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신앙 노선

 

1983. 5. 3. 화전집회

 

본문 : 마태복음 13장 18절∼23절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지난 밤과 오늘 아침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배웠는데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 세 가지가 달라서 롯은 멸망을 하였고  아브라함은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무엇이 달랐는고 하니 첫째가 저희들이 당한 그 현실은 주격 다툼입니다. 주격  다툼. 누가 주인이 되느냐, 누가 자기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그 주격 다툼의  시비였습니다. 주격 다툼의 시비요. 둘째로는 의사 다툼의 시비였습니다. 또  셋째로는 소유 다툼의 시비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은 이 세 가지가 다 있을 때에도 있고 두 가지가 있을 때도  있고 한 가지만 해당될 때도 간혹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다 해당이  됐습니다. 그 현실에서 롯은 자기가 자기의 주가 됐습니다.

 이래서, 자기가 자기의 주격이 됐기 때문에 제 마음대로 제 주장대로 제  자유대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기에게 주 격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자기의 주격자를 삼았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의 현실에 대해서 자기  마음대로 자유로 하지를 못하고 하나님은 자기 현실에 대해서 자유하시고 자기는  그 자유에 복종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을 그 현실에서 주격으로 모셨고 자기는 하나님에게 소속한  하나님의 것이 되어졌고, 롯은 자기가 자기에게 주격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해 버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주격이 되어서 자기 현실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했습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 게 된 롯은 자기가 아무짝도  못쓰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게 되니까 악령이 와  가지고 자기를 주장하니까 악령의 감화를 받으니 악령은 우리 사람에게 대해서  행할 때에 털끝만큼도 우리에게 유익된 일은 하지를 않습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속이고 꾀우고 이래 가지고 멸망하는 일만 시키는 것이 악령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무슨 일에든지 어디서든지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게 되든지  인간이 자기를 주장하게 되면 벌써 그것은 마귀의 것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뭐 두말할 것 없이 그의 언행 심사의 모든 움직임은 다 마귀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멸망시키는 것 그 외에는 섞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확정을 짓고 확신을 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그 현실에서 자기의 주격을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주장하고, 하나님이 하나님 마음대로 아브라함에게 하고 아브라함의 당한  현실을 하나님 마음대로 아브라함에게 시키고 아브라함은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  되어졌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이 됐고 하나님이 거기 총 책임 주격이  됐으니까 성신의 역사가 안 올래야 안 올 수 없어서 성신의 역사가 와 가지고  아브라함은 성신의 감화를 받아서 심령이 치료받았고 또 그 몸의 행위가  치료받으니까 차차 성자와 성녀가 되어서, 성자 성녀 됨으로 세상에서 얻은 복은  세상에서 비용으로 사용하고 자체나 행위가 영원성으로 변화된 것은 전부  하늘나라에 가서 소용하게 된 것입니다.

 또 둘째로는 의사 시비입니다. 의사. 자, 하나님의 의사를 따르나, 또 자기  의사대로 행하나, 또 모든 사람들의 의사를 따르나 이 시비인데 하나님은 그  현실을 만들어 주시고 '네가 보자, 누구의 의사를 따르노 보자' 할 때에 롯은  자기 의사와 모든 사람들의 의사를 따라서 그 현실을 처리했고 아브라함은 자기  의사나 모든 사람들의 의사를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의사를 찾아 가지고  하나님의 의사를 따랐습니다. 고게 다릅니다.

 또 그 다음은 소유에 대한 시비입니다. 소유. 소유에 대한 시비인데, 롯은 물  좋고, 땅 좋고, 풀 좋고, 조건 좋고, 문화 좋고, 편리하고 한 눈에 보이는 모든  구비하고 좋은 것 그것을 자기는 소유하겠다고 그것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좋아도 하나님의 축복 없으면 안되니까, 눈에 그래 보이는  것이 좋지 못해도 하나님의 축복 있으면 된다 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했고, 롯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견적인 그 현상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은 그 신앙 사상과 행위가 달라서 갈라져 가지고 롯은  망하고 아브라함은 승리했습니다.

 여기서도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자기 현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 그 현실을 만들어 줬습니다. 하나님이 고 현실을 만들어  주시고 '보자, 네가 이 현실에서 나를 주인으로, 나를 주로, 나를 주로 모시나  네가 너를 주관하는 네가 네 주인이 되나? 보자. 누구를 주인으로 삼노? 고것  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현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롯은 그 현실에서 하나님을 냅두고 그만 제가 주인 됐습니다. 제가  주인 되니까 하나님은 '이놈아, 나는 너하고는 상관 없다' 하고 그만 버려  버리고, 아브라함은 옆에서 그렇게 '아, 당신이 숙부니까, 큰집이니까 자유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래 해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다. 내 위에 어른이  있기 때문에, 이제 주 하나님 그분이 주장을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야 되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 가정의 호주는 주님이시요, 내 주인은 주님이시라.' 주격과  주를 하나님을 주로 모셨습니다. 이러니까 그 현실이라는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만족한 합격을 했습니다.

 또 현실을 주시면서 '보자. 이 현실에 인간들이 이렇게 저렇게 시비하고 있고,  또 네 의사도 이렇고 저렇고 하니 네 의사를 따라서 네가 처리를 하나 내 의사를  따라서 하나 보자' 하고 보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사를 따라 해서 하나님이  만족한 그 현실 처리를 했고, 롯은 자기 의사 모든 인간들의 의사 그 의사를  따라서 처리해서 하나님의 의사를 저버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총공회에서는 종다수 가결을 부정합니다. 숫자, 많은 숫자를  따라서 모든 것을 결정하자 하는 종다수, 다수를 따라서 결정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일반 회라고 하면 그 회에서는 언제든지 숫자를 따져  가지고 많은 숫자를 따라서 결정을 합니다. 총공회에서는 숫자를 따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옳고 그른 그 판단을 해 가지고 숫자가 적어도 옳은 것을 따르고,  숫자가 많아도 옳은 것을 따르고, 많은 숫자 다수가 좋기는 좋지마는 다수보다  진리가 위에 있다.

 또 진리가 좋기는 좋지마는 진리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이신  영감 없는 진리가 소용이 없고, 또 인간의 숫자가 암만 많아도 진리 없는 그  숫자 그까짓 거 소용없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종다수 가결을 취하지 아니하고  성경으로 비판해서 언제든지 옳은 것을 따라가자 하는 그것이 우리 총공회  결의법입니다.

 또 현실을 주님이 만들어 줘 놓고 '보자, 네가 눈에 보이는 울긋불 긋하고  번쩍번쩍한 현실을 네가 귀중히 여겨서 현실을 네가 택하나 현실에 거슬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택하나?' 요걸 시험합니다. 현실에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  있고 또 현실도 좋고 둘다 좋으면 참 좋습니다. 현실에 되어 있는 조건도 좋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 맞은 게 있으면 그게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가다가는 눈에 보이는 이것을 잡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내 놔야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붙들려고 하면 눈에 보이는 좋은 조건 현실을 내놔야 되는  그런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어느 걸 취하는가 보자' 하고  있었는데 그만 롯은 보이는 현실을 따르고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해서 실패를  했습니다.

 오늘도 제가 교인들 혹 보면 어쩌든지 눈에 보이는 그런 조건 좋은 것, 눈에  보이는 조건 좋은 것 그것은 뭐 백프로 믿습니다. '이렇게 조건이 이렇츰  좋으니, 이렇츰 구비하니 이거야 틀림없다,' 그것은 백프로 다 인정을 하지마는  하나님의 축복은 인정을 별로 안 합니다. 이러니까, 현실이 좋고 하나님의 축복  받는 길이 되면 좋지마는 현실에 좋은 현실을 택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에  거리낌이 되어서, 현실은 참 조건은 좋은데 그걸 취하려 하면 하나님의 법칙에  위반된 점이 있고,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겠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는 그 길을 택하려고 하면 현실에 조건들이  나쁘다 하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그것을 중하게 여기는 고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택했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세상에서 아직까지 살 날이 많은 젊은 사람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들 앞에 놓여 있는데, 그래 보여지는 조건 좋은 게 참 좋기는 좋습니다.

조건 좋은 게 좋지마는 아무리 좋은 조건이 좋아도 하나님의 축복만은 못합니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하나님이 저주하면 그만이오. 아무리 조건이 나빠도  하나님이 꼭 축복만 하면 조건 나쁜 그까짓게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모든 좋은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에 흥망 성쇠가 달려 있다  하는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이요, 아무리 하나님의 축복, 받는 길이라 할지라도 조건 안 됐으면 안  됐다 이래서, 조건을 우선으로 보고 조건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우 안  하는 사람이요, 멸시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래 내 축복 없이 네  한 번 해봐라 하고 하나님하고 은밀히 시비를 한다 이거요.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오는 것은 자기 현실에 하나님의 축복 받으려 하면 조건이  나빠질 때에 조금 나빠지는, 그것 조금 나빠지고 하나님 축복 받는 길이 있고,  또 많이 나빠지고, 많이 나쁘고 하나님 축복 받는 길이 있으면, 조금 나쁘고  하나님의 축복 받는 길은 하나님이 그 축복에 대해서 조금만 책임져도 되고,  많은, 조건이 많이 나빠서 영 그만 하나님의 축복 받으려면 전멸이 되는 그  조건에 하나님의 축복만 보고 나가면 하나님이 그것을 전부 다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그 현실에는 하나님을 주격으로 모시는 데에,  하나님의 의사를 따르는 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택할 때에 그때에  마찰이 없는 것보다 마찰이 있는 게 좋고, 마찰이 작은 것보 다 마찰이 큰 게  좋습니다. 왜? 그것은 주님이 책임을 더 져야 합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아주 하나님의 축복 받는 길을 가려 하니까 대적들이  향해 가지고 그 사람을 들이 절단을 내려고 이렇게 애를 쓰니까 겁이 나지  아니하고, 절단내는 그런 역사를 하니까 속으로 좋아서, 속으로 좋아서 이러면서  '하나님 보십시오. 하나님 보십시오.' 속으로는 '더 대적을 해라. 더 방해를  해라. 너거 방해는 하나님의 책임을 더 무겁게 지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참  위하는 거라. 이러니까 속으로 좋아서,  다리오 왕 앞에서 다니엘이 다리오 왕이 그렇츰 심하게 그래 쌓으니까 다니엘  마음에는 '이렇게 다리오 왕이 이렇게 이래 쌓는데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을 따르니까 하나님 귀가 있으니 들으시고 눈이 있으니 보시겠지.'  이래서, 그 다리오 왕이 그만 어지간히 시비하고 마는 것보다도 자꾸 '안 된다  안 된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안 되면 협박을 놓기도 하고, 안 되면 좀 어떻게  좀, 박해가 심할수록 이 전능자의 그 손이 더 가까이 와서 역사할 것이기 때문에  더 속으로 재미있다 그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신앙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울리지를 못합니다. 그럴수록 속으로는 좋아서 지금 춤을 춥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현실에는 반드시 주격 시비, 의사 시비, 소유 시비 이 세  가지 시비가 아브라함과 롯에게는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승리하고  롯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자기의 현재 조건 좋은 것을  택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그 길을 뿍뿍 걸어가는 사람은  백이면 백 망한다는 것을 확정 지워야 됩니다. 확정 지워야 돼요.

 뭐 내가 이런 노릇 저런 노릇,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하려 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뻐하지 않지마는  이 조건을 이렇게 구비해서 요래 해야 된다 하는 고것이 뭐이냐 하면 망령이오.

고게 망령이오. 고게 망령이라. 그것은 제가 어리석어서 망해도 망한 줄을  모릅니다. 심령이 둔해 놓으면 지혜 있는 사람은 '벌써 저것은 저게 들어서  망친다. 저 말 한마디가 들어서 조걸 망친다. 행동 하나가 들어서 망친다.' 고  딱 진찰해 알 수 있소.

 고걸 말하면 말해도 안 듣습니다. 안 듣는 것은 제가 경험하고 체험해 가지고  코가 깨지든치 뒤꼭지가 깨지든지 뭐 한번 징계가 오고 실패를 봐야 그게 깨닫고  나이가 들어야 깨닫지 그 전에 깨닫는다는 것은 참 행복인데, 말을 하면 도로  거슬려서 서로 대립만 되어지지. "진주를 도야지 앞에 던지면 진주는 밟고,  진주를 모르기 때문에 진 주는 밟고 도로 와 가지고 문다" 하는 것처럼 이제  아무리 옳은 것을 말해 줘도 안 듣고 도로 서로 사이만 벌어집니다. 이러니까  말하다 안 되면 그만 슬그머니 그만 말아 버리요. 그만 하나님께 맡겨두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은 이 세상살이를 해 나갈 그 일이 아직까지 많이 있는데,  자기가 세상살이를 할 때에 세상 어떤 것이든지 눈에 보이는 조건 좋은것 나쁜  것 그것보다, 조건에 좋고 나쁜 그것보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크다는  요것을 꼭 명심해야 됩니다. 아무리 조건 좋아도 하나님 저주하면 헛일, 암만  조건 나빠도 하나님 축복 하시면 되는 것.

 이러기 때문에 먼저 '야 장사할 때에 장소가 어떠노? 또 이 물건이 좀 잘  팔리는 물건이가 어떻노?' 그것을 택할 게 아니라 '보자, 이 물건이, 이 장소가,  이 사업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 인가 축복 받을 수 없는 것인가?  아! 이것은 축복 받을 수 있는 업 인데, 이 업을 잘못 하면 축복 못 받지마는 이  업은 잘만 하면 축복 받을 수 있는 업이다. 그러면 됐다. '이 업은 참 조건이  좋고 아주 일이 잘 되겠는데, 잘되기는 잘되는데 그러면 하나님 축복은 어찌  되노? 아무래도 하나님 축복은 받을 수 없어. 하나님 축복 받으려 하면 이 업은  안 돼. 하나님 축복 받으려 하면 이 업은 안 되고, 하나님의 축복 받으려 하면  이 업은 실패이고, 이 업을 하려 하면 하나님의 축 복은 받을 수가 없어. 그리  될 때에 그 업을 내 놓고 하나님을 취하면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책임져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내놓고 그 업을 취하면 하나님은 손 떼요.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어.

 이러니까, 이 세상 조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보다 크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됩니다. 그 세상 조건 그게 좋지마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조건이 좋아야 되고 또 하나님의 저주가 없고 조건이 좋아야 되지 하나님의  저주 있고 조건 암만 좋아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젊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의  모든 면의 조건 그 조건에 유리하고 좋은 것, 눈에 보이는 그 형편의 눈에  보이는 그것들의 유리하고 좋은 것 그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크고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서 하는 사람이면 하나도  실패 안 했소.

 우리 서부 교회 실패한 청년들은 전부 요것을 혼돈해서 눈에 보이는 조건만  선택했지 하나님의 축복은 생각지 않고 저주도 생각지 않 았소. 그래서 다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살펴서 그렇게 해야  됩니다. 뭐 복 복 하면 추접한 것 같지만, 아니오. 이 복은, 성경이 말한 복은  자기라는 사람이 완전되는 그것도 복입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자, 이  사업이, 이 돈벌이가, 이 직장이, 이 장사가, 이 걸음이 이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냐 저주 받을 수 있는 길이냐?'  조건 좋고 나쁜 그것은 두루 둘러 두고 하나님의 축복 저주 그것부 터  살펴보고, 그러고 난 다음에 둘째로는 이제 조건을 맞춰서, 같은 값이면  하나님의 축복받는 길이라면 축복받는 길중에는 조건 좋은 길을 택하지요.

그러나 자기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 못하는 그런 조건에서, 하나님  축복 취하려하면 조건 나쁜 것 취해야 되고, 조건 좋은 것 취하려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버려야 되겠고 요렇게 될 때에, 꼼짝 못하는 요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축복 자기가 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 조건에 손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보상이, 하나님의 보상이 더 크기 때문에 좋은 것이요 유익되는  것입니다.

 또 그러고, 거기에 보면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롯이 소돔들을 볼 때에  아직까지 소돔 들은 여호와께서 멸하시기 전 인고로 이랬습니다. 10절에  "요단들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이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 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이제 보십시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그런 모든 조건들이 있고 또 고 속에는,  제일 껍데기 그 모든 좋은 조건 나쁜 조건 그 조건들이 제일 껍데기로 보이고,  고 속에는 죄와 의가 보이고, 그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보입니다. 제일  껍데기는 눈에 보이는 조건, 고 속에는 죄, 의, 그 속에는 죄, 의, 속에는  축복과 저주 이게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조건도 봤고 조건보다 죄와 의를  더 봤습니다. '아! 저 소돔 성이 저런 곳이다. 악하고 저러니까 그 악한 데  자녀를 데리고 가 어떻게 되노? 악한 그런 것을, 죄를 봤고 하나님의 축복을  봤지마는 롯은 그런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찍해야 보이는  조건 좋은 그것만 보였지 의도 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더 안보였습니다.

 요새 제가 우리 교회서는 결혼 상담이라 해 가지고 화요일날 아침에는 새벽기도  마치고 나면 결혼 상담으로 잠깐 모입니다. 모여서 결혼안에 대해서 서로 협조를  하고 이러는데, 중매를 해 보면 전부 롯의 눈밖에 없습니다. 롯의 눈밖에 없고  아브라함의 눈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보자. 조건이 어떤고 보자.'  그것만 보지 조건 속에, '보자, 조건 속에 그 사람에게 의가 있나 죄가 있나? 그  사람에게 의가 있나 죄가 있나?' 그 의와 죄를 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있지. 그만 눈에 보이는 조건 그것만 봅니다.

 또 그 의, 죄 그 속에 그 사람의 모든 사람됨이나 형편을 보고 하나님의 축복이  어떠하며 저주가 어떠하냐, 그 축복과 저주까지를 생각 하고 구혼을 하는 사람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보다도 더 깊 이 들어가서 '자, 영원 무궁에 그  구원이 어찌 되느냐? 저가 거거에 까지 생각을 하고 결혼을 구하는데 정반대요.

조건 좋은것은 저 하늘의 구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 소경입니다.

 보면 참 하나님께서 별로 두 가지를 잘 안 줘요. 짐승들도 보면 다 한가지씩  줬어요. 보면 발톱이 아주 묘한 것은 찢고 하는 그런 것은 잇빨이 없고, 이가  강한 것은 발톱이 없습니다. 잘 기는 것은 날개가 없고 날아 다니는 것은 또  기지를 못해요.

 그런데 보면 가견적인, 가견적인 눈에 보이는 그 외부의 조건 그것 만 그만  위주로 해 가지고 상대방을 취합니다. '학벌이 어디지? 직장 이 뭐이지? 돈  수입이 얼마나 되지?' 그게 전부 보이는 것이오. 그래 가지고 돈 많은 사람에게,  권리 있는 사람에게, 학벌 많은 사람에게 가 가지고 종지 종이 돼 가지고  모가지를 발끈 들려 가지고 숨도 못 쉬고 게갈게갈거리면서 요래도 못 하고  조래도 못 하고 여기 집회도 못 옵니다. 어디 옵니까? 만날 죽자껀 일해도 항상  구박이고 그런데.

 눈에 보이는 이 현상의 그것만 보고 선택하는 당달 봉사, 그것보다도 조금 눈뜬  자는 '그 사람의 그 생활이 어땠노? 그 사람의 생활에 의가 있나 죄가 있나?'  그걸 보고, 또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을 많이 받을 사람이가?  적게 받을 사람이가?' 그걸 보고, '거게 가면 영원한 구원이 잘 되겠나? 못  되겠나?' 그걸 보고, '아! 구원은 누가 아나? 모르는데 우선 좀 잘 먹고 잘 입고  조건이 좋아야 되지 않느냐?' '하루밤 나그네인데 뭐 또 그래 가지고 암만 좋아  봤 자 오늘 죽어서 과부가 될지 내일 죽어서 홀애비 될지 그것도 모르는데 그거  정함이 없는 그런것 보고는 못 갑니다. 어쩌든지 신앙 위주로 가야지' 하는 그런  사람도 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이 롯은 그 성이 죄악이 관영한 그런 것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보이는 그것 속에 뭐 들었지요? 보이는 것 속에 뭣 들었습니까? 죄와  의가 들었습니다. 아주 번쩍 번쩍 번쩍 해 가지고 마구 권리가 있야 이래 가지고  해도 가만히 보면 그 속에 무서운 죄악이 들어 있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떠들고 날뛸수록 그것을 볼 때에는 마치 목을 끊어 놓은 닭이 어쩔 줄도 모르고  벌로 뛰다니는 것, 벌로 뒤에 심판도 모르고 뒤에 보응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마구 뛰 다니니까 힘이야 있지요. 마구 못 할 말 없고 못 취할 것 없고  못 내버릴 것 없고 못 할 행위 없고, 이렇지마는 그것은 모 가지가 끊겨서  구별을 못해서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도 보고 부러워서  좋아하는 사람 있다 그거요.

 어떤 사람 여기 왔는지 모르겠는데, 시집을 가 가지고, 그 남편 아주 잘난것  보고, 남편에게 그만 배척을 당해서 이혼을 당했다 이거요?. 이혼을 당해도 내가  뭐라는가 보자 싶어서 '아 그분이 지금 어떻지요?' 고만 내 놓습니다. '그분이  지금 이런 벼슬하고 이렇게 이렇게 높으고 이렇게 위대하고' 고만 자랑을  내놓소. 하도 같잖아서 '그렇츰 배척을 당해 똥덩어리가 되고도 그래도 또 이혼  당한 그 남편 지금 자랑하고 있나? 너는 그렇게 똥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보이는 것 그 이면에 그 사람이든지 그 가정이든지 그 민족 이든지 그  나라든지 그 이면에 있는 죄악을 우리가 심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 죄악을  심사하고 난 다음에는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우리는 심사해  봐야 합니다. 또 축복과 저주 그 속에 인생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있는데 영원한  구원이 어찌 되나 하는 그걸 또 살펴봐야 됩니다. 그만 이런것 몇 맞춰 보면  환해요. 가치가 환하게 나타납니다.

 자, '현재에 가견, 현재에 눈에 보이는 조건 어떠하노?' 하나. '그 이면에 죄와  의는 어떠하노?' 둘. '그 이면에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어떠하노? 셋. '그  이면에 인생의 영원한 구원은 어떠하노?' 넷. 이것만 살피면 그만 환하게 다  판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끼리 손을 잡고 뭘하든지, 또 평생 살 결혼을 하든지,  사람을 뭐 어떤 일로 상관하든지 요런 면으로 사람을 살펴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해서 살피는 게 줘습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보자, 저 사람이 지금 저렇게  하는 것이 저게 하나님에게 대해서 어 떠며, 하나님의 의사에 대해서 어떠며, 또  소유에 대해서 어떠냐? 그 만 성경을 가지고 이리 진찰 한번 하고 이리 진찰해  보고 뭐 진찰 잘 하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으로 진찰하면 병을 확실히 딱  드러내서 바른 진찰을 해 낸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이 말씀 가지고 눈에 안약을  삼아야 됩니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그러면 이 말씀을 가지고  이리저리 심사해 보면 지금 또 그 후에 자손대 그 다음에 어찌되나 할것을 그런  것을 대략 짐작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가지고 네 신령한 그 심령의 눈을  밝히라 하는 말씀입니다.

 또 오늘은 이제 오늘 봉독한 말씀, 고 세 가지 단단히 기억하고, 오늘은 좀  복잡합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했는데, 길가에 뿌린 씨에 대해서는 거기에  와서 보면 새들이 와서 주워 먹는다' 그랬습니다. 길가에 뿌린 씨는 땅이  단단해서 그 씨가 속에 파묻히지 않기 때문에 '새들이 와서 주어 먹는다' 그렇게  말해 놨고,  고다음에 예수님이 해석을 할 때에는 '천국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함으로  악한 자들이 와 가지고 빼앗아 간다.' 위에는 새가 씨를 집어 먹는다고 했고,  밑에는 악한 자들이 빼앗아 간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요 두 가지에서 길바닥은 어떤 것이 길바닥인가? 길바닥 그것은 우리 사람을  말합니다. 길바닥 같은 사람이 되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돌밭 같은 사람이  되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가시덤불과 같은 사람이 되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옥토 같은 사람이 되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을  가리켜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람 전체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인데, 요게 조금 어렵습니다.

 길바닥에 뿌린씨라. 이 길바닥은 사람들이 많이 다져서 그 밭이 그만 길바닥  모양으로 반질 반질 그만 다져져서 암만 씨를 심어야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완패해지고 강퍅해진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완패해지고  강퍅해졌는가? 이런 사람들의 말 저런 사람들의 말, 이런 사람들의 주장 저런  사람들의 주장 그런 모든 주장들을 많이 자기가 듣고 보고 읽고 배우고 접촉한  그 많은 사람들의 의사와 주장과 지식과 그런 것들을 많이 접해서, 자기 마음이  그런 것으로 인해서,  인간의 지식으로 인해저 자기 마음이 밝아지는 줄로 이떻게 사람들 이 생각하는  요게 아주 대착각입니다. 인간들의 말로 가지고 사람의 그 심령이 밝아지는 줄로  그렇게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인간의 지식은 하나 들으면 하나들은 것만큼  사람의 심령은 어두워집니다. 가리워지기 쉽소. 그러기에 그것이, 인간의 지식도  쓰이는 데에는 필요하게 쓰이지마는 그 지식을 잘못하면 그 지식에 치어서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길바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많은 지식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접했는고로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가 많은 지식을  접한 그 지식과 같은 지식으로 이렇게 인정하는 그 마음이 강퍅한 마음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위에는 해석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새들이 와서 주워  먹는다.' 새라고 비유한 것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어디다 빼앗기느냐? 새들에게 빼앗긴다 그 말은 새는 사람들을 가리켜 새라고  말한 것입니다. 새는 겨자씨 비유에 보면 '겨자씨는 작은 씨로되, 씨중에 작은  씨로되 그 씨를 심으면 나중에 커서 나무같이 되어서 공중에 노는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 그렇게 말 했고, 또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고" 이렇게  말을 한 그 새는, 또 계시록에 "새 모인 곳이라" 그렇게 말씀한 그 새는 소속이  없고 뿌리 박힌 데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말합니다.

 겨자씨는 작아도 뿌리가 박혔고, 새는 아무리 많아도 뿌리가 박히지 아니해서  공중에 나는 새로서 그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아무 데도 박힌 데가 없고,  아무 데도 매인 데가 없고, 아무데도 속한 데 가 없고 이렇게 공중에 떠 있는  그런 인간들의 그 모든 정함이 없는 그런 기회주의자, 그런 인간성을 가리켜서  새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들은 그 것을 자기가 이미 사람들에게 들은 그 지식 때문에 이 말씀을  그만 저버리고 이 말씀을 업신 여기고 그렇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들은 모든 인간의 지식은 그 인간들이 정처 없는 인간이다, 정함이  없는 인간이다, 소속이 없는 인간이다, 박힌 데가 없는 인간이다, 뿌리가 없는  인간이다, 하루 열 번이라도 뿌리를 옮길 수 있다, 열 번이라도 소속을 바꿀 수  있다, 소속도 없고 뿌리 박힌 데도 없다 하는 말이요, 겨자씨는 작지마는 그것은  뿌리가 박혀 있기 때문에 부러지면 부러졌지 그것은 요동을 못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에 세상에 있는 그  지식이, 이 복음의 말씀을 세상 지식과 같은 것으로, '말은 말이고, 지식은  지식이고, 책은 책이라. 뭐 신구약 성경만 있나? 성경이라는 그런 경전이  얼마든지 많고 이러니까 말은 말이요, 책은 책이요' 다 이렇게 같이 보는  거기에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중 그만 저버려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자의  말씀이요, 자존자 창조주 주권자의 말씀이요, 영원 불변자의 말씀이요, 이 말씀  외에 있는 그 모든 말은 새떼의 말이다. 새떼의 말이다. 새가 와서 주워 먹는다  말은 정함이 없는, 소속이 없는, 뿌리 박힌 데가 없는, 목적도 없습니다. 이  목저 저 목적, 그러니까 그 사람은 매인 데도 없고 속한 데도 없고, 지식도  사상도 다 그래요 요것이라 하는 변하지 않을 불변적인 지식 하나도 없고,  불변적인 사상 하나도 없고, 불변적인 목적 하나도 없고, 불변적인 주장 하나도  없고, 새떼 모양으로 그런 자들의 말이라. 그런자들이 와 가지고, 그런 새떼  같은 자들이 와 가지고 네가 받은 바의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다 빼앗아 가게  된다.

 또 고 밑에 해석은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 버린다. 악한 자는 어떤 자를 악한  자라고 하는고 하니 자존자이신, 주재자 조물주 대주재자 우리를 구속하신 주 이  주재자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그것은 다 선이고, 악은 주님 외에 어떤  피조물이든지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것을 가리켜서 악이라 그렇게 성경이  말씀합니다. '악한 자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하는 그 말은 세상이 말하는 악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만을 중심으로 위주로 삼지 않는 그 자의  주장과 그자의 계획과 그 자의 사상을 따르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세상에 있는 인간 지식이 그 책으로 말하면 뭐 얼마나, 집 몇  무더기, 몇 채나 될 만큼 책이 많지마는 한 말로 말하면 새 떼 말이다. 또 한  말로 말하면 악한 자들의 말이다. 그는 전부 제 중심의 말이다. 제 중심의 말.

이러기 때문에 이 철학자도 제 중심, 저 종교 창설자도 제 중심, 저 정치가도 제  중심, 저 사상가도 제 중심. 전부 중심은 하나님 한 분을 중심으로 해야  피조물은 살지 하나님 한 분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멸망을 받는 것인데,  크고 작고 다 멸망 받소. 조만간 시간이 문제지 다 멸망입니다.

 이런데, 인간들의 지식은 전부 그것이 인간 자체를 자기 주인으로 삼아 가지고,  인간을 중심으로, 제가 중심 아니면 어떤 잘난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위주로 하지 않는 그런 것들의 말이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와  가지고 네가 들은 바의 하나님 말씀을 빼앗아 간다. 어쩌면? 깨닫지 못하면,  어쩌면? 길바닥이기 때문에 그 씨가 길바닥을 뚫고 들어가 가지고 심기워지지  아니하면 그 말입니다.

 심기워지지 아니하면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세상에 수많은 주권자, 수많은 자주자, 수많은 주권 자 수많은 자주라를  이것을 정복하고 꿰뚫고 이것을 능가한 이 말씀으로 네가 깨닫지 못하면  헛일이다. 또 기회주의자로 이렇게 떠돌아 다니며 정처 없이 다니는, 이렇게  조석으로 변하는 이런 인간의 그 모든 변동성이나 지식이나 그런 것을 네가  능가하는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에 사람이 자기 중심으로 해서 주장하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다 발아래 밟고  그 지식을 능가해서, 이 지식보다 지극히 탁월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네가 이 인간의 어떤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성경 말씀이나 같다고 네가  생각하면 너는 헛일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 외에 중심이  되고 위주가 되어 있는 그런 것을 다 정복하고 능가할 수 있는 복음으로 네가  깨닫지 못하면 안된다. 또 이 세상에서 정처 없이, 소속 없이, 박힌데 없이 그저  기회주의자로 돌아다니는 그런 자들의 모든 그 주장이나 미혹을 다 능가할 만큼  네가 깨닫지 못하면 안 된다 하는 이 말씀인 것입니다.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많은 세월을 세상에서 산 사람은,  이제까지 네가 세상에서 살 때에 경험하고 체험하고 듣고 보고 읽고 배운 고  모든 말의 그 중심자, 모든 그 말의 주인공 되는 그 말의 주격자 그것을 다  깨닫고, 그 모든 것은, 어떤 수많은 사람이 중심하고 주격을 했든지 그것은 그  주격자가 그저 천도 만도 넘은 모든 그런 중심자들이 제 생각하는 대로 한마디씩  다 해 놓은 이런 것을 어떤 사람은 주 모아 가지고 책을 만들고 이래 가지고  자꾸 만들어서 이래 해 놨기 때문에, 네가 수많은 말에 대한 그 주인공, 주격자,  중심자 그자를 네가 바로 발견하고,  또 정처 없이 기회주의자로 아무 박힌 데 없고 소속한 데가 없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그 모든 무소속과 또 그 무근원된 그 모든 것을 네가 바로 파악을  해서, 그것과 네가 들은 하늘나라에 복음과의 비중을 네가 바로 깨달아서,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말한 그 말은, 그게 다 악한 자들인데, 다 자기 중심,  인류 중심, 피조물 중심인데, 그 세상에 모든 말과 모든 서적에, 모든 지식에,  그 지식에, 그게 악한 자의 말인데, 그게 모두 다 각각 제 중심으로 해 가지고,  위주로 해 가지고 해 놓은 말인데, 그 말한 주권자, 그 말한 주격자, 그 말한 그  중심자 그자와, 너한테 말한, 이 천국을 복음을 말한 이 중심자, 이 주격자  이자와 그자의 이 비중을 네가 달아 봐 가지고, 그자는 이 자의 억억억억 만분의  것도 아니요, 그까짓 것은 그게다 비교할 것 없이 거기에는 부스러기도 아무것도  아닌 요것을 네가 바로 파악해 가지고,  여기에 가서 네가, 길가의 길바닥 되어 있는 그 흙을 다 개간해서 나벼 가지고  옥토같이 허분허분 하게, 물씬물씬 하게 옥토가 된 것처 럼, 네가 이 세상의  수많은 중심자 주격자 위주자들이 말해 놓은, 수 많은 기회주의자 무소속자  수많은 정처 없는 자 그런 자들이 말하는 그 모든 것, 그 자의 무소속과 정처  없는 것과 조석으로 변하는 그 모든 그것들과,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시는 이  하나님과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아니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과, 이 주격  중심자들과 이 말씀을 하신 중심자이신 하나님과,  이 하나님과 말한 이 주장자가, 주인이 많은데, 하나님이 중심인 하나님과 이  수많은 중심과 이 중심자를 비교해 가지고 수많은 중심 자를 발아래 밟고,  그까짓 것은 이 중심자와 비교해서 비교할 것도 없고 그 상대도 하지 못하고  말할 것도 없다. 또 수많은 새떼들의 말, 그것은 이 말씀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하는 여기에 가서,  하나님의 중심과 또 하나님의 주격, 하나님의 주권자, 하나님의 주재자 이  사실을 네가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달아서, 세상에 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 이까짓 것이야 오늘도 죽으면 죽고, 오늘도 썩으면 썩고, 오늘도 변해지고  공연히 거짓뿌리로 제까짓 게 주권자가 중심자가 됐다 하지 그게 사실은 주권자  중심자가 아니라는 것을 네가 파악해서, 수많은 말들을 한 그 주인공된 그자를  네가 확실히 깨달아서, 그자의 가치와 권위를 확실히 깨닫고, 너한테 하나님의  천국 말씀을 한 그자를 네가 깨닫고, 그분과 말한 그 수많은 인간들과, 말씀하신  그 말씀과 수많은 인간들의 말과 이것의 비중을 네가 바로 아는 이 깨달음에  나아가지 못하면 너는 네 지식으로 망했다. 너는 많은 그 경험과 체험으로  망했다.

 그것은 네가 이 복음을 들을 때에 수많은 자기 중심자의 악한자들이 와 가지고,  악한 자들이 와 가지고 무슨 논리 무슨 주장을 해도 그것에게 빼앗기지 아니할  수 있을 만큼 너는 깨달아야 되고, 수많은 새떼들이 '인간은 이게 지혜다. 저게  지혜다.' 수많은 지혜가 있는데 그 수많은 인간들이 와서 너한테 유혹을 주고 뭐  별별 방법을 꾸밀 때에 그것에게 빼앗기지 아니할 수 있는 깨달음을 가져야 너는  길가 밭을 나벼서 옥토를 만들어 가지고 심기운 자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기 공부한 사람들 똑똑히 들으시오. 공부한 사람들. 지식 있는 사람들, 나이  좀 많은 사람들 제대로도 경험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옥토는 뭐이 옥토냐? 길가도 개간만 해 가지고 서분서분 하게  물씬물씬하게 만들면 옥토 됩니다. 악한 자를 제거해 버리면 옥토된다 그  말이오. 악한 자를 제거해 버리면, 자기 중심자를 제거해 버리면 옥토 된다 그  말이오. 정함이 없이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자로 날뛰는 그것을 다 없애 버리면  이제 옥토가 됩니다.

 그러기에, 네가 살펴서,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아니할 말이 어디 있다? 또 완전  영원에 소속한 것이 어디 있나? 영원히 주권자는 하나뿐인데 주권자 하나가 어디  있나? 이 위에 더듬어서 주권자 불변자 피조물이 소속해야 될 그 소속처 여기를  깊숙이 들어 가지고, 네가 지식이 많은 것만큼, 광문 다학 하고 많은 세상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이런 모든 것들을 다 헤치고 파고, 마구 괭이를 들어서  막깨고 부셔 뜨리고 다 이래 가지고 '공자야, 네가 암만 해도 하나님께 지음  받았다. 너는 죽었어. 피조물이라. 석가모니도 피조물이라. 주님은 창조주라.

어떤 사상가 어떤 공산주의자, 뭐 어떤 김일성이 뭐라 해도 너는 피조물이라.

이는 조물주라. 주재자라, 자존자라, 주권자라 하는,  요 근본 중심자와 주권자 주재자 또 변치 않는 불변, 불변 주재 요 둘을 네가  확실히 깨닫고 확정을 짓고 판정을 하는 고 깨달음을 가져서, '자 변하지 않을  말이 어디 있느냐? 변하지 아니할 사상이 어디 있느냐? 변하지 아니할 주장이  어디 있느냐? 또 절대에게 속해 있는 소속이 어디 있느냐? 또 그러면 참으로 그  모든 존재에게 중심이 되어 있는 중심자가 어디 있느냐?' 요것을 뿌럭지에, 네가  길가밭 되어 있는 것만침, 길가밭이 되어 있는 것만큼 새떼를 제거하고 악한  자를 제거할 수 있는 이런 깨달음이 없으면 너는 헛일이다 하는 말입니다. 요게  아니면 헛일이오.

 이러니까, 어떤 사람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들의 말과 이 말의 비중을 같이  봅니다. 이래 가지고, 제가 성경 말씀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성경 말씀 그거야  뭐 말해 봤자 유명할 게 뭐 있는가?' 이러니까 다른 사람이, 모르는 말, 어떤  철학자의 말이나 한마디 해 가지고 이런 철학자 말 턱 할 때에는 힘이 난다 그  말이오. 이 철학자의 말과 이 하나님의 말씀과 비중을 같이 여겼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지식이 들어서 자기를 망쳤다 그 말입니다.

 또 이 말씀하신 그분은 어떤 분인가? 그분을 찾아서 '아! 이분보다 그분이 높다  그분이 높다. 그분이 높다. 많이 이래 가지고, 모든 자기 중심인 위주인자  그자를 전부 다 바사트리고 잡아먹고 다 깨트려 버리고 능가한, 하나님이  대주재이신, 참으로 중심자요. 주권자이신 그분이 하는 말씀이라 거기까지  나아가 가지고, 이 모든 것을 양식을 바사트려서 다 발아래 밟고 나아간  거기까지 깨닫지 못한 너는 길바닥 때문에 너는 이 도가 들어가지 아니했다.

그것을 깨트려야 이 길바닥을 옥토로 만든 것이 되어지니까 거기까지 나아가는  깨달음을 가져야 된다.

 이러기 때문에 유식한 사람이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았소? "문벌 좋은 학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며 있기야 있지요. 간혹  있지 별로 없어. 별로 없어. 무식한 사람은 데리고 성경 말씀을 말해 보면 놀람  만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유명한 학자는 데리고 성경 말씀을 말해 보면 깨달을  것이 하나도 없어. 전부 껍데기요. 666이라. 다는 아니지만 대개는 그래요.

 이러니까, 길바닥에 뿌린 씨는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지나다니니까  밭이 다진 것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혀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식 경험  체험 모든 것에게 다 자기 심령이 다져지고 그로 인해서 강퍅해져서 있는  사람이니, 그 사람은 새떼가 와서 주워 먹고 했으니까 새에게 주워먹히지 않을  만한 깨달음을 가져야 되고, 또 악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을 만한 깨달음을  가져야 되고,  이 세상 모든 지식을 새떼 지식 악한 자의 지식 이랬는데, 악한 자라 말은  하나님 외에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걸 악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모든 걸 볼  때에 중심자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신데, 그래서 세상에 모든 볼 때에 '아 !  인간은 타락해서 이렇게 저렇게 벌로 무책임하게 지절거리는 인간이다' 하는  그것을 알고,  '나도 이와 같이, 잘못하면 이와 같이 무책임하고 되나 안 되나 벌로 지껄이는  인간 되기 쉽겠다' 해서,  자기 속에 그런 요소를 먼저 뽑아 버리고, 자기도  그렇게 불쌍하고 가련한 그런, 인간에게 해독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공부를 해야 되고, 또 '이것은 인간들이 이렇게 말한다.' 거기  빠진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거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공부 해야 되고,  하나님의 지식이 활 동할 때에 그것을 타고 활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에게  이용이 되면 하나님에게 이용이 되면, 그 자연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필요있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함부레 길바닥 사람 길바닥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새떼를 능가할  수 있어야 되고 악한 자를 능가할 수 있도록 깨닫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 이래 암만 설교해도 '아이구, 말도 옳게 못하는 저게 무식해  저래 쌓는다. 세상에 이런 책도 저런 책도 있다. 암만 책이 있어도 그것은 악한  자가 말한 말. 그것은 새떼들이 말한 것이라. 아무 정처 없어. 그 인생관도  일관되지 아니하고, 소망관도 일관 되지 아니하고, 심판관도 일관되지 아니하고,  미래관도 일관지 아니 하고, 과거관도 일관되지 아니요. 아무 정함이 없어요. 참  새떼라. 새떼. 그래 가지고 그때 그때 형편 따라서 인기만 끌려고 지금 심판을  자꾸 마련하기 때문에 도살의 날에 자기를 살찌워 산다. 심판대에 심판 받을  거리만 자꾸 마련해서 살찌우지.

 그러니까 고것을 우리가 주의를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이  말씀하신 분은 어떤 분이시며, 고만 무식해도 쉬워요. 그것 다 몰라도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어떤 분이시며, 자존자 하나님이시라. 이러면 또 유식한 사람 또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자존자, 제가 하나님이라 하는 사람 꽉 찼는데, 꽉 찼는데  예수님뿐인가, 어디? 여호와 하나님뿐이가? 꽉 찼는데? 그게 이제 뭐이냐 하면  무책임하게 말했는데 유혹을 받아서 자기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건 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하는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마귀를 가리켜서  불한당이라 했소, 불한당. 불한당. 땀 흘리지 아니하고 남이 수고해 놓을 것을  제가 한 척 하는 것이 그것이 불한당이라. 그러니까 마귀는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아비. 그 마귀에게 속한 것은 거짓말쟁이 새끼이기 때문에 다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좀 어려운 말이오. 어려운 말이니까, 요것은 어려우니까  길바닥에게 해당했소. 어려우니까 길바닥에 해당했소.

 길바닥된 사람은 요 새떼를 벗어나야 되고 악한 자를 벗어나야 되고, 뭐  돌짝밭에 뿌린씨 그런 것은 새떼나 악한 자나 그런 염려는 하나도 없어. 그것은  와서 주워 먹지도 못해요. 그만 땅속에 딱 파묻혔기 때문에 새가 와봐야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못 주워 먹어. 악한 자도 또 빼앗아 가지 못해요.

이러니까 그것을 단단히 주의해야 됩니다. 과학자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참 잘  믿고 그리 안 하면 그것이 무 신론자 되고 맙니다.

 둘째로 돌짝밭에 뿌린씨라, 돌짝밭에 뿌리운 씨인데, 이 돌은 원죄를 말합니다.

원죄. 또 이 돌이 깨어지면 작은 돌이 되는 것인데, 그런 것은 다 본죄를 말하는  것이고, 죄를 말하는데, 이것은 곧 옛사람 자기를 말합니다. 옛사람 자기. 이  돌은 옛사람 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돌을 어떻게 자기라고 말하는가?  자기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에 해설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돌짝밭에 뿌리운  씨는 돌 자갈 그것만 다 나벼서 없애 버리면 옥토 됩니다. 돌짝밭은 돌만 없애면  옥토 돼 버려요. 돌만 없애면 옥토되는데, 돌만 없애면 옥토 되는 것은 자기만  없애 버리면 옥토가 됩니다. 자기 만 없애면,  돌을 어떻게 자기라고 해석을 하는가? 돌을 자기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거기에  해석을 보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그러면 그 환난 핍박이 누구에게 옵니까? 그 환난 핍박이 자기에게 옵니다. 그  환난 핍박이 자기에게 오요. 그러면 환난 핍박이 자기에게 오는데 그 오는  환난이 오는 핍박이 그것이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서 오는 환난,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서 오는 핍박 그 핍박과 환난이, 그 핍박과,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오는 핍박과 환난을 받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녜? 그 사람은  누구지요? 녜. 그 사람이 옛사람입니다. 옛사람 자기요. 옛사람 자기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 돌밭에는 뿌리가 없어서, 뿌리가 없어서 해가 쬐면 말라  버린다. 뿌리가 없어서 마르는데 그것을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마른다. 이러니까  그 환난 핍박이 오니까 하나님의 도를 저버린 다 그 말입니다. 저버리니까 고  환난 핍박 고것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를 저버려 버려서 하나님의 도는  물러가고 돌밭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게 뭐이냐? 그게 내나 자기라  그말이오. 그것이 자기.

 그래서, 여기 돌 밭에 돌올, 이 비유 해석하기를 자기라고 해석하는 것은,  핍박과 환난이 오니까 그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서 돌을 저버렸는데, 돌을  저버렸는데 이 돌을 저버린 것은 비유하는 데에는 '돌 때문에 이 도가 절단나  버리고 말았다' 이랬습니다. 돌 때문에 이 도가, 이 씨가 돌 때문에 씨가 절단  났다 그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돌 때문에 씨가 절단났는데, 고다음에  해석에는 자기에게 박해가 오니까 자기 박해 안 당하려고 하니까 이 도를  저버렸다. 자기 때문에 도를 저버렸다, 돌 때문에 도를 저버렸다. 그래서 여기  돌이라 하는 것은 자기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에 성경이 해석해 놓은대로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억지 해석이 아니고. 그것 이해가 됩니까?   돌이 들어서 그 씨를 그만 말려 버리고 헛일했소. 돌이 들어서 헛일해  버렸습니다. 돌이 들어서 헛일했는데 해석하는데에는 뭐 때문에 도를  저버렸습니까? 뭐 때문에 도를 저버렸소? 환난 오니까 저버립니까? 누구 때문에?  자기 때문에 도를 저버렸습니다. 그 비유에는 '돌 때문에 씨가 다 헛일됐다'  그러니까 돌은 자기로 해석하는 것이 성경이 해석해 놓은 대로 바른 자연스러운  바른 해석입니다. 그러기에 억지로 자꾸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어떻게 들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능가할 수 있는 이 말씀으로 받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자기라는 자기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려 가지고 옥토가 되게 하려면 이제 돌을 없애야  되고, 돌이 없어지든지 하나님 말씀이 절단나든지 둘 중에 하나는 납니다.

그러니까 돌을 없애지 아니하면 옥토가 안돼요, 그만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결실을 못해요.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를 능가할 수 있는 이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진리는 자기를  지으신 권위 있는 창조의 능력을 가진 인생 이상의 권위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이냐 자기냐 이 두 가지 권위를 대조해 가지고, 자기를  하나님 말씀과 동등으로 삼는 사람도 헛일, 또 자기를 하나님 말씀보다도 위에  둔 사람도 헛일, 요것은 둘째 비유는 요것은 뭐이냐 하면 권력 시비입니다. 권력  다툼. 요것은 권력다툼이오. 권력 다툼,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권력을 더 가지느냐 자기가 권력을 더 가 지느냐?  이것을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력은 크고 자기  권력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력 밑에 깨져서, 그 앞에 복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력에게 정복을 당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력에게 자기라는 권력은  정복을 당해서, 하나님의 말씀에게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요 깨달음을 가져야  고것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됩니다. 고것이 옥토에 뿌린 씨.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아무리 받고 즐거워하고 좋아하고 기뻐해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예산하지 아니고 망대 세우려고 시작하는 사람 한가지요.

예산하지 아니고 집 지으려고 시작하는 사람 한 가지입니다. 앉아서 예산해야  됩니다.

 요 둘째, 돌짝밭에 뿌린 씨는 권력 다툼입니다. 권력 다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력이 자기를 꿰뚫고 들어가서 자기에게 거침없이 이 말씀이 뿌리를  박을 수 있도록,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는 복종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력에게 자기는 복종해야 살지. 하나님 말씀과 권력다툼 해 가지고  시비하면 자기가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모든 만물보다 나는 위에 있고, 또 내 위에는 진리가 있고, 진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돌짝 밭에 이 돌은 돌 때문에 고만 이  씨가 뿌리를 박지 못해서 말라 죽어 버렸습니다. 돌에 걸쳐서. 이러니까 돌을 이  뿌리가 박을 수 있도록 돌을 없애야 된다 그 말이오.

 돌을 없애는 것은 그 돌은 이제 해석한 대로 자기이니까 하나님의 도를 받는  사람이 이 도에게 자기는 정복을 당해야 되겠고, 이 도에게 이용을 당해야  되겠고, 이 도의 것이 돼야 되겠고, 이 도에 소속해야 되겠고, 이 도에 속해야  제가 살지 제가 이 도하고 서로 어깨 겨룸을 해 가지고 평소에는 이 도도  환영하고 저도 환영하고 이래 살다가, 마지막에 자기냐 하나님의 도냐 이 둘이  비중이 지금 시비가 날 때에는 자기가, 이 도보다 자기 생활에 세력이 있고 이  도는 자기에게 밀려 나가면 이 도는 성공을 못합니다. 거기에서 결실을  못합니다. 말하자면 하늘나라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때에 이 도로 더불어 자기가 싸우는데, 이 도로 더불어 자기가  싸우는데 이 도에게 자기가 져서 굴복을 하면 자기라는 그 옛 사람이 죽어  변하여서 새 사람이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와 대립이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동으로 가자 하고 저는 서로 가자 할 때에, 이 둘이 대립이  되어 있을 그때의 자기는 어떤 자기입니까? 그때 자기는 어떤 자기요? 그것은  자기를 죽인 자기, 자기 아닌 자기, 거기 쓸모 있는 것은, 쓸모 있는 것은 마음  몸뚱이, 마음 몸뚱이 둘은 쓸모 있고, 쓸모 없는 것 뽑아 버려야 될 것은 악령  악성 악습 이 세 가지는 뽑아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때 마음과 몸뚱이를 누가 주관하고 있습니까? 녜? 마음과 몸뚱이를  누가 주관하고 있지요? 마음과 몸뚱이를 악령이 주관하고 악성이 주관하고  악습이 주관합니다.

 악령이라 말은 하나님 앞에서 제 중심으로 하다가 하나님 앞에 벌받아 쫓겨나온  것이 악령이요, 악성이라는 것은 인간 제 중심으로 하려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온 것이 그것이 인간의 악성 원죄요, 악습은 악령과 악성인 이 둘 악령  악성이 이 몸과 마음을 이용해 가지고 행동한 고것이 악습입니다. 한 번 하고 둘  하고 몇번 보면 그것, 악습이라 말은 자기 중심의 연습이라, 자기 중심의  습성이라, 자기 중심의 버릇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돌짝밭이 되어 있는 사람은,  돌짝밭이 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옥토가 되어 가지고 들으려면 어떻게  들으면 옥토가 들은 것이 되느냐? 하나님의 이 천국 복음을 배울 때에 자기가  돌짝밭 같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도를 옥토같은  심령이 되어 가지고, 옥토 같은 자기가 되어 가지고 받는 것이 되어지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이 도의 권력을 자기, 자기라는 그 자기의 권력보다, 자기의  권력보다 더 크게 여겨서, 자기의, 악령으로 말미암은 그 자기에게 있는 권력,  악성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는 권력, 악습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는 권력 이것이  하나님의 도의 능력에게 복종을 하면, 복종을 하면 무엇이 죽습니까? 복종을  하면, 복종을 하면 뭐이 죽습니까? 악성은 죽고, 또 악령은 쫓겨 달아나고,  악습은 죽고 악습과 악성은 죽고, 악령은 쫓겨 달아나고,  그러면, 우리 마음과 이 몸뚱이는 좋은 것인데, 악령 그놈이 와 가지고 내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아주 나쁘게 회 쳐서 넣는데, 고 악성이 죽어져 버리면  선성이 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성품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도로 찾은 것이죠. 그러면 그것이 사죄 칭의 화친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하고 화친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악성이 절단나면 하나님과 화친이  되어서 하나 되고 또 악습이 절단 나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믿음의 의의 행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도를 내 가 얼마나  반대하나, 자기에게 하나님의 도의 권력과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는 권력과 이  권력을 비교해 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는 그 권력을 하나님의 도가 자기를  주장하는 그 권력 앞에 복종시킬 수 있어야 자기가 바로 깨달은 것이고 하나님의  도를 받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도를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돌밭 되어 있는 사람은 그만큼 돌을 빼내어서 개간을 해서 옥토를  만들어야 되니까, 돌을 빼내야 옥토가 되고 길바닥은 나벼서 아주 땅이 물씬  물씬 해야 옥토가 되고,

 또 가시덤불 되어 있는 이런 사람은 그 가시덤불 그것을 캐내 버려야 이제  옥토가 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가시덤불을 캐내  버려. 돌을 캐내 버려. 또 길바닥을 파서 허번 허번 하게 땅을 일궈야 돼. 이 세  가지를 해야 옥토가 됩니다. 하나님의 도를 바꿔 받게 됩니다.

 덤불 같은, 덤불 밭 되어 있는 그것은 주님이 해석하시기를 '세상 염려 재리의  모든 미혹 이 두 가지 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받아도 헛일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 가 이 세상 온 세상 이것을 내가  취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느냐 이 두 가지가 지금 비중을 두고 달린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에 있어야 되고, 또 물질보다  하나님 말씀이 위에 있어야 이 도를 행할 수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행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처음에 말한 것은 그것은 지금 주권 다툼이오. 주권 다툼의 시비요,  둘째 것은 자기 다툼의 시비요. 셋째 것은 처소 다툼의 시비입니다. 처소  다툼의, 우리가 이 세상은 잠깐 있다 갈 나그네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 위해서 지어 주셨는데, 우리에게 필요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신다고  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면 다 주시고 우리가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하면 세상도 빼앗기고 하늘나라도 빼앗깁니다.

 그러기에 이 덤불 밑에 뿌린 씨, 세상 염려와 재리의 미혹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천국을 발견한 사람이라야 됩니다. 천국을, 자기의 처소는 천국이라,  자기의 살 곳은 천국이라, 이래서 천국을 자기의 살 처소로 발견하고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면 세상에 있는 그 모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지마는 세상이 뭐인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가치를 뭐인 줄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 그 염려에 떨어지고 또 그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냥 자꾸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이 말씀을 들으면 이 밖에 수많은 악한 자들이  있다. 수많은 악한 자들이 있다. 수많은 새떼들 이 있다. 새떼를 능가할 수 있는  말씀으로 듣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 이 길바닥을 개간해 가지고 옥토를 만든  사람이라 그 말이오. 그 사람이 길바닥을 개간해서 옥토를 만든 사람이라.

그것은 생각해 보지도 아니하고 여기에 가면 이 말씀 듣고 또 저기에 가면 저 말  듣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것은 악한 자에게 빼앗기고 새떼에게 다 빼앗깁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악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새떼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또 돌밭에 자갈, 돌 때문에 이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까 이 돌에 걸리지 않도록, 돌에 걸려서 손해보지 않도록 그  돌을 제거해 버리는 것, 또 셋째로는 이 덤불에 걸리지 않도록 덤불을 제거해  버리는 것.

 그러면 덤불을 이기고, 돌을 이기고, 새를 이기고, 악한 자를 이기고, 악한 자  새떼를 이것을 다 개간해서 제거해 버리고, 악한 자 새 떼를 제거해 버리고, 또  돌을 제거해 버리고, 또 이 덤불을 제거해 버리고, 세상과 재리의 모든 염려를  다 제거해 버리고, 또 자기를 제거해 버리고, 또 이 모든 세상의 수많은 사상과  주의의 미혹들을 다 제거해 버리고,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여기 13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씨  뿌리는 비유를 해 놓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먼  '귀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귀 있는 사람은 다 들을 수 있고, 귀  있는 사람은 옥토에 뿌린 씨가 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다 들을  수 있다 그 말은 귀 있는 사람은 다 옥토에 뿌린 씨가 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 귀 있는 그 귀는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자기가 이 세상에 이런 것에게 저런  것에게 충격을 받지 말고 모든 것을 냉정스럽게, 냉정스럽게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고것이, 고 이성 비판 도가 고것이, 이성이 이것을 자기가 아는 대로의  지식을 활용해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를 이렇게 하면, 그 이성이  평가해서 나가면 고 이성이 어디까지 안내를 해 주느냐 하면 이성 평가  가지고는, 이성은 둔해 놔서 위에 산만당에 못 올라갑니다. 이성 평가로  해석하면 이성 평가가 그 양심 평가에 중매쟁이가 되어 가지고 양심 평가의  중매쟁이를 시켜대서 양심 평가까지 소개를 해 줍니다. 안내를 해 줍니다.

 그러면 양심 평가, 양심은 아무것에게도 제재도 받지 아니하고 편도 들지  아니하고 매수도 당하지 아니하고 그저 그것은 꼭 자기대로 사는 것이 양심  인데, 자기가 아는 그 지시대로 자기대로는 하후 하박 이 없이 아무데도 침노나  제재를 받지 아니하고 고렇게 하는 것이 고것이 양심인데, 고렇게 너희가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도 듣고 세상 지식도 듣고 다 이래 지식을 들어 가지고  고것을 네가 이성을 가지고 비판을 해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식은  조물주가 있다 했는데 세상 지식은 제자리에 있다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어  놓은 것을 당신이 주관하시고 당신이 관리하시고 심판한다 했는데 인간들의 말은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성 비판을 하면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거기에 새떼가  제거되게 되고, 악한 자가 제거되게 되고, 거게에다가 또 좀 나아가서 양심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이 새떼와 악한 자와 돌 밭 덤불 이것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을 가리켜서 "귀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성도 있고 양심도 다 있습니다. 없는 것 아니오. 귀 있는  자라 살은 우리는 귀가 없다 말 아니오. 우리는 귀가 있습니다. 이  귀를(주:육체에 달린 귀) 말하는 것 아니오. 이성의 귀도 있고 양심의 귀도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성과 양심은 우리가 있으니 우리는 누구든지 들으려면  들을 수 있고 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듣고 그냥 저버리지 말고, 듣고 나서  자기가 홀로 원하는 그런 장소나 시간을 찾든지 해 가지고 자꾸 명상을 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들어 가지고 그 도를, 들은 천국 말씀을 듣고 자기가 눈을 감고  생각하고 생각할 때에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이제 내가 길바닥, 길바닥에  뿌린 씨가 안되어야지. 돌밭에 뿌린 씨가 안되어야지. 덤불 위에 뿌린 씨가 안  되어야지.' 이거 생각합니다.

 제가 진주 성경학교 가 가지고 최상림 목사님을 만나 가지고 내가 처음에 만날  때 좀 미안하지만 물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신앙에 유력하다 하는 말 내가  들었는데 최 목사님 표어가 뭐입니까? 이래 물었어 '표어가 뭐입니까?' 이러니까  웃으시면서 '예, 저는 옥토에 뿌린 씨가 제 표어입니다.' 그렇게 말해. '옥토에  뿌린 씨가, 항상 나는 옥토에 뿌린 씨가 되겠다. 옥토에 뿌린씨가 되야 되겠다.'  그래서, 또 내가 내 표어도 또 묻기 때문에 가르쳐 주고 이러면서,  그때는  몰랐는데 차차 차차 믿어 가면서 보니까 그 표어를 아주 잘 선택했습니다.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고 하니까 이거 길바닥을 개간해야 되지, 돌을 다 추 내야  되지, 또 덤불을 다 없애서 개간해야 되지 이 셋을 개간하려고 하니까 그 어른이  밤낮 바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는 것이 이 악한 자들이 빼앗아 갑니다.

새떼들이 빼앗아 갑니다. 새떼와 악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혼자  명상을 해야 됩니다. 자꾸 명상하고 명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그거 명상하는  가운데에서 성신의 감화를 받아서 천하에 말이 많지마는 말과 말을 비교하고,  말한 자와 말한 자를 비교하고, 이 비교를 해서 자기에게 확신이 이제 생겨져야  됩니다. 세상에 어떤 자가 말할 때에 그 말을 못 할지라도 그 말하는 것이 참  말할 수 없이 가증스럽고 아무것도 아닌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그렇게 보여지지  아니하면 이 길바닥을 면치 못한 사람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에 미리 알아서, '이 말에 대해서 이제  미혹이 많을 터이니 어찌 되노? 하면 말과 말의 비중을 대조해 봐야 되겠고,  말한 이와 말한 이의 또 권위를 비교해 봐야 되고, 또 이 말씀과 자기에게 있는  자기 주장 말하자면 옛 사람의 주장, 자기 주장과 이 말씀과 둘을 비교해 보고,  이제 자기 주장을 이 말씀이 능가할 수 있어야 뿌리가 박히지, 능가하지 못하고  그냥 의심하여 듣고 가 가지고 그만 '복음 들었다' 이러는 사람들은 다  실패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들은 바의 하나님 말씀은, 이번에 들은 바의 하나님의 말씀은  다 자기를 능가할 수 있는 이 말씀으로 잡아야 됩니다. 이 자리에서 '아! 이  말씀은, 내가 이 말씀에게 복종해야 되지 내가 이 말씀을 거역하면 절단되고  망한다' 하는 요것을 제가 확정을 지워야 돼요. 그냥 그것을 확정지워요. 마귀는  확정 지우지 말고 그냥 들었으니까 기억만 하면 다 안 됐느냐? 자꾸 이럽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과 자기에게 있는 자기  주장 돌, 이 둘을 비교해서 '내가 현실을 당하면 이 말씀이 내 현실에서 권위가  있겠나 주장을 하겠나, 내 주장 이놈이 주장 하겠나?' 이걸 비교를 해 가지고,  자기가 주장할 그것을 평소에 자꾸 꺾어야 되지요. '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되고 하나님 말씀에 속해야지. 이것은 하나님 말씀인데 네 주장과  하나님의 주장이 그 중량이 같으냐? 이 말씀은 없는 가운데 천지를 창조한  말씀인데 네 말과 같으냐? 네 말이, '이 가증스러운 자야. 자기 말을 자기가  아주 저주를 하고 정죄하고 네까짓 게 어디 비교를 하려 하느냐? 해서 자기를  납짝 깨서 아주 바짝 보스라기를 만들어 놔도 현실을 닥치면 이게 나옵니다.

돌밭 이게 나오요. 돌 이게 버떡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말씀을 듣고 '아! 돌밭에 뿌리운 씨. 내가 돌밭에  뿌리운 씨 될라' 돌을 제거하는 이 노력을 해 봐야 되고, 또 덤불을 제거하는  노력해 봐야 되고, '내가 이 말씀을 듣고 나갈 때에 땅에 속한 그 온갖 문제가  오면 어찌해야 되겠느냐? 이 문제도 들이 닥쳐보고 저 문제도 들이 닥쳐 보고  봐서, '땅에 속한 어떤 문제가 와도 이 말씀에 대해서 내가 요동하지 않겠다.

내가 이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은 뭐 가정 문제, 사회 문제, 국가 문제, 뭐 사업  문제, 또 심지어 생사 문제 어떤 그 세상 염려가 와도 이 말씀에 대 해서는 이제  양보나 가감이 없다' 요것을 단정짓고 짓고 자꾸 지어도 그때가 되면 흔들리기  쉬운데 아무 이런 예상도 하지도 아니하고 벌로 하나님 말씀 들었다고 턱  말씀대로 산다고 덜렁 시작했다가 덜컹 넘어가는 그런 사람은 다 뒤에 가서 알속  없이 지냅니다. 실패하고 마요.

 그런고로 우리는 길바닥을 벗어나서 길바닥을 없애는, 없앤 옥토가 되어야  되겠고, 또 돌밭을 돌을 제거한 옥토가 되어야 되겠고, 또 덤불을 제거한 옥토가  되어야 된다.

 요러면 외우고 난 다음에 자기가 그러면 돌을 제거하는 것이 어떤 것이  제거하는 것이냐? 또 덤불을 제거하는 것이 어떤 게 제거하는 것이냐? 길바닥을  이렇게 허불허불하게 개간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는 그것을 해석을 해 놨다  말이오.

 길바닥을 개간하는 것은 새떼와 악한 자만 이겨날 수 있으면 돼요. 또 돌밭은  자기만 밟고 꺾고 자기만 이기는 진리 되면 돼. 자기 이기는 진리가 되면 도고,  또 세상을 이기는 진리 되면 되고,  이러니까 이 성경 말씀은 전부 전투요. 싸워서 이기느냐? 지느냐? 이기면 살고  지면 죽습니다. 세상이 이기면 세상이 살고 하나님의 도는 그에게 죽어 버리고,  하나님의 도가 이기면 하나님의 도는 살고 세상은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세 가지를 없애면 옥토가 됩니다. 옥토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려고 할 때에, 그대로 성취 되려고 할 때에 이  세상 악한 자에게도 아무 제재받지 아니하고, 새 떼에게도 제재받지 아니하고,  또 자기라는 돌에게도 제재받지 아니하고, 세상 염려나 재리에도 제재받지  아니하고, 그런 데에 제재 받지 아니하고, 자기의 마음과 몸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이 도가 솔빡 삼켜 버리는 이것이 이제 옥토 뿌린 씨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이 도가 삼켜서 자기는 하나님의 이 도, 이 복음에게 완전히 삼키워지면  그것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것인데,  그러면 백배 육십배 삼십배라는 말은, 십배씩 인데, 열에는 십배가 백이  되겠고, 여섯에는 십배가 육십이 되겠고, 셋은 십배가 삼십이 되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이것은 이렇다 확정은 내가 지우지 못 하나 내가  깨달은 대로는 그러합니다. 사람의 수는 열이요, 사람은 '열' 하고나면 또  고다음에 하나 셉니다. 사람의 수는 열이요, 또 마귀의 수는 육이요, 하나님의  수는 삼입니다.

 이러니까 그리 되면 하나님을 상대해서나 또 인류에게 상대해서나 또 악령에게  상대해서나,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에게 상대해서 이 말씀대로 다 완성을  이룬다, 완성을 이룬다, 완성을 이룬다, 이 말씀을 이 길바닥, 돌밭, 덤불, 요  세 가지만 제거해 버리면 옥토가 되는데, 이 세 가지만 제거해서 옥토가 되면  마귀를 대하든지 하나님을 대하 든지 세상을 대하든지 인류를 대하든지 어디  대하든지 자유고, 어디 대하든지 다 성공이고 승리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해 주 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전에 한 말씀은 좀 듣기가 어렵습니다. 이러니까 가서 좀 새김질 하고 잘  생각해 가지고, 혹 기회가 있으면 한번 더 증거를 해 줄 것이고 그리 안하면  지나갈 것입니다. 녜 지금 폐회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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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신앙 노선-씨 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장 18절-23절/ 830503화전집회 선지자 2015.10.28
50 두 신앙노선/ 창세기 13장 1절-18절/ 871018주후 선지자 2015.10.28
49 두 신앙노선-하나님이냐 자기냐/ 창세기13장 8절-13절/ 830502월밤집회 선지자 2015.10.28
48 두 신앙노선-하나님이냐 자기냐/ 이사야 49장 22절-23절/ 830331수새 선지자 2015.10.28
47 두 양식/ 요한복음 6장 27절-35절/ 840226주전 선지자 2015.10.28
46 두 여인/ 마태복음 24장 40절-44절/ 860203월새 선지자 2015.10.28
45 두 운동-두 이치/ 사도행전 27장 22절-26절/ 860814목새 선지자 2015.10.28
44 두 인도/ 로마서 8장 4절-6절/ 840217금새 선지자 2015.10.28
43 두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절/ 880908목새 선지자 2015.10.28
42 두 종류의 사람/ 요한일서 4장 7절-11절/ 861128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8
41 두 종류의 생활-가인과 아벨/ 창세기 4:1-8/ 800117목새 선지자 2015.10.28
40 두 종류의 생활-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 1절-9절/ 800116수야 선지자 2015.10.28
39 두 종류의 증인들을 보고 온전을/ 히브리서 12장 2절/ 880711월새 선지자 2015.10.28
38 두 종류의 증인들을 보고 온전을/ 히브리서 12장 1절-2절/ 880709토새 선지자 2015.10.28
37 두 종류의 지식/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820602수새 선지자 2015.10.28
36 두 종류의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0절-18절/ 821013수야 선지자 2015.10.28
35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20107목새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