 마음으로’ 한 마음, 평생 한 마음이 돼도 지옥 갈 마음 있습니다. 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 하나를 말해서 한 마음 말하는거요.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다툼은 뉘하고 다툼입니까? 인간끼리 다 제것 할라고 다투고 있지. 제것 할라고 다투는 것.

그러면, “다툼으로 하지 말아라” 다툼으로 하지 말면, 다툼으로 하지 말면 예수님과 하나되어 할라 하니까 예수님과 하나되지 말고 사람 저하고 하나되어 하라고 이래 할 때에 그때에 예수님과 하나되는, 예수님과 하나된 것으로 할라 하니까 예수님과 하나 안 된 것들이 저와 하나되자고 자꾸 이래 할 때에, 저와 하나되자고 이래 할 때에,

“다툼으로 하지 마라” 그 다툼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그 다툼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우리 ○○○장로님? 그 다툼은 있어야 돼, 이 다툼으로 하지 말라 했는데? “아무 일이든지 다툼으로 하지 말아라” 이라는데.

그 다툼은 있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다툼으로 하지 말라 하는 것 보니까 네 마음 내 마음, 인간끼리 제것 만드는 그런 것이 없이 전부 예수님의 한 마음으로 하니까 다툼이 있을 게 뭐 있습니까?

교회서 무슨 일을 해도, 다툼으로 하지 말라 말은 네 마음으로도 하지 말고, 내 마음으로도 하지 말고, 네것으로도 하지 말고, 내것으로도 하지 말고 예수님의 것으로 하면은, 예수님 하나로 하면은 다툼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 ○○○권사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 되나 안 되나 자꾸 교회서 뭐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아도 요거 안 살피고 하면 스스로 속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교회서 뭐 할라 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을 못 하구로 해. 못 하구로 하면은 ‘왜 저래 못 하구로 할꼬?’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자꾸 열심히 저래 해서 목사보다 올라갈 상바르니까 시기해서 못 하구로 하는구만 .’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 한 마음으로 하지 안하는 그런 것은 나중에 가서 그것을 키우면 교회를 삼키고 맙니다.

교회를 섬기되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를 영광받기 위해서, 자기를 알아 주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것은 다 거짓 그리스도 적기독이 하는 것입니다, 적기독이. 적기독은 예수님의 원수라고 했습니까 하나라고 했습니까? 적이라, 원수.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허영. 허영은 요거 무엇입니까? 허영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 예수님에게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하는 거 그게 허영입니까, 어떤 사람에게, 자기에게, 예수님에게 돌리지 않는 영광, 또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영광, 예수님에게 돌리지 안한 영광, 영화 그것이 다 허영입니다. 알겠습니까?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영광, 주님에게 영광이 되는 그 영광 이것은 허영이 아니고 전부 인간을 위해서 인간 모가치로 하는 그건 전부 다 허영입니다.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이거 참 어려운데.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 “겸손한 마음으로” 뭐 시간 많이 갔으니까 얼른 설교 마치면 싶으겠는데 이 “겸손한 마음으로” 요 겸손한 마음 요거 누가 요 하나만 알아도 그만 마치겠는데. 겸손한 마음.

겸손한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허리를 굽신굽신 굽히는 것이 겸손한 마음입니까? 겸손한 마음은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정상적인 마음. 정상의 마음.

따라합시다.

겸손한 마음은! 정상의 마음! 겸손한 마음은! 정상의 마음!

이것도 이래 해석해 놨으면 아마 바깥에 사람들이 이 듣고 난 다음에는 ‘그거 참 별소리 다 하네. 겸손한 마음이 무슨 정상의 마음이라? 굽신거리는 게 겸손한 마음이지.’ 정상의 마음이라 말은, 우리는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지음을 받은 것이 배암에게 꼬여 가지고서 멸망 가운데 깊이 빠진 자입니다. 전적 부패해서 옳은 것이 하나도 없고 완전히 영원히 죽었던 자입니다.

이랬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써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서 구원해 주셨으니 이 구원을 받은 자의 정상인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것이 정상의 마음이오. 그게 겸손한 마음이라.

‘나는 주홍같고 진홍같은 붉은 죄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구출하셨다. 나는 마귀에게 꼬임받은 자이다. 내 행동은 전부 억만의 죄악으로 행동했던 자이다.

영원히 멸망한 자인데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면 그 사람이 큰소리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큰소리 못 해요.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 있어요? 못 해요.

죄인과 악인 보면 동정이 가요 멸시를 해요?

이래서, 이 구속받은 자의 정상인 그 마음을 가리켜서 겸손한 마음이라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요 해석이 딱 발라요. 세상 학자들이 다 반대해도 이기요.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요게 정상의 마음이라. 남을 낫게 여긴다 말은 자기는, 남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자기는 남을 위해야 될 존재라. 자기는 남을 위해야 될 자고, 자기는 남을 섬겨야 될 자고,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이용을 당해야 될 자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우대하고, 자기는 다른 사람을 우대하고, 섬기고, 높이고, 위하고, 그에게 복종하고 이용당할 존재라. 자기와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마음으로 평가할 때에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자라, 존귀한 자라,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살라고 했어.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우대하는 요것이 겸손한 마음인데 요 마음은 우리 구속받은 자의 정상인 마음이라 그말이오, 정상인 마음.

“낫게 여기고” 이래서 우리는 아예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겨서 ‘나는 저 사람을 위할 자다, 섬길 자다, 나는 저 사람에 종노릇 할 자다. 나는 저 사람을 위할 자다, 섬길 자다, 나는 저 사람을 높일 자다, 북돋을 자다, 나는 저 사람에게 이용을 당할 자이다.’ 요것이 정상의 마음입니다.

이웃이 나를 악으로 이용할라 하면 그거야 죽어도 안 되지. 옳게 이용할라 하면 나는 죽어도 이용을 당해야지. 바르게 이용할라면 이용을 당해야지. 내 생명도 바르게 이용할라 하면 나는 생명을 바쳐야지. 알겠습니까?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자기를 살필 뿐 아니라, 자기 의무와 책임과 본분과 위치와 소속을 똑똑히 살펴볼 뿐 아니라, 자기를 살펴보고, 자기가 어떤 자인지 살펴보고, 자기가 잘한 장점은 필요가 없고, 그거는 잘됐으면 상받을 것이고, 자기가 혹 잘못한 단점이 있는가 자기의 단점을 “돌아볼 뿐 아니라” 자기의 단점을 살필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일을 못 했다, 줄 것 못 줬다, 희생할 것 못 했다, 봉사할 것 못 했다, 섬길 것 내가 섬기지 못했다, 내가 종노릇해야 되는데 종노릇하지 못했다.’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다른 사람의 일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의무와 책임으로 해야 될 그 일을 하지 못한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한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한 그거는 자기 일 돌아보는 거고, 또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한 거 이것을 돌아보는 것,

그거는 모든 단점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살피고 장점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장점만 돌아보라, 살펴봐라. 그 사람은 저 사람에게 어떻게 했는데, 그 사람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너는 그 사람에게 하지 못한 그것을 찾아라 하는 것입니다.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요 나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지요? 나는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성령입니까? 이 성경은 누가 기록했지요? 성경을 누가 기록했습니까? “나의 기쁨을” 이 성경 기록한 그이의 기쁨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 나의 기쁨은 사도 바울을 말합니까 성령을 말합니까? 성령을 말한다고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성령을 말해. 사도 바울 말하는 것 아닙니다.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성령님을 기쁘게, 성령님의 기쁨이 충만케 하라 하는 말입니다.

이런데, 오늘 내가 오전 설교한 목적은 이제, 지금까지 모두 다 서론을 하고 본론은 마지막 조금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오래는 아니고 여러 날 전부터 얼마 전부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서 작정한 것은 오늘 주일은 이 설교를 하고ㅡ온전히 다 못 했는데 오후에 또 계속하겠습니다ㅡ하고, 내일부터 엿새 동안 다음 주간은, 다음 주간은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다음 주간은 무엇을 하는 주간으로 삼을까?

다음 주간은 다른 것 다 내비 두고 기도도 그것만 하고, 행동도 그것만 하고, 연구도 그것만 하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장점, 다른 사람의 좋은 점만 나는 연구해서 기록할 것, 다른 사람의 좋은 점,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단점이 천 가지 만 가지 있어도 그거는 나 할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장점만 이제는 찾아 가지고서 낱낱이 기록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잘못된 점, 못쓸 점, 나쁜 점 그것만 찾아 가지고서 기록하는 것을 다음 주간은 다른 사람의 장점과 자기의 단점을 찾아서 요 고치는 주간으로 삼자 요렇게 제가 생각을 하고 많이 기도하는 가운데서 마땅히 이것이 해야 될 일이라 하는 것을 깨닫고 작정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께 대한 도리만 이래 가르치다 보니까 그만 이 인인 관계에 인간성이 없어져 버렸어. 인간성이 없어져서 아주 못쓸, 하나님만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지 안하다 보니까 하나님 사랑도 헛것, 인간 사랑도 헛것, 다 헛일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사랑하는 것 좋은 것 배워 놨으니까 인간 사랑하는 요것을 우리가 해서 채우면 완전케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미워해라” 다 미워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을 사랑해라” 이제 인본만 오늘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인본을 다 제해버리고 ‘신본만 해라’ 이랬는데 신본 했으니까 이제 인본을 겸해서 해야 되기 때문에 요것을 말합니다.

이래서, 오는 주간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단점은 얼마가 있어도 그 단점이 내게 직접 어떤 관련이 있어도, 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단점은 보지 말고 장점만 찾아서 기록할 것.

그러면 장점만 찾아서 기록하면은 장점 있는 사람에게 내가, 장점 있는 사람을 본받고 장점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장점 있는 사람을 따라갈까? 이것은 금물입니다. 알겠습니까?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높이지도 마십시오.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따라가지도 마십시오. 다만 다른 사람에게서 장점을 발견해 가지고 내게도 그와같은 장점이 있도록 노력하고 장점이 있게 해 달라고 주님에게 간구할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러면 남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은 그로써 나도 그와 같은 장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발견하고, 그와 같은 장점을 주님에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 발견하고, 장점 있는 사람을 높이고 따라가면 마귀 됩니다. 알겠습니까? 아무리 장점이 있어도 따라가고 높이기 위해서 장점을 가진 자는 그자는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맙니다.

장점 보고 나도 그와 같은 장점을 마련하고, 힘쓰고, 주님에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또 자기에게는 장점은 보지 말고 단점만 보고, 그 단점을 힘써 고쳐 회개하고, 그 단점을 주님에게 고쳐 달라고 기도하고, 요래 하면 한 주간 동안에, 한 주간 동안에 자기에게 있는 단점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 고쳐 주시는 주간으로 정해 줬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이 아니고 주님이 나에게 기도하는 가운데서 나에게 알려 줘서 했습니다.

오늘까지 내가 설교할 때에 내 생각으로 설교해 보지 안했고 언제든지 주님이 요 설교해라 할 때 했고 또 무엇이든지 주장하라 할 때 했지 내가 한 것 없어.

그러기 때문에 나는 다른 학자에게 배운 게 없어. 배운 게 없으나 주님에게 직접 배워서 내가 알았습니다.

이것도 교만한 말이라 내게는 손해요. 내게는 손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욕 얻어먹을 소리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합니다. 왜? ‘남의 장점만 자기의 단점만 보고 남의 장점이 내게 완성되도록, 자기에게 있는 단점을 완전히 회개해서 치료되도록 다음 주간을 이렇게 하자.’ 하는 이 말을 ‘인간의 말로 저와같이 한다. 그거야 뭐 요번 주간에 해도 되고 다음 주간에 해도 되지.’ 이렇게 말할까 해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다음 주간을 이 주간으로 정해 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거 주님이 시키시는 기회인 것을 알고, 남의 장점 보고 나도 저와 같은 장점 가진 자가 되도록 하자 힘써 장점을 마련하고, 하나님께 장점이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자기에게 있는 단점을 발견해서 힘써 고치도록 노력하고, 주님에게 고쳐 달라고 기도하고,

요렇게 하면 다음 주간 한 주간을 지내고 난 다음에는 우리 사람이 변해서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는 장점만 보는 사람으로, 자기에게 대해서는 단점만 살피는 사람으로 요렇게 되면 손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단점 있는 것은 내가 그것은 따라가지 안하면 손해 없습니다 . 따라가지 안하면 손해 없어. 장점만 보는 요 주의 요 평생으로 살면 자기는 유익되지 손해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주일에 근본적으로 나는 이제 사람이 바꾸어져서 다른 사람에게서는 장점만 보고 내게 대해서는 단점만 보고, 장점 봐서 뭐할라고? 나도 그와같이 장점 마련할라고 , 주님에게 장점을 마련해 달라고. 단점 봐서 뭐할라고? 내 힘써 고칠라고, 주님에게 고쳐 달라고.

이래서 이제는 요번 주간에 연습해서, 이야기 하다가도 남의 단점이 펄썩 보일 때는 ‘주여, 내가 범죄했습니다, 내가 볼 게 아닌데.’ 장점만 보는 사람으로 일주일 동안에 만들고 자기의 단점만 보고 고치는 사람으로 만들고, 일주간 동안에 요것 만들면 큰 수입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라고 또 오후에 말할 건데 오전에 말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주일날 이제 장로님들 전부 앞에 내세워 가지고서 우리가 장로님을 어떻게 장로님으로 모셔야 되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님들 모두 다음 주일에는 모두 구질구질하게 해 가지고 오지 말고 옷도 좀 깨끗하게 해 가지고 와요. 여기 전부 장로님들 다 단 위에 다 내세울 것입니다. 이러면 그때 부끄러운 것 있으면 아예 고치고.

또 권사님들에도 내세우고, 또 집사님들은 많으니까 올해 당선된 집사님들도 그 자리 다 세우고, 또 구역장들도 세우고, 또 이 부장들도 세우고, 총무도 세우고, 반사들도 세우고 다 이래서 다음 주일에는 우리가 절을 많이 할 것입니다.

절을 요만치 할 절도 있고 요만치 할 절도 있고, 이래서 이제 다음 주일에는 여러분들이 전부 ‘차려!’ 해 가지고서 `백 목사에게 절!’ 할 때 절해야 될 겁니다, 알겠습니까? 이제 절도 인제 가르쳐. 절을 가르치고, 예의도 좀 가르치고 이래서 이거 좀 가르쳐야 되겠다 이래서 다음 주일에는 그거 가르칠 것입니다.

왜? 다음 주일 지내고 난 다음에는, 나는 그걸 용기 있게 못 했어요, 이제까지.

예배 보고 난 다음에 교인들끼리 서로 인사하는 것도 이거 하라 해도 내가 주지가 없어서 간이 작아서 이걸 못 했어. 또 뭐 인사하라고 이래 하면 좀 마음에 좀 열적스럽고 이래서 그걸 못 했더라 그말이오.

인제 다음 주일 지내고 난 다음에는 딱 예배 마치면 ‘돌아섯!.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돌아!’ 이래 가지고서 서로 마주 보고 ‘경례!’ 이래는 안 하고 그만 `절!' 이랄 겁니다. `절!' 이라면 다 절하고 그래 이다음에는 길가 가도 우리 교인들이 이래 알 수 있도록 이제 다음 주일부터 인제 그걸 실행을 할 겁니다.

이래서, 우리는 좋은 거 먼저 하고 이거는 못 해서 이걸 지금 해야 되겠는데, 저 ○○ 회사 뭐 사장노릇, ○○ 회사를 만든 사람이야. 지금 ○○교회에 있는 ○○○목사님인데 그 ○○○목사님은 나를 만날 때에 두 번 만나든지 세 번 만나든지 네 번 만나든지 언제든지 이래 악수하는 그런 법 없습니다. 딱 만나면 다리를 둘 딱 요래 모아 가지고 탁 차려 탁 요래 가지고서 요래 가지고 아주 경례합니다.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

그런데 여기 어떤 목사들은 버르징이가 없어. 이거 손을 악수하는 거는 위에 사람이 밑에 사람에게 악수하면 손을 내면 악수 받아 주는 것인데 이 다리를 비틀고 이래 가지고 이래, 아주 버르장이 없어. 우리 진영에는 아주 버르장이가 없어 인간 버르장이가 없기 때문에 이걸 이제 고쳐야 되지 하나님께 대해서는 어북 버르장이가 있습니다. 있는데 이제 사람에게 대해서 버르장이 없는 이것을 고칠 것입니다.

이러니까, 다음 주간에는 일주간 내내 연습을 다른 것 하지 말고 기도도 이거 하고 여게만 전력을 기울이요. 다른 사람의 장점만 보는 사람이 되기를 연습하고 자기에게는 단점만 보는 사람이 되기를 연습하고, 다른 사람 장점 보고 할 일은 뭐인가? 나도 그와 같은 장점이 있도록 노력해서 마련하고, 하나님께 그 장점 있는 사람 되도록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자기의 단점 보고 고치도록 노력하고 그고쳐 달라고 주님에게 기도하고, 다른 사람 장점 보고는 안 해야 될 일이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또 모르네. 손가락으로? 꼬마 조거는 아는데 꼬마 조거는 딱 아는데 어른들은 몰라. 참 불쌍해.

자, 다른 사람의 장점 보고 해서는 안 되는 거 몇 가지? ○○○권사님, 손가락으로? 오늘 우사하네. 손가락으로, 해 봐요, 손가락으로. 몇 가지? 두 가지 했어. 안 하면 내가 오늘 권사님 일으켜 세워 가지고 벌을 시킬라 했는데 옳게 답을 했어, 두 가지.

내가 그 사람 따르지 말 것. 그 사람 따르면 그 사람 넘어져요. 또 그 사람 높이지 말 것. 높이면 그 사람 망해요. 나중에 그래 놓으면, 왜 따르지 말라 해요? 우리는 주님만 따라야 되는데 그 사람 따르다 보면 나중에 인본 돼요. 왜? 이 세상에서는 장점 하는 사람들이 사람에게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그거 하고 있거든.

이러니까 옳은 성도는 자기의 장점을 못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못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다른 사람에게 사람 같잖게 보이는 그걸 합니다 알겠습니까? 옷도 구질구질 입고 얄궂게 해서 막 다른 사람이 지나치게 존대할까 싶어서. 이게 성경이라. 바울이 나를 지나치게 존귀히 여길까 해서 자기를 그렇게 수치스러운 사람으로 만든다 이랬어.

또, 자기의 단점을 발견해 가지고서 자기의 해서는 안 되는 금물, 금물이 몇 가지입니까? 낙망하지 말아야 됩니다. 자기 단점 보고 낙망하지 말아야 돼요. 또 하나는 뭘로 정할까요? 게을하지 말아야 돼요. 요거 두 가지 안 해야 돼. 게을 말고 낙망 말고 힘써 고쳐 만들고 하나님에게 고쳐 달라고 기도해.

그라면 남의 장점 보고 할 일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남의 장점 보고 할 일은 몇 가지입니까? 두 가지. 자기의 단점 보고 해서는 안 될 것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저게도 손가락으로, 저 뒤에도? 또 자기의 단점 보고 해야 될 일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녜, 됐어. 오늘 큰 거 배웠어요.

이제 다음 주간은 요것만 전심 전력 기울여서 해서 첫째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둘째로는 단점 없애고 장점으로 구비하는 그것 만들고, 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음 주간은 그렇게 하기로 우리가 약속하는 표로 손 한번 들어서 표시합시다. 녜, 이제 이거 한번 합시다. 하나님이 자꾸 복을 주시는 모양이라. 이거 하면 또 당신이 큰 복 주시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 이렇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주님이 원대로 우리를 자유로 양육하시고 양육을 또 자유로 받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고요한 때를 주셔서 앞으로 정권이 어찌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자유롭게 주를 섬겨서 깨끗한 성도들의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여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권과 정치를 세워 주셔서 끝까지 주님에게 축복받고 영광 돌리는 우리 교회와 민족과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교훈해 주셨사오니 다음 주간에 실행하려는 이 생활, 남의 장점만 자기의 단점만 보아 네 가지 금할 것을 금하고 네 가지 행할 것을 행하여 다음 한 주간을 지나고 난 다음에는 사람도 행위도 완전히 변화하여 주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어코라도 실천하여 열매 맺게 하여 주옵소서.

또 많은 형제를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든든히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주사 모든 것을 주님에게 의논하고 주님에게 구하여 얻어 풍족하고 평안하게 세상을 승리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귀의 시험을 다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더욱이 뜨겁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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