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신앙


선지자선교회 1982년 1월 24일 주후

 

본문 : 단 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골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행한 대로 갚으신다" 하는 이 계약은 세상에서도 그러하고 또  영원무궁세계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대로 되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말씀을 했습니다.

 다니엘서 1장 8절을 보면 그가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를 먹어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그렇게 뜻을 정했다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을 잘못  섬겨 그렇기는 그러하지마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가 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이방 바벨론 나라는 강한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포로해 간  그런 형편에 있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잘못 믿어서 그러하지만 잘못 믿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데 잘못하면, 잘못 믿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이방인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잘못 믿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서 하나님이 분을 푸시는 이런 사실은 인정하지 못하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무능하다.'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그때에 이 신앙의  청년들은 그렇게 생각지를 아니 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믿다가 무슨 믿는 사람들에게 능한 일이나 참 인기있는 일이  되면 하나님을 잘 찬양하고 부르지마는 믿는 사람의 일이 그만 꺾어지고 이방이  높아지고 이래 되면 믿는 사람이 잘 못 믿어 하나님이 채찍으로 때리는 이 사실,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고 기르시다가 채찍으로 써 가지고  삼아 가지고 믿는 사랑을 치신다는 이 사실을 인정치 못하고 하나님은 무시하고  그때에 세력있는 그런 데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멸망에서 멸망으로 더 나아가는 것이요, 그럴 때에 바로 깨달아 '저  무엇 때문에 바벨론 나라가 저렇게 우리를 포로해 가게 되느냐? 이는 그 선조  히스기야 왕 때에 히스기야 황이 망령을 부려 불신의 죄를 지은 그 값으로  자손된 우리가 그때 선포한 그 예언대로 된다.' 이걸 깨달아 회개하는 것이  바르지마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 꺼꾸러지게 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부리는 채찍, 그  몽둥이에게 가 가지고 머리를 숙여 들어 붙는 이런 망령된 일을 하기 쉽습니다.

 포로되어 갔으니까 이제는 죽을는지 살는지 모르는 그런 참 비참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다니엘 일파인데 거기에서 만일 석방만 해 준다고 해도 뭐 감지득지  해서 견디지를 못할 것인데, 석방만 해 줘도, (저게 저 청년? 이것 못  알아듣는데, 성경 말씀을 못 알아듣는 데, 처음에 와서 알아듣기 어려워요. 이걸  못 알아들으면 안 돼. 저 ○○○교회서 온 청년 말이오. 지금 내가 보니까  알아듣지를 못하는 모양인데 이제 기분 좋게 자꾸 좋은 소리만 듣고 울렁거리는  그것 다 소용없는 것이니까 이 진리를 꼭 바로 깨달아야 돼요. 잘 깨닫지  못하는데. 깨닫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다 속아 넘어지는  것입니다.)  해방만 당한다고 해도 그만 거기에 좋아서 석방받는 데에 좋아서 우쭐거릴  터인데 하물며 세계에 제일 강대국인 그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들을 그 정계에  요인으로 쓰려고 선택을 했으니까 벌써 정계 요인의 자리는 차지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만 하나님은 저거를 망하게 한 하나님이요 힘없는 하나님이요,  느부갓네살 왕은 세력 있고 강성한 나라요 권위있는 왕이라. 이러니까 거기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 배반하고 그리 들어 붙기가 쉽다 그거요. 또 일국의  대정치 요원들로 쓰려고 특별 학원을 만들어 놓고 공부를 시키니까 어쨌든지  여기에서 공부를 잘해 가지고 제가 좀 유력해지겠다는, 그만 느부갓네살 왕이  세상 벼슬 주려는 거기에 소망을 들이붙여 놓고 야단을 지길 건데 다니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나라 소망과 하나님의 그 주시는 소망만 가졌지 거기에  소망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또 왕의 진미를 먹여 가지고 이렇게 영양을 채워서 어쨌든지 열심히 공부하게  하려고 하는 그런 일을 해도 하나님이 나를 지혜롭게 해 주는 그 지혜면  총명이면 나는 기쁘게 받지마는 이 왕이 주는 식물이나 방편이나 그것 가지고  능한 사람 되기는 싫다는 그의 지하는 것이 도무지 변개를 안 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러, 여기에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버리고  느부갓네살 왕을 섬기는 이 섬기는 대상을 바꾸는 것이나 또 이 참 희망있는  자리에 있었지마는 희망을 바꾸는 것이나 의지를 바꾸는 것이나 자기가 성공하는  이 성공의 원인을 바꾸는 이런 것은 자기를 더럽히는 것인 것을 알고 '나는  더럽히지 않겠다.' 하는 마음의 결정을 지웠습니다.

 이럴 때에 참 하나님을 아는 자, 그의 법칙을 믿는 자, 그를 숭배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 하나님을 그만 썩 버려둬 버리고 그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런  자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보면 그 학생이 국민학교 할 때는 좀 거석하다가 이것이 뭐 대학이나 가면  그만 섬기는 것도 희망도 의지도 자기의 모든 근거도 홱 바꿔 버립니다. 공부 안  하던 자가 공부하면, 또 높은 공부에 진학하면, 그게 무슨 어디 출세나 무슨  그런 취직이나 하나 하면, 어떤 유력한 입장에나 그런 인물이나 하나 찾아  가지게 되면 당장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대한 모든 소망도 약속도 다 버리고  변질돼서 그리 돌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어쩔 수 없어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 또 갈 길이 없으니까 그런 것  이런 정도에 있지, 자기가 유기적으로 능동적으로 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섬기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모든 사람이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나온 때 그때의 하나님 같은 그런 하나님일 때는 잘  섬기지마는 이렇게 포로되어서 비참하게 만든 하나님으로 나타날 때에는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신앙이요 실질적인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한편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가 땅에 있는 인간들에게  무슨 호감을 사려고 날뛰었지마는 한편 강도는 같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아주  저주받아 허무하게 보여지는 그때에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자기를 부탁했기  때문에 그 신앙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 너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다니엘과 같은, 로로돼 있는  다니엘과 같은 이런 형편, 하나님의 돕는 아무 효력이 보이지 않는 형편, 보기에  하나님보다 아주 위대하고 크고 강한 그런 것들이 앞에 있을 때에 자기의 섬기는  대상을 바꾸지 않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이 희망은 그대로 계약으로만 나타나 있지마는  자기 앞에 번쩍거리는 이 세상 굉장한 그 희망들이 자기 앞에 얼렁거릴 때에  그때에 자기의 소망을 바꾸지 않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기가 이런 하나님에게, 하나님에게서 아무 효력이 은총이 오지 않을 그때에  그것이 분명히 자기들이 잘못됨을 인해서 하나님의 채찍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앞에 큰 희망을 두고 큰 축복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시련이든지, 자기를 잘못된 것을 고치게 하는 것이든지, 또 새로운 그 성장을  갖게 하시는 것이든지 이것 외에 단것은 없는 이 사실을 굳게 잡아야 될 터인데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껍데기 인간적 생각으로 해석을 해 가지고  속화되기 쉽습니다.

 현재를 당했을 때에 다니엘은 믿는 그 믿음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무슨 좀 앞에 세상적 희망이나 보여지고 하면 그만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다 바꿔버립니다. 또 예수님 믿다가 자기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해되는  일이 오고 그 세상에 어떤 세력히 커지면 그만 자기의 섬기는 그 섬김을 바꾸고  따르는 그 대상을 바꿔버립니다. 그것이 종교적 음행이오. 그것이 인격적  음행입니다.

 그럴 때에 환관장이 있다가 말하기를 '이 식물을 먹지 않아서 자기네들 얼굴이  좀 초라해지면 내 머리가 다 달아날 터인데 내 생명이 끊어질 터인데 안 된다'고  이랬는데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은혜를 입혀서 그 환관장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자기 생명을 내놓고 그 들의 말을 들어서 얼마 동안 지내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이 신앙을  실상으로 가지면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상으로 나타내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것이  진실이 됐나 안 됐나 하는 것은 그 환관장이 그들에게 은혜를 입히는 그것이  증거입니다. 또 그러고 난 다음에 채식만 하고 어려움을 연구하는 데도 조금도  몸이 약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건강해졌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또 공부를 하는 데에 다른 학생의 10배나  뛰어난 지식을 가지게 된 그것이 또 하나님이 다니엘과 그 청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 증거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그분들은 계속적인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했을 것입니다. 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겠고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겠고, 그에게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일을 시작해 왔습니다.

 자기 몸들이 약해도, 그 지식이 뒤 떨어져도 안 될 터이니까 하나님에게, 밥을  먹으면서도 '주여, 아무리 영양 없는 채식을 먹어도 저들보다 뒤떨어지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이들에게 보여 주지 못합니다. 선포는 해 왔지만 하나님이  과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하나님이 무신론이 아니고 계신다는 이 사실은  하나님의 역사에서만 나타날 수 있으니까 우리를 건강을 주옵소서.' 그분들이  계속 먹는 데도 기도했을 것이고, 공부하는 데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서 총명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지식이 뒤떨어지면 또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고 하나님  영광이 가리워집니다. 우리 말한 것이 다 헛된 말이 됩니다. 우리가 당신을  섬기지 않고 바라보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짓을 해서  포로가 돼 왔기 때문에 우리가 깊이 각오하고 회개하고 믿습니다. 우리를  도우시옵소서' 하는 그 기도로 늘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고  했으니까 그만 하나님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과 으례히 서로 교제하면 하나님이 말하고 또 받고, 주고 받고 하는 것이  능숙해져서 서로 하나님과 통화가 되어졌고 또 하나님이 자기네들 일에 척척  동행하시는 것이 환하게 자기들은 몇 번이든지 경험했고 체험했고 알아졌고  이랬으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어 가지고 이 꿈의 해몽자를 찾으니까은  전국에 공부시킨 박사들이 하나도 몰랐습니다. 그랬는데 다니엘을 척 부르니까  자신있게 말합니다. '네, 이런 비밀을 인간의 박사고 복술이고 술객이고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비밀을 알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을 했는데 그런 소리는 혹 죽을 요량하고 헛 장담으로 그렇게  큰소리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서 '하나님밖에는 이 비밀을 아시는 이가  없는데 나는 이것 전연히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 주시고, 내가 모시고  나를 거느리고 계시는 이 하나님께서 이것을 옳고 바르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내가 말하겠습니다.' 얼마나 그들이 평소에 연습을 해서 익숙하고 능숙했기에  하나님이 알려 주나 안 알려 주나 틀림없이 물어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안  알려 준다.' 했으면 그들이 뭐 두말 할 것 없이 '그건 내가 하나님이 안  알려주려 해서 모릅니다.'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면 내가 왕에게 지금 꿈도 말하고  해석도 말하겠습니다. 꿈은 이런 꿈입니다.' 했는데 딱 들어맞는다 그거요.

그것이 실질적으로 하나님은 상대해서 생활했고,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의논한  일이 익숙해졌고, 하나님과 서로 통화가 돼서 하나님이 이렇다 저렇게 알려 주는  것을 알렸고, 또 금하는 것을 금했고,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고 의지했기 때문에  그분 외에는 두려운 분이 없었고, 그분 외에는 의지할 분이 없었고, 그분의 하는  일에는 피조물들이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줄 알았기 때문에 담대히,  '인간으로서는 이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이 일을 알려 주시면 알려 줄 수가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왕에게 미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알려 주시면 내가  알려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알려 주시니 내가 말하겠습니다.

이렇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실질적이며 실상적이며 또  사실적이었습니까? 얼마나 확신이 있었으며 자신이 있던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았습니까? 그 뒤에 또 우상을 만들어 놓고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지  아니한 자들은 다 불미불 속에 넣어서 태워 죽이기로 전국민을 한마음으로  묶어서 느부갓네살 왕 하나에게만 전부 다 집중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했을 때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거기에 절하지를 않았습니다.

 절하지 아니한 것이 왕에게 소문이 들어가서 잡아다 놓고 '너희가 고의적으로  지금 이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나 혹 실수로 하지 않았나?' 고의적으로 안 한 줄  알지마는 구원하기 위해서 빠져 나갈 길을 주기 위해서 '실수로 이렇게 했나,  몰라서 그렇게 했나, 혹 잊어버리고 했나? 지금이라도 하면 용서를 하겠다.'  이렇게 느부갓네살 왕이 절하지 아니하면 불에 넣어서 태워 죽이는 이 불미에다  불을 피워놓고 이것을 물을 때에 그 셋 청년이 '우리는 거기체 절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섬기는 그 신이 내 손에서 너희들을 구원해 내리라고  생각하느냐? 이 불 속에 던지는 이 불 속에서 너를 구원할 수 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호통을 칠 때에 그들은 말하기를 '예, 왕이 아무리 불  가운데 집어넣어도 우리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시면 구원하십니다. 또 그분이  구원을 하실는지 불 가운데서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써 태워 죽는 것이 그것이  당신에게 영광이 될는지 그건 우리가 모릅니다. 구원하시려면 하실 수 있습니다.

또 구원 안 하셔도 우리는 족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그분만 높이다가 그분의 뜻대로 살고 뜻대로 뜻대로 죽는 이것이  소망이기 때문에 구출할 수 있는 능력은 얼마든지 계시는 분이시지마는 구출하는  것이 당신의 뜻인지 아닌지 그건 모르기 때문에 구출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이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은 왕은 아십시오.' 그분들이 이렇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요동치 않고 이렇게 여유가, 끝이  없는 그런 온유한 마음으로 왕에게 대답을 하고, 또 그들의 사람이 돼 가지고  있고, 불미에 묶어서 던지려고 묶여질 때까지도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고 그  얼굴도 변하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유유하게 조금도 요동치 않는 그 신앙이  그것이 평소에 주님으로 더불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그의 두려움과  그의 주권과 그의 능력과 그의 신실하심을 얼마나 평소에 그가 숙달했고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무슨 돌발적인 무슨 일이 닥쳐도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그들과 관계가 조금도 요동치 않았습니다. 죽음이 와도 요동치 않고  세력이 와도 요동치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과의 평소의 관계가 이러한 역경의 위험한 그 현실을  만나도 요동치 아니하는 마음과 생각과 태도와 말 행동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들이 평소에야 어떻게 믿는지 누가 알았습니까? 모르지마는 이런 현실을 당할  때에 그들의 언행심사가 조금도 요동치를 않았습니다. 태도도 하나도 요동치  않았어 이것이 그들로서는 실상의 신앙, 실지의 신앙, 산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에게도 자주 현실을 닥쳐서 그 현실에 우리의 신앙이 참으로  진실한지 거짓된지, 그를 두려워하는지 그보다 두려하는게 딴데 있는지, 그만  바라보는지 딴것 바라보는게 있는지, 그만 좋아하는지 딴걸 좋아하는지, 그분의  주시는 것만 참 소망하는지 여기에 저기에 아무데나따나 주 얻어 하려고 하는  그런 창녀 같은 그런 더러운 인격인지, 그것을 우리가 현실에서 자기를 스스로  시험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것뿐이라면 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 죽음에서도 담대히 주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나는 주님만 바라본다. 죽어도 상관없다. 그 계명 지키는  것 제일이다.' 이렇게 장담도 할 수 있고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묶어서 불 속에다 집어던졌어. 얼마나 활을 뜨겁게 했든지 집어 던지니까 던진  그 역사들을 불이 나와 가지고 다 태워 죽였습니다.

 그 불이 얼마나 강하게 지금 맹렬한 그 불인데 불 속에 세 사람을 옷 입은 채  결박을 시켜서 던졌는데 던지고 보니까 결박은 없고 자유롭게 풀려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그 세 사람 외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네 사람이 자유롭게 불 속에  설렁설렁 이렇게 걸어다니고 있는 그것을 보고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서 그  옆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몇 사람 던졌지?' '세 사람입니다. 세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지금 결박이, 다 결박지 아니한 네 사람이  다니는데 그 하나는 똑 신의 아들 같다' 놀라서 쫓아가 가지고 불미 옆에 가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어서 나와서 내 옆으로 가까이 오라.' 그래 그들이  나온 것 보니까 옷도 하나도 타지 않고 불 내음새도 하나도 안 났습니다. 이것이  이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현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냐 이 세상이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할 때에 세상을 버리고 당신을 바라보는 이 입지를 우리가 세웠을  때에 정말로 네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만 두려워하고 그만 섬기느냐  입술뿐이냐 하는 것을 실상으로 우리에게 어느 것이냐?  '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어느 걸 두려워하며 어느 것을 너 섬기며 높이며  바라보며 의지하며 사랑하느냐?' 이것을 구별할 수 있는 그 현실이 왔을 때에  그때에 요동치 않는, 단일 요동하면 다시 새로 허리끈을 줄여서 회개를 하고  요동치 않는,  그럴 때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섬기고 그에게 붙들려 그만을  두려워하는 자가 탁 되고 그 현실을 통과하면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와 가지고 나도 보고 다른 사람도 보고 환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이 사실이 드러나도록 이렇게 되어져야 이것이 산 신앙인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성경을 보고 믿는 도리를 배웠지마는 일차적으로는 '네가 성경에  배웠는데 어느 것을 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느냐? 하나님이냐 세상에  있는 뭐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이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피조물의 끌릴 만한  그런 모든 것들을 만들어 가지고 내 마음이 하나님 버리고 이리 착 기울어질 수  있는 이런 현실을 우리에게 닥쳐오도록 하나님이 만듭니다. 그것 저절로 온 것  아니오. 만들 때 그때에 내 마음이 세상으로 왔으면 이제까지 믿는 믿음은  거짓부리인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획 돌아서서 이걸 버리고 '주여!! 내가  이것보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의지합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높이며  바라보며 사랑하며 부러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신입니다!' 탁 돌아서면  이것이 그때라도 신앙을 바로 가지는 것이고, 그러고 나면 그것이 정말로 바로  됐으면 그 다음에 내가 할 수 없는 불 속에 들어갔을 때에 당신의 능력이 나를  붙들어서 세상에 모든 사람이 볼 때에 '과연 저거는 제 힘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하는 것을 만방에 모든 사람이 보고 놀라면서 이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 바라보고 의지하고 섬기는 것이 헛되지  않다 하는 것을 세상에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일계단 이계단  삼계단의 신앙입니다.

 다니엘도 보면 자기가 그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에 선포를 받았습니다. 조서를  내려서 지금 다 '그런 사람은 사자구덩이에 넣어서 죽인다.' 이렇게 다리오 왕  때 이렇게 나타났을 때에 다니엘은 그 소문을 들어도 조금도 두려워하고  염려하지 않고 여전히 하루 세 번씩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기뻐  기도했다 했어.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바로 믿고 의지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이 표시되는 판입니다. 여기에서 앞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이 자기와  같이 할 수 있는 믿음인지 아닌지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여전히 기도했을 때에 고발이 들어가서 다니엘을 던지게 됐는데  다리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다니엘을 구출하려고 해가 질 때까지 '야, 속으로는  어쩌든지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만 해라. 그놈들이 너 죽이려고 그러는 걸 내가  모르고 내가 속았는데 이번만 면하면 내가 그 원수는 다 복수할 터이니까 네가  그렇게 해라.' 전국이 다니엘을 배반하는데 자기가 제일 높이 섬기는 왕이  다니엘을 도와서 구원하려고 하루 종일 기도하지 말라는 그 사정을 할 때에 그  사정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 속에는 '나를 구원하실 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도 구원하고 구원 안 해도 좋고 당신  처분대로 해야 지 내가 이제까지 섬기던 주를 바꾸며, 의지를 바꾸며, 구주를  바꾸며, 내가 생의 방편을 바꾸겠느냐?' 하는 이 마음을 가지고, 하루 종일  말해도 다니엘은 요동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자기가 하나님과 다른  것을 바꾸느냐 안 바꾸느냐 하는 시험이오. 또 하나님을 참으로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느냐 하는 그 시험입니다. 다니엘을 묶어서 사자구덩이에 던져도  다니엘의 소망이나 의지나 섬김이나 이것이 조금도 요동치 않았습니다.

 그가 만일 '내가 아무리 지금 묶여서 던져져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사자구덩이 들어갔다가는 죽지 않고 살려냄을 받아서 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믿었으면 자기 주관입니다. 그것은. 자기 주관.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것은 명령했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라 하지마는 나는 기도한다 하고 기도하는 사람 되어지는 그것은  이미 성문계약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마는 사자구덩이에 들어가면  살려낼지 안 살려낼지 그것은 당신의 뜻이지 자기가 자기 뜻으로 '살려낼까?'  이런 것을 작정하면 주관이기 때문에 자기 주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자기 주관은 하나도 안 썼고 꼭 하나님의 뜻만 이행했지 주관을  쓰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냈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그 자리에서 죽는 것보다 '사자 입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왔으면  좋겠다.' 소망을 가졌으면 그 소망도 자율적인 소망이요 하나님이 주신 소망은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망만 가졌고, 하나님이 명령한 명령만 지켰고,  하나님이 주신 법칙만 썼고,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대로만 바라보고 의지했지,  방편도 소망도 판단도 두려움도 기쁨도 평강도 담대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했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외에는 하나도 안 하기로 일생을 정리하면서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이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해서,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만 가지고, 하나님에게로 가서,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받은 것 가지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피동으로 사는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러기에 학개서에 보면 "사람들이 더러워지는 것은 한쪽만, 손만 더러워져도  온 전신이 죄인으로 묶여 가지마는 깨끈한 것은 하나 깨끗하다고 전신이 깨끗한  것이 아닌데 이 법칙을 모르고 행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역사가 나다나지를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에도 섞인 것이 없어야 됩니다.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제일 두려워해야 되지 이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마는  저 사람보다 하나님 덜 두려워한다 하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두려워하지마는  죽음보다는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다 하면 아닙니다.

 이래서 우리에게 살게 하는 이 일생은 금을 불로 연단해서 잡철은 다  제해버리고 순금만 남게 하는 것처럼 순전히 섞인 것 없이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만 순종하고, 내  자율도 주관도 사욕도 본능도 습성도 습관도 어떤 피조물도 어떤 인간도 세력도  큰 것도 다 그것으로 말미암은 것은 태워버리고 다만 하나님과 나와 하나님의  법칙대로 똘똘 뭉쳐서 하나되는 이것을 만들려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이시요  이것으로써 영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경 지식을 보고 처음에 논리로 지식으로 믿고, 그 다음에는  이 믿는 것이 참 믿나 안 믿나 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아시지마는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은 아시지만 다른 사람도 모릅니다.

 내가 신구약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 대한 모든 믿는 것이나 소망하는 것이나  믿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말인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모두 다 성경이 말해 주신 이것을 인정하고 내가 그대로  행동하는게 믿음인데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 이것을 하나님은 아시지마는 나는  모르고 있기 때문에 믿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믿는 줄로 알기 쉽고 믿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도 나를 믿는 줄 알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나에게 속았고 나도  나에게 속기 쉽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믿나 안 믿나 하는 이것을 실지로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현실을 우리에게 주어 하나님을 믿는지 또 이것을 믿는지,  하나님보다 이것을 더 믿는지, 처음에는 순전히 하나님 믿는 줄 알았었는데 큰  무슨 돈이나 어떤 잘난 사람이나 어떤 애정이나 어떤 감정이나 어떤 분노나 어떤  영광이나 어떤 권세나 무엇이 푹 와서 들어 붙이니까 그만 하나님만 관계를  가졌었는데 거기에 충격받아 가지고 거기 기울어지고, 끌려 기울어지고, 분해서  기울어지고, 욕심나 기울어지고,  이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이 관계가 어떤 피조물에게도 피해를 받지 않고,  요동되지 않고, 손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이런 관계를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이것을 시험해서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현실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모든  현실은 이런 성질의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믿음 없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서 회개하고 믿음을 다시  가져서, 이제는 무엇이 와도 내가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 하는게 없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게 없고, 하나님보다 더 바라보는게 없고, 하나님이 주는  것이라야 되지,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지 암만  무엇이 끌어도, 부애를 질러서 분해서 죽을 만한 부애를 질러도 그 부애 지르는  그 분노에 피동되지 않고 하나님에게 피동되고, 마구 기뻐서 못 견디는 이래 막  들어 붙이고 바람을 속에 일으켜서 막 이래 떠올려도 거기에 바람들어 피동되지  않고 하나님께만 피동되고, 이 모든 온갖 현실은 우리로 어디에 지금 연결줄이  잇겨 가지고 있어서 아직 끊지 못했나? 이 줄이 연결돼 가지고 '나는 돈은 그것,  돈, 돈 그까짓 것 그까짓 것 했더니마는, 내가 돈 그까짓 것 했더니마는 빛에  졸려서 죽느니 사느니 하는 이 큰 문제가 내게 닥치니까 그만 이 돈의 문제를  무시하려 해도 안 되는구나. 이 돈에 대해서 내가 관심이 기울어지는구나.' 돈이  올 때에는 시험에 안 들었는데 돈이 갈 때에 시험에 들고, 사람이 나를 높일  때에는 시험에 안 들다가 사람이 나를 끌어 내릴 때에 시험에 들고, 내게 고생이  올 때는 시험이 안 들더니마는 영광스러우니까 시험에 들고, 이 모든 것으로써  하나님과 나와의 맺혀져 있는 이 연결줄이 얼마나 튼튼하냐 또 세상에 다른 줄에  내가 매여 가지고 잇겨 있는 그 줄이 딴 줄이 있나? 이것을 자꾸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현실을 주는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것이 와도 당신에게 대한 것이 요동치 않을 때에 그 현실 이하의  것들은 다 나에게 점령을 당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와 가지고  하나님께 이걸 내놓고 저걸 내놓고 오만 걸 들이대 가지고 나를 끌려고 흔들려고  해도 아예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탁 탁 끊어서 모든 것을 부인해 버리고 다  끊어버리고, 온 세상이 무엇을 보내 가지고 '너 아무 것이를 좀 흔들어 봐라'  해도 아무 것이가 와도 흔들지 못하고, 마귀가 와도, 돈이 와도, 권세가 와도,  죽음이 와도, 독침이 와도, 공산주의가 와도, 무슨 애정이 와도 무엇이 와도  흔들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연결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흔들지 못한 것은 나에게  졌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종입니다. 영원히 내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주와 영계와 마귀와 모든 영물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때 다 전투로 투쟁으로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속한 나를 흔들려고,  저거에게로 귀속시키려고,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과 연결되고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하는 이것이 이 사이 우리 투쟁인데,  이래서 내가 그에게 혼들리지 않고 하나님에게 귀속된 것이 그대로 유지됐으면  그거는 다 내 소유물이오. 이러기 때문에 온 세상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세상으로 인해서 요동되지 않으면 세상은 나에게 졌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겼습니다. 나는 세상을 이겨서 내것이 됐고 하나님은  연결돼서 하나님은 내 하나님 됐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경 지식적으로 일단 우리가 가지고, 거기에서 우리가 입지를  세워서 '이대로 믿겠다.' 하고 나면 믿나 안 믿나 하는 그 시험하는 현실이 올  때에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이기려고 애를 써 거기서 요동치 않고  하나님에게 들어 붙는, 하나님과 결합되는 이 결합을 가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이 오나 안 오나 하는 이것입니다.

 사자 입이 막아진 것, 불이 태우지 못한 것, 이 실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으면 나는 아직까지 미진이기 때문에 또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오는 것은 영적으로 도우심도 오고 이 물질적으로도  도우심이 오니, 물질적으로 도우심이 오는 것은 외부에 도우심이요 영적으로  도우심이 오는 것은 자기에게 말할 수 없는 성령의 충만으로 깨달음과 하나님께  대한 이 섬겨 바라보고 의지함과 자기에게 대해서는 성령의 지혜와 총명이  충만해지는 그것은 본인은, 이것은 껍데기요 그것은 실상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실상으로 와서 부딪혀지느냐, 역사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이 마지막으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가 믿음에 있는지 없는지 자기 믿음을 현실 현실에서  시험해 가지고 자기는 이런 자라 저런 자라 하는 것을 확정지워 가지고 거기에서  다시 수정도 하고 수술도 하고 재출발로 견고해서, 어쨌든지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인데 여러 면으로 연결, 소망으로 연결, 순종으로 연결, 사랑으로  연결, 두려움으로 연결, 의지로 연결, 기쁨으로 연결, 모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 속성 그와 우리와의 연결된 이 연결을 이 세상에서 맺은 것만치  무궁세계에서 하나님으로 삽니다.

 무궁세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이 아닌 것은 그 나라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피조물의 단독의 힘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의 그 힘이 끝까지 그  힘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단일 생명이요, 단일 생명이오, 단일 생명. 단일 생명이라  말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피조물의 생명입니다. 단일 생명이요, 단일  법칙이요, 단일 성품이요, 단일 행동이요, 단일 행복입니다.

 이러기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것이 제것 된 것 이것만이  영원하지 그 외 것은 다 불살라집니다. 이것을 우리 현실에서 만들 수도 있고,  현실에서 바로 그것을 알 수도 있고, 또 이것을 현실에서 고칠 수도 있고 구비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이 아니고는 그 병을 진찰 못 합니다. 현실이 아니고는 믿음에 병이 든 걸  모릅니다. 현실이 아니면 병든 믿음을 치료를 못 합니다. 현실이 아니면 없는  것을 구비하지 못합니다. 또 현실이 아니면 기를 수도 없고 강하게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보배로운 믿음 이것은 저 지난밤에 말씀과 같이 노아  때에 방주입니다. 방주. 방주가 있으니 홍수는 방주를 떠받아서, 방주를  떠받아서, 홍수는 다른 것은 다 침몰해 죽여버리고 이 홍수는 방주를 떠받아서  방주 때문에 이 홍수는, 죽이는 홍수는 이 방주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떠올라서  구출해 가지고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심판이오. 하나님의 심판에서 죽은  것이오. 죽지 아니하실 분이 죽었기 때문에 그게 하나 묘한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물은 침몰시키면서, 물은 침몰시키면서 또 물건을 띄울 수  있는 그것이 또 물의 그 본질이요 본성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대신입니다.

 이 대신은 우리나 주님이 대신하신 이것을 사실로 믿을 때에 대신한 것이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대신한 것 믿는 것, 믿음이면 하나님의 심판은 대속한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아무 피조물도  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뭣이냐? 이것이 하나님이 선포하신 이대로 순종하면 믿음이 됩니다.

순종하면 믿음이 되다니? '주님이 정죄받은 것은 내 대신 정죄받은 것이라,  죽으신 것은 내 대신 죽으신 것이라. 살으신 것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 살으신  것이라.' 하는 이 대속을 믿는 그 믿음이 만들어집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내가 같이 죽고 주님의 살으심에 내가 같이 살아 주님이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한다, 이 로마서 5장 6장에  간단하게 말했지마는 믿어지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지려 한다고 믿어지는 줄 압니까? 안 믿어지요. 안 믿어지는데 우리  현실에서 '이거 해라. 이 말은 하지 마라, 이 말은 해라. 네가 이건 또 이렇게  해 봐라. 그물을 던져 봐라, 고기가 잡힐 것이다. 이래 봐라, 병이 낫는다.'  이렇게 현실에 하나 둘 당신이 시키시는 그대로 해 보니까 차차 나에게 믿음이  생겨집니다. 확신이 생겨집니다.

 이러기에 일생 동안 예수님의 대속을 의심 없이, 대속하신 이 사실을, 예수님의  살으심은 나의 살으심이라는 이 사실을 믿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현실을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믿지 않고, 이  현실에 하나 둘 순종하지 않고 '내가 그와 같이 믿으면 돼 버리지.' 그것은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현실도 있고, 권능을 믿는  현실도 있고, 계약을 믿는 현실도 있고, 그래서 믿음으로 믿어지는 이 믿음을  점점 만들기 때문에 현실에서 하나님에게 하나 둘 따라 순종하는 이것이, 한  쪼가리 두 쪼가리 붙인 것이 노아 방주 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하나 둘  순종해 모은 것이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확신하는 신앙이  있으니 나는 주님의 것이 완전히 돼 버렸고, 주님의 죽을 때에 내 죄의 사람은  완전히 죽어버렸고, 주님의 살으심으로 인해서 나는 죄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져  버렸고, 주님이 대속해서 베푼 그 사죄와 칭의는 완전히 내것이 됐고, 하나님과  화친한 그것은 완전히 내가 화친이 돼 버려서 실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거짓부리가 아닙니다. 실상의 종교이기 때문에 진실로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해 가지고 이것은 공연한 일이요  헛일입니다.

 쉽게, 내가 지식으로 믿는 것이 현실을 당했을 때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다니엘이나 그들이 유유한 그 유유함이 내게 있는지? 그럴 때에 요동치 않는  내가 되어 있는지?  요동치 않는 내가 되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실상의 성신의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하는 그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나타나지 않으면 이것도 나 혼자  주관적 신앙인지 모릅니다. 그게 바로 되면 사자굴에서 살리든지, 불 가운데서  살아나오든지, 내게 순교가 유일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좋아서 사는  것보다 주를 사랑함으로 생명을 바쳐 죽어 사랑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나오는 것보다 이게 더 좋아서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베드로가 십자가에 꺼꾸로 못박힌 것과 같이 원하는 그 기쁨으로  이것보다 그게 좋아서 취해지는 이것이 자기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면적인 영적 최고의 역사요 그 외의 것은 이 세상에 사람 눈에 로이는  역사로서 보였다가 이 다음에 이리 될는지 저래 될는지 미결에 있는 그 승리가  우리에게 외부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현실에서 자기를 시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확정  지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이북에 있는 공산주의가 저래 있으니  우리는 이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다.'  오기 전에는 지금 떨려지고 두려워지고 견디지를 못해서 자꾸 '준비가 이래도  모자랄까 모자랄까?' 모자라는 마음에서 갈급해서 이 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는  이것이 오늘 할 태도요, 그 일이 척 닥치고 나니까, 그렇츰 떨어 쌓더니마는 그  일이 닥치고 나니까 이미 준비를 많이 해서 닥치고 나니까 두려움은 커녕 기쁘고  즐겁습니다.

 기쁘고 즐거운데 보이는 승리의 그 기쁨보다도 주를 사랑함으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 주를 사랑하는 이것이 결성되어지는 이것이 더 마음에 소원이  되어지는 이것이 이제 완전 승리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에 두려워하는 자는 그날에 기쁘고 즐거울 것이요 오늘에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때에 떨고 놀랄 것이요, 그때에 외부적인 신앙을 바라는  자는 사욕적 이요 내부적인 그 승리를 바라는 자는 그것은 객관적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아무래도 우리는 지금 이것이 당면한 일입니다.

 뭐 큰소리는 다 할 수 있습니다. 큰소리는 다 할 수 있지마는 네가 진실한  믿음이냐, 하나님이냐 무엇이냐 하는 이것을 시험하는 그 현실을 당할 때에  그때에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지금 떨면 그 때에 평안한 사람이 될 것이고 지금  헛되이 안심해서 '됐다.' 하는 자는 그때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때에 평안하고 담대하면 된 것 같은데 모릅니다. 그게 진짜로 됐으면  영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오든지 보이는 역사가 오든지 그게 와야  이제 그게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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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다스리고 지키라/ 창세기 3장 1절-7절/ 810214토새 선지자 2015.10.27
146 다스리고 지키라/ 창세기 2장 15절-17절/ 810213금야 선지자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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