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열쇠

 

1981. 6. 6. 새벽(토)

 

본문:요한계시록 3장 11절~13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역사가 있을 때마다 찾아오시니까 주님을 기다리다가 맞이하면 참 좋은데 갑자기  오시기 때문에 허둥지둥하다가 복 있는 기회를 놓치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밤에 도적같이 온다, 뜻하지 않을 때 온다는 말과 같은 성질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네가 이미 가진 것을 놓지 말아라. 가진 그것이  면류관을 만든다. 가진 것 뺏겼으면 면류관 뺏겼고, 면류관 뺏겼으면 성전 기둥  뺏겼고, 기둥 뺏겼으면 성전에서 나가게 된다.

신사참배 한 사람이나 6·25 때 주님 판 사람들도 성전에서 나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제단을 옮기지 말라고 했는데 제 마음대로 제단을 이리 저리 옮겼으면  성전을 지키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을 버리지 아니한 사람이  성전에서 나가지 않은 사람입니다.


선지자선교회 우리는 지금 어떤 것을 마련해야 되느냐?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해서 주님과  진리를 영접해서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은 우리를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은 주님을 위하여 진리대로 하는 것 곧 이웃을 구원하는 일에  쓰기 위해서 마련하지 자기를 위해서 마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성도들은 이 일을 위해서 쓰려고 마련합니다.

그보다 더 장성한 신앙은, 마련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니까 자기는 쓰는 일에만  전력합니다. 「구하지 말아라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했습니다. 또  다른 데는 구하라 하셨는데 그것도 쓰기 위해서 구하라는 것이지 달리 구하라는  것 아닙니다. 또 「너희들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한 연고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대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습니다. 정욕대로 쓰는 것은  자기 위해서 쓰는 것이요 성령의 소욕대로 쓰는 것은 주를 위해서 쓰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를 위하고 진리대로 하는 것은 그것이 형제를 위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을 위함으로 형제를 위해서 쓰는 이 연습이 우리의  연습입니다.

우리가 소유를 주님 때문에 바쳐 쓰는 것도 있고 뺏기는 것도 있는데, 뺏길 때  참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이것은 더욱 적극성 있는 것이고 저것은  소극적입니다.

그러면, 소유도 몸도 생명도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 십자가의 원리인데 왜  없어지도록 한다면서 밥은 먹는가? 그것도 없어질 것을 마련키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자리에서 없어지라고 하는데 제가 저  자리에서 없어지는 것은 제 사욕이, 주관이 끼어 있습니다. 주님은 내일  없어지라 하는데 오늘 없어지는 것도 제 주관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없어지라 할지 모르니까 그걸 보존해 놔야 합니다.

보존하려면 밥도 먹어야 되고 물도 마셔야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밥  먹는 것도 가난해질 준비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가난해지신 것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인데 우리를 위해서 모든 부요를 내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기 소유와  목숨과 몸을 주와 및 형제를 위해서 다 내어놓는 이것이 참 사는 일이요  가치있기 때문에 이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니까 ‘어떻게 하면 좀 잘되고 부자 될까?’ 해서, 과거 이북에서는  예수 10년 믿고 부자 안 되면 잘못 믿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예수  믿고 거지 된 사람, 병신된 사람, 맞아 죽은 사람이 없나 했는데, 지금 여기에도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지마는 그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또 공산주의 옵니다. 어리석어요. 이 연습이라야 하는데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가진 것을 놓지 않고 굳게 잡아야 모든 시험을 이기고 면류관 차지합니다.

승리합니다. 승리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육신이 영을 이기는 승리도 있고 세상이  천국을 이기는 승리도 있습니다.


충현교회 장로님 여덟 분이 며칠 전에 다녀가셨습니다. 그분들이 말하기를  ‘특별히 우리 한국 교계에 대해서 생각하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해서, 좁은 데서 귓속에 대고 한 말이 지붕 위에서 외쳐진다고 성경에 말씀했기  때문에 기회라 싶어서 말을 했습니다. 또 석원태목사님이 왔을 때도 같은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전국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염려하는 것은, 신학교가 많은데 신학교가 질이 나빠져 가니까  신학교의 질을 향상시켜야 되겠다 하고, 또 지저분한 신학교는 폐합을 하자는  것이 공통적인 생각인데 물론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그분들이 신학교 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높이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말하는 것은 세상 질이 낮으니까 세상 질을 높이자는 말인데 도리어  신학교 질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까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너무 허무하니까 이 질을 올리자. 또 성경  깨달음을 보배롭게 평가하는 것이 모자라니 이 평가를 좀 높이자. 목회를 하되  질이나 양이나 수단이나 방편이 성경적이라야 하는데 이게 모자라니까 올리자.

또 영감에 대해서 낮으니까 올리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신학교의 질을  높이자는 말이 되겠지만,  이것은 말하지 아니하고 ‘세상 대학보다 낮으니까 세상 대학처럼 만들자’ 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름도 신학이 아니라 대학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 하나만  공부하면 신학은 가치가 없으니까 대학을 붙여야 된다 하는데 대학이 세상  학교지 신학하는 학교입니까?  신학 대학이 되려면 신학 한 가지만 가르쳐서는 안 되니까 종합 대학이 되어야  하는데, 종합 대학이 되면 그 중에 신과가 있는데 검은 것과 흰 것을 섞어  놓으면 표시가 잘 나는 것처럼 다른 학과가 많이 있으니까 당장 표시가 납니다.

이마가 빤들빤들하고 똑똑한 학생은 의과나 법과로 가고 못난 학생은 신과를  다니니까 거기서부터 밟힙니다. 학교에서부터 신과를 밟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천물이라. 처음 신학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종들을 만들려고 생명 내놓고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되고 맙니다.

우리 교단에서도 엄궁에 산을 사서 양성원을 만들자 하는데, 부산에서는  고려신학교 자리가 제일 좋은데 엄궁은 전망이나 모든 면에 더 좋습니다.

그렇지만 반대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그 즉시로 신학 대학이 됩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는 반대합니다.

그러기에 신학 질이라는 말은 좋지만 표준하는 것은 세상 질을 말하고 있으니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교단이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되면 정치가가 거머쥐고 흔들기 쉬우니까  뭉치라고 하는데 이걸 모르니 문제입니다. 또 종교법을 창설하자고 하는데,  종교법안을 이방인이 만들면 그렇지마는 우리끼리는 하면 좋지 않겠느냐  하겠으나 예수 믿는 목사들이 만들었으니까 더 반거짓말이기 때문에 유혹받기가  쉽다 하는 것으로 걱정이 되는 것을 말해 줬습니다.

또 순복음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 때문에 ‘아, 거기에는 성신의  감화도 있고 진리도 있고 열심도 있고 금식기도도 있고 찬송도 있고 조직도 있고  이적도 있는 단체인데 그 단체에서 제일 껍데기 힘은 조직적으로 된 힘이고,  유지되어 나가는 알맹이 힘은 금식이더라’ 했더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금식에서 이적도 나오고 열심도 나오고 그 단체가 유지가 되고 있는데  진리, 영감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를 바로 깨닫는 것, 진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 진리에 모든 사람을 귀속시키는 것…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서는  66권에 나타난 진리가 중매쟁이요 제일 외부적으로 나타난 길이니까 진리를 제일  강조해야 하는데 거기서 제일 귀중히 여기고 주도성을 가진 것은 금식기도라고  보여집니다.’  ‘모이는 것도 좋고 다른 것도 다 좋은데 진리가 아니면 안되니까 진리를 굳게  잡아라, 진리를 배워라 이렇게 진리를 강조하는 것이 제일이어야 하는데 병 낫고  부자 되고 소원 성취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좀 아쉽고 염려가  되더라’ 하는 말을 해 줬습니다.


「네가 잡은 것을 놓지 말고 굳게 잡아라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도록  해라」 굳게 잡은 것 뺏기면 면류관 뺏깁니다. 면류관 뺏기면 성전 기둥 안  됩니다. 성전 기둥이라는 말은 원수도 그 혜택을 입었다는 말이오. 원수에게라도  혜택을 입혀요. 기둥이라 말은 받들고 있다는 말이오. 온 교회에 봉사한다  말입니다.

「네가 다시는 나가지 않으리라」 패전이 없으리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의 이름」 천국의 이름, 「예루살렘의 이름과 내 새  이름이 그 위에 있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천국 사람이라,  예수님의 사람이라. 또 그가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천국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이런데 「새 이름이라」 자꾸 새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면 다 아닙니까?

그러면 굳게 잡으라는 것은 열린 문을 줬으니까 버리지 말라는 말이오. 열린  문은 승리하는 방편, 승리하는 길이라 말입니다. 승리하는 길은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능력 가지고 배반치 않으려고 하면 있는 것을 다 기울여야  됩니다. 있는 것 다해서 진리를 파수하고 하나님을 모시는 그것이 좋은  방편입니다.

그런데 열린 문을 어떻게 받았는가? 그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니 거룩과  진실입니다. 거룩과 진실로 열린 문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평소에 결심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결심은 가치가 적습니다. 결심보다는 이성  비판이 높습니다. 그보다는 자기의 본능이 높습니다.

집에 불이 나면 돈 보따리만 챙기는 것처럼 사람은 마지막에 본능을 따라서 가기  때문에 평소에 ‘주님과 진리는 내 소유보다 크다, 생명보다 크다, 내 전부를  주더라도 받아야 한다’ 하는 이것이 본능적 지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본능적 지식을 만든 것은 무엇이냐? 자기대로는 구별해서 따져 보니까  꿈속에서도 무엇이 더 나은 줄 아는 본능의 지식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이것만큼은 놓을 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김일성씨는 악을 행해서 그렇지 위대한 인간입니다. 왜? 그가 하는 일은  어린아이들에게 ‘우리 어버이는 종이 한 장만 타면 날아서 달에도 가고  어디든지 날아다닌다’ 이렇게 자기를 하나님으로 인식시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이북 사람들은 외부를 모르니까 김일성이 그들에게는 신격화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통일이 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서 그 지식을 뽑아내려면  적어도 4, 50년은 걸려야 하는데 차라리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낫습니다. 김일성의 사람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남한에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벌로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급하더라도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버렸으면 버렸지 주님과  진리를 내놓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지식이 주님과 진리가 낫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인을 재판하는 자리에 불타는 불 무더기를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가면  네가 사형을 받을 것이고 왼쪽으로 가면 사형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왼쪽에는 불이 활활 타고 있어서 그리로 가면 당장 불에 타서 죽을  것이고 오른 쪽으로 가면 사형을 내리겠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가겠습니까?  불더미 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사형받는다는 쪽으로 가겠습니까? 불속으로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에 들어가면 타서 죽는다는  확고한 본능적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다 투자해도 진리와 주님을 버리지 않을  본능적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 본능적 지식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본능적 지식을 낳은 어미는 거룩과 진실입니다. 자꾸 구별하고 따져 나가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옳고 참된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별을 잊어버렸으면 그 사람 생활에서 구원은 감감합니다. 구원은 근방에  비치지도 않습니다. 내가 서부교회 온 지가 30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물어 보면  모릅니다. 이렇게 어려운데 사람들에게 마구 흥분만 일으켜 주면 알게 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 것도 좋지마는 성전 밖마당도 있고 제단도 있고 경배자도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것이지마는 최고는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배워서 깨달으려고 애쓰는 것이 최고요.

어리석은 자들은 그런 곳에 가서 흥분된 가운데 돈을 내는데, 여기서는 주일날  연보하는 것 아니면 평소에 모여도 천원짜리 한장 내는 사람이 많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기 참석했다가 연보를 일일이 다 거두니까 천 원짜리를 넣었는데,  그 이튿날 가니까 마침 5천원 짜리밖에 없는데 또 연보를 거두기 때문에 그때  생각하기를 ‘아, 내가 우리 교회서도 5천원은 안 냈는데 여기에 넣기는  아깝다’ 하고 있으니까 옆에서 연보궤를 대고 쿡쿡 찌르는데 땀이 바짝 바짝  나지마는 눈 감고 기도하는 척 하니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꾹꾹 찌르더랍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나 땀을 흘렸든지, 속으로 ‘내가 왜 여기 와서 뜸질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나더라고.

천년성이라는 전도관에도 살림을 다 바쳤기 때문에 아닌 줄 알아도 못  나왔습니다. 절에다가 자기 재산을 다 털어 바친 사람은 아닌 줄 알면서도 재산  바친 그것 때문에 못 나옵니다. 성경에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어리석은 청년들, 무식한 사람들이 그런 곳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거요.

임신해서 입덧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들이 ‘금식기도 하면 낫는다’ 하니까 그  말대로 사흘 금식하니까 낫더랍니다. 거기 가서 금식기도 할 것이 아니라  집에서라도 하루만 굶어 보십시오, 안 낫는가.

입덧은 자기 생명 아닌 생명이 속에 들어와서 요구를 하기 때문에 생겨지는  것입니다. 내 눈이 빠져서 아이의 눈이 되고, 내 귀가 빠져서 아이 귀가 되는데,  이제까지는 내 구미대로 먹었지만 그 아이가 필요로 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자기 구미대로 먹으니까 토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먹으면  토하니까 고기가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마는 옛날에는 집에 개를 팔면 제법 돈이 되니까 개를  길러도 잡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지깽이에 불을 붙여서 등에다가  대면 털이 타면서 노린내가 나는데, 그 냄새만 맡아도 입덧이 물러갑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입덧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치기를, 돈 없는 사람에게, 그때 돈  5백원니까 요새는 5천원 정도 하면 되겠지요. ‘한 5천원을 가지고, 고무  주머니를 준비해서 시장에 가서 제일 적게 주고 살 수 있는 양만 사서 입에 넣어  보면 아예 느낌이 싫은 것도 있고 조금 넘어가는 것도 있는데, 시장을 죽  돌아다니면서 하루 스무 가지만 입에 대 보면 해결이 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이틀 해 보고 또 안 되면 하루 더 해서 사흘만 하면 다 됩니다.’ 대개는 하루면  다 떨어집니다. 먹고 싶더라도 조금 사서 먹어 보면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버릴 수는 없으니까 고무 주머니에 넣고 이래 가지고 한 스무 가지만  조금씩 조금씩 맛보면 해결돼요.

옛날에는 개털을 태워서 냄새만 맡아도 해결됐으니까 조금만 먹어도 다 해결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해결하면 속에 아이가 필요한 요소를 다  취했으니까 건강해집니다.

아이가 지금 필요해서 입덧을 하는 건데 ‘이놈의 새끼, 굶겨 버려라’ 이래  가지고 사흘 동안 굶기면 자기 구역질은 없어져도 아이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금식하면 다 된다고 하는데 그게 도박 신앙이오. 아마 부산에서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산은 다른 곳보다는 신앙의 질이 제일 높습니다.

귀에 대고 말해도, 한 구석에서 말해도 다 퍼져 나갑니다. 진리는 소수나 다수나  사람 귀에 대고 말해도 나중에 지붕에서 외쳐집니다.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입니다.


이러니까, 거룩은 자꾸 구별하는 것이요, 진실은 세 가지 면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볼 때 옳고 바른 것으로 인정되는 자기 주관적 진실입니다.

둘째, 다른 모든 사람이 옳다고 찬성하고 인정하는 객관적 진실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옳다 참되다 인정하도록 찾아가는 진실입니다. 이 진실을  잡으려고 찾아가는 사람이 거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4장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나를 폄론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줄 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폄론하는 것도 매우 적은 것으로  안다」 했습니다. 자기 양심에 인정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그게  문제요, 또 다른 사람들이 틀림없다고 인정해도 「나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숨은 것을 다 드러내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벌벌 떨며 사는 것이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죽자껏 힘써서 다른 사람들의 사회성 객관성에 인정받기까지  구별되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될지 겁을 내는 것이 성도의 걸음인데  여기에 대해서 아예 구별하기도 싫어합니다. 왜?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는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따져 보면 알 수 있지만 따져 들어가면 너무  자책할 게 많으니까 끝까지 구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거룩과 진실을  팔아먹은 자라 말이오.

지금 떠들어 쌓지마는 참으로 따져 보면 압니다. 제 행위도 따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도 따져 보면 압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기도를 원하시느냐? 자기가 아는 대로는 구별하고  구별해서 마지막에는 ‘주여! 나는 이것밖에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으니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대로는 힘껏 찾아 놓고도 마음에  만족이 되지 않아서, 주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하게 해 달라는 욕망을 하나님께 두고 찾아가는 이 사람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거룩과 진실을 가져야 하는데 오늘은 거룩을 말하면 ‘저 괴퍅스런  인간, 콩팥을 가린다. 그저 두루뭉실하게 화평주의로 나가면 될 것인데…’ 이래  가지고 구별하는 사람의 목을 날려 버립니다. 교회서도 구별하려고 하면  싫어하고 우리 공회도 구별만 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구별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와 사망이 이릅니다.

우리가 가는 첫 자국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둘째 자국은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


이번에 양성원 경건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말씀으로 시험을 쳤는데 100점은  없고 90점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두루뭉실로 답을 했는데 옳은 것 같아도  정답은 아니오. 60점 받은 학생은 낙제시킬 수가 없어서 60점을 줬지 실은  빵점이오.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이라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왜 죽었지요? 미지근해서 죽었습니다. 미지근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좌면 좌 우면 우, 틀렸으면 틀렸고 옳은 것은 옳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에 거룩이 없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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