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한 안식일

 

1986. 11. 5. 새벽(수)

 

본문:히브리서 4장 1절-2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러면 「남아 있을지라도」 하니까 남아 있는 것이 의문 중에 있는 거와 같은 그런 생각을 가지기 쉽겠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 「다시 하루를 정하여」이거 다 성령이 말씀하신 것인데하면 그 의문 중에 있는 거는 아니고 확실한데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하는 그말은 구약에 속한 사람들이 안식을 바로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 구원에 이르지 못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거게다 역점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아무리 우리에게 그 안식할 날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못 미치면 소용 없다 그말이오. 그말은 「남아 있을지라도」 하는 그것은 그 밑에 말과 연결하면 「남아 있다 할지라도」 암만 남아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 도달하는 게 문제다 그말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 말인 것입니다.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러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도달 못 한다는, 가다가 도달 못 한다는 그런 것을 나타낸 말인데 그러면 어데까지 가다가 도달 못 하는가? 그 다음에 “믿음과 화합지 아니함이라” 또 “순종치 아니함이라” 하는 말을 여러번 말씀을 했습니다, 성경에.

그러면, 미치지 못한다 말은 순종하는데 순종이 도달해야 될 위치가 있는데 그 위치까지 거게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시작만 하고 중간에서 머물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그 지경까지 가야 하는데 그 지경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그만 중단되고 말까 두려워한다, 말까 두렵다.

중간에서 중단하고 끝까지 영원한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거게까지 도달이 돼서 ‘너는 안식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는 합격이 돼야 될 터인데, 시험은 치르기는 치렀는데 합격 안 된 거와 마찬가지로 안식을 지금 들어갈 일을 하고 있기는 있는데 안식에 들어갈 그 합격,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거게까지 순종으로 나아가지를 못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은 시작은 했다 말입니다.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러면, 미치지 못할 자가 있는가 함이라 하면은 이거는 시작은 하기는 했는데 완료가 안 됐다, 완성이 안 됐다, 합격이 안 됐다.

그러면 시작은 했는데 합격이 안 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한다. 거게까지, 안식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거게까지 들어가야 될 터인데 거게까지 도달하지 못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안식에 들어가는 준비를 시작했다 말입니까 안 했다 말입니까, 여게 보면은?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했으니까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이 준비를 시작을 했다는 말인지 안 했다는 말인지? 요런 거 왜? 하나씩 똑똑히 따져야 됩니다. 이게 나중에 죽을 지경 될 때에는 나서지 안한다 그거요. 지금은 ‘그렇다’ 할지라도 생명을 내놔야 될 그런 경우가 되면은 자기가 평소에 해석한 거와 다르다 그말이오.

평소에는 잘 믿는 방향으로 해석을 할라고 애를 쓰고 환난이 오면은 환난을 피하는 방향으로 해석을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람이라 그말이오. 이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말을 못 알아들으면 소용 없어.

그러기 때문에, 확실한 믿음,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때에 내나 사람 보기에 외부에 과학적으로는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과학적으로는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없는데, 다만 그 믿음이 틀렸지.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가 믿음이 없어지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니까 거게 나타나는 능력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이랬는데, 우리가 뭣이든지 깨닫는 그것이 환난이 올수록 자꾸 환난을 피해서 믿을 수 있는 그 길을 찾습니다. 평소에는 환난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환난이 있든지 없든지 어짜든지 잘 믿고 옳고 바른 길을 찾을라고 애를 씁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길을 찾을라고 애를 쓰고, 왜? 평소에는 잘 믿는 길에는 잘 믿으면 복있다 하는 복에 대한 소망만 있지마는 잘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피해가는 게 없다 말이오.

잘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손해가는 게 없으니까 얼마든지 잘 믿을라고만, 왜? 잘 믿으면 잘 믿음으로써의 복받는 것만 평소에는 있지 잘 믿을라 하는 데에 희생이 없고 박해가 없기 때문에 어짜든지 잘 믿는 그 길을 택할라고 애를 쓰지마는 이제 환난이 떡 닥치면, 닥치면, 잘 믿으면 복있다 하는 그 소망은 멀고 현재에 잘 믿으면 박해 손해간다 하는 그거는 앞에 임박해 왔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환난 닥칠 때에는 어느 길을 그 사람이 택할라고 애를 쓰겠습니까? 평소와 아주 달라져 버립니다. 평소에는 소망은 둥그러니 확실하고 현재에는 손해는 없고, 외나 승리를 이룰 수 있는 밤중, 절정에 도달할 때에는 앞에 보이는 소망은 흐미하고 현재에 당장 손해는 자기 앞에 눈앞에 닥치고, 이러니까 그 사람이 택하기를 쉬운 길을 택하겠습니까, 평소에는 아주 어려운 길, 복있는 그 어려운 길을 택했는데 막상 어려움이 턱 닥치고 나니까 그때는 그 길이 아닌 좀 쉽고 현재에 손해 안 닥치는, 현재 손해 닥치는 그것이 앞으로 소망 그것보다도 더 강하게 역점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강하게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 손해를 안 당할라고 하는 그 점에 사람이 필연적으로 주력하기 쉽다 그말이오.

그 점에 주력하게 되니까 그 사람이 어려움의 길을 걸어갈라 하겠습니까 현재에 손해 안 닥치는 그 길을 걸어갈라 하겠습니까? 현재에 손해 닥치지 안하는 그 길을 걸어갈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해석이 평소에 해석과 아주 환난 때에 해석과 해석이 달라집니다. 또 소원도 평소에 소원과 환난 때에 소원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사람이 달라져 버립니다. 진리는 변하지 안하지마는 사람은 달라집니다, 현실이나 환경을 닥친 데 따라서.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리를 믿는 것은 평소에는 잘 믿기 쉽고 환난 때에는 잘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믿는 그 길이 이리도 저리도 변동할 수 없는 확고한 길, ‘이거는 이리도 저리도 변동 못 한다. 죽어도 이 길뿐이지 뭐뭐 내가 그라면 안 죽을라 하면 구원은 내놓는 거고 환하게 내놓는 거고 이렇지.’ 이거 사이비하지 안하고, 이거는 ‘죽어도 이 길 가면 살고 이 길 안 가면 죽는다. 이 길 가면 구원 있고 이 길 안 가면 구원 없다.’ 하는 요 확고한, 요 변동성 없는 것을, 변동성 없는 그 하나만 알고 있어야 되지, 그 하나만 알고 있어야 되지, 그럴 때에 평소에는 그 사이비한 쉬운 길 있고 어려운 길 있고 둘이 이래 있으면은 사람들은 평소에는 다 어려운 길을 찬성합니다. 어려운 길을 찬성하지마는 환난이 오면은 어려운 길 이거 말고 좀 쉬운 길로 갈 수 있지 않는가 그것을 찾을라고 이렇게 애를 쓰기 때문에 그때에는 사람이 어려운 길 이 길 한 길뿐이라는 사람과 이 길도 있고 이 길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만 이거는 천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평소에는, 어려운 길 쉬운 길이 있으면은 평소에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려운 길을 찾겠습니까 쉬운 길을 찾겠습니까? 평소에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어렵게 가는 길 있고 쉽게 가는 길 있고 두 길이 있으면은 평소에는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길을 택하겠습니까 쉬운 길을 택하겠습니까? 평소에 쉬운 길을 택하겠다 하는, 모든 사람들은 쉬운 길을 택하겠다 그렇게 깨달아지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없고, 그러면 평소에는 모두가 다 어려운 길을 택하겠다 그렇게 생각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여반에는 모르고, 이라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버물거려 여긴다 말이오.

어제 ○○○목사님이 나한테 거게 대해서 걱정이 돼 가지고 묻는데 그 대단히 고마운 일이라 내가 좀 잠시 좀 얘기를 해 줬었습니다. 했는데, 이래 들으면 뭐 이게 이런가 저런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상관이 없다. 이걸 모르니까, 실지로 자기가 생각해 보고 실지로 행해 보면 아는 거라.

예수 믿는 길이 쉬운 길 있고 어려운 길 있으면은 평소에는 사람들이 다 어려운 길을 택합니다. 왜? 보니까 쉬운 길 있고 어려운 길 있는데, 어려운 길은 그것이 백점짜리이고, 보니까. 소망에 대해서 백점짜리이고 쉬운 길은 한 팔십점짜리입니다. 이러니까, 모두 다 평소에는 다 백점짜리 그걸 택하지 팔십점짜리는 안 택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탁 오니까 ‘아이구, 백점짜리는 어렵고 이라니까 이제 팔십점짜리로, 되기는 되니까 팔십점짜리 택하자.’ 하고서 환난 때는 팔십점짜리를 택하고 평소에는 백점짜리를 택하고 하는 것이 인생이라 그말이오.

누구든지 다 그러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평소에 백점짜리로 가는 길과 팔십점짜리로 가는 길과 두 길이 있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고 두 길을 인정하고 있으면은 그 사람은 환난 때에 ‘어라, 최고의 구원을 얻지 못할지라도 쉬운 길 팔십점짜리를 택하자.’ 하고서 택하지 안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길을 말하는데 ‘이거는 팔십점짜리 이거는 백점짜리인데 이거는 팔십점짜리 이거는 아주 영점이다. 이거는 공이다. 이거는 하나도 안 되는 것이고 이 구원 얻는 데는 이거 백점짜리 하는 요거 하나밖에는 없다.’ 요거 하나밖에는 없다는 것을 평소에 확정을 짓고자기가 자꾸 깨달아 가지고그냥 확정을 짓는 게 아니라 우리가 따져 나가면 안다 말이오. 성경 가지고 자꾸 따지고 따지고 따지면은 ‘이것은 속이는 말 이건 육백육십육이지 이거는 구원에 도달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안된 말이다.’ ‘그러면 너는 이 두 길 가운데 어느 길 갈래?’ `어데 두 길이 있느냐?' `팔십점짜리도 있고 백점짜리도 있고 두 길이 있는데 하나는 좀 구원에 좋은 구원 얻고 하나는 좀 못한 구원 얻고, 하나는 준비하기가 좀 힘들고 하나는 준비하기가 좀 쉽고 그런 것 아니냐?’ 그렇게, 이 팔십점 백점 두 길이 있는데 팔십점짜리는 구원 준비 하기가 쉽고 좀 받는 구원이 좀 빈약하고 백점짜리는 구원 준비 하기가 힘이 드는데 힘이 드는 것만치 받는 구원은 크고 더 영광이 있다 이래 두 길로 이렇게 여기면 그 사람이, 이 두 길로 여기는 사람이 환난이 닥쳤을 때에 그 사람은 어느 길을 가겠습니까? 팔십점짜리 길을 가겠소 백점짜리 길을 가겠소? 어떤 길을 가겠소? ○○○목사님? 환난 때에 어느 길을 갈까? 저 ○○○목사님? 예. 평소에는 백점짜리 가겠고, 또? 녜.

자, 어느 것이 맞습니까? 발표는 못 해도 평가는 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평소에는 백점짜리 가고 환난 때는 팔십점짜리 간다 요렇게 대답하는 요것이,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게 맞습니다. 그게 맞소.

요걸 모르고 이렇게 구별 못 하는 사람은 신앙 생활이 덩더꿍이입니다.

그러기에, 설교를 들어보면 ‘저것은’ 자, 거룩이라 하는 거룩이 도달한 곳은 한 군데입니까 두 군데입니까? 거룩의 종결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요. 진실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입니다. 저 사람은 하나인 그것을 잡고서 단일 신앙으로 믿고 있느냐 둘 셋을 믿고 있느냐? 설교 들어보면 압니다.

자기 가는 길이 두 길 세 길 있는데, 자꾸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기는 몇 길이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다. 그러면 우리 구원 얻는 그 길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하나 그 외의 것은 인본주의로서 사람들이 만들었고 마귀가 만들어서 유혹 줘 가지고 만든 것이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구원이라 하는 요리 좀 백점짜리로 걸어가도 되고 팔십점짜리로 걸어가도 되는 게 아니고 백점짜리 하나뿐입니다. 하나뿐인데 다만 구원에 차이가 있는 것은 요 사람은 요 현실에서 언제든지 구원된 것은 평생에 한 현실만 믿음을 지켰지 다른 현실은 믿음을 지키지 못했고 이 사람은 백 현실을 지켰고 이 사람은 천 현실을 지켰고 이 사람은 한 현실만 지킨 거기에서 구원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구원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이 사람은 한 현실에서 백점짜리 지켰고 팔십점짜리 지켰다 하는 그거는 아닙니다.

우리 구원이라 하는 거는 언제든지, 세포적으로 말하면, 분자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언제든지 온전한 행위라야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고 또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 기울인 것이라야 되어지는 것이지 팔십프로 구십프로만 기울여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요것을, 그러기 때문에, 두 가지로 생각하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틀림없이 요 사람은 다 실패할 사람이라 확정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평소에 백점짜리 어려운, 어려움이 있는 힘드는 그 길을 다 평소에는 택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실패하겠습니까? 자기가 길이 둘이면 우리 생의 본능이 있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우리 사람에게는 살고 싶어 하는 생의 애착과 생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 환난이 오면은 생의 본능이 들어서, 가기는 가는데 ‘좀 일등 구원이 아니라 이등 구원 얻어도 요거는 이등 구원 얻는 것이니까, 구원은 구원인데 하늘나라 제일 좋은 자리 갈 게 아니라 요거는 하늘나라에 좀 이등 구원이 될지라도 일등 구원은 너무 힘들고 이라니까 이등 구원 요 좀 쉬운 길로 가 가지고 이등 구원을 얻는 게, 구원을 얻어야 되지 않겠느냐?’ 요래 가지고 환난이 오면은, 환난이 오면은 다 쉬운 길을 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좀 전에 말하기를 평소에는, 평소에는 소망이 강하게 보여지고, 평소에는 소망이 강하게 보여지고 현실은 무시되고, 자기가 현재에 환난을 닥치면 환난 때에는, 환난 때는 소망이 강해집니까 현재 손해보는 그 손해가 자기에게 강해집니까? 뭐이 강해집니까? 세상으로만 살았고, 세상으로만 살았고 신앙으로 살지 안했기 때문에 여게 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자기가 세상살이라도 정신 차려서 되는 대로 아무나따나 살다가 보니까, 이제 되는 대로 살다 보니까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있는 사람이고, 세상살이라도 요것을 따져 가지고 요렇게 사는 사람은, 따져 가지고 현재에 따져서 결정지운 것과 그것이 지나가서 과거가 되어지고 난 다음에 회고, 돌아보면서 이제 그걸 한번 비판해 보는 것과, 현재에는 미래를 바라보는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요것을 일관해 가지고 하나로 해 가지고 따져보는 사람은 세상 사람이라도 그거 다 그걸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막 사는 것이오.

이거 또 그런데, 여기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거는 시작은 하기는 했는데 이 사람은 합격되는 데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그래도 문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그 사람은 암만 공부를 하기는 해서 시험을 치르기는 치렀지마는 입학에 도달하지 못했다, 합격에 도달하지 못했다, 미치지 못했다.

안식 세계에, 여기 미치지 못했다 말은 안식 세계에 들어갔다 말이오 안식 세계에 못 들어갔다 말이오? 못 들어갔다 말입니다. 그러면 시작은 하고 못 들어갔다 그말입니다. 알겠습니까? 그것을 성경 다른 데서 보면은 그들이 안식을 지킨다 해도 다 외식으로 지켜서 절기 지키는 거나 모든 것이 다 거짓부리로 지키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 짐이라” 이사야 1장 고거 몇 절입니까? “내게 무거운 짐이로다” “너희들이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모두가 다 지키는 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너희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누가 찾았소? 14절, 녜.

그래, 이제 “미치지 못한다” 하는 사람은 뭘 말해서 지금 말하는가? 그 밑에 가서 알아보면은 “믿음에 화합지 못해서 그렇다” 그러면 미치지 못한 것은 믿음에 화합지 못했다 하니까 믿음이 적었다, 믿음이 적었다 그말 아닙니까? 믿음에 화합지 못했다 하는 거는 믿음에 화합했으면 합격인데 믿음에 화합이 안 됐으니까 이 믿음은 합격되는 믿음이 아닌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어째요? 믿음을 화합지 못했다 하니까 이 믿음은 합격되는 믿음이요 합격 안 되는 믿음이요? 합격 안 되는 믿음이라. 요거 자꾸 따져 나가야 돼요. 합격 안 되는 믿음이라.

이러니까. 미치지 못한 거는 뭐이냐? 껍데기 안식일날 일 안 하는 것만 했지, 일 안 하는 것만 했지 일 안 하는 그거는 껍데기인데, 일 안 하는 그거는 소극적으로, 일을 하면 저게 안 되기 때문에 일 이런 것 다 제쳐놓고 모든 것 다 제쳐놓고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뭣 해야 되느냐?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그는 예비 대속, 이 예약 대속의 이 약속을 자기가 확고히 잡아서 이 약속을 달성해야 되는데 이 약속 달성에는 가지를 안하고 약속 달성을 할라면 모든 것은, 네가 두 가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 속한, 땅에 속한 그런 일은 다 제해 버리고, 그거는 다 치워놓고 여게만 전심 전력 하라 했는데 그것만 치웠지 외나 알맹이 여게 도달하는 약속을 지키는 여기에는 지금 성공하지 못한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미치지 못했다” 미치지 못했다 말은 거게 도달하지 못했다.

거게 미치지 못했다 말은 도달하지 못했다 말인 것은 다 이거 공통 됩니까? 어째요? 미치지 못했다 말은, 그 사람이 서울을 가는데 아직까지 서울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직 서울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말이지요? 그것은 뭘 말하는 것이냐? 이것은 그날에 일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그면은 그들이 지켰지마는 적극적이고 실상인 이 예약 예표의 대속은 저희들이 저희 대속으로 삼지를 못했다 그말이오.

저희 대속으로 삼지 못했다 하는 말인데 저희 대속으로 삼지 못한 거는 자신은 어떻게 됐다 말이요? 자신은 주님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말이오. 자기는 자기 것으로 있고 주님의 대속은 대속으로 있어서 대속과 자기와 바꾸지를 못했다.

대속을 자기 것 삼으면 자기는 주님의 것이 돼야 되는데 자기는 자기대로 있고 주님 대속은 대속대로 있고 이걸 바꾸지 못하고 그저 주일날 안식일날 일만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이건 외식이다, 헛일했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에 화합지 못했다는 요 믿음은, 믿음에 화합지 못했다는 것은 안식에 들어가는 믿음이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그렇지요? 어째요? 그거 깨달아져요? 어때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믿음이라 하는 게 깨달아져요? 어때? 그 인정이 됩니까? 이거 인정 안 되면 안 돼요.

이 믿음과 화합지 못했다 말은 안식에, 믿으면 안식에 들어가는데 믿지 아니하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이러니까 믿음을 화합지 못했다 말은 그들이 이 안식 들어가는, 안식 들어가는 이 안식일을 그들이 지키기는 지켰지마는 미치지 못했다는 그말과 내나 같은 말로 믿음에 화합지 못했다, 안식에 들어가는 그 믿음을 그들이 가지지 못했다 하는 이 말이 내 해석이 이거 다릅니까 같습니까? 맞습니까? 이게 안 맞으면 안 돼.

이래서, 우리는 이 평소에 따져 가지고 이 둘을 가지면 안 된다 그말이오. 둘을 가지면 안 되고, 평소에는 제가 둘을 주장을 하고 설교도 암만 해 쌓아도 둘이 되어 있는 자는 환난이 오면은 자기 생의 본능이, 사람이란, 불에 들어가면 죽는 줄 아는 사람은 생의 본능으로 힘이 있는 데까지는 불에 안 들어갈라고 애를 쓰지 불에 들어갈라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불에 들어가면 죽는 줄 아는 사람은 불에 안 들어갈라고 애를 쓰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백점짜리, 어렵지만 ‘백점짜리 요거 하나뿐이다. 백점짜리 요거 하나 외에는 사는 길이 없다.’ 요것을 확고하게 가진 사람은 그 백점짜리 한 길밖에 없으니까 그 사람은 자기 생의 본능에서, 이 생의 본능은 육체의 본능이 아니고 영의 본능입니다. 인격의 본능 말이지요. 심령의 본능을 말합니다.

그러면 심령의 본능이 한 길밖에 없다고 하면은 그 한 길을 가기 위해서 자기는 힘을 몇 프로나 거기다가 기울이겠습니까? 몇 프로나 기울이겠습니까? 이거 무슨 말인지 전연히 모르는 모양이라. 예? 백프로 기울이겠습니까 구십프로 기울이겠습니까? 백프로. 불에 들어가면 타죽을 줄 아는 사람은 불에 안 들어갈라고 있는 힘을 백프로 기울여 가지고 안 들어갈라고 애를 쓸 것 아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라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요 깨닫는 교리와 신조를 둘을 가져야 됩니까 하나 가져야 됩니까? 하나 가져야 된다고 좋아하지마는, 하나 가져야 된다 하지마는, ‘여럿이 있지만 그거 틀렸다. 하나만 가져야 된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 가질 수가 있습니까 따지고 따져 보니까 ‘아니다. 이거는 하나뿐이다. 하는 게 자기에게 생명을 바칠 만치 하나뿐이라는 것이 확고하도록 가져야 됩니까? 그저 자기가 ‘저 사람은 정통 사람이라’ 다른 사람에게 그런 명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권위적으로 인정적으로 그런 정도에서 하나 삼은 그거는 소용이 없습니다.

요거는 하나로 교리로 삼는 것은 자기가, 자, 자기에게는 교리도 있고 생명도 있고 이 둘이 있는데 우리의 교리가, 생명하고 이 교리하고 둘이 있는데 이 교리가 자기 생명보다 중량이 가벼우면은 그 사람은 어데로 기울어지겠습니까? 어데로 기울어지겠습니까? 이런 말 자꾸 여러분들이 말 하십시오, 이거. 이거 좋습니다.

이거 말을 해야 되지 자꾸 그래 가지고 그뭐 양반처럼 그러니까, 그러니까 정통 신학자들 가운데에서 학자들이 다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 많다 그말이오. 내 말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장에 “학벌 좋은 사람이 많지를 못하다” 했어.

그렇지 않소? 자, 자기 생명과 교리와 둘이 있는데 사람이 이 둘이 있으면 평소에는 둘 다 가지고 평소에는 이 교리를 가진다고 이래 하지마는 막상 ‘생명이냐 교리냐? 둘 중에 하나를 취해라.’ 할 때에는 그 사람이 어데로 기울어지겠습니까? 생명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이 교리와 신조라 하는 것은 생명보다 중량이 커야, 생명보다 중량이 커야 생명 문제가 있을 때도 생명 던지고 이쪽을 취하지 생명보다 중하게 가지지 못한 그 교리와 신조는 다 헛일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학자들이 ‘뭐 교리는 이 사람은 이 학자는 이리 말하고 저 학자는 저리 말하고 이리 여럿 말하기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다 정통이다’ 하는 자는, 정통이라 말은 이리 가도 되고 저리 가도 된다 하는 말이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인데 둘이라 하는 그것도 다 썩어서 그런 말 하는 겁니다. 썩은 말이오.

이것도 목회 설교록에 나갈 거라 그말이오.

그래, 이라니까 앞으로 지금 뭐, 만일 틀린 게 있으면 굉장한 공격이 들어올 것이고 이런데 여러분들이 이래 들어 가지고 만일 나도 이거 뭐 꼭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 깨달은 게 있으면 뭐 박살이 납니다. 왜? 모든 사람에 거슬리기 때문에.

그래서, 열 처녀를 다 기본구원은 얻고 행위구원에 있다 하는 그말 한다고서 어떤 총회에서는 말이 나기를 그런 놈은 당장 잡아 죽여 버려야 되지 냅두면 안 된다.

그런 거는 다 염병인데 잡아 죽여야 된다고. 어떤 사람이 ‘그거 그래 말하는데 우리가 거기 대해서 좀 생각을 가지고 연구해야 되겠다’ 이라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잡아 죽여야 된다' 이렇게 말하더래. 왜? ‘이제까지 내려오는 전통을 깨뜨리니까 잡아 죽여야 된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게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거는 아니고 전통이, 그러기 때문에 유전을 믿는 사람들이고 자꾸, 삭개오는 앞질러 갔는데 뒤만 따라다니는 사람이라.

이러니까, 이렇게 문제가 되니 여러분들이 들어 가지고 틀린 거 있으면은 그 의문이 있으면 그걸 자꾸 말해 줘요. 말해 줘 이게 설교록에 안 나가야 돼지지 설교록에 나가면 안 되니까 틀린 게 있으면 자꾸 말을 해 가지고 이래서, 뭐 현대만이 아니고, 이제 앞으로 주님의 재림 때까지만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라도 옳고 발라야 되지지 그게 틀리면 우리는 그때 정죄받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면 나만 받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거게 대해서 배워서 자꾸, 배워서 그대로 알게 되다 보니까 잘못 되면 잘못된 감염 받으면 여러분들도 같은 이거 해에 동참이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듣고서 옳으냐 그르냐 비판을 해 가지고 틀린 게 있으면 자꾸 말해서 지금 어데 나가도 정죄받지 않을 수 있는 옳고 바른 그것을 해야 됩니다.

이런데, 우리가 교리나 신조로 이렇게 가지는 것은 ‘그 둘 서이 열이 있다. 그거 다 정통이다.’ 이러면 거기 백점짜리 팔십점짜리 구십점짜리 육십점짜리 이래서 이거 다 정통은 정통이고 이래 있다. 이라면은 그 사람은 환난 때에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제일 높은 걸 택하겠소 제일 쉬운 걸 택하겠소? 어떤 걸 택하겠소? 그거는 여러분들 주관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어. 뭐이겠습니까? 제일 쉬운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두 길이 있으면, 두 길로 그 사람이, 교리를 둘로 가지고 있고 신조를 둘로 가지고 있으면은 그 사람이 평소에는 좀 좋은 거 만점 되는 거 그걸 택하고 환난 때에는 이등을 택할 것입니다. 환난 때는 이등 택하고 평소에는 일등 택합니다.

왜? 평소에는, 평소에는 소망만 보이지 현재에 손해가 안 가기 때문에 ‘같은 값이면 좋은 걸 택하지’ 좋은 걸 택합니다.

그러나 환난 때에는, 환난 때는 소망은 아직까지, 소망은 그대로 있고 당장 현재는, 현재에 손해보는 것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데로 기울어집니까? 현재에 손해보지 않는 이등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교리나 신조를 둘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가 옳은 교리를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거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그것은 뭐 지옥에서 성도 찾을라 하는 거 한가지요. 거게는 없습니다. 이런 이 공간에서 물고기 찾을라 하는 거 한가지라. 물고기 잡을라 하는 거 한가지라. 안 돼. 없어, 그거는.

이러니까 우리가 교리와 신조라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이 신앙 걸음을 걷는 것은 생명을 내놓을 때에 그때에 구원이 있는 것이지 생명 내놓기 전에는 구원 준비지 구원이 있는 거는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것이 누구의 것이냐? 네가 네것이냐 예수의 것이냐, 예수님의 것이 네것이냐? 예수님의 것이 네것이냐 예수님의 것이 예수님의 것이고 네것은 네것이냐? 내것은 예수님의 것 되고 예수님의 것은 내것이라는 이것이 다 죽고 사는 이거 모두 그 고개를 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라 하는 건 그런 그 절정을 다 넘어 가지고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교리와 신조를 가지는 것은 자기의 생명보다 다 중량이 무거운 것입니다.

왜? 우리가 가진 교리는 생명 가지고 이 교리 지키는 것입니까 생명을 바쳐서 지키는 것입니까? 뭐입니까? 생명을 바쳐서 지키는 거 아닙니까? 생명을 바쳐서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교리 아는 그것이 생명보다 중량이 더 무거워야 그리 기울어지겠습니까 가벼워야 기울어지겠습니까? 이런 걸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거리가 멀어 그래. 요걸 참말로 그 절정에 가 가지고 죽느냐 하는 그걸 거석하면은 요 말 하면 뭐 다른 사람이 우사라 하거나 말거나 막 거기서 고함을 지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필연적으로 사람이 생명을 기울이는 그런 깨달음이 있을 때에는 자기 혼자 있을 때도 깨달으면 ‘주여! 옳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이래 합니다. 거게서 생명 바칠 수 있는, 생명 바치는 문제인데, ‘내가 이리 가야 사나 저리 가야 사나? 생명 어데 바치느냐?’ 이래 이런데 생명보다 중한 그 길이 바로 깨달아졌을 때에는 자기는 거게서 혼자라도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여게서 이래 말하는데, ‘자, 자기가 환난 때에 그 여러가지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있었으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만일 그 사람이 그 교리와 신조의 중량이 자기 생명보다도 귀중성이 더, 귀중성이 그것이 높아야 됩니까 낮아야 됩니까? 어째야 생명을 바쳐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생명보다도 교리와 신조의 귀중성이 커야 됩니다. 높아야 됩니다.’ 하는 그 말을 말하라 하면 그만 거기서 고함을 막 ‘높아야 됩니다!’ 막 이렇게 고함을 지를 수 있어야 됩니다.

필연적으로 그리 된다 그말이오. 그게 안 되는 것은 ‘그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하는데, 어림도 없소! 그런 데 생명 내놔요?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김현봉 목사님이 어떤 신학박사의, 뭐 신학박사인지 모르지마는 어떤 박사의 주석을 보고서 말하기를 ‘그분의 책은 그거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다.’ 그래 가지고 평소에 대립이 됐습니다, ‘생명이 없다.' 그거 보고서 ‘그 주석은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다니 그 무슨 말인가? 생명이 없다는 그말 듣고서, 그말 듣고서 그래 내가, 그분에게 나는 별로이 배운 거 없지마는 그 평가가 높습니다. 생명이 없다니? 그래 내가 역부러 물었습니다. 그 본인은 만나지 못하고 그 밑에 배운 제자들에게 묻기를 ‘생명이 없다, 왜 생명이 없어? 뭣 때문에 생명이 없다 해?’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고 하지마는 나는 어떻게 믿는다 자기는요렇게 말은 안 했어요.단일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일 교리가 아니다. 단일 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생명을 바쳐야 가는 것인데 생명 바쳐 가는, 생명을 바쳐서 갈, 생명을 바쳐야 생명을 얻는 것인데, 이 생명을 버려야 저 생명을 얻는 것인데 생명 버릴 만한 그런 교리는 아니다.’ 그말이라 말이오. 옳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단일 교리, 생명보다 중량이 무거운 교리와 신조를 가지지 안한 자는 그자는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합니다. 교리와 신조를 지키지 못합니다.

구원이 될 수 있는 그 교리와 신조는 절정에서 자기의 마음, 목숨, 힘, 뜻, 자기라는 것을 다 기울여야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이 바꾸는 거. 주님의 그 모든 생애는, 주님이 살아 놓은 주님의 모든 설정해 놓은 생애는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 되고 바꿔야 되는 것이지 바꾸지 안하면 댓가를 내는 게 아니라.

“댓가가 안 되지마는 값을 내고 사라” 했어. 안 내면 안 돼요.

이러니까 단일 교리와 신조를 가지지 안한 사람은 그 사람은 환난 때는 가면은 평소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의 그 길을 가지 못한다. 또 평소에 단일 교리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단일 교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단일 교리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생명이 육의 생명보다 중량이 높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단일 교리로 자기 육의 생명을 바쳐서 육의 생명보다 나은 그 생명을 취할라고 이 생명을 포기하고, 천한 생명 가치 적은 생명을 버리고 가치 높은 생명을 취할라고 하지를 아니한다 그말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미치지 못했다 그말은 외식으로 이 주일날 일만 안 하지 주일날 알맹이는 취하지를 못했다 “믿음과 화합지 못했다” 믿음은 그들이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는 그거는 일은 안 했지마는 예약 예표인, 나는 죽고, 내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죽고, 이제 죽고 또 그가 살았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죽을 터인데 그가 죽고 내가 살았다. 그가 죽고 내가 살았다. 양이 죽고 내가 살았다. 양이 죽고 내가 살았다.

죄에도 죽어야 해결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도 죽어야 해결되는 것이지, 또 이렇게 하나님의 공심판에도 이거 아무,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되는 것이지.

이러니까 예수님의 승리하신 완전한 생애는 내것 되고, 예수님의 공로는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이것이 바꾸어지는 이 일이 돼야 도달되는 것이고 이것이 미친, 이게 도달되는 것이고 바꾸어져야, 안식일날 바꾸어야 도달되는 것이고 안식일날 바꿔야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이 믿음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인데 이거 껍데기만 지키지 속에 알맹이 지키지 안하기 때문에 합격되지 못했다, 도달되지 못했다, 미치지 못했다, 화합하지 못했다.

자, “믿음에 화합하지 못했다” 그말은 하나님께서 ‘이래라’ 인정하고 순종하는 건데, 인정하고 순종하는 건데, 알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건데, 아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삼으면 나는 주님의 것 되고, 또 주님이 대신 죽으신 것, ‘나는 안 죽고 있지마는 내가 죽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것이 아니라 대신 죽으신 주님의 것이다.’ 하는 이것을 자기가 알고 있습니다.

요 사실을 믿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믿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실지로 그럴 때에 그렇게 살지 안하면 행하지 안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요 믿음이라는 요것은, 자기가 그 실행하는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인정하는 것, 그러면 여게서 실행은 양을 잡아 대신 죽이고 자기는, 자기 죽을 터인데 양을 죽여 버렸으니까, 이거 이러니까 요거는 어찌 됩니까? 요거는 믿음에 소속한 것인데 요것도 실지에 소속한 것입니다.

그러면 양이 실지로 죽습니까 가정적으로 죽습니까? 실지로 양이 죽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양이 죽습니다. 양을 내 앞에서 양을 죽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과 불목한 이 불목, 사람과 불목한 이 불목을 인해서, 내가 불목했으면 내가 죽을 터인데 양이 대신, 양을 죽입니다. 양을 그냥 말로만 죽이는 게 아니라 양을 당장 죽여 버립니다. 잡습니다. 또,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다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지키지 못한 자는 죽습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화목제나 속죄제나 번제나 드리는 요것은, 요것이 자기가 죽을 대신 죽었기 때문에 자기는 살아 있지만 자기는 죽은 것이라. 그러면 대신 죽는 이 일이 ‘그라면 그런 법칙이 있다. 그런 도리가, 예약이 있다. 이러니까 그 예약대로 우리가 믿으면 된다.’ 믿으면 됩니까 양이 죽어야 됩니까? 양이 죽어야 됩니까? 양이 죽어야 됩니까? 그러면 우리를 지금 대신 하는 양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우리를 대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습니다. 대신 죽었습니다.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나는 살아 있지만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라.’ 주님이 내 대신 죽었다는 요걸 자기가 확실히, 그들은 양을 잡아서 죽여서, 죽여서 죽었다는 걸 자기가 확실히 느끼니까 느껴지기가 쉽지마는 우리는 한번 근 이천 년 전에 주님이 죽으신 거 내가 죽은 것으로 이래 할라 하니까 이거는 그때보다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전에 그걸 연습을 해 가지고 많은 역사에 모든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가지고 우리가 지금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습니다. 어려운 동시에 그들은 예표 예약적이요 우리는 인제 완료된 현실에 실상적입니다.

이래서, 믿음에 도달한다는 그말은 주님이 내 대신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베푼 그 공로는 내것이 되고 나는 주님의 것이 된 그것을 내가 살아 있으면서 실상적으로, 요 살아 있으면서, 사실은 죽지 안했다 그말이오. 있는데 실상적으로 내가 죽은 것인 것을 자기가 확실히 자기에게 믿어져서 자기는 자기 전체가 ‘나는 완전히, 주님이 죽었는데 내가 죽은 것이라. 나는 살았지만 죽은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의 공로는 내것 되고 이러니까 나는 살아 있으나 완전히 죽어서 장사지낸 거와 같이 주님의 것이 된다.’ 하는 요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 그말이오. 실상으로 이루어져야.

그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뭘로? 우리의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말이오, 믿음으로. 거게 대해서 믿음으로. 이러기 때문에 “너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그말은 너는 살았었는데 벌써 죽은 제물로 드리라 말이오. 그러면 나는 살았는데 잡아서 죽여 놓은 거라 그말이오. 이것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주일날 외식해 가지고 멸망받는 것은 실지에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은 내것 됐고 나는 세 가지 대속을 내것 삼으니까, 세 가지 대속은 내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 됐습니까 세 가지 대속을 받아 가진 내가 주님의 것 됐습니까? 세 가지 대속은 내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 됐습니까 세 가지 대속을 내것 삼은 내가 주님의 것 됐습니까? 요것도 죽고 사는 관계가 있어.

세 가지 대속을, 세 가지 대속이라니? 마귀 죄 사망에서 해방시킨, 해방시킨 대속, 해방은 그 죄값을 그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니까 나는 거기서 해방됐다 말이오.

그러면 요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완전 화목, 완전 율법 이행, 완전 무죄 요것으로써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그 대속, 내 대신 했기 때문에 나는 실지로 나는 하나님의 공심판에 걸릴 게 하나도 없다. 이래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지어다” 성경에 “담대히 나아갈지어다” 자꾸 그말 많이 했어. “담대히 나아갈지어다” 담대히 나아갈 때 담대히,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 어떻게 담대히 나아가? 예수님의 이 대신 공심판 완료를 내가 믿는 것만치 담대히 나아갈 것이고 믿는 것만치 나는 거게 담력과 실력이 나타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두 가지.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하나님을 향하여서 영감과 진리대로 영원히 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은 영감과 진리로 살아야 되고 영감과 진리로 사는 것은 하나님 상대해서, 향한다 말은 하나님을 상대해서 산다 말이오. 하나님 상대해 사는 것은 영감과 진리 생활이라야 상대가 되지 영감과 진리 생활 아니면 상대가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 그말은 하나님을 상대한 영감과 진리 생활을 내가 암만 해 봤자 나는 때묻은 옷과 같습니다. 알겠습니까? 해 봤자, 해 봤자 진흙구덩이 된 옷과 같애. 우리는 암만 뭐 자기가 성자라서 뭐라 한대도 영감과 진리대로 행한다 해도 그래. 이러니까 주님이 내 대신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신, 영원히 행하신, 영원히 살고 있는 그것이 내것이 돼. 그게 내것 됐고 그거 내것 된 나는 주님의 것 됐어.

주님의 것 되면 주님은 생명이요 완전이기 때문에 완전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거짓부리는 들어가지 못해. 거기 들어가면 예수님의 대속으로 다 깨끗해져 버리요.

이러니까, 주님의 영감 진리의 영원한 생활은 내 생활 됐고, 그러면 나는 주님의 것 된 이것이 이제 내대로의, 나로 살지 안하고 주님으로 살고, 주님의 것으로 살고, 주님의 종으로 살고,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성전으로 살고, 주님의 지체로 살고, 주님의 몸으로 살고,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 된 것이 주님의 것으로 주님으로 인하여서 사는 것,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 주님으로 피동돼 사는 것.

이렇게 우리가 살아 봤자 이것은 예를 들면 일점짜리도 안 되는 이건데 주님이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백점짜리입니다. 흠이 없어. 백점짜리하고 일점짜리하고 둘이 바꿔서 백점짜리는 내것 되고 이제 이것은 찍해야 바꿔서 주님의 것 된 이것이 살아 봤자 일점밖에는 못 사니까 항상 빚진 자요 항상 주님 앞에 빚진 자라. 왜? 주님은 큰 것 줬는데 나는 죽도록 해 봤자 불완전하고 그뭐 억억만 분의 일도 그 은혜에 대해서 갚을 수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지금 요를 말하는 것은 여게 안식일은 내나 안식 들어가는 것인데, 신약을 모르면 구약을 가지고 신약을 해석해야 됩니다. 이러니까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 세계에 들어갈 준비한다고 안식일이라 해 놨는데 뚱딴지같이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준비를 할라고는 하지 안하고 이제 전부 안식일 지키는 이것으로만 했기 때문에 외식이요 알맹이를 들어가지 못했다 그말이오.

그러면 껍데기는 뭐이냐? 일하지 않는 거, 이 일 하면 딴거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하지 말고, 뭐 하라느냐? 이제 예약 예표의 대속을 네가 입어서 이제 대속은 네것 됐고 너는 대속의 것이 됐다는 거 그걸 확고하게 이걸 마련해서 너는 주님의 것 되고 주님의 대속은 내것 됐다는 요것이 실상인데 요걸 마련해야 되는데 요걸 마련하는 데는 힘을 쓰지도 안하고 안식일을 일하지 안하는 거게만 힘을 쓰고, 그거는, 현재 이거 안 하고 하고 있으니, 이거 안 하고 있으니 그거 죽이라 이랬지만 이거 안 하는 그거야 했는지 안 했는지 사람들이 봅니까, 어데? 그거 하고 안 하는 거 보입니까? 예수님의 예표 예약의 대속 이거 짐승으로 그래 했지마는 실은 이거는 짐승의 피로 가지고서는 속죄하지를 못한다 하는, 그때도 성도들이 말했습니다. 이거는 앞으로 메시야가 오면은 대속한다는 그들이 다 믿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요, 안 보여. 이러니까 부득이 보이는 이것만 형을 줘서 수정하지 보이지 안하는 그거는 해 놓으면 그 사람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데 죽여 버리면 억울하게 죽인다 이래 할 거 아니겠습니까? 이러기에 보이는 일하는 그것만 죽였지 이거 준비 안 하는 거는 죽이지 안하고 나중에 보니까 이제 알맹이 구원 준비는 하나도 못하고 전부 외식으로서 이래 했기 때문에 안식 세계에 도달하는 믿음은 가지지를 못했다, 화합하지 못했다,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이 준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미치지 못했다 말씀하는 것이라.

요걸 여러분들이 그리 쉽게 알 게 아니라 자꾸 깨닫고 깨달아서 요게서 이제 오늘 주일 지키는 것이 외식이라, 이거는 소극적으로, ‘이거 하기 위해서 이거 안 해야 된다. 이거 안 해야 된다. 이거 하기 위해 이거 안 해야 된다.’ 하니까 이거 안 하는 면만 주력을 해 버리고, 마귀란 놈이 이거 안 하는 면만 주력하게 했고, ‘이거 하기 위해서 이거 안 해야 된다’ 하니까 안 하는 데만 주력하고 이거 해야 된다는 것은 통통 가뤄 놓고 그거는 알지도 못하게 해 놓은 것이 오늘이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외식의 주일을 지켰기 때문에, 외식으로서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준비했기 때문에 다 헛일이라.

이러기 때문에 오늘도 실은 요렇게 완전히 바꾸어서, 그러니까 바꾸는 그 은혜를 언제 주느냐? 바꾸는 능력을 언제 주느냐? 바꾸는 지식을 언제 주느냐? 바꾸는 지식을 주일날 주고, 바꾸는 은혜를 주일날 주고, 바꾸는 능력을 주일날 줘서, 바꾼 걸 이제 엿새 동안에, 주일날 완전히 바꿨는데 바꿔 가지고 있는 바꾼 그것을 엿새 동안에 지금 연습하고, 연단받고, 연성하고, 연습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되나 안 되나 보자’ 더 어렵게 하니까 그거 뭐입니까? 어렵게 하니 그거는 뭐이요? 어렵게 하니 그게 뭐이야? 연단 아니요? 그게 연단이라, 연단. 그라다가 자꾸 연습해 가지고 연단받고 이래 가지고 나중에 완성을 했으니까 그거는 뭐입니까? 연성. 이제 연단해 가지고 완전히 성공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주일날 받아야 엿새 동안에 살지 주일날 안 받으면 못 삽니다. 받은 것만치 제가 살지 받지 안하고는 못 삽니다. 주일날은 뭐하는 날이냐? 주일날은 일 안 하는 게 뭐이냐? 일은 할 여가가 없어. 일은 그거는 일 하니까, 여기 자꾸 일을 이래 하다 보니까 ‘야, 돌아서라. 전환해라. 전환해라. 이 일 하던 거 거기서 삥 돌아서 가지고 이제는 네가,’ ‘주일날 뭐하라 말입니까?’ 주일은 너하고 주님하고 바꿔라. 주님의 공로하고 바꿔라. 주님이 대신 형을 받아 가지고 해방시켜 너에게 자유케 해 줬기 때문에 너는 자유하는 자다. 이제는 종이 아니고 자유하는 자니까 자유하는 네가 주님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하는 너는 주님의 것 됐으니 자유를 얻은 너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주의 것 됐으니까 자유 얻은 너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것으로 사는 요것을, 주님은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 되고 바꿔라.

하나님의 공심판은 주님이 공심판 다 통과했는데, 공심판 통과했는데, 나는 통과하지 못하지만 주님이 공심판 통과한 것은 내것, 공심판 통과한 거 내것이니까, 공심판 통과한 것이 내것이니까 나는 공심판 통과자라. 통과한 자라.

통과했는데 ‘네가 무슨 통과?’ `주님이 대신 통과했기 때문에 내 통과라. 나는 공심판 통과자라.’ ‘그러면 공심판 통과한 너는 뭐이냐?' `공심판 통과한 나는 주님의 것이라.' 요것을 바꿔라.

이제 주님이 다시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셔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영감과 진리의 완전 생활을 이래 하는데 ‘완전 생애 하는 그 생애는 내 생애. 그러면 그 생애 내 생애니 나는 영감과 진리대로 하나님 향해서 완전한 생애를 계속 하고 있다. 영원히 하고 있다. 하고 있다.’ ‘하고 있는데 너는 누구 것이냐?’ ‘하기 있기 때문에 나는, 하고 있는 나는 주님의 것이다.' 알겠습니까? 속량받은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속량을 안 받으면 주님의 것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속량받은 후에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걸 요것도 요 구별을 바로 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요거 요 교리가 얼마나 지금 어렵고, 그러기에 이 지금 하나, 지금 우리가 깨달을 것은 이 주일을 일 안 하는 그 껍데기 그거, 일 안 하는 거 좋아요. 일을 안 해야 되지마는 일을 안 하는 것으로 그것이 완료라 할 게 아니라 일 안 하는 그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 주일날 다른 일 하지 못하고, 이런 거 저런 거, 남종이나 여종이나 다 일하지 말라 하는 거는, 일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은 일하지 말고 놀라 말입니까 일하지 말라는 것은 이제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위해서 일을 바꾸라는 말입니까? 바꾸라는 말이요 하지 말고 놀라는 말이요? 놀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손 들어 봐요. 바꾸라는 말로 아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예. 됐어, 이만하면 됐어.

바꾸라는 말이오.

요거를 여러분들이 새겨서 어짜든지 주일날은 바꿔야 됩니다. 안 바꾸면 안 됩니다. 주님의 공로 세 가지와 나와의 바꿔야 됩니다. 안 바꾸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바꾸면, 바꾸니까 바꾸기 전 주님의 것입니까 바꿔 가지고 세 가지를 내것 삼은 내가 주님의 것 됐습니까? 삼은 내가 주님의 것 됐습니까? 내것 삼은 내가 주님의 것 됐다는 거 이거 얼마나 그게 어려운 단계인지. 하나님의 공심판을 누가 통과할 사람이 있습니까, 있기를? 요것을 잘 알아서 이제 주일을 우리가 지키는 것을 완전히 고쳐야 되겠습니다.

그러고, 주일 지키는 거 외식은 뭐이냐? 미치지 못한 거는 뭐이냐? 껍데기 일만 안 하지 속에 알맹이는 하지 안해. 이러니까 오늘 주일날 이거 대속을 바꿔야 되는 이것이 주일날 되고 여게서 모든 권능, 바꾸는 것을 완전히 주일날 하고, 한 사람은 더 보강해서 더 강하게 하고 어서, 이 무한이기 때문에. 무한이기 때문에 하고 한 것을 그것을 엿새 동안은 뭐합니까? 한 거 그것을, 한 그것을 엿새 동안에 사는 것이 엿새 동안 생활인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일이오, 그게 자기 일.

우리는 우리의 구원 이루는 일 외에는 우리 일이 아닙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어짜든지 게을리 하지 맙시다. 하루 삼십 분이면은 반 시간 아니요? 하루 반 시간이니까 열흘이면 얼마 되노? 다섯 시간. 한 달이면? 한 달이면 열다섯 시간. 한 달에 열다섯 시간이면, 일 년이면 몇 시간이나 되나요? 백팔십 시간? 그래 백팔십 시간을 한 시간에 어떻게 하겠소? 제가 한 시간에 환난 닥칠 그때 그만한 시간의 기도의 양을 채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때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이래 일 년이면 백팔십 몇 시간 십 년이면 천팔백 몇 시간, 이렇게 주 모아 가지고, 환난 때 보니까 이 사람은 벌써 천팔백, 십 년이면 천팔백, 일 년이면 백팔십, 백팔십 몇 시간 기도하는 시간이 한목 왁! 이라니까 고개를 푹 뛰어넘습니다. 알겠습니까? 지금 사선이 여기 있는데 이 사람은 찍해야 기도 막 생명 내놓고 기도합니다.

생명 내놓고 기도해 봤자 그 기도한 양이 찍해야 한 뭐, 한 시간 하면은 뭐 열심히 하면은 한 두 시간 기도한 양이나 될까? 이거 가지고, ‘여게는 백팔십 시간을 기도한 기도의 양이 있어야 넘어간다’ 하면은 이 사람은 일 년 했으면 그만 무난히 훌렁 넘어갈 거라 말이오. 제가 다섯 달만 하고 말았으면 모자라서 못 넘어가요. 수학적으로 맞습니까? 맞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은 다 환난 가운데, 환난을 당한 것도 좋지만 외나 성도들은 환난에 환난 안 당했습니다. 다니엘이 환난 당했습니까? 다니엘이 환난 당했소? 자, 다니엘이 환난을 당했소 그가 환난 안 당했소? 사람 보기에는 환난을 당했지마는 다니엘 자신에게는 환난 안 당했습니다. 다니엘 자신은 기쁘고 즐거웠지. 기쁘고 즐거웠지 환난 되지는 안했어. 제삼자들이 볼 때 ‘아이구 사자구덩이 넣어 환난당했다’ 다니엘은 기쁘고 즐거웠겠소, 그때가 고통이었겠소 기쁘고 즐거웠겠소? 어떤 겁니까? 기쁘고 즐거웠어. 환난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환난 때에 유유하게 다 이기는 거라, 유유하게.

오 장로님은 평양 장로님인데 그 장로님은 왜정 말년에 그 사람은 옥에 가두니까 좋아서 기뻐하고, 그거는 또 그러니까 또 내놨다 말이오. 내놨는데 해방될 때까지 거리에 돌아다니면서 신사참배는 죄라고 외치고 돌아다니고 자유로 돌아다니고 승리했습니다. 그 사람은 감옥에 가둬도 감옥에 들어가기는 들어가도 또 내 보내고 들어가도, 들어가면 또 내 보내고 들어가면 또 내 보내고. 이래 가지고 자유로 한 사람이 오 장로님이었습니다.

요 단일 교리 아닌 것은 제가 속습니다, 단일 교리. 생명보다 중량이 무겁지 안하면은 절대로 그 교리대로 걸어가지는 못합니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54 다섯 종류의 사람/ 민수기 1장 41절-50절/ 880815월새 선지자 2015.10.27
153 다섯 종류의 신앙/ 고린도전서 15장 32절-34절/ 880918주새 선지자 2015.10.27
152 다섯 종류의 하나님의 사람들/ 고린도전서 15장 33절-34절/ 880923금새 선지자 2015.10.27
151 다섯가지 겸한 믿음/ 마가복음 10장 52절/ 870308주새 선지자 2015.10.27
150 다섯가지 준비/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860916화새 선지자 2015.10.27
149 다섯가지 지도/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841221금야 선지자 2015.10.27
148 다스리고 지켜라/ 창세기 2장 15절/ 800103목새 선지자 2015.10.27
147 다스리고 지키라/ 창세기 3장 1절-7절/ 810214토새 선지자 2015.10.27
146 다스리고 지키라/ 창세기 2장 15절-17절/ 810213금야 선지자 2015.10.27
145 다시 안식일로 정한 주일/ 히브리서 4장 1절-2절/ 861102주새 선지자 2015.10.27
144 다시 안식일로 정한 주일/ 히브리서 4장 3절-10절/ 861029수야 선지자 2015.10.27
143 다시 정한 안식일/ 히브리서 4장 7절-8절/ 861026주새 선지자 2015.10.27
» 다시 정한 안식일/ 히브리서 4장 1절-2절/ 861105수새 선지자 2015.10.27
141 다윗의 열쇠/ 요한계시록 3장 11절-13절/ 810606토새 선지자 2015.10.27
140 다윗의 열쇠/ 요한계시록 3장 7절/ 810605금야 선지자 2015.10.27
139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 것/ 빌립보서 2장 3절/ 840427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7
138 다니엘의 신앙/ 다니엘서 6장 23절/ 820124주후 선지자 2015.10.27
137 단일 사랑, 마귀역사/성령역사/ 요한일서 2장 12절-17절/ 830825목새 선지자 2015.10.27
136 단일 소망/ 시편 91장 14절-16절/ 840925화새 선지자 2015.10.28
135 단일 소망/ 누가복음 9장 51절-62절/ 840924월새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