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질하지 말라

 

1981. 2. 13. 새벽 (금)

 

본문: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9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아니하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OOO목사님이 오늘 아침에 기도 인도를 했는데, 하나 아주 고쳐서 돌아서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옛날 영화에 보면 변사라고 해설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하듯이 그런 식을 많이 취하고 있습니다. 요새도 방송 같은 데서는 그런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그런 말이 사람들이 들으면 진실이 없이 그냥 멋진 소리,  멋쟁이 소리, 또 아주 끄떡재떡 하는 그런 소리입니다. 그런 말투를 쓰는 것을  버려야 됩니다. 더뎌도 차근차근, 한 마디라도 옳은 말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똑 멋진 그런 소리 하려는 데서 전부 실패가 됩니다.

 자기가 설교하거든 녹음기를 가지고 부인에게 녹음을 하라고 해서 들어봐요. 한  마디도 앞뒤가 맞지 않아서 그 말이 신소리 같습니다. 신소리 잘한다고 하지  않아요? '그 사람은 신소리를 잘한다.' 하는데, 신소리 잘하는 사람, 또 농담  잘하는 사람, 웃기는 말 잘하는 사람 그거 모두 못쓰는 아주 방탕에 속한 것인데  그걸 사람들이 비유하기를 멋진 말이라 합니다. 그것 아무짝도 못씁니다.

 그렇게 하면 처음에 목회에 들어가서는 아마 며칠은 들을 겁니다. 한 2, 3일이나  4, 5일은 누가 들을지라도 그 다음에는 그만 권태가 납니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말을 차근차근 해서, 아무리 따지고 아무리 비판해도 조금도 법적으로 틀림이  없는 말, 아무리 어떤 사람이 그 말을 탈을 잡고 무슨 끄내끼를 잡으려고 해도  걸릴 것이 없이 앞뒤가 맞는 말, 참 법적이요 과학적이요 성경적이요 영감적인  그런 말을 쓰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앞으로는 교인들에게 소위 아이들 말로 멋진 말 그런 말을 쓰려고 하지 말아요.

될 수 있는 대로 설교하는 사람은 뜻은 높고 말은 아주 낮은 말을 써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낮은 말 쓰는 게 좋습니다. 요새 유행되는 그런  말 안 쓰면 무식하다 하는 그것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쨌든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보편 말을 써야  되고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무슨 문자를 쓰는 그것도  정신없는 사람, 또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새로 유행되는 말 그런 말  쓰는 그 사람도 정신없는 사람입니다.

 말을 하면 상대방이 알아들어야 될 것 아닙니까? 말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면 그것은 그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대해서는 오랑캐라 그랬습니다,  오랑캐. 적이라 그 말입니다. 성경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방언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방언은 다 해치는 말이라고.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수수하게 보편적인 그런 말을 쓰려고 해야 됩니다. 뭉떵  뭉떵 엉뚱한 데  툭 툭 한 마디 하는 그것이 좋은 것 아닙니다. 그걸 가리켜서  말하기를 '말 설사한다.' 이래요. 음식을 먹으면 그것을 배설하려면 하고 안  하려면 안 하고 좀 자유로 보유할 수 있어야 되지 배설하기 싫어도 안 할 수  없이 그만 배설해 버리면 그것 다 설사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든 말에 비추어 봐서 그 말은  엉뚱스러운 말이라 그 말입니다. 그것 고쳐요.

 교리를 척 말하고 또 '저주가 떠내려가는'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에게 오는  저주를 방지하도록, 저주를 벗도록 이래야 되지, 보면 아주 멋진 소리 같은데 말이  아닙니다. '저주가 떠내려가는' 떠내려가는 저주야 붙들 게 뭐 있는가, 잘  떠내려가는데? 떠내려가 버리면 내게 없지요.

 그래 하려면 '저주로 떠내려가는 나를' 하든지 그래야 말이 되지요. 만일 물결로  비해서 그렇게 하려고 하면 '저주라는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는 나를 건져  주옵소서.' 이러면 말이 되지마는 '떠내려가는 저주를...' 떠내려가는 저주가 무슨  상관 있는가? 좀 조심해서, 어쨌든지 그런 식으로 하지 말아요.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을 모르니까 몇 가지 요긴한 말만 들어 가지고 말을  하려 하니 그 말이 바로 안 됩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말 배워 가지고  말하려면 말이 맞지 않고 그런데 똑 미국 사람들 말하듯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늘 아침에 기도하는 것 나는 아멘 안 했어요. 기도가 돼야 아멘을 하지요.

전부 거꾸로 하는 기도인데. 앞뒤가 안 맞아요. 중심은 안 그런데 발표가 틀렸다  그거요. 그런 기도에 아멘 해 놓으면 그것 이루어지면 어쩌려고? 좀 고쳐졌는가  싶어서 내가 오늘 아침에 한번 시켰는데. 이제 처음부터 신소리 멋진 소리 그런  것 하지 말고 꼭 여기 보편적인 일반 사람, 아주 무식한 사람들이 말하는 그 말이  좋습니다.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말과 같은 그런 말을 가지고 속에 있는 내용은 높은 뜻을  말합니다. 진리는 높고 아주 말은 낮고 그래야 그게 참 도통을 한 사람의  말입니다. 진리는 높고, 높은 진리를 아주 쉬운 말로, 아무리 어린아이들이 들어도  들을 말로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며칠 전에 동아일보사에서 와서 물어서 내가 대답을 했는데 그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묻기를 '주일학교도 장년반 설교를 그대로 합니까? 그러면  아이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까?' '꼭 그대로 하는데, 장년반 설교  중에서도 간추려서 주일학생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간추리면 더 강령만 가르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시 묻기를 '그러면 아이들이 어찌 알아듣습니까?' '뭐 저는 본래  설교할 때에 어린아이들도 다 들을 수 있는 그런 말로 합니다.' 이랬는데 그분이  알아듣고 갔는지 안 알아듣고 갔는지 모겠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문자를 쓰려고 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지식 수준은 아주  무식하면서 어디서 가끔 가다가 문자 한 마디씩 들어 가지고 문자를 한 마디씩  턱턱 쓰면 제 딴에는 유식한 것 같지마는 들을 때에는 그게 말 설사요, 말 설사.

'저 사람은 저 말은 제게 합당치 않은 말을 지금 발하고 있다.'  말을 하는 것은 자기의 의사를 발표하는 것이 말이요 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물을 설득시키는 그것이 말인데, 어떤 사람은 보면 거기는 중점으로 두지  아니하고 문자 쓰는 거기다가 중점을 둡니다. 말이 되든지 말든지 문자만 써  가지고 문자로만 엮어 대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말하는 그것으로써 자기 의사를 잘 발표가 되도록, 또 상대방에게 그것이 잘  전달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하는 데는 중점을 두지 아니하고 말에만, 수사해  가지고 말을 묘한 말, 재미있는 말, 요새 유행 말, 또 문자 그런 데만 주력하는 그  사람은 수사 공부나 했지 진리는 그 사람에게는 가지 않아요.

 여기 OOO목사라고 지금 아미동교회 있다 하는데, 그 사람이 그런 면에 힘을  써요. 우리 OOO목사님이 언제 한번 내가 사투리를 쓴다고 그러기 때문에 내게는  고마운데, 내가 말할 때에 '거기는 상관하지 말고 어쨌든지 도(道)를 듣도록  하십시오.' 이랬는데, 말을 들으려고 하면 자연히 거기 신경이 기울어지니까  도(道)를 듣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투리를 쓰든지 미개한 말을 쓰든지 어쨌든지 도를 들을 때는 '저가  말하는데 도를 말하나?' 하는 그걸 중심으로 도를 들으려고 애를 써야 되지 '저  사람이 유행어를 쓰는가? 수사적인가? 저 사람이 무슨 말을 쓰는가?' 그런  중심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요새는 영어 그게, 그것도 가지기는 가져야 되는데 영어가 이제 일반 공통어가  돼서, 그만 외국말이 우리나라에 공통어가 돼 가지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 있는데도 그 말을 씁니다. 우리나라 말이 있는데도 그 말을 써요.

우리나라 말이 있는데 뭐 하려고 그 말을 쓰는지?   그 말이 우리나라 말로  없으면 그 말 쓰지만 우리나라 말로 있는데 우리나라 말은 쓰지 않고 무슨  유행어를 쓴다 그거요. 뭐 터미널이니 뭐이니, 우리말로 있는데 왜 그러고  있어요? 그게 다 넘어 그렇고 건방져서 그렇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면, 그게 말이 됐으면 어쩔 수 없이 자기도 그  말 써야 되지요. 우리나라 말은 없고, 또 우리나라 말이 있어도 그 나라 말이  우리나라 말이 됐을 때에는 써야 돼요. 구루마, 또 리어카 이런 것은 우리말로  말하면 수레인데 그게 그만  리어카 하는 것은 우리나라 말이 돼 버렸어요.

그것은 할 수 없어요. 수레라 하면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들으니까, 리어카라 해야  알아들으니까 리어카라고, 그것도 외국말인데 리어카라 해야 되겠다 그거요. 그런  것은 그렇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지도 말고 뒤서지도 말고 중간을 가야 되겠는데, 될 수 있는 대로  말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그것이 말에 능한  사람입니다.

 또 말을 잘하는 사람은 그게 아닙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은 그 이치가 틀리지  아니하게 이치를, 더듬어도 이치에 틀리지 않는 말 하는 그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서 외국에 대사를 보냈으면 그 사람이 마구 대통같이 이 문자 저 문자  써서 막 주 대는데 속에 내용은 없는 말 했으면 그 사람 말 잘하는 사람입니까?  아니오. 말을 더듬거리고 잘 못 해도 그 사람 하는 말이 국교로는 어디에  가더라도 틀림없는 정확한 말, 참 올바른 높은 뜻의 말, 누가 그 말을 틀렸다 해도  틀렸다 한 그 사람이 숙어지지 틀리지 않은 말을 해서 그 말대로 되었다면 그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세계 정세가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앞으로 이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가 어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그 말을 더듬으면서 해도  그 말이 아무리 분석해도 맞으면 아니라고 부인해도 앞으로 그리 된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말 잘한다 말은 발표한 것이 실력 있는 발표를 했다 그 말입니다. 내용이 아주  참 정확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그렇게 옳은 말 했으면 그 말이 잘한 말이요  그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문자를 써 가지고 하는 그것은 하나의 말의 문체고 구변인데,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은 오랑캐 말입니다. 오랑캐라 말은 적이라 말이니까 오랑캐  말이라는 말은 적의 말이라 그 말입니다.

 이것을 늘 말해 줄 시간 없을 터이니까 꼭 그것 고쳐요. 고쳐서, 이 다음에는  설교할 때에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 쉬고 재미있는 그런 멋진 소리 하려고 하지  말고 꼭 어린아이가 말하는 것처럼 해서, 그 내용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상대방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해석해서 말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 아침 본문에 "깨어 있으라" "자지 말라" "밤에 도적이 와서 도적질해 가는  것처럼 자는 자는 다 도적맞는다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낮에도 잠이 들었으면 밤이나 한가지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깨는 것과 자는  것과 죽은 것이 다릅니다. 죽은 것은 생명이 없는 그자를 가리켜서 죽었다 하는  것이고, 또 자는 자는 생명은 있지마는 죽은 자와 행동은 같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잔다 그렇게 말하고, 또 깨어 있는 자라 말은 감각이 활동하고 있고  이목구비가 활동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말할 때 되면 말하고, 볼 때 되면 보고, 들을 때 되면 듣고 이목구비가 활동하고  있고, 수족이 활동하고 있고 하는 그걸 가리켜서 깨어 있다 말하고, 자는 자는  생명은 있지마는, 이목구비가 있기는 있지마는 이목구비의 활동이 없다 그  말입니다. 들을 줄도 모르고 볼 줄도 모르고, 말해야 될 때도 말할 줄도 모르고,  움직일 줄도 모르는 그게 자는 것 아닙니까? 자면 도적 다 맞지요.

 도적이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우리 영적 도적만 못합니다. 우리 영의 도적은  밤이나 낮이나 계속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순간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눌  자리에 누워서도, 밤도, 낮도 찰나도 이 도적은 떠나지 않고 도적질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일생 동안을 다 몽땅 도적 맞고 마는 사람 많습니다. 하루의  생활도 산 생활은 하지 못하고 수입 있는 생활은 하지 못하고 전부 도적만 다  맞아버립니다.

 자는 것은 신앙이 잔다 말입니다. 신앙이 잔다 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피동이  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생명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성령의 감동이 우리의 생명이요 또 진리의 역사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진리가 우리 생명이 됐고 성령이 우리의 생명이 됐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말하는 것은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거듭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과 진리 역사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성령이 우리 생명이라, 진리가 우리 생명이라 그래 하면 알아듣기 쉬운데 그  말은 왜 안 하느냐? 성령이 우리 생명이요 진리가 우리 생명이라 하면 말하는  사람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듣는 자들이 정죄하기를 '성령이 우리의 생명이요  진리가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면 성령과 진리가 인적 요소가 된다 말이다. 요게  틀렸다. 이단이다. 봐라.' 요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 요소 아닙니까?  그러나 저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해도 아직까지는 제가  말한 것은 이단으로 그들이 정죄할 수 없도록 말해 놨습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한  사람들이 나중에 다 회개를 해야 됩니다.

 우리는 진리와 성령으로 살아났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살렸고 성령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살아난 생명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보니까 죽은 사람같이 꼬집어도 모르고, 흔들어도 모르고, 욕을 해도 모르고,  반가운 사람이 와도 모릅니다. 눈도 귀도 수족도 다 죽은 것 같지마는 보니까  코가 벌렁거리며 숨을 쉬고 있습니다. 가슴이 덜렁거리며 숨을 쉬고 있어요.

그러면 생명의 힘이 폐에 가서 역사하고 있고 호흡기에 대해서는 역사를 하고  있으니까 그 면에는 살았습니다.

 또 눈을 감고 있더니 살며시 불러보니까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생명이 어디 가서 역사하고 있는 증거입니까? 귀에 역사하고 있는 증거  아닙니까? 부르니까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눈만 감았지 자는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귀에 역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가 생명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에게 말로 안 하고 무슨 소리를 톡 하고 나게 하니까 눈을 번쩍  뜹니다. 그러면 그 생명의 힘이 그 사람에게 어디까지 가서 역사하고 있는  겁니까? 귀에 역사하고 있고 눈에 역사하고 있는 증거 아닙니까? 그게  증거입니다.

 또 닭털을 가지고 살며시 대니까, 꼭 자는 것같이 그랬는데 살며시 대니까 손을  저어서 치워 버립니다. '허, 이게 보니까 감각이 생명으로 역사하고 있구나. 생명  역사가 손에도 와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은 순전히 그 생명의 힘으로 모든 전신 전체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힘으로 전신 전체가 활동을 하고 있는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 호흡이  있으며 귀도 눈도 깨어 있다.' 생명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으면 그게 깨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면도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 우리의 귀가 어떤  힘으로 들으면 귀가 깨어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 인격은 어떤 힘으로  들으면 깨어 있는 것입니까? 성령의 힘으로, 진리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진리의 힘으로 우리가 들을 줄을 알면, 성령의 힘으로 영감으로 들을 줄 알고  진리로 들을 줄 알면 그게 귀가 깨어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영감의 힘으로 우리가 봅니다. 보는  것이 성령으로 본다 말입니다. 진리로 본다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은 눈이 뜨여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어떻습니까? 뭘로 움직이면 깨어 있는 사람입니까? 성령으로  움직이고 진리로 움직이면 그게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움직이고 진리로 움직이면 성령과 진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생명이 있으면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그렇게 움직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우리의 의무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이 세 가지뿐입니다.

새생명은 하나님과 결합된 움직임을 가리켜서 새생명이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감의 힘이, 진리의 힘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무슨 일 합니까? 세  가지 합니다. 무슨 세 가지 일 합니까? 죄로 더불어 싸워서 죄짓지 않는 일을  하게 합니다. 죄짓지 않도록, 의롭게 살도록, 하나님과 결합된 생활을 하도록 하는  요 세 가지를 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힘이요 진리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다 도적 맞는다 그 말은 영감의 힘, 진리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다 도적 맞는다, 영감으로 듣고, 영감으로 보고, 영감으로  활동을 하고, 진리로 듣고, 진리로 보고, 진리로 활동을 하고 이렇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영감으로 진리로 활동하는 것은 어떤 활동 하느냐? 영감과 진리로  활동하는 것은 사죄로 활동하고, 칭의로 활동하고, 하나님과 결합된 새생명으로  활동을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이, 육체의 생명이 활동하는 것은 어떻게 활동합니까? 귀로는  듣게 하는 활동하고, 눈으로는 보게 하는 활동을 하고, 수족으로는 움직이게 하는  활동을 하고, 또 모든 신경은 신경의 감각이 감각하도록 활동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생명 활동입니다.

 그러면 진리와 영감이 우리에게 활동을 하면 어떤 면으로 활동하느냐? 어떤  모양으로 활동하느냐? 듣게 하고,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니  어떻게 듣게 하느냐? 죄냐 의냐 듣게 하고, 하나님과 대적이냐 하나님과 일치냐  이것을  듣게 하고, 이것을 보게 하고, 이것을 느끼게 하고,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는 자가 목자라' 양의 우리에 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가 들어왔습니까? 네, 다섯 가지가 들어왔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목자입니다.

 영감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왔고, 진리가 들어왔고, 또 사죄가  들어왔고, 칭의가 들어왔고, 새생명이 들어왔고 이렇게 들어왔는데 그것이 우리의  목자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나에게 구원에 유익을 주고,  이것 외의 것은 다 우리의 구원을 도적해 갑니다.

 먼저 온 자는 몇입니까? 먼저 온 것도 다섯이었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온  것도 다섯이고 먼저 온 것도 다섯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의 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은 영감의  힘으로 활동을  계속해야 됩니다. 영감과 진리로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되고, 볼  수 있어야 되고, 느낄 수 있어야 되고, 경영할 수 있어야 되고, 행동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아니면 다 도적 맞아버립니다. 우리의 생애라 하는 것은 무궁을  마련하는 것인데 다 도적 맞고 만다 그겁니다.

 그러면 자는 잠을 깨우려면 어떻게 깨웁니까? 깨울 때는 자꾸 흔들면 기지개를  뿌지지 켜면서 깹니다. 그러면 이제 생명의 힘이 수족에 옵니다. 정신에도 옵니다.

'정신차려!' 자꾸 이러면 옵니다.

 깨우는 것이 무엇이냐? 생명하고 그 지체하고 연결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생명하고 지체하고 연결을 시켜요. 그 속에 있는 생명이 호흡에만 있다가 자꾸  흔들면 그 생명이 귀에도 오고 눈에도 옵니다. 그러면 눈을 뜨고 수족도 움직이고  이렇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감과 진리와 우리의 모든 영육과 인격을 연결을 시켜야  되는데, 연결시키려면 진리와 연결을 시켜야 됩니다. 우리를 중생되게 한 진리와  연결을 시키고, 우리를 중생케 한 영감과 연결을 시켜야 됩니다.

 중생된 영감과 연결을 시키려면 뭘 해야 됩니까? 성령으로 우리를 중생시켰는데,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성령과 연결을 시키려면 뭣해야 됩니까?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하고 자꾸 연결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아니오?  또 진리와 연결시키려면 뭣해야 됩니까? 성경 읽어야 됩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면  깨게 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움직여야 됩니다. 행동하면 됩니다. 우리가  깨는 것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자기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무슨 행동? 내나 예수님에게 구속받은 세 가지 행동입니다.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쓰면 우리는 진리의 힘과 영감의 힘으로 살 수 있고, 그러면 도적 맞지 않고  우리의 생활은 다 알참이 되는 구원 생활이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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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독창/ 히브리서 11장 5절/ 870208주후 선지자 2015.10.28
84 돈에 미혹받지 말라/ 마태복음 6장 28절-34절/ 880115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8
83 동거동행/ 요한일서 3장 1절-3절/ 870309양성원개강 선지자 2015.10.28
82 동행-순종/ 요한계시록 3장 20절-22절/ 870801토새 선지자 2015.10.28
81 두 가지 결정이 되는 우리의 현실/ 에베소서 1장 19절-23절/ 820729목새 선지자 2015.10.28
80 두 가지 길/ 창세기 13장 6절-18절/ 890222수밤 선지자 2015.10.28
79 두 가지 능력/ 베드로전서 2장 1절-3절/ 860213목새 선지자 2015.10.28
78 두 가지 명령/ 골로새서 3장 1절-4절/ 820414수새 선지자 2015.10.28
77 두 가지 생각/ 로마서 8장 5절-6절/ 820714수새 선지자 2015.10.28
76 두 가지 순종 일곱 가지 축복/ 창세기 12장 1절-9절/ 881030주새 선지자 2015.10.28
75 두 가지 순종 일곱 가지 축복/ 창세기 12장 1절-9절/ 881106주새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