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은 못한다

 

1985. 12. 31 화새벽

 

 본문:창세기 3장 4절∼1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독립자로 짓지를 아니하셨습니다. 언제든지 무엇을 섬기고 **고 지도를 받아야 할 자로 그렇게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독립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게 하실려고 그렇게 지으신 것인데 이 뱀이 와 가지고 하나님의 위치를 해와를 유혹시켜 가지고 빼앗았던 것입니다. 이래서, 해와가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인한 자기 남편에게 늘 지도를 받고 거게 속해서 살았었는데 고만 그 주인을 바꿔 버렸습니다. 배암에게 속해 가지고 배암이 지도하는 대로 그 지도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이 뱀은 물질이나 타락한 천사가 배암 속에 들어와 가지고 배암을 유혹해서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해와가 하나님과 아담에게 속해서 살아야 할 것이 하나님과 아담을 버리고 배암에게 속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멸망하는 시발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독립할 때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속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든지 악령의 인도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를 받고 있지 아무 인도도 받지 않는 찰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안할 때에 그것은 다, 마귀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안했을 그때는 다 마귀에게 속해 가지고 마귀의 감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도덕가든지 어떤 무슨 종교가든지 철학가든지 의인이라고 하든지 간에 성신의 감화를 받지 아니한 그 사람은 전부 마귀의 감화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독립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해서 굳게 잡고 회개를 합시다.

아, 나는 이때는 성령의 감화는 받지는 안했지마는 악령의 감화는 받지 안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에서 기독자들이 멸망을 받습니다. 성령의 감화에 속하지 안했을 때에는 벌써 마귀의 감화에 붙들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독립 없다, 내 마음이 홀로 독립하는 때는 없다, 내 생각이 독립하는 때는 없다, 내 뜻도 소원도 독립하는 때는 없다, 내 말도 독립하는 때는 없다. 내 말이 성령에 속하지도 안하고 마귀에게도 속하지도 안하고 나는 내대로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거게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절대 독립은 없습니다. 자기가 말을 하는 것이나 마음을 가진 것이나 생각을 가진 것이나 소원을 가진 것이나 욕심을 가진 것이나 뜻을 가진 것이나, 기쁨을 가진 것이나 슬픔을 가진 것이나, 노를 가진 것이나 웃음을 가진 것이나, 근심을 가진 것이나 평안을 가진 것이나 어떤 것이든지 자기는 성령님에게 속해 가지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면 마귀로 말미암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이지 여게도 저게도 관련 없이 독립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고게서 마귀의 유혹은 다 들어와 가지고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고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마귀가 들어오면 우리에게 온갖 해를 주는 줄 알고, 또 우리를 꼬우는 줄 알고, 우리의 마음이 다 어두워지고 삐뚤어지는 줄 알기 때문에 마귀는 다 싫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마귀는 다 싫어합니다. 또 안 믿는 사람들도 마귀는 싫어합니다. 마귀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 모두 ‘호사다마라’ 좋은 일에는 마귀가 들어 가지고서 방해를 지긴다 해서 다 마귀를 싫어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마귀를 싫어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마귀를 싫어합니다. 마귀를 싫어하면서 마귀에게 속해 가지고서, 마귀를 싫어하면서 마귀는 마귀 아닌 줄 알고 마귀가 딴거 있다고 ‘너는 마귀에게 속하지 안했다’ 해 가지고서 유혹해서 일생을 고대로 망치게 되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도 저게도 속하지 안하고 나는 내 마음은 그냥 독립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마귀는 싫어하는데, 마귀를 싫어하거든 성령의 감화에 속하지 안했을 때에는 전부 모조리 마귀에게 속해서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나는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하는 것을 그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생각이나 말이나.

그러기에, 자기가 흔한 마음, 아주 마음이라 하는 것은 재빨라서 그저 찬송 한 절을 할 때도 그 마음이 여러 번으로 이렇게 변동되는 그런 일들이 있는 것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또 자기가 한 시간 무슨 일을 하면서도 그 마음이 여러 모양으로 변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은 날래기가 그 속도가 번개 같다, 이 마음 가졌다가 저 마음 가졌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공상이라, 소용 없는 마음이라 그래, 공상이라. 또 그런 걸 가리켜서 모든 육신의 생각이라 이렇게들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빠른 그 마음에서 마귀를 배척하고 마귀를 물리쳐야 되지 마음으로서는 영접해 놓고, 또 생각으로서도 영접해 놓고, 소원으로도 영접해 놓고, 정신으로도 영접해 놓고 그러면, 이 마귀란 놈이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다 점령 다 했는데, 중요한 것은 점령 다 하고 중요한 것은 다 그것에게 맡겨서 그것이 지배하고 있는데 껍데기 이 수족이나 또 이거 말이나 또 보고 듣는 이런 거나 그것이나, 그것을 바로 할라고 이래 하면, 바로 할라고 하나 속에 벌써 알맹이를 마귀가 점령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할라 하는 그것조차도 마귀의 감화를 받아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 전부가 다, 바로 한다는 것이, 바로 한다는 그 소원을 가졌는데 꺼꾸로 되는 것을 바로 한다고 그렇게 오판을 해 가지고 다 사람이 절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류 시조 때부터 멸망하는 것이 마귀로 말미암아 멸망되고,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이 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데이것을 마귀를 물리치고 성령을 영접하는 데에는 제일 쉬운, 변동 쉬운 내 마음에서부터 단속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벌써 사람은 살인하는 것은 마음으로 벌써 미워하면 벌써 살인했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마음을 단속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남자나 여자나 보고 그 이성간에 마음에 음욕을 품었으면 벌써 음행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도적질하는 것은 네게 해당되지 안하는 것을 벌써 그것이 좋다, 아름답다 그렇게 네가 보고 탐스럽게 여기는 것이 그게 벌써 도적질 한 것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 것은 다 마음에서부터 단속하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는 두말 할 것 없이 마귀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자는 성령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붙들고 놓지 안해야 되겠고 우리는 마귀를 용납지 안해야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붙들고 놓지 안해야 된다는 말은, 우리가 성령님을 붙들라고 해도 그분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붙들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내가, 성령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은 내가 성령님을 배반하지 안하면 성령님에게 붙들린 것입니다. 내가 성령님을 배반치 안해야 됩니다. 배반치 안해야 내 모든 것이 살고 금생과 내세에 모든 것이 다 생명과 평강과 행복으로 이루어지지 이 성령님만 떠나면 자꾸 망합니다.

제가 망하기를 마귀란 놈이 우리를 아주 축소시킵니다. 우리의 눈이 보는데 예를 들면은 만 가지를 봐야 될 터인데 만 가지 가운데 하나만 보도록 해 놓습니다.

이렇게 자꾸 우리의 눈을 가리워서 전면을 보지 못하게 이렇게 자꾸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이러기에, 망한다 하면은 그이의 영원이 망해도 그것도, 그게 제일 큰 건데 그게 상관없고, 또 하나님과 진리와 서로 원수가 됐으면 그것보다 더 없는 건데 그거 망한 것도 모르고, 또 그 사람에, 하나님의 형상인 그 인격이 절단나고 사람의 가치가 절단나면 그게 망하는 것인데 사람의 가치가 절단나는 그런 것도 망하는 줄 모릅니다. 또 그 사람이 사람의 실력, 사람노릇 하는 실력 그게 망했으면 참사람의 실력은 없어진 것인데, 사람노릇 하는 실력은 그런 것이 없어져도 그것 또 없어진 줄을 모릅니다. 망한 줄 모릅니다.

다만 안다는 것이 도적질을 하든지 사기를 하든지 협잡을 하든지 남을 어떻게 해치든지 간에 제 눈 앞에 돈만 있으면 밥만 있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 예를 들면은 백 가지가, 구십 구가 다 망했는데 돈 하나만 있으면 그 사람을 망하지 안했다 이렇게 보는, 인간들이 모든 평가에 대해서 그 시야가 좁아져서 아주 일부분만 보기 때문에 망한 것을 모르게 되고, 또 그보다도 모든 지식과 비판과 평가가 꺼꾸로 되기 때문에 망하는 것은 행복이라, 행복은 망하는 것라 이것을 그만 꺼꾸로 정반대로 이렇게 평가하게 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은 뭐 자꾸 망해 갈수록이 그게 흥한 것이고 성공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 다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질로 사는데 물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억억만도 넘습니다.

참 가치 있는 것 필요한 것은 다 우리에게 가리워졌고, 또 하나님께서 가루어서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생명과는 보지 못하게 했읍니다. 가루어서 보지 못하게 하고 전부, 필요한 것 중에도 제일 천한 것 그런 것 말단의 한 두 가지만 있고 좋은 것은 다 없어져 버렸고 그 좋은 것은 보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걸 주장하고 있지마는 물질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필요가 많지를 못합니다. 볼 수 없는 그게 많습니다. 갓난 아이 말하면 뭐 그런 거 하나도 예를 들면은, 사람은 밥은 볼 수 있지마는 공기는 보지를 못합니다. 밥은 보지마는 이 햇볕이라 하는 것은 볕은 보지를 못합니다. 햇볕은 밥보다도 몇백 배 더 가치가 있습니다. 공기도 그 가치 있습니다. 밥은 안 먹고 얼마 동안 지낼 수 있을지라도 공기는 한 오 분 안 먹으면 그만 썩습니다. 오 분을 그 숨을 못 쉬고 딱 해 가지고 있으면은 그 사람이 고만 썩어 버립니다. 숨을 오랫 동안 쉬는 것을 연습했다 할지라도 오 분을 벌써 그랬으면은 그 사람이 죽지는 안하고, 혹 기절했다 할지라도 오 분 지나면 벌써 속에서, 산소가 들어가 가지고서 다 그렇게 소생시키지를 안하기 때문에, 썩은 것은 내버리고 거부 생신을 하지 안하기 때문에 벌써 속에는 썩었습니다. 벌써 간 같은 것은 벌써 썩어서 피가 나옵니다.

속에 피가 나와, 오 분 숨을 안 쉬면은 피가 나옵니다. 산소를 안 먹으면 피가 나와요.

이러니까, 뭣이든지 우리가, 보이는 걸 위주하지마는 우리에게 물질에 대해서도 가치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것은 가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귀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나왔다, 보이는 것은 영원하나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질 것들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서 평가해 놨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배암이 오면 우리가 모든 것이 다 망하지마는 망하는 걸 모릅니다. 또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이 다 생명과 소생으로, 부흥으로, 다 회복으로, 온전으로 이렇게 점점 향해 가지마는, 보이는 것 그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귀한 것부터 안에 내장부터 성해져야 되지 속에, 예를 들면은 우리의 인체에도 속에 있는 내과에 속한 것이 상해 가고 있는데 겉어머리 수족이 아무리 좋아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수족이 병신이 돼도 속만 건강하면 그거는 차차차 소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가 접하므로써 우리가 치료되고 좋아지는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요긴한 거 속에 내부부터, 그 신령한 면 하나님과의 관계, 또 이 모든 인인 관계, 또 자기 자체의 모든 정신, 마음, 생각 이런 것이 다 바로 돼서 사람부터 바로 되도록 이렇게 하는 이 축복을 주지마는 그건 복으로 모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무슨 그 돈 끄트머리에는 화약이 들어 있어서 돈 그것 취하면 확 폭발돼서 죽을, 예를 들어 비유컨대, 이럴 수 있는 그거는 돈은 오면은 그거 암만 폭발할 그 화가 붙어 있어도 복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자기 마음이 조금 변해서 아무래도 옳고 바른 것을 좀 생각할 여지가 있고, 뭘 자세히 좀 생각해서 또 예의와 체면이 좀 생겨지고, 또 좀 마음에 양심이 좀 생겨지고 하는 그런 것은 지극히 큰 보배인데 그까짓 거는 돈만치 여기지 안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전부 꺼꾸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전부 변질됐고 전부 송장입니다, 말하자면. 전부 송장이오. 전부 송장이니까 그거 아이가 나도 저주 아래 낳은 거는 그거 송장이오. 송장이니까 그것이 송장인데 얼마면 완전히 썩어 버리느냐 하면은 팔십 년 되면 완전히 썩습니다. 어떤 거는 얼마 안 되면 한 여남은 살 먹어 죽으면 여남은 살 되면 그거 썩어 버리는 것이오. 전부 다 송장이오.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는 사람은 독립하지 못한다. 독립하지를 못한다. 하나님이 짓기를 그래 지어 놨다. 독립하지를 못한다. 하나님에게 속했든지 마귀에게 속했든지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접선할 수 있도록 이렇게, 와서 가깝게 있는 하나님은 누구냐?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를 대속해서 십자가의 대행 대형 대화친해 가지고 대속하신 주님은 지금 부활하셔 가지고 있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신성으로만 있느냐? 아닙니다. 인성과 신성과 신인 양성 일위로 계십니다. 신인 양성 일위로 계시는데 신인 양성 일위로 계시는 그분이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한다고 했는데 그분의 이름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은 그분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이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라, 그리스도의 영이라. 십자가의 대속하신 그 하나님이 지금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계신다 말은 이제 대속을 했기 때문에 이 밑천을,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을 해 주셨기 때문에 이 기본구원을 근거해 가지고 우리들을 제사장 선지자 왕, 이 실력을 갖추기 위해 가지고서 지금 우리에게 영으로 와서 역사합니다. 이래서,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는 영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이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라. 그러면, 그리스도는 영은 누구의 영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도성 인신하시기 전에는 그리스도는 신성뿐이요 인성이 없었습니다. 인성을 입고 온 후에 예수님이 되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는 신인 양성을 가지신, 양성을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래 가지고, 예수님의 영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들과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가깝게 접해서 늘 동거 동행할 수 있는 영은 누군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요 또 성령님 안에 성자가 계시고 성자 안에 또 성부가 계셔서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들과 거처를 같이 하겠다 이랬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삼위 일체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와 거처를 같이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내가 나를 내 계명 지키는 그 사람을 통해서 다 나타내겠다 다 역사하겠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계십니다. 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어떤 역사로 계시고 있는고 하니 우리 죽은 영을 영원히 사는 영생으로 다시 살리는 이 영으로 우리 안에 항상 계십니다.

그러면 중생된 사람이면, 그 사람의 영을 영생으로 살리신 그 그리스도의 영, 성령, 이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 일체의 하나님은 중생된 그 사람 속에는 항상 계시고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계시고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는데 우리에게, 떠나는 영은 어떤 영이냐? 그 영이 우리를 중생시킨 그 하나님으로서는 우리 안에 항상 계시지마는 우리의 심신을 붙들고 역사하시는 그 역사의 영, 역사라 말은, 역사라 말은 한문 글자인데 움직일 역자, 일 사자, 일을 움직여 한다 그말입니다. 역사라 말은, ‘아, 여게 큰 역사가 시작 됐네.’ 일이 시작됐다 그말입니다. 역사의 영.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시는데 제일 처음에는 무슨 영으로 와 역사했느냐 하면은 제일 처음에는 기록 영감으로 역사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는 기록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한 기록 영감으로 와 가지고 역사하셨고, 그다음에는 성경 안에서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내재적 영감으로, 성경 이 자체 안에, 성경 자체 안에 내재적 영감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라면 둘 아닙니까? 또, 우리를 중생시킨, 중생시킨 영감으로 또 우리 안에 계십니다. 또,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할라고 하는 조명의 영감, 우리 마음을 밝도록 역사하는 밝게 하는 그 조명의 영감으로 우리 안에 또 역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 안에 와 가지고서 이런 활동 저런 활동 작용을 해서 활동을 하도록 역사적 영감으로 또 와서 계시고 있습니다. 그라면, 영감이 몇 분입니까? 몇 가지입니까? 다섯 가지 영감으로 우리에게 와서 계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항상 계시는데,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 내가 너희에게 들어가서 너는 나를 더불어 먹고 나는 너로 더불어 먹겠다. 문을 두드리니 문을 열어 달라 이렇게 그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고 아가서에도 말씀하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그 두드리는 이는 누구입니까?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의 영이요,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문 밖에서 두드린다 문 밖에서 두드린다 그말은 우리의 마음과 고기덩어리 이 육 밖에서 두드린다 말입니다. 우리의 육 밖에서. 영과 육, 영 안에는 계시지마는 육 밖에서 두드려 가지고서, 두드려서 이 육을 열어 달라 그말입니다.

하나님은 강제하시지, 강제 하시면 그까짓 거 싹 없애 버릴라면 없앨라면 없앨 수 있고 하지마는 우리를 강제하지 아니하시고 유한한 자유지마는 자유를 주셔 가지고서 자유 의지를 우리에게 길러 가지고서 이렇게 자유 의지를 가진 이런 존재로 만들어야 하나님의 모형이 되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자유자시기 때문에 안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유한한 그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영접하면 영접하고 영접 안 하면 영접 못 합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내 안에 삼위 일체 하나님의 신이 와서 계셔도 내가 부인하면 쫓아낼 수 있습니다. 쫓아내면 쫓겨 나갑니다. 하나님이 왜 전능인데? 하나님이기 때문에 쫓겨 나갑니다. 왜? 우리가 쫓아 낼 때에 안 쫓겨 나가면 우리에게 강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게서 그만 죽어 버리고, 유기적인 인격성은 우리가 그만 말살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가라면 나가고 영접하면 들어오고 이렇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내가 영접하고 있다가서 영접하고 있는데, 바울이 말하기를 갈라디아서에 두 사이에 우리가 끼어 있다 하는 것은 한쪽에는 이 성령님이 계시고 한쪽에는 배암 악령이 이래 있는데 우리가 그 사이에 서 가지고서, 어떤 현실이든지 그 현실을 처음 만나는 현실이기 때문에 고 현실은 내가 이렇게 역사를 하든지 저렇게 역사를 하든지 그 현실은 역사해야 되는데 그 현실 역사에 이제 그때에, 그 현실 역사를 이 성령님에게 연결돼 가지고서 성령님에 피동돼 가지고 내가 역사를 하나, 악령을 영접해 가지고서 악령에게 피동되어 역사하나? 내가 이 중앙에 있으니까 성령님은 성령님을 영접하라고 문을 두드리고, 악령은 또 저를 영접하라고 문을 두드리고 이런데 우리는 자유성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성령님을 영접할라고 이래 하면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들어와 가지고 날 주관합니다. 내가 고 현실을 성령님을 따라서 내가 현실을 생활하면은 이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내가 고 현실에서 영접해 들였습니다. 영접해 들였으면 고 현실에 고때에 관련된 내 심신의 기능, 부분적인 그 요소는 성령님과 영원히 하나, 결합이 돼 버린다 말이오. 결합이 되고 악령이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그래 가지고 있다가, 고다음 현실을 만났습니다. 고다음 현실을 만날 때에 또 내가,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 됐다고 다 되는 게 아니고.

하나 하나 개별성을 가졌기 때문에, 고다음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때에 내가 이미 모시고 내가 성령님으로 산 내가 성령님을 모시고 그대로 내가 나가면 되지마는 현실을 만났을 때에 내 마음은 변해집니다. 변해져 가지고서 전 시간은 성령님을 영접해 가지고 내가 동행해 살았지마는 또 딴 현실을 만나니까 내 마음이 흔들려서 이래 볼까 저래 볼까 할 때에는 성령님은 쫓겨 나가야 됩니다. 성령님은 쫓겨 나가야 됩니다.

내가 이래 볼까 저래 볼까 할 때에 성령님을 영접하지 안하고, 성령님에게 나는 복종해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볼 수 없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장생골 가서 많이 배우지 안했습니까?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게 뭐 입니까? 예? 크게 해 봐. 예? 성경 말씀 아니요? 성경 말씀이라. 말씀이고, 말씀이 또 나타난 거는 성경 책이고, 이제, 이렇게 성령님이 확실히 볼 수 있도록 이렇게 말씀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내가 이 현실을 만날 때에 나는 요 말씀대로 요대로 살겠다 하면은 성령님을 영접한 거라.

성령님을 배반하지 안하고 이 성령을 모시고 사는 거라. 모시고 살면 성령님은 쫓겨 나가지 안하고 내 안에 와 가지고서 나를 붙들고 역사합니다.

그래서, 나를 영접하면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하는 먹는다 그말은 인격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먹는다면 입으로만 먹는 줄로 알지마는 인격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인격이 뭘 먹느냐? 인격은 행동으로 먹습니다. 그 인격이 죽었다 하면은 인격이 배 고파 죽은 것은 그 인격이 행동 안 했으면 죽습니다. 그 인격이 또 나쁜 행동 했으면은 그만 죽습니다. 옳은 행동 안 해도 죽고, 나쁜 행동해도 죽고 옳은 의를 진리를 행하게 되면 그 인격이라 하는 거는 살아납니다.

그러기에, 그때 현실에서 내가 하나님을 배척할라면 배척하고, 영접할라면 영접하고, 마귀를 배척할라면 배척하고, 마귀를 영접할라면 마귀를 영접하고 요 우리 현실에서, 현실 현실마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영접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아주 쉽습니다. 쉬운 것는 요 현실에서 이 두 영이 있고, 두 영이 있고 영 밖에 껍데기에는 뭐이 있읍니까? 껍데기에는 뭐이 있습니까? 두 지식이 있습니다. 성경 지식도 있고 세상 지식도 있습니다. 이러면, 내가 세상 지식을 따라서 하면 그 속에 마귀를 내가 영접한 것이 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하면은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현실에서 내가 혼자 독립은 못 하니까, 독립은 못 하니 내가 성령님을 영접해 가지고서, 성령님은 내나 하나님인데 왜 이름을 성령님이라 했으냐 하면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으신 이 구원을 우리에게 완성시켜 주시기 위해서, 완성시켜 주시기 위해서 지금 이 책임을 지고 오신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서 성령님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이 현실에서 성령님을 영접할 수도 있고 악령을 영접할 수도 있고 어느 거든지 영접하지 이것도 저것도 다 영접 안 하고 나는 홀로 산다. 어리석은 자들이, 잘난 자들은 말이오. 잘난 자는 그 자는 완전히 망합니다. 세상에 잘났다는 것이 마귀가 많이 들었다 그말이요, 많이 버려졌다 말이요, 마음이 많이 악해졌다 그말입니다. 잘난 것이. 이 세상에 잘나 가지고 모든 거 다 이래 권세 잡고 하는 그것이 잘난 게 아니라 그것이 배암의 지식으로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통달한 자는 하나님의 도를 모릅니다. 지혜있고 통달한 자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가 알았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가난한 자가 다 복이 있어서 차지하지 부강한 자 그자는 이 마귀의 것이 크기 때문에 그것이 완전히 변화만 되면은, 변화만 되면은 좋지마는. 여러분들, 도살막에서 소를 잡는데 송아지 잡으면 고기가 많아요, 큰 소 잡으면 고기가 많아요? 큰 소 잡으면 고기가 많아요. 이 세상에 잘난 그것이 완전히 때려 잡혀서, 하나님 앞에 때려 잡혀서 완전히 전환이 되면은 참 수입이 많고 크지마는 이것이 전환되기가 그렇게 어렵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현실에서 내가 독립은 못 하니 반드시 현실에서, 현실은 우리가, 말하는 현실도 있고, 생각하는 현실도 있고 또 소원하는 현실도 있고, 욕심하는 현실도 있고, 웃는 현실도 있고, 성나는 현실도 있고 그 현실은 여러 가지 있지 않습니까? 어짜든지 현실에 그 행동은 마귀를 청해 가지고 마귀와 합작된 행동이든지 그리 안 하면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으로 더불어 합작된 그 행동이든지 이 둘 중에 하나이지 독립은 없다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똑똑히 생각하십시오. 독립은 없다.

그러면, 독립은 없는데, 우리는 자유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기 때문에 자유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사람은 자유성이 없습니다. 절대로 마귀를 배반치 못합니다. 그거는 이 두 사이에 끼여 있지 않소. 마귀에게 딱 붙어서 속해 가지고 있어. 마귀가 왕노릇합니다. 마귀의 종입니다. 마귀에게 딱 붙어 가지고 마귀를 그 찰나도 떠나지 못합니다. 마귀가 그 마음을 주관하고 있다 이랬어.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귀에게 속하게 된 그 모든 댓가를 예수님이 다 댓가를 치르고서 우리를 거기서 구출해 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마귀와 죄와 사망이 우리에게 왕노릇 못 합니다.

이 자유하는 자인데 다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구출은 됐지마는 요 현실에서, 영은 구출이 완전히 됐지마는 이 심신은 요소가 여러 수억도 넘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 마음이라 하는 것도 굉장한 많은 분자로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라는 것에도 굉장한 많은 분자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분자로 돼 가지고 있는 걸 요새는 말하기를 그거 세포라 이렇게 말하는데, 분자로 돼 가지고 있는데, 영은 구출됐지마는 아직까지 이 심신의 기능은 구출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구출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야 되지 입지 안하면 구출 못 하는데 요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느냐 벗느냐입니다. 마귀에게서는 해방돼서 나왔지마는, 나왔지마는 요 현실에서, 다시 두번째 마귀에게 붙어 가지고서 마귀를 영접해서 제가, 마귀를 영접하느냐, 이제 마귀에게는 예수님께서 일단 해방시켜 주셨으니까 해방한 데서 다시는 마귀에게, 마귀를 영접해 들이지 안하고 하나님을 영접해서 영원히 사느냐 하는 요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현실인데, 자유한 자가 다시 망령되게 마귀를 현실에서 영접하게 되면은 두번째 마귀를 영접했습니다. 처음에 영접한 것은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영접했고, 그 영접한 그 영접의 원죄를 통해 가지고서 그다음에 본죄라 하는 것은 그 원죄로 말미암아 현실 현실마다 전부이 죄만 지어 가지고서 이와같이 나가던 것이 우리 현실에서는 지금, 해방되어 자유 하니까 요게서 성령을 영접하느냐 마귀를 영접하느냐 둘 중에 하나인데, 만일 그때에 우리가 성령을 영접하지 안하고 마귀를 영접하게 되면 어찌됩니까? 마귀를 영접하면은 그 마귀 영접한 심신의 기능, 그 현실에서 마귀 영접한 심신의 기능은 그것은 마귀를 영접했으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이제, 마귀 영접했으니까 죽습니까 삽니까? 죽으면 그 죽음을 뭐라고 했습니까?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망.

그런데, 우리가 이거, 해방을 받았는데, 해방을 받았는데 현실에서 성령을 영접하면은 성령은 뭘 하고 있느냐 하면은 성령이 오시면 나를 증거한다 했읍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사죄 칭의 화친을 우리에게 입도록 해 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영접하면은, 성령을 영접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마귀에게서 해방받은 우리의 심신이 성령을 영접하면 뭐이 됩니까? 우리 심신의 기능이 뭐이 됩니까? 영생. 따라 합시다. 영생! 영생! 영생!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해방을 시켜 줬지마는 요거 현실에서 제가, 다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혀 줄라고 성령이 오시는데 성령을 영접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고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이 대속의 공로를 영접해서 있기 때문에 고 현실에 해당 됐던, 고 현실에서 지금 이 마귀의 것이 되느냐 하나님의 것이 되느냐 고 양쪽을 두고서 시비를 결정 지우는 고 현실에서 성령을 영접하면 고 심신의 기능은 고게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기 때문에 영생이 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은 우리 심신의 기능이 둘째 사망을 받느냐 영생을 받느냐 요것이 우리 현실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받을라면은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 받습니까? 말을 해 봐요, 여러분들이. 성령을 영접하면 영생을, 현실에 해당된 기능이 성령을 영접해서 영생하게 됩니다. 또 그 현실에서 둘째 사망을 자기가 받게 되면은 어떻게 하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습니까? 마귀를 영접하면. 그러면 우리 현실에서는 영생이나 둘째 사망이나 이것이 없고 이 둘이 아닌 딴 무엇이 있습니까? 딴것은 없습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이 현재 말하면서, 사람들을 어리석게 내 말하는 이 기능이 생각하는 기능이, 또 욕심하는 기능이, 희로 애락의 기능이, 모든 지혜와 총명이, 수족의 행동이, 듣는 기능이, 모든 전체 비판하고 평가하는 기능이 모든 기능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요 현실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요 현실이오.

그러기 때문에, 사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사는 것은 성령을 영접하면 삽니다.

죽는 것은 마귀를 영접하면 죽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독립할 수가 없는데, 그러기에, 우리는 말을 하면은 그 말이 영생하는, 영생하는 말의 기능이 됐으면 그 말의 기능은 영원히 내가 씁니다. 세상에만 쓸 게 아니라 영원히 씁니다, 영원히.

세상에서도 쓰는 것은 세상에서도 그 사람이 말의 기능이, 예를 들면, 말의 기능이 영생으로 살았으면, 살고 살고 하면은 그 말의 기능이 있습니다. 말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의 능력이 있어서 다 같이 말해도, 다 같이 말해도 말의 능력이 천 배 만 배 넘습니다. 천 배 만 배.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다 같이 말하지마는 그 말의 효력이 천 배 만 배 커. 또 목사들도 그 말하는 효력이 천 배 만 배 큽니다.

다른 사람들은 욕을 하지마는 나는 그 사람을 나는 존경하고 있읍니다. 아, ○○○ 목사는 교인 수가 오십만 명인란데, 오십만 명이 ○○○ 목사 말하면 다 그대로 순종하고 반대를 안 한답니다. 그거 어리석어 그렇다.’ 거게도 뭐 장관도 있고 박사도 있고 다른 데보다 더 많습니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야. 그게 뭐이냐 하면 말의 권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 말의 권능이 있기 때문에.

이런데, 교인 불과 한 오륙십 명, 한 백 명 그것도 냅두고 한 이삼십 명 고거 두고도 말해야 한 마디도 안 듣습니다. 말 암만 해야 한 마디도 안 들어.

그러니까, 쩔쩔 매고 그 말의 권위가 하나도 서지 안해.

그거야, 말의 그 기능을 살린 것이, 그 말의 기능이 한 번 살고 두 번 살고 이러면, 그 현실에 한 현실에 살고 두 현실에 살고 열 현실에서 살고 백 현실에서 살고 천 현실에서 살고 만 현실에서 살고 하면은 그 말의 기능이 자꾸 살아난다 말이오, 말의 기능도 살아나지, 또 그이의 행동의 기능도 살아나지, 생각의 기능도 살아나지, 또 모든 총명의 기능도 살아나지, 수족의 기능도 살아나지, 이 모든 기능이 살아난다 말이오. 살아나는데, 이 현실에서 그게 살아나는 건데, 현실에 죽인 자는 나중에 다 자꾸 죽여 놓으면 그 사람이 늙어 갈수록이 권위가 하나도 없어요, 자꾸 죽으니까. 그러나, 우리 기독자는 바로 살면 마지막의 권위가 어찌 되느냐? 최고의, 최종에 제일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가 나중에 늙어서 그때는 그 걸음을 못 걸어서 메다가 강단 위에 놓으면은 다른 설교를 하지 못해. 말을 많이 못 하기 때문에.

단지 설교한다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 했는데, 그 말씀을 했는데 온 대중이 전부 대성 통곡을 하고서 회개를 하고 큰 능력을 받아.

이러니까, 우리가 이 현실에서 살려 놓은 기능은, 살려 놓은 기능은 이것은 영원히 삽니다. 살려 놓은 기능은 이것은 영윈히 살아서 필요한 건데, 이것이 이래 살아 가지고 가다가 마지막에 어떤 때에 싹 배반해 버리고, 보면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그게 있습니다. 개별성 되는 것이 있고 또 종합이 있고, 개별 행동이 있고 종합 행동이 있어요. 개별 행동이 있고 종합 행동이 있는데, 종합 행동에 승리하는 것과 종합 행동에 패전하는 것이 이것이 큰 영향이 있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은 배 추달 집사가 주일을 지킬라고 했는데 주일 지키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데리고 가 가지고서 ‘아나 이거 도야지 이거 좀 지고 가자.’ 주일날 지고 가자고 했다 말이오. 주일날 지고 가자고 그게 주일 범하게 할라고 지금 그 사람들이 그라는 거라, 인민군들이. 그라니까 ‘아,오늘 주일이라서 못 지고 갑니다.’ 또 ‘그러면, 네가 이 개를 한 마리' 잡아 가지고 이제 저거가 구워 먹을라고. ‘개 이거 끌고 가자.’ `아, 개 끌고 가고 도야지 지고 갈 수 있지마는 오늘 주일이기 때문에 못 합니다.’ 이래 놨다 말이오. 이라니까,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상. 이러니까, ‘그러면 네가 빗자루 가지고 마당 이거 한 번 쓸어라. 그러면 살려 주마.’ ‘집에서는 주일날 얼마든지 비로 마당도 쓸고 이래 소제도 하고 이래 합니다. 하지마는 당신이 지금 도야지, 개, 이제는 마지막에는 빗자루 하는 것은 이 비로 쓰는 이것 같으면 내가 쓸 수가 있었는데 이거 나 주일을 범하게 하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단계적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내나 빗자루 쓰는 것이나 도야지 짊어지고 가는 것이나 꼭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해 가지고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키다가 순교했어.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 그렇게 하다가 그만 아까운 목숨 일찍 죽었다.’ 아니오. 그때 그는 생명이 끝날 시간이기 때문에 계명 지킴으로서 죽었으니까 이미 폐물될 그 생명이 이제 완전히 승리의 생명이 됐기 때문에 그는, 삶이 반 죽음이 반 이 둘인데, 일생 동안 순생하는 것이나 그 죽음을 주를 위해 죽는 것이나 비중이 같습니다. 이래 둘이 합해서 완전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순생만 했지 순교는 못했는데 일생 동안 순생하고 순교 못 한 사람 그 사람이나 일생 동안 순생은, 주를 위해서 살지 못하고 깨끗이 살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주를 위해서 순교한 사람이나 비중이 같애, 나중에 가 보면. 그 사람은 그라면 살기도 그래 했지, 생명도 폐물을 완전히 보배로 만들어 버렸지 이래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실 현실 기능에서 이와같이 지금 살려 가지마는 고것이 결론지을 때가 있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아, 요거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요랬지마는 마지막에 최종이 있다 말이오. 최종에 가 딱 져 버리면 그만 헛일이라. 고걸 가리켜서 아, 등불 들고 신랑을 맞이하는데 보니까 지금도 불이 켜였고 불이 켜였고 불이 켜였고 다 불이 켜 있다 말이오. 불이 켜 있지마는 마지막에 신랑 올 때에 등불이 꺼져 버리면 그만 헛일이라. 알겠습니까? 이제 고것이 처음에서 단계적으로 차차차차 올라가다가 마지막에 최종의 어려운 단계에 고때에 딱 승리해 버려야 되는 것인데, 사건마다 요것이 최종은 뭐이냐, 조것이 최종은 뭐이냐, 최종 최종을 승리해야 되는 것이지 최종 승리 못 하면 헛일이라 말이오. 그래 현실에서 이겼지마는 고것이 최종이 됐으면 하지마는 최종이 안 되고 고것이 아직까지 지금 최종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건설해 가고 있는 것이라면은 건설, 건설하다가 마지막에 탑을 쌓고 난 다음에 탑 꼭대기를 딱 해 놔 버려야 되지 꼭대기를 못 하면은그 공사는 다 중단됐기 때문에 수치가 되고 만다 그거요.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는, 우리는 일 순간도 독립하지는 못한다. 독립하지는 못한다. 악령으로 동행하든지 성령으로 동행하든지 동행하지 독립은 없다. 요걸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독립은 없다. 그러면, 악령으로 동행하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되고 성령과 동행하면 영생하게 된다 그러면 현실에서 우리가, 말을 영생시켜서 영생된 것은 그 기능이 자꾸 있습니다. 그 기능이 늘 있다가 마지막에 콱 최종의 마지막 판결, 최후 판결에 가 가지고서 콱 지지 안하면 그만 그거는 영원이라. 그러면. 자기가 개별적으로 이겨야 되겠고, 마지막에 종말 결론인 고때 이겨야 되고 이러니까, 밤중을 넘겨야 된다. 밤중을 넘겨야 돼 고 사건마다 밤중이 있다 말이오. 최고봉이 있다 그거요.

그런고로, 독립은 못 한다 요것을 기억합시다. 이래 가지고서 이것을 기르면 이것이 무슨 자람이냐? 이것 자람이 무슨 자람이냐? 성령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라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성령님을 따라서 피동되는 게 자람입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피동되는 게 자라. 이러니까, 무궁세계에 하나님 따라서 피동되는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다 통치할 수가 있는 거라, 그 실력이. 그것이 전지 전능의 생활이라.

이러기 때문에, 독립은 못 한다, 현실에서 우리의 심신의 각 요소 요소의 기능을 마련하고 이것을 영생으로 마련할 수 있다, 그런데, 고것이 잠깐 하나 생각할 것은 고거, 밤중이 있다. 고게,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하지마는 마직막에 지면 헛일이라. 아, 편씨름을 할 때에 이겼다, 이겼다, 자꾸 이겼습니다. 자꾸 이겼는데, 보니까 벌서 오십 명 단체인데 편씨름을 했는데이쪽 편이 마흔 아홉 명을 이겼습니다. 마흔 아홉 명을 이겼어. 이기고 이제 하나 남았어. 그러면 그게 이긴 겁니까 진 겁니까? 이겼소 졌소? 이겼소. 졌소? 이길 희망은 있지마는 이긴 것은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이길 희망은 있지마는 이긴 거는 아닙니다. 왜? 하나가 있기 때문에 저게 어쩔지 모르겠다 말이오. 저게 어찌 될지 몰라. 아, 나중에 마지막에 보니까 그거 하나가 들어서 마흔 아홉 명이 다 져 버리고 하나 남았고 이쪽에는 그 마흔 아홉명이 다 그냥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데 이겼다 싶었는데 아, 나중에 하나 그게 들어 전부 다 잡아 넘겨 버려. 다 잡아 넘겨 버려면 아,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잡아 넘기니까 처음에 마흔 아홉 명이 이겼던 사람들이 다 패전되고 만다 말이오.

그와같이 모든 우리 행사에도 고 결말이 있다 하는 고걸 기억하십시오. 결말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개별로 승리하고 난 다음에 그 승리 승리를 해서 승리가 쌓이고 승리가 쌓이고 승리가 자라고 자라고 자꾸 자라면 이것이 자라 바로 자라면 마지막에 최고도 이길 수 있자마는 이것이 바로 자라지 안하면 최고를 이기지 못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등불이 있었지마는 밤중에 등불 없으면 그만 헛일 되고 말았어.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이 죄를 우리가 회개해요. 오늘 저녁에 우리가 모일 터인데, 오늘 저녁에는, 오늘 지금 새벽부터 불 피우고 있습니다. 불 피우고 있는데, 오늘 밤에는, 낮에고 와 가지고서 유치반 중간반 자꾸 연락을 해요. 와서 전부, 오늘이 며칠이요? 그믐 날이요? 오늘이 31일입니까? 31일이니까 오늘 너머에는 죄를 가지고 넘어가지 안하도록 죄만 벗어 버리면 우리는 자유하고, 우리는 얼마든지 축복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안 하면 제가 비참하게 망하고 맙니다. 아무리 죄가 보기에 좋아도 그놈 범하기 전에 좋지 범하고 난 다음에 비참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꾸 이래 오늘은, 권찰회도 모이는데 자꾸 전도해 가지고서 어쨌든지 주일 학생 학생이나 자기 맡은 학생들, 반사들은 자기 맡은 학생들, 권찰이면 자기 맡은 식구들 전부, 또 호주는 자기 맡은 식구들 전부 동원해 가지고서 오늘 와서 어짜든지 깨끗하게 회개해서, 오늘 아침에 회개할 것은 요 세 가지라 나는 독립 못 한다 독립 못 하는데 나는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런 죄를 얼마든지 범했다 말이오. 요것을 깨끗이 회개하고, 나는 그러면 과거에 이 둘이 양쪽에 서 가지고 있는 것을 이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이신, 나를 피흘려 구속해 주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배반하고 이 귀신을 영접해서, 내 욕심대로, 귀신 영접한 게 뭐입니까? 하나님 말씀 어기는 그 행동 취한것이 귀신 영접한 것이오. 자기가 암만 하고 싶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고대로 하는 고 행동을 하고, 성경대로 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이 세상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그것이 이제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라 말이오. 요, 마귀 성령, 현실에 대해서 요 죄를 우리가 오늘 아침에 회개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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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도의 젖을 사모하라/ 베드로전서 2장 1절-3절/ 820328주전 선지자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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