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복음으로 들어라


선지자선교회 1983년 8월 8일 월밤집회

 

 본문 : 창3:1-6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장소를 넓게 준비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로 인해서 이번에는 주변에 있는  천막에서는 거게서도 예배를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천막들 안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줄 압니다.

 장소 때문에 그렇게 할지라도 부득이한 일이지 한 자리에너 서로 모여 가지고  시청각적으로 그렇게 은혜를 받는 것이 더 쉬운데 천막 안에서 은혜를 받는 것은  좀 힘듭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참석한 그보다 천막 안에서는 더 정성을 써야  같은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막 안에 거게는 아무 신앙 인도자도 없고, 또 자기 교회 교역자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또 강사도 눈에 보이지 안하고 이러니까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자기 혼자 있는 것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님이 같이 안 계시는  거게는 은혜를 바랄 수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자기와 함께  그 천막 안에 계시는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예배를 드려야 아무  차이 없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 점을 천막 안에 있는 분들이 많이  주의하시기를 부탁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도 여러가지로 본인이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지식이  자기를 교만케 해서 멸망을 이루지 구원은 이루지 못합니다.

 또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이면 자기는 죄인이 되고야 맙니다. 왜? 하나님  말씀이 율법인 줄로만 알고 받아들이면 자기가 배운 바의 말씀과 자기와 자기  행동을 대조해 보면 전부 그 말씀에게 정죄밖에는 안 되니까 죄인이 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자기가 한 그 행동을 살필 때에 그  명령을 어긴 것뿐이니까 거기는 두려움의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으로 받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고, 율법으로 받는 사람도  그다음으로 불쌍하고, 명령으로 받는 사람도 그다음으로 불쌍하고 말씀을 받을  때에 복음으로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복음은 이 말씀이 껍데기는 말씀이요, 그 안에는 생명이요, 또 그 안에는  성령님 이십니다. 이러니까 이 말씀을 자기가 들을 때에 껍데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마는 그 말씀을 자기가 받아 그 말씀으로 말미암이 자기에게 생명이  오는 것인 것을 믿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영접하려고 소망을 가지고서 말씀을  들으면 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생명을 영접하게 됩니다. 생명은 능력입니다.

 또 생명을 영접할 때에 생명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영접할  소망을 가지고서 말씀을 받으면 그 사람은 이제 모든 면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살리는 것은 영이요' 거게 영은 인간의 영을 말함이 아니고 성령님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성령님만이요 자기의 그 모든 생애를 살리는 것도 소유를  살리는 것도 살리는 것은 성령님만이 살리지 성령님 외에는 뭐 있는가? 육이  있는데 육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마음 자기의 이 고기덩어리,  심신이 합해 가지고 움직이는 그 모든 움직임을 가리켜서 육체라 그렇게  말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그말은 고기덩어리가 무익 하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이 자율적으로 주관적으로 사욕적으로 육체의 소욕적으로 이렇게  하는 그것은 모든 것이 사망의 결과만 맺지 하나도 자신에게는 유익이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신구약 성경 말씀은 생명을 영접하게  하는 중매쟁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면 다 된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 말은 좀 위험한 말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은 성경 말씀은 문서계시 이면에 내재적인 영감  인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면 된다는  말은 맞기는 맞지마는 그 사람이 혹은 이 문서로 되어 있는 이 문서의 이 도리인  이 도리만 지켜 행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좀 그 사람에게는  물어볼 만한 그런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서 벌써 집회를 여러번 참석했고 또 해방 전  세계적인 교리와 신조와 8·15 해방 후, 세계 이차대전이 끝난 지 그후의 세계의  교리와 신조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진 그것은 변해서 달라진 것이 아니고  그때는 세상에 그렇게 약간의 핵 문제가 있었지 그렇게 많이 흔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나 벌써 지금은 뭐 어린아이 들라도 핵이라 하면 다 알고 또 그  외에 원자 뭐 수소 이래 모두 다 이래서 그때와 세상은 많이 지식이 달라졌고,  또 죄악의 세력도 달라졌고, 인간의 부패와 타락의 그 기능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대를 따라서 그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내재적 영감의 그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에 옛날과 지금과는 아주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은 다 같은 말씀이지마는 이 말씀의  윤곽 안에 내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영감은 시대를 따라서 또 그 사람들의 형편을  따라서 이 말씀의 윤곽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 그때 그때에 합당한 그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 말은  조금 위험스러운 말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아, 바울도  말하기를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신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 구약 성경의  그 모든 하나님의 도리는 다 지켰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흠이 없이 구약 성경 말씀 그대로 지켜서 행한 그것이 누구와 대적이  됐느냐 하면 말씀 안에 계시는 성신의 감화와 대립이 돼 가지고,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그 일은 구약 성경의 그 윤곽을 벗어나지 안하고 그 윤곽  안에서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서 역사를 하시고 그때에 속화된 유대 육체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감은 무시하고 다만 문서로 되어 있는 문서적인 그 율법만  이행을 하다 보니까 율법이 소개하는 영감을 받아 역사하는 그 운동과 영감을  무시하고 문서로 되어 있는 그 문서계시만 영접해 가지고 그대로만 시행하는  사람들은 정반대인 대립이 돼 가지고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나간, 예수님이 처음에 탄생하셔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정죄한 것은 다 자기네들이 구약 성경을 보고 그  문서대로 믿는 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 가지고서 담대히 정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정하신 율법을 어김이  아니고 그 율법과 율법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이렇게 하기 때문에  문서만 보고 믿는 그런 사람들의 외식자와 진실한 신앙가가 대립이 돼 가지고  그때에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그때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문서계시를 이렇게 믿으면서 문서계시 안에  역사하시는 내재적 영감을 인정하고 그 영감의 인도를 받도록 그 영감을  영접해서 그 영감으로 더불어 연결을 가지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들은 그때에  예수님을 영접해서 다 구주로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던 시므온이나 안나나 또 빌립이나 그런 사람들,  나다나엘이나 그런 사람들은 다 문서계시를 믿으면서 문서계시 안에서  역사하시는 영감계시를 바라봤던 것이기 때문에 내나 영감계시를 바라보던  그들은 주님의 하시는 일이 대립이 되지 안하고 주님의 하시는 일이 그들에게  인정이 되어서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읽고 행할 때에 이 말씀  이 문서대로만 하면은 다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아주 잘못입니다. 이  문서계시는 그 안에 있는 영감계시를-사람 말로 말하면- 영접하자 -하는 그  순서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서계시를 자기가 영접해서 이 문서계시를 버리지 안하고 이  문서계시대로 복종하는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 그 안에 있는 성령님에게 복종이  되어져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지는 그 연결을 받음으로 자기가 생명을 얻는 것,  생명을 얻는 것은 생명은 힘입니다. 생명은 힘인데 그 생명은 하나님으로부더  연결돼 가지고 인간에게 오는 그 능력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그러면 '성령과 물로 다시 살아났다' 중생, 살아났다. 물이라고 말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1장 23절 이하에서 보면은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똑똑히  거기 해석을 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영이 중생되는 것은 성령님과 또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와 연결이 돼서 성령님의 그 연결과 진리의 연결로써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그 능력과 진리의 힘에 피동되게 된 그것이 중생이요 피동되게 되는데 피동되게  된 그 피동이 영원히 변동 없는 피동인 그 피동을 가리켜서 영생으로 중생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영도-우리의 영혼은 중생된 것 아닙니다. 우리 영혼은  중생되지를 안했고 우리 영만 중생됐습니다. 혼이라는 그것은 육에 속한 것인데  마음을 고기덩어리로 붙여서 그렇게 육으로 깨달은 사람들도 있고 마음을 영에  붙여서 곧 영이 마음이요 마음이 영이라고 그렇게 깨달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영에다 붙이는 사람은 모든 성경에 궁극적으로는 억해가 되지  안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다 배치가 되지 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영인데 영만 중생된 것을 성경이 말합니다.

'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나 육은 아직까지 죄 아래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고 '살아난 영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나 이 육은 아직까지 중생된  영들이 탄식을 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곧 육체의 구속을 기다림이라' 그러는 것은  이 심신이 구속받는 것을 기다림이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영은 단일성이요 단일체지마는 우리의 심신은 단일성도 아니요 단일체도 아니요  종합성이요 종합체입니다. 그 마음도 수많은 것들이 종합이 돼 가지고 돼 있고  우리의 몸도 수많은 것이 종합돼 가지고서 되어 있는 것이 몸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심신의 구원은 중 복적으로 수많은 그 현실 현실을 통과해  가지고서 거게서 심신이 구 속되는 것이고 영은 단번에 구속이 됐습니다.

 영은 주격이요 심신은 피소유격이기 때문에 주격이 죽었으니 스스로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은 주격을 살린 것이 중생시킨 것이요 주격을  살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월권으로 직접 심신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안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의 심신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 구속 받은 자이니 구속 받은 자로 구속을 벗지  말고 구속을 입고 살아라.' 하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을 로마서 8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3장에 '영으로 난 거는 영이니' 그렇게 말했습니다. 영으로  난 거는 영이라 그말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그 중생된 것은 인간의 주격인  영이지 심신은 아니라 하는 것을 성경에 똑똑히 구별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도 진리만 가지고 살아난 것 아닙니다. 영이 위에 있고 영과  진리로 살아난 것이 그것이 우리의 중생된 영입니다. 우리의 심신 구원도 외부에  육십육 권인 이 성경 말씀과 이 성경 말씀이 중매해서 이 성경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영접해 가지고서 성령님과 이 진리와 우리의  심신이 하나가 돼서 움직일 때에 그 부분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은 성령과 진리와 우리의 마음이 하나되어 현실을  통과했으면 그 부분의 마음의 요소는 살아났습니다. 또 성령과 진리와 우리의  마음과 하나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이 하나돼 가지고서 그 현실을 통과했으면  그 현실을 통해서 그 부분은 마음도 몸도 진리와 성령님과 하나가 돼서 완전히  결말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 그래  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되는 것이 생명이요 영생은 성령과 진리와와 자기  현실에서 연결된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연결된 것을 증거하는 그 연결이 되면 그  현실에 연결된 그 생애는 영원히 죽지 안하기 때문에 영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영생을 백도 만들고 뭐 열도 만들고 하나도 못  만드는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 현실에 자기의 마음이나 몸의 그 기능이  성령과 진리와 하나가 돼 가지고서 그 현실을 통과 했으면 그 현실에서 그  심신은 영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은 살아났고 그 현실에 해당되지 아니한 심신의  기능은 아직까지 그것이 살아나려 하면은 남은 심신의 기능 그것이 성령과  진리와 결합이 되어서 하나되어 움직이는 하나로 완전 결합이 되어지는 그런  시기를 기다려야 되고 그런 시기가 왔을 때에 그 시기에서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 처녀 비유에도 신랑이 더디 옴으로 졸며 잔다 그거는 예수님의  신랑 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만을 가리린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재림만으로  가리키는 것 아닙니다. 거게 신랑은 기본구원에 대해서 신랑으로 오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도 내나 그와 같은 것이지마는 자기 심신이  기능적으로 다시 속량을 얻어서 부활해 가지고서 영생하는 그 기능이 되어지는  그런 기회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그 사건으로서는, 밤중이라 말 하는 것은 그  현실에 꼭 같은 사건을 만났는데 그 사건을 만난 그 사건이 그 현실에 그 사건을  만났지마는 그 사건이 현실에서 차차 차차 그 사건이 더 짙어져 가고, 어려워져  가고, 거게 대한 반대되는 세력이 더 많아지고 하니까 그게 밤중으로 자꾸  깊어갑니다.

 그럴 때에 최고 절정에 가 가지고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 최고 절정에 가  가지고서 빛을 들면은 신랑 영접해서 그거는 영생이 됐고 밤중에 빛을 들지  못하고 어두워졌으면 그거는 신랑을 영접하지 못한다.

 그러면 부분적인 기능이 구원을 얻으려고 할 때는 그 현실을 통해서 얻는데 그  현실에 사건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 차차 차차 더 어려워져 가지고 어려워져 가고  더 높아져 가고 이럴 때에 최고 절정적인 그 일 될 그때에 빛을 가지고 그때에  기름, 기름이 나타내는 것이 빛인데 그 기름은 영감과 진리를 가리켜서 거게  기름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 진리의 결과로, 영감 진리의 역사로 현실을 빛으로  통과하면 신랑 맞이했습니다. 또 빛으로 통과하지 못하고 그때에 영감 진리로  빠닥빠닥 살다가 너무 세상이 박해가 심하니까 그만 영감 진리를 그만 뚝  떼버렸다 그말이오. 그러면 기름이 없었어.

 영감 진리가 끊어져 가지고 거게까지 승리할 수 있는 영감 진리가 없고 영감  진리가 끝이 나서 그때 깜깜해져 버렸으면 신랑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만,  기다리고 있을 때는 좋았지마는 신랑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대립이 돼 버리니까 쫓겨나 버렸습니다. 그러면 기다릴 때보다 그 시기를 통해서  비참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시기도, 그 시기 그 절정의 그 시기도 곧 신랑이 오는 시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랑 맞이하는 것은 우리는 심신, 육체의 기능이 구원 얻는 그  기회는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도 될 수 있는데 그 토막 토막에 절정이 돼야  네가 진리와 영감을 영접하느냐 진리와 영감을 네가 배척하느냐 하는 그것이  결정되는 것인데 그 최고로 어려울 때에, 그 사건으로서는 최고로 어려울 때에  영감과 진리를 배척하지 안하고 영감과 진리를 가지고 영감과 진리의 그 빛을  나타내는 것, 기름이 소모돼서 빛이 되는 것처럼 영감과 진리의 역사로서 세상에  빛, 의, 그것을 나타내는 그런 사람은 신랑을 영접하게 된다. 그 기름 준비는  평소에 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열 처녀 비유에 신랑 맞이를 한 번만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고 '한 번만 있다.' 또 '죽은 사람은 부활해 가지고 영접한다.

한 번만 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번만이 아니고 자기가 현실 현실에 사건 사건을 닥치는  사건마다 절정이 있다. 사건마다 절정이 있는데 절정 그것이 밤중이기 때문에  절정이 뭐 우리에게는 백도 천도 만도 넘을란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요렇게 깨달은 사람들은 '내게 지금 거짓말 하나 안 하는 요  문제가 생겼다. 내가 남한테 억울한 소리를 들었는데 억울함을 참는다 하는 요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러면 억울함을 참는 그것도 절정이 있다 그말이오.

 처음에는 다 아무라도 참지마는 그것이 절정이 되는 그 절정이면 끝나버리는데,  밤중만 되면 그다음부터 밝아집니다. 이러니까 절정되는 그때도 내가 평소에  기도하고 깨닫고 성경을 깨닫고 이래 가지고 준 비해서 영감과 진리의 준비된,  영감 진리에 자기가 붙들린 그 준비된,  그것이 억울함을 처음에 들을 때는 그게 초저녁이겠고 또 억울함이 점점  짙어가니까 그것은 차차 밤중이 돼 가겠고 최고로 억울하게 될 때에는 그때는  사람이 못 견뎌서 그만 폭발한다 말이오. '내가 이제까지 참고 있으니까 네가 뭐  사람을 죽은 줄 아느냐? 한번 해 보자.' 하면 딱 졌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오 리를 가자거든 십 리를 가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 향하라' 하는  그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는 거게서 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밤중이 돼 가는 것 보니까  점점 최고로 높아져 가고 절정으로 돼 가는 것 보니까 요 현실을 통해서 얻을  기능이 이제 구원이 되느냐 죽느냐 하는 결정이 되는 것이니까 최후의 오  분간이라고 최종까지 내가 견뎌서 영감과 진리대로 요대로 내가 행해야 되겠다.'  딱 그래 결심을 가지고서,  어떻게 해도 '이제 절정 밤중이 온다.' 밤중은 안 됐지마는 억울함이 자꾸 많이  심해지고 혹독해지고 참 뜨거워지고 강해지는 것은 그것은 안됐지마는 그게  아니면 신랑되신 주님이 오지 안하시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주님과 내 기능이  결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통해 가지고 결합이 딱 되어서 영원히  나눠지지 안할 이별 없는 결합이 돼서 영생이 되기 때문에 요렇게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 현실 현실에 기회를 그것을 싸워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렇게 깨닫지 못하고 처녀가 신랑 맞이하는 밤중을 평생에 한 번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깨달음을 잘 못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의  건설구원을 이루는 전투 생활에 있어서는 아주 그만 참 손해를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신이 이것이 영감과 진리로만 살아납니다. 진리만 가지고서  살아난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성경에 영이 성령과 진리로,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다 했지 진리로만 살아났다 하지를 안했습니다. 여게는 진리라고 말했고  저게는 영감이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두 군대 걸 다 합해서 여러 군데 합해서  보면은 영감과 진리라야 살아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인격 존재가 아닙니다. 진리는 인격 존재지 아니고,  진리는 독자적인 권위는 가지기는 가졌지마는 인격 존재가 가지지 안한 신격  존재를 가지지 안한 하나의 진리, 이치의 온전함의 그 능력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말하면 인격, 하나님으로 말하면 신격, 그 신격에서 나온  진리입니다. 신격에서 나온 진리인데, 진리 가지고 살아나지 안하고 진리로  신격인 생존하신 신격과 우리의 인격이 결함이 되는 거게서 이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은 이미 기본구원을 우리가 받은  이 기본구원을 잘 활용을 해 가지고서 기본구원으로 말미암아 벌써 성령과  진리가 우리의 영을 살렸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니까 내주해 계시는  성령과 진리를 내 마음이 영접해 가지고서 내 마음과 하나만 되면 되어지는데  하나가 돼 가지고서 성령도 영접하고 진리도 영접하고,  어데 있는 성령과 진리를? 자기 영을 중생시킨 성령과 진리를 자가 안에 계시는  성령과 진리를 자기 마음이 영접하려고 하고 또 영접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린다 문을 열어라' 하는 그 문은 무슨 문이냐 하면은 우리의  마음의 문이요 또 우리의 고기덩어리 문입니다.

 그 고기덩어리 안에 그 성령과 진리가 들어오셔 가지고서 영에게 하는 역사와  같이 역사를 하시고 역사할 때에 이 마음이 거게만 피동이 되고 그것의 것만  되면, 성령의 것만 되고 진리의 것만 되고, 성령에게 피동만 되고 진리에게  피동만 되면 그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로써 살아나지 다른 법으로써는  살아나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기를 '어짜든지 주님의 것으로 살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종으로 살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성전으로 살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전으로 살게 해 달라는 말은 자기의 심신 속에  성령과 진리가 주인이 돼 가지고서 자기는 그 심신이 그 주인의 소유가 돼  가지고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종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거게 따라서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거게 절대적인 피동으로적으로 사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이 심신의 구원 곧 이 육체의 구원,  성화구원, 성화구원, 또 집짓는 비유에 말한 대로 건설구원 이것이, 행위구원.

이 구원인데 우리 심신의 구원을 우리가 소망하고 지금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함으로써 중생된 영의 구원은 더 되는 것은 없는데 다만 중생된  영이 뭣을 하는고 하니 권위가 커집니다.

 중생된 영의 권위가 다 같은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은 중생된 영이 제 소유인  심신을 딱 지배해서 심신이 그 영이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감옥  가자 하면 감옥 가고, 또 어데든지 가자 하는 대로 가고 또 그 영이 굶으라 하면  굶고 이러지마는 중생된 사람도 그 영이 주격의 권위가 빈약해 가지고서 암만  중생된 영이 뭐라고 말한다 해도 그 심신은 꼼짝 안하고 하나도 듣지 안한 그런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다음에 부활을 하되 영만 부활했지 아주 벌거벗은  거지와 병신같은 자로서 이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심신의 기능 구원을 이루려고 이 자리에도 왔습니다.

그러면 심신 구원을 이룬다 말은 심신이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림을, 살림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능은 살림을 받는 시간은 언제냐 하면은 현실입니다. 그러면  현실에서는, 이 현실에서는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다 구원 받을 수가 있느냐?  아닙니다. 요 현실에 해당된 그 심신의 기능만 구원 받지 다른 건 못 받습니다.

그건 또 그다음 순서를 기다려야 됩니다.

 또 한번 기다려 가지고서 그 현실에 실패한, 실패한 기능은 영원히 죽었기  때문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아서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다시 그거는 재차가  없습니다. 단번에 받은 도입니다. '단번에 받은 바의 도리를 위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힘써 싸우기를 위해서 내가 부득이 편지한다' 그게 유다서에 편지가  유다가,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다른 것을 기록하려 하다가 한 번만 준 도리를  위해서 힘써 싸우라는 이 편지를 기록하는 것이 이것이 옳겠다 해서 다시 이  편지로 고쳤다, 성령이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번 성패요. 단번 성패, 단번 생사로 영원히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 그말은 처음에 죽었던 것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살아났었는데 그 현실에서 다시 죽었으니까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났던 것이 새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불택자들은 둘째 사망의 해가 아니요 첫째 사망의 해를, 벌써 다 사망되고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둘째 사망이라 말은 첫째 사망 받았던 자가 다시 죽을 수  있는 것으로 살아났던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이요, 장소는 현장이라는 장소요, 그 모든  대상들은 현재에 접촉한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사건이든지 뭣이든지 그때  접촉한 그것들, 그거 접촉하는 이 자리 이 시간 여기에서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고 또 중생된 영, 중생,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된 우리들도' 처음 성령의 열매된 우리라, 성령의 열매라 말은 성령의  결과라 말이오. 그러면 중생된 우리들도 그 말이오. 중생된 영들이 탄식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곧 몸의 구속 하나님의 양자됨을 기다림이라' 이랬어.

이러니까 영은 양자가 됐지마는 이 고기덩어리는 양자가 안 됐습니다. 양자가  자꾸 차차차 자꾸 돼져가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현재라 하는 것이 이렇게 귀중한 보배인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라는 이 현재에서 중생된 영이 가지고 있는 영의 소유인 죽은 심신을  살려낼 수 있는 기회가 그 현실인데 이 현실을 그때에 살리지 못하면은 영원히  죽어버리고 다시 못 살립니다. 그다음 시간에는 그다음 시간에 해당된 그것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 한 번 통과밖에는 못 합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살아날 기회는 한 번 뿐인데 아직까지 몇십 년  게 있으면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금 자기 차례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돌아오는 그 기회에 모처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현실을 딱 만날 때에 그때에 요 심신이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대로 순종하는 그 자유, 진리와 영감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중심이요  우리의 목적 아닙니까, 우리 본능 아닙니까? 우리 생활 아닙니까? 진리와  영감대로 사는 그 자유 생활 하는 것을 고대합니다.

 고대하고 만물들도 고대하고 하는데 그러면 그 심신이 엉뚱스럽게 옆에 마귀란  놈이 자꾸 꾀우고 간부들이 꾀우니까 그 현실 만났을 때에, 하나님은 본부요  간부는 한 말로 말하면 세상이 간부인데 세상이 간부면 세상은 무엇으로 된  건가? 악령과 악성과 악습, 악습은 인간들의 행동이 모은 것을 가리켜서  악습이라고 말하고 악성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될 것이 타락됨으로서 인간  중심으로 사는 그것이 악성이니 그것을 가리켜서 원죄라, 교리적으로는 원죄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자꾸 그렇게 살라고 이래 쌓는데 그만 거기 미혹받아 가지고 이  현실에서, 주님은 본남편이고 이 세상은 간부인데 그 현실에서 자, 주님을  영접하느냐 어짜느냐 간부가 와 가지고 살살살 꾀우고 이러니까 본부되신  하나님은 '보자' 하고 있는데 그 척 보니까 그뭐 세상이 와서 이렇게 저렇게  꾀워도 꼼짝 안하고 탁 물리치고 주님에게 딱 거석해서 그 현실을 주님을  영접해서 주님으로 더불어 하나돼 주님을 딱 영접한 현실로 영감과 진리대로 그  현실을 탁 통과해 버리면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이상이 없습니다. 그  이상이 없어.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겠소? 남편이 가만히 보니까 저 창문 안에서 숨어  가지고 가만히 숨어서 바늘 구멍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으로, 아가서 보면은  그래 놨어. '창살틈으로 사랑하는 자가 나를 엿보고 있다' 이랬어.

 가만히 주님이 창에 바늘 구멍만한 구멍으로 가만히 내다 보고 보니까 자기  신부 성도가 있고 거기 간부 이 세상이와 가지고서 뭐 오만 걸 이것 주마 저것  주마 오만 걸 다 보여주고 이렇게 꾀웁니다.

 이렇게 꾀워서, 꾀워 가지고서 그 현실을, 그 현실을 세상이 말하는 대로 자기  중심으로, 악령 중심으로, 그만 자기가 범죄하던 그 습관 구습 그대로, 그대로  딱 해 버리면 요거 세상하고 짝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때 볼 때에 이래 딱 창살문으로 보니까 뭐 주님한테 기도도 하고 단식기도도  하고 오만 짓 다 해도- ○○○씨? ○○○. 눈 똑 떠요. 놀라지도 안 하네.

○○○. ○○○. 또 더 부를까?-그래, 뭐 금식도 하고 주여 주여 막 야단을 지겨  쌓더니마는 가만히 바늘 구멍같은 창틈으로 가만히 '어짜는고 보자' 하고 보고  있으니까 그만 살살 꾀우니까 슬그머니 세상하고 한짝, 짝이 돼 가지고서 자기  중심으로 마귀를 따라서, 과거에 죄짓던 대로 착 넘어가니까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야고보서 4장 4절에 보면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말을 네가  헛된 말로 아느냐 말했습니다.

 그래 놓고, 그래 놓고 또 와 가지고서 '주여 뭐 어짜고' 단식기도 하니까 속은  가당치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와 가지고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러니까, 그거 주님이 모르는가 이러니까 '그래.' 그래도 괄시하지 안하고 '너  할 일을 해라' 하는 것 모양으로 주님이 그렇지마는 속은 안 준다 그말이오.

속은 안 줘요. 그래 한번 섭섭한 것 속 안 줍니다  언제 그게 돌아오느냐? 그랬는데 그 뒤에 주님한테 기도도 하고 들어붙고  '주여,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만 보고 삽니다. 당신만 의지하고 삽니다.

당신뿐입니다. 당신보다 더 신실하신 이가 어데 있으며 맡길 이도 당신밖에는  맡길 이 없고, 의논할 이도 당신뿐이고 믿을 이도 당신뿐이고, 의지할 이도  당신뿐이고, 사모할 이도 당신뿐이고, 또 뭐 지도받을 이도 당신뿐이고,  가르침받을 이도 당신뿐이고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래 쌓는데 속으로 '이거 네가 누구를 꾀워  넘기려고 하나 어짜노?' 이러며 마음에 참 기가 차지마는 그래도 주님은 어짤 수  없어 그만, 원청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원청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도 그래 쌓으면은 버리지를 못해서 '이게 아무래도 이게 그렇지 안할 거라'  걱정하고 있는데,  그 뒤에 창틈으로 가만히 보니까 또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현실에 와 살살  꾀우고 이러니까 속으로 딱 결심을 하고 이러니까 저게 꾀워 쌓아니까 이게 뭐  갈듯 갈듯 이러더니마는 뭐라고 눈을 감고 기도도 하고 어짜고 하더니마는 딱  나중에 가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이 간부야 물러가라. 내가 과거에 속은 것도  원통한데 또 속을 줄 아느냐? 주여, 나를 도우시옵소서. 이놈이 와 나를 유혹을  시키는데 나를 도우시옵소서. 내가 죽어도 이 현실에 영감과 진리대로 살지 내가  네까짓 거 꾀임대로 악령이나 악성이나 악습대로 내가 따라서 가지 않겠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만 다 해결입니다. 그만 만족이오.

 그뒤에, 여러분들 그래 보십시오. 그래 가지고 척 기도를 해 보십시오. 해  가지고 '주님' 하면 제딴에는 무슨 큰 일이나 메뜸이나 떠 가지고, 다른 사람은  날마다 현실에 다 그래 이기고 나가는데 장 지던 것이 한 번만 현실을 딱 그래  통과해도 해 가지고 '주님' 이래 부르면 제딴에는 큰 일 한 것같이 '주님' 하면  주님이 또 어서 얼른 대답하며 '내가 여게 있노라. 내가 여게 있노라.'  '오늘 내가 이렇고 이렇고 이랬는데 그거 미혹이 오는 걸 내가 그래 가지고서  기어코 이겨냈습니다.' '그래 기쁘다. 참 잘했다.' 그만 주님이 기뻐하시면서 뭐  위로도 주시고 영감도 빛도 주시고 오만 것 깨달음도 주시고 흠뻑 주십니다. 또  그러고 난 다음에 또 요게 창기 모양으로 그런 짓하고 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밤에 생각할 것, 우리는 건설구원 이 심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노력인데 이 심신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이 현장이요, 여러분들 지금은 심신구원 이루는 곳이 이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예배 보면서 이 자리에 이룬다 그말이오. 현장  이 시간으로는 요 시간, 또 모든 상대는 많은 성도들을 상대했고 또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이게 모두 다 상대라 말이오.

 이 상대하는 여게서 영감과 진리대로, 성신의 감동과 진리대로, 그러면 영감을  대번에 영접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영감에 중매쟁이는 누굽니까? 누구,  중매쟁이는 누굽니까? 네, 진리.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더듬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하려고,  하나님과 연결하면은 뭐이 나오는데? 연결하면은 생명 나옵니다. 생명은 다른  말로 말하면 뭐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은 힘이라 말이오. 능력이라 말입니다.

능력. 능력 만나기 위해서 이제 성경 말씀을 찾습니다. 그래 가지고 능력 만나고  나니까 그만, 능력 만나고호 나니까 성령님 만나게 된다 그거요.

 그래서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말에 거하면' 그말은  '현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하면' 그말이오. 행동하면,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은 예수님화가  좀 됐다 그말이오. 그 현실에 그렇게 주님의 영감과 진리대로 현실을 살면은  그만치 성화가 돼 버립니다. 왜? 그거는 그 기능은 영생으로 다시 구속받아  살아났기 때문에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그러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화된 것만치 아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성경을 자꾸 연구를 함으로써 이렇게 성경을 알려고  애를 쓰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되는, 자신이 변화된 것만치 성경을 깨닫게 되지 변화된 이상을 깨닫지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그대로 실행을 해서 자기가 변화되는  그 변화로서 알아지지 변화되기 전에는 알아지지 않는다  자기가, 아무리 가르쳐도 자기가 그것을 받아서 깨달음 만치 장성해져야 되지  장성해지 기 전에는 안 되는 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진리의 말씀을 받아  장성해짐으로써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그 방편을 취하는 사람온 이 사람은  든든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고 어짜든지 이 세상 지식 모양으로 자꾸 이것만  자꾸 읽고 닳고 해 가지고 하면은 깨달아지는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그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지 안합니다.

 그러니까 살게 되는 장소와 시간과 배경은 요 현실이라는 그것이고 살아나기는  뭘로만 살아나느냐? 딴걸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진리와 영감으로만  살아납니다. 처음에 우리의 영이 살아날 때는 영감과 진리로 살아났습니다. 좀  바꿔졌소. 영감과 진리로 살아났지마는 우리 육의.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은  진리와 영감으로 살아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의 영이 죽었을 때에는 성령이 그거 주장을 해 가지고  진리를 통해서 우리워 영을 살렸습니다. 살렸지만 우리는 지금 살아났다  그말이오. 우리는 영은 살아났는데 영은 살아났으니까 이제는 우리 주격이  살아났다 그거요. 주격이 살아났으니까 이 주격이 성령 만나기가 쉬우냐 진리  만나기가 쉬우냐? 문서로 돼 가지고 있는 이 진리 만나기는 쉬우니까 문서  진리를 먼저 가까운 자를 만나 가지고서 그다음에 먼 성령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세례는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찾아가는  것이라' 그말은, 양심이 찾아간다 그말은 양심은 뭐이냐? 신앙 양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신앙 양심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자기가 알고 성경 지식을 알고  성경 지식을 아는 그 지식대로 옳고 바르게 하려고 애쓰는 그것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신앙 양심.

 기독자의 양심은 불교 양심도 아니고 이 무슨 유교 양심도 아니고 이것은  기독자의 양심은 신앙 양심, 성경적 양심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양심.

 그러면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했으니까 그 양심은 진리하고  합작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말해 보십시오. 양심은 진리하고 합작됐소 안 됐소?  ○○○목사님? 양심은 진리하고 합작됐지요? 합작된 것 아닙니까? 합작이 안  됐으면 기독자의 양심이 아닙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인데  자기가 지식 가진 그 지식대로 바로 하는 것을 가리켜 양심이라 그랍니다.

그러면 불교 양심은 자기가 불경을 배운 불교 지식대로 자기가 바로 하려고 하는  그것이 불교인의 양심이오. 양심이면 다 같은 양심 아닙니다.

 그런고로 그 지식이 이런 사람은 이런 양심 되고 저런 사람은 저런 양심 되고  그 지식에 따라서 양심이 다른데 기독자의 착한 양심이 그 말 하는 것은 기독자  양심을 말한 것인데 기독자 양심은 그 자기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가 된 그  마음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착한 양심이 누구를 찾아간다 했습니까? 하나님을 찾아 간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 만나 가지고서 양심을 만나게 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여게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 진리지식만  영접을 하고 이 지식을 통해서 영감을 영접하려고 하지를 안하면 안 됩니다. 이  지식을 통하여서 능력을 받으려고, 능력은 뭐이지요 능력은 뭐입니까? 생명.

능력을 받으려고, 그 능력은 또 뭣을 만나려고? 성령님을 만나려고.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전하는 것이 지혜의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기 때문에 '권능과 성신의 감화에  있기를 원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게서 성경 진리를 받는 것으로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은  마지막에 그렇게 진리를 배워 가지고 그 사람은 어떤 사람 됩니까? 교만한 사람  됩니다. 왜 교만한 사람이 됩니까? 이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만 받아 가지고 그  말씀대로 하려고 애를 쓰지 안하고 해 보려고 애를 쓰지 안하니까 어려울 게  하나도 없고 시작도 안 했으니까 그까짓 거 시쁘다 말이오. 그러니까 자꾸  교만해지지. 교만해지지.

 이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이 말씀은 지키지 안하면 법이기 때문에 반드시  형이 있다. 법이다.' 법으로 받은 사람은 정죄를 받습니다. 법으로 받은 사람은  그 말씀을 법으로 받았으니까 법대로 해야 되는데 법대로 안 했기 때문에 자기  행한 것을 전부 다 보니까 죄가 된다 그말이오.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정죄로 받았습니다.

그거는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또 명령으로 받는 사람은, 명령으로 받는 사람은 명령이면 순종해야  되는데 명령대로 하지 안했으니까 자연히 벌을 받을 것 아닙니까? 그래 그  사람은 그만 공포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대개는 지식으로 받아서 교만한 사람만 되지 성경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  가지고서 '나는 이런 죄인이다' 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으로 받아서 정죄함을 받아 가지고 그래야 주님에게 부르짖는 사람이  되는데, 또 계명으로 받은 사람은 지키지 안하기 때문에 계명을 어긴 사람이니까  '하나님 앞에 벌을 받겠다.' 벌받을 것을 겁이 나는 그 사람도 이제 예수님에게  부르짖는 그런 싹수가 나올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러나 복음으로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지고서 이와 같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이 명령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명령이다. 행할 수 없는 명령인데 우리의 행하지 못한 것은 주님의 피공로로 다  고해서 해결을 받고 주님의 피공로를 인해서 우리가 힘있는 대로만 하면  나머지기는 진리와 성령님이 둘이 합작해 가지고서 내가 시작만 한 것,  시작을 해 가지고 나는 놀면서 하나님을 심부름꾼으로 시키고 성령님을  심부름꾼으로 시키고 진리를 이용물로 삼으면 어림도 없지마는 자기가 힘대로  해서 안 되면 '주여, 나는 안 되니까 해 주십시오.' 이랄 때는 '오냐' 뭐 지체  안하고 말씀합니다.

 또 진리를 이용물로 삼지 안하고 '이 진리 이건 도무지 내 힘으로 하지  못하니까 이 진리의 혜택을 입어야 되겠다'고 진리에게 그 혜택 입기를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이 말씀이 너희를 지켜 든든히 하여 거룩한 자들  가운데에서 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지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은 성경 어데 있습니까? 사도행전 20장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복음이라 그말이오. 복음은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보증이, 우리 보증이 몇입니까? 하나는? (성령) 하나는? (진리) 또 하나는? (피)  이러니까 성령과 진리가 우리에게 직접은 상관 없는데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에게 연결이 됐다 그거요. 피 때문에 우리에게 연결이 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복음은 예수님의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렇게 현실을 주신 이 현실이니 내가 이 현실을 당해서 영감과 진리대로 살려고  애만 써서 내게 있는 힘만 다 기울이면 영감과 진리가 나를 도와 가지고서 영감  진리대로 살아서 완전히 구속함을 입도록 이렇게 다 공로를 베풀어서 딱 결정해  놓은 댓가를 내놓은 주님의 피공로이기 때문에 된다.

 이래서 복음으로 받는 사람은 성령과 진리와 주님의 공로로 받는 이것이  복음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시간에 복음으로 받아야 되는데 복음으로 받는 데에는  성령과 진리와 피공로가 나를 도와 주실 수 있는 것으로 받아야 되는데 자,  그러면 이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이 말씀과 영감과 주님의 피공로의  이 셋이 합해서 하나가 되는 이 역사가 와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이 셋이  합해 가지고서 하나의 역사로 나를 도울 수 있도록 그 도움을 받는 데에는  하나의 비결만 있습니다.도움을 받는 데에는 하나의 비결만 있는데 그 하나의  방편은 무엇입니까? 아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하나의 방편이 있는 걸  아는 사람들? 알면 한번 손 한번 들어 보지. 요래밖에 안 들어?  한번 해 봐요. 답이 그렇츰 쉬워? 다해야 돼. 뭣 다해? 뭘 다해? 마음과, 또?  급하게 한목 하지 말고. 마음, 또? (힘) 또? 뜻, 또 ? (성품) 또? (목숨) 또?  (다하여) 소유는 안하고? (소유 다하여) 예. 다하면 된다 그말이요, 우리  다하면. 뭐 가난해도 좋아요. 가난해도 좋으니까 다만 하면 돼.

 이러니까 여게서는 뭐 그만 마음 다하고 뜻 다하고 성품 다해서, 다른 사람이  쥐박든지 말든지, 쥐박으면 왜 이래 쥐박노? 왜 이래 밀어닥쳐 쌓아?' 이러면  성품이 은혜 받는 데 있소 없소, 그 사람하고 싸우고 있소? 어떻소? 옆에서 자꾸  비좁다고 '아, 비조운데 엔간히 밀어붙여 밀어붙여.' 그러면 그 사람 마음이나  뜻이나 힘이나 모든 것 이래 쌓아면 이러면 그게 은혜 받는 데 기울어져 가지고  있소 지금 그 사람하고 시비하고 있소? 시비하고 있는 사람이지. 그 사람은 아예  은혜받는 데는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이러니까, 그래 다하면 돼요. 다하면 이 시간에 '내가 너희들에게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너희들의 믿음이 말에 있지 안하고  능력에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다.' 이러니까  여게서 우리가 그 능력, 피의 능력, 주님의 성령의 능력, 진리의 능력 그 능력을  영접하는 데는 내 인격을 다 기울여서 받아야 되지 이것을 무슨 똑 약장사 말과  같이 이래 듣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거는 제딴에는 '내야 지혜와 총명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 암만 깨  가지고 듣는 것보다 자며 들어도 다 듣는다.' 너는 네가 속았어. 스스로 속았어.

하나님이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지식 있는 사람이라고 그걸 봐 줬습니까? 그게  소용 없어.

 하나님이 지금 십자가에 못박히고 대속하신 것은 우리의 총명을 당신이  필요해서 우리의 총명을 요구하시는 것 아닙니다. 또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시는  것 아니오. 그것은 당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어 놓으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돼 있는 우리의 인격,  우리의 인격, 이것을 기다립니다. 이걸 원하고 있소. 못나도 인격만 바치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서 제가 지식으로만 받았으면 결국은 여게  참석함으로써 교만해지는 사람, 율법으로만 받았으면 정죄받는 사람, 정죄받으면  죽습니다. 정죄받으면 죽는데 정죄를 받아서 율법에서 정 죄받아 가지고 참  깨닫고 정죄에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나아가면 구원이 됩니다.

 이러니까 그것도 많이 삥삥 둘러가는 걸음이라. 여게서 율법으로 받는 사람도  둘러가는 걸을, 명령으로 받는 사람도 둘러가는 사람, 여게서 복음으로 받는  사람 바로 첩경으로 직통으로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번 기회에 여게서 능력을 받아야 됩니다. 능력 안 받으면 안  돼요. 목회나 뭐이나 주의 일은 뭐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하려고 하면  벌써 틀렸어. 그러기에 바울이 말하기를 '약한 것을 자랑한다' 뭣 때문에? '내가  약할 때에 강하게 됨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고 자기가 함으로 된다고 생각하면은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내가 안하고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데' 해 가지고 그 게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있는 힘 다하고, 자기가 있는 것 다하고, 다하는 그것은 주님이  해 주시는 것을 달라는, 은혜로 공짜배기로 달라는 부르짖음에 지나지 못하고  당신의 은혜로 주시는 것을 내가 요구하심에 저나지 못하지 그것이 뭐 되는 것은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고 아버지의 성령으로만 할 수  있는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의 다하는 것으로서 당신이 해 주시는 은혜로  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그 사람이 자기가 부족하고 불가능하니 하나님이  도와 달라는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 되어지지,  자기 것도 다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내가 뭐 못할 것이니까 하나님이 해  주십시오' 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뭐 모자라서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한번 대답해 봐.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종으로 삼는 사람이지, 종으로. '이것 좀  해 주시오. 이것 좀 하시오.' 그렇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안하십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해 주시옵소서' 하는 그  순서는 자기로서는 다하고, 자기로서는 다하고 할 수 없는 것, 자기로서는  다하고 할 수 없는 것, 다하고 보니까 할 수 없다 하는 그게 아니고 자기는  다해도 할 수 없는 줄 알고 다하는 그것이 다만 주님의 노를 풀고 주님이 해  주실 수 있는 그분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내 간구라 그거요. 그게 아니면  헛 일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심부름 꾼으로 아는 사람들은 다 교만해서  헛일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시간에는 진리의 말씀을 받고 또 진리의 말씀 소개하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 '살리는 것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영이요 생명이라' 이러니까 이 영과  생명을 찾아들어가려면 뭘로 찾아들어가야 돼요? 말씀은 문서에 기록했기 때문에  볼 수 있지 안하요? 접할 수 있지 안해요? 이러기 때문에 제일 접하기 쉬운 것  문서계시입니다. 이러니까 영을 만나려면 생명을 만나려면 말씀을 해야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그 말씀은 '내가 너희들에게 일러 준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이랬으니까 이 말씀이 내게 성령으로 내게 생명으로 이렇게  역사를 할 수 있어야 되지 이 말씀이 내 지식에서 있으면 이 지식은 우리의  소유입니까 내가 이 지식의 소유가 됩니까? 자기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거는  자기가 주인이요 지식은 자기의, 유물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인간의 소유물이 되지 않습니다. 영감도 인간의 소유물이 되지 않소.

'성령을 받아라' 하니까 우리는 주인공으로 넙적 받고 우리는 소유하고 성령은  우리의 소지품같이 영접하는 것같이 보여지지마는 그것은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성령을 받아라' 하는 이 말은 네가 성령을 영접해라 그말이오. 또 네가 성령의  것이 돼라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요번 기회에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이 말씀은 주님이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은' 주님이 하신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은 무엇이라고요?  이 말씀은 뭣이라고요? 자, 이 말씀은 뭐라 했습니까? 네, '영이요 생명이라'  자,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그러면 이른 말이 무엇입니까? 이른 말이 어느 말입니까? 신구약 육십육 권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신구약 육십육 권의 말씀이오. 이 말씀인데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따라합시다.

영이요 생명이라! 영이요 생명이라!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가 하나의 지식으로만 듣고 이 말씀이 곧 성령이신  하나님이신 성령이요 또 생명이라 말은 하나님하고 완전자로 더불어 연결이 돼  가지고서 그분에게 피동되는 지식도 그분에게 완전 지식에 피동되는 지식이니까  완전 지식, 완전 지배에 피동되니까 완전 지혜 완전 능력에 피동되니까 완전  능력, 완전 사상에 피동되니까 완전 사상, 완전 소욕에 피동되니까 완전 소욕,  완전 온전한 희로애락에게 피동되기 때문에 완전 온전의 희로애락, 이러니까  이것이 생명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말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내가 모시고 하나님과 연결돼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내가 받을 수 있는 이걸 받아야 옳게 된다 그말이오. 이걸  받아야 이 시간에 받는 것이라. 지식으로만 받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말은 자기가 신앙  경험 체험을 해 가지고 제일 신앙 생활 하기 쉬운 것은 많은 세월을 걸쳐서  하나님 말씀대로 또 한번 실행해 보고 실행해 보고 자꾸 실행해서 이렇게 힘써  가지고서 하는 것은 제일 쉽고, 그것은 저속이오.

 고성능 고성능은 뭐이 고성능이냐 하면은 말씀을 받을 때에 그때에 영과 생명을  한목받아. 받을 때에 하나님과 영을 한목 받아서 내가 영의 것이 되고 내가  당신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되어지는 이것이 담박에 되면은, 담박에 되는 것,  그러기 때문에 나중된 자가 먼저된 자 많이 있습니다.

 몇십 년 예수를 믿는 것보다도 한 집회에 참여해 가지고 몇십 년 예수 믿는 그  사람보다도 훨씬 영이나 모든 면이 장성하고 깨달음도, 지혜도 위에 있고 능력도  위에 있고, 사랑도 위에 있고, 인내도 위에 있고 모든 변화도 위에 있고 완전히  위에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 현실에서는 여게서는 얻으려면 얼마나 많이 얻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데 마귀란 놈이 와서 꾀웁니다. 꾀우기를 '그 말씀 또 들은  말씀이다' 그놈이 꾀워 가지고 '들은 말씀이다.'  그러면 물리치기를 '사탄아 물러가라. 야, 이놈아 내가 이 말씀은 말씀만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들은 말이라? 이 시간  주님이 오시고 생명이 오니까 내가 이 시간 주님과 생명을 영접해서 모든 것에  능치 못함이 없는 생명, 전능의 능력을 나는 아직까지 내가 많이 받지를 못했어  부스러기밖에 못 받았어. 주님을 영접했다 해도 주님도 나를 차지 못했고 나도  주님을 차지 못했어. 이러니까 이 시간에 주님은 나를 완전히 차지하시고 나는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되고 이러려 하는데 뭐 사탄아 뭐라 해? 물러가라.' 이래야  될 터인데 보면 그만 좁니다. 목사들이 거게 다 속소. 거게서 목사님들이 다  속아. 모두 다 여기 앉은 사람은 다 속을 사람들이라.

 요걸 기억합시다. 오늘 저녁에 본 말씀은 내일 아침에 증거할 것인데 그보다도  지금 초두에 요것이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게 생명이라는 것은, 여게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 육신의, 육신의 생명은  이게 생명입니까 죽음입니까? 육신의 생명은 생명입니까 죽음입니까? 네,  죽음입니다. 생명 같으면 있으면 자꾸 자라고 자꾸 생명으로 더 충만해지고 자꾸  자라져 가지. 이거는 죽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루 있으면 그만치, 그만치  썩어졌소. 그만치 죽어졌소. 이러니까 자꾸 지금 아이가 나면은 살려고 나는 줄  알아도 죽으려고 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니'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은 살리는 것은 뭐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어떻게 하는 것은 영입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니' 그말을 다른 말로 한번 해  보십시오. '성장케' 그것도 됐어. 성장케 하는 게 영이라. 전능하게 하는 것이  영이라. 전지하게 하는 것이 영이라 완전하게 하는 것이 영이라. 영생하게 하는  게 영이라. 완전 승리하 하는 게 영이라. 영원히 노쇠함이 없게 하는 그게  영이라.

 살리는 것, 살린다는 것을, 요 살린다는 것을 요게 자존자 완전에게서 나오는  모든 면에 능력이라 그렇게 알면 됩니다. 요 생명이라 것은. 그러기에 '살리는  것은 영이라' 요 말씀도 잘 깨달으면 참 말씀이 우리를 살려 주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 '내가 전지자가 되고 싶은데, 전지자가 되고 싶은데.'  '네가 전지자가 되고 싶어? 전지자가 되고 싶으면 성령님만 너를 전지자 만들 수  있다. 성령님만이 너를 전능자 만들 수 있다 성령님만이 너를 완전자 만들 수  있다. 성령님만이 너를 영생하는 자 만들 수 있다. 성령님만이 너를 영원 승리자  만들 수 있다.' 그말이오  '영원히 기쁨은?' '영원히 기쁨은 성령님만이 해 줄 수 있다.' '영원 행복된  것은?' '영원한 행복은 성령님만이 해 줄 수가 있다.' '그러 영원한 영광과  존귀는?' '영원한 영광과 존귀는 성령님만이 해 줄 있다.' 영원한 영광과  존귀는, 그 영광과 존귀가 살았다 그말이오. 영광 존귀가 살았어. '그거는  성령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이 성령님이 참 우리에게 보배입니다. '살리는 것 영이니'  요것을 똑똑히, '살리는 것은 영이니' 그러면 성령님이 보배 인데 그 영을  영접하려면 어째야 됩니까? '내가 너희에게 일러 준 말이 영이라' 영을  영접하려면 일러 준 말을 영접해라. 생명을 영접 하려면 일러 준 말을 영접해라.

이러니까 너희들이 접촉하기 쉽도록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이 접촉하는데 이 말씀 접촉해 가지고 놓지 말고 그 말씀 안에 생명과  성령을 영접해라. 이러니까 이만하면 다 된다 그거요. 이런데 이 껍데기로  성경을 이렇게 깨달아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라니? 살리는 것이 뭐라는 것을 오늘 저녁에 배웠고, 또 살릴  수 있는 이는 영이라. 영을 영접하는 데는 내가 너희들에게 일러 준 말이  껍데기는 말씀이지마는, 내가 일러 준 말이지마는 그 말씀 안에는 영과 생명이  그 안에 계신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네가 영접하되 이 말씀 안에 성령님,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하나님의 모든 연결로써 그에 충만이 오는 그 충만의 능력  그 충만이 이 말씀 안에 있는 줄 알고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영과 생명을 네가  같이 영접하라 그말이오.

 이러면 졸며 해서 되겠습니까? 대답하십시오. 졸며 하면 되겠습니까?  학박사라고 이게 그러면 자기가 졸며 하면 되겠습니까? 학박사도 소용 없어.

많은 경험 많은 사람도 소용 없고, 경험 많고 체험 많은 노인들도 소용 없어,  어짜든지 여기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내주해 계시고 모든 좋은 게, 생명이라는  것 모든 좋은 게 그 안에 다 들었어.

 이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욕심을 내고, 얼마나 우리가 간절하고, 얼마나 힘을  들이고, 얼마나 애를 써야 되겠습니까? 당신이 볼 때에, 하나님이 감동돼야 돼.

'너는 이놈아 거짓부리다. 네가 뭐 돈을 가지고 이걸 살 줄 아느냐? 네가 돈과  함께 망하리라. 네가 지식을 가지고서 살 줄 아느냐? 지식하고 함께 망하리라.

네가 썩은 아이큐 그것 가지고서 될 줄 아느냐? 그 아이큐와 함께 죽으리라.' 다  함께 죽지 뭐, 틀림없이 함께 죽지, 그런 자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내가 너희들에게 일러 준 말이 이 시간  우리에게 지금 말씀해 주시는 것은 나는 주님의 참 피로 값주고 사서 주님의  입술이라면 입술이고, 주님이 대고 말하는 스피카라면 스피카고, 인제 어찌  됐든간에 말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라 말이오. 여게서 말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그러니까 영으로 영접하고  생명으로 영접해서 실상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된다 그거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많은 데 있지 안해요. 기독교는 진실입니다. 진실. 이 문서계시로만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은 마지막에 교만한 사람으로서 멸망받고 맙니다. 율법으로 가진  사람도 정죄함을 받아서 크게 후회만 마련하게 됩니다. 거게서 소망 안 가지면  헛일이오. 계명으로 받은 사람은 벌뿐입니다. 거게서 혹 갈급이 생길 수 있지요.

복음으로 받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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