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기도-행함

 

1985. 2. 12. 화새벽

 

본문 : 디모데후서 4장 15절-18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전하는 복음을 심히 대적하는 대적이 있었던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 앞에도 이런 대적을 하나님이 아직 접선을 시키지 안했으나  기다리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소련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해서  다 완전히 하나님의 복음이 다 철거되었고 또 중국에도 그 많은 신자들을 다  죽이고 박해해서 복음을 다 철거했습니다. 또 이북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복음을  이북이 먼저 받았는데 거게서 또 이 복음이 다 철거를 당했습니다. 지금 남한에  믿고 있는 이 복음을 다 철거할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시는 주님이 복음을 전해  놓으시고 넉넉히 준비할 만한 그런 기회를 주시고 난 다음에는 믿는 자와 안  믿는 자를 구별하십니다.

 지금 우리 남한에는 복음으로 가득 찬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는 것을 다 알고 있고 또 예수님 믿는 이 도리를 여러 각도로 다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깨달아 전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깨달아 전하고 그  전하는 것이 대개는 진리에 그렇게 탈선되지 않게 진리를 이 각도로 가르치고  저 각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지식으로는 거의 다 참  통일이 될 만치 구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복음을  대적하는 대적이 우리 앞에 닥쳐올 때에 우리가 그 대적의 입에 삼키우지  안하고 거게서 건져내 주심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란지 하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이 여게 밝혀 주의시키기를, 그렇게 대적하는 자들이 있지마는 그  대적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너도 주의를 해서 그 대적하는 자들에게 삼켜지지  안하도록 주의해라 그것을 첫째 말씀했고, 또 둘째로는, 그 대적하는 자들이  그렇게 대적을 하지마는 내가 그들에게 정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를 위해서 원수 삼지 말고 그를  대적삼지 말라 하늣 그것을 여게 말씀을 또 둘째로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테반도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다가, 그 증거 한 것이  7 장에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증거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박해를 당한 것이 아니고 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박해를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는 것을 증거할 때에 그들이 그 바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럴 때에 돌 속에서 맞아서 죽어 가면서 증거한 것이 '주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내가 올라오기를 지금 기다리시고 서서 지금 나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이 주님의 안면이 보이지 않느냐' 그렇게 말을 했고, 또 둘째로 말한  것은 '이들이 알지 못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오니 그들에게 쥐를 돌리지 마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는 고 말을 두 번째 했고 세번째는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는 그 말을 했습니다.

 여게도 '그가 심한 대적을 했으니 너도, 믿음의 아들 디모데야 너도 그를  주의해라. 잘못하면 그의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에 네가 끌려서 타협하기 쉽고  그들과 하나 되기 쉽고 미혹받기 쉬우니까, 또 그들의 위협에 떨어지기 쉬우니  네가 주의해라' 그래 하고, 그 다음에는 '나도 그들에게 죄를 돌리지 안할라고  내가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도록 그렇게, 이걸 다 이렇게 우리에게  대적하니까 이걸 멸해 주십시오 하는 그런 내가 소원을 가지지 않고 끝까지  그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는 이 소원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을 둘째로 말했고,  세째로는 이런 대적들 가운데에서 내가 구출 된 것은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셨다'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서서 나를 강건케  하셨다'그렇게 말씀 하셨고, 또 그 다음에 17절에 내려 보면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 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이렇게  복음을 전할 때에 대적하는 것은 참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도록 하시는 역사라고  이렇게 여게 증거를 했습니다.

 소련이나 중공이나 이북에 이렇게 복음에 박해되는 것은 이것은 참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실려고 오래동안 복음을 전하고 난 다음에는 복음 믿는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여러 가지 박해가 있는데 복음을  믿는 스데반 같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통해서 참 복음이 전파될  터인데 그런 사람이 없으면 생명 없는 모든 기독자들이기 때문에 다 거게  삼키워지고 또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고 다 중단되고 맙니다. 그러나 거게는  생명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문서로 전하고. 말로 전하고 그 다음에는  능력으로 전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다.'  그러면 말로 전하고 난 다음에는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말로 전해 놓고 난 다음에 능력으로 전하는 그 전도를 하나님이 원하셔서  섭리하실 때에 그때에 능력이 없으면 다 삼키워지고 맙니다. 그런 박해  가운데에 스데반이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됐습니다.

 또 바사 나라에서도 하나나님이 복음을 전하고 난 다음에 능력으로 전하실라고  역사할 때에 금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은 다 불미불  속에다 넣는다 하는 그런 박해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있는 능력 가진  전도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때에 그 나라가 짧은 기간이나마 온  전국이 다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됐고. 또 얼마 후에 복음을 전하고 난  다음에 능력으로 전하기 위해서 한 달 동안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은 사자  구덩이에 잡아 넣기로 그렇게 전국이 다 결의를 하고 하는 그런 어려움이  왔습니다. 그 어려움이 왔을 때에 다니엘은 사자 구덩이에 출어가도 자기는  기도를 중단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 사자 구덩이에 들어 갔습니다. 들어간  그것이 능력있는 믿음입니다. 이러니까. 하루 밤 사이에 오늘은 사자 구덩이에  던졌으니까 온 전국이 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나라가 됐고 또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그들도 다 그들에게 항복을 하고 했는데 하루  밤 지내고 난 다음에 그 이튿날은 전국이 다 하나님 공경하는 사람이 됐고 공경  안 하면 뉘든지 다 사형을 받는 그런 거석으로 변화가 됐던 것입니다.

 이들이 다, 보면 어느 시대라도 하나님이 이 외부적인 이 말씀의 도를 전하고  난 다음에는 능력으로 전하는 그 순서를 하나님이 베푸십니다. 그러기에, '내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분들이 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생명있는 그런  복음을, 능력있는 복음을 전하게 됐던가?  그것은 뭐 다른 것이 아니고, 바울도 여기 똑똑히 말하기를,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것을 그는 똑똑히 봤습니다.

자기가 시각으로 봤고, 볼 시(視)자, 깨달을 각(覺)자, 시각으로 봤고,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시각으로 봤고. 또 감각으로 봤고, 신경으로 봤고, 자기의  모든 정서라는 정서로 봤고, 이래서, 주님이 자기 곁에 자기와 함께 하심을  그는 마음 전부가 다 알고 본 사람이 됐었고, 또 그이의 모든 신경이라면  몸인데 신경도 봤고, 또 피부도 느꼈고 전체가 느꼈기 때문에. 스데반도 돌  속에서 그렇게 죽임을 당해도 스데반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다 이랬습니다.

기쁨이 충만했다 이랬습니다.

 불란스의, 불란스 수도인 콜이라는 거게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컨트노라는  사람이 전했는데, 그 사람을 잡아서 죽일라고 붙들어 가지고 온깆 고형을  했습니다. 항복을 받을라고 온갖 고형을 해도 물론 신앙을 반대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안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면에 기쁨이 충만한 것을 보고 '네가 아무리 네  도를 자랑하기 위해서 한다마는서도 네 얼굴에 근심 걱정과 고통이 가득차게  하겠다' 하고서 뭐 불로 지져 보기도 했고 때려 보기도 했고 오만 짓 다  했습니다. 그래도 그 피부까지 기쁨의 충만함을 없애들 못해서 마지막에는 목을  끊음으로써 끝을 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 나라에 복음으로 충만케 했던  것입니다.

 여게도 이렇게 어려운 박해 있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을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이 박해 있는 것은 온전한 믿음 참 생명있는 믿음 권능있는 믿음 이  능력있는 믿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와 같이 어려움을 주신다. 이  어려움이 아니면 생명있는 믿음을 그둘에게 보여 줄 수가 없고 또 권능있는  믿음을 그들에게 보여 줄 수가 없기 때문에 보여 주는 역사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와 같이 하신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들을 말하기를 사자라고 말했습니다. 사자. 무서운 사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그러면, 이렇게 어려움이 있는데 그때에 건지움을  받은 비결이 뭐이냐?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사자 같은 박해  가운데서 건지움을 받았느냐? 받은 것은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인식한 요것뿐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서셔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든지 다니엘이든지 그런 사람들도 보면은 전부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그들이 감각하고 시각한 여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가? 중생된 자라면 언제든지 함께  계십니다. 신명기 28장 1절에 말씀하신 대로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러면, 주님이 직접 동거 대면 대화로 서로 이렇게 하고 계시는 것을 거게도  말씀했습니다. 그거 여러 날 공부했습니다.

 이랬는데, 과거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에서 승리한 한 상동 목사님이 승리 한  비결을 말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신앙 생활을 지키고  그렇게 한 번도 어려움 없이 비겁한 것이나 공포에나 그들의 탄압에 눌리지  안하고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가졌습니까? 가지게 된 그 비결이  뮈입니까' 이래 물으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말씀하더라고서.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는 요 성구를 자기는 잡고 믿는 요거 하나  가지고 이겼다 고헤게 증거를 하더라고. 뭐 한 상동 목사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랬습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를 이긴 사람들은 다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는 거기에서 다 이겼고 그저 자기가 무슨 지식으로나  자기의 의지로나 또 자기의 결심으로나 그런 거 가지고 이긴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요것을 아는 사람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자꾸 연습을 해야 되겠습니다.

 옛사람이 뭘로 된 사람이냐 하면은, 악령, 첫째 악령, 악령이라 하는 것은  마귀, 우리에게 감화주는 마귀, 악령, 악성, 악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중심으로, 자기 중심의 성질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악성입니다. 또 악습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의 행위를 한 번 두 번 자꾸 이래 해서 연습해서 모아 놓은  그것이 악습입니다. 이러면, 제일 처음에 뭐이 되느냐 하면은 악습이 이것이  차차 차차 악성을 견고케 하고, 또 악성이 들어서 악령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권위있게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와 정반대로. 우리는 성신의 감화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성신의 감화의 연습이 필요하고, 성신의 감화의 연습 그 연습이 필요하고 그  연습을 자꾸 함으로 그 사람이 차차 차차 성령의 형상이 됩니다. 악성 반대로  믿음의 성품이. 자꾸 하나님을 딿는 그 믿음의 성품, 믿음의, 영감의 성품이  자꾸 되어지고 그래 가지고 성령의 사람이 되기 때문에, 주님이 내 곁에  계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하는 이것을 자꾸 우리가 연습해서 내 지식에  가득 차야 되겠고, 또 내 감각에 가득 차야 되겠고. 내 생각에 가득 차야  되겠고, 또 내 시각에 가득 차야 되겠고 내 성질에 가득 차야 되겠고 자꾸  연습을 해서 내 마음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자기가 자기 마음에  자꾸 이렇게 연습하고 연습해서 채워야 되겠고 자기 몸에도 채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다 기도하는 것이 인제 이런 것인데. 기도할 때에는 주님을 상대해서  기도하는 것이니까 다른 것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는 주님을 상대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면서도 주님을 이래 서로 상대해 가지고  주님과 대화하는 이런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그저 사람을 보고서 사람들에게  '들어봐라' 연설하는 거, 무슨 설교하는 설교는 될지라도 기도는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거 보면은 사람들에게 '들어 봐라' 하는 그런 기도를 우리가  구별할 수가 있고, 또 기도할 때에 제가 기도하고 입으로 기도하고 그 기도를  제 귀로 듣고 자꾸 제 입으로 나와서 귀로 들어가고 입으로 나와서 귀로  들어가고 뺑뺑 요렇게 하고 있는 것도 알 수가 있고, 또 기도 할 때에 어떤  물건이나. 물건을 보면서 '저 물건은 어떻고 저 물건은 어떻고, 이와 같이  자기가 물건을 보면서 이 물건에 대해서 또 말 몇 마디 하고 저 물건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 뭐 기도할 때에 그런 물질이나 무슨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 가지고  그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진정 주님을 상대해 가지고서 기도할 때에,  물론 주님을 상대해 기도하면서 '주님' 이 사람에게는 어떠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어떠며 어떻습니까? 주님하고 마주 대화하는 이런 기도를 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거창 있을 때인데, 농산 교회 다닐 때입니다. 그때 농산 교회  집사로 있을 때인데, 하루 밤에 내려가니까 ○○○ 전도사라고, 여자입니다.

처녀 전도사인데. 아주 경남에서는 그때 ○○○가 제일 지식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에 첫째, 그 다음에는 최 덕지, 또 그 다음에는 한 분 소경된 분  있었읍나다. 야로에 있던 소경된 분 그분 누가 압니까? 예? 아따. 뭐이지,  이름이? ○집사님은 알 거 같은데, 예? 옳지. ○씨야. 맞았어. 어찌 알아요?  아따, ○○○씨는 ○○○씨인가 그분이 있고 아주 유력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분이 와 가지고서 사경회를 하는데, 설교하고 난 다음에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는 사람이 기도하십시오' 이래 그 강사가 말하니까, 말을 하는 데 누가  하나 나서 가지고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를 들으니까 순전히 마귀 기도라.

이거는 하나님과는 기도하지 안하고 사람들에게 '들어봐라' 하는 기도를 하는데  순전히 마귀 기도라. 이래서. '아, 조 마귀가 한 마리 들어 왔다. 저놈이 지금  무슨 큰 장난을 할라고 이 집회 왔는가 모르겠다' 이랬는데,  나중에 기도하고 나니까 온 교인들이 막 거게 감화를 받았습니다. 감화를  받아서 그만 예배 마치고 나니까 그 사람을 당장, 장로 될 사람인데 ○집사라고  그 ○집사 방으로, 그 방이 크니까 그 방으로 인도하고 뭐 온 교인들이  빡빡하이 전부 들어갈 수가 없어. 어떻게 빡빡하이 사람이 들어 찼던지. 거기  가니까 그 사람이 무슨 얘기 하는데. 그때에 바로 왜정 때에 신사 참배라는  그런 문제가 있을 때인데. 그래 가지고 들어와 가지고 얘기를 하는데, 자기  궁둥이를 보이면서 궁둥이에 화침질을 해서 이만치 구멍이 뚫려 가지고 있고 또  여게 어데 한 군데 있고 있는데 이게 신사 참배 안 할라 하다가 이래 됐다고서.

말하는데 그 사람이 내가 기도하는 거 보니까 그럴 사람이 아니라. 도무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래 내가 거기 들어가지 안하고 몇 사람을 소리해 가지고 말하기를 '저  사람이 저거 정상의 사람이 아니고 저게 큰 미혹이 들어왔으니까 아까 기도할  때에 정상이 아니다. 그러니까, 너거들은 미혹받아 이렇지마는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거게 미혹받지 말아라' 그래 놓고 나는 한 십 오리 밖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가 버렸다 말이오.

 아무래도 염려가 돼서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찌거니 농산 교회로 갔습니다.

가니까 벌써 ○○○ 장로라고, ○○○씨라고 그 집에서 청해 가지고서 아주 뭐  참 만반진수로 이렇게 대접을 하고. 그 사람이 뭘 어떻게 뭐 차를 사면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고 해 가지고서 그래 된다고서. 그래 가지고 꼬였다 말이오.

벌써 꼬였어. 이거는 도둑놈이라. 보니까. '가면 안 된다' 내가 거기서 설득을  했는데, 얼마나 꼬였던지 암만 말해도 안 들어. 안 듣고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제가 집사라도 전도사만큼이나 권위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권위가 더 있을 만치 인정을 했었습니다. 이랬는데, 그래 놓고 '아마 저게  가지' 싶어서 내가 한 이십리 내려가서 도평이라 하는 데 길목에 기다리고  있었어. '저게 아무래도 이제 저 사람 꼬아 가지고 내려오지.' 내나 꼬아  가지고 내려와. 내나 ○○○씨하고 그 사람하고 둘이 내려와요. 막 급하게  이렇게 그 사람 신용이 있으니까 돈을 이래 뭘 고리대금으로 이래 가지고서  얻어 가지고서 돈을 몽뚱거려 넣어 가지고 지금 그 사람하고 서울 간다고. 그래  내가 붙들고서 '그래 가지 않느냐? 나한테 바른 말 해라. 가면 망한다  '아닙니다. 우리 조카가 지금 요번에 이대 졸업을 해서 졸업하는 데 갑니다.'  이래 가 가지고서 그때에 몽땅 아마 요새 돈으로 말하면 상당히, 몇 천만  원이라 하는 그런 돈 솔박 떼여 버렸습니다. 그런 자가 있어.

 그런데, 그걸 뭘 보고 알았느냐 하면은. 다 그런 사람 '성령에 감화된 사람  기도하십시오' 이라니까, '기도하십시오' 이라니까 다른 사람 달라들 여가  없이, '기도하십시오' 하니까 '주여' 이래 버려, 그만. 그래 나머지기,  '주여'하니까 다른 사람이 기도할 수가 없다 말이오. 그만 먼저 일호를 땄다  그말이오. 일호를 딸라고 날 뛰는 것 보니까 그게 좀 이상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는 거 보니까 하나님을 상대해 기도하지 안하고 사람에게 '들어 봐라.'  뭐 들은 것을 뭐 청산유수로 이래 하니까 어리석은 교인들이 팍 다 녹았다  말이오.

 자기가 신앙 생활 안 해 본 사람은 모릅니다. 이러니까, 기도도 이래 시켜  보면은 이거 사람에게 '들어 봐라' 하는 기도 있고, 또 기도해도 저 혼자  입으로 기도하고 귀로 들어가고 입으로 기도하고 뺑뺑뺑 요래 기도하고 있는  사람도 있어. 그래서 그런 사람은 '네가 주님을 보고 기도하지 안하고  기도하면은 네 입으로 말해 놓고 네 귀로 들으니까 좋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니까 좋고 자꾸 요래 기도하니까 너는 주님을 상대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권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기도는 주님을 상대해서. 주님이. 내 앞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서로 대면해 가지고 대화하는 진실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차차 차차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이 자꾸 인식이 돼집니다. 그런 요것 가지고 이기지  달리는 못 이겨요.

 그래서. 제가 엊저녁에도, 이거 그만 거창에 있을 때에는 아주 고요히 산에  가서도 기도도 많이 하고 참 금식도 하고 자꾸 주님과 이래 교제하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확실히 믿어졌고 보여졌고 이랬는데, 지식적으로는 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안한 시간 없습니다. 본인이야 알든지 모르든지  본인이 택한 자라면, 중생된 사람이라면 그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주님은  자기와 함께 계십니다. 함께 계시나 다만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그가 보지  못합니다. 마귀란 놈이 보지 못하게 해요. 마귀란 놈이 보지 못하게 해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도록 뚫을 수가 없어. 뚫으면 죽어 버려요.

뚫으면, 그 사람이 어두움의 사람이 됐기 때문에 어두움의 사람이 됐으니까  어두움의 사람은 빛이 들어오면 이거 녹아 버려요. 그만.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강제로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문을 두드리노니 문을 열라' 하는  그것으로 라오더게아 교회에 말씀한 것이 내나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아침 지금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영 아주 그만 주님이 내 곁에 계심을 학실히 지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알고 있기는 옛날 거창에 있을 때보다는 지식으로는 더 확고하게 알고  있습니다. 확고하게 알고 있고, 이러니까 함께 계신다 저러니까 함께 계신다  하는 것을 뭐 논리로 말해도 그때보다 논리로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멀고 회미하다 말이오.

희미해. 희미하니까.

 내가 자꾸 이렇게 볼 때에 '아, 이번에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이런 행동한  것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내가 잊어 버렸다.' 그러면 말해 놓고 보면  주님이 자기와 나와 함께 계심을 잊어 버리고 말했고 또 내가 행동할 때에 보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자기가 보이지 안하고 믿어지지 않는 그런 행동을  했고, 자기가 무슨 안 할 말을 한 것이라든지, 안 할 행동을 한 것이라든지. 안  할 생각을 한 것이라든지 자기의 언행 심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주님이 내 곁에  같이 계심을 이렇게 보고 한 말이 아니라. 보지 안하고 한 말이라. 만일 거게  어떤 사람이 내곁에 있었어도, 그 본인 그 본인이 내 곁에 있었어도 그런 말 할  수 없었을 터인데, 본인이 내 곁에 있었어도 그런 말 할 수가 없었는데 본인이  없으니까 한 그것은 주님이 본인보다도 더 내 곁에서서 그런데 대해서 더  금하시고 노하시고 섭섭해 하시는데 그 본인이 있는 것만치도 내가 인정 안  하고 한 말이 있다 그말이오. 내가 말한 가운데 보면 그 본인이 옆에 있어도  그런 말을 그 사람에게 거슬리는 말 할 수가 없을 터인데 내가 그 말 한 것은  본인만치 본 인만 못한. 본인만치 내게 경계가 되고 주의가 되는 그 주님으로  내 곁에 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말이오. 말한 걸 볼 때에.

 또. 자기가 무슨 생각한 것도 그 생각하는 그 생각을 자기가 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거 공포를 해도 그 생각이 못 쓸 생각이지 유익된 생각이 아닌데,  옆에 다른 사람도 그 생각을 보면, 그 생각을 보면은 그 생각을 칭찬하지  안하고 다 나무랄 생각이요 잘못된 생각인데, 주님은 내 생각을 아신다 말이오.

아는데, 내 생각할 때에 그 생각에, 생각한 것을 하고 나서 보니까 주님이 내  결에 나와 같이 계시는, 모든 거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이 내 생각을  아시는 주님으로 내 곁에서신 것을 내가 깜빡 잊어 버렸다 말이오.

 이래서 말한 것이라든지 행동한 것이라든지 이런 걸 볼 때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내가 분명히 보지 안했고 잊어 버렸고 감각하지 안했고 시각되지 안했고  그 신경이 되지 안해서,

 어제 내가 말 들었는데, 어떤 아이가, 그 아이가 저거 아버지나 아무도 없을  때에 그러니까 그 집 주인에게 와 가지고서 뭐 아주 아양을 떨면서. 아양을  떨기 때문에 그 아이가 달라 하는 거. 이거 달라 하면 이거 주고 저거 달라  하면 저거 주고 오만 것 다 줬는데 줬는데, 나중에 저거 아버지가 오니까 저거  아버지 품에 딱 안겨 가지고는 혀를 내면서 조롱을 하더라고. 조롱을 하더라고.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것이, 이제 아부하고 자꾸 이래 뭐 이래 아양을 떨고 한  그것은 부모가 없으니까 그 억압에 눌리고 부자유 했다 말이오. 억압에 눌린  감을 가졌다가서 아버지가 오니까 이제 피난처가 됐으니까 자유가 있고  그러니까 억압에 눌린 그 복수요. 조롱을 하고 그래서. 그 본인은 깨닫기를  그래 깨닫고 있어. '그 아이가 부모가 없을 때에는 내가 그렇게 친절하게 해  줬는데. 친절하게 해 줬는데 나중에 부모가 오고 보니까 오히려 조롱을  하더라.' 그 조롱하는 그게 뭐이냐 하면 부모 없을 때에는 자기는 아부하고  그렇게 한 것이 탄압에 눌려서 억지로 그래 했다는 것이 지금 속에 발표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아이들도 부모가 오니까 부모 품에 안기니까 영 달라졌는데. 이렇게  주님이, 전능하신 그 품에 내가 안겨 있으면 내 마음이 펀안해 질 것이고, 내  마음이 편해 질 것이고 느껴질 것이고 저거는 뭐 조롱을 하면은, 뭘 탄압을,  무슨 세력이 와서 탄압하면, 주권 개별 섭리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면은 주님 세력만 못한 것이 와 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가 두렵지 안하고 오히려 조롱이 돼지고 오히려 부애를 지를 것이고  이럴터인데 왜 내가 그런 사람이 안 되느냐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주님과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말뿐이지 실상으로 되어지는  이것이 없어.

 이래서, 그 면이 지식적으로는 훨씬 높아겼는데 실지로 감각적으로. 또 내게  있는 시각적으로, 모든 정서적으로, 내게 있는 신경적으로, 뮈라 해도 아무리  그들이 위협을 하고 어떻게 한다 해도 주님이 내 곁에 서시고 그 분이 더 능력  계시는 분이니까 뭐라 한다 해도 내 신경은 기쁘고 즐겁고 평안할 터인데 뭐 내  신경이 그렇게 부들부들 떨리느냐? 또 그분이 내 곁에 서신 이것이 그렇게  확실히 믿어진다고 하면은 스데반처럼 그들이 뭐라고 한다 해도 내 얼굴 안면이  기쁨이 충만할 것이고 오히려 그들을 멸시하는 일 있을 것이고, 조롱하는 일  있든지. 그런 일은, 뭐 조롱하거나 멸시 하저나 그런 일은 못 할지라도 주님이  내 곁에 서셨으니까 내 피부가 기쁘고 즐겁고 평안함이 내 피부에 가득히  나타났을 때 왜 이렇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내가 느끼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엊저녁에 내가 집에서 가만히 혼자 이렇게 명상 중에 생각해 보니까  옛날 거창에 있을 때보다 주님과 나와의 같이 계시는 이 감각이 퍽 둔해졌어요,  둔해졌어. 하는 수가 없어서 자꾸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어. '주님이여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내가 보는 시각이 나에게 밝아지게 해 주옵소서.

감각이 밝아지게 해 주옵소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내 신경이 함상 계심을  느끼는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자꾸 그래 밖에 기도할 수 밖에 없어. 팍  멀어요. 멀어서, 말로는 그런데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거 실상의 효력이  내게 나타나지 안하고 있다 그거요.

 이러면 앞으로 공산주의가 오든지 무슨 대환난이 와서 참 복음을 전할 때가  오겠는데, 생명있는 복음을 전할 때가 오겠는데, 그럴 때에 내가 과연 '이  주님은 이러한 주님이라' 다니엘처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사도  바울처럼,  나는 후퇴를 하고 있어요. 과거에 공산주의들이 그래도 뭐 와서. 설교할 때에  저기셔 군인들이 와 가지고서, 그때 사람을 자꾸 죽이는 때인데, 제가 위천에  있을 때에, 양쪽에 문에 와서 그들이 위협줄라고 총을, 총을 꽝 이래 놓으니까  앉은 사람들이 깜짝 놀랬다 말이오. 이래도 나는 놀래지 안하고 같이  기도하면서, 그래 가지고 나오라 해도 안 나가고 꼭 계속해서 설교를 하고  누가, ○○○ 목사가 그때 집사인데, 와 가지고, 하도 뒤에서 그만 독촉하고  두려워 놓으니까 좀 나를 나오라고 하라고, 가서 네가 나오라 하라고 이라니까  들어와. 들어오기 때문에 고함을 질렀어. 어디 들어오냐고 들어오기를. 예배 안  보고 어디 들어오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도로 튀어 나가 버렸어. 그때는  그랬었고, 또 신사 참배 그런 거 때문에 말할 때에 뭐 국기를 날 도라. 내가  불에 태워 볼 께. 너거 신상. 아마데라스, 오미까미 천조 대신 가미다나를 날  달라. 내가 불에 태워 볼 께.' 일본 부장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해도 아무  감각이, 예사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뭐 담대히 그래 했는데,  그때 신앙이 없어. 그때 그만 주님과 함께 계시는 그보다도 내 심령이  어두워졌다 말이오. 어두워져서. 벌써 이 세상에, 부산 안 올라고 했는데 부산  나와 가지고 속화가 됐다 말이오. 그래 이 속화된 때를 이걸 다 환난 전에  벗어야 되지, 벗어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내 감각에 가득 차야 되고  시각에 가득 차야 되고, 신경에 가득 차서, 심지어 함께 계심이 내 얼굴에  피부에 기쁨에도 충만해져야 돼지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평안한 안면이  없고 공산주의의 협박이 내게 와 가지고 내 피부에 느껴지게 되면은 나는  패전되고 말 것이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이 일을 우리가 연습합시다.

 오늘 아침에 증거할라 하는 것은 이것을 내가 증거해야 되겠다 해서 그래  증거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님이 나와 실지로 함께 계심이 내 마음과 몸에 가득 차야 됩니다. 내 마음과  몸에 가득 찬 것이 세상이 내게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이 내 마음과  몸에 가득 참을 밀고 들어오지 못해야 됩니다. 그런게 꺽지를 못해야 됩니다.

이런 산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앞으로 산 복음을 전할 기회에 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짜든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자꾸 연습합시다. 또 말로 하고 자꾸  연습하고 생각하고 해서 고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내 마음에 가득 차고 내  몸에 가득 차서, 신경에 가득 차서, 내 피부에 가득 차서 함께 계심을 부인할  수 없도록 이 함께 계심이 세상이 내게 와도 그런 걸 다 이겨 낼 수 있도록  함께 계시는 걸 우리가 확실히 믿어지는 사람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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