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예민하게 하라

 

1986. 9. 20. 새벽 (토)

 

본문:히브리서 4장 7절∼13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어제 아침에는, 우리가 아무나따나 말을 하지 안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 어쨌든지 이 세상과 세상 일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 사람도 몰라서 자살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고, 또 자기가 말을 할 때에 다른 사람이 그 말을 이해를 하고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 말에 응하는 그런, 요새 말로 인기를 끌면 그것이 참 웅변이다, 또 그 말에 성공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도 어리석은 자살 행위를 하는 미친 자요.

말을 할 때에 그 말로 가지고 자기를 유리하게 할라고, 또 그 말로써 다른 사람을 정복하고 설득시켜서 자기의 사람의 되게 할려고, 인기를 끌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다 생명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그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너무 다 하나님의 뜻에 무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말하기 쉽기 때문에 심판에 걸리기가 쉬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지 아니하고 순전히 만물보다 거짓되고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자기를 위해서 도모해서 말을 한다는 그건 참 천부당 만부당의 일입니다.

또 말을 할 때만이 아니고 말을 들을 때도 그러합니다. 말을 들을 때에 그 사람이 어떤 뭐 설득력이 있고 웅변이 있고, 또 아주 유창하게 하고, 또 감정을 일으키는 어떤 그런 특수한 그런 소질을 가진 말이라 할지라도 말을 들을 때는 꼭 그런 게 다 필요 없습니다. 이거저거 말을 들을 때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말을 들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말을 하고 말을 들을 때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말을 들어서, 할 때는 심판에 정죄받지 안하고 심판에서 심판주가 내편이 되셔 가지고 ‘옳다’ 나를 그 심판에서 옳다 인정하고 도와 줌을 받을 수 있는 이런 말을 해야 되겠고, 또 말을 들을 때도 어떤 사람의 말이라도, 뭐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말을 들을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사람의 말을 꼭 들어야 됩니다. 그래야 자기가 자멸하는 그런 미련한 행위를 벗어나지 그렇지 안하면 다 자기가 자기를 망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일 자가 누구냐? 자기를 죽이고 망치는 자는 자기입니다. 다른 이에게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에 말하기는, “사람이 시험받는다” 말은 사람이 망한다 말인데 사람이 망하는 것은 뭐 누구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우연 때문에, 자연 때문에, 운명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됨이다.

자기 속에 자기 망치는 것이 있어서 그대로 해 가지고 망하는 것이지 무슨 자기 밖에 있는 타는 자기를 망치지 않는다.

아무리 마귀가 그렇게 맹렬히 활동을 한다 할지라도 자기 속에 잘못된 욕심이 없으면 마귀는 왔다가, 빛이 있고 어두움이 없으니까 마귀는 놀라 달아나지 들어와 가지고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 지난밤에는, 말은 우리의 운전대와 같다, 말망아지를 끌고 가는 것은 굴레의 고삐다, 고삐 가는 대로 그 말망아지는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또 어떻게 큰 배지마는 그 사공이 키를 잡고 있는 그 키를 따라서 배는 가고 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키 운전을 하는 대로 그대로 배는 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혀는 가장 작은 지체로되 온 몸을 제어한다 이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배의 운전대는 키요, 힘센 그 말망아지의 운전대는 고삐요 고삐 가는 대로 갑니다. 사람은 자기의 미래라는 그 모든 흥망성쇠 생사화복은 자기 말한 대로 그대로 따라간다 요것을 야고보서 3장에 말씀해 놨습니다. 가서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말해 놓지 안했는가? 그러기에, 이 혀는 자기의 온 몸을 지옥불에 사른다고 했습니다. 또 윤회하는 만물들을 지옥불에 사른다고 했습니다. 또 혀는 적은 지체로되 세계와 같은 악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혀를 길들인다는 것이 다른 말물은 길들이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혀를 길들이는 사람은 심히 희귀하다. 혀만 길들여 놓으면 자기는 행복됩니다.

그러기에 그 입에서 쓸데 없는 말 안 하는 사람이 제일 복 있는 사람이니 쓸데 없는 말 안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이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누가 쓸데 없는 말 하겠습니까? 기도할 때는 그래도 남 망하게 해 달라 하는 그런 기도는 하지를 않습니다. 대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해 달라고 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자기가 당장에 우리들이 갖춰야 될 다섯 가지,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영감과 진리 이 다섯 가지를 생각한다는 그것이 당장에 혜택이 안 오니까 ‘그거 가지고 뭐이 될까?’ 이러나 그렇게 해 본 사람은 이제 증거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 다섯 가지를 생각할 때에 우리의 굴레, 우리의 굴레가 되고 우리의 미래의 굴레가 되고 우리의 미래의 배의 키와 같은 우리 말이 이것이 행복되게 됩니다.

자기가 실제로 범할지라도 말이나 소원은 이 다섯 가지 이 실력을 가지고 이 실력대로 살라고, 사죄받은 대로, 칭의받은 대로, 화친받은 대로, 영감대로, 진리대로 살라고 자기가 말을 하고 원하고 이라니까 그것이 차차 자기라는 사람이 성화돼 나가고 거기 따라서 저주가 치료되고 모든 축복이 차차 차차 종자가 생겨지고 심어지고 자라지고 해 가지고 행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난밤에는 증거를 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혀를 금해야 된다” 혀를 금하지 안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 미래를 좋은 그 미래가 오기를, 현재보다 좀 더 좋아지기를, 행복되기를 원해 봐도 소용 없다. 혀를 금하지 안하면 소용 없다.

또 아무리 자기가 또 하나님께 기도하고 뭐 어짜고 한다고 해도 혀를 금하지 안하면 소용 없다. 혀는 세계 같은 악이다 이랬어.

혀는 야고보서 3장에 세계 같은 악이 혀다, 모든 접촉하는 윤회하는 만물을 지옥불로 사르는 것이 곧 혀다 이랬습니다.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성냥불 한개 가지고 뭐 부산 시내를 다 태울라면 다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것을 태우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혀는 지극히 작은 지체이지마는 이거는 모든 윤회하는 만물을 지옥불로 사르는 그 독이 있는 것이다, 세계 같은 독이 있는 것이 혀라 이랬습니다.

이런 줄 알고 그 혀를 단속하지 안하는 사람은 참 그 사람은 마귀에 꼬여서 완전히 정신 이상이 된 사람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생명 있는 사람이 없고 모두 다 죽은 사람이라 그렇게 성경은 말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그러면 과거에는 안식일이지마는 안식일이 주일날로 변동됐습니다.

그것을 벌써 변동되기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을 했고 예언한 대로 이제 안식일이 주일날로 변경됐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일차 창조의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된 것을 항상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구별하는 것을 안식일날 주는 것이고 복되게 하는 그 복을 안식일날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운전하는 사람이, 우리 나라는 더군다나 알 수 있어. 고속도로는 좀 이거 쭉 거석한데 고속도로도 꼬불랑꼬불랑 이런 건데, 크게 보면 꼬불랑꼬불랑하는 건데 그 운전대를 가지고 요리 조리 요렇게 조렇게 운전을 해야 자기가 떨어져 죽지를 안하지 그거 가지고 그냥 쭉 바로만 대고 밀고 있으면 죽을 것 아닙니까?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것이? 그와 마찬가지로 “복 주어 거룩하게 하였다” 하는 말은, 안식일이 주일날로 변동됐는데 이 주일날은 일차 창조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활로 말미암아 시작된 날이 주일날인데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하여서 온 모든 축복,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마암아 오는 축복, 이 두 가지 축복을 주일날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날은 지키는 제도나 하나님이 응해 주시는 그 응하는 것은 변동되지를 안했습니다. 날만 변동됐지 다른 거는 변동되지 안했어.

그러면, 주일날은 뭐하나? 주일날은 첫째 구별하는 날입니다. 주일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래라 조래라’ 자꾸 이렇게 세밀히 그 모든 굴곡을 다 말해서 요럴 때는 요라고 조럴 때는 조래서 이 아주 하나님이 우리 앞에 우리 걸어나갈 자기 진리가 있는데 자기 진리는 일관이 아니고 자기 진리는, 자기 진리는 꼬불꼬불합니다.

왜 꼬불꼬불한가? 자기 일생에 부딪치는 그 현실이라 하는 것은 꼬불꼬불하기 때문에 그 꼬불꼬불한 데 다 맞추어서 요리 꼬불한 데도 길 가운데로 가야 되겠고 요리 꼬불한 데도 길 가운데로 가야 되겠고, 자기 당하는 그 모든 현실이 뭐 여러 수백 수천의 꼬불꼬불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꼬불꼬불한 데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거게서 탈선되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가야 되기 때문에 이거는 심히 복잡한 그 구별을 해야 되기 때문에 구별하는 그 은혜를 주시는 날이 주일날이요, 또 그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육에 모든 복을 이루는 그 능력을 주시는 것이 주일날입니다.

이러니까 주일날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모든 축복,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인한 모든 축복을 담뿍 받는 것이 주일날이요, 이 축복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다시 깨달아서 수정케 하는 것이 주일날이기 때문에 주일날은 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구별하는 것과 모든 실제가 이루어지는 그 실상인 축복을 다 주시는 것인데 이 주일날을 이것을 예사로 알고 사람들이 지키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주남선 목사님은 그때 말하기를 ‘십계명 가운데에 사계명이 제일 근본되는 계명이다’ 이라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그때 그저 스승이 말하니까 들으면서도 부인했습니다. ‘일계명이 제일이지 사계명이 뭐 그래?’ 이랬는데 나중에 차차 자라 보니까 사계명 그날을 하나님이 복 주어 거룩하게 해서 그날 우리들이 일계명으로부터 십계명까지에 지킬 수 있는 거 그 모든 것을 주일날 주시고, 또 잘못된 것을 주일날 수정하도록 해 주시고, 또 그걸 지킬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다 주일날 주기 때문에 주일만 지키면 일계명도 다 지킬 수 있지마는 일계명만 지킨다고 해도 주일날 안 지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는 것이 없기 때문에 헛일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강퍅케 하지 말라 그말은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을 완패케 하지 말아라 하는 말이요, 자기의 마음을 미련케 하지 말라 그말입니다. 미련케 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해서 그 세밀하게 말합니다. 요럴 때는 요리 하고 조럴 때는 조리 하고, 이 쪼그만한 걸로 봐도 운전 기사가 어떻게 그 운전대를 잡으면은 자꾸 노선에 따라서 자꾸 이래 이렇게 그걸 운전을 해야 되지 그 노선은 자꾸 두 번 꼬부라졌는데 저는 한 번만 꼬불트렸으면은 저는 추락돼 죽습니다. 소용이 없어. 죽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번개같이 빠릅니다. 이래서 에스겔 1장에 보면은 “그 영물이 번개와 같이 달아나는데 앞길로 달아나고 있다.

번개같이 우리는 따라 움직여야 된다.” 이러니까, 무슨 범사에 ‘요거는 요라면 안 된다. 요래야 된다. 요거는 또 너무 지내쳤다. 요거는 좀 미달됐다. 요거는 또 좀 부족하다. 요거는 또 지나쳤다.’ 요렇게 하나님께서 세밀히 가르쳐 주는데 우리 마음을 ‘뭐 그렇게 뭘 세밀히 하고 자꾸 뭐 자꾸 자잔하이 그래? 사람이라는 것은 좀 신중해야 되지.’ 이래 가지고 이 믿음이라 하는 것이 잘못하면은 ‘그저 하나님을 든든히 믿고 이렇게 나가면 되는 것이지 뭐 이렇게 저렇게, 저렇게 이렇게 자꾸, 한 가지 일에 대해 가지고 이리 한 번 생각했으면, 한 번 그렇게 생각했으면 섣달 그믐날까지 그만 그대로 생각하는 게 옳지 이래 생각했다 이리 생각했다.’ 아니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생각한 그것이 일 분도 되기 전에 그것이 다시 변동돼서 달리 생각해야 될 일이 있다 말이오. 하나님이 우리를 지도하는 그 지도에 따라서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도는 우리에게 번개같이 빠릅니다.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자꾸 이래요.

왜? 우리의 당한 일이 우리 미련해서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거라고 보지마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일은 그 한 시간도 계속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왜? 사람의 천태 만상, 내가 접촉하는 사람이 천태 만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대할 때에 천 가지 만 가지의 마음으로 변동되는 마음을 대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대할 때마다 내가 거게 따라서 내가 나는 또 변동이 돼야 된다 말이오.

변동이 돼야 되는 것은 그것은 그 사람 따라서 내가 변동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이런 사람의 마음 저런 마음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을 대할 때에 나는 그 사람 마음 따라서 내가 변동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이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너는 이런 마음을 가져라. 또 저 사람이 저런 마음을 가지고 저런 말을 네게 하고 있으니까 너는 이럴 때 그 사람에게 대해서 이런 말을 해라.’ 이 지도하는 것이 뭐 이것이 번개같이 빠르고 우리는 번개같이 움직여야 된다 그거요.

이런데, ‘뭐 믿는 생활 하는 사람이 그렇게 자꾸 경하게 움직여 되겠느냐?’ 이래 가지고 ‘믿음은 꾸준히 일관돼라, 꾸준히 믿음을 일관적으로 이렇게 꾸준히 믿고 변동되지 않는 그런 믿음을 가지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 알았으면 그대로 뭐 언제든지 천인 만인을 대해든지 그대로 대하라 그말이 아니오. 하나님의 변동되지 안하는 그 뜻에 따라서 복종하는 것을 변동하지 말아라 그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우리 현실을 천태 만상으로 변동되는 현실을 줍니다. 천태 만상으로 변동되는 현실을 주고 또 그 현실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다르다 그거요.

내가 말하자면 순종해야 될 사람도 만났고, 또 내가 거역해야 될 사람도 만났고,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안해야 될 사람도 만났고, 또 말을 해야 될 사람도 만났고 그 만난 데마다 내 행동은 달라져야 되겠다 말이오. 달라져야 되니까 변동되지 말라 말은 하나님에게 순종이 변동되지 말아라 그 말이오.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라’ 말은, `믿음이 흔들리지 마라’ 말은, 믿음은 뭐이 믿음인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그대로 순종하는 요 세 가지를 합해서 믿음이라 합니다. 그러면 어데서든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대로 따라서 움직이라는 이것이 믿음인데 이 믿음이 변동되지 말라는 말을 사람들은 미련해 가지고 그만 하나님 믿는다 하는 그거 하나 가지고 그대로 요동치 안하고 꾸준히 가는 그 사람들이 헛일이라.

내가 언제 한번 봤는데 그 사람이 개척 교회 하는데 거게 한 달에 오백 원이라면 요새로 말하면은 한 오만 원 돈 됩니다. 그런데 ‘한 달에 오백 원씩만 네가 부담을 해라’ 하니까 오백 원씩 부담하는 그 부담을 하는데 벌써 부담하고 난 다음에 얼마 동안 지나고 나서 그 일이 자립을 했기 때문에, 그 개척 교회니까 자립을 했기 때문에 자립했으니까 벌써 거게 대한 그 작정 헌금들은 끝이 났습니다. 끝이 난 걸 끝이 났다고 했습니다. 끝이 났다 해도 그대로 오백 원은 바칩니다. 죽는 날까지 오백 원은 그대로 바치다가 갔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는 하나님 앞에 작정했기 때문에 요거는 바친다’ 하는 그런 것보다도 그 사람은 내가 전생활을 볼 때에 한번 뭐이든지 작정하면 움직이지 안해. 작정하면 움직이지 안하고 그저 하나 깨닫기만 깨달으면 그대로 얼마든지 밀고 나가서 끝도 없이, 중단해야 될 때는 중단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중단을 할 때는 중단을 해야 돼.

사람이 밥 먹는 것도 먹다가 그거 조절을 해서 안 먹을 때는 안 먹고 먹을 때는 먹고 이래야 되는 것이지 밥 먹는 거라도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계속하면은 그 사람이 뭐 일이고 모두 다 망쳐지고 만다 말이오. 그런 사람 봤어요. 그런 사람 좀, 말하자면 새로운 깨달음이 없고, 새로운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그 깨달음에 따라서 변동하는 변동이 없어. 그래 놓으니까 그 사람의 구원 이루는 것이 참 답답하게 구원을 이루고 또 그 모든 끝도 다 그렇게 된 것을 봤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자꾸 자기 마음을 자기가 미련케 두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을 미련케 두지 말고 자기 마음을 자꾸 번개같이 움직일라고 애를 쓰고 자기 마음을 새 살같이 예민하게 할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자꾸 예민하게 할라고, 날카롭게 할라고, 민첩하게 할라고 이렇게 하나님이 움직이는 데 따라서 몇십 번이든지, 열 번 움직이면 나도 열 번 따라 움직이고, 백 번 움직이면 백 번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서 자기가 움직일라고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자꾸 슬기롭게 예민하게 만들라고 애를 써야 되지, 자기 마음을 자꾸 예민하게 만들라고 하지 안하고 도리어 정반대로 자기 마음을 부동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마음으로, 또 자기 마음은 뭣이든지 그저 뭐 깨달아 가지고 자꾸 그 깨닫는 데 따라서 자기 마음이 따라 움직일라고 하지 안하고 자기 마음을 미련케 하고, 또 움직이지 않게 하고 하는 그런 자꾸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그저 미련, 날카롭지 안하고, 자기 마음을 자꾸 뭘 깨달아서 알고 잘못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고칠라고 자기 마음이 민첩하도록 만들어 가지고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나 또 자기가 나가고 있는 모든 관련된 사람들이나 그런 데 대해서 좀 더 바로 깨달을라고, 또 깨달은 게 있으면 잘못된 거는 고칠라고, 또 미달된 것이 있으면 자기가 그것을 보충을 할라고 이렇게 해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자꾸 움직여서 예민하게 할라고 아주 날카롭게 하고, 자기 마음이 모든 접하는 데 대해서 정확한 접촉을 하고 정확한 관계를 가질라고 자꾸 이렇게 자기 마음을 움직여 가지고 그렇게 할라고 애를 쓰지 안하고 그 자기 마음을 움직이지 안하고, 다른 사람이 자꾸 그렇게 말하면은 반대한다 말이오.

어떤 사람은 보고서 벌써 그 일이 열 번 지나갔는데 ‘이래야 된다’ 하니까 그것도, ‘이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 자꾸 이래도 처음에 자기는 하나 생각한 대로 그대로 두고서 아무 그 뒤에는 감각도 할라고 애를 쓰지 안하고, 거게 대해서 틀렸는가 생각해 볼라고 하지도 안하고 그만, 벌써 바로 깨달은 사람은 열 번이나 ‘아, 요거 요래 해야 된다.’ 또 고랬다가 요랬다가 자꾸, 자기 현실은 같은 현실 같지마는 현실이 시간 따라 자꾸 다르기 때문에 요랬다 요랬다 자꾸 거기 따라서 하나님 따라 움직이는 그 연습을 이렇게 해서 자기 마음을 슬기롭게, 자기 마음을 아주 민첩하게, 자기 마음을, 새 살에는 조그매만 대여도 아프지 안해요? 새 살과 같이 이래서 조그매만 잘못해도 그 잘못된 거기 대해서 자극성을 가지고 아픔을 가지고 이래야 될 터인데 이거는 뭐 미련해서 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한더란대도 참 도무지 감각이 없게, 자기 마음이 감각이 없고 아무 깨달음이 없고, 또 자기 마음이 뭣을 옳게 바르게 참되게 해 볼라 하는 요 마음을 가지지 안하고 자기 마음을 그만 미련하게 한번 뚝 그대로 똑 무감각한 쇠덩이 모양으로 둬 두는 그런 사람들은 이 구원 이루는 데에 대단히 불리합니다.

그런 사람하고 또 예민한 사람하고 같이 사는 사람은 예민한 사람이 굉장히 희생을 하는 것이오. 희생을 해서 그걸 고쳐 볼라고 아무리,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어서,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하나마 그 사람에 대해서는 ‘뭐 자꾸 그렇게 변동될까, 그랄까?’ 이래서 자기 마음을 강퍅케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또 아는 사람이 그대로 냅두면 망하고 죽을 터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그것을 말을 해서 고치게 하지 안할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종노릇 한다 하는 그런 말 하고 있습니다. 모르니까, 미련해서 모르니까 자꾸 멸망할 길로 걸어가고 있으니까 아는 사람이 부득이 그거 ‘그래 하지 마라.’ `그래 하지 말기는 뭐 그래 쌓고 뭐 지저분하게 자꾸 그런 소리하고 있어? 뭣을 그래 변동해?’ 제딴에는 변동 안 하는 게 크게 아주 의인 줄 알고 굳센 줄 아는데 그것이 미련이라 자멸되는 행위이건마는 거게 대해서 생각을 안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래서, 여기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그런 자들의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순종하지 안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에,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 이런 순서에도 또 ‘아,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로구나’ 또 이라다 ‘아, 이럴 때는 또 이래야 되는구나.’ 그뭐 총총 가르치는 것이 요리 해라 조리 해라 하는 걸 가르쳐 줬지마는 그들은 ‘뭐 그래?’ 하고서 그저 자기 마음들을 움직이지 안해. 마음을 움직이지 안하고 작용하지 안하는 그런 것으로서 하기 때문에 그들이 완패해서 망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이 완패해 가지고 망한 거와 같이 ‘너희들은오늘날이라는 이 오늘날이라는 것은 주일날을 말하는데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언제든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그 말씀을 따라서 어서 움직여서, 가르침을 받는 그 말씀과 네 마음이 어서 하나로 움직여져라.’ 그러면 이 말씀을 가르칠 때 이 말씀과 같이 움직이고 저 말씀 대할 때는 저 말씀과 같이 움직여지고, 또 성경을 읽을 때에 이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성구와 나와 내 마음이 같이 되고 저 성구를 읽을 때는 저 성구와 내 마음이 같이 돼서, 이래서 수많은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할 때에 내 마음과 행동이 그와 같이 움직여져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번개같이 움직이라 했는데 우리 마음을 그저 미련하게, 자꾸 예민하게 하나 둘 셋 넷, 틀렸다 옳다 따지지 안하고 강퍅하게 하는 그런 사람은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련한 사람은 제가 예민한 사람을 보고서 업신여깁니다. 왜? 저는 가만히 뚝 있으니까 예민한 사람이 자꾸 이렇게 해 주거든. 그러나 그거는 마지막에는 망하고 만다 말이오. 마음을 강퍅케 하면 안 돼요.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살아 있습니다. 그 말씀은 전능의 능력으로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뭣이든지 운동력이 있어서 그 말씀에 따라서 순종을 하면은 모든 피조물을 막 움직여져서 응하게 만들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움직이지 안하고 말씀을 배척하고 제 주장대로 움직이고 하면은 모든 피조물 전체가 따라서 그를 망치기 때문에 환경과 주위와 분위기 공기까지 다 망치게 되기 때문에 제가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씀대로 따라서 움직이면 모든 피조물이 전부다 협조하기 때문에 분위기도 공기도 일기도 뭐 전부 다 따라서 움직여서 협조합니다.

그거 또 미련한 사람은 그걸 모른다 그 말이오. 그거 아는 사람이 말하면 ‘뭐 사람 같잖이 자꾸 그렇게 지저분하게 말해?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인가?’ 이번에 우리 장생골 집회할 때도 하나님께서 일기를 조절해 주셨고, 또 한서를 조절해 주셨고, 그 모든 우로를 조절해 주셨고, 모든 그 풍조를 조절해 주셨고, 모든 인간들의 그 모든 관민의 심리들을 조절해 주셨고, 이 모든 걸 다 하나님이,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만 한 일을 했지마는 거게 대해서 ‘하나님이 과연 이렇게 해 주신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열 가지로 만일 움직였으면 열 가지 움직인 걸 다 알아야 그 사람이 만점인데 열 가지 움직이는 걸 다른 사람이 말을 하면 삐쭉삐쭉 웃습니다. ‘뭐 그래?’ 그게 강퍅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도 생활을 하고 자꾸 심령을 살려 이래 나가게 되면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구경을 할 거라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 자신이라도 믿음에 좀 들어갔을 때에는 ‘하나님이 요렇게 하신다 조렇게 하신다’ 하시는 것을, 하루가 아니고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해 요 시간 요렇게 하신다, 저 시간 조렇게 하신다.’ 시간마다 내게 대해서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마는 어떤 사람은 일 년 내내 가야 하나님이 하시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한다 말이오.

그게 마음이 미련이라 말이오.

그 마음을 좋은 줄로 알고 그 마음을 고칠라고 애쓰지 안하면서 ‘에, 저렇게 자꾸 잔소리하고 뭐 변동 많다.’ 그 변동 많다 하는 그 자는 그거 참 미련한 것인데 그자하고 상대하니까, 하나님은 그 예민을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미련하고 강퍅한 그것을 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줬기 때문에 ‘에, 그거 더럽다.’ 하고서 내버리고 차 던질 수가 없다 그 말이오. 하나님이 ‘나에게 예민을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신 거는 저 강퍅한 자를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나만 가지고 살 수 없고 없는 사람 보고 멸시할 수가 없고’ 이러니까 할 수 없어 하나님 앞에 그 일을 하는 것이 복음 생활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은혜에 나아갈 때에는 그 사람이 그만 말이 달라집니다. 하루 종일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이런 나는 기적을 주시더라, 이런 은혜를 주시더라, 이런 축복을 주시더라.’ 기적, 은혜, 축복 전부 아닌게 하나도 없어. 하나도 아닌 게 없어.

이라면은 강퍅한 자들은 말하기를 ‘에, 말쟁이. 뭐 하나님이 그렇게 할까? 전부 꾸며 가지고 말쟁이, 저 사람은 뭐 말은 말이 많아. 그저 제맘대로 이래 주 씨부렁거리는 거라. 전부 거짓말 하는 것이라.’ 이렇지마는 관심 없었기 때문에 깨닫지를 못했다 말이오.

우리 마음이라 하는 이거는 예민한 것인데, 그래서 속언에 말하기를 ‘애기 어머니는 하루 열두 번 거짓말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거짓말합니까? ‘아, 우리 아이가 요 지금 요렇다고 지금 좋아한다, 웃는다. 뭐 이라니까 이란다, 그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 어머니의 그 모든 것을 다 알아듣는 양으로, 알아듣는 양으로 말하니까 제 삼자가 들을 때에 전부 거짓말로 들려지니까 ‘에이고 네가 너거 아이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렇게 네가 생각하는 것이다. 전부 너는 네 주관이고 그거 거짓말이다.’ 아니오. 거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고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아이의 모든 움직여지는 거 희로애락을 그 몸에 해롭고 유익한 것을 다 알아서 거게 따라서 예민하게 봤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강퍅하게 하면 우리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래 강퍅하게 하는 마음을 버리고, 어짜든지 내 마음도 좀 예민하게, 뭣이든지 다른 사람, 같은 일에서 ‘저 사람은 여게 대해서 이렇다고 깨닫는데 나는 그런 걸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 그거 회개하고 자기도 깨닫도록 할라고, 또 그 사람 보니까, ‘이랬다가 요걸 또 요건 요래 하더니마는 요렇게 했다.’ 그 사람은 벌써 그 열두 번이나 뭐 변동을 해서 요래 했던 거 요래 하고 요래 요래 하고 요래 가지고 나중에 보니 그거 완전히 다 이루어져 가고 있는데 이거는 그 미련이 돼 가지고 그걸 하나도 못 해.

다른 사람은 열두 번이나 지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요게는, 예를 들면 미련하게 어떤 한 기계를 조립한다 할지라도 이제 한 사람은 여게는 꽂아라, 요거는 빼라, 요것은 요리 꽂아라, 요게 요거는 조금 크니까 요거는 좀 깎아라, 요거는 기니까 잘라라. 뭐 요래조래요래 자꾸 그만 따라 하니까 요래라 조래라 요래라 조래라 이렇는데, 하나는 뿌욱 거머쥐고, 거머쥐고 자꾸 그 사람이 요래라 조래라 하니까 ‘뭐 그렇게 뭐 하라 해, 그래 하기를? 또 금방 빼라 하더니만 또 금방 또 꽂으라 하고, 금방 또 끊으라 하더니만 금방 또 이으라 하고, 금방 또 깎아라 하더니만 금방 또 부하라 하고, 뭐 어짜라 말이야?’ ‘예 이놈아! 너는 미련해서 이거 한 시간에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이나 움직여야 될 건데 네까짓 거는 하나밖에는 못 움직이니 너는 필요 없어! 나가!’ 쫓아내 버리고 만다 그 말이오. 그렇지 안해? 이와 마찬가지라 그 말이오.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미련케 가지면 이게 아무 일이 안 돼요. 이러니까 나중에 예민한 사람이 있으면 예민한 사람이 골탕 먹고 죽어. ‘까다롭게만 말한다, 까다롭게 말한다.’ 이라니까 ‘잔소리 많이 한다, 까다롭게 말한다, 이는 변동 많은 사람이다, 잔소리 많은 사람이다.’ 네 마음이 강퍅해서 잔소리가 되고 말지 예민하면은 그게 너는 깨닫지 못해도 깨달았기 때문에 네가 미련하기 때문에 번개같이 움직이는 연습을 해 가지고 따라와도 안 될 터인데 그래 놓으면 뭐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칼보다” 칼보다 예리해. 칼보다 아주 민활합니다. 민활하여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여게는 사람을 삼분설을 말했습니까 이분설을 말했습니까? 여기 사람을 몇 가지로 쪼갰지요? 여기는, 관절 골수는 이게 내나 고기덩어리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또 혼과 영, 혼은 따로 있고 영은 따로 있고 여기 삼분설을 말했는데 삼분설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옳은데 또 이분설로 다 모두 나왔기 때문에 그걸 반대하면 또 이단이라고 이래 조롱하기 때문에 그 이분설을 말하나 이분설에 이래, 이분설은 육을 하나로 봤고 삼분설은 육을 둘로 봤기 때문에 이제 여게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삼분설도 알고 이분설도 아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 인간의 그 요소를 아는 사람이지 그 사람이 이분설만 주장하고 삼분설을 부인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오. 아무리 박사라도 모르는 사람이오. ‘삼분설은 이거 이것을 말해서 삼분설을 말한 거다’ 그게 성경이라. 또 이분설 말하는 것도 이것도 내나 성경이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마음의 생각과 뜻을」 이러니까 미련한 것은 한번 마음 가지면 그 마음뿐이라. ‘사람 마음이 변동돼 되는가?’ 변동 안 되는 것은 어떤 데 변동 안 돼야 되느냐 하면은 옳은 마음을 변동하지 말라 말이지. 옳은 데, 마음이 변동 안 해야, ‘나는 죽어도 나는 옳은 마음으로, 나는 가난해도 옳은 마음으로, 급해도 옳은 마음으로, 나는 옳은 마음 따라서 옳은 마음 쓰는 거,’ 바르고 옳은 마음 쓰는 게 변동 안 돼야 되지 그 마음을 기뻐할 때도 있고, 슬퍼할 때도 있고, 걱정할 때도 있고, 근심할 때도 있고, 이거 또 그거 또 연구할 때도 있고 이렇게 마음이 한 시간에도 얼마나 옴직여져야 되는데 움직여지지 않는 그것이 좋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이 자기가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그 마음이 변동되지 안하는 그 마음이 좋은 것이지.

그러면 하나님이 열 가지 마음을 주면 열 가지 마음을 가져야 될 것 아닙니까? 이런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도 감찰하고 생각도 다 감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우리 마음과 생각이 뭘 때라서 움직여야 됩니까? 우리 마음과 생각이 뭐 따라 움직여야 돼요? 누구 따라 움직여야 돼요?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하루 백 번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억억만도 더 돼 있는 종류에 대해서,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 마음이 이릴 때에는 나도 그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저럴 때는 저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또 하나님의 뜻이 이럴 때는 나는 그 뜻 따라 움직이고, 또 하나님 뜻이 저럴 때는 저 뜻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돼야 되고 우리의 뜻이 돼야 됩니다.

누구 자기 것도 더 가지지 말고 누구의 것도 가지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에 따라 움직이는 데 따라서 내가 따라 움직여야 되지 하나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음을 따라서 움직여 가지고 그대로 고정하고 다시 변동이 없으면, 변동 없으면 그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대해서 변동되는 자입니까 변동 안 되는 자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이 열 번으로 움직이면은 자기 마음이 한 번 움직인 그걸 가지고 변동 안 하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움직이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지 안하고 제대로의 변동되는 움직임입니까? 변동되는 것이라 말이오. 좀 예민하게 좀 알아야 돼요.

어떻게 미련한지, 이 교역자들 가르쳐 봐야 미련해서 도무지, 어떻게 강퍅하고 미련하는지 그 마음은 그뭐 ‘내 마음이야 정월 초하루날 먹은 마음 섣날 그믐까지 그 마음이지.’ ‘네가 여러 천번 만번도 더 이와 같이 지금, 하나님의 이와 같이 지금 변동해서 그래야 건설이 돼 나가는 건데 네가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그거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과 같이 드러나느니라」 이러니까 이렇게 우리는 이런 미래에 우리의 모든 생각 한번 가지는 것이나 마음 한번 가지는 것이나 이게 전체가 다 그대로 드러날 터인데 이것은 생각지 안하고 자꾸 우리가 살고 있다 말이오.

그러면, 여러분들 자, 아주 변동 없는 것은 뭐입니까? 돌이 변동이 적소 나무가 변동이 적소 뭐이 변동이 적습니까? 돌이 변동이 적습니다. 돌이 변동이 적어. 또 나무와 이 동물이나 곤충이나 이 생물들,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과 나무와 어느 것이 변동이 많고 적습니까? 나무가 변동이 적습니다. 또 이 모든 짐승이나 소를 먹입니다. 소와 사람과의, 사람의 마음과의 변동이 소가 변동이 많습니까 사람이 변동이 많습니까? 사람과 하나님과 이랄 때 이래 둘을 비교하면은 사람이 변동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변동이 많습니까? 하나님의 변동은 무한하다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의 작용은 이런데 나쁘게 하는 것이 문제이지, 나쁨과, 삐뚤어진 거 옳은 걸 이거 그라면 이거 옳은 걸 몇 번이든지 자꾸 이거 이래 여러 가지로 구비해야 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 밥할 때에 밥에 대한 구비한 요소가 구비돼야 밥이 됩니까 쌀만 하나 가지고 밥이 됩니까? 그 구비 요소가 만일 열 구비 요소가 있는데 아홉만 되면 밥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과 이런 움직임이 하나님 따라 움직여 그 구비돼져야 되는데 구비 안 된다 그 말이오.

이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강퍅하게 말아요. 자기 마음을 미련케 말아요. 미련케 말고 어짜든지 자기 마음을 예민하게 해 가지고 모든 것을 바로 깨닫고, 정확하게 깨닫고, 빨리 깨닫고, 또 깨달은 대로 빨리 움직이고, 우리는 번개같이 움직여야 됩니다. 우리 마음도 번개같이 움직이는 게 잘못돼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서 번개같이 움직여야 된다 그거요. 마음을 강퍅하게 맙시다. 어떻게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지 아무 감각이 없어. 감각이 없어. 너무 둔해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기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을 완패케 하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을 미련케 하지 마십시오. 예민하게 하십시오. 어짜든지 새 살같이 예민하게 하고, 다른 사람 예민한 그걸 보고서 조롱하지 말로 예민한 사람을 따라서 자기 마음도 그래야 자꾸 건설이 있고 진보가 있고 개량이 있는 것이지 자꾸 뚝 그라면 무생물같이 그라면 뭐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송장 같은 사람이 있어.

송장 같은 사람이 있어, 송장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은 참 그거는 일거리나 되지 아무 뭐 취할 가치는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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