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신앙 노선(결과), 시험

 

1983. 4. 27. 수야

 

본문 : 창13:8-11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오늘은 주일 공과를 한번 다시 공부하는 것으로 공과를 한번 소개 하겠습니다.

 본문은, 창세기 13장 8절로 11절.

 제목은, 두 신앙 노선.

 요절은, 창세기 13장 9절.

 일대지 '아브라함과 롯은 육신으로는 숙질간이요 믿음으로는 믿음을 같이  시작한 동지이다. 이 두 사람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온 천하에 믿는 사람의 두  표본이요 두 조상이다. 수천년 동안 내려오면서 세계에 믿는 모든 사람은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든 성공자의 조상이 되었고 롯은  모든 믿는 사람의 실패자의 조상이 되었다. 누구나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라  구원과 축복을 받는 신자도 있고 롯을 따라 저주와 구원의 실패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어느 노선이든지 매일 매일 걷고 있는  우리들이다. 주님께서 이 두 사람의 신앙 걸음을 성경에 기록해 주신 것은 롯과  같이 멸망하지 말고 아브라함을 따라 복된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란에서 출발하여 벧엘에 가서 살  때에 흉년으로 시험을 만났다. 시험을 못 이기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변을  보고 회개하고 다시 벧엘로 돌아을 때부터 큰 축복을 주시고 벧엘에 있을 때에도  계속 축복하여 두 사람이 다 재산과 노비가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그때에 두  사람은 다시 시험을 당하게 되어 일꾼들의 시비로 숙질간까지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  셋째 '이때부터 두 사람의 신앙 노선은 갈라지게 되었다.

갈라지게 된 이유. 첫째, '아브라함은 인간편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 편을  생각하여 하나님을 노엽게 아니하고 기쁘시게 하려 하여 롯에게 자기 소원대로  선택하라 하였고, 롯은 하나님편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 자기들만 생각하여  하나님은 섭섭하실지라도 가족들과 사람들 좋게만 하기 위하여 옥토 소돔 들을  택하고 아브라함은 박토 가나안을 차지 했다.'  둘째, '롯은 가족들과 목자들과 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한  타협주의를 택했고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의  의견을 따른 신앙주의의 길을 택했다.'  셋째, '롯은 현재에 보이는 재물과 조건과 희망을 택하여 유물주의의 길을  걸었고 아브라함은 보이는 모든 좋은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더욱 크고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는 것임을 믿어 축복주의의 길을 택하였다. 이것이 우리 각  신자들이 만나는 현실 현실에서 두 길 중 어느 것이나 하나 택하는 데에서  흥망이 결정되는 것이다,'  넷째 대지. '롯은 재산과 노비는 다 없어졌고 또 전쟁에서 다 뻐앗겼고 또  유황불비에서 재산은 완전 거지되고, 아내는 소금기둥 되고, 두 사위는  사망했고, 두 딸은 망령된 죄인이 되었고, 롯도 부끄러운 신자로 끝마쳤다.

아브라함은 대 거부가 되어 자기 집 지키는 군대가 삼백십팔 명이나 되었고,  오대 연맹국이 이기지 못한 강한 연맹국을 자기 집 훈련병으로 격퇴하였고, 모든  가족들은 다 신앙의 성자와 성녀들이 되었고, 천하 만민의 복의 조상이 되었다.

누구나 믿는 사람은 하늘 나라로 가면 일단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되는 믿음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노선에서 훙망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대로  되는 사실을 알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공과입니다. 공과를 여러번 읽으면 또 설교도 듣고 해 놔서 알겠습니다.

 아브라함,-아직까지는 이름이 아브람이고 그 뒤에 이제 하나님이 다시 한  승리를 이루고 난 다음에 아브람을 가리켜서 아브라함이라 그랬습니다.

아직까지는 이름을 아브람이라 그래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은 우리 모든 믿는 신자들의 두 조상입니다. 롯의 신앙을  따라서 롯의 신앙 자손들이 되는 사람도 있고 또 아브라함의 신앙 노선을 따라  아브라함의 신앙 자손들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이 두 사람의 노선 중에 한 노선을 밟아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요것은 이치로 돼 있기 때문에 그 노선 걷지 않고 딴 노선도 또 있을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기 쉽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노선을 안  걸으면 롯의 노선 걷고 롯의 노선을 안 걸으면 아브라함의 노선을 걷고 이 두  노선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노선을 잘 구별해서 우리가 항상 롯의 노선을 피하도록  노력해야 되고 아브라함의 노선을 양보하지 아니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숙질간인데 신앙 생활은 같이 시작했습니다. 같이 시작해서  벧엘까지 가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또 벧엘에서 어려움을 닥쳤을 때에 그  어려움을 좀 참고 견디면 그만 시험에 합격이 돼서 큰 축복을 받을 터인데 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가지고 애굽으로 설설 내려갔다가 애굽에서 큰 환난을  만났습니다. 거게서 아브라함과 롯이 회개를 하고 다시 벧엘을 향하여서  올라가게 됐습니다.

 올라가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벌써 벧엘까지 가는 그 동안  세월이 얼마 지나는 가운데에 큰 축복을 해서 모든 것이 다 풍부하게 됐고 또  벧엘에 가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물질도 풍성했고 또 따르는 그  종업자들 모든 고용인들도 많아졌던 것입니다.

 이러니까 축복을 받아서 부요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시 험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재산이 많아지고 짐승이 많고 목자들이 많으니까  필연적으로 시비가 나지 않겠느냐 하지마는 하나님이 그렇게 시험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이 아브라함같이 자기에게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 어려움을 신앙으로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견디면 하나님이 큰 축복을 주시는데 그만 견디지  못해서 그들이 애굽으로 간 것처럼 세상으로 설설 기어나가기 쉽습니다. 나가면  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난 다음에 그때사 돌아옵니다.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대개는 그렇게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해 가지고  세상으로 나갔다가 빨리 돌아오지 않고 그래도 뭐이 될까 해서 택한 자들이  날뛰다가 마지막에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폐인이 될 그때사 예수  믿으러 돌아와 가지고 후회를 하면서 믿는 사람들 많고, 또 젊을 때에 그것을  깨닫고 빨리 돌아와서 일찍부터 준비를 해서 믿는 사람들은 다소 있고, 처음에  믿을 때부터 실수하지 않고 시험 닥친 것을 이겨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것은 시험이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재되시고  또 주권자 되시고 전능자 되시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게 해 주시리라.' 하는  것을 믿은 사람들은 다 승리를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다가 이 아브라함과 롯과 같이 이렇게 시험을 못 이겨서,  가난해서 시험을 못 이기는 일 있습니다. 너무 생활이 어려워서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를 떠나는 그런 시험의 실패자들이  있기 쉽고 또 그게 지나가고 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이제는 어려움이 있어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시험에 드는 일이 또 있습니다. 모든 일이 풍성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고 모두가 다 성공이 되어지니까 또 그것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은 어려울 때도 그 어려움이 시험이 되는 것을 알아야  되고 또 좋고 평안할 때도 그것이 또 시험이 되는 것을 알고 어쨌건 어려워서  오는 어려움에서 오는 시험이든지 좋아서 오는 시험이든지 시험은 그때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꼭 꼭 지키는 참고 견디는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것 외에 좋은 방편이 없습니다. 잠시 잠깐만 지나가면 광명의 새 날이  닥치는 것입니다.

 숙질간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내려다 보고 계시면서 '너희가 어떻게  하나?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나 세상을 믿나? 나를 따르느냐 인간들을 따르느냐?  네가 모든 세상 조건과 눈에 보이는 모든 재물과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소망 그런  것을 너희들이 보고 따르느냐, 내 축복욜 보고 따르느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시험하십니다. 언제든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꼭 같이 시험은 같은 시험입니다.

다른 시험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도 처음 일이 돼 놓으니까 시험인 줄  모르고 롯도 시험인 줄 모르고 다 이런 일을 닥쳤습니다. 닥쳤는데 롯은 실패한  신자의 조상인데 믿는 사람이 실패를 하면 어떻게 실패하느냐? 롯의 걸음을  따라가다가 실패를 한다 그러면 롯은 어떤 걸음을 걸었느냐 하는 것을 여게 세  가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자, 지금 그 자리에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쪽편에는 아주 소돔 들이 물 좋고 목장 아주 방목하가 좋은 그런 옥토가 있고  또 한쪽은 아주 물도 없는 발간 자산이 있고 이런데 지금 어떻게 이걸 가르며  어떻게 서로 나누어야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성신의 감동을 그들이 받는 것이나, 또 그들이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도를 들은 것이나, 또 그들이 예의와 도의를 배운 것이나 그 모든 것이  그들을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계시 시대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주셔서  문서계시를 주석 가지고 문서계시를 표준으로 해 가지고 따라서 사는 시기가  아니고 그때는 양심 시대입니다. 자기네들이 모든 사회에서나 국가에서나 또  윤리에서나 도덕에서나 자기네들 마음 속에 양심으로서 양심이 '이래 하면  틀렸다 이래 하면 맞다' 하는, 양심을 따라서 살아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시대입니다.

 지금도 신구약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는 하지마는 성경이  인도하는 그 인도를 받으면서 자기 속에 양심이 인도하는 인도를 받아야  하나님을 만나지 그리 안 하면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 본다' 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숙질간이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양심으로서는 벌써 다 자기네들이  깨닫고 아는 바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래도 여게서 시비를 하면 조카 롯이  양보는 안 할 것이고 또 그 질부가 굉장히 욕심쟁이니까 양보도 안 할 것이고 또  질녀들도 그것 뭐 양보 안할 것이고 모든 목자들이나 그 모든 노비들도 양보를  안할 터이고 이래 시비가 일어날 터이니까 이러면 하나님에게 욕이 되겠다. 우리  사람편만 생각하면 내가 큰집이고 또 내가 숙부고 이러니까 그래도 내가  큰집이니까 내가 좋은 것을 먼저 택하고 남은 것을 저희들이 택해야 되지마는  이렇게 하면 우리는 좋지마는 하나님이 섭섭해 하시고 하나님이 걱정하시고  하나님에게는 이것 대우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대접이 아니다.'  이래서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야, 우리가 이래 다투지 말자. 네 앞에 모든 것이  다 있지 않느냐? 네 마옴대로 좋은 것을 택해서 네가 취하면 남은 것은 내가  하마.' 그래야 양심이 편코 또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그것을 택해서 롯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롯이 그때 또, 사기가 양심을 쓰는 것보다 아브라함 자기 삼촌이 양심을  써서 말을 하니까 자기는 더 깨닫기 쉬울 것입니다. '이것 삼촌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어떻게 좋은 곳 택하겠다 그럴 수가 있겠느냐? 삼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삼촌이 큰 댁이고 또 어른인데 어른이 먼저 택하시고 남는 것 제가  해야지 그래 되겠습니까?' 의례히 그것은 그래 해야 된다는 것을 그 양심이  가르쳐 주고 있고 다 이제까지 배운 모든 사리들이 그런데,  그만 롯의 모든 가족들이 자꾸 욱신거리면서 그저 그러면 안 된다고 어짜든가  한번 요번에 한번에 결정지우고 마는 것인데 한번 잘못되면 우리가 이 모든  사람들 데리고 어떻게 고생을 하고 하느냐고 자꾸 뒤에서 조아대니까 그만 롯이  있다가서 '미안하지만 그러면 제가 소돔 들을 그만 택하겠습니다.' '그래.

그러거든 소돔 들을 택하면 너희는 소돔 들로 그리 가서 장막을 치고 옮겨  가거라.' 그래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네들 사람의 이해, 우리 사람에게 어찌 되느냐?  자기네들 사람들의 좋고 나쁘고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번연히 그렇지마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아브라함과  같이 말을 해야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생각은 그만 둘째 두고 눈 지끈 감고  자기네들을 먼저 생각해 가지고 요단 들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근본으로 삼았고 롯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은,  이래서 하나는 신본주의 롯은 인본주의로 갈라졌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만날 때도 다 그렇습니다. 사건을 만나든지 시비를 만나든지  장사를 만나든지 무엇을 만날 때도 보면 자, 여게서 반드시 두 길이 다 하나님도  좋고 사람도 좋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도 좋고 사람도 좋고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다가는 하나님이 딱, 하나님 대우하려 하면  사람은 대우가 못 되고 사람 좋게 하려 하면 하나님은 섭섭하게 되고, 요 둘 다  취할 수 없는 요 꼭 요런 외통목으로 딱 몰아붙일 때가 있습니다. 여게는 요렇게  몰아붙여 줬소.

 그럴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지 사람 자기네들 좋게  하려는 그 길을 택하면 그것이 롯의 신앙 자손입니다. 또 거게서 번연히 '이리  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좋아하시지마는 우리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이것 참  절단난다' 그럴 때 사람이 절단나도 하나님 좋아하시도록 하나님을 대우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대우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는 그 길을 택하는 그것이  신본주의요 아브라함의 신앙 노선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거게서 지금 달라졌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자기네들 가족들이 말하기를 '암만 그래도 우리가 큰 집인데  그러면 짐승은 지금 풀을 한 끼만 안 줘도 야단을 지기고 이러는데 이  가나안에는 발간 자산에 풀 하나도 없고 이런데 이 많은 짐승떼를 몰고 그러면  이 가나안에서 어떻고 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요단 들을 같이 가르든지  어짜든지 하지 이럴 수가 있겠느냐고 그렇게 뭐 말하고, 또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목자들도 '이러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이거 양이고 뭐고, 소고  양이고 낙타고 뭐 다 죽지 여게서 뭐이 되겠습니까, 발간 자산에서?'  이러고, 아브라함이 양심으로 생각해 볼 때에 '사람들의 모든 공론은 다  식구들이 이런데, 모든 식구의 의사는 전부 다 이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이냐?'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살피고 할 때에 '그러면 롯하고 시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나 그만 그걸 양보를 하고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내가 하나?' 이 둘로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나 모든 사람의 이 뜻을 따르나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이래  생각하다가 아브라함은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지 이 사람의 뜻을  따르는 그것이 좋고 이 사람들의 이 뜻을 받아주지 못하고 이 사람들의 뜻에  이것 받아주지 못하고 대립이 되고 그 뜻을,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지니까  이것 마음에 아프고 안됐 지마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이들의 의사를 따라서 할  수는 없고 이 사람들의 의사를 받아 주지 못하고 이 의사들을 거부하는 것이 참  마음에 안됐지마는 하나님의 의사를 거부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제 내가 내 욕심을 위해서 이 사람들의 의사를 거부하는 것 같으면  하지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거부하는 것이니까 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들의 다 의사를 거부하니까 하나님이 아시고 이분들도 불쌍히 여겨 줄  것 아니냐?'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 신앙을 택했습니다.

 롯은 그렇게 가족들이 시비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은 자기가 생각해 보면  알지마는 자꾸 옆에서 사람들이 말하니까, 사람들이 말하니 하나님의 뜻 사람 뜻  하나님의 뜻 사람 뜻, 인간들의 모든 중론, 가족들의 호소, 사람들의 말,  사람들의 의사, 사람들의 호소,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 모든 것은 자꾸 '그만  요단 들을 택해 가지고 가자'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면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되겠 고 삼촌에게 양보를 해야 되지 내가 그래 가지고 안 되겠다'  이러나 자꾸 이래 쌓아니까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사람들을 배척을  못 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서 사람들의 뜻을 맞춰 가지고 인간들의 원하는  대로 그만 요단 들을 택하기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참 그 마음이 쓰리고 아프고 하지마는 부득이 모든 가족들의  의사를 들어주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의사를 따르는 신앙을 택해서 신앙주의로  나아갔고 롯은 이렇게 서로 하다가 그만 하나님의 뜻은 거부해 봐야 무슨 별  거석도 없지만 여기서는 하니까 마구 호소가 나오고 싸움이 나오고 분쟁이  나오고 할 수 없어 사람의 뜻을 따라서 이렇게 한, 사람의 뜻을 따라서 뜻을  양보하는 그 타협주의로 나갔던 것입니다.

 이래서 롯은 타협주의로 나간 사람이요 아브라함은 신앙주의로 나간 사람으로서  요 현실에서 둘이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일을 닥 쳐보면 그렇습니다.

일을 닥쳐보면 반드시-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하나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럴 때는 뭐 하나님 비위도 맞추고 사람 비위도  맞추고 다 좋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면 인간의 뜻을 거부해야 되고 인간의 뜻을 따르려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해야 되는, 요 둘 다 할 수 없는 똑 요 형편으로 몰아넣습니다. 현실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까?  이럴 때에 대개는 보면 믿는 사람들이 사람을 배척하지 못해서, 사람을 안면  괄시를 못 해서, 사람을 버리지 못해서, 사람을 내놓지 못해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부득이 마음이 아프지마는 '주여,  내가 이것 알면서도 내가 이런 죄를 짓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래 쌓아니 이래  놓으면 이 사람들이 다 이렇게 지금 섭섭해 가지고 반대하고 이래 가지고 할  터이니까 부득이 용서해 주옵소서.' 하면서 사람의 뜻을 취해서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대부분의 약한 신자들로서 실패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뭐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마 여게도 지금 사업 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일이 있을 것이오. 좀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일수 록이 그런 일을 많이  봉착합니다. 요것 단단히 들으십시오. 거게서 결정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참 마음에 이 떼기가 거부하기가 참 안됐지마는 '안됐다' 다니엘이  자기 왕 다리오 왕이 하루 종일 '요번만, 내가 모르고 조서를 내렸으니까 이번만  용서하고 어짜든지 한 달 동안만 기도 하지 말라'고 날이 저물도록까지 그  사정을 할 때에 그 거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그 거부를 안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해야 되겠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 하면 다리오 왕의 뜻을  거부해야 되니까 이 두 가운데 있어서 그 난점이 얼마나 많으며, 그런 난점이  우리에 있다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럴 때에 참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인간의 뜻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는 뭐 땀이 바짝바짝 나고 그걸 당장 이래 척 거부해 버리면 서로 상할  터이니까 당장 거부를 못 하고 설설 돌려서 이래 가지고 그저 속을 썩혀서  어짜든지 하나님의 뜻을 양보하지만 않고 인간의 뜻에 따라가지 않고 이렇게 해  나가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오, 이제야 내가 너를 안다.' 할 수 있는 그게 있는 것입니다.

 또 롯의 모든 식구들은 말하기를 이 소돔 들은 현재 물도 좋지요 땅도 좋지요  풀도 좋지요 또 이렇게 평지지요 이러니까 앞으로 목장이 목축이 얼마나  잘되겠습니까? 현재 있는 모든 물질, 현재에 되어 있는 좋은 형편, 또 앞으로  아주 유망한 그 유망, 이 모두 다 눈에 보이는 것 이 피조물로 되어 있는 것, 이  모든 현재 있는 것, 또 현재에 좋은 형편, 또 현재에 보이는 것으로서 유망한  그것, 그것을 자꾸만 그 식구들이 말하고 이러니까 그만 그걸 택했습니다.

그래서 롯은 눈으로 보이고 현재에 보이는 것, 현재에 당한 것, 모든 피조물로  되어 있는 것 그런 모든 조건, 또 피조물로 되어서 앞으로 유망하게 보이는 것  그것을 중하게 여겨서 그 점을 택해 가지고 요단 들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 이러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하나님에게  마찰되는 이 길을 택한다. 그러면 이게 하나님의 은혜보다 크냐? 또 이러면  하나님이 내가 이 길을 택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시겠느냐? 내가 이것을  내어 주고 양보하고 가나안을 차지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 아닌가? 하나님의  축복이 크냐 보이는 조건과 형편과 소유의 풍부한 희망 이게 크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이것이냐, 하나님의 은혜나 이것이냐? 이 둘을 가지고 볼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버릴 수 없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취해  나간 축복주의를 취한 신앙의 걸음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브라함과  롯은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갈라지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됐느냐? 롯은 어떻게 됐는지 얼마 후에  육축도 다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져 버리고 짐승떼 하나도 없습니다. 짐승떼  하나도 없었고 또 그 많은 목자들 일꾼들 종업자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돌도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없어지고 단지 사람이라고는 자기, 자기 아내, 딸 둘. 사위 둘 요래만 있고  다른 사람은 다 없어져 버렸어. 그러고 난 다음에 있다가 그만 전쟁이 나 가지고  전쟁에 포로되어 가면서 재산이고 뭐이고 다 전부 다 뺏겨져 버리고 이래서 전쟁  한번 치르고 나니까 아주 그만 거기다가 있는 것이나마 그만 또 거지가 돼  버렸지, 그러고 난 다음에 또 소돔 고모라 성에 유황 불비가 내려와서 완전히  태워버려서 그만 롯은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져 버렸어. 하나도 없고 그저  입은 옷 그것만 입고 마구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면 여게서 이제 간단하게 내일 학생들에게 문답할 것만 간단하게 좀  말하겠습니다. 롯이 모든 소유가 다 없어지고 이렇게 거지 거지 가난하게 된  원인이 어데 있습니까? 롯이 소유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주 거지가 돼  버렸습니다. 입은 단벌 옷뿐이요, 아무것도 뭐 조그만한 몽탱이 하나도 들고 못  갔습니다. 이러니까 그 소유가 이렇게 아주 거지가 됐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았든지 자기 집에 재산을 지키는 수직 군인이 삼백십팔 명이 있었으니까 그뭐  재산이 얼마나 부자 된 것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부요해지고 롯은 그렇게 가난해진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그것을 학생들에게 알려 줘야 되겠습니다.

 롯이 그렇게 가난해진 이유는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 그것을 위주로 삼고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거지가 돼 버리고 말았고  아브라함이 그렇게 부요하게 된 것은 보이는 모든 조건 그 전부 좋은 형편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여겨서 축복을 바라보고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렇게  부요가 됐습니다.

 믿는 사람이 물질이나 소유나 금생이나 내생에 있어서 이미 현재 있는 것과  보이는 것 그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여겨, 그것도 크고 좋지마는, 그것도  가지고 축복도 가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걸 가지려면 축복을 못 받게  되고 축복 받으려면 그걸 못 가지게 되는 요런 경우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럴 때에 그것보다 축복을 앞세워서 축복을 바라면서 그것을 부득이 양보하고  삣기면서 아깝지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이래 한 사람들은 다 소유에  성공을 하고, 그래 될 때에 눈에 보이는 그것 뭐, '뒤에 가서 축복을 받아서  어찌 될런지 아는가? 우선 잡아 놓은, 나는 꿩 잡으려다가 쥔 꿩 떨군다고 이제  잡아 놓은 것 이것 만일 흩어버리고 뺏기고 나면 헛일 아닌가?' 하면서 축복보다  그것을 귀중히 여기는 그 걸음은 반드시 결과적으로 거지가 되는 걸음이라는  것을 여게 보이고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사람 부자가 돼  버렸어. 그 지키는 사람이 삼백열여덟 명이나 됐으니까 그 다른 종업자  식구들이야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람 부자가 돼 버렸어.

 사람 부자가 됐는데 그뿐 아니고 아브라함은 영원한 사람 부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나면 일단 아브라함 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아브라함 품에 가 다 안겨 가지고 겨우 그 구원의 세계를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은 대부가 돼 버렸어. 롯은 자기 목동들은 없지 사위 둘도 다  그만 안 따라오고 없어져 버렸지, 배반해, 사위 둘에게도 배반당했지, 아내도  그만 그래 가지고 다 잃어버려 버렸지, 딸도 그만 그리 됐지, 완전히 인간에  대해서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실패했고 아브라함은 인간에 대해서  대성공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인간 성공을 한 원인이 어데 있느냐? 롯이 인간 실패한  원인이 어데 있느냐?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인간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얻기 위해 가지고, 하나님 뜻 버린 게 하나님 버린 것이니까. 하나님  버리고 인간 얻기 위해서 한 그것이 인간을 다 뺏겨서 인간 거지가 된 그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사람들이 사람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뒤로 돌리는 그것이  인간을 뺏기는 원인이요 인간을 내놓기가 싫고 인간하고 이렇게 손잡고 좋고  친밀하고 화평한 것이 좋지마는 부득이 가다가 하나님을 안 버리면 인간을  버려야 되고 인간을 안 버리면 하나님을 버려야 되고 하는 요 둘이 있을 때에  울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잡고 인간들을 울면서 내놓으면서 햐나님께  기도한 사람마다 인간의 대거부가 됩니다. 안 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롯은 그 사람은 인간의 대실패자입니다. 자, 아내는 재앙을 맞아 가지고  소금기둥이 돼 버렸지, 사위 둘은 불에 타서 죽어버렸지, 또 딸 둘은 만고에  우사스러운 추한 아주 못쓸 죄인이 돼 버렸지, 자기는 늙어서 도망을 쳐 가지고  소알 산에 가 가지고 있으면서 늙은. 영감 태기가 아주 참 비참하고 '가련하게  돼 가지고 있으면서 딸들과 관계 모든 된 걸 보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면  롯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자기와 자기 가족이 망했느냐?

 아브라함은 자기도 천하 만민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지 모두 복을  빌려면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달라 하고 아브라함의 자손되게 해 달라고 모두  아브라함 자손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 여자는 기도할 때 그렇소. '사라와  같은 믿음 주옵소서. 사라의 딸이 되게 해 해 주옵소서.' 사라의 딸이 되게 해  달라고 전부 기도 그래 합니다. 안 하는 사람 없어. 또 아들 이삭은 얼마나  성자입니까? 또 야곱은 얼마나 성자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다 다 성자요 그 밑에 있는 모든 수종 드는  종들도 전부 성자요 다 성녀들이라.

 어떻게 해서 이렇게 그 사람들이 존귀해졌느냐? 왜 롯은 어떻게 해 그렇게  천해졌느냐? 천해진 것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고 저거 생각한  그것 때문에 그 인간들을 그렇게 하나님이 천하게 만들어 버렸고 아브라함은  인간이 아깝지마는 하나님을 생각하느라고 부득이 둘 중에 하나 생각을 해야 될  때에 눈물 흘려 인간을 뒤로 두고 인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인간 이해나, 인간  조건, 인간편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편을 생각해서 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인간으로서 존귀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높일 줄 모르고 저를 높이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망치게 하는 그 길이요, 자기와 하나님 둘 중에 어느걸 높이게 될 때에  자기는 천해도 하나님을 높이는 그것이 자기를 높이는 그 길입니다. 이것 변하지  못합니다. 이 길은 변하지 않아요, 진리기 때문에.

 또 인간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척한, 인간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버렸으니까 하나님 버린 것 아닙니까? 인간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버린 그자  인간 완전히 다 뻣겨버리고 인간 하나도 제사람 하나도 없는 사람 가련하게  됐고, 인간의 의사를 버려서 인간과 이렇게 그 의사를 버려서 인간과 벌어지는  게 안됐지마는 부득이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이와 같이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을 내놓고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얼마나  부요하게 줬든지, 얼마나 부요했소?   그러기 때문에 인간을 취하는 길은 무슨 길이냐? 인간을 취하는 길은 인간을  취하는 그 길은 하나님 버리고 인간 취하는 그 길은 인간을 뺏기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인간을 다 버릴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버릴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 때문에 인간 손해본 그 사람이 인간 부자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재산 손해본 그 사람이 재산 부자가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권세 손해본 사람이 그 사람이 권세에 부요해지고, 하나님 때문에  자기들을 돌보지 못한 그 사람이 자체들을 성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것은 변하지 않아요. 우리가 요것을 깨닫고 자기 현실에서 그저  현실에 뭐 간단합니다. 그러기에 실은, 철이 없을 때에 그러다가 자꾸 고치고  변동하고 고치고 고치기 때문에 희망이 있게 보이는 것이지 사람들이 보면 롯의  걸음을 걷기가 아주 쉽습니다. 아브라함의 걸음을 걷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걸음을 걷는 그 걸음은 제 삼자들이 보기에 어렵지  본인에게는 평탄한 길이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험하고 좁다' 그 말은 인간  너희 눈으로 볼 때에 좁고 험하다는 것이지 하나님 눈으로 볼 때는 넓고  대로입니다. 거기는 구불어도 자빠지지 않고 다치지도 아니하는 곳이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아주 평평한 것 같지마는 전부 한 자욱 한 자욱에  함정이 있어 막 빠져 죽는 길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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