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종류의 믿음


선지자선교회 1982년 7월 9일 금새

 

본문 : 히 11:1-2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은 객관에게 내 주관이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 요소가 두  가지로 되어 있으니 타나는 지식이요 하나는 행동입니다.

 지식의 종류가 심히 많고 사람들은 그 수많은 지식을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수는 셀 수 없을 만치 수가 많습니다. 지식의 수가 많고 그 힘의  움직임의 수가 많기 때문에 믿음의 수는 심히 많습니다.

 불교에도 믿음이 있고, 유교에도 믿음이 있고, 공산주의에도 믿음이 있고,  민주주의에도 믿음이 있고, 이런 단체 저런 단체, 이런 가정 저런 사람 전체가  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일반입니다. 믿음으로 산다 말은 자기 지식을 따라  움직이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크게 분류하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은  믿음 하나는 산 믿음. 하나는 살해의 독이 극히 강한 믿음 하나는 지극히  보배롭고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 이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종교마다 믿음이 있고 사회마다 믿음이 있고 단체마다 국가마다  주의마다 사상마다 믿음은 다 있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해도 결국은 인생은  믿음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아니하고 본능으로 살았지마는 차차 그 본능이 자기밖에 있는 지식을 따라 그  지식으로 자기 지식을 삼아 그 본능이 점점 믿음으로 변해져 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지식과 능력 이 두 가지가 믿음의 알맹이입니다. 믿음이 수가  셀 수 없을 만치 많다는 말은 지식이 셀 수 없을 만치 수가 많다는 말입니다.

인생관에 대한 지식도 백도 천도 넘습니다. 수많은 철학은 제각각 다른  인생관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모든 만물관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믿음은 그 수가  극히 많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소를 삼아 된 믿음이 있으니 이 믿음은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는 산 믿음이요 살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성경 가운데 우리에게 소망으로 주신 이  소망을 실상으로 만드는 것도 믿음이요. 또 성경 가운데 나타나 약속돼 있지마는  우리는 그 약속을 보고도 모릅니다.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지극히 크고 영화로운  희망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 소망이 있는데 이런 것도 다 믿음으로 실상을  만듭니다.

 또 우리의 지식 경험의 지식이나 체험의 지식이나 우리의 모든 배움의 지식 이  지식은 좁고 얕아서 우리 지식으로 측량 못 할 우리 지식을 무한히 초월해  가지고 있는 모든 그 실상을 우리가 바로 알고 그것을 내가 바로 가질 수 있는  것도 다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 11장에 기록된 이 믿음은 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 중에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을 요소로 삼은 믿음들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히브리 11장 장명을 지을 때에 믿음장이라 그렇게 지으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세상이 말하는 믿음을  혼돈해 가지고 이 믿음에 대한 정의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일생 동안 헛수고만  하고 택한 자라도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것과 같이 헛된 건설을 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어떤 것이 보배로운 믿음인가?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은 문서로 기록된 문서 지식이 있고 또 성령으로 감동시키는 영감 지식이  있으니 이거나 저거나 다 하나님의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그 믿음의  요소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 믿음의 요소가 되어있는 이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로 된 믿음은 우리에게 해당된 모든 책임은 다 감당할 수 있고,  우리의 의무도 다 감당할 수 있고, 우리에게 허락된 소망도 다 완성할 수 있고,  우리가 정복하고 제거하고 치료해야 될 것들도 다 할 수 있고 능치 못함이 없어  모든 나쁜 것을 다 치료하고 제거할 수도 있고 모든 좋은 것을 다 취하여 가질  수도 있는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해서 같은 믿음 아닙니다. 얼마 전에 내가 신문에 보니까  '다 믿고 삽시다.' 말하는데 그 믿고 살자는 말은 잘못 된 말입니다. 그 믿음은  죽이는 믿음, 망하는 믿음, 속이는 믿음, 꾀우는 믿음, 나중에 후회될 그런  믿음들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면 안 됩니다.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이 있다는 것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이것을  잡으면 말세에 악령의 온갖 기묘한 미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두 가지  종류 있다. 멸망시키는 믿음은 천개 만 개도 넘다.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뿐이다.'  보배로운 믿음은 무엇인데?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그것이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죽이고 망치는 가장 사망의 해독이 강한 믿음은  인간 지식과 피조물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식만 알고 이  힘만 알기 때문에 강대국이라고 말합니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지배의 요소가 되고 피조물의 힘이 그 지식 성취를 시키는  그까짓 거야 커도 죽은 것, 작아도 죽은 것, 좋아도 죽은 것, 세계를 휩싸도  죽은 것이요, 다 망치는 것이요, 사람을 절단내는 것이오. 모든 지옥은 이것들이  다 만들어서 놓은 것입니다.

 지옥에 가 있는 것은 다 이것들이 꾀우고 속이고 만들어서 보낸 것이 다 지옥에  있는 것들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 이 두 가지로  움직여서 만들어 놓은 것들이 가서 있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여기에 뭐 이의가  있습니까? 여기에 잘못된 무슨 해석이 있습니까?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은 두 종류라는 여기에 이 정의에 굳게 서서, 나는 어떤 믿음으로  살든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토막은 하나도 없습니다.

멸망시키는 멸망의 믿음으로 살든지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으로 살든지 이게  아니면 저것이요 저게 아니면 이것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생애는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는 이 힘은 피조물의 힘인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인가? 택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피조물의 힘도  우리 앞에 있습니다. 지극히 큰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면 피조물은 이용당할 것  다스림 당할 것뿐이지 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언제나 결과적으로는 위하는  것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면 지극히 큰 능력으로 내가 움직이고 있는지 피조물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그것의 판정은 내가 하나님의 지식, 문서 지식 영감 지식, 하나님의  지식으로 움직이면 절대적인 지극히 큰 능력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어떤 피조물의 지식이라도 그것의 지식으로 내가 움직이면 세계가  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거기에 상관이 없습니다. 같이하지 않습니다.

멸망시키는 멸망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십세기의 과학은, 하나님의 지식대로  움직이는 과학이라면 그는 죽은 과학이 살아났고 하나님의 지식을 떠나서 인간의  지식대로 움직인다면 그 과학은 영원히 멸망을 받고 영원히 저주를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광도에 원자를 던진 그 원자를 발명한 사람이 삼 년 동안  근신했다 말 들었는데 그건 사실인지 내가 들은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다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내가 알기에 소망시켜 주신 소망도 성경에 많지마는,  소망시켜 주신 것 중에 내가 아는 것도 물론 실상을 이룰 수 있지마는 내가  모르는 당신이 나에게 소망시켜 주신 건 나는 모릅니다. 다 모릅니다. 무한하신  그분이 조부라운 나에게 소망으로 줬으니까 내 지식을 초월한 소망이기 때문에  모릅니다. 내가 모르는 소망도 믿음은 실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기에 믿음은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제일 조심해서 노력할 것이 무엇인가? 믿음과 믿음을 구별하는  여기에 제일 주력해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믿음을 구별하는 데에 제일 주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알기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고 큰 것 아닙니다.

세상이 시대가 몰라 준다고 해서 작은 것 아닙니다.

 그 움직임의 알맹이가 지극히 큰 능력이냐 완전한 지식인 하나님의 지식이냐  하는 여기에 크고 작고, 귀하고 천하고, 강하고 약하고 거기에 있는 것이지  인간들이 크다고 말하면 뭣할 것이오? 인간들이 작다고 몰라 주면 뭣할 것이오?  그것은 극히 적은 것입니닥. 바울은 매우 적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여론은 매우 적은 것이라' 말했습니다.

 히브리 11장에 보면 몇 사람을 신앙의 사람들을 열거해서 말했는데 이것은 이와  같이 천이든지 만이든지 이와같이 열거해라 하는 말이오. 다 이와 같다  그말이오.

 에녹이 안 죽고 승천할 생각을 가졌습니까? 아니오. 그는 믿음으로 그와 같이  됐습니다. 믿음이라니? 현실 현실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지식과 자기 지식 둘이  싸우고 자기 지식과 인간의 모든 지식은 똘똘 뭉쳐 한 덩어리 되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대립할 때에 인간의 지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고 그 능력을 힘입어서 행동한 그것이 나중에 산 채로 결과로 승천한 것이  되어진 것이니 이것은 뭐입니까? 우리에게 형식으로 보여 주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움직임에는 죽음이 없다. 모든  인간이 다 죽었지마는 그에게는 죽음이 없다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오.

 이 두 가지 요소로 사는 노아는 전인류가 멸망해도 이 두 가지 요소로 산 자는  멸망하지 않고 멸망이 도리어 그에게 구원에 이용물이 되어지고 만다 이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제 이 바로가 될  수 았는 그 형편이었습니다. 이 말이 정확한지는 몰라도 내가 책에서 봤는지  들었는지 모르나 그때에 바로 왕은 아들이 없었는데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의  아들로 삼은 모세는 준수하기 때문에 바로가 극히 소망을 가졌으니까 그분이  계대하지 않았겠나 하는 그런 다 추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그 사람은, 모세는 믿음으로 권세관을 가졌습니다. 모든 권세를  믿음으로 권세관을 가졌어. 인간의 지식으로 권세관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권세관을 가졌기 때문에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망쳤습니다. 오늘 우리가 권세에 대해서 권세를 무슨 지식으로  권세관을 가지며 그 권세에 대해서 어떤 능력으로 움직입니까?  그는 잠시 애굽에서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랬습니다. 모든 희로애락, 근심 걱정 기쁨  평안 고통 이것이 중요한데 여기에 인간들은 피동되는데 이것을 인간의 지식이  고통이라 한다고 고통이라, 쾌락이라 한다고 쾌락이라 그렇게 하지 않았어.

믿음으로 했다는 요걸 우리가 잡아야 됩니다. 그는 믿음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공주의 아들로서 일국에 높은 사랑을 다 받고 있는 참  표시 못 할 만치 구비한 쾌락을 누렸지마는 그 쾌락을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비판해 보니까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멸망의  행위라는 것을 자기는 발견했기 때문에 그 낙을 누리는 것을 도피해서 미디안  광야로 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는 것을 애굽의 많은 재물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에 좋은 것을 취했습니다. 그는 나쁜 것 취하지 않았소. 좋은 것 취했소.

더러운 것 버리고 좋은 것 취했어. 무가치한 것 버리고 가치 있는 것  취했습니다. 왜 그런데 그는 인간이 볼 때에 바보 노릇을 했는가? 그는 지식을  바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문서 지식과 영감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고 썩은 인간의 대가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르고, 인간이 나기 전도 모르고 죽은  후도 모르고,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 처럼 이렇게 조부랍게 아는, 아는 것도  하나도 절대성의 권리는 하나도 가지지 못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이런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는 데에서  천하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을 모세는 걸었습니다. 과연 그분이 잘못 걸  없습니까? 그분이 과연 속았습니까? 잘못 걸었습니까? 그때에 그분이 걷는 것을  세상이 슬기롭다고 누가 칭찬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지식으로 삽니까? 어떤 능력으로 삽니까? 대체로  희로애락관을 무슨 지식 가지고 희로애락관을 논평하며 무슨 지식을 가지고  재물에 대해서 행동합니까? 무슨 지식을 가지고 권세에 대해서 행동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믿음으로 삽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 가지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라는  이 심신 이 육은 보배로운 믿음을 내가 영접하느냐 멸망시키는 살해의 해독이  있는 이 믿음을 영접하느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종된 데서 해방돼서 자유성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믿음을 네가 취할 것이냐 우리가 자유로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해독이 있는 그 믿음을 내가 일단 현실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을 논평하고 시비할 때에 보다 피조물의 인간 지식이 낫다고 이것으로 취해서  그 현실을 통과해서는 다시는 그는 그 면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한 번만 준 구원의 기회요 도리입니다. 한 번만 주신  도입니다.

 한 번 하나님의 지식을 내 지식으로 삼고 인간의 지식을 부인, 현실에서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삼고 인간의 능력을 피조물의 능력을  부인했으면 이것은 영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전쟁할 때도 믿음으로 전쟁했고, 자기에게 당면한 현실도 다  믿음으로 통과했고, 자기가 소망하는 소망도 전부 믿음으로 소망했습니다. 아는  것도 전부 믿음으로 알았고, 배우는 것도 믿음으로 배웠고, 일하는 것도  믿음으로 일하고, 동경하는 것도 믿음으로 동경하고 전부 믿음이오.

 말하는 것도 믿음으로 하고, 비판도 믿음으로 하고, 평가도 믿음으로 하고,  인간 교제도 믿음으로 하고, 만물 관계도 믿음으로 하고, 믿음으로 하다니?  하나님의 지식으로 판단한다는 말이오. 내 힘 믿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을 믿음으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경영하는 것이나 소욕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나 모든 움직임의 전부는 지극히 보배로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주신 이 선물인.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우리에게 무슨  믿음이 오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이 참된 지식과 무한한 능력을 우리 것을  삼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왔습니다.

 이러나 우리 현실에서 이 보배로운 믿음을 자기가 가질 수도 있고 이 보배로운  믿음을 버리고 멸망시키는 믿음으로 살 수도 있는 자유성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대해서나 이웃에게 대해서나 과거에 대해서나 현재에  대해서나 미래에 대해서나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나 창조주에 대해서나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전부 멸망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전부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말씀한 지식 그대로 내가 알아야 되겠고, 그대로 판단해야  되겠고, 그대로 평가해야 되겠고, 그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지 이 보배로운  믿음을 떠나서 하는 것은 전부가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문서 지식에 맞추나 그 안에 영감 지식이 어른어른하면서 양심을  통해서 영감 지식이 자기를 지도하려 하나 좀 참고 생각 하면 알 상바르니까  하나님의 영감 지식이 자기에게 오면 그 지식 대로 자기는 이리 가야 될 터인데  그리 가기 싫으니까 가다가 중단 해 버리고 마는 것은 그게 고범죄입니다. 알고  범하는 죄입니다. 인간이 현실에서는 고범죄 아닌 죄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극히 보배입니다. '믿음으로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다 안다' 그말은 하나님의 지식이 그렇다 하기 때문에 그 지식을 내가  인정하고 그 능력을 바라보고 그 능력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알았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이 있다. 하나는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이요 하나는 멸망시키는 믿음이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보배로운, 지극히 보배로운 이 믿음으로 현실을 살든지 멸망시키는  해독이 가장 큰 멸망시키는 믿음으로 현실을 살든지 어쨌든지 인생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자기에게 주관은 아무것도 없었다. 올 때는 하나의 동물처럼 하나의 물체처럼  아무것도 없던 것들이다. 이것이 전부 객관으로, 생긴 것도 믿음으로 생겼고 또  믿음으로 움직인다.

 보배로운 산 믿음으로 현실을 사느냐 해독이 가득 찬 멸망시키는 이 죽이는  믿음으로 사느냐, 우리의 현실은 이게 아니면 저것이요 저게 아니면 이것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길은 없으니 보배로운 믿음으로 살았으면 요 믿음은 영원  무궁토록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믿음입니다. 요것은 못 할 것이 없는 전능 전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밖에 없으니 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중간은 없다. 이게 아니면 이것이다. 이게 아니면 이것이라. 둘  중에 하나라.

 지극히 보배로운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지극히 보배로운 능치 못 할 것이 없는,  내가 아는 소망 모르는 소망 좋은 소망은 다 완성할 수가 있고 내 지식을 초월한  무한한 것을 다 알 수 있고 다른 이에게 줄 수까지 있는 이것을 이루는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이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우리에게 왔는데 내 현실에 이  보배로운 믿음의 생활을 내가 하느냐 사망의 해독이 가장 큰 이 멸망의 믿음의  생활을 하느냐? 두 가지 믿음 중에 하나 어느 것이든지 해야 되는 것이니 내  현실은 뭘로 지금 무슨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이것을 판정하고 가야 됩니다.

 보배로운 믿음, 지극히 보배로운 산 믿음은 하나님의 문서 지식 영감 지식  하나님의 능력 이 두 가지가 요소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에다가 조그만한 불을 붙여 놓으면 그 불로 인해서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우리의 이 심신이라는 이것은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 영생성의  것은 못합니다. 다만 이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연결 시키는 하나의 도화선에 지나지 못합니다.

 다이나마이트를 속에 요만한 걸 묻어놓고 이 도화선을 요만치 끌어내서 놓고  불을 붙이면 팔팔팔팔거리며 요게 붙어 들어가 가지고 다이나마이트에 대면 꽝  그러며 바위도 터져서 폭발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지식이 내게 와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접선시키는 일할 수 있도록  해 놓는 도화선이 우리의 심신입니다.

 다이나마이트에 도화선 그까짓 거야 한짐 놓고 태워봤자 요만한 자갈 하나도 안  날아갑니다. 다이나마이트에 접선을 시키면 크게 폭발되지. 이것 모양으로 천인  만인의 힘을 합해도 요만한 것도 하지 못할, 인간으로서는 피조물로는 할 수  없는 다 완전성 영원성의 것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영접하고 인정하고 인간의 지식과 피조물의 힘을 부인하고  이 지식과 이 능력을 내가 영접할 때와 가지고 '꽝!!' 이렇게 폭발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오! 이것이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믿음 가진 자는 영계와  우주는 그의 것입니다!  믿음 가진 자를 밉다고 총으로 쏘면 그 총으로 그 믿음 가진 자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했소. 칼로 찌르면 해한 줄 압니까? 절대 해하는 길이 없습니다!  해하는 길이 없어. 다 그런 것들의 주인공이요 영원히 그런 것들의 왕입니다.

 이런고로 믿음은 두 가지로 종류를 나눌 수 있다. 믿음의 요소는 두 가지  요소인데 지식과 능력이다.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 요소가  되어있는 믿음도 있고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의 지식과 피조물의 힘들이 그  능력이 되어있는 것도 있으니 하나는 지옥을 채우는 것들이요 하나는 하늘나라를  채우는 것들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죽어도 죽는 줄 알고 죽으십시오. 속아도 속는 줄 알고 속으십시오. 자기  현실이 이 믿음 아니면 저 믿음이지 그 사이에 중간이 있는 줄 압니까? 에누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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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 후에 아랫층에 남반은 신관, 여반은 구관에서 철야기도 있고 또 재독도  있습니다.

 건축에 대해서 일곱 가지 기도를 잊어버리지 말고 계속해서 여러분들이 하시기  부탁합니다. 앞으로 있는 어려운 문제, 가정 사회 자기 모든 어려운 문제를 두고  매일 반 시간 이상 기도하십시오, 후회하지 말고,  또 건축 연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빨리 청산하는 것이 좋습니다. 팔 것은  빨리 파는 것이 낫습니다. 또 빌릴 것도 빨리 빌려서 내는 것이 낫습니다.

 기도 후에 사층 예배당에서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서 움직인 전체는 멸망입니다. 아무리 눈  앞에 볼 때 좋아도, 모세가 왜 애굽의 많은 재물을 던지고 떠났습니까? 이걸  알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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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74 두 가지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3절-15절/ 881026수야 선지자 2015.10.28
» 두 가지 종류의 믿음/ 히브리서 11장 1절-26절/ 820709금새 선지자 2015.10.28
72 두 가지 죄악의 결과/ 창세기 11장 1절-9절/ 810621주전 선지자 2015.10.28
71 두 가지 준비의 현실/ 야고보서 4 장 13절-17절/ 840213월새 선지자 2015.10.28
70 두 가지 지식/ 에베소서 1장 17절-23절/ 830602목새 선지자 2015.10.28
69 두 가지 지식/ 베드로전서 3장 8절-12절/ 840831금야 선지자 2015.10.28
68 두 가지 회개하여 네 가지 축복/ 누가복음 5장 4절-11절/ 860629주후 선지자 2015.10.28
67 두 가지 회개하여 네 가지 축복/ 누가복음 5장 1절-11절/ 860629주전 선지자 2015.10.28
66 두 가지가 결정되는 현실/ 마태복음 5장 13절/ 800211월새 선지자 2015.10.28
65 두 가치관/ 창세기 13장 1절-18절/ 881221수야 선지자 2015.10.28
64 두 갈래길과 그 결과/ 창세기 13장 8절-13절/ 830424주후 선지자 2015.10.28
63 두 갈래길과 그 결과/ 요한일서 3장 8절/ 830314총공회 선지자 2015.10.28
62 두 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80119화새 선지자 2015.10.28
61 두 길/ 마태복음 6장 34절/ 841220목새 선지자 2015.10.28
60 두 사람을 구별하라/ 로마서 6장 5절-7절/ 880109토새 선지자 2015.10.28
59 두 사랑/ 누가복음 10장 26절-28절/ 1988. 8. 11. 새벽집회 선지자 2015.10.28
58 두 생각/ 로마서 8장 32절/ 800804월새 선지자 2015.10.28
57 두 신앙 노선/ 창세기 13장 8절-18절/ 830425월새 선지자 2015.10.28
56 두 신앙 노선/ 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830316수새 선지자 2015.10.28
55 두 신앙 노선/ 창세기 13장 14절-15절/ 890217금새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