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대한 지식

 

1981. 1. 2. 밤 (금)

 

본문:사도행전 20장 29절∼32절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우리는 과거에는 하나님에게 대한 소망이 없었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로를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고 하나님의 권속이 됐고  또 하나님에게 온갖 소망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필요를 느끼는 것만이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소망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는 것들이 더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더 큽니다.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에게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 참 무한이라고 할 만치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구속이 있기 전에는 우리는 무한한 절망과 멸망 속에 있던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절망과 멸망 그것으로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참 무한이라고 할  만한 그런 가지 각색의 절망과 사망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 신인양성일위의 이  예수님의 대속의 그 무한한 대속, 무한한 대속으로 무한한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또 앞으로 받을 구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무한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지식이 어리고 또 적고 또 삐뚤어진 것도 많아서 소망하지  아니하여야 할 필요 없는 자기에게 해가 되는 그런 소망은 많이 가지고 있지마는  참 우리가 소망해야 될 예수님 안에 있는 지극히 보배롭고 큰 이 소망은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여기에 대해서 다 관심이 깊은 것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그 사람의 지식에 따라서 가진 희망이 각각 다릅니다. 지식이  적을수록 그의 소망은 적게 되고 많을수록 그의 바라는 것은 많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도 어떤 사람은 가지는 소망이 수도 심히 많고 또 그 소망의  가치의 지극히 큼도 아는 사람들이 있지마는 그 중에는 예수님 안에 소망한다고  해도 몇 가지 소망을 하고 또 소망하는 것조차도 흐미해서 반신반의로 그렇게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들이 무지해서 이렇지 우리가  주님에게 대한 이 소망은 극히 크고 많습니다.

물론 땅에 있는 땅에 속한 것에 대한, 땅에 속한 것의 소망도 있고 또 영원  무궁에 속한 소망도 있습니다. 그러면 땅에 속한 소망도 소유에 대한 소망, 자기  몸에 대한 소망, 또 자기 존재라는 그 생명에 대한 소망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지마는 예수님 안에 영원 무궁토록 없어지지 아니할 무궁세계의 것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소망이 심히 크고 많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받을 것도 많고, 또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할 이런 것도 많고, 또 하나님과의 잘못되어 있는 그런 것을 다 정리하고  해결해야 할 그런 것들도 많고, 우리가 아는 것도 있지마는 나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그런 문제도 많고, 또 내가  그렇게 필요로 느끼지 안하지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지금 관계를 맺어야 할  그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참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못돼 고칠 것도 수가 많고 또 바로 이루어  가져야 할 이런 것도 수가 많고,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도 많고 우리가 하나님을  대접해야 될 것도 심히 많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잘못되어 있는 이런 것을 죽기 전에 해결을 지워야 할 그런  것들도 많고, 또 영원히 택자들과는 같이 살 것이요 불택자들도 음부에서  호소하고 있으니까 그 호소가 내게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아니하여야 우리가  하늘나라서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끼리 잘못된 것도 많고, 안 믿는 사람과의 잘못된 것도 많고,  믿는 사람과 바로 해 가져야 될 것도 많고, 또 안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과 나는 뒤에 정죄받지 아니할 수 있도록 바른 관계를 가져야 될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다음으로 복잡한 위치에서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천사보다도  복잡하고 더욱 그 위에 있는 모든 만물보다 뛰어난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는 참 고칠 일도 많고 또 마련해야 될 일도 많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과 모든 사람과 만물과의 할 일이 너무 많은 우리들입니다. 잘못된  것을 고칠 것도 많고 또 그것만 고칠 뿐 아니라 바로 갖추어 가지고 가야 할  그런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마치 소경은 눈 하나 어두우니까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눈이 밝으면 백 가지고  열 가지고 눈에 천 가지고 보여지는데 눈을 감으면 하나도 안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그러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나 사람에게 대해서나 만물에게 대해서 우리가 참 황금으로 비할  수 없는 이 귀한 시간인데 이 시간에서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정돈하고 정비를  하여야 할 이 일이 뭐 참 태산도 부족할 이런 복잡한 일들을 우리가 다 가지고  날아가는 것과 같은 이런 빠르고 짧은 세월에서 이 일을 다 감당해 가야 될  터인데 우리는 눈이 어두우니까 하나도 안 보입니다. 하나도 안 보이고 눈이  뜨였다고 해도 세상 눈밖에는 뜨이지 안했으니까 보이는 것이 세상뿐입니다.

이러니까 세상과 세상에 있는 이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할 줄 알지 영원  무궁한 세계에서 살 이 참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이것만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만 주력하고 난제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인류와 만물과 영원 무궁토록 무궁한 세계에 있는 그 면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보는 눈이 없고, 만물  심판을 보는 눈이 없고, 영원 무궁세계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렇게 마음에 느끼지를 못하니까 자연히 믿는다고  하지마는 모든 생활은 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인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런 관계는 벌써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데 이 관계에 그 사건들이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헤아릴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숫자를 헤아릴 자가  없고 또 어떤 일이 있는지 그 종류를 알 자도 없습니다.

큰 문제가 있는데 이 종류도 모르고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눈먼  소경처럼 ‘아무것도 없다. 무사 평안하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보이는  것이라야  기껏 돈, 세상 권세나, 물질이나, 세상 무슨 행락이나, 영광이나 이런 것이나  보여지지 영원한 것은 보여지지를 아니하니까 우리의 전생활은 거기에  기울어져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위치에서 사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잘못함으로 모든 만물이 그 피해를 그  영향을 입게 되고 사람이 잘함으로 그 모든 은택을 만물들이 입게 됩니다.

사람은 영원에 대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평안합니다. 또 세상에서도 이런  복잡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평안합니다. 그보다 더 평안한 것은 짐승은  더 평안합니다. 그러하지마는 그 평안이 길지를 못하고 빨리 고난으로  바꾸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쁨보다 근심이 좋은 것은” 기쁨이 좋지 뭐 근심이 좋을 게  없지마는 기쁨보다 근심이 좋은 것은 “이로 인해서 그 마음이 좋아짐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세상 그 어려움을 인해서 그가 무사태평으로 알고 세상 것만 눈을  뜨고 있던 사람이 인간의 이 고통이라 하는 이 고통, 어려움이라는 이 어려움,  이 불행이라는 불행, 환난이라는 이 환난, 이런 것들을 인해서 신령한 마음의  눈이 떨어져서 인생의 종말도 생각하고 또 영원히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과 같이  드러나는 그날도 보는 눈이 열려져서, 이제까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문제에 눈이 뜨여지고, 이제까지  근심하지 아니하였던 그 일에 근심하게 되고, 이제까지 필요로 느끼지 못하던 그  필요를 발견해서 근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웃음보다 근심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 죽는 날까지 형통에서 형통에서, 무사에서  무사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복되다 하지마는 그보다 더 큰 복이 있습니다. 인생이  모든 애로로, 모든 가난으로, 모든 마찰로, 모든 불행으로, 모든 원수로, 모든  실패로, 이런 어려움을 인해서 인생이 감고 있는 인생 문제 영원 문제, 곧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영원한 관계 문제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 눈 감고 생각할  수가 있고 여기에 대한 것을 한번 미루어 느낄 수가 있는 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래서 가난에서 겸손을 배우게 되고 모든 환난에서 그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문제를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절대라는  자기 행동과 하나님의 심판을 앞에 두고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4장 9절로 10절에 “너희 웃음을 울음으로 바꾸고 너희  기쁨을 근심으로 바꿔라. 너희 부요를 가난으로 바꾸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말은 그 부요해 있는 부요에서 반드시 가난해지기는 가난해지니까 그  부요에서 가난해질 것을 좀 생각하고 살고 웃음에서 반드시 슬픔으로 바꾸어질  터이니까 그것을 미리 좀 미리 당겨 보면서 사는 사람 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알든지 모르든지 만물 중에 뛰어난 인간이요 또 인간 중에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수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임무도, 책임도, 희망도,  우리의 모든 무대도 심히 넓고 크고, 높고 깊고, 끝이 없는 이런 위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심히 복잡한 이 복잡을 우리가 무슨 지혜로 이것을 다 알며, 이  또 복잡한 문제를 무슨 능력으로 해결을 지울 것이며, 또 우리가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의 지혜로는 알 수 없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또 이것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다 알 수도 없는 일을 우리가 아듬고  있고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러기에 인생 단독이 순간에 움직여진 그 움직임이 너무도 과오가 커서 인생은  그 위치에서 이 한 가지 과오로 타락하게 됐고 만물은 저주받게 된 여기에서, 이  지극히 작은 그 과오지마는 이는 벌써 영원에 결과가 되어져서 영원한 멸망  여기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영원한 고난으로, 영원한 희생으로, 영원한 대속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 이 대속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은 이렇게 만물 영장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인간이 자기 단독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 지능에 벅찬 일을 만나 있기 때문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이것을 예수님께서 대속을 하셔서 우리를 여기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해결해 놓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모든 지혜 지식의 일,  알아야 될 일, 인간이 할 수 없는 능력의 일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대신  하셨습니다.

이렇게 법적으로 해 놓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  지공 지성법에 인정을 받아서 공심판을 우리는 면제받고 무궁세계에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궁세계에 가서 살 만한 그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입어서 무궁세계를 가기는 가지마는 우리 자체가 실질적으로는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살 만한 그 시민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이 갖추지 못한 이 실력을 이 세상에서 갖추어 가도록 그 기간을 주시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이요 또 이 일을 완전히 완성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예정과 모든 창조, 섭리, 모든 것을 구비해 놓으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만물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뛰어난 존재로 지음을 받은  우리들이며 또 우리의 지혜로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위치,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 어려운 일들, 하나님 다음으로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요 있는 이 위치, 이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실력도 되고,  우리의 소유도 되고, 우리의 영광도 되는데 이런 존재로 이런 위치에 이런  직책을 이런 영원을 받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혜도 능력도 하나도 없습니다.

전지한 지혜가 아니면 할 수 없고, 전능한 능력이 아니면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지능만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까지도 우리는 다 받아야 되겠고,  하나님의 전적 무한한 은혜를 우리가 다 받아야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해서 우리에게 칭의를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그 의로운 자로 우리에게 칭의를 주셨지마는 실지로 우리는 아무  실력이 없는 것이요 실상은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특수 창조로 창조를 받고 특수한 위치에서 특수한 복잡과 어려움,  심히 큰 영광과 실패 이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 한 분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을 다 받아야 되겠는데, 우리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지 안하면 우리는 영원한 실패자요 하늘나라 가도  아무런 실력 없는 그 무능자로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참 그 나라에 필요 없는  그런 존재로 아무 힘없는 존재로 살게 될 우리들입니다.

이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이 어려운 위치를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이 어려운 위치를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이 인격 이것을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위치를 우리의 이 모든 욕망을 다 달성할 수 있는  전지한 지혜를 하나님이 없는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고, 전능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고,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그 신성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도 우리에게 주셨고,  하나님의 위로도 주셨고, 사랑도 주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것을 대신해서  대신해 주실 이것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오늘밤에 봉독한 이 말씀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이 말씀은, 이 말씀이면 우리의 위치를 이모 저모, 이면  저면, 이 종류 저 종류, 이 복잡한 것을 다 바로 감당할 수가 있고, 이 힘드는  것을 바로 감당할 수가 있고, 모든 인류와 천사를 미혹시킨 이 악령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이 이김도 이 안에 다 감추어 있는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우리 자체가 뛰어나게 존귀함으로 지음을 받았고, 존귀한  소망을 가졌고, 영원토록 존귀한 위치를 우리가 가지고, 존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위치에서 실패함으로 모든 만물이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사람으로 인해서 만물이 저주받았다, 이 우주가 저주받았다 이랬습니다.

이것은 첫째 아담으로 만물이 저주받은 이 저주가 둘째 아담과 곧 그의 지체인  그리스도인 우리 들로 말미암아 물질계 만물과 영계 모든 만물이 축복을 받는 이런 위치, 아주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복잡한 위치, 능력 있는 위치, 또 자신이 하나님처럼  자체가 온전치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이 위치, 이 위치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구비한 요소를 다 내가, 하나님을 받아야 되겠는데,  하나님의 것을 받아야 되지 어떤 피조물의 것 받아 가지고는 하나도 안 됩니다.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부 무한성의 것,  이 무한성의 것과 영원성의 것, 성질도 무한성의 성질이요 영원성 성질이요 다  영원한 영생성에 있는 이런 것들이라야 우리 자체도, 위치도, 사명도, 모든  관계도 감당하겠는데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것을 받지 안하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아만 가지고 우리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해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주실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법적으로는 주셨습니다. 이러나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 놓으시고 이것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지마는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런 보배로 인정을 안 합니다.

하나님이 전지한 지혜를 주셨지마는 전지한 지혜를 우리가 인정치 않습니다.

전능을 주셨지만 전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그 온전한 신성을  우리에게 주셨지마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곧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함을 입은 자들 안에 업이 있게 하시리라” 하는 말씀은 거룩한 세계,  거룩한 만물, 이 모든 거룩한 것들에게 영원히 이 거룩의 위치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업입니다.

우리의 업은 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업이면서 모든 피조물을 봉사해서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의 직업은  거룩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에 그것이 우리의 기업이요 그것이 우리의  사업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말씀은 이것이 뭣인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신이 하려는 당신의 뜻이요 당신의 소원이라 말이오. 당신의 계획 세워놓은  당신의 의사입니다. 당신이 정해놓은 당신의 의지입니다. 곧 진리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뜻은 둘이 있으니 문서에 나타난 문서의지가 있고 은밀의지는  영감 그것을 은밀의지라 하는데 이 의지는 이것은 곧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은밀의지는 하나님의 영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은 하나님 뜻이라 말이오. 하나님의 뜻이라 말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설계라 경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이 문서 이 문서가 우리 위치를 감당할 수  있는 이 전지의 지혜요 전능의 능력이요, 영감이 하나님의 전지한 지혜요 전능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한 절 한 절 볼 때에 ‘이것은 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지혜라, 내게 주신 능력이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지혜라, 내게 주신  능력이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는 보호라, 하나님이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영광이라, 하나님이 나를 권위 있게 하는 권위라, 하나님이 내 원수를 멸하는,  원수를 멸하는 이 멸하는 것이라, 원수를 멸하는 것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쾌락이라, 기쁨이라, 만족이라, 평강이라, 이 말씀이 나의  피난처라, 이 말씀이 나의 부요라.’ 이렇게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도 되고, 하나님의  능력도 되고, 하나님의 지혜도 되고, 하나님의 보호도 되고, 하나님의 책임도  되고, 하나님이 나를 돕는 도움도 되고, 내 대신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도  되고, 원수를 멸하는 무기도 되고, 나를 존영케 하는 존영도 되고,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쁨도 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도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도 되고, 하나님이  나를 돕는 도움도 되고, 이 말씀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조물로서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이 위치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런 직책을 우리에게 메워 주시고, 이런  영광스러운 이 모든 무대를, 우리의 나라를, 우리의 백성을, 우리의 기업을,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은 우리의 기업입니다. 이제 것이나 장래 것이나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다 너희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업입니다.

제가 기껏 해 봤자 이 부산시장 하나도 되려 하면 어렵고, 좀 좋은 이 뭐 몇 억  되는 빌딩 하나 집 한 채 이것을 하려 해도 안 되는데 공연히 “하늘의 땅의 것  이제 것과 장래 것 모든 것이 저희 것이라” 하는 것을 우스꽝스레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못 믿는 것이요 이것을 믿는 것이, 믿는 자에게 주십니다.

이 위치를, 이 사명을, 이 직책을, 이 존영을, 이 모든 악령과 죄와 사망으로  더불어 이 인간이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인데 이런 것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이 이김,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에게서만 얻어 가지고 그분의 것으로만  할 수 있지 그분의 것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그분의 것으로만 할 수 있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능력을 줘야 되겠습니다. 전지한 지혜를 줘야 되겠습니다.

그분이 수많은 원수 속에서 나를 보호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분이 내가 이길  수 없는 모든 대적을 내 대신 싸우셔서 이기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평강을 주실 때 이 평강이라야 아무도 뺏아가지 못하지, 하나님이 내게  기쁨 주시는 이 기쁨이라야 아무도 뺏아가지 못하지, 이분이 나를 사랑해 주셔야  되지, 그러면 그게 다 어데 있느냐?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입니다. 말씀입니다. 문서의지 영감의지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오.

다니엘을 원수들이 죽이려고 그렇게 해하려고 할 때에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기도 안 한다고 하지말고 기도한다 해라.’ 기도한다 해라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다니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요, 다니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다니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나는 기도합니다 해라’ 하는 그 말씀이 곧 그것이 뭐이냐? 사자  입을 막는 말씀이요, 원수를 다 죽이는 말씀이요, 다니엘을 존영케 하는  말씀이요, 다니엘을 원수의 손에서 보호하는 그 말씀이요, 그 말씀이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다니엘을 존귀케 하는 그 존귀요, 그것을 받아서 ‘나는 기도합니다.’ 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것이 되는,  능력도 되고, 지혜도 되고, 보호도 되고, 원수를 멸해 주는 것도 됐고, 다니엘  사랑하는 것도 됐고, 다니엘을 존귀케 하는 것도 됐고, 영광스러운 것도 된  그것을 다니엘은 받았습니다.

‘나는 기도한다.’ 받았소. 그것이 다니엘은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을 다 받아서  그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충만합니다.

받았고, 하나님은 다니엘이 그렇게 그것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것을 받았을  때에 그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 돌아가게 결과가 맺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볼 때에 “이 은혜의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한 자들 가운데 업이 있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모든 투쟁 가운데서 세우시려고 하시는구나. 나를 모든 자에게 봉사자가 되게  하시려 하는구나.’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몇 가지나 되는가 보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보호요, 하나님의 책임이요,  하나님이 내 대신 해 주시는 것이라.

이런데, 그러면 이것을 언제든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지마는 내가 이것을  언제 내가 받아 가져야 되느냐, 이것이 언제 내것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언제 내것이 되겠느냐? 다니엘이 평소에 그렇게 기도했어도 그 기도가 원수를 멸하는 건 아닙니다.

사자구덩이에 보호하는 건 아니오. 전국에서 그렇게 다니엘을 죽이려고 몰아댈  그때가, 그때에 ‘기도 할래 안 할래?’ 기도 할래 안 할래 하는 그때가 오는  그때가 바로,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하는 이 말씀을 듣고 기도를  했지마는 이 기도의 완성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이 나를 보호하는 말씀이요, 나를 이기게 하는  말씀이요, 높이는 말씀이요, 영광스럽게 하는 말씀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말씀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말씀이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씀인데 이것을 언제 실지로 만들겠느냐, 이것 언제 실지로 만들겠느냐?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이 말씀이 언제 요 실상으로 만들 그  기회가 오겠느냐? 그 기회를 주시지 안하면 내가 실상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줄 때에 내가 그것을 실상으로 만들면 된다 그거요.

히브리 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그 말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그 말씀은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자기 그 뜻대로 행하는 것과 요 둘을 합해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아무 때나 다 행하고 싶다고 다 행할 수 있습니까?  이때는 이 말씀을 행할 수 있고 저때는 저 말씀을 행할 수 있고 때를 따라서 그  말씀을 행할 때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으려고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하나님에게 받으려고 암만 해야  하나님은 사랑을 줬는데 내가 달리는 받는 길이 없습니다. 바로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신구약 성경이 다 있지만 그 성경을  우리가 한 시간에 다 지킬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 내가 지켜야 될 하나님의  뜻이 있고 저 시간에 지켜야 될 뜻이 있고, 또 이 신구약 성경에 없는데 성신의  감동이 이 사건에 이렇게 감동해 주시고 저 사건에 저렇게 감동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내게 줄 때에 그 뜻 그것이, 그 뜻을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뜻을 행하는 그것이 실상을 만드는 거라. 내가 소망하는, 내가 바라보는 것을  실상을 만드는 것이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내게 왔는데 그때에 내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요,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  주심을 내가 입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이 내 편돼서 가지고서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있지마는 이 충만한 은혜는 당신의 뜻, 곧  당신의 말씀, 곧 진리, 요 진리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요 진리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현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이 글로 한 성문의 이 의지든지 영감의지든지  그때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면, 요 명령이면, 요게 말씀이면, 요 뜻이면  요것이 말씀이요, 요것이 진리요, 요것이 명령이요, 뜻 그것이, 요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요, 그게. 그것을 받으면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요,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전능한 능력을 주는 그  능력이요, 하나님이 전지한 지혜를 주는 그 전지의 지혜요,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는 보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내편되셔 가지고서 원수로 더불어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우심입니다.

내가 그것을 행하면 하나님이 내편이 돼 내 응원자가 돼, 내 응원이 되셔 가지고  원수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요 내가 그것을 뜻을 그것을 버리면 하나님의 응원을  내가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권능을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보호를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책임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받지 안하면 하나도 할 수 없는 이런  존영한 어려운 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부 하나님에게 받는, 하나님에게 받는  이 영원성 완전성의 것 이런 것들만 가지고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은혜로만 할 수 있는 것인데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면 은혜요, 하나님의  것이라면 것이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 앞에 공으로, 받아 가지고, 이룰  터인데, 하는 이 모든 것을 주실때에 어떻게 주시느냐? 그때에 하나님의 뜻인  그것을 주십니다. 그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실상이오.

그것을 행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그것을 그대로 순종해서  행하면 실상이 된다 그말이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믿음은  소망하는 것이 실상되는 것이 믿음이라 그말이오. 그때에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행하면 그게 믿음이오. 그러면 바라던 그것이 실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능력 뭉텅이요, 지혜  뭉텅이요, 보배 뭉텅이요, 사랑 뭉텅이요, 하나님의 모든 은혜 뭉텅이라.

그러면 이 뭉텅이인데 이것을 언제 이것을 내것을 만들겠느냐? 언제 이것을  내것을 만들겠느냐? 언제 이것을 내가 실상으로 만들어 가지고서 내가 받겠느냐?  나를 주기로 돼 가지고 있기는 있지마는 이것을 언제 찾을 것이냐? 그것 마치 누가 뭐 쌀표를 탔는데 이 쌀표 그것을 날짜가 와야 가서 찾지? 어떤  물건표는 가졌는데 그 날이 와야 찾지? 이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내게 주실  은혜가 신구약 성경에 가뜩 지금 실려 가지고 있는데 요 시간이 맞아야 찾겠다  그말이오. 그 시간을 기다려서 기회를 기다렸다가 그 시간 될 때에 딱 찾으면  돼.

우리가 요 현실 현실에 요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행하면은 실행하는 그  현실에서 내가 표를 받아 가지고서 이 표를 받아 가지고 바라고 있던 게  실상되고 실상되고, 바라던 것이 실상되고 바라던 것이 실상되고, 요렇게 해서  우리는 영원 무궁한 완전한 것으로 날마다 부강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되 인간을 통해도 주지  않습니다. 뭘 통해서도 뭘 공중으로 돈이라고 공중에 던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당신이 보호를 이래 무슨 뭣을 통해서 보호로 주시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북에서 이래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밀고 있으니까 미군이 와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줄 알지마는 그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아닙니다, 미군을  가지고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소. 미군으로 보호해 주는 그게 성경에 없습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를 어떻게 주느냐? 우리 보호를  주는 것은 그때에 인민군이 나를 죽이려 할 그때라도, 그때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뜻을 나에게 성경으로 나타낸 문서계시의 뜻을 주시든지 문서계시에 없는 은밀한  것이라면 영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줄 때 그 뜻대로 내가 행하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는 보호를 내가 입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여기에 입각하고 여기에 굳게 서서 요 자리를 옮기지 안해야 되지 공연히 이  자리 옮겨 가지고서 암만 해 봤자 다 허탕, 외식하는 것 다 헛일 걷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은혜 그것을 하나도, 그것을 받아 가지고라야 내것이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그것을 거기에서 받은 게 아니면 하나도 안 이루어지는데  거기에 것을 받아야 되는데 그분이 나에게 줄 때에 뭘로 주느냐? 문서의지로  은밀 의지로 하나님의 의지로 요 의지 그것을 줄 때에 그것을 착 받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게 됩니다. 요 외에 딴게 없어.

그러기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바라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갖 소망하는 것 아니요? 얻으려고 소망하는 것 아니요? 소망하는 그것은 그때  그때 하나님의 뜻을 줄 때 그 뜻을 순종하는 그 순종하면 실상 된다. 요 외에는  딴 길 없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것은 우리의 무기요. 우리의 원수가 아무리 강해도 요것으로 하나님이 보호를  입으면 해할 자가 없습니다. 요 능력으로 대항할 때는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요것으로 하나님의 응원을 받으면 못 이길 일이 없습니다. 고요히 생각합시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때는 꼭 인간 생각으로는 안 될  것같이 줍니다. 그래야 믿는 것이지. 그래야 믿고 안 믿는 게 표나지. 사는 것은  죽는 말씀을 줍니다. 부요는 가난한 말씀을 줍니다. 영광은 수치스러운 말씀을  줍니다. 이기는 것은 반드시 지는 방편으로 줍니다. 당신을 믿기 때문에 행하지.

<기도> 주님, 무한이 담겨 있는 주님의 말씀은 유한한 우리들이 감당치 못할 것을  주께서 잘 아시나이다. 주의 공로로 인한 무한하신 성신의 감화가 아니면 알  수도, 감당할 수도, 힘입을 수도 없음을 아옵나이다. 주님의 뜻 곧 우리  각자들에게 대한 주님의 뜻, 주님의 뜻, 이 주님의 뜻에 지극히 크고 넓고 높고  깊고 헤아릴 수 없는 무한의 주의 온갖 충만이 가득 들어 있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직 이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행할 때에 모든 바라는 것이 실상이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굳게 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32 말씀 묵상하는 자/ 시편 1장 1절-6절/ 800919금야 선지자 2015.10.30
331 말씀 순종의 세 가지 난제/ 누가복음 1장 30절-38절/ 820625금새 선지자 2015.10.30
330 말씀 안의 내재적 영감/ 마태복음 13장 3절-9절/ 830720수새 선지자 2015.10.30
329 말씀 지키는 것/ 말라기 3장 7절/ 841125주후 선지자 2015.10.30
328 말씀과 실상은 하나/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81012수새 선지자 2015.10.30
327 말씀과 실상은 하나/ 베드로전서 1장 3절-4절/ 881010월새 선지자 2015.10.30
326 말씀과 주님/ 요한일서 4장 1절-3절/ 890206월새 선지자 2015.10.30
325 말씀과 현실을 통해 온전/ 베드로전서 5장 6절-7절/ 830929목새 선지자 2015.10.30
324 말씀-기도-행함/ 디모데후서 4장 15절-18절/ 850212화새 선지자 2015.10.30
323 말씀-기도-행함/ 사도행전 20장 26절-32절/ 850310주새 선지자 2015.10.30
322 말씀대로 식구를 길러라/ 사도행전 20장 32절/ 840525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321 말씀대로 한 것/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890702 남권찰회 선지자 2015.10.30
320 말씀듣는 귀를 열어 주어라/ 디모데전서 4장 4절-5절/ 861024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319 말씀만 사모/ 마태복음 13장 33절/ 840511금야 선지자 2015.10.30
318 말씀에 굳게 세워라/ 사도행전 20장 29절-32절/ 870710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 말씀에 대한 지식/ 사도행전 20장 29절-32절/ 810102금야 선지자 2015.10.30
316 말씀은 보배덩어리/ 사도행전 20장 32절/ 810101목새 선지자 2015.10.30
315 말씀은 유일한 배경/ 요한복음 12장 47절-50절/ 850801목새 선지자 2015.10.30
314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890806주새 선지자 2015.10.30
313 말씀을 깨닫는 것이 은혜의 첫번째/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60505월밤집회 선지자 201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