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붙드는 방법

 

1987. 1. 18. 주일오후

 

본문:갈라디아서 2장 16절∼21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님의 사활로 우리에게 구원 일곱 가지를 설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그 설정 순서를 가리지 아니하고 다만 설정된 그 구원 중에 우리가 기억하기 쉽고 깨닫기 쉬운 순서로 오전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과 불목된 것을 이것을 다 사하고 하나님과 화친을 위해서 당신이 화목의 제물로 죽으신 그 죽으심을 인하여 이루어진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친된 것을 오전에 잠깐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과 화친됨으로 하나님의 모든 그 충만과 아무것도 없는 거지인 우리와의 친합이 되어서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의 것이 되어지는 이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불목이 된 이 죄는 주님이 이 죄에 대한 값은 형으로 그것을 대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값인 그 형을 대신 받으셔 가지고 저주의 사망을 받게 된 그 죄는 세 가지 종류의 죄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불목된 이 죄의 형으로 정죄를 받으셨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의 공심판에 정죄된 그 정죄의 형을 받으셨고, 또 마귀와 이렇게 화친해 가지고 하는 그 행동의 죄의 값을 주님이 형을 받으셔서 대신 형 받아 죽으셨습니다.

형을 받아 죽으신 것은 세 가지 죄의 형을 받아서 죽으셨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불목되어 있는 그 불목을 화목으로 일으킨 이 화목의 공로 건설을 하신 것은 형을 받아 죽으심으로가 아니고 이것은 화목을 위해서 화목의 노력을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화목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화목은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형으로 다 형에게 속해 가지고 해결이 되고 이 화목은 하나님과의 이 화친, 하나님과 하나되는 데에서 이 화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된 화친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그 의사에 복종하고 당신이 당신을 주장하지 안하고 그는 하나님의 근본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낮추시고 종의 형상을 가지고 사람같이 이렇게 낮아져 하나님에게 전적 복종하고 거게 의속하는 이것으로서 하나님과 화친이 된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에게 따르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이 화목을 이룬 것입니다.

이 불목을 일으킬 때에 불목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배반하고 또 하나님을 어기고 자기 독단이 이렇게 행동한 것으로 불목이 됐기 때문에 이제는 전적 하나님에게 속하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고 그만 바라보는 여기에서 이 화목이 되어진 것입니다.

화목이 되어진 것은 대신, 하나님을 배반해 있기 때문에 배반의 반대인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는 요것으로써 화친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화친 이루어진 것은 사람들이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 무한하신 자에게 불목된 것을 이것을, 무한으로 불목된 것을, 무한의 불목을 무한의 화목으로 이렇게 다시 제물되어 가지고 속량했기 때문에 그 제물된 것은 어느 그 양이 종류가 어느 정도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당신을 희생해서 화목했느냐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는 무한이기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화목을 간단하게 알라고 하면 과거에는 불목된 것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를 주장해 세우는 데에서 불목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 불목의 반대인 화목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함으로 화목이 이루어지고, 또 자체를 비움으로 화목이 이루어지고, 거게 속해 피동됨으로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 화목이 이루어진 것은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고거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면 압니다.

세상에 사람들도 불목이라 하는 것은 서로 쌍방이 돼야 불목이 되어지고 또 배반하고 자주장이 되어질 때에 불목이 되어지지 상대방을 배반치 아니하고 자기를 세우지 아니하고 상대방에게 속하여서 피동될 때에 불목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목이라 하는 것은 한 세력에서는 불목이 있는 것 아니고 두 세력이 돼야 불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불목된 것을 화목하시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들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는 데에서 이제 불목에 화목 제물이 된 것입니다. 또 “자기를 비어” 해. “자기를 비어” 자기를 양보했다 말입니다. 양보함으로 화목이 됐습니다. 또 그이 앞에서 낮아지고 순종함으로써 화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불목한 것도 그 불목의 양이 얼마나 되며 그 불목의 종류가 몇 종류나 불목이 됐으며 그것이 범위가 어데까지인가 우리는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는 알 수도 없고, 그러기 때문에 이 불목한 것을 다시 복구해 가지고 화목으로 이루는 데에는 사람으로서는 거게 도무지 근방에 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랬는데, 부득이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 대신하시기 위해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불목한 것을 화목을 할라고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 사람되어 왔으나 이 사람만으로서는 그 불목을 다시 복구할 수 없는데 겉은 사람이요 속은 하나님이심으로써 그 불목한 것을 능히 다시 화목으로 복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뭐 우리가 연구하면 영원히 연구해도 다 모르는 무한한 은혜요 무한한 복잡이요 권위인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이 화목을 설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설정한 이 화목을 우리를 위해서 우리 줄라고 우리를 대신해서 화목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화목을 택한 자로서는 누구든지 자기 것으로 믿을 때에 이 화목이 제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화목을 제 화목으로 믿으면 제 화목이 됩니다. 이거는 값을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 화목으로 믿으면 제 화목이 됩니다. 이것은 댓가를 낼 만한 그런 인간에게는 아무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 화목을 자기의 것으로 믿는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믿음을 주어야 그 믿음 받은 것만치 이것이 믿게 되어지지 믿음 받지 안한 것이면 조금도 믿지를 못하게 됩니다.

왜? 땅위에 이 지저분한 인간들에게 있는 이 모든 일반적 믿음이라는 것은 이것은 능력이 없습니다. 암만 믿어봤자 하나님 그분과 거게 있는 그 상대방이 인정을 안 해 줍니다. 암만 믿어봤자 인정을 안 해 줍니다. 그런 믿음은 뭐 억억만이 있어도 그까짓 거는 다 사망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 여게만 전용할라고 창조하신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로 만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이 믿음을 받은 것만치 그 믿음은 이 방해물들이 많이 있어서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물들이 많이 있는 이 방해를 꿰뚫고 믿음 받은 것만치는 이 대속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전능의 믿음이라, 악령과 그 모든 죄악의 군대가 되어 있는 세상 세력이 믿지 못하게 방해를 할지라도 이 믿음은 전능의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이 그 방해하는 것들을 꿰뚫고 들어가서 이 대속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믿게 되는데, 예를 들면은 조그만한 이 철사도 몇번 선 몇번 선 하면서 아주 실나끈 같은 철사도 있고, 또 손가락 같은 철사도 있고, 또 팔뚝 같은 이런 철근도 있고 그렇게 많은 것처럼 이 믿음이 하나님이 주실 때에 실나끈만한 믿음을 주면 실나끈만한 그 믿음이라도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믿게 됩니다. 믿으면 실나끈만한 믿음을 얻었으면 실나끈만치 믿게 됩니다. 그만치 믿게 됩니다.

그것도 믿음이 가늘기는 가늘지마는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꿰뚫고 들어가서, 이 대속의 구원을 많이 믿지 못하고 아주 소량으로 믿고 어느 일부분을 믿을지라도 믿기는 그 믿음이 거기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아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천하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다 뭉쳐봐도 이 세상을 꿰뚫고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뚫고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세상이 뭐인데?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령의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선물을 받은 것만치는 뚫고 들어갑니다.

이래서, 믿음을 점점 길러라. 자라가는 것은 이 믿음은 성경을 자꾸 읽어서 성경에서 교훈을 받고 잘못된 책망받아 고치고 또 바른 것을 인도받아 바른 대로 건설하고 자꾸 요렇게 하면 믿음이 자꾸 커집니다.

요 실나끈만한 믿음이 나중에는 손가락만한 믿음으로 돼지고, 나중에는 팔뚝 같은 믿음이 돼지고, 나중에는 이렇게 이런 믿음이 돼지고, 한 아름되는 믿음이 되어지고, 이제는 점점 믿음이 커져서 나중에는 이 우주에 가득찬 그런 큰 믿음이 되어질 때에 이 세상은 그 앞에 다 갈라지고 깨어지고 다 이렇게 헤치고 이걸 뚫고 들어가서 바로 일곱 가지 이 대속의 구원을 믿는 믿음과 연결이 딱 돼 있을 때 옆에서 아무리 한다 해도 이것이 막혀지지 안하고 가루어지지 안하고 흔들리지 안하고 이와같이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연결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일곱 가지 구원 가운데에 이런 면 연결 저런 면 연결 여러가지 연결이 있는데, 베드로가 바다 물 위로 걸어갈 때에, 그때 ‘오라’ 이랄 때에 이제 걸어간 그것은 무슨 믿음인고 하니 그 믿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그 믿음이오. 순종하는 믿음인데,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그 순종은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순종을 했었는데 순종하다가 그만 그 믿음을 확 버렸습니다.

그 믿음이 어째서 그 믿음이 다시 뒤로 물러 나왔는고 하니 그 믿음이 풍랑 이는 걸 보고 믿다가 풍랑 보고 풍랑으로 기울어지고 이 믿음은 없어져 버리고 풍랑만 보고 두려워하는 것만 가지니까 이 믿음이 뒤로 후퇴해 버렸습니다. 그 믿음을 본인이 버렸습니다. 본인이 버렸기 때문에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렇게 말씀하니까 그 능력이 오지를 안했던 것입니다.

또, 다니엘이 사자구덩이 속에서 그렇게 있었으나 사자가 그를 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지켜 보호해 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그가 믿을 때에 그 능력은 와 가지고 그를 보호했는데 만일 거게서 굴에 있다가 어느 한 시간이라도 하나님이 능력으로 사자에게서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흔들려서 ‘사자가 내 옆에 있으니까 이 사자가 나를 이제까지는 안 물고 있었지마는 이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이래 계속해 주시겠느냐, 하나님의 능력이 중단되지 안하겠느냐, 중단되면 나는 사자한테 물려 죽는데 중단되지 않겠느냐?’ 해서 그 믿음이 자기가 뒤로 후퇴해 나와 버리면은 그때 사자한테 먹혀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믿음이 선물로 그에게 왔을 때에 이 믿음을 준 것만치 자기가 받아 가지고 믿게 되는데 그 믿게 되는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와같이 가늘게 믿게 했다가 좀 더 많이 믿게 했다가 또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이제, 본인이 받아들이지 안해도 이 믿음이 들어가면 되지마는 하나님께서 본인이 또 부인할 때는 그 믿음을 거둬 가지고 가십니다. 또 거둬 가지고 가시고, 어떨 때는 본인이 부인을 해도 이 믿음을 거두지 안하시고 믿음을 그대로 계속해서 밀고 있을 때에는 그 믿음을 요동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믿음이 적은 믿음, 또 반동가리 믿음, 또 하루 계속하는 믿음, 또 일 년 계속하는 믿음, 뭐 장구히 계속하는 믿음 여러가지 믿음 그 믿음의 수많은 종류의 그 모든 형태들을 하나님께서 이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할 때에, 이래서 이런 데에서 경험하고 체험하고 모든 걸 느끼고 난 다음에 비로소 사람의 결론이 깨달은 사람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시니 믿음이 있고 안 주시니 믿음이 없다. 믿음을 거둬 가시니 믿음이 없고 믿음을 내게 주시면 그 믿음은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다.’ 이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주권 은혜라 하는 것을 믿는 데에 도달케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이 구원 섭리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에게 믿어지는 그 믿음이 있을 때에 그 믿음을 혹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 마음의 그 주관 작용에서 그 믿음이 생겨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을 지금 받아 가지고 있어 그런 것입니다.

땅위에 있는 수많은 믿음이 있지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창조주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분으로, 이분이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신 이 대속의 구원이라 하는 것을 믿게 하는 그런 믿음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작든지 크든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믿게 하는 것은 이거는 순전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요 특수 믿음이요 하나님이 만드신 믿음인데 이거는 선물로 받은 것이지 자기 주관 행위에서 환경과 형편을 따라 가지고 믿어진다, 생각해진다 하는 그런 믿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읍시다. 믿어지도록 합시다.’ 자꾸 이라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의 그 믿음 작용이 와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인간 주관에서 아무리 말해도 그것 가지고는 믿어지지는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믿어지는 믿음이 생길 때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니 그 믿음을 내게 머물게 할라고 하면, 그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인데 그 믿음은 전능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내게 머물러 있게 하고 그 믿음이 내게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그 방편이 뭐인고 하니 그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게 와 가지고 그 믿음이 왔는데 그 믿음이 형을 믿는 믿음, 동생을 믿는 믿음, 부부간에 믿는 믿음 그런 믿음은 이 믿음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아니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을 믿는, 대속을 믿는,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믿는 요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일반 믿음과 이 특수 믿음을 요것을 구별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내게 내가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이 믿어지는 것이 잠깐 믿어지든지, 길게 믿어지든지, 퍼뜩 한번 ‘그렇겠다’ 이렇게 생각이 돼서 믿어지든지 자기에게 믿음이 퍼뜩 생겨졌을 때에는 그것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을 믿게 하는 것은 길게 믿든지 짧게 믿든지, 많이 믿든지 적게 믿든지, 조금 믿든지, 믿음의 흔적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요 일반 믿음이 아니요, 사망에 속한 사망 아래 있는 믿음이 아니요 이거는 생명을 가진 전능의 믿음인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잠깐 이루어졌어도.

그러면 그 믿음을, 자기에게 온 그 믿음을 가지 못하게 붙들 수가 있다면, 그 믿음이 오니까 가지 못하게 붙들고 또 오니까 붙들고, 온 믿음을 가지 못하도록 붙듭니다. 온 믿음을 가지 못하게 붙들고 붙들고 하면 그 믿음이 많아질 것 아닙니까? 조금 오지마는 그 믿음을 왔다가는 가지 못하구로 붙들고 불들고 자꾸 이렇게 붙들면은 그 믿음이 차차 차차 많아집니다, 그 믿음이 말이오.

“이스라엘 가운데에 내가 이런 믿음을, 이렇게 큰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 예수님이 큰 믿음이라 하는 거는 많은 믿음이라 말이오. 큰 믿음이라 말은 많은 믿음이라 말입니다. 많은 믿음이라 말은 적지 않은 믿음이라 말이오. 주님께서 그래서 “이 적게 믿는 자야” 말했어. 적게 믿는 자. 또 “이렇게 큰 믿음을 내가 보지 못했다” 그거 많은 믿음이라 그 말이오. 적은 거 반대는 많은 거 아닙니까? 큰 거 반대는 작은 거 아니겠습니까? 내나 큰 믿음이나 또 많은 믿음이나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우리에게 왔을 때에 그 믿음을 돌려 보내지 말고 그 믿음을 내가 볼끈 붙잡아서 가지 못하게 하는 도리가 뭐이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하고” 그러면 그 믿음이,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믿는 믿음이 생겨지니까 그 믿음대로 믿고 싶고 그 믿음대로 또 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처음에 아는 믿음이 왔고, 인정하는 믿음이 왔고, 그 다음에 그대로 행할 때에 그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하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 사실을 알고 인정을 함으로, 알고 인정하는 그 믿음 가지고 행합니다. 알고 인정하는 그 믿음 가지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해져 버렸다” 온전해졌으면 가지 안합니다.

온전해졌으면 그 믿음은 가지를 못합니다, 온전해졌기 때문에.

그러기에, 오는 믿음을 내가 가지 못하게 붙들어 두는 방편은 요것은 내가 그대로 그만 딱 행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대로 나에게 믿음이 생겨졌을 때에 그 믿음대로 그것을, 믿어지고 믿고 이렇게 그렇다는 걸 알고 인정되어지고 요라는데 그 다음에 하나 남은 것은 행함인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했어.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이랬는데 그러면 행하지 안하면 그 믿음은 아직까지 완성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돌아가 버릴 수가 있다 말이오. 딱 행해버리면 다시 그 믿음은 돌아가지를 못해.

행해버리면 왜 못 돌아갑니까? 행해버리면 자기가 그 믿음의 효력을 보게 된다 그 말이오. 그 믿음의 효력을 보게 되고 그 믿음의 효력을 자기가 딱 가져서 취했기 때문에 다시는 의심하지를 않습니다. 왜? 믿어보니까 됐거든.

베드로가 이렇게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주님 말씀하시지마는 그 말씀대로 되나 안 되나? 뭐 말만 하지 참말로 그래 되겠느냐?’ 이렇지마는 고기를 딱 잡고 난 다음에는 다시 돌아가지 안했어.

고기를 잡고 난 다음에는 ‘된다. 어짜든지 주님 말씀대로 하면 그대로 된다.’ 이렇기 때문에 거게서 그 믿음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온전해지고 나니까 그 믿음이 이제 행해보니까 온전한 믿음이 되어지니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또 믿음이 생겨집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믿음이 생겨져.

‘이거 보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은 모든 거 다 그대로 되는데 이 고기 잡으라 해 가지고 고기 잡는 이까짓 거야 잡아봤자 뭐 먹으면, 잡아먹어 뭐 먹어버리면 다 없어질 것이지마는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에는 순종하면 영생과 무궁한 그 구원의 축복이 이루어지는데 이거 되는 것 보니까 무궁의 구원의 축복이 이루어지는데 나는 그걸 전부 부인하고 거짓말로 알고 도로 주님한테 배운 거 다 배반하고 고기 잡으러 갔던 자가 아니냐?’ 이제 되는 거 보니 기가 찬다 말이오.

주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되는 거 보니까 기가 차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하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은 자와 같이 되어지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기를 ‘이제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두려워하지 말라 말은 ‘너무 낙망하고 이제 비관을 품지 말아라. 지금부터라도 네가 요 시간 갈급 그 마음을 가지고 하면은 사람 수입을 보게 된다, 사람을 취하리라.’ 하니까 이제 자기 소원한 그게 소원이었는데 주님께서 또 그것도 된다 하니까 됐다 말이오.

된다 하니까 이제는 그때 배고 고기고 그물이고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안하니까 다 집어던져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래서, 온 믿음을 돌려 보내지 안하는 방법은 뭐입니까? 뭣입니까? 행함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하고” “믿음이 행함과 함께 하고” 하는 그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그 믿음은 행한 믿음입니까, 아는 믿음입니까, 알고 인정하는 믿음입니까?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는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아는 믿음입니까, 알고만 있는 믿음입니까, 알고 인정하는 믿음입니까, 인정만 하고 알기를 잘못한 믿음입니까?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는 그 믿음은 아는 거와 인정하는 거 두 가지인지, 그게 인정은 하기는 하는데 잘못 알면 소용 없어. 알겠습니까? 인정은 하기는 하는데 잘못 알았으면 소용 없어. 또 알기는 바로 알았는데 인정 안 해도 소용 없어.

그러면,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하는 그 믿음은 몇 가지가 바로 된 것입니까, 손가락으로? 예, 두 가지가 요거 바로 돼. 두 가지가 바로 된 것. 두 가지가 바로 된 것입니다. 아는 것 인정하는 것 바로 됐습니다. 그 믿음이오. 아직 거기 행함은 없습니다.

믿음이 이제는 행함과 함께 일합니다. 믿음이 행함하고, 믿음이 이제 믿음 둘이 행동하고 같이 지금 합작해서 일을 합니다. 그라면은 그 믿음이 무슨 믿음이 된다고 했습니까? 온전한 믿음.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하여진다” 그 말씀이 어데 있습니까? 여게 22절에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과 함께 일하고” 22절,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온전케 되었느니라” 그러면 이제 온전한 믿음된 것은 몇 가지 요소로 온전한 믿음이 됐습니까? 세 가지 요소로 온전한 믿음 됐습니다. 행함하고 함께 일하는 믿음은 몇 가지 요소가 돼 가지고 있습니까? 두 가지 요소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인제 그러기에 나에게 예수님의 사활의 이 일곱 가지 대속을 내가 아는 그것은 배워서 성경대로 아는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인데 그 믿음은 삼분지 일의 믿음입니다. 그 요소가 하나뿐입니다.

그 아는 것을 자기가 인정치 안하면 달아나 버립니다. 인정치 안하면 달아납니다.

그것을 아는 믿음을 자기가 그대로 인정하고 확신할 때에 그 아는 것은 달아나지를 못합니다. 확신할 때에 자기에게는 한 가지 요소의 믿음이 두 가지 요소의 믿음이 됩니다.

두 가지 요소의 믿음이 된 그것을 자기가 그대로 행하게 되면은 세 가지 요소의 믿음이 되니까 온전한 믿음이 돼 버립니다. 그대로 온전한 믿음이라. 그러면 가는 철사면 가는 철사로 그대로 온전한 믿음이 돼 버려.

온전한 믿음이 됐으니까, 온전한 믿음이 됐으니 그 믿음이 도망을 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도망을 못 칩니다. 왜 못 칩니까? 내가 알고 인정하고 행해 보니까 고기가 잡혔거든. 행해 보니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고 남았거든. 행해 보니까 나사로가 살았거든. 믿고 행해 보니까 이제 실상이 나타났다 말이오. 실상이 나타났으니까 그 실상을 보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의심을 합니까 안 합니까? 그것은 의심을 못 합니다. 의심을 안 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있습니다.

그 믿음은 있는데, 그것뿐이고 그 다음에 또 새로 알고 인정하고 행해서 자꾸 이렇게 하면은 이제 세 가지 요소의 믿음은 작아도 온전한 믿음인데 요 온전한 믿음을 자꾸 모으고 모으고 하면은 이 믿음이 많은 믿음이 되고 큰 믿음이 되어집니다.

요것은 믿음에 대해서 지금 말했습니다. 그래,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믿음을 붙드는 방법을 지금 말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그 말은 실나끈 같은 믿음 가지고 나중에는 손가락 같은 믿음에 나아가게 되고, 손가락 같은 믿음이 뒤에 가서 팔뚝 같은 믿음에 나아가고, 팔뚝 같은 믿음이 나중에는 한 아름 되는 믿음이 되어지고, 한 아름 되는 믿음이 나중에는 이 세상에 가뜩 찬 믿음, 그 가뜩 찬 믿음이 그 사람은 세상에 가뜩 찬 믿음을 가지니까 그 사람 앞에는 세상이 없어. 세상이 다 없어져 버려. 이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의가 뭐인가? 예수님의 사활로 일곱 가지 대속의 이 구원은 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이 전부 하나님의 의요. 이것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행사 중에 제일 의로운 것이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제일 의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 의로운 이것을 가리켜서정금 등대라 이랬습니다. 정금 등대라.

정금 등대라는 것은 이 등대도 밝은데 정금으로 만든 등대이기 때문에 거게는 흠점이 없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믿음덩어리가 교회입니다. 믿음으로 된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면 일곱 가지 대속이 자기의 것이 됩니다. 믿으면 자기 것이 돼요.

그러면, 오전에는 하나님과 화친을 말했는데 믿으면 하나님과 화친이, 예수님이 대화친해 가지고 화친된 이 화친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화친한 이 화친인데, 이 화친은 예수님이 대신해서 화친한 이 화친을 만들어 놓은 화친인데 이 화친에는 혹 티나 주름잡힘이 있습니까 완전한 화친입니까? 자, 조그만치라도 흠점이 있는 화친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면 이는 전지자가 살펴봐도 조금도 흠이 없는 완전한 화친이라는 것을 이렇게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완전한 화친인 것을 아는 사람? 녜, 완전한 화친입니다.

완전한 화친인데 이 화친은 사람이 들어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화친은 사람이 이 완전한 화친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완전한 화친을 예수님의 인성이 이 완전한 화친을 할라고 하면은 완전한 화친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의 인성이 완전한 화친을 할라고 하면은 한 사람 모가치의 화친은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 사람의 모가치도 못 합니다. 왜? 이는 무한자와 불목됐기 때문에 이거는 무한자와 불목됐기 때문에 이 화친은 못 합니다. 무한자라야 이 화친을 할 수 있습니다.

무한자라야 화친할 수 있는데 무한자가 하면은, 무한자가 화친하면은 사람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사람이 무한한 화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사람의 불목된 것은 사람이 대신하지 사람 불목된 것을 다른 이가,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사람 불목한 것은 사람이 그 불목을 대신해야 벌을 받아도 대신 받을 수 있고 또 사람이 대신 화친을 해도 해야 되지 사람이 불목해 놓은 것을 짐승이 그 불목을 화목할 수도 없고 사람이 그 불목한 것을 금덩이가 화목할 수도 없어요.

사람이 불목했으면 사람으로서 그 불목을 화목을 만들어야 되는데, 사람이 만들어야 되는데 이 불목은 무한자와 이 불목이 돼 버렸다 말이오. 이 사람이 무한자가 되어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이 무한자에게 범해 가지고 불목이 됐기 때문에 이 불목은 무한한 불목이니 이 무한한 불목을 화목하는 데는, 이걸 다시 복구하는 데는 무한자가 안 들면 안 된다 말이오. 무한자가 안 들면 안 되고, 무한자가 또 이와같이 할라고 하면은 무한자 그분이 한 것이지 인간을 대신할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 입고 오지 안할 수가 없는 이 필연의 사실입니다.

사람을 입고 오지 안하면은 이 화목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화목을 이룬 것은 완전한 화목이요 이거는 전지 전능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인정하고 모든 피조물도 인정하는 이 모두가 다 완전히 공인, 공인.

전체가 다 인정하는 완전한 화목인데 이 완전한 화목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어.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데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화목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화목하신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화목한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이오. 믿음으로 자기 화목이 됩니다. 믿음으로 자기 화목이 돼요.

믿음으로 자기 화목이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오늘 봉독한 말씀에 이것입니다.

갈라디아 2장 16절을 한번 찾아 보십시오. 갈라디아 2장 16절. 지금 읽어 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이 의로운 것은 완전한 화목, 공심판에 완전 통과, 죄에 대해서 완전 승리 자유, 마귀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 완전 승리 자유, 하나님께 대해서 완전 진리 생활 영감 생활, 완전 영생, 이 모든 것을 총칭해서 의라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한 것입니다. 의라. 그거는 흠과 점이 없는 완전이라 그 말이오. 의라.

의인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이 화목면이나, 공심판면이나, 죄에 대한 면이나, 또 마귀에 대한 면이나, 사망에 대한 면이나, 하나님을 향한 이 생애면이나, 진리 생애면 영감대로의 생애면 이 모든 면, 그 면 이것이 합해서 일곱 가지인데 이 일곱 가지가 완전이 이루어지는, 일곱 가지의 완전을 이루는, 일곱 가지의 완전을 이루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일곱 가지의 완전을 이루는 것은’ 그 말이오.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옳은, 하나님의 그 법칙은 다 옳은 법칙인데 하나님의 법칙대로 요렇게 이 법칙대로 행하고 조것도 조 법칙대로 행하고 모든 법칙을 사람이 하나님 법칙대로 지켜서 행함을 가지고,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 의를 할라고 해서는 안 돼.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과 완전 화친을 할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의 공심판에 통과할 수도 없고, 또 죄에 대해서 완전 해결을 지울 수도 없고, 마귀에게 대해서 완전 승리를 할 수도 없고, 또 이 사망도 완전히 이길 수 없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인 것을 아는고로 그 말입니다.

맞습니까?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성령이 하는 말씀이요, 이 말씀이. 사람 말 아닙니다.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알겠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의롭다 함을 인정함을 받지 믿음 아니고는 의롭다 함을 인정함을 받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이거는 왜 믿음으로 하느냐? 믿음이 아니고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데, 만들어 가지고 주시는데 만들어 가지고 주시는 이걸 당신이 그 보배를 만들었으니까 이 댓가를 받을라 해도 우리는 댓가를 낼 만한 아무 자격이 없어. 이거는 은혜로 공짜배기로 믿는 자에게 줄 수밖에 없어. 믿는 자에게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음으로써 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 그거요.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를 제가 해 가지고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이 의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육체는 없느니라. 육체가 없다 말은 뭐이 없다 말입니까? 뭣이 없다 말이요? 심신이 없다 말이오. 우리의 심신 가지고는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제가 행할라고 해도 의롭다 인정할 수 있는 데까지에 행함을 육체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 로마서 8장에 “육체가 약함을 인해서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이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어 죄를 정해 가지고 우리 대신 이 일을 해결했다” 하는 것을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 기록해 가지고 있습니다.

“없느니라” 요거 참 어려운 말이오. “만일 우리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그러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될라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이 공로로 주시는 이 일곱 가지로 우리가 의롭게 되려 하다가, 완전이 될라고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라는데 그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될라고 우리가 바라보고 애를 쓰는데 나는 턱 죄를 짓게 됐습니다. 나는 죄를 범하게 돼 버렸어.

“죄인으로 나타나면” 내가 죄를 짓게 됐다 말이오.

예수님의 대속의 의를 믿음으로 나는 완전 의인 될라고, 이렇게 믿음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믿음으로 나는 의롭게 됐다 하는 것을 믿음으로 나는 의롭게 된 줄 알고, 이래 의롭게 된 줄 알고, 자기는 의인인 것을 인정하고 의롭게 된 그것을 자기는 믿고 의롭게 된 자로 믿고 있는데, 있는데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랬는데 나중에 엉뚱스럽게 또 죄를 지어서 엄청난 죄를 지었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엄청난 죄를 지었다 말이오.

죄를 지었으니까, 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으면 나는 완전 의라. 죄에 대해서 완전 의, 하나님과 완전 화목이라, 하나님의 공법에도 지공법에도 완전 통과자라 이렇게 인정받은 내인데, 이걸 믿음으로 ‘나는 이런 자이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 공심판에도 의, 하나님과 화친에도 의, 또 마귀에게 대해서 죄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도 의, 하나님을 향한 생애하는 것도 영생, 진리 영생 영감 영생으로 완전 이 의롭다, 의롭게 된 줄 알고 자기는 믿음으로 의인인 줄 알고 이렇게 살다가 뚱딴지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었어.

요거 말하는 거 요거 아주 중요합니다. 요거 암만 백 번 읽어도 천 번 읽어도 모릅니다. 천 번 읽어도 몰라요. 요거 주석을 가서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어찌 돼 가지고 있는고?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단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라면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가 의롭게 될라고 이라다가 그만 내가 죄를 짓게 되면은, 너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네것으로 믿고 대속을 입은 너는 주님의 것인 것을, 나는 믿음으로 나는 주님의 것 됐고 주님의 대속은 내것 되고 주님의 것된 요 생활을 할라고, 아이구, 어려워라. 참 여러분들이 이거 요거는 요 신학자들이 막 요렇게 한 마디를 가지고 죽고 살고 요거까지를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야 요거 말하면 알아들을 건데 이거 통통이 뭐 검은 거는 먹이요 흰 거는 종이요 이거밖에 모르는 그 사람에게 요 점이 하나 올라가면 뭐이 되고 뭐이 되고 하니까 애터지지만 실컷 말해 놔도 ‘검은 거는 먹이고 흰 거는 종이 아닙니까?’ 이라는 자다 보니까 거게서야 올라 한 점 더 찍으면 뭐 한 점 덜 찍으면 뭐 어떻다 하는 그런 소리는 백날 해 봤자 귀전에도 안 들어온다 그 말이오.

이러니 내가 여게서 뭐할라고 이 설교를 하는지 나는 몰라요, 그래. 나는 지금 왜 그런지 그거 나는 지금 그 의문 중에 하나라, 의문 중에. 이제까지는 하는 것이 의문 중에 하나. 그뭐 배워 가지고 뭐이 될 게 있는가 모르겠어.

“그럴 수 없느니라” “내가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단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믿음으로 완전 의인된 것을 내가 믿고 나는 완전 의인으로서 이렇게 자기는 살라고 사는데 의외에 보니까 죄를 짓는 자가 됐습니다.

이러면,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이랬는데 주님의 것 된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이거는 주님이 죄짓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쉽다 말이오. 논리로 따지면 그렇게 된다 그 말이오.

그러나 “그럴 수 없느니라”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세우면” 헐었던 걸 세우는 건 뭐입니까? 뭣을 세웠다 말이요? 헐었던 것이 무엇인데? 헐었던 것이 무엇인데? 요것만 하나 알면 요 말에 대해서 좀 알아듣는 사람이 되는데,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도로 세우면” 헐었던 것이 뭐인지? 헐었던 것이 뭐인지? 예수님의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나의 옛사람은 죽어졌고, 나는 죽었고,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됐고,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 됐고, 이러니까 내게 악령 악성 악습으로 감염됐던 것은 이것은 탈색이 돼 버렸고, 죄는 죽었고, 옛사람은 죽었고,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은 죽었고, 나는 이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서 완전자 되었고, 완전자 되었으면 내 남아 있는 이 심신은 내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 됐고, 이것이 지금 이제 헐고 세운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것이 옛사람은 다 파괴를 시키고 다 새로 이 새로운 의로서 건설해 놓은 것입니다.

건설해 놓은 것인데 이래 살라 하다 보니까 또 죄를 지었으니, 그러면 이 몸뚱이가 죄를 지었으니까 예수님이 죄짓게 한 것이냐? “그럴 수 없느니라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범법한 자로 되는 것이라” 이것은, 이 죄 짓는 자는 죽어서 다 죽어버렸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사는 것이 이것이 내인데,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나는 주님이 내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 사는 요것이 지금 새로 건설해 놓은 것인데, 요게 건설해 놓은 거, 이거 알아듣겠습니까? 요게 건설해 놓은 거, 요게 새로 건설해 놓은 거라 말이오, 새로 건설해 놓은 거. 건설해 놓은 것인데 거게서 죄 지었다고 그것이 예수님이 죄지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이 내게, 내가 그냥 주관적으로 일방적으로 이 대속을 믿는다 하지마는 이 대속이 실상 내게 와서 있지 않구먼. 이르지 안하고 있구먼.’ 그러면 네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자다. 이제 첫째 아담에게 속해서 그거는 멸망받아 죽은 것인데 죽은 것을 다시 내가 살리는 것이 된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헐은 것은 옛사람을 헐어.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을 헐었다 말입니까 이거 둘째 아담에게 속한 걸 헐었다 말입니까?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을 헐었다 말입니다.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다시 세운 것은 뭐입니까?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간다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수님의 대속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돌아간다 말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헐었던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은 헐어버렸다 말이오. 헐어버렸다 말이오.

헐어버렸는데 다시 헐었던 걸 새로 세우면, 세우는 거는 뭘로 세운다 말입니까? 옛사람으로 돌아간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옛사람으로 돌아가. 옛사람의 위치에 다시 돌아간다 그 말이오.

그러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나를 이 대속의 법을 범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

범법이라 하면은 다시 하나님의 법을 범한 자로 만든다 말입니까,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든다 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의 법을 내가 어긴 자로 만든다는 말입니까 내가 이 헐었던 다시 법을 내가 범하는 자로 만든다 말입니까? 법은 나를 대속하신 법이 있고 또 사람을 정죄하는 하나님의 이 율법이 있고 한데 하나님의 그 율법을 헐었다 말이요 내가 예수님의 대속의 법도를 헐었다 말이요 뭣을 말입니까?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무슨 법이지? 대속의 법을 어기는 자로 만든다 말이요, 대속의 법을 어기는 자. 알겠습니까? 대속의 법은 죽어도 어기지 말라 말입니다. 요거는 요동치 말라 말이오. 요 중요한 것입니다. “만드는 것이라” 19절에, 다시 해석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율법을 향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말은 내가 과거에는 율법에 속한 사람 아닙니까? 알겠어요? 과거에는 내가 율법에 속한 사람인데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은 그러면 내가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 내가 같이 죽은 것은 이것은 뭘로 인해서 죽습니까? 뭘로 인해 죽습니까? 율법으로 죽습니다. 알겠습니까? 율법으로. 율법으로 죽는 거.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는 공심판 율법, “공심판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이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이라는 것은 이 죽음은 뭣을 향해서 죽는 것입니까? 모세의 율법을 향해서 죽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향해서. 이해가 돼요?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이는” 왜 율법을 향해 죽었느냐?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하나님의 공심판의 법으로 인해서 내가 죽었다 말이오.

예수님이 공심판의 법으로 인해서 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라. 내가 죽은 것은 나는 살아 있지마는 법으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라.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 이라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까 이거는 첫째 아담으로 산다 말입니까 둘째 아담으로 산다 말입니까? 둘째 아담에 속한 자로 지금 살려함이니라 한 것입니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못박힌 건 주님이 못박혔지 내가 못박혔습니까? 그러나 내 대신 못박혔기 때문에, 내 대신 주님이 못을 박혔는데 하나님의 공심판의 율법에서 내가 범죄한 것을 예수님에게 다 정죄를 해 가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이 형으로, 저주의 형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내가 못박힌 것이라 말이오, 내가 못박힌 것. 알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못박힌 거 이거는 율법으로 못박혔습니까 은혜로 못박혔습니까? 율법으로 못박혔습니까 은혜로 못박혔습니까? 이 율법은 첫째 아담이 범하고 지키고 있는 첫째 아담에 대한 법, 하나님의 공심판의 법 이 법입니까 사심판의 법입니까? 공심판의 법입니까 사심판의 법입니까? 공심판의 법입니다. 그저 들어둬요.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제 내가 살아 있는 것은 그라면 공심판의 법에서 죽었으니까 내가 살아 있는 거는 뭐입니까?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 있어, 예수님의 것으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고 있어. 이거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고 있고, 그러면 첫째 아담이 지키는 공법에서 죽은 것은 내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 됩니까? 예수님의 죽으신 것이 내가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죽었을 때에 그때에 죄와 사망과 마귀는 죽어버렸는데, 그러면 그때 죽은 것은 죄와 사망과 마귀는 죽어버렸고 나는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죽은 자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죽었는데 내게는 그러면 죽은 것은 하나도 없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만 내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심으로 내게 죽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데 그라면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에 내게는 죽은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뭐이 죽었습니까? 옛사람이 죽었는데 그 옛사람 죽었다 하면 그라면 되기는 됐습니다. 옛사람이 죽었는데 마귀가 거게서 죽었습니다. 마귀가 죽었고, 죄가 죽었고, 악습이 죽고, 악성이 죽었습니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이 악이라는 게 죽었습니다. 자기 중심의 영, 자기 중심의 이 원죄성, 자기 중심의 본죄성이 죽어버렸습니다.

죽어버렸으니까 내 심신은 죽었습니까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는데 그라면 이 대속을 받기 전 심신과 대속을 믿음으로 받은 후에 내 심신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게 뭐입니까? 탈색이 됐습니다.

따라합시다.탈색!탈색!탈색이 됐습니다.

뭐이 탈색? 악이 이거는 하나님의 법으로 죽었습니다. 악으로 탈색이 되어 악령 악성 악습은 내게 상관 없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러고 예수로 다시 살았습니다.

예수로 살았는데 이제 탈색이 되고 그대로 있습니까 다시 염색을 했습니까? 염색을 했습니까 그대로 있습니까? 염색을 했습니다. 뭘로 염색했습니까? 예수님의 일곱 가지 대속으로 염색을 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일곱 가지 대속으로 염색했습니다.

일곱 가지 대속으로 염색된 나는, 이것은, 그러면 일곱 가지 대속으로 염색했으니까 이제 염색된 나는 과거에는 악으로 염색되니까 악으로 산 것처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대속으로 염색했으니까 나는 뭘로 살게 됩니까? 일곱 가지 대속으로 살게 됩니다. 알겠습니까? 일곱 가지 대속으로 사는 거 그 이해가 돼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산다 말은 그리스도의 이 대속의 공로를 가진 이 대속을 나에게 입혔기 때문에, 이 대속으로 염색된 내 속에는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합니다.

“사신 것이니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 심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대속하신 아들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그러면 이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하는 이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이 믿는 믿음 안에서 사니까 요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인데 어떤 것을 믿는 믿음입니까? 내 대신 죽으심으로 일곱 가지 대속을 나 위해서 설정했기 때문에 이 설정은 내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 일곱 가지 설정을 입어서, 일곱 가지 설정으로 염색 들여서 일곱 가지 설정이 돼 버렸어.

속에는 그렇지만 이 흰베쪼가리에 푸른 물을 들여 놓으면 완전히 이거는 푸른 거와 꼭 같이 푸른 걸로 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제 하나님과 완전 결합으로 물들여 버렸고,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 통과로 물들여 버렸고, 죄를 이긴 자유로 물들였고, 마귀를 이긴 자유로 물들였고, 사망을 이긴 자유로 물들였고, 하나님을 향한 진리의 영생 영감의 영생으로 물들였기 때문에 그게 돼 버렸다 말이오.

속에 분석하면 속에 인적 요소가 있지마는 이제 보이는 모두 이 전부 염색돼 있는 것은 이것은 다 신적 요소의 완전 일곱 가지로 돼 가지고 있는데 이걸 뒤에 예수님의 대속만 쏙 빼 탈색만 해 버리면 이거는 순전히 인적 요소의 이 영육인데 이거 그냥 보기에는 꼭 신적 요소라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누가 요 갈라디아서를 참말로 옳게 주석했으면 이 주석은 억만금 억만 원이라도 쌉니다. 억만 원이라도 싸. 이 주석을 바로 해 놓은 주석이 없어. 근방에 껍데기만 술술 훑고 있어.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한다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박살시키지 않는다 말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다 없애버리지 아니한다 말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한다 말은 뭘 폐하지 아니한다 말이요? 일곱 가지 대속을 없애지 아니한다 말입니다. 일곱 가지 대속을 없애지 안해. 언제든지 일곱 가지 대속을 굳게 서고 일곱 가지 대속을 놓지 안한다 말입니다.

일곱 가지 대속을 내가 폐지하면 나는 범법한 자라. 대속의 법을 범하는 자가 되고 말아. 그러기 때문에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지 않는다” 세워 놓은 걸 다시 헐지 안한다 그 말이오.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인간이 행함을 가지고 의롭게 된다고 하면, 자기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 하나님과 화친하는 것이 자기 노력으로 화친이 된다고 하면, “의롭게 되는 것이 행함으로 된다고 하면” 하나님과 화친되는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화친이 된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다 헛일이니라.

이거 참 시간 참, 기가 차는데 이거,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고 이렇는데 이걸 그러니까 이제 또 이거 껍데기만 간단하게 말할 수밖에 없어.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된 거, 이 화친돼서 화친된 이것은 내가 믿음으로 화친된 것은 놓지 마십시오. 화친된 것을 내가 죄를 범해도, 내가 죄를 범해도 이 화친된 걸 내가 죄를 범하면은 ‘아이고 죄를 범했으니까 나는 죄를 범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이러면 화친된 이것을 불신으로 버려버렸습니다.

불신으로 버려버렸습니다.

이걸 버리지 말고, 이 화친된 것은 거머쥐고 놓지를 말고, 놓지를 말고, 범죄하면 이것은 이 심신은 주님이 자유로 사용할 터인데 주님이 자유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자유로 사용할 터인데 이 내 심신은 주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데 주님이 사용하지 안하고 도둑놈이 와서 사용했다. 알겠습니까? 도둑놈이 사용했다. 도둑놈 이놈 쫓아내야 되겠다.

도둑놈 이놈 쫓아내자면 도둑놈 그놈은, 도둑놈은 누가 도둑놈입니까? 죄 마귀 그놈이 도둑놈인데 이 도둑놈이 들어와서, ‘주님의 것을 도둑놈이 와서 도둑질 했다. 이러니까 이 도둑놈 쫓아내고 주님 것을 어서 도로 찾아야 되겠다. 도둑질 했다.’ 그라면은, 예수님의 대속의 의를 자기 것 삼은 것은 그대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대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대로 있습니다. 또 자기의 심신을 주님의 것 삼은 것은 그대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대로 있습니다. 뭣만 그렇습니까? 이 도둑놈이 와 가지고 이 심신을 이걸 꾀워 가지고 이 심신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우리는 기도하기를 ‘주여! 내 심신은 당신의 것인데 왜 당신의 심신을 뺏깁니까!! 왜 당신의 심신을 뺏깁니까!! 어서 찾으십시오!! 마귀 이놈이 와 가지고 당신의 심신을 지금 도적하고 있습니다! 어서 뺏드십시오!!’ 하는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대속을 놓지 마십시오.

로마서 7장 16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 심신이 원치 안하는 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그러면 지금 이건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을 하니까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인데 원치 안하는 것은 죄지었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원치 안하는 것을 하니까 자기는 하나님의 율법을 인정하는 자입니까 대항하는 자입니까? 자기는 원치 안하는 걸 행했으면 자기는 죄를 짓는 자입니까 죄를 안 지을라 하는 자입니까? 안 지을라 하는 자입니다.

이러니까, 율법을 옳다고 율법대로 살아야 되는데 율법을 어겼다 이래 가지고 자기는 율법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율법대로 살라고 하는 사람이라. 하나님의 법대로 살라고 하는 사람이라.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알겠습니까?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면 몸뚱이 속에서 범죄했으면 범죄한 것을 대속받은 내가 범죄합니까? 대속받은 내가 범죄합니까? 내가 그 죄 짓기를 원합니까? 원치 안하는 죄를 범했을 때에는 내가 범하는 게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내가 범하는 게 아니라” “이제 원치 안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행했다” “죄니라” 그러면, 자기가 이 대속을, 그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짓는 자와 짓기 싫은데 짓는 것과 짓고 난 다음에 ‘이거는 내 본의가 아니다, 이 본의가 아니고 내가 이거 고의가 아니다, 이놈은 원치 안하는 게 됐다.’ 할 때는 대속은 그대로 있고 자기가 그것을 원하면 대속을 벗은 자가 됩니다.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체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이 육체 속에, 이 심신 속에는 죄악이 들어 가지고 나는 지금 원치 안하고, 중생된 영 나는 지금 원치 안하고 있는데 이놈이 들어 가지고 그짓 한다 말이오.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면 육체 속에 이 영은 선을 원하지마는 심신 이놈들은 아직까지 이게 어리석어서 악령의 유혹을 자꾸 받는다 그 말이오. 속에 악습이 들어 있지, 또 악성이 지금 다 뽑혀 나가지 안했지, 이러니까 이게 들어 지금 장난을 하고 있는 거라. 이 패잔병이 들어서 장난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뭐라 했습니까? “죄니라” 이래서, 우리는 대속 받은 자기의 주격인 자기의 영이 믿고, 영이 믿는데 이 심신이 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대속의 일곱 가지를 믿고 놓지 말고, 요거는 떨구지 말고, 놓아 주지 말고, 이 대속 받은 이 심신이 악령에게 이용을 당했을 때에는 어서, 이 악령에게 이용당했을 때는 주님에게 호소해야 됩니다.

‘주님이여, 지금 주의 지체된 주의 몸된 이것을 악령이 도용하고 있사오니 주님이여 어서 이놈을 쫓아내십시오.’ 할 때 나가 버립니다. 알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이거는 내가 원치 안하고 이것은 주님의 것인데 악령이 와서 이라고 있다. 이 악령을 몰아내 주십시오.’ 하면 그 마음만 먹으면 즉시 죄는 물러가고 마귀는 물러가 버립니다. 악령은 물러가고 죄는 물러갑니다.

그러면 자기는 깨끗해졌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말씀하시기를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자기가 잘못됐을지라도 돌이켜 회개하면 다 사해 줘라” 하는 것이 요 말씀입니다. 요 실수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됐더란대도 다시 그것을 얼른 주님에게 고해서, 이것을 고해서 어서 이것을 물리치고 다시 이 몸은 주님의 것으로 주님이 지도하는 대로 주님에게 지배받고, 주님의 사활의 대속은 자기 것 됐고 요렇게 하면 자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올바른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후에 이것도 또 하다가 다 못 했어. 이제 시간이 뭐 자꾸 쫓기요. 또 분교 예배 보러 가지 이 시간이 자꾸 쫓기지, 오전에도 자꾸 하다 보니까 쫓으니까 자꾸 이거저거 못 했어.

이랬는데,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창조주의 것을, 창조주의 것. 창조주의 창조의 은혜를 내가 받는 것, 그는 전지자입니다. 전지의 은혜를 내가 받는 것, 전능의 은혜를 내가 받는 것, 그분은 대주재라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의 것을 내가 받는 것, 그분은 주권자입니다. 그 주권의 은혜를 내가 받는 것, 모든 존재는 그분이 주인입니다. 대주재라 말은 모든 존재는 개미 한 마리도 짐승 한 마리도 돌 하나도 흙 하나도 바다도 다 그분의 것인데 그분의 것을 내것으로 유업받는 것, 이것은 뭐이냐? 이것은 이 하나님과의 결합에서 받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사망이라. 하나님과 화친에서 다 받는 거라.

이 화친에서 다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과 나와 대속으로 화친된 이걸 믿으면 내것 되는데, 믿으면 내것 되는데 이 육체가 범하는 것은 이제 주님의 것된 것을 이걸 주님에게 고해서 이놈을 쫓아낼 일이지 이거 나의 대속을 내가 의심하고 양보하면 안 된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 주님의 대속을 믿어서 주님과 화친된 이것을 놓지 안하는 요 믿음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의 모든 것은 내가 구할 수 있고 내가 받을 수 있고 다 가질 수 있습니다. 그의 온갖 것을 다 내가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나 화친이 안 되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이제 범죄했을 때는 이 범죄한 것을 죄와 마귀와 사망의 그놈 세력이 있기 때문에 범죄한 것을 이거는 원치 안하는 죄가 했기 때문에 범죄했을 때는 즉시 고해서 이것을 주님 앞에 사함을 받고 이제 이것을 쫓아내. 쫓아내는 거는 뭐? 사함 받는다 말은 주님하고 같이 합작해서 쫓아낸다 말이오. 이걸 쫓아 부인해 버려. 이 범죄한 것을 부인하면, 하나님과의 화친, 그 밖에는 뭐 있습니까? 화친 밖에는 뭐 있소? 화친 밖에는 나는 주님의 것, 또, 그 밖에는 뭐 있습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당신이 주인으로 주관해.

주관하면, 그러면 이 심신은 내 안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니까 그리스도가 이 몸을 당신이 주관해. 당신이 주관하기 때문에 이것은 지금 당신이 범죄케 하는 거는 아니고. 당신이 뺏겨도 당신이 뺏겼고 당신이 잃어도 당신이 잃고, 이러니까 ‘왜 이걸 잃습니까?’ 이거 가지고 기도하기를 `주님이여, 왜 당신이 당신의 것을 당신이 뺏기고 그놈에게 당할 겁니까? 당신이 이기지 안했습니까? 이거 지금 도적이 들어왔습니다. 외밭에 도적 들었습니다.

지금 금창고에 도적에 들어왔습니다. 주여! 도적 들었으니까 이놈 쫓아내 주십시오!’ 할 때는 그놈이 왔다 쫓겨 도망을 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면, 자, 이제 내 몸은 주님이 주관하시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그러면 이거는 주님이 주관하지 않습니까? 이거 하나님의 성전 아니요? 성전이니까 이 성전은 주님이 책임이지, 또 내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니까 손 이까짓 놈이 뭐 힘이 있어? 두뇌가 머리가 지금 이래라면 이라고 저래라면 하지 이 손 놀리는 건 두뇌에 작용이 있어. 두뇌가 뭐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라 그 말이오.

그분에게 주권 있다 말이오.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은, 움직여 사는 것은 그분이 움직여 사는 꺼풀 하나, 껍데기 하나 있고, 그 속에는 뭣 들었습니까? 그 속에는 나는 주님의 것된 속껍데기, 속껍데기. 그 속에 뭣 들었습니까? 주님의 사활의 대속은 내것, 겉껍데기 속에 속껍데기, 속껍데기 속에 예수님의 대속이 내것 되어 있는 것을 확신하고 놓지를 말라 그 말이오.

암만 겉어머리 죄를 지어도 거게서 야단지기지 이거는 놓지를 마라. 놓지 안하면 하나님하고 나하고는 화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것은 내것이 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지 못하고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는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많이 말씀한 요 믿음의 비밀 요것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요것을 알아야 돼요.

믿음의 비밀과 믿음의 지극히 그 큰 능력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마귀란 놈은 요걸 믿지 못하도록 자꾸 애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하는 것은 이걸 믿을 때에는 하나님과 나와 하나되는, 공심판에 인정받았는데 못 할 게 뭐 있습니까? 참 이것을 여러분들이 이거 생각하지도 안하지. 그러니까 세상에서 이런 선을 행하라 저런 선을 행하라, 또 이런 자선을 해라 저런 자선을 해라, 이런 구제를 해라 저런 구제를 해라, 이런 믿음을 지키라, 이런 행동해라 하는 그거 뭐입니까? 그것이 이 구원의 알맹이 아니오.

그렇게 함으로 우리 속에 녹이 벗겨지고 그래 함으로 우리라는 사람들이 이 사욕이 없어지고 차차 사람이 자꾸 밝아지고 깨끗해지면 이 구원의 도리를 받는다 하는 것인데 이러니까 껍데기 이거는 알아듣지마는 이 구원의 진짜 이거 참 고단위의 바로 진짜 이것만 받으면 다 되는 건데 이걸 말해 놓으니까 몰라. 이 기독교에 도덕이나 말하고 이런 걸 말하면 알아듣지.

참 여러분들이 복이 있는데 여게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세상을 이기고 이런 사람이 뭐 하나라도 있으면 좋아요, 하나라도 있으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 이 무한의 구원도, 도리도, 방편의 믿음도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고 아버지의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과연 영감이 아니면 우리는 들을 수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행할 수도 없는 저희들입니다.

순전히 주님의 피의 능력과 피로 말미암을 영감과 진리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 있는 성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확신을 주시고, 이 믿음으로 지극히 큰 영화로운 구원을 자기 것 삼는 것을 깨닫는 은혜를 주시고, 믿음에서 요동치 안하고 굳게 서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믿음으로 하지 안하고 자기의 행동으로 뭣이 될라고, 자기의 행동이 죄인 만들고 행동이 의인 만드는 줄 알고 이 행함에서 항상 머물러 마귀의 유혹받는 저희들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의롭게 받는 것도 믿음이요 또 죄인되는 그것도 자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확신하는 데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어두움에 있다 나왔사옵고 아직까지 주님에게 가까이 있지 못한 데에 있다가 나온 형제들이오니 주님이 장중에 잡으시고 앞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사 저희들로 더불어 크고 작은 것을 의논해 주시고 저들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저들의 지혜와 의와 능력이 되셔서 저를 붙들고 험한 세상을 평강 가운데서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지극히 큰 축복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기도> 주님, 우리에게 무한한 구원을 우리들이 감당하도록 무한한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이 무한한 구원, 땅의 것은 다 배설물이요 이것을 위해서 모든 존재가 있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가치를 깨달아 믿음에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 나그네 세상에서 이 믿음을 잘 준비해 가지고 가도록 항상 두려움으로 지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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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51105화새 선지자 2015.10.31
68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20절-21절/ 851128목새 선지자 2015.10.31
67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 고린도전서 1장 21절/ 851130토새 선지자 2015.10.31
66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20절-21절/ 851127수야 선지자 2015.10.31
65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19절-25절/ 851129금새 선지자 2015.10.31
64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갈라디아서 4장 19절-31절/ 851104월새 선지자 2015.10.31
63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20절-21절/ 851201주새 선지자 2015.10.31
62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으라/ 히브리서 12장 1절-8절/ 860301토새 선지자 2015.10.31
61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으라/ 히브리서 12장 2절-8절/ 860224월새 선지자 2015.10.31
60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으라/ 고린도전서 1장 20절-21절/ 851207토새 선지자 2015.10.31
59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썩먹으라/ 히브리서 12장 2절/860302주후 선지자 2015.10.31
58 믿음을 만들고 써먹는 것/ 히브리서 12장 2절/ 860226수야 선지자 2015.10.31
» 믿음을 붙드는 방법/ 갈라디아서 2장 16절-21절/ 870118주후 선지자 2015.10.31
56 믿음의 5단계/ 요한복음 8장 31절-34절/ 880902금야 선지자 2015.10.31
55 믿음의 결과/ 누가복음 5장 5절-11절/ 860703목새 선지자 2015.10.31
54 믿음의 경주/ 히브리서 12장 1절-2절/ 820514금새 선지자 2015.10.31
53 믿음의 경험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60704금야 선지자 201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