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길과 그 결과

 

1983. 4. 24. 주후

 

본문 : 창13:8-13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지난 주일에도 '우리가 주일 지키는 것 하나라도 바로 지켜서 행해 보자'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도는 참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부족한 것은 하나님이 다 보충할 수 있지마는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드리지 않고 그렇게 갈라서 다른 데에 다 쓰고 찌끼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당신의 거룩상 그것을 받아 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다 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도 아브람과 롯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이 성구를 택한 그 이유는  그리 됐습니다. 제가 밤에 자면서 꿈에 이 말씀을 가지고 다른데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니까 모두 다 은혜를 받아서 그래 이제 오늘 주일 이 말씀을  증거하게 됐습니다. 동기는 거기에서 생겼고, 또 제가 생각해 볼 때에 아무래도  아브람의 신앙과 롯의 신앙은 이 두 신앙 노선인데, 이 노선이 아니면 저  노선이고 저 노선이 아니면 이 노선이니, 이 두 노선 가운데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 또 왔다 갔다가 하는 사람들, 항상 롯이 걸어간 그 노선에서  일생을 마치고 있는 불쌍한 사람,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아무래도 증거해야  되겠다 해서 증거한 것입니다.

 아브람과 롯에 대한 것은 여러분들이 창세기 l2장으로부터 한 l9 장까지 읽어  보면 대략 그 가운데에 내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전에 제가 간추려서  간단하게 증거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한번 복습겸 기억을 하도록 해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아브람은 그 시비가 있을 그때에 인간보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람은 신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신본주의, 신본주위요. 롯은  인본주의였습니다.

 그러면 신본주의 인본주의를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십시오. 신본주의는 어떤  것이 신본주의냐? 인간보다 하나님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겨서 하나님 위주 하나님 중심한 것이 신본이요, 또 인본은 인간을 제일  중하게 여겨서 인간 위주 인간 중심한 그것이 인본입니다. 신본이니 인본이니  하는 그 뜻은 이것이라고 알고 있으면 틀림없습니다.

 아브람은 자기나 자기 가족이나 자기 재산이나 이런 것이야 어찌 됐든지 하나님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되고, 또 하나님 그분의 뜻이 어디 있는가 그 비위를  맞추어야 되지, 하나님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해서 사람을  제쳐 놓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것을 양보를 해야 되겠고 인간을 생각하면 그것을 취해야 될 때에,  아브람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양보했고, 롯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생각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그것을 양보해서는 안 되겠고 취해야 되겠다 해서 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신본주의의 사람이요. 롯은 인본주의의 사람이라 하는 것을  그것을 기억합시다.

 둘째는 아브람은 신앙주의의 사람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라서, 일이 어찌 됐든지 물건이 어찌 됐든지 사람이 어찌 됐든지  그분이 조물주요, 구속주요, 주재이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서 움직이자, 그분을  따라서 순종 행동을 하자 하는 그것이 믿음주의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주의로  걸었고, 롯은 그것의 반대의 타협주의로 걸었습니다.

 타협이라 하는 것은 다수주의입니다. 다수주의, 숫자 많은 것을 따라가는 것이  역연 타협주의입니다. 그러나 신앙주의는 인간의 수가 많은 것보다 진리가 더  크다, 사람의 수보다, 다수보다 진리를 크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  신앙주의입니다. 또 타협주의는 인간을 잘 사귀 어서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이렇게 친교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양보하고 나가는 그것이 타협주의요,  신앙주의는 사람에게 어떤 고독을 당해도 그저 자기 혼자 외로웠으면 외로웠지  하나님의 뜻은 버릴 수 없다 하고 나가는 것이 그것이 신앙주의인 것입니다.

 또 아브람은 그저 자기의 현재에 소유, 또 물질, 사업, 또 앞으로 미래 장래  영원까지도 자기에게 있는 소유 그런 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크다. 아무리  현재나 앞으로 희망성 있는 것 무엇이 있다 할지 라도 하나님의 축복 없으면 다  소용없다. 그러면, 자기의 소유나 또 자기의 지식, 소유나 직장, 소유나 사업,  소유나 무엇이 그런 것이 다 소유입니다. 직장 그런 것이 재산 아니오? 그것도  다 자기 소유인데,  '하나님의 축복보다도 내가 직장이 좋아야 되지, 하나님  축복보다도 사업이 잘되어야 되지, 하나님 축복보다도 무슨 소유가 좀 넉넉하 고  풍성해야지.' 이것이 롯이 걸어간 걸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지 않고 아무리 직장 좋아 봤자, 기술이 좋아 봤자,  소유가 많아 봤자 하나님이 축복 안 하고 딱 끊어 놓으면 기술 좋은 것이 빳빳한  송장 같이 돼 버리니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이 자연계시에서 많이 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지마는  머리가 획 돌면 그만이라. 제가 그 사람 이름은 말하지 않는데 서울대학, 대학  중에는 제일 좋은 대학이 서울 대학 아닙니까? 서울 대학 대학원 원장으로  지냈습니다. 아주 천재고 워 법학에 대해서는 한국에 제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데, 그만 어디 가서 가스를 먹어 가지고 그만 뇌가 획 돌아 버리니까  아무짝도 못쓰는 사람 돼. 말 한마디도 쓸모있는 말 하지 못해. 또 수족 하나 만  병신 되어도 됩니까? 소용 있습니까?  이러니까 아브람은 '뭐 현재에 미래에 희망적으로 어떤 소유보다 하나님이  축복해야 된다. 하나님이 축복 안 하면 안된다.' 내가 건강 해 가지고 내야 딱딱  출근만 하면 월급 얼마 딱 받아다가 그것만 하면 뭐 사고 뭐 사고 해 가지고  우리가 안락하게 산다 하는 고런 사람 이 롯의 걸음을 걷는 사람입니다.

 아브람은 암만 그래 봐도 생명이 당신에게 있지, 건강이 당신에게 있지, 활동이  당신에게 있지, 정신이 당신에게 있지, 모든 것의 주권이 활동이나 생명이나  공간이나 정신이나 총명이나 모든 것의 주권이 당신에게 있으니까 당신이 빽  틀어 버리면 헛일이니까, 또 그런 것을 만드신 이가 당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무능해도 그분이 축복하셔 가지고 잘 되게 하면 잘된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주의로 나간 사람이 아브람입니다. 롯은  축복주의로 나가지 아니하고 '뭐 하나님의 축복을 좀 못 받아도 현재 이  소돔들을 차지해야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아도 우선 이것 만 하면, 이만해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지 않는가?' 해서 그는 눈에 보이는 유물주의로  살았습니다. 물질주의로 살았습니다. 눈에 보이 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위주로  해서 자기의 소유를 하나님 축복보다도 크게 여기는 유물주의 소유주의 이런  것으로 산 것이 롯의 걸음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소망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소망으로 살고 그 축복을 받기 위해서 희생을 합니다. 그 축복을  받기 위해서 뭐 어떤 희생이 되어도 축복만 받으면 되어지니까 그 축복 받기  위해서 희생합니다. 그걸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에게 축복  받으면 그것보다 더 나은 줄 알기 때문에 그 소돔들을 척 양보를 하고 희생을  하고 소망을 가지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브람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현실을 당할 때에 꼭 아브람과 롯이 이렇게 당면 된 것과  같은 그런 세 가지 이 조건들이 우리에게는 다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조건이 우리 현실에 그 해당되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  세 가지 조건이 크나 작으나 다 있습니다. 눈이,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비판을  밝히 안 해 그렇지 큰 것이 나 작은 것이나 이 세 가지 조건은 다 당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현실에서 아브람의 길을 걷다가 롯의 길을 걷다가 질 팡 갈팡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머뭇 머뭇 거리다가 이것도 저것도 안 되고 모든 걸 다 헛일한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롯의 걸음을 걸어서 실패한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의 간 그 걸음을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함으로써 성공을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걸어간 그 길은 어떤 길이냐? 거기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서 그거 다 양보 안 했습니까? 희생이 있어.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하기 때문에 희생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가려고  하니까 외로와집니다. 외로와지요. 그러나 롯은 그와 반대입니다.

 또 하나님 좋게 하려고 하니까 또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 그 말이오. 이러니  하나님이 꼭 요렇게 요 둘을 견제해 가지고 우리를 기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양육하시려고 그와 같이  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믿음의 네가지 요소를 말했고 또 몸의 믿음의 세 가지 요소를  말했는데, 우리 몸으로 행동하는 데에는 반드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시험을 해  봅니다. 네가 어디 속했나? 정말로 네가 신본주의로 너보다 하나님을 더 중하게  높이느냐, 널 중하게 높이느냐? 요걸 꼭 시험합니다. 또 네가 소유냐, 내  축복이냐? 네가 인간들의 주장이냐, 내 주장을 따르는 순종이냐? 요것을 꼭  시험해 보십니다. 시험해 보시고 시험에 통과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잡탱이를 뽑기 위해서 시련을 하십니다.

 금을 불로 연단하는 것처럼, 요게 인간 각오나 인간 결심이나 인간의 뭐 다른  헛된 것을 욕심을 내 가지고, 어떤 사람은 예가 될런지 몰라도, 어떤 사람이  새벽기도도 나오고 열심히 철야도 하고 이러는데, 제직 선택할 때에 제직에  선택되지 아니하고, 선택이 안 되고 고만 거기서 떨어지니까 고만 그 이튿날  아침부터 새벽기도 나오지 않더라고.

 제직되기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처럼, 여러가지 시험을 당해도 고  시험에 다 떨어지지 아니하고 합격을 했지마는 그 속에 중심이 무슨 목적으로,  무슨 욕망으로, 무슨 힘으로, 무슨 뜻으로 그와 같이 하는 것인지, 순전히  성신의 감화 감동의 능력으로 하는 것인지, 고걸 금을 연단해서 잡것을 다  제하는 것처럼 잡것은 태워 버리 고 잡것이면 넘어지고 떨어지고, 잡것이니까 그  사람 새벽기도 나오다가 그만 턱 그만 떨어져 버렸다 그말이오.

 이것 모양으로 시련하는 일이 있고, 시험해서 합격되고 시련해서 잡것이  제거되고 순전히 하나님과 진리의 힘으로만 되어진 것이라고 하면 고것을 이제  연성시킵니다. 고것을 자꾸 성장시키요. 고것을 성장시켜서 나가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행위를 만들어 가지고 무궁세계에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다 대리를 자기 재량에 따라서 맡길 때에 그런 것을 척척,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실력가의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에 머물게 하는 것이지, 세상을 가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취급하는 것이 시험도 있고 시련도 있고 연성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앞길에 있어서 요 아브람과 롯의 생각을 언제든지  합시다. 고 현실 당할 때 '아브람은 신본으로 걸어갔는데 롯은 인본으로 가다가  망했다.' '신본으로 감으로-하나님 높였다 말이오-신본으로 아브람은 가니까 그  결과가 어찌됐나? 하나님 높였으면 하나님 높이고 아브람 자기는 고만 다 절단이  났는데 하나님 높이려 하다가 자기는 절단났는데 그 결과는 어찌됐느냐?' 하나님  높인 고 자기는 낮아지고 하나님 위했는데 마지막에 보니까 자기와 자기 가족은  전부 성자 성녀가 되어 가지고 전 인류 중에 존귀한 인물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높이고 자기네들을 높이지 아니한 그것이 결과적으로 보니까  자기네들이 존귀한 것이 돼 버렸고 자기 높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네들 높여서 자기네들만 위주로 중심으로  존귀하게 중요하게 이렇게 여겼는데 그 결과는 어찌 됐느냐? 롯에게 속한 그  모든 사람들도 다 실패해서 어디로 죽었는지 홑어졌는지 없습니다. 또 롯의  가족은 다 흩어지고 없어졌고, 롯의 아내는 소돔 고모라 성에서 소금 기둥이  되어서 절단났지, 또 자기 딸도 그 꼴 됐지, 약혼한 사위도 그리 됐지, 롯  자기도 그리 됐지.

 하나님을 높이느냐 인간을 높이느냐 하는 요 두 시비 가운데에서 하나님 높인  아브라함은 인간 자기들이 이렇게 높아졌고, 하나님 높 이지 아니하고 인간  높이는 롯은 인간 그 자체들이 완전히 절단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거 꼭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뭐 옛날은 해당되고 오늘은 해당 안되는 것  아니오. 또 사건마다 해당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되어도 모질받아서  모질받아서, 인간이 절단 절단나도 대번에 그렇게 절단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벌써 만분의 일이 절단나고 천분의 일이 절단나고 백분의 일이 절단나고 이래  이래 나 가지고 마지막에는 다시 회복할 수 없도록 절단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여게서,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을 높이느냐 신본. 인간을 높이느냐  인본. 하나님 높인 사람은 결과적으로 자기네들이 이렇게 아주 존귀해졌고,  하나님 높이는 것 두고 인간 높이는 것을 위주로 해서 인간 높이는 길을 취한  사람들은 그 인간들이 다 박살이 났습니다. 이게 막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현실을 당할 때에 그러면 내가 나를 박살시키는게 뭐인가? 뭐  세상에 다른 일 많지마는 없는 가운데서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만 가지를  결과짓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결말이 하나님에게 달렸소. 종말이 하나님에게  달렸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실은 몰라 그렇지 여러 가지로 우리는 관련이 있는 것 같지마는  실은 하나님과의 관련 이것 하나뿐입니다. 이 하나뿐이오. 이러니까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거기에서 제가 하나님 높이고, 자기는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 높여  주려 하면 자기는 낮아져야 됩니다.

 또 자기를 높이려 하면 하나님은 낮아져야 됩니다. 작으나 크나 하나님 높인  일이면 벌써 자기는 그로 인해서 그만큼 하나님이 키워 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또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중하게 여겨서 하나님을 버렸으면 그런 것만큼 자기는  절단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를 절단내는 길이 하나님보다 자기 높이는 것이 자기  절단내는 길이요, 또 자기를 존귀케 하는 길이 현실에서 하나님 높이기 위해서  자기가 낮아져야 되면 낮아져야 되고, 낮아지지 아니하고도 하나님 높일 수  있으면 하나님 높이고, 낮아지든지 그대로 있든지 하나님 높이기 위해서 산 그  현실은 다 자기를 키우고 높 이는 그 결과를 맺고야 마는 것입니다.

 또 우리 현실에서 사람의 그 모든 뜻을 맞추어 가지고 타협적으로 이렇게 모든  사람 비유를 다 맞추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참 화평하 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나는 화평이 포원이 되어도 화평을 내가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화평에 포원이 되어도 화평이 안되는 일이 자꾸 내게는 있다 말이오. 화평 안  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이 조롱을 하고 욕을 할 거라. '저거 화평도 못 하는게.'  화평을,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이야,  하나님하고야 나누어지든지 갈라지든지 벌어지든지 어찌 되든지 사람 비위  맞추어서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가지려고 이렇게 한 그 걸음은, 고것이  하나님과 화평해서 하나님과 요렇게 하나 되는 친밀되는 고것을 버리고 인간하고  이렇게 화합하기를 원하는 고 걸음이 인간과 자기와의 온전히 그 사이가 다  떨어져서 자기 혼자 고독 고독으로 이러다가 마지막에 자기도 망쳐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얻기 위해서, 인간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인간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척한 사람들 그것이 인간을 다 잃어 버리는 유일한 방편이오.

인간을 다 잃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또 인간 취하고 인간도 비위 맞추고 하나님도 비위 맞추면 좋지마는 꼭 맞기를  인간을 맞추어서 인간하고 서로 화합하려 하면 하나님과 벌어지고, 하나님과  화합할려면 인간과 벌어지고 고럴 때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것 아니고 둘다  화합을 이룰 때에 얼마나 좋습니까? 고럴 때에 하나님과 화합하기 위해서 부득이  인간과의 눈물을 흘리면서 불합을 취한 사람은 고것이 인간을 얻는 방법입니다.

'인간을 얻는 방법. 그 사람은 인간을 수입하고 인간에 대해서 성공을 해서 많은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고 방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인간을 다 빼앗기고 실패를 하느냐 인간을 얻어서 성공을  하느냐 하는 고것이 요게 꼭 매였습니다. 요것을 꼭 깨닫고 가져야 되지 이거 안  가지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인간 타협한 자 우선이야 좋지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서로 양보하고 이렇게 타협을 해 가지고 하나님이야 섭섭해 하거나  말거나 할 지라도 그분은 말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과는 사이가 벌어져도 인간과  화합하자' 하고 그 길을 취해 간 사람마다 마지막에 인간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벌써 제가 여기 부산 와서도 삼십여 년 됐기 때문에 봅니다. 유력 한 분들도 고  타협주의로 나간 사람은 마지막에 자기 옆에 있는 사람 들도 다 반대요.

속으로는 반대요. 외롭기가 짝이 없습니다. 외로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하고  화합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외로운 그 길을 걸은 사람은 다 마지막에 시체에도 그  사람에게 막 우굴우굴 막 들어 붙어서 꽉 차서 인성을 모은다 했소. 변하지  않습니다.

 또 자기 눈에 보이는 이 소유,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형편, 사정, 소유,  뭐이든지 인간이 다 볼 수 있는 것, 인간이 다 볼 수 있는 것 지식도 볼 수 있고  기술도 볼 수 있고 무슨 능력도 볼 수 있고, 소유도 사업도 직장도 지위도 다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볼 수 있는 것이오.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보다도 크게  여기는 고것이 자기의 그 모든 것을 다 망쳐 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시험하십니다. 그거냐 내 축복이냐 둘을 두고, 하나님의 축복  받으려, 하면 그것을 부인하게 되고 그것을 부인하려 하면 하나님 축복을 못  받게 되고, 꼭 요렇게 외통목에다 딱 몰아 가지고 요거냐 조거냐, 보다 어느  거냐, 이것보다 저거냐 저것보다 이거냐 요렇게 둘을 꼭 저울질하고 견제를 딱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시라 말이오.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모든 우리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고렇게 딱 종결을 짓는다 말이오.

 그럴 때에 자기의 소유한 그 모든 그것을 취하느냐, 그것에 거리끼고 그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취하느냐 요 둘에서 결정됩니다.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취한 사람은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 속한 소유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충만케 하는 것이요, 또 자기에게 있는 모든 소유를 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아도 이게 중하다 해서 그점을 택하는 고것이 인간  자기에게 현재 소유 미래 소유를 마구 절단내어서 바사트려 버리는 것이 그것이  진리입니다.

 요 세 가지를 여러분들이 깨달아집니까? 우리는 다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  살지 않았소. 나도 지금 나이가 일흔네 살이지마는 다 살지 않았소. 다 살지  않은 사람이오. 다 살지 않았소. 내가 지금 죽을 때까지 사람 보기에 성공을  가지고 간다 할지라도 죽음 너머에 무궁이 있기 때문에 무궁에 대실패자로  나타날런지, 또 내가 죽는 날까지 세상에서 실패자로 있다 할지라도 죽은 다음에  무궁에서 아주 승리의 성공자로 나타날런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 그것  가지고 판단 못 합니다. 요 진리는 변 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신본이냐 인본이냐, 타협이냐 신앙이냐, 소유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둘이 다 이렇게 견제되는 것인데 어느 것을 취할 것이냐? 이 법칙은 하나님이  변치 앉는 그와 같이 이것은 변치 않습니다. 당신이 내어놓은 법이오. 당신이 이  법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처리하시 고 통치하시고 이대로 다 보상도 하시고  복수도 하시고 다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귀라는 놈은 우리를 미혹시켜 가지고  어쩌든지 그 현실에서 신본하지 못하게 하려고 마구, 신본으로 살려고 해 보면  인본의 패가 많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신본으로 살려고 하면 인본의 패가  많습니다. 그 패가, 그 당이 어떻게 센지 마구 달려들어 가지고 신본으로 살지  못하고 인본으로 살라고 하는 그걸 볼 수 있습니다.

 신본으로 살려 할 때에 신본으로 사는 것을 반대하는 인본의 무리가 내 주변에  이렇게 많구나! 다윗이 말하기를 내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보니 적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또 내가 타협으로 살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하나님을 이는 신앙으로 살려고  하면 타협으로 살려고, '인간을 보지 아니할 수가 있느냐?' 이래 가지고 뭐 인간  화합 운동이 어떻게 모아 들어오느지 몰아들어오고, 만일 그걸 듣지 아니하면  멸해지고 아무짝도 못 쓸 사람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요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신앙대로 요와 같이 나아가려고 하면 엘리사에게 그 모든 생도들이 말한 것처럼  고 타협하지 않으려 하면 '이러면 되느냐?' 이래 가지고 타이르는 사람들이,  친구들이 많이 옵니다.

 이래 가지고 신앙으로 나가고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면 친구 하나 떨어져 둘  떨어져 마지막에는 그 사람은 독선주의자라, 안하무인이라, 교만한 인간이라,  이래 가지고 외로워지지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타협주의로 나가지 않고  신앙주의로 나가는 사람은 사람을 얻습니다. 신앙주의로 나가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저희 사람 되고, 세상에서 욕하던 사람도 무궁세계에 가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다 그 사람의 사람이 됩니다.

 사람 부자가 되려될거든 하나님 보고 신앙으로 나가고, 인간을 다 빼앗겨서  정말 영원히 고독한 사람이 되려면 인간 비위 맞춰 가지고 타협주의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또 유물주의로 사는 것. 현실주의, 현상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견주의  이것으로 살라고 뭐, 가정이면 그 가정에 한 사람이 축복주의로 살려 하면 그  나머지기 사람은 전부다 반대할 것이오. 축복주의로 살려고 할 때에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제일 가까운 요 사람 이 축복주의로 사는 요것을 방해하는구나'  그 사람이 원수 아니라 그 사람을 나를 넘어트리기 위해서 마귀라는 놈이 원수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미혹에 들지 않으면 마귀의 이용물 됐던 원수는  결국은 내 사람이 돼 버리고 점령돼 버리고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세 가지를 단단히 생각하면서 우리 현실을 조심 있게 한자욱  한자욱 걸어가면 실패 없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 이게 천천 금은보다 낫습니다. 천천 금은보다 낫소. 사업하는  사람은 요래 하면 실패 없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실패한 청년들 많이 있는데  한 사람이라도 실패한 청년들은 전부 이것 때문에 실패 다 했소. 요 세 가지에서  롯의 걸음 걷다가 다 실패 다 했습니다. 안 그런 사람 하나도 없어. 아브라합의  길을 걸어 가지고 그 길을 걸어 가지고 성공 못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성공을 못 했다면 무궁세계 해와 같이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무궁세계까지 안 갑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주의의 걸음을  걸어가는 요 사람을 당신이 무궁세계까지 끌고 가지 않아요. 자랑이 하고  싶어서, 자랑이 하고 싶어서 '봐라, 이 사람 봐라. 신본주의로 살지. 신앙주의로  살지. 축복주의로 살지. 이 사람 이래 사는 데 봐라, 이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냐?' 소문을 진뜩 냅니다. '어리 석은 사람 아니냐?' 소문을 내어서 소문이  퍼질 대로 어지간히 퍼졌으면 '이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지? 어리석은가 봐라'  축복을 갑자기 해 가지고 버뜩 들어 올려서 '저기 어찌 저리 됐노?' 봐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것을 당신이 자랑하고 싶지마는  자랑할 사람이 있어야지? 누구를 통해서 자랑을 하겠소? 참 우리는 영과 육이  아울러서 한없이 복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인데 우리가 못나 가지고 마귀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해서 우리가 영광 돌릴 수 있는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 자신도 영광스럽고 좋을 것인데, 우리가  어쩌든지 요것을 꼭 실행을 하고,  앞으로 오윌달 집회가 있으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은 것, 고게 들어서  가로막는 고놈이 들어서 신본주의로도 살지 못하게 하고 인본주의로 살게 하고,  신앙주의로 살지 못하게 하고 타협주의로 살게 하고, 고것이 들어서 축복주의로  살지 못하게 하고 이제 보이는 모든 유물주의로 살도록, 고렇게 만드는  것이니까,  우리의 대적이 지금 하나 있으니까, 대적이 하나 있으니까 고걸 발 견하면 돼.

하나님께 전심 전력을 기울였으니까 발견만 하면 고걸 뿌 리 뽑을 수 있어.

뿌리만 뽑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고 기쁘고 평안하고 담대하고 어디 가든지 자유  세계라.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자리에 앉아서 자기 현실을 고요히 살피면서 고만 지나간 것은 다 살피려  하면 시간 없으면 이제 현재에 내게 당한 요걸 신본주의로 하면 어떠며  인본주의로 하면 어떠며, 신앙주의로 하면 어떠며 타협 주의로 하면 어떠냐?  축복주의로 하면 어떠며 현재 유물주의로 하면 어떠냐? 요게 당장 효력 납니다.

이런 사람은 올무와 착고에 걸리지 않습니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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