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진리를 가지라


선지자선교회 1985년 10월 4일 금새

 

본문 : 요한계시록 1장 1절 3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어제 아침에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모든 이 문서 계시는 범위가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범위가 각각 다릅니다. 좁은 범위에서 말씀하신 것이 있고 또  좀 넓은 범위에서, 또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아주 궁극적인 그 이상이 없는 그런  넓은 범위에서 말씀한 그 범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달을 때에 이 성경은 어느 범위 내에서 말씀하신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자기가 발견하고 거기에 대한 진리를 깨달아야 되지 범위에 따라서 하나님의  발표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좁은 범위에서 말씀한 것이나 아주  궁극적인 범위에서 말씀한 것이나, 궁극적이라면 끝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제한을 벗은. 그 범위에서 말씀한 것과 같은 것으로 이래 생각하면 거기에는  모순이 생겨지고 서로 일치되지 않는 그런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연구할 때에 범위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어제 아침에  말한 것은 우리가 성경을 깨달을 때에 복수적인 깨달음을 가지 말고 단수적인  깨달음을 가져라 그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한 도리를' 가르쳤는데 그 가르 친 것을 이렇게 가르칠 수도  있고 저렇게 가르칠 수도 있다. 그렇게 그 이치가 둘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언제든지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이지 이것도 가합하고  저것도 가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 진리를 이 각도에서 말하고 저 각도에서 말하는 것은 다 릅니다. 또  이 범위에서 말하고 저 범위에서 말하는 거와는 다릅니다. 그러면 범위는 여러  범위가 넓고 좁은 그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도 우리 하 가족이라도 가족의  그 범위를 좁게 말하면, 가족이라면 단 부부가 가족이요 좀 넓게 말하면 이제  모든, 부모와 자녀들이 또 가족이요, 그보 다 더 넓으면 이제 이대 삼대 사대  오대 십대 나중에 가서는 그 문벌이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때에 모두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같은 진리를 가지고 생각하나 생각하는 그 깨달음이 각각 다릅니다.

이 사람이 말한 교리가 다르고 저 사람이 말한 교리가 다 릅니다. 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는 뜻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아,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맞다 저렇게 말하는 것도 맞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생각은 아주 창기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 진실이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아주 버리 그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면. 이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학자는 저렇게 말한다.

그러나 각각 달리 말하나 한 하나님에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다각적인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모가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이 모도 있고 저 모도  있으니까, 혹은 이 각도에서 말 했다 또 저 면을 말했다 그렇게, 발표한 것이  전체를 말하지 안하고 어느 면을 말한 그것이기 때문에 그게 다르다. 그러면 그  틀린 거는 아닌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 말로 코끼리를 기둥 같다. 그는 마치 뱀 같다 이렇게 말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러면 '아, 이것은 코끼리 다리를 말한 것이로구 그 이거는 코끼리  코를 말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은 코끼리 이 이빨을 말 한 것이다, 아, 이거는  코끼리의 몸통을 말한 것이구나. '그것을 그 사람 이 말하는걸 보고 틀렸다고  틀렸다고 말할 것은 아니고 '아, 이 사람은 어느 각도에서 어느 면을 말한  것이다.' 하는 것을 알고 그 사람 말한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 있고, 이거는  코끼리를 호랑이라 했으면 그거는 아주 틀리는 것입니다. 코끼리면 코끼리지  호랑이 되는 게 아니라 그말어으. 그러나 코끼리를 말할 때에, 아,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 하는 그것은 그 사람이 보는 면이 달라서  발표하는 면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 사람의 발표와 저 사람의 발표가 다르나  실은 이것은 한 코끼리를 한 마리의 코끼리를 이 면에서 보고 저 각도에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코끼리에 대한 지식을 바로 원만하게  가질라고 하면 이 사람 말한 것은 '아, 이거 코를 말했다. 이거는 다리를  말했다. 이거는 배통을 말했다.' 이렇게 그걸 다 보고 '이거는 이 면을 보고  말했구나 저 면을 보고 말했구나.' 그것을 다 알아야 그 사람이 그 코끼리에  대한 것을 아는 사람이지 그 한 일부분의 그것만 알고 그 사람은 '기둥 같다'  하는 거는 그 다리를 보고 말한 것인데 그것만 아는 사람은 코끼리에 대한  원만한 그런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도 우리가 생각하고 깨달을 때는 언제든지 체계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체계적으로 깨달아야 된다는 말은 그 모든 성경은 한 몸을  이루었고 한 몸은 한 인격체를 이루었고 한 거와 마찬가지로 성경 전체는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사람이 성경에 대한 진리를 말할 때에 아, 이  사람은 손이라 말했는데, 이 사람은 손이라 말했는데 '아. 그 사람은 손을 보고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손, 그 손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다리도 말하고  했으면 '아, 그 사람은 손발을 아는 사람이다.' '이 손발 이게 전부다. 이  외에는 없다.' 그렇게 말하면 '아, 그 사람은 사람에게 대해서 일방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원만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아직까지  지식이 어린 사람이라. 미달된 사람이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면이 아니고, 이 말하면 또 이래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아는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너무 이해에  지나쳐서, 이해에 지나쳐서, 그 사람이 분명히 아. 이 사람은 코끼리는 꼭  기둥같이 생겼다고 그거 하나만 알고 그걸 주장하는 그 사람이 뭐이냐? 틀렸는데  그 모든 거 아. 는 사람이 말하기를 '아, 이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보고 지금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다고 그렇게 말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지식이 이거는 코까리 다리 만 보고 말한 사람이라. 이거는 다리를 보고  말하는 것이라. 고라고 난 다음에는 뭐이냐? 그러면 이 사람이 다리를 보고 말한  것이니까 코끼리는 또 이 무슨 벽과같이, 벽, 배통을 만지니까 벽같이 넙적하이  어디라고 뭐 끝이 없으니까 벽과같이 생겼다 하는 그것을 모르고 기둥같이만  생겼다 하면 '아 이 사람은 일방적 지식이기 때문에 이거는 틀렸다.' 이걸  정죄를 해야 뒬 거라 말이오.

 정죄를 해야 되는데. 그저 제가 전부 다 코끼리를 다 상식으로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이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세워댑니다. 기둥 같다고 세워 대 그 따른  사람이 '아니, 코끼리는 큰 구렁이같이 생겼다. 뱀같이 이래 이렇게 생겼다.'  이러니까 '틀렸다' 이라면, '기둥같이 생겼다' 이랄 때에는 그 사람이 틀렸다고  정죄하지를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코끼리는 마치 이 벽과같이 생겼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틀렸다' 이렇게 말할 때는 그때에 제가 저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이 코끼리 다리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로구나. 이 사람이 코끼리 그  몸통은 모르는 사람이로 구나. 이러면 이 사람은 코끼리에 대해서 이거 무식한  사람이라. 그래 정죄를 해야 될 터인데 사람들은 제가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이  그것만 알고 그 면만 알고 다른 면을 모르기 때문에 원만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 '아, 이 사람 다리 같다 하는 게 뭐 틀렸느냐?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다는 것이 뭐이 틀렸느냐? 아. 이거 코끼리 다리를 말한  거 아니냐? 다리는 기둥같이 안 생겼느냐? 다리는 기둥같이 생겼지만 네가, 네가  코끼리에 대해서 모든 걸 전체를 다 알고 있으니까 이 사람이 기둥같이 생겼다는  말을 '맞다' 말하지만 맞은지 안 맞은지 모르겠다. 미결이 아니냐? 그러면  맞았는가 알아 봐라. 기둥같이 생겼다. '아 코끼리는 뱀같이 생겼다.' 하니까  '아니다. 절대 기둥같이 생겼다.' 그게 틀렸다. 벌써 정죄받았다 말이오. 이렇게  해서 자꾸 구별해 나가야 되는 것이지. 왜 틀렸느냐? 그 사람은 코끼리 코를  모르는 사람이거든. 그 사람은 코끼리 배를, 몸통을 모르는 사람이라. 그와  마찬가지로 진리도 꼭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거룩과 진실을 가져야 됩니다. 거룩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 거룩이냐? 많은 것 가운데에 구별하고 구별하고 구별해서, 선별 선별해  가지고 완전인 그 하나에 도달한 그 과정과 결과를 가리켜서 합해서 말할 때에  거룩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이. 진실이라 하, 는 말은 그  선택 과정은 떼 버리고 마지막에 결과인 참은 하나 인데 하나에 도달됐을 때에  그것을 표시해서 진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거룩이 없는  진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진실이 없는 거룩이라면 그것은 아직까지  미완성이요 그것은 지금 진행. 연구, 알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지 완전히 그  사람이 선별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해야 될 터인데,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러 보낸 사람들이 '여기  배운 거와 좀 다릅니다.' 그 말을 듣고 내게 대단히 소망을 가지고 처음부터도  그런 면이 있는 걸 봐서 이 사람은 이런 면을 연구했으면 좋겠다. 조 사람은  저런 면을 연구했으면 좋겠다 해서 보냈는데 그걸 보고 '아, 요거는 희망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우리가 배운 거와 여기 배운 것이 다릅니다. 이거  다르니까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는 그걸 발견했기 때문에 회망이 있다  말이오. 발견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기서 지금. 우리 양성원에도. 그러니까 강사들이 여러분  아닙니까'? 뭐 학위는 받지를 안했지만 학위 받을 만한 그런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더러 있습니다. 또 지금 안 받아 그렇지. 논문을 안 내서 논문 박사가  안 돼 그렇지 될 만한 그런 사람들도 있고, 또 명예 학위는 받을 만한 아무 그  사람의 공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은 안 되고 있고, 이런 사람 들 있는데 그 여러  사람들이 다 깨달음이 같지를 안하다 그 말이오. 깨달음이 같지를 안하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배우고 바로 알아야 돼. 그래서 제가 오층에다가 스피커를 달아  놓고 강의할 때는 꼭 듣습니다. 듣는데 처음에는 단단히 들었다가서 나중에 '이  사람이라면, 벌써 언간히 봐서 이 사람이라면 뭐 탈선되지 안하고 바로  나가겠다' 하는 사람의 강의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이 거기서 관심을 가지고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직 신학 강의 할 때는 내가 시간이 있으면 꼭 받습니다.

듣습니다. 듣는 것은 왜? 거기에는 좀 아직까지 이거는 이만하면 됐다 할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제가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배우면서 여러분들의. 교리라면은 깨달음인데 교리가  단일 교리라야 됩니까 복수적인 교리라야 됩니까? 자 복수적인 교리라야 됩니까  단일 교리라야 됩니까? 그러면 복수적인 교리라야 광문다학을 해서 이 면도 하고  저 면도 하고 모두 다 해서 복수적인 교리라야 됩니까 단일 교리라야 됩니까  복수적인 교리가 돼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하번 들어 보십시오. 하나도 없어.

네, 그러면 단일 교리라야 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 줄 제가 알겠습니다. 단일  교리라야 됩니다. 이랬는데. 또 단일 교리와, 교리는 단일 교리라야 되는데 모든  한 진리에 대해서 각도는 하나뿐입니까 각도가 여럿입니까? 각도가 여럿 각도르  보는 것과 그 하나의 단일로 봐야 될 것을 그것을 구별해야 되지 그게 없습니다.

 이래서. ○○○목사님이 어떤 유력한 목사님의 그 주석을 그 주석을 다른  사람을 읽으라 해서 죽 읽히더니만 말하기를. 주석에, 그 주석을 보고 난 다음에  '아, 이 사람의 이 주석은 죽은 주석이라. 죽은 주석이라. 생명이 없다.' 그래  가지고 그 분하고 대립이 됐습니다. 같이 나가다가 개혁 신학교에서 같이  나가다가 그것 때문에 대립이 돼 가지고 마지막에는 이래 나눠진 것 중에 한  건입니다. 한 건은 물질 그 개악설이라는 것을 ○○○목사님은 말을 했고 일반  '신학에서는 물질은 악한 것이 아니라' 하는 그것 때문에 서로 이렇게  나뉘어졌습니다. 그 물질 개악설을 제가 한번 삼각산 집회에 가니까 그게 있어서  제가 고요히 들어가서 '아. 이거 일반 신학에서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는 좀, 그거 혹, 틀리면 그 진리가 하나 틀리면 다른 것 다 틀렸다  이렇게 도매금으로 내려가는 넘어가는 놈의 세상이기 때문에 그거 하나 틀리면  다른 사람이 다 그만 그래 알까 싶어서 그걸 수정하면 싶어서 고요히 들어가서  말하니까 그 만 그 다음 시간에, 배우러 왔으면 배우기나 하지 말한다고, 그래  가지고 나중에 그것 때문에 개혁 신학교에서 강사로 갔다가 거기서 서로 배척돼  나왔습니다. 나온 것, 나온 그것은 하나의 교리로 그래 됐고 그러면. 이 사람의  책은 다 생명이 없는 죽은 책이라 한데 대해서 서로 항상 이래 대립이 돼 가지고  있었는데 대립됐다가서 그 교리가 나오자 말자 그걸로 가지고 서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거 죽은 지식이라 말했느냐 성경 자기가 주석할 때에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고 소개만 해 놓고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하는 자기가 가진 그 단일 교리 자기 교리가 없기 때문에  그 책은 죽은 책이라 그렇게 정죄를 했어. 그 말이 맞습니다. 대개 학자들은 다  그렇습니다. ○○○박사 제가 조직 신학을 약간 봤습니다. 조금 봤는데, 거기에  보면 그 목사님은 그저, 많은 사람들의 소개를 했어. 참 아주 많이 책을 독서를  많이한 분입니다. 뭐 모든 세계에 신학자들, 많은 신학자들 있지만 그 신학자들,  각각 그 자기의 학설을 공부하려고 하면 심히 시간 많이 걸릴 거고 여러분들이  ○○○그 목사님의 조직 신학을 보면 많은 그 학자들의 학설을 연구한 것이  됩니다. 많은 학자들의 학설을 자기가 많이 인용했습니다. 인용하고도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하는 그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제가 보고 이상하다 이래  생각했는데 그 뒤에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해서 과연 아멘이 됐었습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 여기 배울 때에 이 사람에게 배우는 거와 저 사람에게  배우는 거와 여러분들이 하나를 가져야 되기 때문에 이 사람의 가르치 는 거는  또 이래 가르치고 저 사람은 저래 가르치고 하니까 '이게 맞으나 저게 맞으나  어느 게 맞은지 모르겠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겠다' 창기 신앙 그거는  창기적인 신앙이기 때문에 시대를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환경을 따라서  변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수절 지키는, 수절적인 그런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요동되지 않는 그런 신앙을 가질라면  '아. 이 사람은 이렇게 가르치고 저 사람은 저렇게 가르치는데 이건가 저건가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래 가지고 다 이렇게 비판해 가지고 '요거다'  하는 그걸 하나 잡아야 그 사람이 죽어도 거기다 생명도 내대고 갈 것 아닙니까?  이런지 저런지 모르는 그거, 둘인가 셋이가 그렇게 아는 거기에다 생명을 내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생명이 그렇츰 천합니까, 어디? 천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하나만 되는 그 진리라야 생명 내대지 하나가 아닌 둘이라면  '아, 이 진리가 아니면 저 진리도 있는데 이 진리에 걸릴 때는 생명 내놓을  필요가 뭐 있나, 둘인데? 이거 냅두고 저거하지.' 이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복수적인 교리를 가지지 말고 단수, 요 단일적인 교리를 가지라  하는 요거 하나를 여러분들이 배운다는 것도 이것도 큰 보배입니다. 이게  예사로운 보배가 아닙니다. 이것의 가치를 모르지만 이 가치가 여러 수천 명  수만 명 여러 수십 년 수백 년 내려오면서 머뭇거리는. 방황하는 것을 그것을 다  갈래길을 다 제해 버리고 이 참길를 하나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만큼 가치  있고, 이만큼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거 못 느끼는 사람은 못  느낀다 그거야.

 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아, 이래 되면 이건가 저건가. 그러면 여러분들 이 자꾸  그게 와야 될 거라. 그 학생 모양으로 이러니까 '아, 여기서는 이래 가르치고 또  백 목사님은 또 이래 가르치고 어느 목사님은 이래 가르 치고 어느 교수는 이래  가르치고 어느 강사는 이래 가르치니까 이 어느 것이 맞은지 모르겠습니다.' 이  각각 다르면 하나를 잡아야 될 터인데 여럿이니까 '이거 모르니 이게 뭐입니까?'  요게 패해서 좀 번민을 가지고 이 것은 단일이 안 됐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해서는 내가 생명을 내댈 만한 길이 없다. 생명을 내댈 만한 것이 이 길인지  저 길인지 어디 생명을 내 대야 될란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것이 반드시 그  교리가 다를 때에는 이 교리로 말하면 생명 내대야 되고. 저 교리로 말하면  피난을 해야 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꼭 생명 내대야 된다고 그게 좋은 게  아니라 그 말이오. 그게 좋은 게 아니라. 그게 옳은 게 아니라. 잘못하면 엉뚱한  데 생명 내대기도 쉽다 그 말이오.

 내가 어제 아침에도 말하기를 일본서는 순교를 시킬 때에, 예수님의 사진이라  하고 그 사진을 떡 내놓고 이 사진을 밟는 사람은. 밟고 지나 가는 사람은  살리고 이 사진을 밟지 안하는 사람은 죽인다 이래 가지고 그 사진을 안  밟을라고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 말이오, 그러면 그 순교가 바른  순교입니까 잘못된 순교입니까? 바른 순교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잘못된 순교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잘못된 순교라. 예수관이 틀렸다  말이오. 예수를 그 사진 그거 인간들이 그렸는 데 거기 있습니까? 나 같으면  '이거 뭐 밟아야 좋습니까 찢어야 좋습니까?' '네가 한번 찢어 봐라' 막 찢어  버리고 입으로 꼭꼭 씹어 내버리겠어. 왜? 이게 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을  미혹시킨다 싶어서 왜? 그까짓 거는 예수님이 거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건. 그게 예수님이 아니라 그 말이오. 아닌데 예수관이 틀렸기  때문에 사진만 걸려 놔도 그렇다는 그것이 예수관이 틀렸다 그거야.

 그래서 그 카타콤 그 순교자라 하는 그 책을 누구 아이한테 읽어라 해서 아이가  읽고 나는 들을 여가도 없어서 그만, 아이더러 읽으라 하고 '읽고 난 다음에  나한테 말을 해라' 하니까 그거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래서 대충 알기는  알겠어. 그래 내가 그걸 똑똑히 보지 못해서 그게 어떤가 정죄는 못 하겠으나  거기에 뭐인가 알송달쏭한 것이 있다 그거요. 알쏭 달쑹한 것이 좀 있어. 그런데  그 일이 적은 일인데 그것을 과장을 하고 또 축소를 하고 저거 마음대로  과장하고 축소해 가지고, 돈벌이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거, 영화를 꾸미고 또  사람들을 인기를 끌기 위해서 하나의 소설을 지으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  실상과 다른 점이 있지 않느냐 하는 그거 내가 지금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보면 이것은 이건. 대개는 여기에 영화관에서 그 배우들이 돈벌이  하기 위해서 왕중왕이라 이래 해 가지고 해 놓은 거, 그래서 모두 한창 말  나기를 그래 말했어. 그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기독교 영화를 떡 내놓으면서  '같이 은혜를 받읍시다' 또 어떤 목사들은 말하기를 '아. 뭐 부흥회, 부흥회 열  번 하는 것보다 기독교 영화 한 번 보이는 것이 훨씬 낫다.'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 그 목사가 자랑하기를, 어떤 ○목사라는 분인데 그분은 말하기를  어쩌든지 세계에 영화 보는 것 거기서 제일 선견자로 이렇게 보고 '미국에는  이런 영화가 있는데 한국에는 안 건너오나?' 한국에 건너오면, 건너오면 제  일호로 교인들 데리고 간답니다. 서울에 나오면 서울에 데리고 가요. 데리고 가  가지고, 데리고 가며 한번 데리고 갔다 오면 훨씬, 부흥회 열 번 한 것보다  은혜를 많이 받고 감동을 받고 이래 온다고 이래 가지고 그것을 선전하고,  그라니까 우리 서부교회도 기독교 영화가 올 때에는 공문이 많이 옵니다. 와  가지고 초청장도 오고 또 입장권도 오고 뭐 그래 옵니다.

 오나 그것이 순 복음 역사가 아니고 그게 순전히 참 예수를 덮어 가루는  적기독의 역사라 하는 것을 자꾸 제가 말을 하니까 인제 서부교회는 그게 안  옵니다. 안 오고, 또 요새는 그 목사들이 '아, 영화 보는 그게 열 번 부흥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하는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는 요새 잘 안 합니다. 내  귀에 안 들려 그렇는지 안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거는 그 사람들이 돈벌이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기분을 끌기 위해서 흥분을 일으키고 기분을 일으키고 그  사람들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위주로 해 가지고, 그래야 돈이 나오거든. 그래.

이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고 자꾸 이와같이 하는 그것이지 성경에 있는 것은  우리가 볼 때에 이것은 필요 없는 말인데 실은 것 많고. 이거는 필요가 있는  말인데 그래 강조 안 하는 것이 있다 그래 보이고, 그러나 나중에 자꾸 신앙이  자라서 들어가 보면 강조할 거는, 심히 강조한 거는 심히 강조할 만할 참 그  중량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강조 안 한 것은 강조할 만한 그런 중량이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적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 사람들이 성경을 봐야 되지. 성경에 더한 자는 어떤 자가  더한 자입니까?g 성경에 있는 것을 더 과장을 시킨 그것이 그것은 성경에 있는  벌을 더 많이 준다 이랬어. 또 성경에 대해서 축소한다 말은 그 진리를 하나라도  감퇴시킨 그거는 이다음에 하나님께서 구원에 감퇴를 시켜 버린다 이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적은 한 말씀이라도 버린 자는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적다 일컬을 것이고, 지극히 작은 한 말씀 이라도 버리지 안하고 다 가르치고  지켜 행한 자는 지극히 크다 일컬으리라.' 그렇게 예수님이 평가를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눈이 어두우면 자꾸 그런데에 끌려가기 쉽다 그 말이오.

영화에서 그라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바로 알릴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바로 알리고 이 구원 도리를 바로 알려서 구원을 바로 해 주기 위해서 한 목적이  아니고 그 사람 모든 연구하고 정신 쓰는 목적이 인간들의 주관이라는 그 감정  그것을 자꾸 충격 주고 또 정서를 충격 주고 이래 가지고 돈이 빠져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벌이하는. 돈벌이 하는 돈벌이 목적으로 했지 우리 구원을  확실히 이루어 주기 위해서 한 목적이 아니라 말이오. 동기와 목적이 다 다르다  그거야

 아마 누가 충고했느냐? 어떤 사람이 그 사람 나하고 친한 사람인데 개혁 신학  중에는 개혁 신학으로 아주 정통 신학을 지금 자기가 이렇게 창설 해 나가겠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이 달력 카렌다를 꾸민 달력을 꾸몄는데, 달력 꾸민 데  거기에. 그 사람들은 모두 성화라 합니다. 예수님의 사진을 가리켜 성화라  말해요. 또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성자들의 그림 그려 놓은 거는 성화라 이렇게  말해. 이런데. 성화를 가지고 다 했어. 성화, 물론 뭐 사람의 사진은 말할 수  있습니다. 뭐 바울의 사진도 땡땡하 이 좀 무섭게 생겼고, 또 뭐 이렇게 뭣이  어떻고, 대개는 상상적인 그런 초상입니다. 그린 것이고, 사진을 베껴 가지고  나온 거는 아니라 말이오 이런 것인데, 그런 것도 재미는 없습니다. 그저  사도들이라면 사도 모든 선지자들이라면 선자자. 그 선지자가 우리가 알 때는  선지자를 어떻게 아는 게 좋으냐? 선지자가 아. 이 사람은 보니까 수염이 진뜩  났겠다. 이 사람 보니까 막 엉크리고 뻑뻑 얽은 것이 좀 무섭게 생겼겠다. 이  사람은 또 어떻겠다. 그 뭐 그것보다도 성경에 그 사람의 이력과 행적이  나타났을 때에 그 성경에 그 사람의 행적이 나타난 그 행적을 보고 '아, 이  행적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그 서적을 보고 이 서적에 나타난 대로의 선지  사도들을 지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식하는 게 좋고. 예수님에게 대해서는 예수님이 음행한 여인의 문제가  생겨났을 때에 그때 땅에다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글을 쓰고 난 다음에 그  글을 없애지 안했으면 그걸 만일 뭘 그려 가지고 야단일 거라. 예수님이 싹 뭉케  버렸어. 예수님이 그걸 싹 뭉케 버렸어 싹 뭉케 버리니까 그걸 뒤에 예수님이  뭉켄 걸 누가 그럴 수가 없다면 그 뒤에 말이 안 났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당신의 초상 하나도 남구지를 안하고 또 글 한자 쓴 것도 남구지 안 했느냐 하면  쓴 게 있다면는 그것이 나중에 '이거는 예수님의 글씨다, 예수님의 초상이다,  그때 했다' 그것이 하나의 우상같이 돼져 가지고 그것만 보게 되고 성경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바로 지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거 다 제해 버린 것입니다.

 제해 버린 것인데, 이 성경에 초상 그렸는데 어떤 사람 보니까 낯이 기단하이  수염이 검검추리하이 또 이래 아주 그럴 둣하게 또 예수님을 얼굴을 그렸더니만  요새는 또 인제 기형을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 얼굴도 또 얄궂게 이래 가지고  사람들 보면 참 재미있게 요래 또 그려 가지고 이상하게 그려 가지고 이래  가지고 이거는 예수님이라 이래 그려 놨다 말이요. 그랬는데. 달력을 하면서  예수님의 사진을 이렇게 모두 그려서 이래 놨어. 그래 해 놨어. 그게 뭐이냐?  그게 일종의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진 그린 것이 우상이 아니라 왜 우상이  되느냐?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말이오.

 내가 그때 거창에 있을 때에 ○장로라고 그분이 여기에, 지금 고아원이. 그  고아원이 큰 고아원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하는데. 무슨 고아윈이요? ○○집사님  알지요? 예 ○○중 고등학교가 그 모체인 고아원이지 그 고아원에 그래 인제  그런게 나왔지. 이랬는데 그분이 와서 말해요. 뒤에 자꾸 따라다니며 이라는데.

'아. 내가 주님에게 자꾸 기도하면서 주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보여  달라 이러니까 이래 주님이 십자가 이래 떡 달려 가지고 피를 흘립디다. 그  손에서 피방울이 덩강덩강 떨어지고 그 발에서도 피방울이 떨어지고 이래 떨어  집디다. 떨어 지는데. 그래서 떨어져서 그 피를 내가 받아 먹었습니다. 그래,  그랬는데 지금은 그만 기도를 할라 하면 기도를 할라 하면 다른 거 생각하면 다  안됐고 다 물리치고 그래 기도를 간절히 정성 들여 기도를 하면 예수닙이  십자가에 못 박힌 형체가 들납니다. 그래서 그 형체를 볼 때에 만족을 하고  그렇게 지금 기도를 하는데 지금은 힘을 써서 기도를 하면 그만 그 형체가  보이고 이래 자꾸. 헝체가 보이면 그 형체 앞에서 내가 엎드려 가지고 기도를  하고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또 형체에서 떨어지는 피방울 내가 받아 먹었을 때에  내 마음이 기분이 좋고 상쾌하고 그렇습니다. 이게 어찌 됩니까?' 그 사람 말은  내가 이렇게 지금 기도 가운데 깊이 들어 가지고 이렇게 이제. 지금 실상 그래  됐고, 이러니까 이것이 참 기도 가운데 깊이 들어 갔구나 칭찬받기 위해서  나한테 말하기는 말한 겁니다. 내가 그때 볼 때. 내가 거창 있을 때 그때 지금은  뭐 여기 부산 와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이단자라고 이래서 이제 박살이 돼  버렸어요. 박살이 된 것이 좋아요 그거. 박살이 됐으나 거창 그때 있을 때는 뭐  제 말이라면 뭐 뭐이든지 콩이라도 팥이라 하고 목사들이고 뭐이고 전부 쫙 다  따랐습니다.

 이랬는데, 그때 그분이 그렇게 말해요. 그분이 그렇게 말하는 거기서, 내가  그전에 그 성화라고 하는 그것을. 벽에 붙인 것을 '저런 것 붙이면 안 된다 저거  인정하면 안 된다. 저것이 들어서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려면 예수님은 첫째  껍데기 예수님은 성경 가운데 나타나신 그 성경대로의 서적 중에 문서 중에 있는  예수님이시요. 문서 중에 있는 예수님이 그게 예수님의 껍데기요, 그라고 난  다음에는 문서 중에 있는 예수님을 문서대로의 예수님으로 깨달을 때에 그 속에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우리에게 더 밝히 알려 주시고 똑똑히 알려 주실 때에  이제 그가 영감이 우리에게 가리켜 주시는 소개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면,  이렇게 해 가지고 영감으로 나가면 나중에 가서 주님이 자기에게 영감으로 더  확실하게 믿 어지고 알아지게 되게 되는 이것이 주님 찾아가는 길인데 그만 그래  가다가 사람들이 이 성화를 보고 성화에 나타난 '예수님은 수염이 검검추리  났다. 혹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거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그 이상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성경 가운데 있는, 성경 가운데 나타나신 그  주님을 찾아가지를 못하고 그만 그 사진에 가 가지고 딱 중단 딱 됐다 말이오.

중단 돼 버리고 항상 사진만 지금 '이런 예수님이라' 기도 하면 사진이 나타나고  기도하면 십자가가 나타나고 이래 가지고. 십자가에 나타난 그런 주님으로만  자기가 발견하지 그 가운데 주님은 영원 자존자시다. 그는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먼저 목적을 정하셨다  예정하셨다. 창조하셨다. 섭리하셨다. 모든 창조속에 들어가서 예정, 예정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목적, 목적 속에 들어가서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심을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데 거기에까지 가서 만나지를 못하고 이 껍데기, 성화라는  이 사진에 가서 딱 막혀 버리고 더 넘어가지를 못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우상이라 그 말이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라, 그게  그랬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제가 그런 말들을 이렇게, 거석한 자리에서는 말을  더러 했었습니다. 이래 말하나 그런 말도 나가면 대적이 너무. 바람이 세기  때문에 그말 하면 전체가 다 그렇게 주장하고 성화라고 보면 막 공손드리 들이고  갖다 붙이는 것을 이거 믿음에 좋은 건 줄 알고 이래 붙이는데 그래 말해 놓는  날이면 콱 흥수같이 막 밀어 붙이면 내가 그물에 떠내려가 죽을 거라 그 말이오.

그래 내가 그거 말을 안 하고 가끔 가다가 이래 말했습니다. 가끔 가다가 이래  말하고 이랬는데 그 장로님이 기도 가운데 그렇다는 말을 듣고 내 마음에 더  확신을 내가 가졌습니다. '아 그래. 과연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주님 향하여  찾아가는 사람이 공연히 성화로 그려 놓은 그거 하나의 그 물체, 거기서 막혀  버리고 물체를 초월한 부활한 영체를 가졌고. 부활한 영체를 가졌고, 그 영채  이면에 신성을 가지셨고. 영원 자존자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거기에까지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이 길이 중간에 아주 껍데기에서 막히고 만다.' 하는  그것을 더욱 느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말을 많이 좀 했었는데 제가 신학교 다니고 ○○교파에 있을  때에는 많이 말했지만 여기에 와서는 그런 말을 잘 하지를 안 합니다. 안 하는  것은 왜?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아예 성화 그걸  성화라고 위해 놓고 좋다고, 이거는 예수님의 성화라고 좋아하지 안하고 이거  하나의 잘못아라 이렇게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 자꾸. 그말 하면 자꾸 제 자랑하는 것이 되고 말고  도로 대적만 사는 게 되기 때문에 안 한다 말이오. 그래서 그분에게 내가, 개혁  신학 할라 하는 그분에게 그 말을 해 줄라 하는 것이, 하려고 전화를 들었다가는  또 '이게 어찌 달리 알면 좋은데 내가 말하면 또 이런 것 때문에 거슬리지  않겠느냐?' 그래서 말하지 안했는데 그 뒤에, 달력 내더니만 그런 걸 내지  안해요. 내지 안 하니까 은연중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게 뭐이냐 하면  아직까지 똑똑히 깨닫지 못하는 그런 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경 중 인물로 보는 것이 좋고, 그 다음에는 영감 인물로 영감 존재로  그렇게 깨달아 나가면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공부하는 가운데에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그걸 이 사람  이란다 저 사람 저란다 그걸 똑똑히 알고 있어야 되지 이래도 그만이다. 저래도  그만이다. 그래서 그걸 내가 알기 위해서 성경 보감을 다 열람을 시키면서 성경  보감에 기록한 것. 성경 보감이 아주 좋은 책입니다. 성경 보감과 여기 우리가  지금 깨달은 거와 다른 점이 뭐인가 그걸 찾아 봐라. 그걸 말했고, 또 한번은  요리 문답, 웨스트 민스터 신조 교리 요리 문답 그것을 이렇게 한번 열람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와 신조와 다른 게 뭐인고 그걸 한번 기록을 해라. 그거  공부했지? 예? 두 권 열람하며 공부했지? 그러면 그거와 마찬가지라.

 그라고 또 그 조직 신학도 지금 조직 신학에 공부를 하면 '이 조직 신학에  공부하는 것은' ○목사님도 그것을 많이 수정하고 있습니다. 그거 지금 모든 그  신학자들의 조직 신학을 다 이렇게 모아서 열람하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과 이게  다른 것이 뭐이냐? 우리 깨달은 것이 잘못 됐으면 우리가 얼른 수정해서 고쳐야  되고. 다른 것이 또 잘못 됐으면 우리 깨달 음을 가져야 되고 이렇게 자기의  교리와 신조를 이것을 밝혀서 단일 교리와 신조로 만드는 그것이 제일 급선무의  일착순입니다. 일착의 일착으로 먼저 착수해야 돼. 그래 가지고 단일 교리가  돼서 '이거는, 아예 이거는, 틀렸다. 요거 한 길밖에 없다.' 한 길밖에 없는  것이, 진리는 하나입니다. 한 길밖에 없는 것인데, 그거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갈래길이라 하는 그런 사람은 창기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요, 거룩이 없는  사람이요, 진실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거룩하고 진실하다' 그걸 말했어  거룩하고 진실하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도 시간 많이 갔는데, 자꾸 이거 전부 서론이오. 이  요한계시 1장 절로부터 3절까지를 가르칠라고 자꾸 이래 서론으로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 한번 선뜩 한번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이 계시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오.

그 안에 한 층 더 들어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이 성경이라는  말이오. 요한계시록은 육십오 권을 간추려서 결론 지워 놓은 것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가운데에는 육십오 권이 다 내포되어 있는 이 성경이기 때문에 이제  육십육 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다 내재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증거하고 있다,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전부는 그 외에  딴것이 없다, 뱀을 기록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뱀과의 관계점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그러면, 껍데기 몇입니까? 지금 껍데기 몇  말했소? 둘 말했는데, 주인공.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는 다 내재해  있다. 또, 세째로는 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이 여기에 들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 계시에 들어 있다. 세째로 인제 그 알맹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여기 들어 있다. 예수의 구원이 들어 있다는 말은 뭣을  말하나? 예수의 구원이 들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은 도성 인신. 해 가지고 양성  일위로 우리를 대속해 가지고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사 죄로 다 청산해 버렸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으로서 대행으로서 칭의를 우리에게 건설해 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 화친을 이루었으니까 예수 의 은혜는 뭐이냐 하면 하나님,  영원 자존자 완전자 전능자 불변자 대주 재자 주권자 만왕의 왕 이분과 우리와  결합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요.

 그리스도의 은혜는 뭐입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님과 결합된 자가 세 가지  직책으로 영원히 사는데. 우리가 무궁 세계에 가 가지고서 우리의 직책은 보니까  이 세 가지 직책이 우리의 영원직입니다. 영원 직. 그러면 이 세상은 지금  뭐하는 세상인가? 이 세상에서는 예수의 은혜를 입는 이 기간이요 또 예수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이제 세 가지 직책의 실력을. 세 가지 직책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 우리의 이 준비라. 그러면, 우리가 두 가지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된 자가 세 가지 제사장. 선지자, 왕직을 그걸 자기가  어느 정도 실행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느냐'? 그 실력을 영원의 원인이 되는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실지로 제사장직을 행하고 선지직을 행하고 왕직을  행함으로써 이 직책의 실권이 자꾸 성장돼 간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서서 심판받을 심판은 하나님과 연결된 예수님의 은혜는  예수의 은혜는 다, 결합된 것은 같습니다. 이 기본구원에 대한 것은 같은데,  기본구원에 대한 것은 같은데 건설구원은 말자하면 영광의 구원인데 이것은  우리의 행위구원인 것입니다. 우리 행위구원인데, 우리 행위구원이 심판을 받을  때는 그 심판 이름을 가리켜서 무슨 심판이라고 말했습니까? 그 심판 이름을  뭐라고 말했지요?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이래.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말은 이제  그리스도 직을 네가 얼마나 감당해서 그리스도의 직의 실력을 얼마나 가졌느냐  그것을 심사해 가지고 영원한 영광으로 관 씌워 주시고 또 무궁세계에 너는  이만한 제사장 실력이 있기 때문에 이만한 범위를 네가 차지해라. 또 너는 선지  실력이 이만치 있기 때문에 이만큼 차지해라. 너는 기본구원을 얻기는 얻었지만  제사장 실력은 한내끼도 없기 때문에 너는 제사장직은 받을 것이 없다, 선지직도  받을 게 없다 왕 직도 받을 것이 없다 하는 그것이 인제 결정되는 것이 그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제사장 직을, 그게 뭐이냐? 제사장직은 네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하나님과 이 사람과, 하나님과 피조물과 그 사이를 조화를 책임지고 일으키는  것이 제사장직인 것입니다. 그전에도 많이 말했지만 하나님의 것이 우리에게  직접 오면 우리는 죽습니다. 또 우리 것이 하나님에게 직접 가면 하나님이  더러워서 다 정죄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첫째 제사장, 대제사장 예수님이  계셨으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것을 당신이 받아 가지고 우리들이 그 은혜를  받아도 죽지 안하도록 그 사이에 조화를 일으켜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셔서 그 은혜가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살게 되는 것이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는 것,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걸 우리가 직접  가면 하나님께서 다 이거는 정죄해서 다 타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중보자 이제 대제사장 예수님이 조화를 부려 가지고 이래 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예수의 이름이라 하는 것을 붙여야 되지 그리 아니면 안 된다 그  말이오. 예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화친하신 이 대속의  큰 공로를 가지고서 하나님인 그 하나님과 피조물 우리, 타락한 우리와의 그  사이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들어서 머물머물 머물머물 이렇게 다 조화를  붙여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게 됐고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됐고 이렇게 밀접하게 되졌다 그거요. 그런 역할을 우리가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을  하나님과 화친하도록 이래 만들고, 만드는 것은 우리 가지고 안 되니까 예수님의  공로를 써 가면서 이래 예수님의 공로를 가지고 이와같이,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이 일 한다 그 말이오. 그러기에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그 제사장 안에서  우리는 제사장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과 그  사이를 조화 맞춰서 하나님은 원수인 사람을 좋아하고, 원수인 사람은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이 공작을 하는 것이 우리 의 제사장직 하는 것이라  말이오.

 또 하나님은 모든 축복을 줄 때에 인간에게 복덩어리를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 주실 때에는 하나님이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를 주시면 그 진리가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하면 사람들이 그 진리대로 하면 그것이 복덩어리의  실상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에 그 말씀대로 행하면 실상이 이루어진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의 그 충만을 피조물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선지자직인데, 선지자직은  하나님의 것을 피조물들에게 잘 전해 줘서, 전해 줄 때에 그냥 전해 주면 죽을  터이니까 선지자가 영감의.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에 제 힘대로, 힘써 하니까 그  일이 이루어진다 말이오. 묘한 조화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선지자도 중보자요, 제사장도 중보자요, 또 왕도  왕은 하나님의 단일 통치를 인간들이 그 통치 받지 못하교 통치를 받으면 죽는다  말이오. 죽으니까 하나님의 단일 통치를 그 우리 사람들 이 받아 가지고 내가  먼저 그 통치대로, 하나님의 단일 통치대로 내가 살므로 내가 살므로 그들에게  보이고. 그들에게 본을 보이고, 또 그들에게 말을 하고, 많은 시간과 애로를  거쳐 가지고 비로소. 내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에게 복종  하도록 이렇게 만드는 그것이 이제 왕직의 그 공로인데,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  일을 네가 얼마든지 실천으로 하는 데에서 실력이 자라고, 또 실력 자란  것만치가 이다음에 그만치 영광이 있고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광은 뭐이냐? 인간들이, 갑이라는 사람을, 갑이라는 사람을  인하여서 모든, 인간들이 혜택 본 것이 없으면 갑에게는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갑을 병, 병 이거는 그 다음에 밑에 다리지만 이 병으로 비유컨대 병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사장의 은혜를  입었고. 선지자의 은혜를 입었고. 왕의 은혜를 입었으면 그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참 감사합니다. 저로 말미암아 은혜 입었다 할 때에  이 사람이 영광이 있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 영광은 이런  다 평가적인 영광입니다. 평가적인 영광.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반사노릇이나 또 권찰노릇이나 이 모든  목회자노릇이나 다 장로노릇이나, 장로들은 다 치리하는 일 하는 것이, 행정하는  이런 거석하는 것인데 그 노릇하는 것이. 그것이 다 '아, 나는 제사장노릇을  해야 되겠다. 선지자노릇 해야 되겠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당장 저주받아서  전멸될 사람인데, 전멸될 사람인데 거기서 그 전멸될 것을 하나님한테 잘 조화를  붙여 가지고 하나님의 노가 풀어지고 불쌍히 여길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드는 것이  제사장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를 내가 전멸 하겠다'  이랬는데. 모세가 거기서, 눈물을 흘리며 간청을 하면서 '그러면 나부터 전멸  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청을 하나님께서 '내가 뜻을 돌이키고 전멸 안  하겠다' 이랬다 말이오. 그 게 제사장노릇이라 말이오. 그러면, 이것이 우리  직책인 것을 알고, 그러면 사람과 하나님과의 조화 붙이는 이것이 제사장 직책인  것을 알고, 또 선지직책인 것을 알고, 이러기 때문에 선지 직책의 말을 생명을  뺏겨도 전 할 말을 전하고. 남한테 욕을 얻어 먹고 아주 사람들에게 대적이 많이  돼 도 할 말을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사도행전 20장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유익한 말은 한 마디도 내가 감하지 안하고 다 했다' 이랬어. 듣기  싫은 소리도 말이지요,

 이러기 때문에. 이런 것을 우리가 알고, 그러면, 이 예수의 은혜 그리도의  은혜는 뭐이냐 하면 이 계시를 읽고 듣고 지켜 행함으로 된다 하는 것을 해  놨는데, 함축했기 때문에 이 가운데는 굉장한 많은 진리가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때 ○○○교회서 해방 직후에 이 사경회 하면서. 일 주일 동안 사경회를  하면서, 일 주일에 사경회 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는 요거 하나를  그때 일주일 동안을 그때 계속 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언제 논술 할라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모든 게 또. 다른 거 배운 게 다 그거라. 그 다음에  계속해서 하겠으니까 여러분들이 잘 깨닫고 그 가운데 든 진리를 아. 한 번  들으면 두 번 듣기를 싫어 합니다. 한번 들은 거는 두 번 들으면 '다 아는데?'  알기는 뭐 알아? 얼마나 들어 있는데 알 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 세상을 차지 못 하면 성경 차지 못 합니다.

성경을 차지 못 하면 예수님의 구원을 차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3장 44절에 보물을 만나고 있는 걸 다 팔아 가지고 밭을 샀다 하는 그  밭이 뭐이냐 하면 밭이 세상이요, 밭이 세상이요, 밭이 밭이 문서 계시요, 밭이  영감 계시요, 내나 문서 계시가 영감 계시요, 영감 계시가 이 세상이요, 세상은  다 이 영감 계시 속에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어기는 것이 영감을 어기는  것이요, 영감 어기는 게 세상 어기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영감대로 진리대로 살라고 하면 자기 생명까지도 다 내대야 이제 살 수가 있기  때문에 생명도 팔아야 이 계시를 산다 말이요, 이 세상을 산다 말이요.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 현실이라는 그 현실을 산다는 말입니다. 다 통일되는 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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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단합 운동의 해독/ 요한계시록 17장 12절-15절/ 830830토새 선지자 2015.10.28
126 단합기도/ 야고보서 5장 13절-20절/ 840607목새 선지자 2015.10.28
125 단합기도/ 야고보서 5장 13절-20절/ 840606수야 선지자 2015.10.28
124 달란트 비유/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870423목새 선지자 2015.10.28
123 달음질 생활/ 고린도전서 9장 22절-27절/ 871101주전 선지자 2015.10.28
122 담대히 계명을 지킬 이유/ 요한복음15장 9절-11절/ 810405주전 선지자 2015.10.28
121 당면된 3가지 기억할 것/ 이사야 1장 18절-20절/ 880804목새 선지자 2015.10.28
120 대가리 멸망/ 히브리서 11장 5절-6절/ 791107수새 선지자 2015.10.28
119 대구 기도원- 양성원 건축 준비/ 890605교역자회 선지자 2015.10.28
118 대구집회에 옥토밭을 만들어서/ 마태복음 13장 3절-9절/ 880408금야 선지자 2015.10.28
117 대구집회에서의 근본 소원/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880422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8
116 대내전과 대외전/ 사무엘상 15장 9절/ 850308금야 선지자 2015.10.28
115 대내전과 대외전/ 빌립보서 2장 1절-4절/ 890524수야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