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신앙 노선

 

1983. 4. 25. 월새

 

본문 : 창13:8-1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광고합니다. 대구집회를 위해서 모든 면을 기도합시다. 각자 개인 개인의  사정을 기도해서 집회에 참석하는데 아무 지장없도록 기도하고, 또 그곳에  가서도 은혜 받는데 지장이 없도록 다 준비가 되게 그렇게 기도하고, 두고 가는  직장이나 집이나 그 모든 것들도 주님이 안보해 주셔서 아무 사고없이  평안하도록 기도를 합시다.

 그리고 또 집회 경비를 구역장님에게 속히 내어 주시기 바람니다. 또 우리가  가고 난 다음에, 믿는 사람 거의 다 가니까 안 가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이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나 혹 믿는 사람으로도 쓸만한 이가  있으면 여기 경비하는 데에, 남반 두 사람이 경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 건축에 대해서도 계속 기도해서, 지금 외벽을 바르고 있으니까  위험한 공사입니다. 아무 사고없이 안보해 달라고 기도하고, 십분 기도한 후에,  과거에 화요일날 했는데 집회가 가까운 것만치 오늘 아침에 권찰회를 해야  되겠습니다. 십분 기도 후에 권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제도 우리가 이 말씀을 봤는데,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고 그 문서를 보고  생각하는 일도 있고, 또 문서에 기록한 모든 법칙과 제도를 생각하는 것도  있어야 되겠고, 또 하나 좋게 쉽게 생각할 것은 거기에 인물들을 생각할 때에 또  우리에게 신앙의 길이 밝혀질 수 있는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무슨  일을 자기가 당할 때에, 첫째로 '예수님이면 이 일을 당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거기서 많은 지혜를  얻습니다. '이 사람을 만났는데, 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예수님이면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처리하시고, 또 이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을 하시고, 또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취급을 어떻게 하시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좀  간단하고 명료하게 되기 쉽습니다.

 또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당했을 때에 어찌 되느냐, 내가 지금 당면한 일이 아브라함의 일과  비슷하냐, 꼭 같냐, 아주 다르냐 하는 걸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의 당한일이  간단하지마는 우리에게 매일 매일 당하는 그 일과 꼭 같습니다. 알고 보면 꼭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기가 매일 매일 닥치는 그 현실을 처리해  나갔지?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을 생각지 않고 성경에 뭐라고  말씀 하셨는지 그 성경대로 내가 살려고 하면 어찌 되냐? 하면 성경은 범위가  넓기 때문에 쉽게 그렇게 판별이 나지를 않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능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을 당할 때에는, 어제도 말했지마는 신본이냐 인본이 냐 고것  중요합니다. 신본이라 말은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위주로 하나님  중심으로, 무슨 일을 닥쳤든지 제일로 '자, 여기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님을 좋게, 하나님에게 영광되게, 하나님을 위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것이 신본 주의입니다.

 바울은 그는 빌립보에 말하기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만 원한다' 담대히 말하는데, 전에도 그랬고 이제도 지금 자기의 전  생애에서는 어떻게 하면-그리스도라 말은, 그리스도라 말은 예수님이라 말인데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했는가? 예 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신 이가 예수님이시요, 십자가의 대속을 베풀어  놓으시고 대속으로 베풀어 놓은 그 공로를 택자들에게 입혀서 그 택자에게  기름부음을 받도록, 다시 말하면 택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은 제사장 은혜, 선지자 은혜, 왕의 은혜가 그것이 그리스도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자기가 지금, 예수님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올바른 중보자 노릇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격을 기르기 위해서 예수님의 영이-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님의 영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이럽니다. 그 중보자가 바로 되도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내가 들어가면 그  사이가 아주 관계를 영원히 가도 후회 없을 만한 그런 관계를 맺도록, 사건과  물건에도 어데든지 하나님과 그 물건과 영원히 대립되지 않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물건이 되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건이 되어지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하는 그 성과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역할입니다.

 또 선지 역할은 하나님 안에 무한함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마는 그 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몰라서 그 은혜를 받지 못하고 연결되지 못한  그 부분을 재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피조물들에게 잘 전달해 주고 또  피조물들은 그것들을 잘 받도록 그 역할 하는 것이 선지자 역할입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격을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가 하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왕 자격인데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의 분봉왕, 예수님의 그 통일  정치에 하나의 분봉왕처럼 통일 정치에 소속한 그 정치인으로서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그 정치를 이루시는, 그 정치에 배치되는  자들을 다 그 정치에 일치되도록 해 가지고 그 정치에 속해서 그 정치에 같이  움직이는 자 그자가 되도록 하는 역할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노라'  그말은 그리스도의 그 하시는 직책이 완성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그,  직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피조물이 다 만족할 수 있는, 그 계획이, 경영이 어서  달성되기를 위해서 자기는 죽든지 살든지 그것 위해서 다 바치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일한 소원이 되는 것인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롯은 하나님 안 생각했습니다. 현실 닥칠 때에, 하나님을 물론 그만치  따라다니고 축복 받았으니까 하나님을 크신 분인 줄도 알고, 또 섬겨야 될 분인  줄도 알고, 또 두려워하는 그런 것도 있겠고, 이렇지마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낫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자기가 거기에서 소돔 들을 취하지 않으면 자기의 그 모든 것이 다  절단나지니까, 하나님께 섭섭해 하시고 아브라함이 섭섭해 할 줄은 알기는  알지마는 자기에게 손해가 가니까 안 되겠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하나님 생각하는 것보다 자기 생각하는 것을, 낫게, 앞서서, 먼저,  더, 보다 이렇게 생각한 고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기를 세상에  자식이 돼 가지고 부모를 죽이는 일이 어데 있느냐? 또 부모가 돼 가지고 자식을  죽이는 일이 어데 있느냐? 이렇게 말하지마는 저는 죽이는 것을 봤습니다. 제가  위천 있을 때에 공산주의자들이 와 가지고 '네가 너희 아버지 안 죽이면-너희  아버지는 이미 사형을 받는 사람, 받아 가지고 사형이 돼 가지고 있으니까 -안  죽이면 너도 죽고 너희 아버지도 둘 다 죽인다. 어떻게 할 건가? 이러니까  아들이 죽였습니다. 아버지도 '너희 아들 그것은 벌써 아무데 잡혀 죽기는  죽을건데 너희가 그 아들을 감싸고 그래 돌면 너희 가족 다 전멸될 터이니까  어떻게 할 건가?' 아들이 오니까, 잡히면 죽을 줄 알면서도 저희 집에 부모  집이라고 빼곰이 찾아오는 것을 부모네가 밥을 주면서 안심하고, 밥을 줘서 밥  먹는 동안에 신고해 가지고 와서 잡아 가지고 사형시켰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보다, 하나님은 자기보다 하나님을 낫게 여기는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공연히 뭐 하나님 섬긴다, 하나님 높인다  하는 그런 헛장난 가지고 생각지 말고, 나보다 하나님을 귀중히, 하나님을  높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래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다. 내야 죽든지 살든지 이렇든지  저렇든지 나는 어쨌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있는 자라 하는 요  위치를 바로 잡아 놓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고것이 신본주의요. 신본주의  인본주의란 말은 많이 하지마는, 요새는 지금 그 말도 없어졌습니다.

 롯은 인본주의. 그것은 그렇게 마지막, 마지막도 아닌데, 마지막 골목에 당하는  것도 아니오. 아주 최종에 닥쳐도 아랑하고, 그 중간에 왔는데도 롯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서 생각하고, 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뒤로 두고 자기를 앞서  생각하는 그 길을 걸었으니까 롯은 신앙에서는 감감한 사람입니다. 감감한  사람이오.

 지금 롯의 노선에서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진리, 진리' 아무리 말해도 자기의 혈육의 정이나 감정이나  무슨 그런 게 있으면 진리 다 당장 버려 버리고 무슨 짓이라도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서 그것이 대번에 그렇게 장성한 신앙은 안  되지마는 자기가 현실 현실 당한 데에서 '자, 내가 신본의 길을 걷느냐 인본의  길을 걷느냐?' 거기에서, 뽀스래기 거기에서 신본의 길을 차차 차차 걸으면  신본의 길이 이제는 장성해서, 티끌 모아 태산 된다고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현실에서 신본의 길을 걷게 되면 최종에는 자기가 어떤 것이, 무엇이,  세상이, 피조물이 다 달려들어도, 피조물은, 마귀의 것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사람이 마귀에게 졌거든.-마귀의 것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피조물을 다 가지고 이렇게 그 사람을 인본주의로 살도록 해도 꼼짝하지 않는 다  그말이오. 신본주의로 삽니다. 그게 신앙이오.

 거기서부터 당신은 당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당신은 그 사람을  통해서 무슨 일이든지 해도 뒤에 가서 욕되지 않지마는, 언제 가서 변할지  모르는 그자 가지고, 그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난 다음에는 그게  변해 버리면 그 역사한 그것이 결국은 다 마귀의 것이 되고 말 터이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의탁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임무를 생각하면서 '보자, 여게서는 아브라함과 롯' 많은 인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마는, 성경에 능한 사람들은 많은 인물을 생각합니다. 왜? 이  인물에 대해서는 이런 각도가 있고 저 인물에 대해서는 저런 각도가 있고,  있지마는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많은 인물들을 다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저  둘만 생각해도 좋다 그거요.

 그러나 차차 둘 생각하다가 성경 지식에 따라서 세 사람 생각하고 네 사람  생각하면 더 세밀히 이제 구별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니까 자꾸 그것도 성장돼  나가야 되기는 되는데, 우선 첫째 당할 때에 '자, 여게서 어떻게 하면  인본주의고, 어떻게 하면 신본주의고?' 그것 알고 기억하고 말하기 좋다  그말이오.

 '자, 여기서 내가 지금 오늘은 신본주의를 가려면 뭐이며, 인본주의는 어떤  것인가? 롯은 인본주의에서 망했고 아브라함은 신본주의에서 성공했으니까  인본주의 신본주의가 어떤 건가?' 요렇게 구별하면 환하게 나오게 됩니다.

 또 그러고 그 다음에는 '자, 타협주의라? 신앙주의라?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나갔고 롯은 타협으로 나갔다. 타협이라 말은 서로 이렇게 다른 것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의논해 가지고 거게 맞추어서 나가는 것을 타협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지금 세상은 다 타협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신앙은 타협이 아니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하나님 한 분의 그  뜻만 찾아 가지고 고대로만 나가면 고대로 나가는 것, 자기가까운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먼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한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백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온 교파와 배치가 되거나 말거나 하나님의 뜻 하나  고것만 찾아 가지고 고대로만 밀고 나가는 사람이, 그 사람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붙들고 일하십니다.

 뭐 약하든지, 외롭든지 혼자든지 어쨌든지 신앙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제  신앙으로 나가는 그것 반대하는 타협주의자들을 전부 이 세상에서 점령을 하든지  세상에서 점령 안 하면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다 점령해서 그가 다 부하로, 그  슬하로 다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그 뜻을 인간의 생각하고 서로 조화를 붙여서 종합을 해  가지고 서로 흥정하는 그것이 타협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뭐 '아, 뜻인데  아무것이가 이렇게 말하던데, 몇 사람이 이렇게 말하던데 ..' 하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뜻에는 가감도 없고 양보도 없고 에누리도 없고 누구로 더불어 서로  홍정해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그런 것도 없고, 그저 하나님의 뜻이면 복종하는  고것이 신앙입니다.

 타협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지마는-제가 그 때 그전에  교계에서 싸울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들이 다 총회장 되고 다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와 가지고 조사님, 우리도 그게 옳은 일인 줄 알고 그런 줄  알지마는 그대로 어떻게 다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러면 뭐 당장에 직장 떨어질  것이고, 또 밥통 떨어질 것이고, 또 이런 마찰될 터이니까 그것 되겠습니까?'  '옳기는 옳은 말이라 안다고 저를 대할 때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내 다 문제가  이러니까 와서 위로하고 권유한다고 '옳은 줄 알기는 알지마는 우리 가 어떻게  다, 옳다고 해서 다 그래 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말 안 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그랬소. '옳으면 그것이 하나님하고 하나인데 하나님 배반하고  무슨 길을 가겠느냐? 우리는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 옳으면 그걸 택해야지 딴 거  뭐 있느냐?' 조금도 요동하지 안했어. 요동 하지 안했어. 요동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핍박을 많이 당했지마는, 내 다른 행위로 보면 뭐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에게 가르쳐주지 아니하지마는 요동치 않고 나가는 그것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래도, 이 서부교회 교인들 이렇게 많이 모아 주셨고, 또 주일학생은 세계  제일이라는 것이 뭐 많이 곳곳에 퍼져나가는 이런 것도 되는 그것이,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인데 내 다른 면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거는 뭐 어림도 없고 다  실패되고 말게 하지마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타협하지 않고 신앙으로 나가는  고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이라 하는 것을 제가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점이지 다른 점을 하나님이 보시고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타협이냐 신앙이냐? 타협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은 그렇기는  그렇지마는 그 사정과 형편이 이러니까 그것도 좀 서로 조화를 해서 흥정을  붙여서 그렇게 좀 하면 좋지 않느냐? 꼭 고대로만 해 가지고 되겠느냐 하는  고것이 타협주의요. 거기에는 가감을 할 수도 없다. 에누리도 할 수도 없다.

조그만치라도 양보하고, 서로 밀고당기고, 너 얼마 양보하고 나 얼마 양보하고,  하나님의 뜻 얼마 양보하고 또 인간의 뜻 양보하고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뜻  하나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 나가자 하는 그것이 타협주의인데 롯은  타협주의로 나갔습니다. '하나님 뜻은 그렇지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고  사정이 그러니까 안됐지마는 어쩔 수 있느냐?' 하면서 나갔기 때문에 고게  타협주의요.

 아브라함은 뭐 가족이고 사물이고 자기 사업이고 모든 것이 절단나도 하나님의  뜻이면 그만 사나 죽으나 고대로 나가는 고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주의입니다.

 또 롯은, '소돔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다' 아주 여호와의 동산 같다 말은 에덴  동산같이 모든 것이 풍부하다 그말이오. 또 애굽이 아주 물풍으로 말하면 지금  미국 같이 물풍했었습니다.

 이러니까 눈에 보기에 그렇기 때문에 롯은 요단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롯은  눈에 보이는 것, 또 현재에 되어 있는 것. 그러면, 현재 되어 있는 것 또 눈에  보기에 잘 되어 있는 것, 또 앞으로 아주 희망이 있는 것. 그러면 피조물 그것이  아주 잘돼 가지고 있고 조건 좋고 유망한 그것, 피조물로 되어 있는 그것의 좋고  잘 되어 있고 유망 하고 아주 힘있게 되어 있는 그것 그것을 가리켜서 현상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상태. 현재의 상태 이것을 롯은 귀중히  여겼고, 아브라함은 현재의 상태를 귀중히 여겼지마는 현재에 잘 되어 있는 이  상태와 하나님의 축복과 이 둘을 두고 '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현재 잘  되어 있는 이 상태를 내놔야 되고 현재에 있는 이 상태를 네가 취하려면  하나님의 축복을 내놔야 된다' 하는 고 둘이 서로 견재될 때에 그럴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택했고 롯은 현재에 잘 되어 있는 그 현상을 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현재에 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현재에  되어 있는 것도 아주 귀중하고, 현재에 무엇이 되어 있는 것과 되어 있지 않는  그것은 참 천지 차가 있습니다. 현재에 잘못되어 있는 것과 잘 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에 되어 있는 그것이 오십점 짜리로  되어 있는 것과 육십점 짜리로 되어 있는 것은, '뭐 오십점이나 육십점이나 그  까짓 것 차이 둘 것 뭐 있나?' 아니오. 오십점 짜리와 오십 일점 짜리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십 일점 짜리는 그만치 가치있고 귀합니다. 오십점 짜리와 백점  짜리는 차이가 한정 없이 있습니다. 이러나 그것이 그것과 그것끼리는 비교하면  일점 차이라도 차이가 무섭고 중요한 것이지마는 하나님의 축복에다가 갖다 붙여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이냐 그거냐? 하나님께 대해서 견제될 때는 그까짓 것 암만  잘돼봤자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고것을 잘못 하면 기독자들이 염세주의가 되고 또 기독자들이 세상을 무시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을 저는 많이 봅니다. 뭐 세상에서 뭐 되어 가지고  있으니까 지위나 권세나 소유나 이런 것 든든히 돼 가지고 있어도 '그까짓 것 뭐  하나님 축복이면 다 되지.' 그 사람이 너와 같이 축복 받으면 너하고 그  사람하고는 천지 차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다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그것은 그대로 되어 있는 것이 조금만 차이 있어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이고, 피조물과 피조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피조물로서도  백원짜리와 백십원짜리와는 차이가 크다 하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만치  차이가, '뭐 백십원짜리나 백원짜리나' 아니야. 그 차이가 큽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에게 붙여서 네가 천만원짜리가 하나 있고, 또 십원짜리가 하나  있고 그런데 거기 하나님이 붙어 버렸어. '자, 네가 천만원짜리를 네가  차지하려면 하나님 내놔야 되고, 하나님을 차지하려면 십원짜리를 차지해야  되고' 어느 것 차지해야 됩니까? 십원짜리! 그때, 하나님과 비교할 때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떼놓고 그것과 그것과의 차이를 말하는 것 아니오.

 그러기 때문에 롯은 소돔 들이 보기 좋고 이러니까, 그게 분명히 자기 삼촌  아브라함에게 거리낀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그때는 성경이 없는 때이니까  양심을 가지고 사는 양심 시대인데 자기 양심에 그게 거리낀다 그말이오. 그게  분명히 그래 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슬려 가는 것이요, 또 아브라함을 거슬려  가는 것인 줄 알지마는, 자기의 현재 보이는 소돔 들이 그렇기 때문에 소돔 들을  택하고 아브라함을 배척했다 이거라. 그러니까 그것이 뭐이냐? 유물주의요, 현재  되어 있는 가견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을 크개 여겼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 뜻과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축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거요.

 그러므로 롯은 유물주의요, 아브라함은 축복주의라. 롯은 타협주의요,  아브라함은 신앙주의라. 롯은 인본주의요, 아브라함은 신본주의라. 이렇게  구별을 시켜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믿음에 성공한 표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그말은  아브라함과 같은 고 신앙을 가지라 그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공한 신앙의 하나  표본이오. '보라, 이 표본을 보고 요대로 해라 하는 것이고, 또 롯은 실패한  신앙의 표본입니다. 신앙 같지마는 롯은 실패한 사람은 다 요렇게 해 가지고  실패한다 하는 것을 표본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롯을 잘 생각하면서 자기 신앙 걸음을 조심있게  걸어야 될 것이오. 모두 우리 교회 보면 청년들이 뭐 이런 사업 저런 사업  시작한다고 하는데, 무슨 사업을 시작할까 사업에 대해서 종별을 바로 택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죄 안 되면 됐소. 죄가 되는, 죄를 짓는 업이 아니라면 꼭  같습니다. 죄를 짓는 업이 아 더라면 꼭 같소. 무슨 업이라고 업의 종류를  택하려고 하지 말고, 또 자기의 뭐 조건이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런 조건도 자기가  중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종류나 조건이나 그런 것이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데에  같이 한다고 하면 그 차이가 있지마는 하나님과는 비교 못합니다.

 그러니까 첫째 생각할 것이 뭐이냐? 신본으로 하자. 신앙으로 하자.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자. 축복 받도록 하자.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자.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살자. 요 세 가지만 바로 되어 있으면 인간이 그것 가지고는 다 실패,  사람마다 실패한 업을 그 사람이 했다면, 이 세 가지를 그 사람이 거기서 한다고  하면 인간으로는 다 천인 만인이 다 실패했는데, 천인 만인이 네 곁에서  꺼꾸러졌는데 이 재앙이 네게 오지 않는다. 천인 만인이 실패했는데 이 사람은  성공한다. 이 사람은 이 세 가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공을 시킨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랑하고 싶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걸 지키면 빨리 지금 소문 내기 위해서 '봐라. 이 사람은 이  세 가지를 지켜 가지고 지금 어찌 되느냐?' '세 가지 지키기 때문에 조렇게 빼빼  말라서 망한다. 조렇게 되어진다' '봐라. 이 사람 이 세 가지 지켰다.' '세 가지  지켜 가지고 망했습니다.' '어찌 됐노?' '망했습니다.' '어찌 됐노?'  '망했습니다.' '어찌 됐노?' '망했습니다.' '너희는?' '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했다고 알고 난 다음에는 '이 세 가지 지킨 사람들을 보라.' 뻐뜩  들어 가지고 당신이 '보라.' 이러니까 '아, 야 이상하다.' '이 세 가지 지킨  사람의 결과를 보라.' 하나님이 이렇게 자랑을 하고 싶고, 광고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왜? 당신 알아야 피조물들이 멸망을 받지 않고, 구원 얻기 때문에 이것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소원하시는 일입니다. 이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라가다가  조금 한 몇 사람 알 만큼만 되어지면 그 동안을 못 견뎌 가지고 배반하고  변해지니까 하나님이 역사할 수가 없어.

 그런고로 신본주의, 신앙주의, 축복주의, 고게 말해도 '뭐,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면 된다. 야,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된다.' 아무것이 그 직원이 참 좋은  직원이다. 그 사람 없으면 우리 공장 안 된다. 그래도 그 사람이 주일날 꼭  일하지 말라 해도 주일날 꼭 와서 일하고 '내가 주일날 안 하면 이런 일  못하니까, 이 감당을 못하니까 주일날 왜 빼라 합니까? 여기서 이 일 지금 그만  나는 사면하고 말겠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공장 운영이 안 되는데, 그 사람이 주일을 제가 안 지키려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등용을 해야 되지 그 사람 사면 하면 우리 회사는  절단나 버린다.' 그 사람이 주일, 그 사람이 참 아 깝기는 아까운데 그 사람이  주일 안 지키니까, 안 지키고 일은 잘 하는데 뭐하고 대조됐소? 무엇과 대조가  됩니까? 무엇과 대조가 돼? 온 회사가 다 주일 지키는데 그 사람 하나가 주일을  안 지키는데, 그 사람 하나를 주일을 지키고 이걸 해 달라 하니까 아 주일 빼  버리면 일이 다 낭파되기 때문에 나는 이 자리를 못했으면 못했지, 나는 그러면  나는 사면하겠다고, 주일 지키는 당신들끼리 잘 하라고 이렇게 만일 몰렸다고  하면, 그 사람은 기술을 보면 그 사람 아니면 안 될 사람 많이 있고, 그  기술자를 붙들려 하면 어찌 됩니까? 왜 벙어 리라? 아! 그 사람을 불들려고 하면  그 회사가 어찌 돼요? 주일을 범 하잖아? 그걸 몰라? 그렇게 어두워 가지고  어떻게 마귀를 다 이겨 나가겠소?  그 기술자를 붙들어서 일을 시킬라 하면 주일을 범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지겠고, 또 하나님 축복을 받으려 하면 그렇게 요긴한 사람을 내보내야  되겠고 이러니까 축복이냐 기술이냐 이 둘인데, 롯은 그 기술, 그 사람을 택했다  그 말이오. 아브라함은 축복을 택했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거석해도, .말을 해도 보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  '네가 그러면 주일날 그리 가면 축복 못 받는다' 해도, '축복은 못 받아도 내가  오늘 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오늘 일 안 보면 안 된다. 그 일 안 보면 안  된다. 또 그리하면 안 된다. 해도, 안 된다는 고걸 듣고 딱 고대로 회개하고  실행하지 않고 하는 사람은,  옆에 선지자가 말을 했는데 안 듣고 그래 할 때는 하나님께서, 뭐 계명을 안  지켜도 요건 요리 해야 된다 할 때에 하나님은 거기서 어떤 칼을 가느냐? '오냐.

계명 지키라고 선지자가 말을 해도 안 듣고 하니까 네 하는 대로 되는가 안  되는가 봐라. 하나님이 힘이 모자라면, 그 사람한테 모자라면 안 되겠지마는  하나님이 힘이 있으면 힘있는 대로 다 해 가지고 고와 같이 하는 것이 실패가  되어져야 그 사람이 꺼꾸러지고 회개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러니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뭐 할 때에 미치괭이 같습니다. '보자. 이러면 하나님의  축복에 거리끼나 어떠노? 하나님의 축복에 거리끼나 안 거리끼나?' 이것을  생각해서 '축복이냐? 아, 안됐다. 이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안 오겠다. 축복  위주로 이렇게 사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축복보다도 저희 기술,  실력, 모든 조건, 모든 피조물에 이렇게 모든 돼 가지고 있는, 그 종합되어 있는  그 멤버 이런 것을 더 크게 여겨 가지고 그걸 위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습니다. 이러니까 고것을 잘 살펴서, 축복 아니면 헛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래 나가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그래 나가면 사람  보기에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실패해도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성공을  세상에서도 일으킬 것이고 무궁세계에서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고것을 잘 생각해서 일은 하나님의 축복주의로 하십시오. 또  모든 일을 판정할 때는 타협주의로 하지 말고 신앙주의로 하십시오. 또  무엇이든지 할 때에 일을 무슨 목적으로 하느냐? 일하는 목적은 신본으로 하고  인본으로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다 성공 해. 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성공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복이 없는 일 하나 있습니다. 복이 없는 일 하나 있는  것은 뭐이 복이 없느냐? 우리 집에 혈육의 자손이 큰 아들 이 신앙으로 그꼴  하고 있지, 또 작은 아들도 신앙이 그렇게 없지 이러니까 '예수 암만 잘 믿어도  목사님 자녀 보니 저렇게 하니까 아 그렇다 이런 것은 자기네들에게 지금 복이  없소. 복이 없는 것입니다.

 왜 복이 없느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내가 설교를 해도 요 것을 백프로  믿고 딿지를 않기 때문에 복이 없다 그말이오. 나는 믿습니다. 내가 살았을 때에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내가 죽어서라도 반드시 그들이 신앙가로 서부교회에 제일  우두머리로 등용될 줄 압니다. 그저 절대로 그렇게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런 싹수는 보입니다. 싹수는 보이는 게 아니라 악이 강한 것이 돌이키면 선도  강합니다.

 그런고로, 이거는 여러분들이 나를 보려면 성경을 똑똑히 보면 압니다. 그러나  내가 자긍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마는 고린도전서 l2장에도 보면 사도바울에게  마귀가 달려들어서 마귀의 가시를 줘 가지고 사도바울을 머리를 들지 못하게  자꾸 수치스러운 일들이 두터씌였습니다. 이래도 이제 그것을 벗어나기를  원했지마는 그게 벗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교만해겨 가지고 자긍해 가지고  실패되기 때문에 그걸 족한 줄로 마지막에는 깨닫고 견뎠습니다.

 이러니까 내게 대한 것을 보지 말고 내가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에 에누리하지 말고 믿으십시오. 됩니다. 또 그러고 제 자녀들도  내 말을 안 듣습니다. 내가 말하는 걸 안 들어요. 안 듣는 게 권위 없으니까 안  듣지 않는가? 권위가 없으니까 안 듣지 마는 하나님이 안 듣게 하시면 안  듣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듣는 것은 할 수 없어.

 어떤 교회 와 가지고 그 목사님이 그러니까 '자녀 중에 목사가 몇이나 낳는가?  이렇게 묻는데 그 사람들도 신앙이 그러면 좁습니다. 목사 밑에서 목사 난 것만  거석한 것 아니고, 위대한 신앙가들 밑에는, 위대한 신앙가들 밑에는 신앙가가  되어 난 것도 있지마는 신앙가 아니고 저 개망나니가 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 넓은 범 위의 조건이 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그런 면에서 내가 거석해 가지고 내 자녀들이 다  목사가 되고 신앙에 위대한 가가 됐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 권위있고 신임있고  여러분들이 백프로 믿겠지마는 그렇지 않으니 여러분들이 에누리한다 말이오.

에누리하면 여러분들만 속아. 나를 믿으라 말 아니오. 나는 나를 본받으라 하는  그 말을 하지 못해. 과거에는 나를 본받으라고 내가 거창 있을 때는 나는 큰소리  쳤지마는 나를 이제 본받아라 말을 하지 못해. 내가 이 강단에 와서 기도할  때마다 이 모든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 죄인이라 하는 고것을 내가 중심으로  내가 느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뭐를 더듬어?  이러니까, 나를 보지 말고, 내가 증거하는 것은 참 성경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에 그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바로 되도록 하기 위 해서 나를 지금  사탄의 가시를 줘 가지고 이와같이 하고 있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그걸 보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에누리하면 여러분들에게 복이 없다 말이오.

 아브라함은 신본주의 롯은 인본주의, 아브라함은 신앙주의 롯은 타협주의,  아브라함은 축복주의 롯은 유물주의. 이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백프로 믿으십시오. 믿고 행하면, 그대로 하면 다 복 받을  것이고 안 하면 다 망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분 기도 후에 권찰회 있습니다.

 나를 보고 믿으려 하면 여러분들이 다 낙심돼요. 나를 보고 믿지 말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니까 성경이냐 성경이 아니냐? 그것만  상고해 가지고 성경 말씀이면 여러분들이 백프로 믿고 그대로 나가면 복 받을  것이고 에누리하면 그만치 손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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