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담대를 바로 가질 것

 

1987. 5. 19. 새벽 (화)

 

본문:누가복음 15장 3절∼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의 일생 생활에는, 우리의 일생 생활에는 두려움이 고통이요 담대함이 평안함입니다. 그런고로 두려움과 고통이 우리 사람들에게는 심히 중요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여야 할 때에 두려워하지 않는 그것도 망하는 행위고 또 두려워하지 안할 때에 두려워하는 것도 그것도 망하는 길입니다. 또 담대하지 안해야 될 때에 담대하는 그것도 망하는 길이요 담대하여야 할 때에 담대하지 못하는 그것도 망하는 길입니다.

사람이 두려워할 것을, 참 두려워하여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또 담대할 것에 대해서 담대하면 그 사람은 언제나 생명과 평강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워하는 것과 담대하는 그것을 바로 판단해서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 전생활은 다 실패합니다. 두려워할 것과 담대할 것을 바로 선택해서 가진다면 그 사람의 모든 생활은 반석 같아서 아무도 해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어떤 것을 두려워할 것인가? 우리는 범죄하는 거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범죄하는 거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 범죄하는 것은 우리를 대속하신 전지자요 전능자요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신 대주재이신 영원히 우리의 생명되어 있는 하나님을 내가 떨어지는 것이요, 하나님과 나와의 벌어져서 내가 하나님을 잃는 것이요,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외에는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요, 우리의 능력의 보호를 잃는 것이요, 우리의 온갖 행복과 평강의 충만을 잃 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범죄하는 거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착각하고 오해해서 망령을 부리는 것이지 범죄하는 거 외에는 우리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범죄하지 안했을 때에 그때는 온 세계가 다 나에게 대립이 되든지 우리 형편이 어떻게 지금 산 벼락같은 그런 일이 닥쳐오든지 우리는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러기에 무슨 일이든지 닥칠 때에 우리는 ‘나에게 무엇인가 죄가 있나?’ 하는 그거 찾는 것이 제일 지혜로운 사람이요 찾다가 죄가 없으면 언제든지 두려워하는 그런 것을 안 해야 됩니다. 또 죄가 있으면서 인간들이 저를 보호한다고, 형편이 좋다고, 모든 배경이나 사정이 좋고 뭣이 형통해진다고 담대하는 자도 그자도 정신 잃은 자요 미친자요 비정상의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죄를 범하여 죄와 저와 하나되어 있으면서 담대함을 가지는 그것도 비정상의 사람이기 때문에 곧 그 시간부터 썩고 죽고 망하는 것이고 또 죄가 없는데 공연히 두려워하고 떠는 그것도 비정상이기 때문에 망하고 죽는 것입니다.

꼭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해야 됩니다.

죄를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망할 행동, 죄가 없는데 두려워하는 것도 망할 행동. 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요것을 똑 바로 가져야 합니다.

또 우리가 담대함은 어떨 때 담대함을 가져야 되느냐? 오늘 아침에 봉독한 말씀같이 잃어버린 양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날 때를 가리켜서 잃어버린 양이라 그랬습니다. 주님에게는 잃어버린 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면 잃어버린 양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건 어떤 게 떠나는 것인가?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는 것이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말하면 범죄하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오. 나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요 예수님은 나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도 중요하지마는 두고 한 마리를 찾도록 찾아 다닌다는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가 범죄해서 하나님과 떨어졌을 때에는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할려고 이렇게 전력을 기울이고 계신다 하는 그것을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찾은즉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갔다” “찾은즉 어깨에 메고 집으로 목자가 돌아갔다”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범죄 가운데 있다가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집으로 돌아간다 말한 것입니다.

잃은 양이 목자 만나 가지고서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은 우리가 범죄해서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떠났다가 이제는 하나님에게로 회개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갈 때에는 제가 범죄할 때에는 저 혼자 탈선 행위로 하나님 떠나는 행위를 제가 했지마는 회개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회개하는 그것은 벌써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셔서 나를 붙들고 회개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잘못된 게 깨달아지고 ‘잘못된 행위를 이것을 고쳐야 되겠다’ 하면서 고치게 되는 그것은 벌써 주님이 나를 찾아 다니시다가 나를 만나서 나를 당신 품에 안으시고 당신 어깨에 메시고 지금 생명의 나라로 주님 계시는 곳으로 자꾸 이렇게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요것을 가리켜서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요거는 회개하는 걸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범죄하는 것은 나 혼자 하나님을 떠나서 방종하는 행위고 회개하는 것은, 내가 회개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회개 시켜서 내가 회개하는 것이니 회개를 하는 그것은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고 어깨에 메여서 가는 걸음이라는 요것을 우리에게 똑똑히 가르쳤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되는 것은 나 혼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되는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어 가지고 우리가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을 고치게 되는 것은.

고치게 되는 것은 내 힘으로 고치는 게 아니라 목자되신 주님이 나를 찾아 헤매다가 나를 만나 가지고서 나를 붙들고 당신의 나라로 옮겨져 가는, 탈선됐던 데에서 본집으로 돌아가는 그것을, 정상으로 돌아가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어깨에 메고 다시 양의 우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목자되신 주님의 이 은혜로 주님이 아듬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는 걸음은 지극히 크신 전지 전능의 주님의 품안에 안겨서 이 생명의 나라 하늘나라 주님의 세계로 점점 이 생명 세계 진리 세계로 옮겨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굳게 잡고 우리가 잘못된 데에서 회개할 때에는 주님이 나를 붙드시고 나를 아듬고 어깨에 메시고 지금 나를 회개시켜 가고 있다 하는 요것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하는 걸음은, 회개하는 걸음은 담대해야 됩니다. 이 양이 목자를 떠나서 그렇게 탈선했을 때에는 가다가는 뭐 개울도 만났을 것이고 덤불도 만났을 것이고 이리도 만났어.

이리 만났으면 죽을 지경 지내서 참 안 잡아먹힌 게 다행이지 제가 죽을 어려움을 당했을 것이고 들강을 만났으면 제가 뭐 그 어린양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주 터러기는 양의 터러기는 부풀부풀하이 똑 솜뭉텅이 같습니다. 솜뭉텅이 같은 것이 양의 새끼인데 그게 들강 속에 들어가 놓으면 감겨 놓으면 못 나갑니다. 감겨 놓으면 터러기, 터러기 빠지면 가죽 다 벗겨져요. 그런 것이 양입니다. 이런데 들강 만났을 때에 제가 얼마나 곤고를 당했으며 개울을 만났을 때에 얼마나 곤고를 당했겠는가? 이러니까 그만 딱 배어 가지고 있어.

양이, 양을 목자가 아듬고 양의 우리로 돌아갈 때에 이 들강을 보고서는 양이 막 발동을 합니다, 과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이구, 이 들강에 이거 내가 지금 또 찢겨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또 이 들강으로 지금 간다. 들강 거석하겠다.’ 이러나 제가 목자를 떠나서 갈 때의 만난 들강은 자기가 찢기고 이렇게 어려웠지마는 목자에게 안기고 어깨에 메여서 가니까 들강이고 뭐 그런 것이 아무 상관이 없어.

저만 놀랬지 실상 닥치고 보니까 상관이 없어.

개울도 그렇게 저만 놀랬지마는 실은 목자의 어깨에 안겨서 개울을 건너는데 개울을 보기는 보고 저만 놀랬지 개울을 어째 건너가는지 그런 것이 상관이 없어.

이리가 와 가지고서 보이니까 막 발동을 치는데 발동치는 걸 목자가 볼 때에 ‘이 양이 이리 만나 가지고 욕을 봤구나’ 하는 것을 안다 그거요. 목자가 아듬고 가니까 이리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이 있어? 근방에 오지도 않애. 보이기만 보이지 근방에 오지도 못한다 말이오.

그러니까 혼자 갈 때에는 이런 것들이 어려웠지마는 목자의 어깨에 안겨서 목자에게로 가까이 나아갈 때에, 우리로 나아갈 때에는 ‘주님을 떠날 때의 그 모든 어려움과 꼭 같은 사정 형편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구나’ 하는 것을 이 양이 깨닫는 거와 같이 우리들도 요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생활할 때에는 온갖 어려움이 있지마는 회개하는 그 걸음에는 꼭 같은 그런 어려움이라도 어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걸음을 걷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니까 피조물들이 뭘 해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이러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든지 다니엘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걸음인데 불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사자가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과연 그런 것들이 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이래서, 회개하는 걸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염려 없고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함께 하기 때문에 다 평안뿐이니 회개하는 걸음은 평안뿐이니 담대히 회개하라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담대히 회개하라.

우리가 회개할라 하면 ‘이라면 회개할라 하면 가정이 깨지겠다, 사업이 잘단나겠다, 이라면 내 직장에 떨어지겠다.’ 어리석은 자야. 네가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인데 회개하는 걸음에 어떤 어려움이 있으며 어떻게 해할 자가 있겠느냐? 회개하는 자는 해할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회개하는 것은 들강도 해하지 못하고 개울도 해하지 못하고 이리도 해하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어짜든지 고쳐서 회개하는 걸음은 아무도 해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담대히 회개해야 됩니다.

그저 잘못된 거 회개할 때는 사업이고 뭐 가정이고 뭐 ‘이라면 회개하면 이혼이다.’ 주님이 이혼 안 시키는데 어떤 남자가 이혼할 것이며 어떤 여자가 이혼할 것입니까? 회개만 하면은 제 계집 제 아내는 제것 되고 말지 또 제 남편은 제것 되고 말지 아무도 뺏들어 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자기에게 화가 될 사업이면 하나님께서 다 치워 주실 것이고 필요한 사업이면은 회개하는 자에게 그 사업을 누가 뺏들어 가겠소? 회개하는 자의 그 직장을 필요한데 누가 그걸 뺏들어 가겠소? 해할 것만은 다 제거돼지고, 회개하는 걸음에는 해할 것만은 제거돼지고 필요한 것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라고 베드로전서 1장 5절에 보면은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5절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안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 때에는, 의를 행할 때에, 회개할 때에 담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 때에 담대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 때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닥치면 이거 큰일나겠다 싶으지마는 그 어려움을 인하여서 하나님과 나와 가깝게 만들고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뒤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만드는 일만 되지 절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려 하는 자에게 해할 자가 없다는 요것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아무것도 해할 자 없다. 또 죄 짓다가 죄에서 회개할 때에 아무도 해할 자 없다. 그런고로 회개하는 그 생활에 우리는 담대함을 가져야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에 담대함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범죄하는 거 외에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범죄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원수가 되어지고, 능력의 보호를 다 벗는 것이고, 하나님의 품안을 떠나는 것이고, 사망을 자취하는 것이고, 생명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범죄하는 거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뭐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다 해도 범죄 안 하면은 하나님이 다 “너희에게 있어야 필요할 것인 줄 아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너의 천부께서 너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인 줄 아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습니다. 또 죄 없는 자가 굶으면은 한없는 그 영광에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범죄하는 거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는 요거 기억하고 또 회개하는 걸음은 어떤 형편 닥쳐도 문제하지 말아라. 강하고 담대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걸음에는 강하고 담대하라.

그런고로 두려움과 담대를 우리가 바로 깨닫고 요 둘을 바로 가지면 그이의 걸음은 언제든지 형통뿐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광고합니다.

‘주일학교’ 뭐이요, 이거? 어제 내가 부탁했는데 왜 이거 없어? 그라면 안 돼.

정신이 살아 있어야 돼. 팔십이 다 된 영감탕구가 지금 그런 것 다 기억하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다 잊어버려? 내가 부탁을 했으니까 부탁을 했는데 부탁받아 가지고 잊어버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이제부터 공과를 외워야 됩니다. 공과를 외우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 구원도 절단나 버리고 또 외우지 않기 때문에 주일학교가 자꾸 떨어져 내려갑니다. 여러분들이 공과를 외워서 그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과 기도함으로 깨끗해진다” 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외우지 않으니까 여러분들이 더러워지니까 전부 마귀 종이 돼 놓으니까 무슨 사람을 구원하겠습니까? 그런고로, 내가 요 어제 말했어. 요 광고에 말이요, ○○○ 어데 있어? ○○○? 안 나왔어? ○○○? 이거 또 병 들었어. 아프면 나는 병 들었어.

나는 처녀들 아프면 ‘너 죄 지었구나. 칠계 범했구나.’ 이래 그만 나는 이래 봐, 그만 대번에. 그런 줄 알아요. 처녀들이 신앙 떨어지면 또 병들면 ‘너 칠계 범했다.’ 이렇게 흉측하게 나는 봅니다. 목사가 그래 봐. 그런 줄 알고 살아요.

병이 들어도 새벽기도 빠지지 마. 새벽기도 빠지면 ‘이거 또 병들었구나. 이거 또 죄 지었구나.’ 그래 봐. 그래 보는 것이 아마 백프로는 안 맞아도 오십프로는 맞을 것입니다. 이런 악한 더러운 세대입니다.

여게 적기를 그래 적으라 했어. ‘주일학교 반사들은 반드시 공과를 외울 것’ 그리 안 하면 `주일학교 반사들은 반드시 공과를 외우도록 노력할 것’ 그라든지.

요 제일호에 고거 광고를 하라 했어. 새벽마다 그 광고. 대예배 때마다 그 광고.

요 써 올릴 때는 일호로 고거 하라고서. 왜? 그렇게 안 하면 이거 뭐 여간 한번 두번 말해 가지고 듣는 사람들이 아니라, 얼마나 강퍅해졌는지. 그게 뭐이냐 길가입니다. 그게 길바닥이라.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그 마음이 강퍅해진 것도 길바닥, 세상 말을 들어서 마음이 강퍅해진 것도 길바닥, 다 같은 길바닥이라.

하루 삼십 분 기도 놓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도록 합시다.

혹 내가 오늘 양산동을 가는데 가 가지고 좀 기도해 봐서 새벽기도를 내가 인도하는 게 옳으나 대구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굉장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자꾸 좀 공적으로 재독을 해야 되지 개적으로 구역장들이 자꾸 데리고 앉아서 이걸 재독을 하면 되지마는 재독을 안 하는 구역장들이 많애.

자꾸 재독을 시켜야 되지 찬송 부르면 바람 들어. 찬송만 해 가지고는 바람 들어.

재독을 시켜야 돼요. 하나님 말씀이 회개를 시키지 찬송은 감동을 받아서 그 찬송해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 가지고, 듣고 읽어 가지고서 해서 깨달아서 회개를 해야 되지. 회개 입문이 찬송입니다, 회개 입문이 찬송.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찬송이라. 감정은 의지를 만드는 게 감정이라. 의지의 입문이 감정이라.

의지라야, 신앙 의지라야 신앙 생활하는 것이지 감정 가지고는 신앙 생활 못 한다 그 말이오. 감정 신앙 생활은 항상 실패해요.

그러니까 구역장들이 이거 재독을 많이 시켜야 될 터인데 어짜든지 구역장들이 바로 자기 구역을 살릴라거들랑 이번에 대구 가서 집회한 것을 열 번 이상 재독을 시키십시오. 교인들이 다 듣고 외우도록 하십시오. 그래 놓으면 그거는 잘 믿지 말라 해도 잘 믿어. 또 축복 못 받으라 해도 자꾸 축복 받아져. 회개하면 받지 뭐 딴게 뭐 있는가? 그래서 혹 재독을 하는 것이 필요하나 내가 가는 것이 필요하나? 이래서 어느 것이 필요한지? 재독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러면 내가 좀 건강만 있으면 가 가지고 내가 앉아서 재독을 다 할 것이고, 내일 아침부터는 앉아서 재독할 것이고, 오늘 아침까지는 그 해야 될 필요성이 있는 거, 왜? 공연히 두려워하지 안할 때에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많고 담대하지 않을 걸 담대하는 인간들이 많고. 우리는 담대는 몇 가지에서만 담대해야 됩니까, 손가락으로? 우리는 몇 가지에서만 담대해야 됩니까, 손가락으로? 다 몰라. 다 잊어버렸어. 뻐뜩 들어 봐요. ○○○씨 들어 봐요. 담대는 몇 가지 담대해야 돼? 퍼뜩 들어 봐. 뭐 안다고? 더 들어, 더. 손 더 들어. 뭐 그거 알면 구역장 아는 게 대단해서 이래 가지고 아는 척 이래 가지고 이라고 있어? 이래야지.

두려움은 몇 가지 두려워해야 되는데, 손가락으로? 높이 들어 봐요, 손가락을 좀.

뻐뜩 들어, 다른 사람 보구로. 저 ○○○목사님 사위 잘 들었다. 이래 드는데, 그거는 병신 아니라. 다른 분들 모두 병신인 모양이라. 다 한번 들어 봐, 이거.

손가락. 한번 들어 봐. 다른 사람 팔이 모도, 젊은 사람이 모두, 뭐 이 사람 팔 오그랑이야? 팔 오그랑이? 팔 곰배팔이야?○○이 뒤에. 그 뒤에 봐, 뒤에. 말해, 뒤에. 한번 팔을 쭉 들어 봐요. 들어 봐. 팔 한번 들어 봐. 이래 들어 봐, 이래 좀.

옳지. 팔은 병신은 아니로구만.

그래, 두려워할 것은 하나, 담대할 것은? 또? 그러면 담대할 건 둘. 말하면 담대할 거는 둘. 회개할 거 하나. 손들어라 소리 안 해도 이래 들어서 자꾸 익혀.

능숙해야 돼. 숙달이 돼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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