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1985. 11. 5. 화새벽

 

본문 :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성경 지식만을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지식으로 삼고, 또 참됨을 인정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그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우리 지식을 삼고 우리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또 그대로의 사람이 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이렇게 자꾸 알려고, 성경에는 많은 그런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씩 둘씩 자꾸 이렇게 알아 나갈려고 하는 그것도 좋습니다. 좋으나 알아 나갈려고 하는 그것도 그리 치우치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믿는 도리를 우리가 바로 깨닫고 우리 구원을 바로 이루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편에 있어서 세상에 마귀들이 내놓은 방편이 뭐 얼마든지 있습니다. 참 아주 굉장히 찬란한 그런 방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유혹을 받는 것은 다 허영과 허욕을 죽이지 못하고 허영과 허욕, 허영과 허욕 그것이 우리 속에 있어 가지고 우리를 미혹해서 그렇게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별다른 우리가 방편을 연구할려고, 따라갈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대개는 보면은, 제일 좋은 방편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걸었고 성경에 있는 인물들이 다 걸어서, 걸은 중에 이래 걸은 사람은 망했다 저래 걸은 사람은 또 흥했다 하는 것도 우리에게 다, 결과라는 그런 흔적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그런 것이 다 처음에 시작될 때에는 모든 사람이 다 인기를 끌었고, 모든 사람들이 혹 해서 다 그 미혹을 받아 가지고서 절단났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들은 다 허영과 허욕주의, 허영과 허욕, 허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광스러워져서 내가 영광스러운 그외의 것은 다 허영입니다.

하나님 그로 말미암아 영광스럽지 않은 것은 그거 다 허영이오. 허욕도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욕심만 그것이 우리 욕심이지 그외의 거는 다 허욕입니다. 허영, 허욕 가진 그런 공명 신자들, 또 자기의, 어짜면 자기를 좀 더 낫게 소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까 하는 그 인기를 노리는 그런 사람들이 다 그런데 빠져 가지고서 절단이 났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다 자기 행한 대로 갚기 위해서 하시는 그 갚는 일입니다. 곧 그것이 그런데 빠져 가지고서 넘어지는 것이 그것이 자기 사람된 대로, 그 행한 대로 하나님이 보응해서 막바로 그게 망하는 것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사람이 올라가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방편 가지고 인정받는 그것이 저주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별스러운 다른 그런 방편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그저, 뭐 쉽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다 정확 무오한 말씀이요, 물론 사본이 있는 데서 사본에서 틀리고 번역에서 틀리고 틀린 게 있지마는 그래도 자꾸 읽으면 전체적으로 바로 깨달을 수 있지 뭐 마귀가 아무리 사본에 착오를 가지도록, 또 번역에 그렇게 오역을 가지도록 이렇게 아무리 해 봤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그거보다도 더 큰 능력이 같이 하기 때문에 그런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정확무오한 성경이 우리에게 어쨌든지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손에 들어왔고, 성경 안에는 이런 다른 문서와 같지 안하고 다른 문서들은 그 문서가 문서, 죽은 문서뿐이기 때문에 그 문서를 이해할 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문서를 발 아래 밟으면서, 멸시를 하면서 읽어도 다 이해를 합니다.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이 성경 말씀을 자기가 벌써 무시하고 멸시하고 그렇게 하고는 성경을 암만 천하 박사가 다 모아 가지고서 본다 할지라도 이 성경 말씀 속에 알맹이는 저는 모릅니다. 제 복음은 되지 못하고 제 구원은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 히브리어 박사가 말하기를 구약은 히브리어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 박사는-예수 안 믿는 불신의 히브리어 박사도 많이 있는데-히브리 박사는 불신자라도 구약에 대해서 아는 것은 히브리어 모르는 목사보다 낫다, 구약을 더 잘 안다, 하는 그런 말을 어떤 사람이 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 지금 살아 있지만 내가 그 말을 하기가 거석해서 말을 안 합니다. 그런데 그래 가지고 그 배운 제자들이 나한테 와 가지고 말하기를 히브리어는 거게 대해서 이제 말한 대로 그런 말을 합디다.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히브리어라 하는 그 어학 가지고서 전부 어학 모르는 목사들을 빨끈 눌러 가지고서 그걸 위주로 할려 하는 것인데 그까짓 것 누르면 다 박살이 돼 버립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진리가 있는데 그 눌리고 깨질 턱이 있습니까? 그런 말은 성경을 다 무시하는 말입니다 성경 안에는 이 세상 문서와 달라서 그 속에 말로 된 이 언어 속에 진리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또 그 속에는 성신의 감화 영감이 그 속에 내재해 가지고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성경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다 성경의 명백성은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꾸 보면은 그 성경은 똑똑히 옳고 바르고 참되게 알려 준다 성경이 그 사람을 알려 준다 하는 그 명백성을 인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만 성경은 허영과 허욕으로서 멸시하는 사람의 성경 아니고 성경은 우리에게 계명으로 줬고 교훈으로 줬기 때문에 교훈으로 줬으니까 우리가 거게 따라서 회개해야 되겠고, 계명으로 줬으니까 우리가 그 명령이니까 지켜야 되겠고 하겠습니다. 이래서, 그저 뭐 자기가 성경 보고 아는 대로 아주 보면은 믿는 사람들이 보면은 우스꽝스러운 것 같지만서도 자기가 성경을 혼자 읽어서 아는 대로 그대로 또박또박 그대로 지켜 행하고, 아는 대로 행하고 아는 대로 행하고, 요렇게 아는 대로 행해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물이 들지 안하고 자기 혼자 첩첩 산중에 앉아 가지고서 그저 성경 말씀을 자기가 읽고 아는 대로 행하고, 아는 대로 행하면 그 사람이 참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성경 학자가 될 터인데, 이 다 마귀들이 내놓은 것 도무지 이래 가지고서 잡탱이 인간들이 해 놓은 그런 것이 가득 이렇게 쌓여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을 찾지 못하게 되는 때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날라고 다닐 때에 사람들이 모두 주 모여 가지고 가리워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으니까 뽕나무에 올라가 가지고서 그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오늘도 이런 것 저런 것 다 치워 버리고 어쨌든지 제일 아는 것은 뭐 하나님이 주신 방법만 써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 아는 방법도, 예수 믿는 방법도 신구약 성경에 다 가르쳐 놨는데. 그외에 특수 방법 그런 것은 다 마귀가 내놓은 것이라고 봐서 뭐 틀림이 없습니다. 왜? 유익보다 손해가 많습니다. 성경 방법 외에는 다 귀신이 우리에게 준 것이지, 다 허영과 허욕자들, 자기 인기 끌라 하는 자들이 별스러운 소리를 해 가지고서 사람들을 끌어 들일라 하는 것이지 성경에 있는 이 방법, 성경에 있는 이치, 성경에 있는 법칙, 성경에 있는 범위, 성경에 있는 소망, 성경에 있는 이 지식 이것만으로서 족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 말씀 보는 것은 여러분들이 뭐 우리가 다 이거 많이 알고, 다 지금 알고, 뭐 설교도 여러 수십 번 여러분들이 했을 것이고 저도 했고, 이거 반사들도 다 했고 뭐, 아마 평신도들도 다 이 말씀을 쓰면서 사람들에게 전도도 하고 심방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금으로 비유하신 것은 우리 개인 구원 이루는 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개인 구원 이루는 것은 어떤 것이 개인 구원 이루느냐? 개인 구원 이루는 것은 자기가 첫째는 하나님에게 쓸모 있는 사람되는 것이 개인 구원 이루는 것이요, 또 모든 인류들에게 쓸모 있는 그것이 개인 구원 이루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하나님과 사람 두고 그 위에 모든 만물들이 있는데 그 만물들에게 필요 있는 그런 인물이 되는 것이, 그게 구원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물들도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만물들에게 필요 있고, 만물둘에게 참 필요 있는 그런 인물들이 되기를 탄식하면서 원한다는 것을 로마서 8장에 기록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이나 인간에게 대해서나 모든 전피조물, 하나님과 전피조물들에게 내가 쓸모 있는 인간되는 것이, 그것이 내 구원입니다. 그것이 내 가치입니다. 아 시장에 가도 쓸모가 없으면은 값이 떨어집니다. 아무리 그게, 그 만들어 놓은 것이 만일 억만금을 들여가지고 만들어 놨다 할지라도 그거는 아무에게도 쓸모 없으면 그까짓 거 시장에 갖다 놔 봤자 아무도 살 사람 하나도 없고 다 돌아 봐 사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가치는 뭐이냐? 가치라는 것은 쓸모 있는데 가치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공으로 주어 가지고 온 건데 돈 한 푼도 안 들었지마는 이거는 쓸모 있는 사람이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 아니라 이 나라에도 저 나라에도 세계에 제일 쓸모있는 물건이 됐다면 그 물건이 아마 가치가 제일 비쌀 것이고. 다 원하는 사람들은 제일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방편을 말해 놨고, 또, 점점 우리가 그 중앙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은 중앙이요 하나님은 중심 인데, 하나님 중심이요, 하나님이 전부 중심이요 하나님이 전부 중앙인데.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고 있고 하나님에게 속하고 이라는 건데 점점, '쓸 데 없어 밖에 버려' 밖에 버리는데, 밖에 버리는, 밖으로 버리는데 밖에 버리는 정반대는 뭐입니까? 점점 중앙으로 영접해 들이는 것입니다. 쓸모가 있으니까 자꾸 '아, 이거는 거게뿐 아니라 더 요긴하다.

더 요긴하다.' 자꾸 쓸모 있어 안으로 영접해 들이는 것 아닙니까? 점점 주님 앞으로 가까이 영접해 들여서 '아, 너는 그 자리 있어 안 돼?' '을라오너라.' 이제 을라가서 점점 밖에 버리는 반대로, 밖에 버리는 데로 점점 중앙으로 자꾸 쓸모 있어서 등용되게 된다.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힌다. 정반대로 사람에게 이제 존대함을 받게 된다. 존대함을 받게 된다.

사람이 창조주와 피조물에게 점점 쓸모 있는 존재로 되어져 가는 그것이 어떤 것이냐?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거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소금이 맛을 지니면, 맛을 지니신, 가지고 있으면 그는 쓸모 있는 것이 되어진다.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 반대로 맛을 가지면 점점 쓸모 있어서 중앙으로 자꾸 영접하게 된다. 맛을 잃으면 사람에게 밟히는 그 반대로 맛을 가지면 사람에게 이렇게 존대해 가지고 존대함을 가져서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도 너는 필요하다.

제일 필요하다 예수님을 말씀했고 예수님은 땅 밑에 있는, 지옥에 있는 모든 사탄들도 다 주라 시인해 사탄들도 '네게 누가 제일 필요하나?' 예수님이, 주님이 제일 필요하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땅 밑에 있는 모든 것들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말은 천상 천하에 예수님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이는 없다 마귀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마귀까지도, 이렇게 말한 이것이 우리가 모든 존재들에게 쓸모 있는 것이 우리 구원 이루는 것이고 쓸모가 있는 데도 점점 쓸모가 더 있어서 점점 요긴한 데로, 중요한 데로, 중앙으로 자꾸, 근원으로 자꾸 끌려 들어 가지고서 제일 근원으로 자꾸 가까이 나아가는 그것이 우리 구원 이루는 것이고, 모든 존재들이 다 필요 있다고 다 존대하고 다 환영을 하고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평가적인 구원입니다. 뭐 이 구원을 구석지게 이리저리 말해 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하면 그와같이 되느냐? 소금이 맛을 잃지 안하고 가지고 있으면 그리 된다. 소금은 우리를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맛이라는 것은 소금의 모양 그게 아니고 맛이라는 것은 소금의 특수성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특수성. 그러면 우리 택자들의 특수성은 뭐인가? 우리 택자들의 특수성은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 세 가지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 그다음에는 진리와 영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진리가 영감이나마 이제 말씀을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서 말씀으로 살면 그다음에 진리를 영접하게 되고, 진리를 영접하게 되면은 그다음에는 영감과 동행하게 되고 영감과 동행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과 같이 해서 예수님의 피와 동행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도 내나 진리와 영감이오. 그런데 왜 순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말씀과 진리는 하나기 때문에 말씀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고 고다음에 영감을 이차로 말하고, 그다음에 예수님의 피를 말하느냐 하면은 그 말하는 순서를 그렇게, 속은 하나지마는 우리들의 논리하는 논리 순서는 그 순서를 잡는 것이 옳습니다. 왜? 우리가 진리대로 행하고 우리가 영감대로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진리대로 행하고 영감대로 행하는 것은 실지의 진리와 영감이 하고 있는 그 일에 억억억억 억만분의 일도 우리는 못 합니다.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한계를 정해서 인간으로서 네가 어느 정도 하면, 어느 정도 하면 그다음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입혀 주신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인데, 그 사죄는 진리와 영감을 범하지 안하고,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을 범하지 안하는 것인데 범하지 안하는 것은 우리가 영원토록 알아도 다 모릅니다. 알고 보면 또 있고 또 있고 또 있고 무한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알아도 모를 그것을 예수님은 우리 대신 해 줬기 때문에 이제, '아들이 너를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이제 말씀하신 대로 그 대속을 우리가 '하나님이 이 대속을 입혀 준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충성이라 이랬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그거는 죽도록 인간이 할 일하고 나면은 그 나머지기는 하나님이 다 해 주신다는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특수성은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이 세 가지가 택자들의 특수성입니다. 세상 사람은 하나도 이거 가지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지식의 진리, 이 진리를 가지지도 못했고 영감도 그들은 없습니다. 마귀의 감화만 있지 영감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 세상에 없는 우리의 특수성이라 말이오. 우리의 특수성, 세상이 하나도 가지지 못한 게 뭐이냐? 세상에 하나도 가지지 못한 걸 가려 보이소. 세상에 하나도 가지지 못한 것은 이 진리와 영감, 예수님의 그 피 이 셋 외에는 없습니다. 그들도 다 비슷한 걸 다 가지고 있지마는 이 셋은 하나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 불택자들이 영감을 가진 줄 압니까? 영감 한내끼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털끝만큼도 못 가졌습니다. 또 그들이 우주 만물을 창조한 진리를가지고 있습니까? 진리 못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이걸 가지고, 맛을 잃지 않은 이걸 가지고 있으면, 그러면 이거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소금은 이래 자꾸 녹으니까, 소금은 녹으니까 소금은 녹으니까 녹는 것을 자꾸 말해 가지고서 희생을 우리가 말해 쌓았는데 그거 우리는 그만 잘못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희생할라고 하면은 뭐 희생하면은 제가 안 할 것을 억울하게 남을 위해서 희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쭐한, 마귀만 나오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희생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희생이라는 그 말을 완전히 취소해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희생하는 거는 취소해야 됩니다.

희생하지 말고, 다만 하루 우리는 딱, 생명과 시간의 제한이 딱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루 살았으면 그만치 감소됐습니다. 일 년을 살았으면 그만치 감소됐습니다. 십 년 살았으면 그만치 감소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피로 이 시간 살라 그 말이오.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피로 내가 이 한 시간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버리지 안하고 진리로, 영감으로,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렇게 우리가 요 시간 살면 녹으나 안 녹으나 나는 녹았습니다. 누구 위해서 희생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진리와 영감, 그러면 영감은-진리는 인격 존재가 아니지마는-영감은 그 이런 모든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격성을 가진 것이 영감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진리는 이치뿐이오. 이치뿐이지마는 영감은 이렇게, 신성인 신격성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보고 다 느낄 수도 있고, 감각 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고, 평가할 수도 있고, 가감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을 작용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기계는 만들어 놓으면 기계는 기계 만들어 놓은 그 본분밖에는 못하지마는 콤퓨터는, 콤퓨터는 제가 암만 명철해도 만들어 놓은 콤퓨터 그거는 고것만 하지 그 범위를 벗어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암만 등신이라도 보고 이렇게 저렇게 모든 것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이렇게 할 수가, 사고 방식을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영감이 되면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너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러면 영감이 이거 하라 하는데 그것하면서 오늘 하루 늙었습니다. 영감이 저거 하라 할 때에 그거 하면서 하루 늙었습니다. 영감이 이 싸움 싸우라 하는데 그 싸움 싸우다가서 하루 늙었습니다. 또 이거는 네가 아무리 하기 어려워도 이거 지키다가, 지키다가, 오늘 이거 이거 지키라 해서 오늘 그거 지키다가서 하루 늙었습니다. 어쨌든지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피를 버리지 안하고, 이 셋을 버리지 안하고 이것으로서 하루 녹았고, 또 일 년 녹았고 요대로만 살면 됩니다.

'뭐 제가 무슨 희생해야 된다는 그런 것 생각지 말고, 이렇게 하면, 요것만 하면 목사라도 쓸모 있고, 집사라도 권찰, 장로라도 쓸모 있고, 하나님에게도 피조물들에게도 교회도 다 쓸모 있습니다 그거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될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고, 다만 내가 진리대로 할라고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라' 그러면 산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데 세대를 본받기 때문에 자꾸 어두워집니다. 암만 해 보십시오. 결과가 뭐 있는가? 없습니다. 제가 천하를 다 움직이고 이랬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보면 아무 것도 없어.

그러기 때문에, 성도의 택자의 특수성 요것을 잃지 말고 특수성 요것을 가지고 네가 살아라. 특수성 가지고서 뭐, 녹는 거는 저절로 녹습니다. 안 녹을라고 안 녹을 수 있습니까? 그거는, 다른 사람은 정욕으로 녹고 물욕으로 녹고 공명욕으로 녹고 명예욕으로 녹고 허욕으로 녹고 오만 걸로 다 녹지마는 우리는 다만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피로 하루를 제가 녹아지라 말이오, 하루를 지나가라 그 말이오.

그것이 일 중에는 제일 큰 일입니다. 그 쓸모 있는 일 중에는 제일 큰 일. 큰 일 하는 게 뭐이 큰 일 하는 것이냐? 이 세 가지 생활이 제일 큰 일 하는 것입니다 '뭐 이래야 내가 좀 높아질까 저래야 높아질까, 이래야 좀 인기를 끌까 저래야 끌까, 이래야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까?' 그거 순 귀신이 들어 가지고 저거 망치는 것, 다 자살 행위요. 자살 행위라. 사울 왕이 저를 높일려고 제 공명 기념비 세웠다가 그것 가지고서 완전히 망하지 안했습니까? 그거 우리에게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사울이 공명 기념비를 세운 그게 뭐이오? 오늘 우리들이 그런 걸 다 뽑아 버리지 안하면 다 헛일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안 돼. "자기를 비어" "자기를 비어" 하나님은 본체시나 동등됨을 여기지 안하고 자기를 비어 죽기까지 복종한 이것 때문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였다 했지 뭐 딴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가 좀 쓸모 있는 사람이 될까, 큰 일을 할까 그거 다 마귀가 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그저 소금이 맛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하루 동안 맛만 안 잃으면, 이 세 가지만 안 잃으면, 아, 영감 소멸하지만 안하고 잔리 배반치 안하고 영감대로, 진리대로, 예수님의 피 대속을 입고 이래 살면 그만 자기에게도 필요하고 하나님에게도 필요한 일 했고 모든 이웃에게도 필요한 일 했고 제일 필요한 일, 제일 쓸모 입는 일 했고, 그러면, 점점 더 필요하니까 너는 열 명에게 필요했는데 이제 백 명에게 필요하다, 또 백 명에게 필요했는데 만 명에게 필요하다, 너는 만 명에게 필요했는데 억만 명에게 필요하다, 자꾸 더 필요한데 점점 필요한 자리로 올라가는 그것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백 명에게 필요했던 것이 너는 백 명에게는 필요는 없다, 열 명에게 필요하다. 그거 자꾸 밀려 나가는 게 밖에 버리는 것 아닙니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 잃으면. 맛 가지면 사람에게 다 이래 존대받느니라.

우리가 요 방법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버리지 맙시다. 이 방법 버리지 말고, 우리가 이 방법을 누가 다 행한 사람이 있습니까, 처음에 행한 사람이 있습니까? 자꾸 그저 이 방법을 할라고 요게서만 노리고 다른 방법 하지 말고 요 방법만 할라고. 내가 어데 말 들으니까 그 벧엘 성서 연구법이라 하는데 그거 순전히 나는 부인합니다 나는, 그 속에는, 속에 주장하는 신은 우리가 주장하는, 우리를 주장하는 신이 아니라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내가 뭐뭐 그걸 다 살펴서 보지는 안했지만 그것도 다 내나, 호주 선교사들이 그 일 많이 했습니다 호주 선교사들이 그때 환등기니 가지고 돌아다니며 자꾸 이래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림 그려 가지고 자꾸 이래 가지고 뭐 하는 것, 그게 내나 천주교의 타락돼 내려가는, 자꾸, 왜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으로서는, 보이는 것으로는서는 그저 이 성경, 문서로 내놓은 그 이상을 나오지 안했습니다. 그 이상을 나오지 안하고 자꾸 보이지 않는 데로 들어갔습니다.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은 이 귀로나 들려지지 안 보이오.

그보다도 더 안에 그 진리, 자꾸 그 속으로 들어가고 들어가 가지고 마지막에 영감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으로 들어가고 자꾸 이래 들어가는데 자꾸 이거 끌어낸다 말이오. 이 인간들은 끌어낼수록이 좋아해요. 자꾸 끌어 내면 좋아서 자꾸 이래 하는데 끌어낼수록이 좋아할수록이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성화, 성화 그걸 붙이는 것을 지금이 아니고 제가 OO신학교 다닐 때로 말하면 내가 지금 OO신학교 한 삼십여 년 됐습니다. 삼십여 년 됐는데 OO신학교 다닐 때에 그때 이 성화 사진을 가지고서 내가 그때 그 몇 시간 그때 새벽 기도에, OO신학교 새벽 기도에서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마귀가 내놓은 법이지 성경법이 아니다. 왜? 이러면 이 성화 보고서, 예수님은 서적 중 인물이오. 우리가 제일 껍데기는 이 성경 가운데서 말한, 글이 말하는 이 서적 중 인물이요, 그 속에는 영감 인물이요, 그 속에는 들어가면은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빛으로 되어 있는 완전 자존자이신 데 자꾸 이래 나가야 되는데, 이제 이 보이는 데에서 자꾸 안으로 신령한 대로 이래 자꾸 들어가야 되는데 이걸 끌어다 내 가지고서 예수님은 수염이 검검추리하이 나고 낯이 기다랗고 아주 미남입니다.

아주 미남이오. 미남이라고 그리 했더만 요새는 또 예수님의 사진이라고 그랬는데 예수님을 또 요새는 이상한 매력으로 또 그려 가지고서 순 음탕한 남자를 또 그려 놨다 말이오. 음탕한 남자로 그려 났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이래서 이래 놓으니까 그라면서 이래 떡 십자가를 그려 놓고, 또 거게서 피가 덩겅덩겅 흐르고 이러니까, 어떤 장로가 자기가 따라다니면서 어짜든가, 자꾸 신령한 것을 말하니까 신령한 것 말하니까 육을 버리지 안하니까 신령한 걸 만나지 못하니까 이렇게도 하다가 제딴에는 좋아서, 내가 그때는 집사인데, 그때 집회하고 돌아 다닐때는 집사님입니다. 집사로 돌아다녔는데 '집사님 지금 내가 이래 기도하다가 내가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을 박혀 가지고 있는데 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데 거기서 보니까 팔에서 피가 덤겅덤겅 떨어져서 내가 그 피에다가 입을 대고서 그 피를 내가 받아 먹었습니다. 참 기쁨니다 그것이 어떻습니까? 그래서 기도하다가 그 형체가 안 보이면 죽을 지경이라 그 형체가 보이기까지 막 힘을 쓰고 애를 쓰면은 그 형체를 이제 예수님의 거룩한 형체를, 십자가에 못 박힌 형체를 보고 그라면 만족이 됩니다.' 그게 귀신이다. 그게 귀신. 그게 무슨 우리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외부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것으로서 다 됐고 그 속에 자꾸 기어 들어가 가지고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안에 있는 그 정신이 무엇이며, 목적이 무엇이며, 그 능력이 무엇이며, 또 거게서 역사하는 역사가 무엇이며, 이루는 결과가 뭐이냐? 자꾸 그렇게 보이지 않는 데로 자꾸 들어가야 됩니다.

이러니까, '혈육은 먼저요 신령은 다음이오' '첫째 아담은 그것은 허무한 것이요 둘째 아담은' 자꾸 이와같이 지금,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비유에 대해서 하갈과 사라에 대해서 비유를 해 가지고서 말씀을 해서, 그렇게 둘이 있는데 하나는 껍데기요 하나는 알맹이라는 걸 자꾸 이래 말해 가지고 우리 심령을 깨우치는 그런 일을 말씀한 데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다른 방편 쓰지 말고 어쨌든지 목회하는 것도 그저, 어떻게 하면 이 교회에 하나님이 날 세워줬는데 하나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쓸모 있는 사람되면 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쓸모 있는 사람되면 되지 않습니까? 이제 안으로 영접하면 점점 더 쓸모 있는 사람된다 말이라. 더 중요한 사람된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그들이, 사람에게 밟히는데 사람에게 모두 존대해서 다 쫄쫄 따르면 다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요 방편, 그저 소금이 맛을 잃으면 절단나고 소금이 맛을 지니면 된다.

이라는데 이걸 우리가 또 인제, 희생한다 해 가지고 제가 무슨 희생이나, 희생이나 하는 체 이렇게 해서, 우리는 희생은 없습니다. 제 할일 제 하는 것이지.

그래서, 말하기를 '내가 할일 한 것뿐입니다' 이 했어. 내가 할일 한 것뿐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할일 한 것뿐인데 종의 근원인 댓가와 자기와 비교하니까 '무익한 종이올소이다. 할일 한 것뿐이요 무익한 종입니다' 그것밖에는 마지막에 결론이 나오지를 안했습니다 이러니까 꼭 요것을, 자꾸 다른 걸 말하지 말고.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 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힙 된다. 소금이 맛을 잃지 안하고 맛을 가지고 있으면 쓸모 있어 점점 중앙으로 영접된다 모든 존재에게 존대 받는다. 이런 것은 이제 요런 성구를 가지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성경을 자꾸 읽어서 성경에 배워야 되겠습니다. 성경에 배워야 소금의, 소금의 맛을 가질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밟히는 거는 맛이 밟히는 것 아니오. 맛이 밟히는 게 아니고, 맛이 밟히는 건 아니고 맛을 잃어 버리기 때문에 맛을 가졌으면, 맛을 가지고 있으면 맛이 들어서 그 사람을 막 높이 들어서 하나님 다음의 사람을 만들 건데 맛을 잃어 버리니까 소금이 밟히지 소금 맛이 밟히는 것 아닙니다. 맛을 잃었기 때문에 밟히지 맛을 가지고 있으면 밟히지 않습니다.

소금은 우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맛은 이제 성도의 그 특수성. 그리스도의 특수의 은혜 피로 말미암아 성령도 왔고 피로 말미암아 이제 진리도 왔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에게 그냥 오지 안했어. 그러기 때문에, 피가 중심이라, 피로 말미암아 성령도 왔고 피로 말미암아 진리도 왔고, 성령도 피를 위해서 왔고 진리도 피를 위해서 왔습니다. 영감과 진리가 피를 증거해 가지고서 이 피의 이 은혜는 완전한 은혜인데, 완전한 구원인데 이 구원을 우리에게 입혀 주실려고 성령도 도울라고 진리도 도울라고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뭐 모든 목회 하는 데에도 자기 구원을 이루는 데에 그게 유일한 방편이라 요렇게 해 가지고 자꾸 우리가 이런 말씀은 뭐, 또 이 말씀을 골짜기에 가서 새김질 하고, 또 그 시장에서 새김질 하고, 또 원수 앞에서 새김질하고 독침 앞에서도 이래 새김질 하고, 독침 앞에서 이 마태복음 5장 13절을 자기가 새김질을 할 때에, 독침 앞에서 새김질 할 때 푹 쭈그러졌던 게 독침 앞에서 새김질 할 때에 '주여!' 고함을 지르고, 이래 고함을 지르고, '주여! 내가 맛을 잃지 않습니다? 내가 이 맛을 가집니다?' 할 때에 세상은 점령합니다. 세상은 점령해.

바로 이걸, 이 진리를 새김질해서 속에서 나오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전능자의 능력이요, 절대자의 능력이요, 세상을 창조하신 자의 능력인데 피조물들이 창조주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쓸 데 없는 방편 다 버립시다. 그거 다 버리고 어쨌든지, 그런 방편 취하면 그것만치 저는 절단나고 맙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모르는 자에게' 그게 다 사탄의 깊은 것입니다. 이뭐 이런 거 저런 거 별별 끌고 나가는 그것이 내나 귀신 그놈이 우리로 하여금 바른 걸 잡지 못하도록 할라고 우리를 번민스럽게, 고민스럽게, 분주하게 만들려고 자꾸 이래 해서, 자꾸 미혹을 시켜서 절단을 내는 것이지 거게 뭐 있는 거 아니오. 빠진 게 없다 했어. 빠진 게 없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이 성경에는 하나님이 모은 것이기 때문에 빠진 게 하나도 없다.

우리 구원에 필요한 것, 우리 지식에 필요한 거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습니다. 그 말씀이 어데 있습니까? 이사야 34장 16절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거는 우리가 내 구원 이루고 난 다음에 남의 구원을 이루어야 될 터인데 남의 구원 이루는데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은 우리가 빛이라 말이 아니오. 우리가 빛을 가진 자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달로 모형했습니다. 달은 자체는 빛이 없는 것인데 태양의 빛이 있는 그 빛을 받아 가지고서 반사하는 것이 달입니다. 이 빛은 내나 소금의 맛이오. 소금의 맛, 성도의 특수성 그것이 우리의 빛입니다. 이게 내나 진리요 영감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피의 공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의 빛입니다.

그러니까, 내 피와 내 살을 기념하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신 그대로 모형 생활하는 것이 우리 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하는 것도, 목휘하는 것도 예수님이 한 그대로의 우리가 모방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했는가?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했는가, 그 방편 외에는 우리가 쓸 필요가 없옴니다. 그거 전부 마귀가 주는 방편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나? 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부귀와 부요를 다 내놓는 것과 존귀를 내놓는 것과 권위를 내 놓는 것과 그 내 놓는 것 아닙니까? 내놓아 가지고 낮아지지 안했소? 낮아져 가지고 땅 위에서 와서 생활할 때에는 자기 당신을 비었고, 전 피동으로만 해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것으로서 끝마쳤다 말이오. 그거 외에는 우리의 방편이 없어요.

이러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라고 난 다음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 그러면 동리는 빛은 없는 거라. 동리는 높이 들었다 그 말이오.

높이 들렸기 때문에 그거는 숨기우지 못해. 아, 숨기우지 못해. 누구든지 그 동리는 환하게 드러나고 있지 숨기지 못해요. 이런 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존재들의 주목으로, 모든 존재의 표본으로, 원형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는 모형이지마는 피조물에게는 우리가 원형입니다.

원형으로 이렇게 뒀기 때문에 이거는 '숨기지 못한다, ' 그 말은 산 위에 있는 동리로 왜 비유했느냐 하면 이거는 빛은 없어, 빛은 없는데 높이, 위치만 높이 들려 가지고 있다 말이오. 우리가 이런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존재의 표본이요 원형으로 돼 가지고 있는 이것이 이제 맛을 잃어서 이 빛이 없으면, 빛이 없어서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이래 살고 제 마음대로 살면 숨기지 못한다.

숨기지 못한다 말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이 세 가지 빛으로 살지 안하고 이 세 가지 빛을 어겨서 사는 그 자차 그렇게 살면서 제딴에는, 살면서 자꾸 잘되기를 원한다 말이오. 살면서 잘되기를 원하지마는 숨기우지 못한다. 그러면, 잘되고자 해도 잘되지 않는다 그 말이오. 하나님께서 이라면 망한다 했는데 그 제가 안 망할라고 암만 해 봤자, 암만 망하는 것을 막을라 해도 안 됩니다. 아무리 잘 되는 걸 될라 해도 안 됩니다. 이러니까, 숨기우지 못한다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셨는데 이 빛대로 살지 안하는 자가, 빛대로 살지 안하는 자가 이 세 가지 빛대로 된다고 한 이 말씀대로의 어긴 보응을 자기가 받을 때에 보응을 받지 안할라고 암만 애써도 안 된다, 이 도리를 떠나 가지고 아무리 제가 유명해질라 해도 안 된다. 아무리 제가 잘살라 해도 안 된다. 아무리 성공할라 해도 안 된다. 아무리 위대할라 해도 안 된다. 아무리 교인을 끌어 모을라 해도 안 된다. 그걸 가리켜서, 불가능을 가리켜서 '숨기지 못한다' 그 말은 제 소원대로 못 한다 그 말이오. 숨기지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특별히 이 빛을 잃고 기독자가 기독자의 생활을 하지 안하고 변질된 생활을 할 때에 거게 대한 상당한 하나님의 보응이 가는데 그 보응가는 그걸 인간이 아무리 막을라 해도 막지 못한다, 멸망을 암만 막을라 해도 막지 못한다. 아무리 성공을 끌어 올라 해도 끌어오지 못한다. 고 불가능한 것을 요게 가르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조금 틀렸으면, 인간의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보는 사람은 못 봐도 사람은 봅니다. 조금 틀렸으면 조금 틀린 값이 있습니다. 절대 값이 없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것은 그 값을 받느라고 다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안한다. 이것은 좋은 면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 세 가지대로, 세 가지를 지니고 있으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를 가지고 있으면, 지니고 있으면 이 지니고 있는 것을 말 아래 숨기지 못해. 주인이 말 아래 두지 안해. 아무리 어떤 자가 와 가지고도, 와 가지고 그걸 말 아래 두면 '왜 말 아래 뒀노?' 등경 위에 둔다 그 말이오. 말 아래 두지 안 한다 그 말은 이것은 비유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 세 가지로 빛, 빛이 뭐이냐?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인의 이 특수성 이것이 빛입니다. 딴게 빛이 아니야. 이게 빛입니다. 이게 빛이오. 그러면, 우리는 진리도 아니요 영감도 아니요 받습니다. 영감을 받고 진리를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오. 대속의 공로를 우리가 입는 것입니다.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여게 대해서 우리에게 또 용기를 줍니다. 네가 진리로 살고 영감으로 살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고, 네가 진리를 외치고 영감을 외치고 예수님의 대속을 외치고 외치면 옆에서 가리워 덮을라고 이단이라 뭐이라, 이단 아니라 뭐, 아무리 말한다 해도 절대 덮어 가루지 못한다 이랬어. 요걸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요렇게 세 가지만 가지고 이 세 가지로만 반사하면 요 세 가지를 세상에게다 반사를 하면, 이 세 가지를 반사하는 자체가 되어지도록 하면은 이것은 온 세상이 반대해서 묻을라 해도 묻지 못한다. 묻지 못한다.

'저거는 이단이다. 이단이라' 하는데 대해 가지고 거게 대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는 '이게 이단이 아니고 이게 바로 됐다. 그러니까 바로 믿어라. 그런 소리 듣지 말아라.' 이 말 할 것뿐이지 그 이상, 자기가 빛을 증거했는데 그라에 대해서 그 상대방이 몰라서 멸망받으니까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옳은 거는 옳다, 아닌 거는 아니라고만 말해 줄 뿐이지 그 이상은 말할 필요가 없어. 그 이상 아, 자꾸 이라니까 빛이 가리워지겠는데, 가리워지겠는데. 이거 안 가뤄지도록 변명을, 변호를 해야 되고 변증을 해야 되겠고 뭐 어짜고 이랬는데, 변증론이라 하는 그것도 우리는 변증론 안 하고 있습니다. 변증론 그거 싹 그거, 과거에 변증론이라 하는 그거는 다 그 뭐 너무 허무한 것이고 예수님의 성경 말씀 가지고서 변증할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증할 필요가 없어. 그만, 하면 되는데 뭐할라고 변증할 필요가 있습니까? 변증 그거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걸, 논단하지 말아라, 이렇게 자꾸 시비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했어.

그런고로 아무리, 네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만치 영감을 가지고 있는 것만치 네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고 있는 것만치 이것은 세상이 물라 줘도 상관이 없다, 세상이 가루지 못한다. 아무 것도 가루지 못한다. 이러기에 우리가 싸움 일으나는 게 뭐이냐 하면은 가룬다 하니까 '우리가 진리인데 왜 우리를 이단이라고 이와같이 지금 하는고?' 이래 가지고 지금 그 싸움이 일어나는데 아,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변호할 필요가 없어. 아니라고 말 한 마디만하고, 말할 것뿐이오. 중생된 영은 절대 범죄 않습니다. 천하가 다 말해도 그거는 나중에 가서 머리를 숙여야 됩니다. 그러나 그걸 자꾸 변호하고 시비할 필요가 없어. 하나님이 가리지 안해요. 이러기 때문에, 그라다 보면은 사람 잃고 그라는 거는 악으로 쫓아나. 그거 그거는 나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제 중심으로 저 나타낼려고 하는 것이지, 아니야.

이러기 때문에, 진리는 가루지 못한다. 영감은 가루지 못한다. 예수님의 피의 역사는 가루지 못한다, 가룰까, 가리워질까 염려하지 말아라. 가루지 못한다. 말 아래 두지 않는다. 가루지 못한다. 등경 위에 둔다. 이렇게 등경 위에 둔다. 높이 둔다. 이제 귓 속에 말한 것이 지붕 위에 외치게 된다.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안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그것을 드러낸다. 드러낸다. 아 다윗이 다요 저거 부모도 멸시하고 형제간도 멸시하고 전부 주변이 다 멸시하고 있고, 또 다윗 자체도 '뭐 내야 이거 뭐 목동이나 하고 있지 까짓 거 내가 뭐하겠느냐?' 그렇지마는 그를 말 아래 두지를 못하게 했습니다. 등경 위에 높이 들었어. 그를, 사무엘을 통해서 그를 다윗을 등경 위에 뒀고, 또 사울 왕이 말 아래 둘라고 애를 썼지마는 가리워졌습니까? 진리를 어떻게 죽입니까? 우리의 구원은 진리요, 우리 구원은 영감이요, 우리 구원은 피입니다. 피하고 나하고, 진리하고 나하고, 영감하고 나하고 있는데 피조물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건 피조물을 지은 창조주의 능력하고 같이 했는데, 같이 있는데, 해할 자가 없어.

그러기에 그것이 드러나지 안할까 염려해서 네가 쓸 데 없는 방편 쓰지 말아라.

드러 날라고, 드러 날라고서 내가 드러나기 위해서 여게 나서야 되겠다. 저게 나서야 되겠다. 아, 거게는 한번 섰으면 유명해지겠다. 거게는 또 한 마디 했으면 유명해지겠다. 여게 하나 메시지를 하나 내면 유명해지겠다- 너 유명할라고 말고 자랑하는 자는 자기로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라. 이제 빛은 등경 위에 두기 때문에 빛만 되면 등경 위에 올라간다. 누가? 주인이 올린다. 하나님이 올린다.

이러기 때문에, '왜 나를 등용하지 안하는가? 왜 나를 큰 교회를 맡겨 주지 않는가?' 어리석습니다. 주님을 천치 바보로 아는 것이오. 당신이 피 흘리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전부 이 소망이 그건데 없애겠습니까? 그런고로, 이빛은 빛은 주인이 높이 들기 때문에 아무도 가루지 못하니까 높이 드러낼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 할 일은 뭐입니까? 우리 할 일은 빛만 나타내는 것, 빛만 가지면 돼. 자꾸 촉수만 돋아요. 자꾸 빛만 돋궈, 자꾸. 촉수만 자꾸 돋워. 이제 십 촉이 삼십 촉 되고 삼십 촉이 육십 촉 되고 육십 촉이 백 촉 되고 백 촉이 이백 촉 되고 이백 촉이 삼백 촉 되고 자꾸 그것만 돋구면 되는 것이지 이제 딴거 할 필요가 없어. 우리의 생활할 것이 어떻게 간단하고, 간단하고 어떻게 뭐 간소해지는지, 이걸 좀 선전을 해서 설교록을 선전을 좀 해야 되겠다. 이 설교록 지금 하는 이것도 그거 안 할라고 자꾸 이라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래 쌓아서 이 설교록 하는 것, 뭐 설교록 해서 이라는 것, 그래도 혹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사람이 거석할까 해서, 많은, 다른, 다른 파의 교파에서 많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많이 가지고 가고 있고, 또 한 사람이 가지고 감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고, 하나님이, 내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와같이 했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 비추어 나가는 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그걸 또 못하구로 그랄 필요가 없고, 그래서 설교록이 지금 몇 권 나왔다더라? 예? 십 구권? 백 십 구호면 스무 권 나온 택입니다. 백호에서부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진리는 드러 낼라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드러내는 건 하나님이 드러낸다. 그저 우리 할 일은 뭐이냐? 우리 할 일은 빛을 자꾸 받으면 내가 반사를 하게 돼. 빛을 받아 사지고서 반사하는 일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온 집안 식구에 비취느니라. 온 집안 식구에 비춰느니라. 그러면 집안 식구가 누군가? 집안 식구가 누군가? 우리는 이와같이 지금 보이는 이면은 모르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식구가 있으니까 너는 누구 누구에게 속했다. 너는 몇 부분이 누구에게 속했다. 너는 팔은 누구에게 속했고, 다리는 누구에게 속했고, 눈은 누구에게 속했고, 고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이제 많은 성도들이 다 맡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맡은 게 아니라. 이 사람의 이 부분은 저게 가서 은혜 받고 저거는 가서 은혜 받고, 이러니까 이래 받아 가지고서 이래 모두 다 사람들이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쨌든지 그 등잔이 맡은 식구, 등잔이 책임 맡은 식구 말이오. 등잔이 책임 맡은 그 식구는 어떤 식구인가? 등잔이 책임 맡은 그 식구는, 그 식구들을 '네가 회개해라, 뭐해라' 하는 그것도 하나님이 외치라 하면 말은 외치지마는 그것도 그저 외칠 따름이지 그 회개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시키니까 순종하느라고 그래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빛 가운데 있는 것은 성경의 방법이 '네 빛만 돋구어라.' 돋구니까 '온 집안 식구에게 비취느니라.' 이러니까, 등의 촉을 돋우니까, 그 방이 더 밝아지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밝아지고 자꾸 더 밝아지니까 더 밝아지고, 그러면 그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빛 가운데 있습니다.

다 빛 안에 있어. 빛 속에 들었어. 빛 속에 들었어. 빛 속에 든 것은 이제 등불된 네 자체의 빛을 점점 돋구는데 있지 너는 돋구지 안하고 이제 그 밑에 가 가지고 '네가 좀 환하이 빛을 돋워라. 좀 빛이 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너 인데, 손에 잡힌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별은 일곱 교회 사자라고 말했는데 이제 비밀은 네가 밝아지면 그게 밝아지고 너가 자꾸 도수가 돋궈져서 더 환해지면 그게 더 환해지고 이러니까, 그들은, 그렇게 속한 것은 네가 돋궈짐으로 그가 돋궈지는. 소속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방편으로 되지 다른 방편으로는 안 된다.

이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 구원하는 것도 뭐이냐? 나만 자꾸 빛만 돋구면 자꾸 돼져. 빛만 돋구면 돼지니까 이제 이 세 가지 이것이 우리의 빛 인데, 이 세 가지는 주님의 것이요 우리가 은혜로 받는 것, 이 세 가지를 자꾸 은혜로 많이 받아 가지고 이것만 자꾸 반사를 시켜요. 그러면 진리면 진리를 내 입으로 말하고 내 행동으로 말한고 내 사람, 내라는 사람으로 말하고, 영감을 내가 말로 하고 영감을 내 행동으로 또 보이고 내 사람으로 보이고 자꾸 이것만 자꾸, 이것만 하면, 이거 하면 내 구원되지 또 다른 사람 구원되지. 이라니까 아무 염려할 것 없어. 다른 사람 보고서 하라 하는 것보다도 제가 하는 게 쉽습니다. 어떻게 이 좋고 쉬운 방편을 우리에게 말씀해 놨는지.

이러니까, 온 교인들을 이렇게 뭐 빛의 생활, 온 교인들이 앞으로 환난을 승리하게 하는 것은 그 승리하도록 그분들을 단속할 것이 아니라 나만 승리하는 이게 되어지면 그건 절로 승리하게 돼져 버려. 절로. 나만 승리하면 그는 절로 승리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본인의 구원에 대해서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과거에도 보면 다 그랬었습니다. 하나 꾐으로 그게 다 돼 버렸어. 하나됩으로 다 되고, 그저, 하나가 죽음으로 다 죽었어. 그게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입니다. 비밀.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지금 하루 삼십 분 기도하는 그 기도를 놓지 맙시다. 그거 놓으면 여러분들 죽습니다. 그거 놓으면 우리가 죽소. 뭐 이 세상이 조금 미국이 어찌된다 하면은 안심하고, 소련이 높아진다 하면은 또 걱정하고, 이북이 어쨌다 하면 걱정하고, 어찌 되느냐? 그까짓 다 안심도 다 껍데기 안심, 소용없는 안심.

또 겁내는 것도 소용 없는 것, 암만 해 봐야 소용 없어. 어짜든지 해결은 요게 있습니다. 해결은 빛에 있어. 소금에 있어.

어제도 교역자회 때 말했는데 그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라면 그다음에 덧붙이기는, 누가 하느냐? 아들이 자유케 한다 이랬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는 그 순서가 통과되면은 아들이 자유케 한다 이랬어 아들이 자유케 하면 참 자유 하리라 이랬어. 참 자유한다 말은 속박 하나도 없이 완전 해방당한다 그 말이오. 완전 자유. 그러면, 우리가 어데 속박이 됐는데? 천 군데 속박당했습니까 만군데 매였습니까? 우리 감옥 매인 것이 몇 감옥이나 되는지 압니까?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만 감옥 될까요 만 감옥 될까요? 만 감옥. 만 감옥으로 헤아릴 수가 없어. 만 감옥, 나는 억억억억억만의 감옥도 넘다고 생각해. 우리가 모르는데 그거 어떻게 해방 당하겠어? 주님이 다 해방했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참 자유하리라.

이렇게 지극히 큰 무한의 소망을 우리가 향해서 가는데 이 인간 조작배기 인본주의 가지고 되겠습니까? 아예 요 방편에 들어서 가지고 요 방편대로 뿍뿍 걸어갈 일이지 그런 못된 것 마귀의 꾀를 쓰지 말자 그 말이오. 쓰면 그만치 저는 다 더러워지고 저는 그만치 약해집니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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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20절-21절/ 851201주새 선지자 2015.10.31
329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갈라디아서 4장 19절-31절/ 851104월새 선지자 2015.10.31
328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19절-25절/ 851129금새 선지자 2015.10.31
327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20절-21절/ 851127수야 선지자 2015.10.31
326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 고린도전서 1장 21절/ 851130토새 선지자 2015.10.31
325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고린도전서 1장 20절-21절/ 851128목새 선지자 2015.10.31
» 믿음을 만들고 믿음을 써먹어라/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51105화새 선지자 2015.10.31
323 믿음을 더하는 방편/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30803수야 선지자 2015.10.31
322 믿음을 구하라/ 에베소서 1장 15절-23절/ 790824금야 선지자 2015.10.31
321 믿음은 주님과 결합되는 것/ 요한복음 14장 8절-23절/ 871212토새 선지자 2015.10.31
320 믿음은 전능/ 누가복음 8장 49절-56절/ 850908주전 선지자 2015.10.31
319 믿음은 전능/ 히브리서 11장 1절-2절/ 850908주후 선지자 2015.10.31
318 믿음은 전능/ 야고보서 2장 14절-20절/ 880930금새 선지자 2015.10.31
317 믿음은 전능/ 히브리서 11장 1절-2절/ 850911수야 선지자 2015.10.31
316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마가복음 9장 21절-27절/ 880630목새 선지자 2015.10.31
315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히브리 11장 5절-6절/ 870129목새 선지자 2015.10.31
314 믿음으로 죽은 것이 살아나는데/ 요한복음 11장 39절-44절/ 871210목새 선지자 2015.10.31
313 믿음으로 얻는 구원/ 디모데후서 3장 15절/ 861219금야 선지자 201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