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을 통해 4가지를 바꿀 것


선지자선교회 1983년 6월 24일 금야

 

 본문 : 벧전1:3-7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계속해서 증거를 합니다. 별 다른 해석을 하는 것도 없고 그저  그대로 계속 강단에서 증거합니다.

 물론 믿는 자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은 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요 또  계약한 것이요, 교훈하신 것이지마는 하나님의 종들을 통 해서 강단에서  증거하는 것은 당신이 이미 문서로 명령해 놓은 것을 또 새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명령을 거듭거듭 계속 이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명령을  한번 들었을 때에 명령하신 분을 알고 또 그의 명령에 대한 불응한 댓가를 아는  자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마음이 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라도 자기의 모든 의식주나 중요한 것이 그에게 매여 있는 그가  자기에게 명령할 때는 그 명령을 받았을 때에 자기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또 그 명령을 다 행했을 때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또 그 명령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고 들어 버렸는데, 들어서 버렸는데  다시 한번 재차 명령이 오면 그 사람에게 더 짐이 될 것입니다. 또 명령이  거듭거듭 오면은 더 짐이 되고 무거워지고 떨릴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한번 들어 저버렸는데 잊어버렸는데 또 명령이 한번 더 내려  두번째 명령이 와도 자기에게 짐되지는 아니하고 '또 듣기 싫은 소리 또 한다'  하고 저버리고 세번째 명령하면 '내나 그 소리' 듣기 싫어서 그만 듣지도  안합니다. 졸고 듣지도 안합니다. 또 한번 더 명령을 더 내리면 '뭐한다고 자꾸  한번 말했으면 알아들을 건데 자꾸 그래 세속 잔소리같이 그렇게 명령을 할꼬?'  하는 그 사람은 명령한 자에게 대한 경외심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보다 그 명령한 자를 업신여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편찮으실 때는 주일 오 전이나 혹은  주일 설교 하시고 새벽기도를 인도 안 하시고 그러니까 그 말씀을 자꾸  새김질해서 그 말씀에 대한 무거운 그 책임감도 차차 좀 더 가지게 되고 또  조금씩 실행을 해서 마음에 기쁨도 가져지고 이러나 요때는 졔속 증거를  하시니까 도무지 그 주의 말씀 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그만 너무 마음만 눌리고  뭘 해야 될지 모르고 아무런, 간추려지지를 안하고 정리가 안 되니까 도무지  힘을 얻지 못하겠습니다' 하는 또 그런 사람도 있습디다.

 과거 집회 때에 하나님 말씀을 새로 증거하고 또 그 다음에는 딴 말씀을  증거하고 이렇게 증거를 해서 산은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만 마음만 무거워지지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다가  이번에 대구에서는 설교 크게 말하면 셋인데 아 설교를 요번 집회에 세속해서  하니까 참 이번에는 힘을 얻었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디다.

 그 사람의 간중하는 사람들을 제가 살펴볼 때에 이번에 증거하는 데에서 힘을  얻은 사람들은 실상을 이룰라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고 또 과거에 그런 것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요 실상은 이루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습성을 아주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도는  무한한 이치입니다. 끝이 없고 한정이 없는 무한의 이치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무한의 도입니다.

 무한의 도를 인간의 말 몇 가지 되지도 안하는 인간의 말 가지고 그 도를  발표하는 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발표하는 그 이면씨 무한하신 성신의 감동의 역사가 있는 그 성신의 감화로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놓력이 무한한 도리를 말씀해 줄 때쎄 인간의 방언으로  발표할 수 없는 그 무한의 도리를 유한한 사람이 받아서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도 그 말씀을 증거하면서 녹음을 해도 꼭 같은  내용이요 음정을 증거하는 데도 증거하는 사람도 다시 새로운 영감을 받아  가지고 또 새로운 영감으로 또 증거합니다. 또 증거할 때도 새로운 영감으로  증거합니다. 그러면 말씀은 그 말씀이지마는 그 말씀 안에 우리에게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 못 할 그 내용을 영감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그 역사는 한 번  증거할 때 두 번 열 번 증거해도 내나 새로운 영감 없이 그대로 증거한다면 내나  그 영감이 처음에 갔던 그 영감이지마는 만일 증거 하는 사람에게 또 새로운  영감이 와 가지고서 증거하면 열 번 증거해도 열 번 새로운 영감이 또 와  가지고서 더 영감에서 영감으로 영감에서 영감으로 이렇게 증거를 했다고 하면  그 증거하는 꼭 같은 말베서 증거하는 사람도 깨달아지는 것이 말은 꼭 그 말 그  언어는 그 언어 지마는 그 언어 안에 깨닫는 것은 매번 매번마다 달라서  깨달음이 더 충만해질 것이고 또 받는 사람도 깨달음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식해서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그저 구경만 하고 무슨  말인가 구경하고 들어버리는 사람 있고, 또 구경하고 지식으로 기억만 하고  끝나는 사람 있고,또 지식으로 받아서 지식으로 받을 때에 그 지식 안에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을라고 애를 쓰는 그 사람 있고, 또 능력 받아 가지고 앞으로  그대로 실행해서 살 때에 어떠한 모든 배경의 그 방해 역사들이 있을 그것까지를  대비해서 그것까지 방어하면서 받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도 증거했지마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빌 기 (祈)자 빌  도(禱)자니까 하나님 앞에 '뭘 주십시오. 또 뮐 잘못했습니다. 또 내 사정이  이렇습니다. 뭣은 감사합니다." 요 종류의 기도라면 그 기도의 종류는 다  들어갔습니다.

 감사 기도, 또 잘뭇됐으면 자복 기도, 또 그 다음에 자기 사정을 고하는 모든  도고의 기도, 그 다음에는 간구의 기도 이 네 가지는 기도 시작해 가지고서 십  분만 하면 다 합니다. 아무리 할라 해야 십 분 넘어갈 게 없습니다, 십 분 이내  걸리요. 한 이삼 분이면 됩니다.

 그런데 기도의 그 시작을 해 가지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또 하다 보면  하루고 이틀이고 지나가고, 또 밥 먹는 것 모든 것 바쁜 낭파될 사건들도 다  잊어버리고 그만 기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그건 네 가지 기도의 종류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 기도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자로다"  하는 그 묵상입니다. 묵상에 잠겨서 자기는 자기의 세상 현실을 잊어버리고 그  묵상에 잠겨서 며칠도 이래 날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그것이 뭐이냐,? 다  묵상이지 뭐 하나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이 몇 가지 기도 그건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이 오늘 봉독한 가운데에서 네 가지 회개를  말했는데 첫째가 죽은 기쁨을 버리고 산 기쁨으로 바꿔라, 다시 말하면 근심  걱정으로 살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라, 노래 부르며 살아라,  노래 부르며 살아라 그것을 기쁨으로 살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쁨으로 살라 말은 노래 부르면서 살라 말이요,노래 부르면서 살라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라 말이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라 말은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서 기뻐 즐거워 못 견뎌 기쁨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라 하는 그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기쁨을 바꿔라. 이 죽은 기쁨  그런 기쁨을 가지고서 사는데 죽은 기쁨은 자기를 죽인다. 죽은 기쁨이 자기에게  오면은 자기를 죽인다. 산 기쁨을, 회개하고 산 기쁨으로 바꾸어 가지는 히개를  해라. 산 기쁨은 자기에게 와서 있는 것만치 자기를 살편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그 계과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서 기뻐서  자기가 노래 부르는, 찬송하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서 기뻐 노래 안 부를 수  없어 노래 부르면서 사는 자 되어져라 그렇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를, 뭐 자존자라 창조자라 천번 만번 외워봤자 소용  없습니다. 그것 안 됩니다. 천번 만번 외워도 소용이 없소. 자기가 자존자에  대해서도 가만히 눈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에 묵상을 하는 가운데에 자존자라는  그 인식이 그 지식이 자기에게 꽉 배서 자기 주관이 그만 '우리 아버지는  자존자라'하는 그 사람으로 완전히 변질이 되어지는 그것이 오랫 동안 묵상 하는  가운데서 되어지는 것이지입 으로 줄줄 외우는 것 가지고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래서, 다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면서 살아가라.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자기가 생각하고 궁구할 때에 눈감고 가만히  있는 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자꾸 생각합니다. 연구합니다.

이라니까 암만 생각하고 연구해도 자기에게는 그렇게 뭐 기뻐 못 견딜 그건  기쁨이 나오지 안하는데, 그 안 하면 그것을 성경에는 찬송하면서 살아가라  했는데 아무런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도 기쁨이 안 나오니까 자기는 성경대로의  사람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것을 탄식을 하면서 '왜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도 기쁘지  않을까?' 이제 그 고민 가지고서 한 시간도 지나고 두 시간도 지나고, 하루도  지나고 열흘도 지나고, 어떨 때는 한 달도 두 달도 명 달도 그 마음 가운데  그것이 근심이 돼 가지고서, '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도 나는 기쁘지  안할까?'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 보낸 그 모든  구속의 과정,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시고 우리를 구속한 것 우리가 다 지식적으로  많이 배워서 외우고도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자기에게 기쁨이  솟아나지 안하는 이게 고장입니다.

 이래서 기쁨이 자기에게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만 생각합니다. 생각을  하니까 조금씩 그 이성, 이성 비쾅으로 기쁨이 생겨 나읍니다. 이성 비판 그까짓  거는 또 아무것도 아니오.

 이성 비판으로 기쁨이 생겨나와 가지고 거게서 자꾸만 이래 몰두해 가지고  생각하고 또 이리저리 주 맞춰서 비교도 해 보고 비판도 평가도 해 보고 생각도  해 보고 졔산도 해 보고 이러니까 이성적인 기쁨이 나오다가 그 다음에는 이제  양심적인 기쁨이 나읍니다. 양심을 가지고 양심을 거게 대해서 양심이 와서  판단해 주는데 참 기쁩니다. 양심이 판단해 주는 그 기쁨은 다른 데에 제재를  받지 안하고 벌써 제재받는 매이고 얽매인 그런 모든 끄내끼를 끄트러기를 세상  줄을 확 벗어서 자유했을 때에 그때에 양심이 와 가지고서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그 만치까지의 과정을 만드는 데는 상당히 힘이 듭니다.

 양심적인 기쁨이, 양심에서 나오는 기쁨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성신의 감동의  기쁨이 나옵니다. 성신의 감동의 기쁨이 딴게 아니고 양심의 느낌의 기쁨보다도  훨씬 깨끗하고 원만하고 정확하고 힘이 있습니다. 영감의 기쁨이 나읍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데서 나오느냐? 자꾸 자기가 생각하고 또 이리저리 비판해 보고  연구해 보고 이러는 가운데에서 이성의, 이성이 증거하는 이성적 기쁨이  나왔다가 양심이 주는 양심적 기쁨이 나왔다가 영감의 기쁨이 나온 것이 그것이  전부 하나님 아버지의 이 구속의 은총을 생각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그  구속으로 인해서 자기가 기뻐진 것입니다.

 그러면 거게서 그 깨달은 기쁨을 가지고 네가 그 기쁨을 가지고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찬송하는 자가 돼 가지고 살아라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인데 우리는 그 근방에 가 지도 안했소. 얼마나 외식하는  자입니까? 이래도 하나님 말씀은 한 번 듣고 두 번 들으면 아예 그것은 사람이  돼 먹기를 그저 구경하는 것으로 자기는 도를 상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 번  뭐인가 구경하고 나서 두 번 나오면은 한 낸 구경한 것 새것이 아니니까 재미가  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만 그 성경만 읽으면 잠이 옵니다. 두번째 읽으면 잠이  오요.

 그러나 이 말씀이 어떤 자가 명령하신, 명령하신 분이 어떤 분이고 또 이  명령을 준행하고 안 하는 데 어떤 결과가 맺어지는 그것을 아는 그 진실한  사람은 그 명령이니까 실행을 하기 전에 명령을 들으니  기쁨이 있지마는 기쁨이 있고 난 다음에 한번 더, 지식적으로는 기삣는데  지식적으로 기쁜 것을 이성을 가지고서 이성적으로 그 말씀을 분석하고  졉촉하니까 어깨가 묵직하게 무거운 짐이 혀입니다. '내가 탄식하는 것은 무거운  짐진 것과 같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묵직 새집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제  양심으로 자기가 생각해서 자기에게 생각해서 양심적인 기쁨이 나올 때는 벌써  자기 이상의 형이상학적인 벌써 인간 요소를 떠난 거기에 접선이 돼 가지고서  손을 거머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다음에 성신의 감동이 왔을 때에  기뻐 찬송하는 것이 그것이 여게 말한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는 이렇게 좀 진실하고 권위 있고 가치 있고 참됩니다.

이것이 명령이오. "찬송하리로다' 하는 것은 찬송 안 하면 죄가 됩니다. 이렇게  찬송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찬송하게 되는, 찬송하게 되는 것은 기뻐서  찬송하는데 그 기뻐 찬송하는 그 기쁨의 힘과 또 찬송하는 힘 그것은 뭣의  힘입니까? 뭣의 힘입니까 누구의 힘이요?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OOO씨?  누구의 힘이지요?  처음에 지식적인 기쁨이 있고, 그 다음에 비판하는 이성적인 기쁨이 있고, 그  다음에 인제 한 단계 넘어 양심적인 기쁨이 있고, 그 다음에 들어가면 영감적인  기쁨이 있어서 그만 못 견뎌 노래를 부릅니다.

 빌립보 옥중에 있는 바울이 매를 뚜드려 맞아서 온 전신이 참 상처가 돼  가지고서 옥 속에 깊숙이 갇혀 가지고 있는데 자꾸 이렇게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니까 그만 '내 주는 강한 성이요' 하는 그 찬송을 했는지 그만 찬송을 해  버렸습니다. 찬송이 터져나왔어. 그 찬송은 누구의 힘의 찬송입니까? OOO씨?  뭐라 하노? 누구의 힘의 찬송이라 해? 안 들려, 몰라. 누구의 힘의 찬송인고  하니 그것이 성령의 힘의 찬송입니다, 성령의 힘의 찬송. 그러면 성령은  하나님이시오.

 그러니까 그때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가지고 모든 죄수들  결박이 다 풀어지고 옥문이 열려지고 그만 그때베 그 지방 세이 완전히  뒤벼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바울을 뚜드린 책임자 옥사장이 그날 밤에 바울 앞에  와서 자복하면저 그날 밤에 회개하고 새레받고 그날 밤에 빌럽보 교회가  섰습니다.

 이렇게 이 "찬송하리로다" 하는, 찬송하리로다 하는 이 찬송을 뭐 해석을 붙일  필요도 없어. 붙일 필요도 없이, 해석은 어데 붙는고 하니 '과연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으로 인해서 감사의 찬송이 몸이 아파도 이 찬송이 나오겠나?  살림살이가 흔들거려도 이 찬송이 나오겠나? 또 사업이 실패가 돼도 이 찬송이  나오겠나? 공산주의가 와도 이 찬송이 나오겠나?'  그 찬송은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서 기뻐 찬송하기 때문에 그 찬송의 원인은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동이 없어. 원인이 변동이 없으니까 그 결과는  변동이 없는 건데 그 찬송이 내 환경이 달라진 데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그것은  내게 있는 고장이지 기쁨의 원인 찬송의'원인이 변동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러니까 기도가 그거요, 다른 게 아니라. '자, 생각해 보자.' 생각해 보니까  참 기쁩니다. 기뻐서 혼자 생각하다가 참 자기가 찬송 안 할라 해도 찬송이  나옵니다. 뭐 엉머거리같은 소리라도 그만 찬송이 나오요. 찬송이 나왔는데 '이  찬송이 어데서든지 이 찬송이 내게 끊치지 안 하고 이 찬송이 계속될 수 있나?'  이제 이것 생각하는 것이오. 생각을 하니까' 이런 현실을 만날 때에 어찌  되겠느냐?'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아니까.

 보니까 '그럴 때는 내가 찬송이 이것 변동되겠는데' 이러다가 굴 속에나  방안에서 앉아서'그뭐 그게 그렇다고 이 찬송이 변할 수가 있겠느냐? 이 감사가  변할 수가 있으며' 이렇게 참 생각하면 내 몸과 생명을 다 팔아도 구속의 은총의  먼지만한 뽀스라기 한 개도 댓가가 안 됩니다. 못 삽니다. 이건 구속을  받았으니까 기뻐 못 견뎌서 어데 서든지 이 기쁨은 변동 없어. 내가 이 기쁨을  잊어버리면 내가 배은자지.

 이래 가지고서 이 기쁨을 자기가 계속 가지고 찬송하는 마음을, 찬 송을 소리로  안 부를지라도 찬송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래 지내다가 어떤 사건이 턱 닥칠 때에  그만 그 기쁨이 없어지고 감사가 없어지고 찬송이 없어지고 그 근심이 나을 때에  그때에 저를 압니다. 요렇게 평소에 자기가 찬송하는 자가 될라고 애를 쓴 자가  자기가 현실에서 이제까지 자기가 변화된 줄 알고 만들어 놓은 감사와 기쁨이  환경의 어떤 걸로 인해서 바싹 깨질 때에 그때에 자기 허무한 것을 깨닫게 된다  말이오. 그게 신앙이라. 그러기에 다른 뭐 해석하지 안하고 '찬송하리로다 하는  이 한 말씀을 성경을 보고 생각 안 할 때는 몰랐지마는 요 제목이 자기에게  떠오르고 난 다음에는 '찬송하리로다 내가 찬송을 과연 할 수 있는 사람이냐?  그러면 찬송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아는 대로 해석도 해 보고 분석도 해 보고  비판도 해 보고 평가도 해 보고 이새 가지고서 자기 주관에서ㅍ'과연 이 찬송은  안 할 수 없다.' 이 자기가 됐습니다.

 그러면 또 앉아 또 생각하요. '안 할 수 없으면 이 찬송이 그러면 내가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어떤 어떤 환경으로 변해질 터인데 변 해질 그때도 이 찬송이  변함이 없을까?' 또 자기 혼자 또 생각합니다. 이러면 '그럴 때는 변해지겠다.

그럴 때 변해질 수가 있느냐?' 자기 혼자 다짐합니다. '그렇다고 해 가지고 내가  이 찬송이 변할 수가 있으며 이 기쁨이 변할 수가 있겠느냐?'  이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현실을 주시면 그 현실에서 그 찬송이 흔들릴 때에  자기를 새닫게 되고 또 흔들린 거게서 새로 단속째서 흔들리지 안하도록, 세상이  어븟게 한다 해도 그 찬송이 변동되지 안 하도록 이렇게 자기가 자꾸 그 묵상  가운데에서 이루어 놓은 건설이 실상에 가 가지고 흔들릴 때에 깨질 때에 또  거게서 또 묵상으로 조성하고, 조성한 것이 현실에 가서 흔들려서 깨져도,  깨지고 얼마 깨지고 좀 남은 게 있으면 거게서 또 묵상으로 조성하고 또  현실에서 그 완성을 이루고 이렇게 나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기에 뭐 기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제목을 가지고서 기도하는 것  아니오.나는 오늘 꽃마을 그 기도원에 가 가지고 누워서도 앉아서도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그겁니다. '환난을 시험으로 바꿔라. 환난을 연단으로 바꿔라.

환난을 상급으로 바꿔라.' 하는 것 그것 자꾸 그것만 자꾸 이래 생각하다  보니까, 생각하니 이럴 때도 나오고 저럴 때도 나오고 벌써 내가 미래에 그  생애를 이루기 전에 알아서 미래에 내게 닥쳐질 그 실상만치 내가 실감을  가지고서 접촉을 해 봤는지? 혹은 그 이상으로 접촉을 해 봤는지?  제가 과거에는 미때에 대해서 접촉한 것이 내가 접촉할 때는 열 가지나 접촉이  되지 싶어서 생각을 해 가지고서 묵상 가운데서 이렇세 모두 다 윤곽도 짜고  세포 조직도 하고 이렇세 생각해서 한 그것이 실상을 올 때는 그 열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도 안 오더라 그거요. 다섯 가지도 안 오니까 그게 뭐인지  모르게 그만 그냥 그만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6·25도 그렇게 지내보냈고, 왜정 말년도 그렇게 지내버렸는데, 6·25 때  마지막에 한 달은 녹아났어. 주님에게 묻지 안하고 그 반사 들이 와 가지고서  말하는 통에 그만 그말 듣고서, 밥 먹으면서, 오전 집회 인도하고 나서 밥  먹으면서 슬쩍 들으며 '그러면 그래 해 보람' 묻지 안하고 그말 해 가지고 그것  때문에 한 달 동안은 녹아났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나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해 주신 것이라. 그때 그런 일이 없었으면 나는, 우리가 믿음의 전투를  해 나갈 때에 가장 사랑하는 자 신임하는 자를 통해 가지고서 마귀의 화살이  들어 온다, 화살이 들어을 때에 기도하지 안하고 묻지 아니하고 한 행동한 것이  내게 있는 전 담력과 평강과 용기를 다 제거해 버리고, 그 한 죄악이 그렇게  제거해서, 그 없으면, 있을 때는 참 천국 생활 했는데,  아주 6·25 때 기쁜 생활 했습니다. 기쁜 생활해서 다른 데는 다 피난가 버리고  다 뭐 목사들도 피난가고 장로들도 피난가고 다 피난가 버리고 예배당 다 비워  주고 이랬는데 제가 있는 위천교회 예배당에는 거게 점령한 지 두 달까지 부흥회  했어.

 부흥회 하니까 본교회 교인은 한 팔십 명밖에 안 되는데 다른 데서 i아무래도  백 조사님 있는 데 가야 피난한다' 이래 가지고서 각처에서 얼마나 모여들었든지  한 사백여 명 모였어. 모여 가지고서 계속 오전, 새벽, 밤 집회 하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저놈이 지금 우리 망하라고 기도하고 지금 종 하루 세번씩 치고  이러니까 거걸 어떻게 해서 처 벌하나?' 하는 그게 날마다 연구라. 그 소식이  날마나 들려와. 들려 오거나 말거나 우리는 기쁨으로 집회했습니다.

 마지막 아침에는 설교할 게 없어,인제 타 했으니까. '이렇게 준비해라 이렇게  준비해라' 다 했으니까 뭐, 그래 내가 그날 아침에 말하기를'이제 설교할 것 다  하고 할 설교가 없습니다. 이제 오늘 아침세는 할 설교 없으니까 마태복음 5장  산상보훈이나 한번 읽어봅시다.' 산상보훈 한번 읽었어. 그거 설교가 아니고  그때 한번 읽기만 했어.

 그 읽어 내려가니까, 저 출입구가 둘인데 출입구 둘에서 하고 또 비상구 있는  데 그 비상 출입구하고 거기서 뭐이 철컥거려. 거리거나 말거나 계속해 나는  그라고 있는데 보니까 인민군 그 군인들이 쫙 돌아 포위하고 있어요.

이러면서'빨리 나오라'고. 저 앞에서'빨리 나오라' 이러는데, 또 뒤에는 옆에  인제문에서는 지키고 뒤로 도망갈까 싶아서 지키고 있고. 빨리 나오라고. 그래  나는 암말도 안하고 지금 열심히 지금 그때 인제 그때부터 설교를 합니다.

하니까 이만기 목사님이 그때 집사라. 믿음 있는 집사는 그 이만기 집사  하나뿐이라. 하도 뒤에 호퉁을 쳐 쌓는데 내가 자꾸 설교만 하니까 내가  모르는가 싶어서 소리 하러 온다고, '가 소리 하라!' 쌓아니까 들어와. 이만치  걸어 들어왔어. 내가 강단에서 야단을 쳐 '어데를 들어오노, 들어오기를! 뭐하러  들어오노, 들어오기를! 예배나 보지.' 고함을 치니까 그만 그 이만기  목사님이-저기 와 앉았을 거라.- 그만 건이 나 가지고 오그려 가지고 나가데요.

그래 인제, 그래서 설교 다 하고 주기도문으로 폐회하고.

 그래 인제 나갔지요. 나가니까 총들고 나를 앞세우고 가자 해. '가자' 가니까  사택으로 가. 사택으로 가더니마는 첫 말에 하는 말이 무슨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착취-집을 보니까-착취는 안 했구먼.' 그말이 그래. 그래 나는 요새도 말이요,  아예 이게 와 가지고 언제 당할지 모를 터이너까. 옷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한  것, 또 지금 요때는 내가 그 마음이 있습니다. '요새 이거 지금 소지품이나 이  농 안에 의복이나 이런 것, 내의도 한 두 벌이나 요런 것 외에는 둬 둘 것 없고  이것 모두 정리를 해야 되겠다. 과거에는,' 백지 주님 때문에 당하면  좋지마는'이놈 이 좋은 것 사치물 뒀구나' 이럴까 싶어서, 뭐 별 사치물은 없  지마는 언제 한번 정리를 해야 되짓다 하고서 오늘 할라다 오늘도 못  하고 그만 요번 주간 안에 못 할까 싶습니다. 하기는 할 겁니다,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애.

 그래 나중애 또 거기 았타가 가자 째요. 저리 가자고서 따라가니까 가더니마는  가면서, 내가 있다가'거게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저거가  그새 와 가지고서'나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그래 허기 때문에. '거게도 뭐  신앙을 그런 자유가 있습니까?' '자유 있습니다.' 이라더니마는'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이라더니마는'돌아 가십시오" 그래. 그래 열적게 가라 하기 때문에  왔지.

 오니까 예배당쎄는 한 대여섯 명 남은 사람, 나머지기는 뭐 도망을 다 가  버켰고. 대여섯 있는 사람들은 곡성이 진동하고 야단입디다. 그럴 때는 그랬는테  그만 그 마치고 난 다음에 마지막 그날 그만 묻지 안하고 세배당 위에  예배당이라 하는 그것 뭐 교회라 하는 것 뭐 처어치라 하던가 뭐라 하던가 이래  쓴다고 저거가 그래 쌓아서 '그러라' 했더니마는 그뒤에 그만 그런 낭파를  당했어.

 내가 무슨 말하다 이리 나왔노? 뭐, 크게 말해. 어떤 일이든지?  그래,그래.그거야,움지.그래 그때에 벌써 6·25가 나리라고는 생각지 안했지마는  왜정 말년을 통과했기 때문에 '앞으로 뭐이 올지 모른다 그런 것을 함부레  예상을 여러번 해서 연습을 여러번 했다 말이오. 여러 수백 번 뭐, 수백 번 해.

수백 번 했는지 수천 번 했어. 그랬는데 그 인민군이 와 봐도 연습한 것보다는  아주 시쁘다 말이요, 아주 성글어. 렷 가지 안 돼. 그래서 그때는 잘  지내왔었는데 그만 그때 미혹을 받는 그 일을 내가 기도하지 안해 가지고서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한 것 모양으로 내가 세일 신임하고 있는 이  주일학교 반 사들, 저 천세욱 장로님도 저기 와 있어. 천세욱 장로님도 거기  왔을 거라. 왔어. 천세옥 장로님 또 신임이 뜻뜻한, 혼자 있는 그분, 내가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니까 '이걸 이랬으면, 인민군이야 무섭지 안 하지마는  공습이, 사람이 너무 많이 출입해서 그러니까 그 위에 씁시다.' 그래 쓸라 해서  그걸 '그래' 했는데 나중에'했습니다' 하는데 가슴이 털컥 해. '빨리  끌어내려라. 안됐다.' 내리기는 뭐 즉시 끌어내렸는데도 뭐 그때, 묻지 안하고  하나님을 믿지 안하고, 하나님 믿는 거, 하나님 믿으면 그런 건데 그세, 그걸로  쓰면 공습 안 온다는 것이니까 미군 믿음이라 말이오. 하나님이 그렇게 삐꿔요.

아주 시기 많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시기 많은 하나님이라. 어떻세 새부리가  많은지? 뭐 마음만 조금 딴데 가도 그만 빽 돌아서 가지고 아예 그 다음에  담력을 주지 않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참 한 달 동안 고통 되게 당했어. 그때  처어치라고 쓴, 저게 천세욱 장로님 저기 보니까 저기 와 앉았구만, 보니까.

이만기 목사님도 저기 와 앉았을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이 세약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있고 예언으로 주신 말씀도 있고, 또 당신이 명령으로 주신 말씀도 있고 또  당신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요구의 말씀도 있고 이런 건데 이 말을 우리가 들을  때에 말하신 그분이 얼마나 진실하신 분 이시니 지극히 크다고 말이요, 지존자로  뭐 자존자로, 지존자면 그익 말씀이면 크지. 지극히 크신 분이라면 그의  명령이면 크지.

 그래 이 말씀을 들으면 자기가 삼가 듣고, 그자에게 하나님께서 은 총을 주시지  들어 가지고 귀에만 기억만 하고 두 번 말하니까 '에, 듣기 싫다. 또 말한다.'  명령을 말하니까 안 지키고 나서 두 번 말하니까'아,듣기 싫다.' 그게 얼마나  맷정입니다. 그게 바로 맷정이요, 맷정.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 진실한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그 말씀대로 어떻게 하면 실행을 하갰느냐?' 그때부터 그 실행의  완료가 되기까 지는 항상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또 생각나고 또 걱정되고  근심하고 또 생각하고 '그럴라고 하면은 무슨 애로가 있으며 무슨 마찰이 있을  것인가? 그거는 어떻게 대비를 하고 어떻게 하고' 뭐 일편단심 거게 대해서  무거운 짐이 돼지는데, 듣고 나서는 버려버리고 두 번 말하면 듣기도 싫고 또  새것 듣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가증스럽고 얼마나 외식이고 얼마나 매를 뚜드려  맞을 그 징조입니까?  여게 와 앉았는데, 좀전에도 와서, 나를 애끼느라고 하지요."말씀을 한번 하면  우리 다 알아듣습니다.다 알아들었는데 또 하고 또 거듭거듭해서 시칸이 많이  가니까 처음에 들었다가 나중에 두 번 세 번 말하면 그만 오히혀 듣는 것도 그만  들리지도 안하고 그만 졸음도 오고 이런데, 다 알아들엇는데'그 말을 하면서,  내가 그래 암말도 안 하고'그래요?' 하고 이러니까 그 변명할라고 나중에는 뭐  어떻고 어떻고 한참 자꾸 변호를 하고 쌓습디다.

 그래도 내 속으로는 딱 단정하기를'여보시오,자기가 지금 그 외식을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마음 가운데 고민을 허으며 얼마나  근심이 됐으며 얼마나 느꼈으며 이 말씀을 얼마나 묵 상을 했는가?' 묵상한 게  있으면은 누가 그 말만 해도, 그 말만 하면 깜짝 놀라지고 '아' 이래 되는데  묵상 안 한 증거라 그말이오. 묵상 안 한 증거라.

 이러니까 묵상을 해 가지고서 나중에 지식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양심으로,  양심에서 영감에 도달해야 성령 그분이 와야 놓력이 와 가 지고 내게 실지  효력을 내는 건데 그 안 오면 효력이 뭐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외식하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우리가 지금 평안 무사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그 은총을 생각할 때에  기쁘고 즐거워서 찬송이 나오고 못 견뎌 찬송이 나오고 혼자, '저 예수  미치괭이라' 할 만치 기쁨의 찬송이 나오고,  오늘 아침에 어떤 청년 하나 왔는데 예수 미치괭이가 돼 가. 여기 왔을 거라.

예수 미치괭이가 돼 가는데, 예수 미치괭이가 돼 가야 됩니다. 예수 미치괭이가  돼 가는데 그대로 이제 자꾸만 나가면 나중에 불건전한 신비주의자가 되고  정말로 미치괭이 돼 버려요. 그래 내가 오늘 아침에 '이제는 지식과 감동의  연구를 했는데 지금부터는 그 실 험으로 가십시오. 실험 연구에 나가면 다시  고칠 게 많습니다.' 이러니까 '예, 알았습니다.' 어짜면 그분이 좋은 목사가 될  것 같애.

 그저 말씀을 들어서 흘러 떠내려버리는 그런 사람은 헛일입니다. 지상 명령인데  어떤 명령인데 그 명령을 듣고 저버릴 수 있습니까? 그 명령을 들을 때는 반드시  책임이 있고 뒤에 가서 계산할 날이 있는 것인데. 그 계산이 심판에 가서 계산할  게 아니고 이 세상에서 계산하는 것은 예비 시험이 있으니까 예비 시험을 잘  통과해야 실지의 시헙인 심판을 퉁과합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요 하나만 해도, 내가 어데서든지 아버지의 이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에 기뻐 못 견디는 이 기쁨이 내게 오는 어떤 것이라도 이  기쁨이 잡아먹어 버려서, 재아먹어서 이 기쁨이 그걸 삼켜버려서 이 기쁨 앞에  어떤 그 근심이나 걱정이나 고통이나 이건 것이라도 살아 있지 못할 만치 그것이  이 기쁨 속에 다 삼켜지고 녹 아져야 그래야 내가 개별로 만나는 현실보다도  6.25동란 같은 그건 하나님이 특별히 만든 그런 대조성의 그런 현실을 만나도  퉁과할 수가 있지 조그만한 시험이 와도 통과 못 하는데 큰 시험에 통과한다고?  그것 안 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거짓되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어짜든지 우리가 은혜를 깨달아서 감사로 인해서 기쁨의 찬송되는  이것도 어데까지, 내게 찬송의 할 만한 그 힘이 어떤 것 어 데까지 이길 수 있는  찬송의 힘이 있는지? 내 재산이 없어지고 욥과 같이 다 그리 돼도, 그리 돼도  그런 것을 능가할 만한 기쁨의 찬송이 되는지? 베드로 모양으로 마지막에 사형을  당해도 사형 당하는 그 사형도 이 기쁨의 찬송이 그것이 다 그런 것을 능가해서,  십자가 못박히다가 '나는 감히 이렇게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내가 주님같이 박힐  수가 없으니까 나일랑 꺼꾸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주십시오' 하는 그 간구를  하면서 감사하는 그런 찬송이 우리에게 있는지?  그래서, 그 다음에는 또 시간 없어 해석을 다 못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지저분한 뭐 열 가지고 백 가지고 천 가지고 제가 무슨 독하고 어려운  근심 걱정 고퉁이라도 자기 개별적으로 당하는 그것을 다 잡아 삼켜서 능가하고,  그런 게 있어도 그런 것을 밟고 넘어서서 감사로 인해서 기쁨의 찬송이 나올 수  있는 그 찬송이 우리에게 있어야 큰 시험 6·25같은 그런 환난 시헙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는지?  기쁨도 보면 전부 썩을 기쁨이오. 그뭐 기뻐 좋아하는 것 보면은 자기 조그맨한  욕심이 하나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는 것, 또 몇 사람이 자기를 비행기를 태워서  좀 칭찬해 준다고 기뻐하는 것, 뭐 조그만한 뭐 소득이 생겼다고 기뼈하는 것,  뭐 조그만한 그런 지저분한 그건 기쁨 그것뿐 이지 참 아버지의 이 대속새 주신  이로 인해서 기뻐하는 이 산 기쁨, 그 외에는 산 기쁨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죽은 기쁨을 이것을 회개를 하고 산 기쁨은 내게 오면은 점점 나를  살려주고, 나를 강하게 해 주고, 나를 자라세 해 주니 산 기쁨으로 바꿔라. 요  한 마디도 우리가 묵상하는 데는 명상하는 데는 하루도 좋고 열흘도 좋고 한  달도 좋고 몇 달도 좋습니다.

 후란시스가 자기 제자가 가 가지고, 한 달 동안인가 같이 기도하러 가 가지고  보니까 기도하는세 항상 그거라. 그 묵상이라. 세 가지뿐이라.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누굽니까? 주의 고난은 어떠하십니까?'  그라면서 자꾸 생각해요. 그것이 성자들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성녀들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회개는 이게 쉽지 안해. 기쁨을 바꾸는 거기 대해서 착수도 안해 보고  죽은 기쁨이 뭣뭣 있는지! 죽은 기쁨이 뭐 있는지? 죽은 기쁨이 있다고 해도  죽은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 산 기쁨이 뭐인지? 그 사람에게 무슨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죽은 기쁨을 알아 요 기쁨을 산 기쁨으로 바꿀라고  하니까 얼마나 애로가 있고 얼마나 고통이 있는 그 애로 고통을 통과하는 거게서  자신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바꾸는 회개를 해라.

 그 다음에 둘쌔는 뭐이지요? 둘째는 소망을 바꾸는 회개를 해라. 그전에는 죽은  소망인데 전부 죽은 소망인데 예수님을 우리가 믿기 전에, 믿기 전에 우리도  전부 죽은 소망으로 살았고 땅위에 있는 수많은 세계세 있는 모든 인간들이 뭐  상둥 인물이나 유식한 인물이나 무식한 인물이나 병신이나 뭐 못났거나 잘났거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소망 가지고 제대로는 살기는 사는데 그 소망 전부가 다  죽은 소망입니다.

 자, 죽은 소망 아닌 것이 뭐 있소, 있기를? 저 집사님! 대구서 이까지 와  가지고 조네. 죽은 소망 자, 집사님한테 있는 죽은 소망 하나 말해 봐. 죽은  소망이 뭐인지? 하나만 말해 봐. 예, 그래 죽은 소망. 모두 다 막 바쁩니다.

바쁩니다. 뭣 때문에 바쁘노? 죽은 소망 그것 달성할라고 바쁩니다. 가는 사람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오는 사람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시비하는 사람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총각들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처녀들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사장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직원들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뭐 아버지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엄마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뭐 아들딸도 죽은 소망을 인해서,  아침에 시간 됐다. 어서 가거라, 어서 출발해라. 도시락 가지고 가거라. 그것도  다 죽은 소망을 인해서. 전체가 죽은 소망입니다. 이 죽은 소망을 가지고 이  소망으로 사는 우리들이 이 죄를 회개하고 너희들에게 우리들에게 산 소망을  주셨으니까 산 소망과 바꾸는 이 회개를 해야 됩니다, 산 소망.

 그러면 산 소망 가졌으면 그 사람은 그만 염세주의로 세상에서 자 살해야  됩니까? 아니오. 죽은 소망으로 사는 인간들 속에 같이 죽은 소망의 그 형태  속에서 산 소망을 거게서 성장시키고 산 소망을 거게서 만들고 산 소망을 거게서  성장시켜 갑니다. 이러니까 다 같이 껍데기는 같이 살았지마는 이 사람은 죽은  소망 으로 살았기 때문에 멸망받고 다 같이 살았는데 그 사람은 남 모르는 산  소망을 그속에서 바꿔 이루어 갔기 때문에 그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지.

 이러니까 이 죽은 소망과 산 소망을 바꾸는 이 회개를 우리가 해야 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바꿔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 가지고  있어도 잠깐 잘못 생각하면 그만 착각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이 죽은 소망에서  살기가 쉽지 근본적으로 죽은 소망을 소망으로 가진 사람은 예수 진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산 소망으로 바꿔 가지고 산 소망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고, 하루 종일 생활하는 가운데서 산 소망이 달성됐으면 '오늘 수입이  있다.' 산 소망이 달성되지 안했으면 '오늘 수입이 없다.'  다른 사람과 같이 아이를 낳아서 길러도 아이 낳아서 기르는 거세도 산  소망으로 기르지 죽은 소망으로 기르지 안하지요. 산 소망이 이루 어져 가는 그  재미로 기르지요.

 소망을 바꾸는 회개를 해라 그걸 말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게 아니오. 소망을  바꾼다는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 아닙니다. 쉽게 아는 사람은 멋도 모르고 벌로  하는 것이오.

 죽은 소망과 산 소망을 바꾸는 데에는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얼마나 울어야 되고  그 죽은 소망베 붙어 있는 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만 죽은 소망을  당장에 딱 떼버리면 그 사람 대번 자살해 버릴 건데. 이렇게 죽은 소망이  강합니다.

 이것을 서서히 죽은 소망을 다 이것을 버리고 산 소망으로 바꾸어 가지고 죽은  소망이라는 껍데기 생활에 산 소망을 거게서 이루고 있는, 이러니까 걸은 죽은  소망의 생활하고 있지마는 속에는 산 소망 그 소망만을 이루고 있어. 소망을  바꾸는 회개.

 또 셋째는 뭐입니까? '안보의 회개. 과거에는 죽은 안보, 썩은 안보, 무능의  안보, 거짓의 안보, 안보한다고 해 가지고 우리를 죽여버리는 우리를 속이는  안보, 그런 안보를 우리가 가졌던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의  안보 이 안보로 바꾸어 가지는 회개를 해야 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말했지마는 과거에 유엔군 철퇴한다 하니까 한국 교회가 막  뒤끓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 죽는다. 덜갱이한테 다 죽는다.' 유엔군 가면 다  죽는다고 유엔군 철퇴 못 하구로 마구 그렇게 날뛰고, 제가 고신에 있음 패인데  고신애서도 그량 가지고 이렇게 멋 사지를 내 가지고 막 교회 막 보내서  교회마다 두 장 세 장 왔습디다. "우리가 다 기도하고 허서 기도하고 '기도를  어쩌 해야 디 건지? 유엔군 철퇴 안 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이지. 그 기도하라는  것이 또 이상하지. 가연 쓱는다고.

 주님은 "네가 내가 뭣이 모자라서, 내야 능력이 모자라나, 지혜가 모자라나,  사랑이 모자라나, 권세가 모자라나? 내가 있건 말건 죽은 송장같이 생각하고  유엔군이 너거를 안보해? 유엔군 안보만 생각하는, 유엔군 안보 아니면 우리는  죽는다 하는 그것이 간부보고 따라가는, 간부, 간부 보고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이 얼마나 되게 시기했겠소? 얼마나 분개했겠소?  이랬는데 그때 우리 한국에 유엔군 철퇴에 대해서 우리는 낭파된다 하는 그것이  '가니까 좀 불리하기는 하다' 할 수 있지마는 우리의 절대의 보호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의 보호로 우리가 보호 입지 그런 보호로 우리가 보호돼 있는 것  아니다." 이러면서,  유엔군이 물러갈 때에, 처음에는 쭐쭐쭐 하다가서 주님이 와 가지고 '왜? 왜  우느냐?' '아니오. 그 사람들이 와 가지고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전사를 하고  갈라 하니까 참 섭섭해서 웁니다." 하면 그게 그럴 수도 있다.

 '혹 야 그들이 가니까 너거 위험하고 너거를 안보할 이가 없어서 지금 그리  염려되는 건 아니가?' 할 때 '아니오. 당신이 계시는데 그건 거야 문제가  있습니까?' 하면 주님이 좋아하시며 딱 거머안으시면서 그래, 네가 과연 내  배우자가 될 수가 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우리나라에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됐다는 것을 느껴서 회개한 그건 교회나 교파나 교인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놓력의 보호를 입었나니" 우리가 입고 있으면서도 '이 보호 그까짓 거야 그까짓  보호야 있거나 없거나 뭐 그게 보호가 되나?' 그세 하나님 멸시입니다.

 그 보호가, 옆에 딴것이 없어도, 딴것이 없어져도, 미군이 지금 철퇴를 한다  해도 철퇴할 때에 그때세 조금 안색만 달라져도 주님이 보시면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실 겁니다. 불쾌하게 여기십니다. 안색이 바꿔 졌으면 퍼뜩 변호를 해야  되지. '주님 내가 안색 바꿔진 것은 그들이 우리 땅에 와 가지고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갈라 하니까 섭섭해서 그렇지 안보야 당신이지 당신 외에 안보해 줄 이가  누가 있겠소? 당신이면 다지.' 이러면 '아멘. 됐어, 됐어. 그러면 내가 너를  책임질 수 있어.'  우리가 안보의 능력을 땅위에 있는 피조물의 그 안보, 피조물로 안 보의 능력을  삼은 요 죄는 우리가 성도는 회개해야 됩니다. 어떤 강대국에 가면 북 될  것이라고? 어리석소!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일일히  복수하지는 안하지마는 하늘나라 가면은 대 단히 잘못됐다는 부끄러움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넷째로 회개할 걸 뭐라 했지요? 환난을? 시험으로, 또 환난을? 연단으로, 또  환난을? 상급으로. 요렇게만 바꾸어 가지면 뭐 공산주 의가 오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어. 우리에게 오는 모든 환난 그것이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나는  여게 대해서 이런 하나님이다. 나는 너와 이렇게 약속을 했다. 나는 너에게  대해서 이렇게 해 주겠다.'  이랬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고 피흘려 이렇게 약속을 맺으셨는데 그 약속을  "인정하나 안 하나, 인정하나 안 하나? 믿나 안 믿나? 참 바라보나 안 바라보나?  말기나 안 맡기나? 나 하나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고 나 하나로써는 전부가 안  되니까, 한쪽 모퉁이나 둬까 안 된다고 나를 그렇게 여기나? 나 하나로 전부를  삼고도 남음이 무한히 있다고 나를 인정하고 내 계약을 인정하나?" 그것  시험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시험에는 어짜면 이긴다고요? 시험에 이기는 방법은 뭐 라요?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뽈끈 잡는 거라. 시험을 이기는 방법이 그만 믿으면 쇄. 뽈끈  잡아. 주님이 나에게 계약으로 선포한 그대로 시험이 올 때 '주여, 내가  믿습니다! 요동 없습니다! 믿습니다!'  와 가지고서 어떤 그 권력가가 와 가치고서 이렇게 나한테 위혐하고 협박을  해도,할 때에 그게 시험이라.

 그러면 '사랑하시는 주님이 이렇게 하는 것이기 벡문에 아무리 이래도 당신의  주권으로 이와 같이 하는 것인 젓을 내가 알기 때문에 내가 여게 대해서 다른  요동이나 변동이나 그건 거는 없습니다. 주권의 개별 섭리인 당신을 의심 없이  믿고 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녜, 시험 그만해도 좋습니다. 믿고 의심  없습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이라면 주님이 또 허허 웃으면서 "참 장해. 참  장해. 그렇게 나를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안하고 나 하나면 다 돼? "예, 당신  하나면 나의 전부가 다 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시험은 당신이 나에게 선포한 계약, 지식, 당신 소개 그대로 딱 믿으면  돼. 믿고 의심치 안하고 믿으면 돼. 뽈끈 쥐고 놓지만 안 하면 돼요.

 또 그 다음에 연단하는 환난은 어째요? 연단하는 환난은 이기는 방법이 뭐라요?  버리는 것. 연단하는 것은, 연단하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것,  완전한 것,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 다 심판도 무난히 통과해 가지고 영원  무궁세계서 있을 것, 완전한 것, 완전한 것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갖추어  가지라고 하는 것인데,  완전치 못한 이런 피조물로 말미암아 된 땅의 것 이건 것을 지저 분하게  가지고서 있으니까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어느 것이 나쁜 것인지 몰라서 나쁜  것 그 불완전한 것은 다 태워버리기 위해서 우리를 연단시켜 불을 금을 불에  넣어 가지고서 굽는 것은 잡철은 태우고 순금만 남도록 하는 것 모양으로  우리에게 순전히 하나님과 진리의 무한하신 영영하신 그 능력으로 완전 영원  불변 그런 것으로만 조성될 그 조성 그런 것으로만 된 소망, 그런 것으로만 된  지혜, 능력, 능력도 그 완전한 능력 지혜도 완전한 지혜,  이것만 가지지 안하고 잡탱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지금 불로 태워서  연단할라고 오는 것이기 때문에 연단의 환난에는, 연단의 환난에는 그 연단의  환난이 좋은 것은 치지 않습니다. 연단의 환난이 이 피조물로 말미암아, 요거 못  알아들으면 안 돼.

 피조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 완전성 없는 것, 영원성 없는 것, 불변성 없는  것 생명성 없는 것, 이 세상이 망할 쩌 불타고 말 것 그건 것을 우리가 영원한  것과 섞어 가지고서 영원한 것인 줄 알고 가지고 있는 그것을 제하라 하는  것이니까 환난은 그놈을 뚜드럽니다. 환난은 그놈을 뚜드려서 뚜드려 가지고  그걸 없앱니다. 그것 없애니까 그새 우요. 환난이 와서 우는 것은 주님이 그놈  뚜드려 깨니까 웁니다.

 깰 때에, '완전치 못한 것을 주님께서 다 제거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좋습니다.' 하고서 기뻐서 그것은 던져버리면, 던져버리면 그것이 저 절로  깨지기 전에 내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인도대로 따라가기 위 해서 그런 것이  거리끼니까 그것을 던져버리고 벗어버려 버리면 나는 그걸 버림으로 말미암아 내  자체는 완전해서 주님하고 결합이 딱 되고 주의 형상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내가 주의 형상대로 이루어지고 주님과 친밀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던져버리니까 나를 바라고 있던 내것이, 죄되지 않게 자연은총으로 나를 바라고  내게 있던 그것이 나 때문에 내가 주님과 밀접하기 위새서 주의 명령 지키기  위해서 내가 던져버리니까 주를 위해서 손해봤고 주를 위해서 던져버리니까,  주를 위해서 던져버렸으니까 그것을 주님 위해서 던져버리니까 진리로 인해서  그렇게 되어진 손해보고 깨어지고 절단난 것이니까 그것이 뭐이 냐? 그것이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을 것이 영원한 것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물이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탄식으로  고대하고 있다' 그말은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감과 진리대로 살므로 인해  가지고서 버려지고 깨어지고 하는 그것은 씸 킨? 려지고 깨어짐으로 그것이  만물을 새롭게 할 때에 살아나는 것이 어지기 때문에 만물이,  그때에 우리가 그것 때문에 영감과 진리를 배반하면 나 죽고 저것도 다 죽는데  영감과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그것을 버리면 주인된 내가 영감과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그걸 버리니까 버건 그것도 버림을 당함을 인해서 그게 살아납니다.

알아듣겠소? 이해가 됩니까?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버린 것은  세상에서 여러배를 얻고 또? 명 배? 백 배. 그런 소리 하니까 '백 배' 허풍선이  같은 말 갈애서 말하기가 주저주저한가배. 허풍선이 아니오. 하나님이 말씀해  놓으신 거라. 천지는 변해도 획 하나도 변치 애는 당신이 말했습니다. "척러 배  혹은 백 배를 얻으리라.

 또 그것이 만물이 새로와질 때 다 새로와지는,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변화돼 버렸어. 진리 버문에 희생했으니까 그 물건온 진리에 속허으니까  살아나야지. 그렇지 않소?  또 이 환난은 무엇으로 바꾸라 했소? 이 환난은 환난으로 알고 있던 그 죄를  회개하고 그 환난이 환난이 아니라 환난 그것이 막바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입니다.

 환난을 환난으로 보고 벌벌 떨던 자야 환난 그것이 칭찬과 주님 나타나실 쩌에  무궁세계서 칭찬 영광 존귀의 면류관인 것을 네가 깨 닫고 그것을 다시 회개하고  칭찬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으로 네가 인식하고 면류관으로 네가 받아 가지라  하는 말씀이오.

 이러니까 요 녜 가지 회개하면 우리는 뭐 공산주의가 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러니까 좀 묵상하고 새김질해서 요 네 가지 회개, 기쁨의  회개 기쁨을 바꾸는 회개, 소망을 바꾸는 회개, 안보의 놓력을 바꾸는 회개,  환난을 바꾸는 회개.

 환난을 시험으로 연단으로, 연단은 치료 아니요? 연단은 잡것 제 거하는 치료,  시험은 합격이면 더 나를 높여 줄라고. 시험은 나를 승격시킬라고서, 대학 입시  고사를 칠 때에 거기 떨어지니까 자살하는 학생들도 신문에 났던데.'시험치는 그  자격이 얼마나 좋은데 이렇게 이 시험은 참 무한한 하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되는 이 시험이니까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시헙인데 이 시험을 치르게  됐으니까 기쁘고 즐겹지 안해요?  환난을 환난으로 보는 이 어리석은 이 마귀의 지식을 버리고 그것이 주님과  나를 두고서 지금 무궁을 두고서 시험하는 시험이니까 이제 기쁨의 시험으로  바꿔라. 네게 잡것을 제거해 주는 치료고 잡것을 네가 자연으로 재거해 주지  안하고 진리 때문에 다거되면 잡것 그것이 만 쯤을 새롭게 할 때애 그것도  새로와지기 때문에 만물이 너 이기는 일로써 저도 새로와지기 위해서 탄식으로  너거 하나님 아들들의 자유 진리 영감대로 사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

 이러니까 환난을 이제 연단으로 바꾸어 감사하면서 가질 것, 환난을 칭찬 영광  존귀의 관으로 바꾸어 가질 것, 이래, 이 네 가지만 바꾸면 우리는 평강  가운데서 살 수가 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짜든지 흘러 떠내려 보내지 말고 그냉 쉬게 하지 말고 새기고 새기고  묵상하고 묵상해서 내 이성이 긍정하고, 양심이 긍정하고, 성령이 와서 인정할  수 있는 변화가 되기까지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 묵상이 잠깐해 가지고  안돼. 누워서도 묵상해요. 누워서도 묵상하고 앉아서도 묵상하고, 늘 어데 앉아  가지고 그래 묵상할 수 있습니까? 누워서도 묵상하고 이라지, 주야로 묵상해요.

 오늘 밤에도 삼십 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아랫층에서 지난 주일 설교 재독도  있고 또 철야기도 있습니다. 어짜든지 요때는 우리가 회개하고 기도해서  어짜든지 회개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환난 준비를 해야 되지 공연히 벌로  지나다가 이제 큰 낭파 당합니다. 거짓되지 말고 진실되이 회개를 합시다.

완전히 바꾸어 가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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