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

 

1981. 9. 17. 목새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4절 - 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쪼개이 쪼개이가 나지 아니하고 한 덩어리입니다. 다른  여섯교회는 모두 쪼강이가 났습니다. 한 덩어리 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산 부분이 없어서 죽은 것으로 한 덩어리가 됐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모두 산 부분이기 거기에 있기 때문에 죽은 부분과 서로 마찰이 있고  대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사에 화평을 줄려고 오지 안했다 서로 시비있는  분쟁을 줄려고 왔다 내가 오기전에 이 싸움이 붙었으면 좋을뻔 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초림하실 그때에 육체의 이스라엘의 말년인데 육체의 이스라엘의 말년에  이스라엘이 전부 인화주의로 인간끼리 좋아하는 인화주의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간끼리만 한 덩어리가 되고 인간들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마찰이 없었습니다. 제사장들도 마찰이 없었고 서기관들도 마찰이 없었고 또  제사장과 서기관과 왕들도 마찰이 없었고 전부 인화주의로서 고만 서로 대립되는  일이 있으면 대립될게 있나 우리가 서로 하나 되어야지 이해하고 용납하고 뭐  화평해야지 이래 가지고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에 그때에 육체의 이스라엘이 두  쪼가리가 아니고 똘똘 뭉친 한 쪼가리였습니다. 그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오기 전에 이 싸움이 붙었으면 좋을뻔 했다" 내가"너희가  화평으로 한 덩어리 되어 있는데다가 지금 이 마찰이 있고 쪼가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도 이제 신령한 이스라엘의 말년이 벌써 됐습니다. 신령한 이스라엘에 말년이  됐는데 "신령한 이스라엘의 말년에 되는 그 일을 육체의 이스라엘의 말년과  비슷하게 된다." 하는 것을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서로 뭐 나빠도 말할게 뭐 있는가? 삐뚤어져도 말할게 뭐  있는가? 이해하지 용서하지 용납하지 서로 타협하지 화평해야되지 이래가지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화합하는 이 시대에 와 가지고 기독교와 기독교가 서로 뭐  분쟁할게 뭐 있는가? 또 교리가지고 무슨 말을 할게 있는가? 이래서 화합주의로  나가 가지고 이스라엘 그 종교 말년과 지금과 거의 꼭 같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요새는 이거는 틀렸다. 이거는 옳다. 만일 죄를 책망하든지 삐뚫어진 걸 들어서  말을 하면은 그 사람의 소리는 듣지도 안하려합니다.

이러니까 요새는 목사들도 모든 인물들도 다 그런 소리를 안해야 환영을 받지 그런  소리 하면은 환영을 받지 못하고 또 그런 소리 할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분쟁하는 것보다는 화목이 좋습니다. 또 화목 그것보다는 하나님과 진리가  좋습니다.

이러기에 하나님과 진리를 먼저 모시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뭘 가지야 됩니까?  그러고 난 다음에는 어찌됩니까? 하나님과 진리 모시고는 분쟁운동을 할랍니까?  화목 운동을 할랍니까? 화목 운동을 해야지 하나님과 진리를 모시고 화목 운동을  하려 하니까 화목 운동전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분쟁이 있지요. 왜?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한 그 뭉텅이에다가 하나님과 진리를 모신 사람이 들어가면 마찰이  있을 것 아닙니까? 마찰이 있는데 그러면 마찰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생명이  있습니까? 마찰을 받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있습니까? 어데 있소. 네, 마찰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생명있지요.

그런데 마찰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생명 있는데 생명 가진 사람이 마찰을  안하려고 하면은 그 생명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그때에  생명을 가졌는데 마찰을 안하면 그 뭉텅이는 생명 뭉텅이로 화해지겠습니까? 점점  사망뭉텅이로 견고해지겠습니까? 사망뭉텅이로 견고해지지요.

이러니까 생명 하나님과 진리 가진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 덩어리가 잘못됐다고  말하니까 그 덩어리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이러니까  선지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덩어리를 좋아하기는 좋아하지마는 한 덩어리가 쪼개이보다 한  덩어리가 좋소. 서로 분쟁하는 것이 좋소. 뭘 택할랍니까? 한 덩어리가 좋지요. 한  덩어리가 좋은데, 그러면 한 덩어리가 좋고 분쟁보다 한 덩어리가 좋으니까? 그 한  덩어리가 좋으니, 한 덩어리 된 단합된 것들 택해 가지고 그 다음에 우리 할 일이  뭐입니까? 예 고 다음에 할 일이 뭐입니까? 한 덩어리 된 것을 우리가 좋아서 한  덩어리 된 것을 택했으니까? 고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이 뭐입니까? 조사할 일이  뭐이요. 한 덩어리 이것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산 걸로 한 덩어리가 되었는지,  죽은 걸로 한 덩어리가 되었는지, 진리로 한 덩어리가 되었는지, 진리를 떠나서  인간끼리 한 덩어리가 되었는지, 그것을 조사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걸 조사해야지.

그러면 그것을 조사해서 인간끼리 한 덩어리라면 거기에서 분쟁을 일으켜야  되겠소. 화평을 일으켜야 되겠소? 분쟁을 일으켜야 되지. 그 분쟁은 무슨  분쟁입니까? 하나님과 진리와 한 덩어리 된 그 생활을 그 언행심사를 거기에서  아무리 마찰이 되어도 해야지 그거 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뭐입니까? 순교입니다.

그것을 자기 생명을 애끼지 안하고 모든 걸 애끼지 안하고 그 강하게 증거하는  마찰을 두려워하지 안하고 있는 몸과 소유와 생명을 다 기울려서 그 일을 하고  끝낸 그 사람이 순교인데,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뭐이라고 말했습니까? 부르기를  뭐이라고 부르지요. 이름이 뭐입니까? 선지자 또 증인 선지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증인이라고 하지 안했습니까? 두 감람나무 두 증인 증인이라 말이오.

증인은 무슨 증인인데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소개하고 인간이 모르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소개하고 하나님 심판을 소개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보고서 이렇다 저렇다 평한 그것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너걸보고 이렇게 평한다. '아합왕아 아합왕 네게 대해서 하늘나라에 총회가  열려가지고 너를 이렇게 평했다' 하는 것 을 아합왕에게 말하니까 아합왕이  분개해서 죽일려고 그 고난의 떡을 고난의 물을 마시고 감옥에 가두어 놨는데 그때  갖힌 그 사람의 이름이 뭐이지요. 미가야. 미가야는 직책이 무슨 직책입니까? 선지  직책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건설해놓고 모두 상을 베풀어 주는데 상을 베풀어 줄때에  제일 처음에 누구에게 상준다 했습니까? 제일 처음에 누구에게 상줍니까? 제사장도  있고 왕들도 있고 장로들도 있고 오만 직책 다 있고 또 전도사들도 있고 이  평신도들도 있고 이 모두 있는데 그때 상을 줄때에 누구를 제일 먼저 상을 준다고  했지요. 선지자 선지자상을 제일 먼저 줍니다. 왜 사람 살리는 것이 전부  선지자에게서 다 나옵니다. 입에서 다 나와서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오늘에는 화목이 좋지마는 하나님과 진리 빼논 화목은 하나님과  진리때문에 불목한 것만 못합니다. 바벨탑을 쌓을때도 하나님 빼놓고 인간저거끼리  단합이 됐기 때문에 그 단합으로 인해서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보면 참 가정들도  아주 단합된 가정이 있고 서로 조금 불목된 가정이 있고 또 지금 불목이 차차  단합이 되가는 가정도 있고 단합된 가정이 차차 불목이 되가는 가정도 있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이 진리를 가지고 심사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중심으로 해 가지고 단합이 된 그 가정은 숨은 마찰이 많아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으로 하나되고 진리로 하나 된 가정이기 때문에 그 가정은 참 좋은  가정입니다. 그 가정은 이제 이상적인 가정이 됐겠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이 하나님과 진리는 멀어지고 인간끼리 인간저거끼리 인정으로  혈육정실로 같이 의식주를 하고 있으니까 그같이 동거정실로 전부 인간 거석으로  가지고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있으면 그 가정에는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가정이라 말입니다. 그 가정은 하나님과 진리를 접해  가지고 생명이 생기야 되겠습니다. 그 가정에 한 덩어리 된 거기에서 하나님과  진리와 한 덩어리 되는 이 생명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무슨 역사가 있어야 되겠습니까? 예, 생명을 가지고 난 다음에 무슨  역사가 있어야 되겠습니까? 예, 화목 죽은 덩어리에 생명을 자기가 가졌으면  가지고 난 다음에는 할일이 뭐입니까? 마구 죽은 것을 깨트려야 될 것 아니요.

죽은 것을 박살내야 될 것 아니겠소.

이러니까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까지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의논되는 것은  안됐다. 우리가 이렇게 단합되어서 이번에 무슨 사건을 만났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모두 한 덩어리 되어 이렇게 하자 하는데 그렇게 하는 그게 틀렸다 그래하면  안된다. 이래하자. 옳고 바른 것을 자꾸 주장하고 말을 하면은 거기에 그 가정에  삐뚤어진 것으로 한 덩어리 됐던 가정에 옳은 것이 거기에서 말하니까 삐뚤어진  덩어리하고 옳은 것하고 서로 마찰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마찰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마찰은 그 분쟁은 그 분쟁은 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 목적입니까? 죽은  것을 이것을 살리가지고 죽은 한 덩어리를 이제 산 한 덩어리로 만들려는  목적입니까? 산 한 덩어리로 만들려는 목적입니다. 산 한 덩어리로 만드는 데에는  먼저 죽음으로 더불어 마찰되는 마찰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이오. 부부간도 그렇소.

부부간도 그렇소, 형제간도 그렇소, 또 가족끼리 가족끼리도 그렇소, 제직들끼리도  그렇소, 교회끼리도 그렇소 그 사업 어떤 단체끼리도 다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 척 들어가면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면 안됩니다. 말을 하면 그  효력이 적습니다. 아주 불리해집니다. 예수 믿는다는 소리를 하지 안하고 그  들어가 가지고 진리와 영감대로 자기가 거기에서 삽니다. 그러면 자기 그  직원들끼리에 마찰이 생기겠소 안 생기겠소? 처음에는 안생기지 시키는대로 죄되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충성되이 잘합니다. 좋아합니다. 가다가 죄되는 그런 문제가  생겨집니다. 그거 삐뚜어진 것인데 그럴 때에는 그대로 하면은 마찰이 안되고 참  이제까지 상관에게도 부하에게도 좋다고 호평받던 사람이 고 잘못된 고것을 고들과  그와함께 해버리면 옳고 바른 것을 양보해서 삐뚤어진 그들과 한 덩어리 되어  나가면 그 화목 존경이 그대로 있을터인데 고게서 삐뚤어졌으니까 고것을 고대로  하지 안하고 부득이 참 안됐지마는 하나님과 진리를 버릴 수 없어서 고것을 바로  하려고 바른 주장을 하고 나는 그거 못하겠습니다. 깜짝 놀래 왜 못해요. 저는  아마도 이게 틀린기 같애서 이렇게 해야 되지 거래는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아, 이  사람이요. 안 그런 사람이 어데 있노. 요새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여 뭐서 뭐  부수입 그런걸 안보면 어떻게 살 수가 있노. 부수입을 봐야 되지, 그렇지만 뭐  저는 안하겠습니다. 가담 안하겠습니다. 네가 도장을 찍어야 될 것 아니요. 네가  도장을 찍어야 결제가 되나가야 부수입이 생기지 그 정도 도장은 못 찍겠습니다.

이러면 마찰 되겠소 안되겠소.

마찰이 되지 마찰이 되는데, 그 마찰이 되면은 하나님과 진리를 잊어버립니까? 그  모든 동직자들 잊어버립니까? 마찰이 되면 동직자들 잊어버리지 무엇 때문에  잊어버립니까? 자기 자존심 때문에 명예 때문에 자기 혼자 그 외롭게 나갈려고  무엇 때문에 그 동역자들에게 마찰을 당해 가지고 배척을 당합니까?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진리 때문에 고것이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 한 덩어리  되는 것입니다. 고때 고 한 덩어리 되는 것이요.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고만 돌룹니다. 저 사람 저거 순 아주 제가 선한채 하고서  그 가증스럽네 저것때문에 우리가 해먹을 것도 아무것도 못해먹을 새 이렇게  되어서 마찰이 되다가 자꾸 그 사람이 다른 모든 일하는 모든걸 볼때에 고것만  보면 그 사람과 대립이 되겠는데 다른 일 하는걸 보니 그 사람이 참 진실되게  모범되게 의롭게 옳게 바르게 하고 모본을 그 사람 본을 뜰만한 그런 사람인데  보니까 고 잘못될때는 안하거든 이러니 고게서 택한자가 있으면 그 사람이 얼른  나도 저 사람을 따라서 살아야 되겠다. 과연 그까짓거 부정해봤자 그거 가지고  무엇이 유익하며 자기만 자지를 더럽히고 그 사람 보니까 자기를 더럽히지  안하려고 자기를 깨끗이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이래싸니 그게 부럽지 떱떱하이  해 가지고 뭐 뭐 그 모든 부정한 것좀 먹어봤자 그게 뒤에 후회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차차 차차 그 사람의 하는 일을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존경하고  또 인정하고 그 사람 때문에 고만 그 과에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고 바로 돼  나가고 이러다가 잘못된 일로 인해서 들통이 났다고 아이들말로 들통이 나버렸어.

일이 나는데 다른 과에는 모두다 그런게 있어 가지고 뭐 면적을 당하고 다 형을  받고 이 야단인데 그 사람 있는 과에는 그런 일이 없다 말이오.

이 모든 사람이 그제야 그때 우리도 그 할라고 안했나 할라 했는데, 저 사람들이  들어서 방해를 해서 우리가 못하지 안했나 그때 우리가 저 사람 욕하지 안했나  지금 생각해보니 참 잘됐다. 이 사람때문에 잘됐다. 이리되면 그만 차차 차차 얼마  세월이 지나가니까 그 사람 존경한다 말이오. 우리도 묶여 들어갈 것인데 참 아무  것이 그것때문에 그렇다 처음에는 비쭉거리다가 나중에는 존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마찰되는 그 마찰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요, 그게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이요. 그 길은 핍박을 받으면서 핍박  끝에 큰 영광이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 끝에 환영이 오는 것입니다. 끄트머리  욕을 하면서 속 양심에는 그게 옳기는 옳다 환영하게 됩니다. 양심의 사람들이  양심에 인정을 받았다가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껍데기까지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인화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한 덩어리는 됐지마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다 손 떨어졌고 진리도 다 손 떨어졌어.

이러니까 저는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 말했지마는 "실상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것과 눈먼것을 네가 모른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떻게 하다가 이꼴이 됐습니까? 어떻게 하다가  이꼴됐지요. 뭐 화평 뭐 하다가 이꼴이 됐어. 뭐라하노. 인간끼리 합해서 자꾸  떠나가지고 본문을 떠나서 네, 흐리멍텅했다 그 말이오. 미직지근한 그게  원인입니다. 미직지근한 그게 원인이요. 미직지근한 것 미직지근한 것이 뭐이지요.

흐리멍텅한 것 흐리멍텅한 것이 뭐인데 구별안하는 것이지 구별없는 것이 그 모든  멸망의 원인이 됐습니다.

"네가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고 미직지근하여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  게욱질이 나서 너를 보지 못하겠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이렇게 좀 구별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  구별하는 사람이 되라. 미직지근하여 미직지근은 뭐이지요. 미직지근하다 말은  무슨 말입니까? 흐리멍텅하다 그 말이오. 흐리멍텅 성도는 구별하는 거기에서 오만  치료할 것이 다 나와서 치료가 되고 갖출 것이 다 나와서 갖춰지게 됩니다. 그  성도가 구별없으면 벌써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별할때에 공장의 도덕가지고 구별할라요. 대한민국 법가지고 구별할라요.

어떤 철학자의 철학을 가지고 구별할라요. 불교의 그 다른 종교의 그 법전을  가지고 구별을 할라요. 이 세상에 인간들이 말하고 살고 있는 그것가지고  구별할라요. 구별할라면 뭐 지식이 있어야 구별을 하지 그렇지 않소. 지식이  있어야 구별하지. 그거는 거 대해서 모르면 무슨 구별이 되겠소.

그러면 구별하라면 뭘로 가지고 구별할랍니까? 무슨 지식으로 구별할랍니까? 예.

네, 하나님의 지식 신구약 성경 말씀가지고 구별하지 그러고 난 다음에 그것을  가리켜서 이성 구별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 구별 이성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이성이 있는 것은 남자 여자를 가리켜서도 이성이라 하는데 그 이성은  다를이 자 성품성 자, 남자가 다르고 여성이 다르고 다르지 않소. 그걸 가리켜  이성이라고 말하고 또 다를이 자 성품성 자 아니 이치이 자 성품성 자 이치를  따지는 그런 성품이 우리에게 있다 그 말이오. 그 이성 이성가지고 이치를 알면  성경 이 지식을 지식의 이치를 가지고 이것을 따져 들어갑니다. 그것이 이성  구별입니다. 이성 구별 이성으로 구별하는 것. 이성 구별보다 더 나은 구별은 무슨  구별입니까? 예, 녜. 고다음에는 양심 구별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양심 구별이나 이성  구별이나 같은데 이성 구별과 양심 구별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요것을 잘알아요.

이성 구별은 자기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게 옳으나 틀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이성 구별이고 양심 구별은 자기를 생각지 안합니다. 자기를 떼놔버렸소. 자기도  생각지 안하고 누구도 생각지 안하고 그 모든 것을 떼롷고 자기도 내놓고 모든  것도 내놓고 순전히 마음 그것이 냉정스럽게 옳느냐 그르냐? 성경 말씀가지고  따질때에 그때 그것이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붙어 있을 때에는 양심이  못됩니다. 알겠습니까? 무슨 비판을 할때에 비판을 할때에 자기를 생각하면 양심이  안돼. 이성은 자기를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자기를 아주 던져  버려놓고 비판하는 것이요.

이러니까 양심은 자기나 남이나 그 관계가 같습니까? 자기는 좀 사정을 더 두고  다른 사람에게는 좀 멀고 자기에게는 가깝고 이리됩니까? 양심은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원수나 사랑하는 자나 그 비판에 대해서 조금 원근의 차이가 없는 고  마음을 가지고 비판할 때에 고것을 가리켜서 양심 비판이라 고렇게 말합니다.

또 이성 비판은 자기를 가지고 비판하기 때문에 원수에게 대한 비판과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비판과 같은 사건이면 비판할때에 누구에게 후하고 누구에게  박하겠습니까? 예, 원수에게는 박하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응 후하고 또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다른 사람의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당했을 때에는 그렇게  비판하고 자기가 그 일을 당했을 때에는 또 달리 비판하고 그러면 비판할때에  자기에게 대해서 사정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사정 두지 안하고 그렇게  비판을 하면은 고 비판은 고것이 양심 비판입니까 이성 비판입니까? 고거는 이성  비판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돼 가지고 비판하는 것이요.

또 자기에게 대해서는 도리어 박하게 비판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후하게  비판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후하게 비판을 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아주  박하게 비판하요. 고것은 양심 비판입니까 이성 비판입니까? 예, 고게 양심 비판이  아니고 이성 비판입니다. 고 이성 비판이 내게 다 사정을 두면 안되니까 다른  사람에게 사정두고 오히려 내게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려서 사정을 안두고  해야되겠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고렇게 좀 후하게 하고 자기에게는 각박하게  하는 고것을 고것이 나오기를 어데서 나왔습니까? 자기에게서 나왔습니까? 자기를  떠난 그 공평에서 나왔습니까? 자기 주관에서 나왔다 그 말이오.

그러면 고것은 자기를 후하게 하는 것과 오히려 다른 사람을 후하게 하는 것 고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낫습니까? 어느 것이 낫습니까? 자기를 후하게하는 것은  무식한 후함이고 무식하게 자기를 후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낫게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고등 착취자입니다. 자기를 더 유익하게 하려는 그 하나  방편을 이래 써 가지고 이래하기 때문에 그 수입이 크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는 자기라고도 각박하게 하지 아니하고 후하게도 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각박하게도 후하게도 하지 아니하고 또 사랑하는 자라고 후하게도  박하게도 하지 안하고 또 미워하는 원수라고도 후하게도 박하게도 하지 안하고  이거는 누든지 상관없이 고 사건을 사건만들고 고 사건만 사건대로 고것만 가지고  이렇게 비판하는 것 아무데도 접선없이 비판하는 것, 말하자면 지남철이 요래  있는데 요게 요게 쇠바늘이하나 있든지 쇠가 있든지 뭐 철사가 하나 걸렸든지  이러면 이놈때문에 그 지남철이 조금 그 끌려지니까 요게 빼딱해집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도 없으면 정남을 가리키지마는 무엇인가 자극물이 있으면  정남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장애물이 없는 고 지남철에는 정남을 가리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고거와 마찬가지로 아무데도 거리끼지 안하고 아무 사정도 없고 마찰도  없고 아무 것도 원인이 없이 다만 참 냉정스럽게 그것을 공평되게 딱 정가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이 양심 비판입니다. 양심 비판  처음에는 이성 비판 그다음에는 양심비판 그다음에는 이제 양심 비판으로 들어가면  영감 비판을 자기가 가집니다. 영감 비판되면 그 비판은 누구의 비판입니까? 예.

하나님의 비판입니다. 그 비판은 하나님의 비판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비판과 자기 비판이 꼭 같으면 그 일이 성사가 되겠소 실패가  되겠소. 성사되지 그 일이 무슨 실패 거기 실패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이성 비판 앞에는 무엇이 있지요. 뭐있지요. 이성 비판 앞에는 자기의  주관 비판 자율비판 주관 비판이 있습니다. 인간 비판이 있소. 인간 비판보다도  제일 못쓸 것은 무슨 비판입니까? 뭐 있겠지요. 응 비판안해, 와 비판안해. 욕심  비판, 욕심 비판 그거는 누구의 비판입니까? 마귀의 비판입니다. 미혹의  욕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욕심 속에는 무엇이 들었기 때문에 마귀가 들었어. 그래서  미혹의 욕심이라 이랬어. 미혹의 욕심, 미혹의 욕심, 미혹의 욕심 그런 사람들은  욕심이 그것이 그 왕이 돼 가지고 욕심이 중심이 돼 가지고 전부 자기 욕심을  표준해 가지고 자기 욕심하는 자기 욕심에 거리끼면 안된다. 자기 욕심에 맞으면  안된다. 전부 자기 욕심에 맞추도록만 하고 자기 욕심을 기준해 가지고 자기  욕심을 표준해 가지고 자기 욕심을 중심해 가지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마귀  역사입니다. 마귀 역사 고게 제일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세상 사람들은 전부 자기 욕심 위해 비판합니다. 자기 욕심에서  비판하다가 수양좀 있는 사람은 이것은 내 욕심 주장하고 내 욕심을 위주해서 하는  것이니까 다른 사람 볼때에 제 욕심 주장으로 한다. 한방 맞을터이니까? 아야  이거는 안해야 되겠다 안하고 슬쩍 돌려서 자기 욕심이 아닌 것같이 공의를 떼다  붙이고 이런걸 떼다 붙이고 이런 방편을 붙이지마는 속에 분석해 보면 자기  욕심이라 말이오. 그러면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 넘어간다 말이오. 우리 눈이  밝아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억울한 소리한다 하지마는 그것이 하나님이  보듯이 봐야 돼요. 보듯이 보고 그 사전에 모든 것을 방비해야 되지 사후에는  해서는 소용이 없다 말입니다. 욕심비판 고보다 나은거는 뭐입니까? 고보다 나은  것 주관비판 그 주관 비판은 그래도 어떤 것 하나 결정된 욕심 비판보다는 그래도  자기의 그 전체를 생각해 가지고 하다 보니까 좀 낫다 이거요. 좀 범위가 넓어  욕심비판은 하나 뿐입니다. 욕심 비판은 한군데 딱 한구덩이 빠졌다 그 말이오.

한구덩이 빠져버리고 그다음에 주관 비판은 고 구덩이 빼지 안하고 자기에게  대해서 이러면 내 명예가 어찌되노, 내 지위가 어찌되노, 내 가정이 어찌되노, 내  장래가 어찌되노, 자기를 갖다가 또 생각하니 어북 범위가 넓어진다  말이오.이러니까 그 비판은 조금 욕심 비판 도담은 조금 낫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관 비판 주관 비판 다음에는 뭐이지요. 이성 비판 이성 비판보다 그 위에  밝은 비판은 뭐입니까? 양심 비판 양심 비판보다 이제 완전 비판은 뭐입니까? 영감  비판 이것이 없어서 죽었습니다. 흐리멍텅한 것은 이것이 없다 그 말이오.

미직지근하다 그말은 이것이 없다 그 말이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직지근한 이것 때문에 죽었어. 미직지근한 것이뭐인데 이  구별이 없는 비판이라 말은 이거와 저거와 비교해서 판단한다 말아닙니까? 모든  것을 다 종합하는데서 자 인간만 생각하면 이렇지마는 창조주가 있는데 인간  좋도록만해 되느냐 안된다 그 말이오.

또 하나님하고 인간 좋도록만 이것만 생각하다 보니까 모든 만물이 있는데  되겠느냐? 만물에도 좋고 하나님도 좋아하시고 인간도 좋아하고 만물도 모든 것이  좋아하는 그것이 자유의 율법이라 그 말이오. 그러 찾아가는 것이라 그 말이오.

우리가 이러니까 비판이라 말이나 구별이나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미직지근하다  구별이 없다. 이거 콩이냐 팥이냐? 자 이것이 내 욕심이냐 성신의 욕심이냐?  이러면 천국의 유익이냐 세상에 유익이냐? 이렇게 하면 이 사람이 우선을  좋아하지만 장래는 이걸 알고 나중에 나하고 벌어지겠느냐 어찌되겠느냐 우선은 그  사람이 싫어하지마는 나중에 깨닫을 때에는 참 감사하다 이제 그 사람이  돌아오겠느냐? 전부 비판속에서 나온다. 비판 구별 비판이라는 말이나 구별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 말입니다.

그러면 미직지근한 것이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원인입니다. 미직지근한 것  미직지근한 것은 구별없는 것 미직지근한 것은 비판없는 것 권찰님들도 이걸 가서  가르치라 그 말이오.

또 중간반 반사들도 다니면서 자기 맡은 학생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라오디게아  교회가 와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지 모를기라 말이오. 대답하면 참 칭찬해주고  미직지근한 그것 때문에 죽었다. 미직지근한 것 때문에 죽었다. 이걸 가르쳐 놓고  미직지근한 것이 뭐이 미직지근한 것이지 구별 없는 것이다. 비판 없는 것이다.

구별이 몇 가지 종류의 구별이 있지. 제일 처음에 못쓸 것, 욕심 구별 또 고위에  고보다 낫은 것 주관 구별, 욕심은 어떤 사람 말이오. 돈 욕심이면 그만 자기  자손도 자기 명예도 지위도 생각해서 돈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표준해 비판하니까  그 비판이 제일 좁은 비판 아니겠소.

그러면 그 보다도 주관 비판이 하는 것은 자기중심이니 자기도 생각하고 늙어서도  젊어서도 또 구원도 생각하고 뭐 명예도 생각하고 좀 범위가 넓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비판이 좀 정확해진다 말이오. 또 욕심 비판 위에는 주관 비판 주관  비판 위에는 뭐입니까? 이 수건을 오늘 여 보니까 내가 수건이야기를 했더니만  누가 수건을 갖다 놨는데 호주머니에 보니까 수건이 없어서 이 수건을 내가  넣었는데 이거 여 누가 다른 사람이 갖다 논 이 수건을 내가 넣어놨군요. 이거 내  수건이 아니라 말이오. 여기에는 누가 수건 갖다 놓은 것 안 갖다 놔도 됩니다. 또  주관 비판 그거 외에는 뭐이요. 이성 비판 이제 이성 비판은 이거는 모든 자기  아는 이치를 가지고 비판합니다.

그러면 불교인은 불경지식대로의 비판할 것이고 그것이 이제 이성 비판입니다.

삼호에 이성 비판 또 그 위에는 뭐입니까? 양심 비판이지 양심 비판은 무슨 지식을  가지고 비판합니까? 내나 성경 지식가지고 비판하는데 그러면 이성 비판이나 양심  비판이나 같은데 뭐 다를 게 뭐 있는가 다른 점이 뭐입니까? 이성 비판은 자기가  주인이 돼 가지고 자기 중심을 돼 가지고 이와같이 비판하지마는 양심 비판은  자기를 떠나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떠나서 비판하는 것 그것이 양심  비판이요. 자기를 떠나 비판하니까 무엇이든지 그 원수에게 대해서 그 일을  비판하면은 과혹하게 비판하고 사랑하는 자에게 대해서 비판하면은 지나치게  비판하고 고만 자기에게 대해서는 너무 후하게 비판하고 이러니까 그것이 이성  비판 안됐는데 양심 비판은 그런걸 떠났다 말이오.

자기에게도 사정두지 안하고 원수라고 그런 선입적 관념가지지 안하고 원수든지  자기든지 다 내비 다 떼내 버리 버리고 이 사건만 보고서 바로 비판하려고 할때에  그게 양심 비판이 된다 그 말이오. 양심 비판이 더 정확해지지 어떤 그에게  마찰이나 충격을 받지 안하기 때문에 정확해진다 말이오. 그렇지마는 하나님한테  정확해집니까? 양심 비판위에는 뭐 있습니까? 예, 양심 비판위에는 뭐이요. 영감  비판.

그러면 비판이 몇 종류입니까? 다섯종류 우리가 무엇이 딱 닥치면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말도 닥치면 돼. 말 한마디 들으면 그걸 들을 때에 그말을 비판해야  되겠다 말이오. 그저 그 말이 들을 때에 좋습니다. 좋을 때에 비판해보면 자기  속에 영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양심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자기 주관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욕심이 좋아하는 것도 있다 말이오. 욕심이 좋아하는 것도 있어. 말  들으면 욕심 좋아하는 그 말이 있다 말이오. 욕심 좋아하는 것 자기가  사기협작으로 할라하는데 다른 사람이 와 가지고 자기가 사기 협작하는 그 일에  대해서 협조하는 말을 하니까 듣기 좋습니다. 듣기 좋을 때에 그것은 비판하면은  무엇이 듣기 좋아하는 것입니까? 욕심이 듣기 좋아하는 것이지. 그리 안하면 자기  주관이 듣기 좋아하는 것이지.

이러니까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접촉하는 것도 먼 것도 가까운 것도 전부 이  비판을 해 가지고 가야 한 것입니다. 쥐라는 놈은 구멍에 들어가 돌아다니  놓으니까 모른다 그 말이오. 쥐라는 그놈이 수염이 앞에 있는데 수염을 쏙 다  뽑아버리면 그만 그 바보가 되버리. 수염 가지고 요래 요래 흔들면서 요 전부  비판을 다한다 그 말이오. 터럭이 가지고 비판하는 것 수염가지고 비판하는 것  눈썹가지고 비판하는 것 동광가지고 비판하는 것 몸에 마찰되는 공기로 비판하는  것 이 짐승들도 다 비판을 해야 죽을때 안 빠지고 살아가지 그 비판 못하면 죽는다  그 말이오.

인간도 인간은 그보다 다 고급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비판가지고 하는데 욕심  비판을 하면은 욕심 구덩이에 빠져 죽을 것이고 또 주관 비판하면 주관 속에 빠져  죽을 것이고 주관적이니까 이성 비판하면은 이성속에 빠져서 죽을 것이고 양심  비판하면은 양심속에서 살 것이고 영감 비판하면은 영감속에서 천국을 누릴 것이고  그리되니까 이 비판없으면 안돼. 비판이 무슨 말이지요. 구별, 비판보다는  구별이라는 말이 더 고상하고 좋습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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