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

 

1981. 9. 19. 토새

 

본문: 요한계시록 3:14-17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노라

 믿는 사람의 욕망도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몸밖에 눈으로 무얼  보니 욕심이 나고 또 귀로 뭘 들으니 접하니 부럽고 이래서 자기 몸밖의 것으로  인하여 자기의 희로애락이 생기는 그 사람은 생명 없는 죽은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 안에서 희로애락이 나오는 그 사람이 그래도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자기 속에서 나오는 그것으로 인하여 언행심사가  되지를 아니하고 자기밖에 접촉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언행심사가 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은 대개 보면 움직이기는 잘 움직입니다. 어떻게 날랜지 어떻게  민첩한지 자기 환경에 붉은 것이 닥치면 얼른 자기가 붉은 것으로 변색이 되어  그것하고 하나 되어 보조를 맞추어서 울렁거립니다.

 또 비유컨대 검은 사람들이 있으면 얼른 그런 사람들을 따라서 그 사람과 같이 돼  가지고 움직입니다. 아주 민첩합니다 부지런합니다 날랩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자기 속에서 무엇이 나오지 아니하고 자기 밖의 주위 환경 자기형편 사정 거기에  맞추기는 잘 맞춥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 거기에 잘 맞추면 그 사람 민첩한  사람이라 그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  죽은 사람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 환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환경을 따라서 움직이고 환경이 하라  하는 대로하고 환경대로 살기 때문에 실은 그 사람이 자기 아닌 자기 주변의  환경이라는 자기 형편 사정이라는 그것에게 붙들려 가지고 거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 감옥에 들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현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상 현실주의자가 있습니다. 지상 현실, 이 땅 위의 현실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 지상 현실주의자입니다. 자기 현실을 자기 속에 있는 그것으로  다스리도록 하는 사람이 철학자인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은  주관주의자입니다. 그 철학자를 주관주의자라 합니다. 불건전한 신비주의자가 다  주관주의자입니다.

 기독자는 주관 주의자인데 객관 주의자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주관을  위주로 해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아닌 딴 것이 있다  말이요.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아닌 딴 것이 누구입니까? 주님이십니다.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데? 그 분을 알려면 그 분의 사진을 보면 알지. 그 분이 어찌  생겼는데? 신구약 성경에 보면 그 분이 어떻게 생긴 것을 대략 짐작할 수가 있지.

그 분을 똑똑히 보려면 영감을 받으면 그 분을 똑똑히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자기 환경이라는 이런 그 감옥 생활을 벗어나야 됩니다.

여기서 탈피돼야 됩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됩니다. 아주 재주 있고 날래고  부지런하고 민첩해도 그것이 자기 환경 따라서 움직이는 자이면 생명 없는 인간인  줄 알고 그렇게 상대해야 되지 그것이 무슨 민첩하고 날래고 부지런하고 하니까  그것이 무슨 주체성이 있고 무슨 진실성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썼다가는  큰 낭패 당합니다.

 왜? 그것은 나하고 만날 때에는 그렇지만 그것이 또 정작 일하려고 가서 현실  만나면 그만 현실의 사람이 돼 버리고 마니까 그게 무슨 인격의 지조가 있습니까.

 그저 이런 말씀을 자주 하니까 자기가 아는 것으로 된 줄로 알고 기억하면 된  줄로 알고 내가 몰라도 못 들어도 녹음기 틀면 되니까 그 안에 다 들어서 가르쳐  주겠지 하니까 깨닫게 하시는 영감도 가지 아니하고 실행하게 하는 능력도  그에게는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들을 때에 그때에 자기가 제일 고쳐지는 것이 많은 것인데  그때는 진리와 영감과 능력이 함께 자기에게 부딪힙니다. 이러니까 환경의  소산이라 환경의 피동의 사람이라 이 말대로 나는 그러면 어떤가?  지극히 작은 데에서 환경에 피동 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지면 어려운 죽이려고  하는 그 죽음의 환경 속에 들어도 죽음 그것에게 피동 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환경에 피동되는 그 일을 회개해서 환경에 피동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돼야 되는데 귀에 들리는대로 말 한마디만 들으면 이상한 사람 되어지고 눈에  하나만 보이면 이상한 사람되고 하나만 접촉하면 이상한 사람됩니다. 자기 처지와  형편과 사정이 변해지면 그만 자기가 변해져버립니다.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모든 사람이 환영할 때나 모든 사람이 배척할 때나  자기는 변하지 안하고 그것을 참고로 하여 양식을 삼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척하면  내가 배척받을 만한 그런 원인이 있는가 그걸 가지고서 주님에게로 들어가서 주님  앞에서 내가 무슨 그런 것이 있는가 살펴보면 배척한 그것에게 배척을 당한 피동된  사람이 됩니까? 배척 그것을 가지고서 배척될 만한 원인이 있는가 해서 그걸  살피니까 배척 그것을 잡아먹었소? 배척에게 잡아 먹혔소? 어찌 됩니까? 배척을  잡아먹습니다. 환경과 주위를 잡아먹었습니다.

 이것이 기독자인데 말씀을 들을 때에 나는 환경에 따라서 피동 되는 사람이라,  환경에 피동 되는 사람이라면 앵무새 모양으로 그것을 기억하면 된다 또 그것을 그  자리에서 알면 된다 아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에 갇히지 아니하고 환경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환경을 양식으로 먹고 그 환경을 자기가 이용하고 그것에게  피동되지 안해야 된다는 요 진리를 알았으면 자기가 그런 사람인가 그런 사람  아닌가 과거도 생각해보고 미래도 생각해보고 생각해보면 사람이 요 일호를 다  완성하고 이호에 착수되는 것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무 구별 없는 사람으로 산다, 그보다 나은 것은 욕심이 구별하는  자로 산다, 그보다 더 나은 자는 주관이 구별하는 자로 산다, 그보다 더 나은 자는  자기 이성 구별로 산다, 그보다 나은 자는 양심 구별로 산다, 그보다 나은 자는  영감 구별로 산다, 이렇게 하는 이것이 이것 다하고 난 다음에 저것 하는 그런 것  아닙니다. 여기서 이것 다 완료하고 그 다음에 옆에서 요래 요래 걸어올라 가는 것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이렇게 올라가는 것 아니고 붙어서 옆에서 이렇게 갑니다. 6가지가  다 한몫 됩니다. 이것 조금 되면 저것도 조금 되고 그 다음에 요것도 조금 되고  조것도 조금 되고 요것도 조금 요것도 조금 되는 이러기 때문에 어디까지 나아간  바울도 이것이 있습니다. 없는 것 아닙니다.

 그 사람이 중생된 사람이면 못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요것도 조금 있는 동시에  영감 비판도 조금 있습니다. 택한 자면 중생된 사람이면 없는 것 없다 말이요  조금이라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는 그것도 큰 영감 비판인데 그  비판이 없으면 그것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자기가 어디까지 되었다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런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으면 자기는 벌써 그 면이 죽습니다.

 아무리 손이 건강해도 이 건강한 손에 피와 신경과 이 호흡이 거기 안 가면 이  숨쉬는 것이 이 손가락 끝에 가서 멈추어집니다. 이 손가락 끝의 세포가 숨쉬는데  같이 따라서 호흡하지 아니하고 이 신경이 움직이는데 같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여기에 있는 피가 거기에 같이 움직여 피가 그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그 손은 마비돼 버리고 말고 마지막에는 병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안팎에 눈을 가지라 하는 그 말이 하나의 비유인데 안팎에  대해서 살피는 것도 또 검사도 조사도 모든 설비도 경영도 역사도 안팎에 다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자기가 깨닫지 아니하고 예수 믿는 일을 어디서 하겠습니까. 기분 가지고  무슨 예수 믿는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은혜 받는다는 것이 제 기분에 맞는  소리하면 된 줄로 압니다. 돈을 중심 하는 자에게 돈 얘기하면 잠이 퍼뜩  깨입니다. 그렇게만 예수 믿으면 항상 모래 위에 지은 집 자기 위에 지은 집 세상  위에 지은 집이지 하나님 위에 지은 것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자, 나는 그러면 환경의 지배를 안 받나.' 이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나게 하니까 화가 납니다. 이것이 우리 평생 싸움입니다.

이것은 무구별, 구별하지 않는 환경에 피동 되는 환경에 따라서 비판한 환경이  나를 비판해 줍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시키는대로 하고 환경이 비판해 주는대로  환경이 이것을 옳다 하면 옳다 하고 이것은 해야된다 하면 하고 안해야 된다 하면  안합니다.

 그것을 어떤 그 설교자가 비유하기를 어떤 부자간에 당나귀를 팔러 갔는데 몰고  가니 옆에서 흉보니까 고치자 또 말하니까 고치자 마지막에는 둘이 타고 가도  안되고 당나귀를 걸리어 가도 안되고 이러니까 할 수 없이 발을 묶어서 둘이 메고  가자 하여 메고 가니까 메고 간다고 야단이라 그러면 어찌 해야 되겠고. 그 나귀를  내버리고 가면 또 저 어리석은 놈 나귀를 내버리고 빈손 들고 가네 하고 말할 거라  그 말입니다. 그렇게 비유한다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별 없이  흐리멍덩한 사람되면 그만 볼일 다 봤습니다. 전부 헛일입니다. 그런데 구별이  없어도 안되지 있어도 구별이 종류가 많기 때문에 종류를 잘못 선택해 놓으면 또  절단되지 이러니까 문제라 그겁니다.

 자기 주위 환경이 구별해 주는 그 구별대로 사는 사람은 환경이라는 그 속에  갇혀서 자유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자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불렀는데  세상에 대해서 자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자기 주위 환경이 구별해 주는  그 구별대로 사는 사람은 환경이라는 그 속에 갇혀서 자유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자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불렀는데 세상에 대해서 자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자유하면 어디에 붙들린 사람됩니까,  진리에 붙들린 사람되고 진리와 하나님에게 붙들렸으니 완전에 붙들린 사람인데  완전에 붙들려서 완전이 됐으니까 하나님에게도 자유입니다. 진리에게도  자유입니다.

 자유 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이 자유를 잘못 깨닫고 악의  자유에게 사로잡힌 사람으로 이렇게 삽니다. 악의 자유가 성장되면 예수 믿는  사람은 갋을 수도 없습니다. 어디에 매인 데도 없고 붙들린 데도 없습니다. 참  자유하도록 불렀는데 그 사람은 아무 데도 붙들린 데도 매인 데도 없습니다. 악의  자유, 그것은 죽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이 환경의 소산이 되나 안 되나 이것을 인해서 자기가 날마다  싸웁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추켜올리니까 입이 벙긋거리고 좋아합니다. 그것은  누가 주는 비판대로 하는 것입니까, 누구의 비판입니까, 환경의 비판입니다. 다른  사람이 추켜올리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게 쑥 올라갑니다. 다른 사람이 너를  죄인이라고 매장을 시키고 마구 이렇게 정죄하고 저렇게 정죄 하니까 그만 쑥  내려갑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정죄를 해도 그것을 이용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정죄  하면 내가 죄가 없는가 있는가 살펴보자 내가 죄야 물론 다 있지만 그 면에 대해서  제가 살펴 볼 때에 죄 되는 게 있으면 얼른 고치니까 그것으로 말미암아 양심이  살이 쪘습니다. 죄인이라고 말하는 그 말로 인해서 자기는 생각 못하던 죄를  찾아서 고쳤으니까 그 죄인이라는 그 말을 먹고 자기는 그걸 고쳤기 때문에 아주  살이 찌고 장성해졌습니다.

 보니까 그 면에 대해서는 죄가 없어 죄가 없으면 또 내가 만일 죄가 있었으면  어쩔뻔 했느냐 거기 대해서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됐으니 앞으로 거기 대해서  방비가 튼튼해지겠고 이기는 힘이 튼튼해집니다. 또 살찝니다. 세상은 우리의  밥이라 말하는 것이 환경이 밥이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헐 때에 치켜올릴 때에,  자기에게 무슨 일만 하나 있으면 그만 거기에 피동 되어서 금방 담대한 사람됐다가  금방 비겁한 사람됐다가 금방 소망이 튼튼했다가 금방 절망됐다가 금방 우쭐하게  올라갔다가 금방 또들다가 절단이 났다가 합니다. 이렇게 환경은 번개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위 환경은 번개같이 변합니다.

 번개같이 변하는데 거기에 따라서 변해지니까 이건 제가 봐도 사람이 아무 지조도  없고 의지도 없고 심지도 없고 뭐인지 모르겠다 이겁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겠습니까.

 그 사람을 대항해서 얼굴빛 하나만 변하면 그만 거기에 충격 받아서 딴  사람됩니다. 우리가 요것을 벗어나야 됩니다. 이걸 벗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공산주의가 너 예수 믿는 것 내놔라 내놓지 않으면 죽일 거다 할 때에 그 환경에  제가 피동 되지 아니하고 됩니다. 환경에 피동되지 않으려고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애를 써서 그것을 이겨 보는 사람은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기를 공산주의나 뭐이나 그런 자를 만날 때에  자기에게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기지 안하도록 기도합니다.

 두려움이 생겨지면 그것에게 피동 되는 것이라 말이요. 그것이 두렵게 해 주니까  두렵게 하는 그것에 비판돼서 그것 비판대로 그것이 나에게 판단해 주는대로 내가  두려워 하는 사람이라 말이요. 그럴 때에 그것에게 피동되지 않도록 해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장기간의 고문과 고행이 있을 때에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그런 고문과  고행이 있을 때에 그때에 그 아픔에 내가 피동될까 아픔 그 놈이 나에게 너는  이렇게 이렇게 아픔을 가지고 아픔의 판단을 해서 너는 아프지 아프다 해라 판단해  주니까 그 아픔에 내가 피동되고 아픔이 판단해 주는대로 거기에 따라 움직인다  말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자기 평소 생활 지극히 작은 보편 생활에서 자기  주위 환경에 피동 되지 아니하고 자기 속에 있는 그 비판에게 피동되고 그  비판대로 살고 자기 현실 그 비판대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 투쟁에서 제  투쟁이 이겨져 가는 것이지 이것은 하지 아니하고 거기서 하려고 하는 그것은 다  헛일을 하는 것입니다. 삼천미터 산을 올라 가려는 사람이 한자국 한자국 기어서  올라가면 능히 올라갈 수가 있지만 그것은 하지 않고 삼천미터 산에 자기가 당장  뛰올라 가겠다고 한 번 훅 뛰어가지고 올라갈 수 있습니까? 제가 나는 새입니까?  안된다 이겁니다. 꼭 그와 같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기가 보편 때에 아무 구별 없이 자기 주관 구별은 없이 환경 주위 그것이  나에게 비판해 주는 그 비판대로 하니 칼을 갈며 이제는 죽는다 사자 구덩이에  넣으니까 죽는다 하는 그것이 역사 통계에 피동되는 것입니다. 사자 구덩에  들어가서 안 죽는 사람 있는가 다 먹혀 죽었지 그게 역사 통계라 그러나 다니엘은  안 죽었다 이겁니다.

 우리는 역사에게도 통계에게도 환경에게도 모든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이  자연에게도 우리는 피동 되지 아니하고 피동되지 아니하려고 거기서 노력을 하며  애를 쓰는 것입니다.

 유행이 뭐입니까. 유행을 만들고 따르는 자는 속에 생각 없는 인간이요 생명 없는  인간입니다. 이러니까 유행 그걸 사용 안할건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유행을  가집니다. 너무 그 유행에 거리가 멀면 그 사람에게 구역질이 나고 아예 삼가해서  가까이 접하여 주지 않으니까 사람 구원을 못하겠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서지도 말고 뒤서지도 말고 그 중간을 가는 게 좋습니다. 그 말은  한OO목사님한테 내가 그걸 배웠습니다. 시대에 앞서지도 말고 뒤서지도 말고  중간을 가는 게 좋습니다. 할 때 내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이는  자기가 실천해 본 사람의 교훈입니다. 그 교훈을 가르쳐 준 그 선생님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는 내가 계속 그 분을 이해서 매일 한 번씩  기도했습니다.

 태순직 목사님이 내가 장립받을 때에 안수했기 때문에 그 목사님이 지금도  살아있는고로 내가 매일 그를 위해서 한 번씩은 기도합니다.

 그 뒤에 그 사람이 영의 문제 가지고서 중생된 영이 범죄 하니 않는다는 것은  이단이라고 대한 신학교에서 가르쳐서 정0 목사하고도 서로 대립이 되어서  승강이를 했답니다. 그래도 하거나 말거나 나는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자이기  때문에 그 은혜 입은 거기에 대해서 사은에 대해서는 내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이랬는데 미국 가도 별 것이 없던 모양이라 미국 가서 지금 어떤 신학교의 교수로  나간다든가 강사로 나간다든가 나가는데 그 신학교에서 유력하답니다. 유력한데  이번에 그 신학교의 총무로 있는 사람하고 그 분하고 둘이 나를 초청하려고 역부러  나왔어. 그 신학교에 와서 보름만 가르쳐 달라고 합디다.

 우리가 환경에 피동 되지 않으려고 지극히 작은 성질이라도 '아, 요것은 보자  내가 이 환경에 피동인가 환경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 하는대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한다고 저렇게 하고 이 환경 시키는대로 내가 비판해서 평가해서 구별해서  움직이는 자가 아니냐 환경이 비판하는대로 지금은 두려워해야 된다. 지금은  죽는다.' 그것이 나에게 알려주는대로 내가 알고서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환경에  피동입니다.

 내가 이런 말 한마디에 피동 되고 사람이 한 번 웃어 주는 웃음 하나에 내가 피동  되고 사람이 나를 욕 한마디 하는데 피동되고 내가 어떤 사건에 피동되면 내가  죽음이 앞에 닥쳤을 때에는 어찌 되겠느냐 그때에 그걸 생각하면서 자기가 한 번  달아봅니다.

 거기에 피동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피동되려고, 그것이 지극히 작은 것에서  환경피동이 안돼야 지극히 큰 데에도 환경피동이 안됩니다. 지극히 큰 환경에도,  공산주의가 둘러 싸서 죽이려 해도 그게 참 큰 환경이 되겠는데 그 환경에도  자기는 피동이 안돼야 환경피동이 안될 수가 있다 이겁니다. 안되는 건 여기서부터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녹음기 틀어놓고 저는 누워자고 어찌 하든지 그것만  틀면 되지 싶으니까 영감 없는 말만 아니까 그 말이 뭐요? 지식이라. 영감없는  지식은 참 아는 지식이 아니고 그런 지식을 가지니까 영감없는 지식은 뭘  만듭니까? 영감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어떻게 만든다고 했습니까? 교만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자기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으로는 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해줍니다.

 이러니까 다른 사람을 가르치지만 자기는 가르치지 못해.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지만 어리석게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나 영감만 가르치는 것이나 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기 때문에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은 가르칠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영감이 와야 자기를 가르치는 것이지 영감이 없으면 그 지식은 자기를 못  가르칩니다.

 이러니까 아무런 비판 없이 환경이 올라 하면 우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울고  환경이 벌벌 떨라고 하면 떠는 게 옳은 줄 알고 떠는 것입니다. 환경의 비판에  피동 되면 저희의 모든 행동은 거기에 피동 되는 것입니다.

 그 보다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욕심의 비판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욕심이 비판합니다. 돈 욕심이든지 자기 명예 욕심이든지 무슨 정욕 욕심이든지  안일 욕심이든지 식욕이든지 뭐이든지 그 욕심이 자기 현실을 비판해 줄 때에 그  욕심의 비판대로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자기에게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욕심 그 놈이 구별합니다. 돈 욕심 내는 사람은 그 돈 욕심 그것이  들어서 구별합니다. 이러니까 어떻게 좋은 것이 와도 돈수입 없으면 물리칩니다.

신앙을 팔고 하나님을 팔아도 돈이 수입되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만 그대로  합니다. 그러면 돈욕심 물욕이 표준이 되어 물욕이 자기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해 주는 그대로 나아가는 사람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그래도, 비판없이  환경비판을 따라가는 사람은 욕심비판의 사람에게 먹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정서도 있고 욕심도 있고 기억도 있고 비판도 있고 이성도 있고  양심도 있고 여러 가지 요소가 모여 있는 것이 우리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마음 만에는 여러 가지 마음이 있는데 다른 마음은 다 배척해 버리고 단지 욕심  하나 요것만 가지고서 주장하니까, 자기 그 마음속에 여러 가지 주장이 있고 여러  가지 사상이 있고 요소가 있고 성질이 있고 다 있는데 물욕 하나가 주장해 가지고  살면 자기 마음속에 있는 다른 요소들이 다 활동을 합니까 못합니까? 남반에 한 번  대답해 봐요. 저 김OO조사님 대답해 봐요. 활동합니까 못합니까? 봐요 이러니  말입니다. 그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물욕 뿐이라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면  그 사람에게 있는 양심이 활동할 수 있소 도덕심이 활동할 수 있소 명예심이  그에게 활동합니까? 물욕의 사람이 명예심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 다  죽었다 말이요 모든 것 다 죽고 욕심이라는 욕심 속에 자기는 딱 갇혀서 욕심을  벗어나지 못해 욕심이 하라 하는대로 해 욕심에게 불끈 사로잡혀서 욕심을  벗어나지 못해 욕심이라는 감옥에 삼켜져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그래도 아무 구별 없이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보다는 자기 속에 뭣이 있는  것이 자기로서는 어느 것이 부자입니까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 자가  부자입니까 욕심으로 사는 자가 부자입니까? 예, 욕심으로 사는 자는 욕심 그것  하나라도 자기에게 있지만 환경에 따라 움직이는 자는 욕심 그것도 없는 자라 죽은  자라 아무 것도 속에 없는 자라 진공인 자라 생명이 없으니까 그저 이것이  거머쥐고 흔들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마치 생명없는 큰 떼목  한가지입니다.

 아마도 잠은 자는데 내가 보니까 조는데 이 진리를 들으면 생각하면 이치를  자기가 깨달아서 아멘 아멘이 되야될 것이고 거기서 능력이 나와야 될 것이고  이제는 이것은 변동 못한다 이렇게 확정이 자기에게 생겨지고 최고 회의처럼  자기의 모든 절정이 지금 결정을 지워 나가는데 무슨 잠이 올 것인가 잠이 오는  그것은 다 헛일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욕심 비판으로 살다가 이제는  주관 비판으로 삽니다. 주관 비판으로 산다 말은 자기가 왕이 돼가지고 이제 자기  전체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비판합니다. 자기 주관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율로  비판하는 것이요 자기 소견으로 자기 의견으로 자기 지혜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  경험으로 자기 체험으로 자기 생각으로 비판하는 것이니까 그 비판은 자기의 눈만  알고 코만 알고 발만 알고 명예 욕심만 알고 물욕만 알고 이 욕심 저 욕심 모든  것을 자기에게 따른 것은 골고루 다 생각하면서 비판하겠습니다.

 주관 비판하는 것도 자기에게 있는 그 전체를 생각하면서 비판하기 때문에 욕심  하나에게 붙들린 자가 이제 조금 더 넓은 범위로 나왔습니까 좁은 데 더 갇히게  되었습니까? 넓은 범위로 나왔다 이겁니다.

 이러니까 욕심 그놈이 혼자 단독이 판단하는 대로하는 사람이 이제는 물욕 이것이  비판하니까 자기 옆에 있는 명예욕이라 하는 것이 하나 딱 나와 가지고, 안된다  물욕 네대로만 하면 안된다 내 명예욕에게 그 물욕은 걸린다 물욕에는 맞아서  돈벌이는 되지만 내 명예는 절단 난다 하면서 명예 욕심이 와 가지고서 안된다고  시비를 합니다.

 명예 욕심하고 둘이 의논해서 판단하고 보니까 여기에 도덕욕심이 와가지고서,  너가 일시 다른 사람이 어리석어서 속아서 네 명예가 올라가지만 내 도덕에 틀린다  하면서 도덕심이 또 와가지고 안된다고 이의를 겁니다.

 이 셋이 합작을 해 가지고 하니까 너희의 그 도덕이나 명예나 그것이 제대로는  옳고 바로 되어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게 속이고 그 모든 조화를 부려 가지고서  인간들을 속여서 그렇지 그것이 참 옳게 바르게 바로 됐나 양심에 거리낀다 양심  내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하면서 양심이 시비를 겁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여럿이 회의를 해 가지고 둥글둥글 회의를 하다가 그래 이것이  옳다 해가지고 나가는 게 뭐이냐 하면 주관비판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주관 비판으로 사는 사람은 그래도 자기 전체는, 팔에도 한 번 가보고 눈에도 한  번 가보고 다리에도 한 번 가보고 명예에도 한 번 가보고 도덕에도 한 번 가고  양사방에 가서 서로 회의를 해가지고 일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하지만 제가 아는 지식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 인간의 지식이라  하는 것이 극소수 아닙니까. 인간의 지식은 아주 좁고 얕고 수가 적고 이렇습니다.

우리 지식이 뭐 얼마 됩니까.

 이런데 또 그 지식이 무슨 지식이요? 마귀가 준 지식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된  마음에서 나온 지식입니다. 마귀가 주는 그 지식 가지고 비판하니까, 자기 주관  비판 그런 것 하니까 그 비판이 마귀적이 됩니다. 그것이 주관 비판입니다.

 주관 비판 거기서 벗어나서, 안됐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미련한  자가 되어져라 자기를 부인해라 이래야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 드린다고 했다 내  지식으로 해도 안된다 성경지식이 뭐라 하는고 보자 하면서 이제 지식을 바꿉니다.

 자기에게 있는 성경 지식을 가지고 이 모든 철학자니 도덕가니 다 치우고 이제는  그 사람이 좀 잘 믿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서 성경지식을 가지고 이제 비판을  합니다. 성경지식을 가지고 비판하는데 성경지식을 누가 사용합니까? 자기가  사용한다 말입니다.

 주관 비판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지식을 이용해 가지고서 비판하고 구별하는  것이고 기독자가 이성비판에 나아가는 것은 내나 자기는 자기지만 이제 잣대를  바꾸었다 그 말입니다. 저울을 바꾸었습니다. 자기지식 주관지식 인간지식 이것을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지식은 정확치 않으니까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꾸었다 이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저희 아이들이 저울 하나를 갖다 줬는데 그 저울이 벌써 15년이  넘으니까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맞았다가 안 맞았다가하여 그 저울이 정확치 못해  집어던져 버리고 이제 저울 하나 사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정확합니다. 노후하면  못쓴다 말이요. 그 저울이 틀리면 모든 것이 틀려집니다. 이러니까 거짓말 안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인간 지식이라는 이 저울 가지고 하니까 정확치 않다 비판이 정확치 않다 구별이  정확치 않다 평가가 정확치 않다 이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해야 되겠다 저울을 바꿨다 그 말입니다. 잣대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잣대만 바꾸었지 자기는 바꾸지 안했습니다. 이러다가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 다음에 양심 비판 해보니까 남의 일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것이  정확해지고 그 일이 내게 닥쳤을 때에는 비판이 달라집니다. 백 년전 천 년전 그런  것은 비판해 보면 딱 들어맞습니다. 노아가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이 옮다 이렇게 되어졌는데 왜 나는 지금 오늘에 순종해야 된다는 이것이  안되어지나 이것이 어디서 무슨 고장이 나가지고 이 비판이나 평가가 바로 되지  아니하고 무슨 자극을 받아서 그렇게 됩니까? 자기 자극이라 말입니다.

 이러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만 가지고 그 사건을 비판해야지 자기  사정 또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사정 또 원수에게 대한 복수 이런 것을 가지고  비판하니 그것이 정평 정가가 안됩니다.

 이제는 그런 것 다 부인하고 냉정스럽게 아무 데도 충격 받지 아니하고  하후하박이 없이 모든 걸 다 진공 시켜 버리고 하나님 말씀 가지고 비판할 때에  그것이 비로소 양심 비판이라 그 말입니다.

 양심 비판에 나아갈 때에 자기라는 감옥을 완전히 벗어나 버립니다. 욕심감옥도  벗어났고 자율감옥도 벗어났고 자기감옥도 벗어났습니다. 벗어났지만 하나님 말씀  가지고 이와같이 아무데도 자극받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있는 그 진리지식을 가지고  비판했지만 그 지식은 한정이 있는 것이고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한정 있는 데만 알지 그 이상은 옳다 인정을 해도 인정하는 것이 유한한 인정이지  무한한 인정은 안된다 이 말입니다. 인정해도 인정하는 것이 저울로 달면 천층  만층이요 중량이 다 다르다 그 말입니다. 인정을 해도 자기 주관적인 자기적인  인정 그것은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보다 큰 것이 오면 퍽 깨져 버리고  맙니다.

 영감의 인정이 와야 마귀가 완도 세상이 와도 우주가 와도 영감 비판으로 비판해  놨기 때문에 무한의 비판을 했기 때문에 유한한 것들이 와서 이렇다 저렇다 아무리  쑤셔 봤자 그까짓 소리에 피동이 되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감 비판에 가지 않으면,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나 이로 이해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나 이로 인해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이 틀린 것은 다 발견해  버리면 이제 의로운 것이 될 것인데 양심이라는 이것이 유한해서 하나님은 틀렸다  하는 것이 있는데 내 눈에는 틀린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롭지 않다, 하나님은  이래야 완성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요만큼 해 놓고 그 위에 어떻게 해도 완성이라는  것이 보여지지 안하고 알지도 못하고 하기 때문에 나는 의롭지 못하다 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는 그것이 양심 비판 양심구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의  갈급입니다 겸손입니다.

 이래서 요것 하나만 가져도 사람을 접촉할 때에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  시키는 대로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이 말하는데 누가 코치해 가지고 누가 배경에서 조절해 가지고 이  말 하느냐, 환경이 조절했다 자기 욕심이 조절했다 어떤 욕심에서 동기가 되고  어떤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주관이 조절했다 주관이 배경이고 주관이  근원이다 이 사람은 그래도 제법 범위가 넓다 이 사람은 이성이 지금 주관하고  있다 이 사람은 말하는 것이 자기 양심이 주관하고 있다 아니다 이 사람은 양심이  주관하는 게 아니고 영감이 주관하고 있다 영감으로 지금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영감이다 바로 하나님이 지금 말하는 영감이다 영감이 이 사람의 배경이 되고 그로  인해서 움직이고 있다 영감이 그 주장이다, 여러분들이 이 안약을 눈에 바르면  환하게 보인다 그 말입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 이 안약을 바르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환하게 안다  이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대로 말하면 본인은 억울하고 분하다고 말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나타나고 맙니다.

 이것이 되면 주님을 영접합니다. 아멘의 주님을 내가 영접합니다. 아멘의  주님에게 내가 순종해서 그와 연결되니까 아멘의 주님과 연결되니 나는 아멘의  사람이 됩니다. 거기서 자랍니다.

 일편단심 하나님의 뜻 이루는 것 그것만이 자기 소원이라 하나 이루어지니까  그만큼 자라지 둘이 이루어지니까 그만큼 자라지 그것이 몇 번 넘어가 가지고서  아멘에서 자기가 자란다는 것을 명상하고 새김질을 해서 과연 아멘에서만 나는  자라지 딴 데서는 자라지 못한다 하는 걸 자기가 바로 깨달았으면 교인이 됐다  그겁니다. 아멘의 주님을 내가 믿고 순종하니까 내가 아멘의 사람이 됐습니다.

아멘은 그 상대가 하나님이십니다.

 충성의 주님에게 내가 충성하니까 충성의 주님과 내가 연결되니 내가 충성의  사람이 됐습니다. 어디에 충성합니까? 주님은 아버지에게 충성 나는 주님에게 충성  이러니까 아버지 위해서 자기 있는 것 다 기울여서 움직이니까 아버지의 모든 것이  주의 것이 되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능력이 주님의 능력이 되어졌습니다.

신인양성일위의 능력이 다 돼 버렸지. 그 신성이 주님의 인성의 아버지지.

 우리가 자기의 기능을 이 세상에서 성장시키는 것은 무슨 기능인가? 진리의  기능이지 성령의 기능이지 성령의 기능을 진리의 기능을 자기 기능으로 삼아  가지고 실력 있게 만드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진리의 기능과 내 기능이 연결이 되어 진리의 기능이 내 기능이 돼  버리고 진리의 기능에 내가 접이 붙여 가지고 진리의 기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데에는 어떻게 해서만 됩니까?  놀면서 찌꺼기 가지고 주님에게 해서 됩니까? 영생이 안된다 했습니다. 마음 목숨  힘 성품 뜻 이것 다 할 때에 영생이 됐다 그 말입니다. 다 할 때에 생명에  연결됐다 그 말입니다. 다 할 때에 하나님과 연결됐습니다. 영생은 뭣이  영생입니까? 하나님과 진리와 하나 되는 그것이 영생 아닙니까?  이러니까 충성에서 자기의 실력을 기른다는 말을 속의 뜻도 뭣도 아무것도 모르고  가르치니까 됩니까? 오래 전에 내가 청량리 교회에 가니까 김OO라는 사람이, 그  남편은 명치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 사람이 내가 한 번 가니까 목사님, 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강단에서 가르치는데 자기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알고 말하는 것 모르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모르는 말을 전달하고 있으니 교역자 깔만 보이고 업신만  여겨지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합디다. 여기서 그런 교역자  많지요.

 충성에서 자기 실력을 기른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새기고 새겨서 논리적으로 알고  있어도 힘이 나옵니다.

 그러나 자기가 참 충성을 할 때에 객관의 능력이 자기에게 와서 자기와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하는 그 사건에 객관의 능력이 와서 연결이 됐을  때에 그 일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자기에게 능력이 온 것을 확실히 볼  수가 있고 그 능력을 환하게 자기가 가졌다 말이요 잡았다는 말입니다.

 언제 이OO목사님이 그렇게 그렇게 말합디다. 누구의 설교는 어떻고 어떤데 하면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의 설교는 체험의 설교라 하는 것을 우리가  실제로 느낍니다 그 말을 들어보면 그 말이 들려지지 안하는데 실지로 해보니까  그것이 나옵디다 아무 것이 설교는 체험의 설교다 또 김현봉 목사님에게 따라  다니는 것은 그이의 설교도 체험의 설교이기 때문에 참 맛이 있어서 따라  다닙니다, 그렇게 말합디다. 들으면 알 수가 있습니다. 충성에서 자기의 실력을  기릅니다.

 참된 증인이라 말은 뭘 증거 한다 말입니다. 증거 하는 것은 무엇 증거합니까?  하나님 증거하지. 예수님이 하나님 증거외에 딴 것 한 것 있습니까? 그게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에게 갖다 준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보자입니다.

 이분을 믿음으로 이분과 연결이 되니까 나도 이분과 같이 참된 증인이 됩니다.

참된 증인이 뭣하는 것입니까? 가감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그대로 전달하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전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전달하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지식을 그대로 전달하는 이러니까 참된  증인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마련이 됩니까? 우리 O목사님, 뭣 마련됩니까? 그래 자기  지위 마련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이 사이는 누가 끼여야 되고 요 사이는 누가  끼여야 되고 여기는 이것 끼여서는 안된다, 다른 것 가지고는 영광됩니까 아 내가  거기에 들어가겠습니다. 한 번 가보니 안 맞아 틀렸어, 이 세상에서 그 일 하면 그  자가 거기에 갑니다. 세상에서 그 일 안한 자가 거기 갈 수 있습니까. 그 일 하던  그 자가 거기에 간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한 지위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말만 들어 가지고 생각해 보지도 아니하고 뜻도 깨닫지도 못하고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하지도 못하고 설교를 하니까 거기에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과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되는 그 위치를 마련하는 것이라 그것이  영원한 지위입니다.

 창조의 근본 되신 그 분을 내가 인정하고 그 분을 따라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그  분 같이 돼 버렸지. 창조의 근본 되신 그 분을 따라서 나도 그로 말미암아 창조의  근본되신 이와 연결된 창조의 근본자가 돼 버렸어. 예수님께서 창조의 근본되시니  그와 연결이 됨으로써 그 분의 것이 다 자기의 것 됐습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자기 것 삼은 그 분과 나와 연결되니까 그 분의 모든 것이 내 것  됐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피조물을 만날 때에 피조물을 거머쥐고 일하는 자는 헛일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거머쥐고 피조물을 달래면서 너 나하고 같이 살지 내 것 되자  아무리 꾀워봤자 그것은 주권이 없고 권세가 없습니다. 그 주인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우시장에 가니 소가 있습니다. 소가 보기 좋으니까 우리 집에 가자 달래면서  쓰다듬으면서 하루 종일 쓸어 주고 이것은 우리 소라고 하면서 누가 오니까 눈이  벌렁벌렁 거리며 야단을 지깁니다. 정신 빠진 사람입니다.

 소를 꾀우고 하도 쓰다듬어 쌓니까 소도 좋아서 꼬리를 흔들고 좋아합니다. 소와  암만 친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소에게 꼴을 또 갖다 줍니다.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나중에 파장이 되니까 눈에 보이지도 아니한 사람이 거기 오니까 고삐를 척 끌려서  손에 쥐어 주면서 몰고 가십시오 이러니까 그 사람이 몰고 가는거라 그 사람이  돈주고 샀어. 누구한테? 주인한테 샀습니다. 그와 꼭 같습니다.

 여러분들, 주인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주인은 전부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나한테 욕을 해도 그 사람하고 단 둘이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 사람에 대한 것을 그 주인한테 가서  해결합니다. 하나님 이게 어찌 그렇습니까? 그게 욕하지 욕하는 것을 시켰어 아  그렇습니까, 그 분하고 해결하니까 그것은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그 분하고  해결하니까 그것이 해결돼 버립니다.

 창조의 근본 되신 이, 그 분으로 더불어 모든 만물의 해결을 지우니까 나머지  그까짓 게 가거나 말거나, 소가 욕심나니 이 소는 내가 가지고 간다 내 것이다  떠들어 쌓거나 팔거나 살며시 소 주인에게 가서 큰 얼마입니까 가격 치뤄주고 딱  사놓니까 다른 사람이 욕심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내게 옵니다. 파장이 되어서 뒤에 서 있으니까 주인이 소 고삐를 끌러  주면서 몰고 가십시오 가서 잘 사용하십시오 하니 옆에 날뛰던 사람 소용이  없습니다. 왜? 주인이 있는데 주인하고 해결이 됐는데 누가 그 소를  건드리겠습니까.

 그런 것은 보면 어리석다 미련한 자라 하는데 그것이나 우리가 창조의 근본 되신  그 분으로 더불어 해결을 짓지 아니하고 해결하려 하는 그것이나 꼭 같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옵니까 구별에서 나옵니다. 구별에서 영감 구별이 와야 능력이  오고 거기서 열매가 맺어지지 그 외의 것은 아무리 자기가 양심 구별한다고 해도  객관의 힘이 없기 때문에 내나 죄요 자기 힘이요 유한한 것입니다. 그것도 양심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입니다. 영감 비판에 영감피동 되어야 조물주 한 분에게만  붙들려지고 모든 피조물에게는 자유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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