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적인 삶을 살지 말라

 

1979. 12. 15. 토새

 

본문 : 골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사람들은 욕심으로 살고 또 지식으로 살고 쾌락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적용시키고 조절을 하여 사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바로되지 아니하면 모든 생애는 삐뚤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서적들이 있고 또 성경이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들은 많이 있는  세상 서적이나 성경이나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서적에 기록된 모든 것이 현재에  어느정도 권위가 있으며 죽음에 심판에 부활에 영원에 어느정도 권위가 있으며  어느정도 허무한 것인가 하는 여기에 대한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동등으로  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세상에 많은 서적들은 하나도 영원한 책임성있는 추호의 권위성도  가지지 못한 서적들입니다. 신론이나 신론, 하나님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신론이나 인간론이나 영원론이나 조화론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고  물리론에 대해서도 옳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과학은 다 그것은 물리인데 그것도 온전한 권위성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이 말은 그것이 물리에 합리성을 가짐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물(物)은 물질은  물질 그것의 존재 목적이 있고 이용결과가 있어 이것으로써 그 물질 자체의  길흉화복이 결정 되어지는 것인데 이것의 관계점 인간도 하나님도 관계론에  대해서 정확지 못하니 물리에 대함도 반거짓말이요 그 이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지식은 전혀 허무한 아무런 보증성이 없는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들이 거짓된 그  생각대로 거짓된 그 생각대로 기록해 놓은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짓의 힘이 강한자는 그 거짓이 일시의 세력과 인정을 받게 되었고  또 한 세대가 지나가면 그런 것은 다 말살을 당하고 또 다른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이는 세세토록 인간이 측량못하는 영원무한 계수할 수 없는 그 모든  존재 거기까지 빈틈없이 맞는 이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을 인정하는 믿음 인정하는  믿음 이것으로만 그 권위와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은 말로만 말은 말로만 지식은 지식으로만 알고 그것의 권위의 그 범위  그것의 결과의 그 범위 이런 것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세상은 책이면 책이지  말이면 말이지 하는 거와같이 믿는자들 안에서도 성경을 보고 아무나따나  깨달아도 보고 말하면 같은 것으로 이렇게 인정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조심하지 않고 담대히 자기의 깨달은 것을 발표하는 이런  어리석음을 가집니다.

 한 깨달음 한 깨달음 한 교리 한 교리 이것은 심히 많은 탈선을 가진 것도 있고  심히 많은 생명과 평강과 권위를 가진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고 주력할 것은 바로 깨닫는 자 되기를 성경을  보고 깨닫든지 배워 깨닫든지 배워 깨닫든지 바로 깨닫는 여기에 제일 주력하고  제일 귀중히 여겨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앎이 첫째요 행함이 다음이요 아는 것과 행함은 실은 하나입니다. 알면  행하기 마련입니다. 아는데에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이것은 필연적으로 하나인  것입니다. 지식을 동등으로 생각하는 여기에서 지식의 사람들이 망하고 권세는  동등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권세에서 망합니다.

 모든 실체나 활동이나 경영이나 경영 그런 것을 다 동등시만 하는 자는 그는  소경인 것입니다. 그는 비교할 수 없는 그 차이가 많이 있는 것이니 믿는  사람들은 구별성 이것이 언제나 자기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구별이라는 것은 비교하는 것이요 비판하는 것이요 평가하는 이런 방편들을 써  가지고 수많은 것 가운데서 참이 없으면 없는 것을 발견하니 거룩이요 거기에  참이 하나 끼어 있으면 하나만 되는 그 참을 참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만 되는  그 참을 찾아 가지는 것이 거룩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이름을 거룩한 무리라 하는 것은 거룩으로 살아가는 무리요  거룩으로 자라가는 무리요 거룩으로 취사(取사) 취하고 놓고 선택을 하는 것으로  자기의 전생애 법칙과 능력을 삼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자는 가장 담대한 자이나 그가 어리석은 자이요 이것이 없는 자는  어리석은 담대 미련한 베짱 이것으로 자기 망할 함정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담대보다 두려움입니다. 담대보다 두려움이요 두려움을 찾아 작은  두려움 큰 두려움 그 두려움의 실상만치 두려워하고 두려움은 병입니다.

두려움은 자기를 망쳐 죽이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그 실상을 깨닫고 작고 크고  길고 짧은 그 두려움을 하나하나 해결을 지워 두려움을 능가한 담대와 평강  그것을 조성하므로 담대와 평강을 가지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 담대자는 그것이 멸망입니다. 제가 모른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오지 않습니까 무시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자기를 해하지  아니합니까? 비유컨덴 사망을 알고 사망을 해결짓는 사망을 능가하는 생명을  가지고야 담대와 평강을 가져야 하지 사망이 뭐인지도 모르고 사망을 무시만  하는 것으로써 사망의 해를 보지 아니하느냐? 이 미련가지고 사망의 해가  방어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생애가 이러합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소.

조그만한 장사를 하는 것도 거기에서 어떻게 하면 실패냐 실패부터 먼저 알아야  돼요. 실패 알고 그 실패를 능가하는 데에서 성공이 있는 것이니 실패의 종류를  다 알아 그것을 해결지워 능가하는 성공을 가졌다면 그 사람을 실패시킬 자가  없습니다.

 실패를 모르고 실패를 능가할 대책을 실력은 하나도 마련을 못하고 성공만 아는  그 자는 실패에게 삼켜질 실패의 미혹에 빠져 벌써 실패의 밥이 되어있는  자입니다.

 실패의 밥이 되어있는 자요 저의 상전은 실패요 저가 무시한 실패는 결국은  자기를 삼키고 맙니다. 작은 시발의 병이 무시할 때에 병, 병 할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평강을 가져야 된다는 그것이 효력이 있을 때는 그 병보다 병에 눌리지  아니하고 안심하는 평강 그것이 병을 누를만한 그만한 힘이 될 때에 그것이  효력이 있는 것이지 그저 정신 문제로 평강을 가지므로 마음이 평안해 몸의  신경의 작용이 잘돼 구미가 있어 소화가 잘돼 영양이 많이 취해져 몸의 건강이  회복돼 미약한 병을 다 꺾어 자연 치료하는 이런 능가의 이치가 있어서 그걸  무시할 때에 효력이 있는 것이지 무시하는 그것만으로써 효력있는 것 아닙니다.

 모든 자연계시는 특별계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계시를 모르는 자가  자연의 이치를 모릅니다. 아무리 과학자라도 저는 성경을 모르는 자는 제가  전공하고 있는 그 과학에 대한 참된 지식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특별계시를  아무리 전공한다 할지라도 이 자연이 가르치는 자연의 계시를 모르면 거기에  대한 것을 파악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마치 배우자로 이렇게 사람을 부부로 남녀 부부로 맺어가지고 한  새사람의 소생이 나는 것처럼 특별계시와 자연계시가 합해져 이 소화에서 자기의  양식과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너무도 우리 교계에는 어리석은 베짱이 많습니다. 베짱이라는 것은 똑똑히  말하면 무지입니다. 무지, 베짱의 일시의 그 큰 활동은 그 다음에 맺어지는 것이  큰 실패의 사망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역력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곳곳마다 진리가 담뿍 담뿍 쌓였고  곳곳마다 진리가 담뿍담뿍 쌓여있고 사건마다 우리에게는 가르쳐 주시는 빛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둡지마는 세상은 어둡지마는 세상에 있는 이치는 어둡지 않소. 세상은  어둡지마는 세상을 비판해서 인간들이 말하기는 운이라 윤회라 말하고 있으나  이것의 책임 처리자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보응은 이것은 밝습니다.

 이것은 빛입니다. 여기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이 운이라  운명론을 말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의 그 무식한 범위에서 운명론을 말하요  순환지 이를 말하요 왜? 정확한 순환이 되느냐? 순환케 하는 주인이 계셔요.

어리석지 말아야 됩니다. 모험성은 멸망입니다. 기독교는 모험성이 아닙니다.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고 훌떡 뛰어보자 잘되면 영웅되고 안되면 실패할  요량하고 그게 기독교 아닙니다. 기독교는 과학보다도 정확한 것이요 알고 또  알고 또 알고 또 알고 살피고 살피고 그의 향방은 모든 존재에게 대해서  시간적으로는 영원 존재적으로 모든 존재 전체 영계와 물질계 여기까지 자기  힘있는 데까지 구별하고 구별하고 비판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평가해서 이는  자기로서는 그 이상 찾을 수 없는 정확하다는 아는 데로서는 그 가운데 아는  데로서는 정확하다 그것을 걷는 것이 양심의 걸음이요 믿음의 걸음인 것입니다.

 아무나따나 한 번 해보자 저 사람 하니까 나도 해보자 이런자는 실패가 그를  뒤따르기 때문에 실패가 사망이 그를 뒤따르기 때문에 좋은 시기 좋은 정력을 다  망치는 모든 원인으로 화의 근원으로 마련하여 그의 생애가 세상에 속한자가  늙으니 가치가 차차 적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자의 생애는 그 사람이 청년때 가치보다 노년 때 가치가 크지 아니하면  예수 믿는 사람 아니요 그 사람이 살았을 때 가치보다 죽을 때 가치가 크지  아니하면 예수 믿는 사람 아니요 또 죽을 때 가치보다 부활했을 때 가치가 더  크고 하나님의 심판앞에 가면 더 크고 무궁세계에 가니까 더 큰 것이 그것이  기독자입니다.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하면 아이구 옛날이 좋다 그때가 좋다 젊을 때가 좋다  옛날이 오늘보다 가치있다 하면 뭐라고 말했습니까? 지헤의 사람이 아니라 했소  그 사람은 어리석은 걸음을 걸었습니다. 바른 걸음을 걷지 않했소.

 그러기에 어떤 목사님 내가 한 분 만났는데 지금부터 근 30 년전입니다. 그분이  한 번 오더니마는 내가 어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어제는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이 설교를 하면서 첫째는 무엇 둘째는 무엇 셋째는 무엇 다섯째는  무엇 이렇게 그 소지를 붙여서 여기에 대해서 첫째는 둘째는 셋째는 다섯째는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분은 자랑하듯이 그렇게 하면 내가 기뻐할 줄 알고  와서 말을 합디다.

 그때 그분이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여기에 와서 공부할 때에 첫째, 둘째 하는  그 첫째, 둘째 그것만 배웠지 그 안에 첫째의 이치가 들어 있고 둘째의 이치가  들어 있고 셋째, 넷째, 다섯째의 이치가 들어 있으니 그 안에 있는 이치를 알려  주기 위해서 그렇게 홋수를 붙인 그 안에 있는 이치는 전혀 몰랐소. 홋수만 그  사람은 배운 사람이 됩니다.

 그것 모양으로 여러분들도 지금은 내가 있는 동안에는 이 말씀 가지고 새김질만  해도 다 못하고 전할라 해도 다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 되어 있으니까 별게  없지마는 이 다음에는 만일 내가 없게 되면 지금 배운 그것을 토대로 삼아서  성경을 배우지 안한 것도 다 해석을 해야될 것이고 또 지금 세대에 해석보다  앞으로 세상이 더 타락해 내려가면 깊게 넓게 타락해 내려가면 거기에서 구출할  만치 더 범위가 넓어야 되겠고 더 세밀해야 될 터이니까 지금에 배워 안 그  윤곽속에서 새움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럴때에 거기에서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는 캐내지는 아니하고 그저  아무나따나 주어대어서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하는 그것은 멸망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리사를 공부를 하면서 일찍부터 그 한 사람의 주장 많은 사람의  주장 그것이 그것으로 끝남이 아니고 그것을 들어 배운 사람들이 자꾸  중얼거려서 심히 많은 과오를 범한 것이 그 원인의 책임자가 그에게 있소 또  바른 것이 수많은 바른 사람들을 낸 그에게 상이 있소. 귓속에 대어놓은 것이  지붕에서 외쳐진다 혼자 말한 것이 수천 수많의 사람에게 번져나간다 이러기  때문에 "많이 스승되고저 하지마라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니라"  한 사람이 말해놓은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논평합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그것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왜? 그것의 활동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당장에 이단도 있고 십 년만에 이단도 있고 백 년후에 이단으로 드러난 것도  있어 열매를 봐서 그 나무를 알 수가 있어 얼마나 우리가 말하기가 힘들고  얼마나 새주장을 하기가 힘이 든다고 마치 홋수를 붙이는 그것만 배워 가지고서  거기에는 얼토당토 안한 것,  그래 내가 붙들고 자, 이것이 이 속에 들었는지 그걸 좀 말해 주십시오 그거는  전혀 몰라 아무나따나 말만 쒸워 거기에 해당된 말이든지 해당되지 않은  말이든지 거기에 해당된 이치든지 아니든지 그 이치에 반대되는 이치든지  뭐이든지 갖다 주워 붙이면 홋수만 붙이면 되는 줄 알아 하나도 해당된 게 없어  이거 큰일납니다.

 왜 이렇게 가르쳐 놨소? 심판 어떻게 할라요. 그 사람이 그 뒤로는 그거  쓰는지는 몰라도 지금도 그분이 오기는 옵니다. 금요일 밤 금요일날 오후에는  대개 안빠지고 옵니다. 지금 어찌 되어 있는지 모르요. 그분도 신학교수  전임강사인지 교수인지 내가 교수라는 말 들었소 아무나따나 성경 해석하는 것만  배워가지고 해석하는 고것만 해석하는 고것만 본떠 가지고 아무나따나 해석만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러기에 내가 성경 깨달음을 여러분에게 말하면서 부탁하는 것은 주의 재림이  얼마나 남았는지 같이 떠날는지 세상을 떠날는지 모르기 때문에 뒤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 있으면 말해 달라 그렇게 말합니다.

 언제 서목사님은 나에게 두 가지를 말해줘서 나 세 가지를 말해줘서 내가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나는 새 사냥꾼이라는 그 나는 그전에 또 설교해서 새라고  해놨는데 그때 사냥꾼이 새(bird) 사냥꾼이라 하니까 아마 힘있는 것을 그  다음에 말했기 때문에 지금 바로 출발하는 피곤치 않은 사냥꾼인가 이리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새, 날아 다니는 새 그것이라는 것을 말해줘서 내가  나도 처음에는 보니까 그전에 그렇게 설교했어 했는데 그만 중간에 그걸  다른나라 말을 참조했으면 알 것인데 내가 그만 그대로 해서 중간에 그만  삐뚤어졌더라 그말이요. 그래 그 고친 것을 고마움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송목사님하고 서로 의논하고 아이의 신앙 젊은이의 신앙  늙은이의 신앙에 대해서 말을 합디다. 또 둘째 사람이라는데 대해서 거기 대해서  이거 어찌 되었는가 말을 합니다.

 그래 말하는 데서 그것은 서로 말을 해서 그것은 그 틀림이 없습니다.

불택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는 지금 죽은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그것이 둘째 사망의 해요 믿는 사람들에게 대한 둘째 사망의 해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지금 살려낼 수 있는 그것을 살려내지 못하는 그게 둘째 사망의  해입니다 그래.

 그래서 둘이 타협을 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가르쳐 놓은 그것이  틀린 것이 있다고 깨달으면 또 의문이 난다고 깨달으면 그것을 말을 해서 많이  번져 나가기 전에 많은 해독을 끼치기 전에 그것을 고쳐야 그것이 많은 심판을  면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기 때문에 저는 잘못된 것은 알면 잘못된 것을 말한 그 사람들이 있는 데에  말합니다. 심판 안받을라고 내가 잘못 가르친 것 있으면 그 사람들이 헤기전에  그 자리 가서 말해야 그걸 그 사람들이 고쳐지지 그래야 심판이 없어지지  아무나따나 속여서 꾀어서 임시 인기를 끌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요 심판도 모르는 사람이요 내세도 모르는 사람, 순전히  그거는 불신자입니다.

 일시 인기를 끌기 위해서 사람을 얻기 위해서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도 모르는 사람이요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이요 그는 불신자입니다. 사람을  얻는 것보다 잃는 것보다 하나님을 얻고 잃는 것이 더 크요 세상의 수치보다  영원한 수치가 더 크고 세상의 존영함보다 영원한 존영이 더 크요.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지옥과 하늘나라 둘이 비추어 와 가지고 있는 그와  비슷한 그림자같은 것이 섞여있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좋은 것을 보아  무한히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치 남의 눈에 티를 발견하므로  자기속에 들보가 있는 것을 스스로 발견해서 연구해 발견해서 치료받는 것처럼  세상의 좋은 것을 보아 무한히 좋은 것이 있는 것을 발견을 하고 세상에 싫은  것을 보아 무한히 싫은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해서 오늘의 무한히 좋은 것을 이걸  보아 깨달아 그것을 상대하고 무한히 싫은 것을 깨달아 그것을 상대해서 사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런데 하나 여러분들이 깨달을 것은 나쁜 것은 이것은 변하지 아니하고 나쁜  것은 그 성질대로 그 종류대로 그대로 영원한 지옥에 크게 나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이 세상에 좋은 그것으로써 종류만 가르키는 것뿐이지 좋은  그것이 그대로의 연결되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여러분들이 가  가지고 대가리를 싸 짜매고 양심을 찾아서 깨달으면 알 것이고 지금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이 말해도 모르요. 가서 깊이 살피면 알 것이요.

 세상에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이것은 다 저주와 사망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죄안에 있는 것입니다. 죄안에 있는 것.

 이러기 때문에 세상의 좋은 것은 죄안에 있는 좋은 것과 의안에 있는 좋은 것이  다릅니다. 저주안에 좋은 것과 축복안에 좋은 것이 다릅니다. 사망안에 좋은  것과 생명안에 좋은 것이 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 좋은 그것을 막바로 그대로 보존해서 영원의 것으로  유지할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나쁜 것은 세상에 나쁜 그것이 그대로 영원히  나쁩니다.

 예를들면 세상에 고독이 세상의 고독이 그 종류에서 종류만이 아니고 그 고독  그 성질이나 영원한 고독의 성질이나 같소. 세상의 가난의 그 본질 본성이나  영원 가난의 본질과 본성이나 같습니다. 왜? 홍포입은 부자가 그 가난을 당한 그  가난은 세상에서도 같은 가난이요. 하나님과 끊어진 거 하나님과 끊어진 그것이  자기가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더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더 많소.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물질 그것으로만 자기의  만족을 누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니까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가  거리가 십 리만치 멀었다면 내세에는 하나님과 거리가 백 리만치 멀고 가면 천  리만치 멀고 점점 더 머요. 더 머니까 하나님의 선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고 하나님의 평강이 없소.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에 그 본질과  본성으로 그대로 계속합니다. 이것을 말해도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가 모를  것이요. 하늘나라는 그 본질과 본성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 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세상에 권세가 좋다 합시다. 권세를 보아서 권세는  좋구나 거기에서 무한한 권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권세는 모든  것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권세인데 하늘나라의 권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제로  복종하는 권세가 아니라 평가적으로 그들이 자원해서 그들이 자원해서 나를  높이는 권세입니다. 강제로 눌르는 권세가 아니고 그들이 평가적으로 나를  높여서 가져지는 권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권세는 내가 그를 이용하므로 이루어지는 권세지마는  위엣것은 내가 그에게 이용이 되므로 이루어지는 권세입니다. 세상 권세는 그  상대방이 벗어날라고 하는 권세요 내게서 벗어날라고 하는 권세요 그렇기 때문에  권세자를 죽이지 하늘나라 권세는 벗어날라고 하는 권세가 아니고 그 권세의  권세를 입으려고 하는 권세요 벗어날라고 하는 그런 조화로서의 권세가 아니고  하늘나라 권세는 그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상대방이 원하고 원하는 권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봉사의 권세요 세상은 착취의 권세요 이러기 때문에 내가 온  것은 모든 사람을 섬기되 생명까지 다 드려 섬길라고 왔다 하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권세를 잡으러 왔다 그말이요. 그 나라의 권세는  그러합니다. 세상 권세는 그와 다릅니다. 취미도 세상 취미와 하늘나라의 취미가  본질과 본성이 다릅니다.

 세상 취미는 예를 들면 올라가므로 취미가 됩니다. 올라가므로 취미가 있소  모든 것을 밟고 올라가므로 취미가 있소 그 취미요 하늘나라는 내가 모든 것  밑에 기어 들어가서 모든 것이 내 어깨위에 태워지므로서의 취미입니다. 세상은  받는 취미지마는 하늘나라는 주는 취미요 세상은 모든 것으로 인하여서 내가  잘되는 취미지마는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잘되기 위해서 내가 녹아지는 취미요.

 그러기에 재미도 권세도 부요도 영광도 종류는 이런 종류가 있지마는 이거는  저주아래 있는 것이요 이거는 축복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종류가 다릅니다.

본질과 본성이 다르요. 이 세상 나쁜 것은 지옥의 것과 본질과 본성이 같습니다.

본질과 본성이 같소 나쁜 것의 본질과 본성이 같소. 왜? 그 모든 것이 세상에  싫어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그게 생겨진 것이요 하나님과 멀어지므로  생겨진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므로 생겨진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연결이 더 떨어진 곳이요.

 그러기 때문에 그 본질과 본성이 변해지지 안하고 그것으로써 영원한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지 안해 하늘나라는 왜 그렇지 않아? 이것은  죄아래에 저주아래에 사망아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종류는 권세라는 종류가  있고 기쁨이라는 세상도 기쁨이라는 종류가 있고 하늘나라도 기쁨이라는 종류가  있고 세상도 재미라는 종류가 있고 하늘나라도 재미라는 종류가 있고 세상도  권세라는 종류가 있고 하늘나라도 권세라는 종류가 있고 세상도 영광이라는  종류가 있고 하늘나라도 영광이라는 종류가 있지마는 그 종류는 그 같지마는서도  본질과 본성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아주 다르요. 이거는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되어있는 이것이지마는서도  하늘나라는 이제 하나님과 가까워지므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종류가 아주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모르기 때문에 망령을 부리요. 모르기 때문에  망령을 부립니다. 모르기 때문에 망령을 부리요 알면 망령 부리지 안해.

 그런고로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깊이 깨달아야 이제 이번에 말씀한 거는  여러분들이 그저 제목만 가지고 가 가지고 자꾸 양심을 써서 연구하면 이 보이는  현상세계에 충격받지 말고 밝은 양심 가지소서 연구를 하면 깨달아져서 세계가  열릴 것이요. 세계가 열려질 것이요. 세계가 열려지면 그런 조브라운 자살행위  하지 아니합니다. 알면 안 행할 자 없소. 알면 행하요.

 인간이 불에 들어가면 타 죽을 줄 아는데 그 자가 불에 안 들어가려고 불에  들어갔으면 나올라고 안할 본능이 어디있소? 알면 생의 애착이 있기 때문에 생의  애착이 있기 때문에 생의 애착과 지식은 합일이 필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안될  수가 없는 것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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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베드로전서 5장 6절-7절/ 831001토새 선지자 2015.10.30
268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벧전5장 6절-11절/ 830925주전 선지자 2015.10.30
267 모든 존재의 목적/ 마태복음 24장 35절-41절/ 811025주후 선지자 2015.10.30
266 모든 존재의 목적/ 로마서 11장 33절-36절/ 811025주전 선지자 2015.10.30
265 모든 현실은 주님과 가까워지게/ 마태복음 10장 16절-42절/ 880413수야 선지자 2015.10.30
264 모본이 되는 생활/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0823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263 모세의 믿음/ 히브리서 11장 24절-26절/ 820707수새 선지자 2015.10.30
262 모순 해결/ 시편 73장 1절-28절/ 840617주전 선지자 2015.10.30
» 모험적인 삶을 살지 말라/ 골로새서 3장 1절-3절/ 791215토새 선지자 2015.10.30
260 목사 사태/ 디모데후서 3장 15절/ 861221주새 선지자 2015.10.30
259 목사를 허는 것은 교훈을 허는 것/ 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861123주새 선지자 2015.10.30
258 목양/ 베드로후서 1장 5절-9절/ 84031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257 목양/ 마태복음 10장 16절-22절/ 840514월새 선지자 2015.10.30
256 목양법/ 사도행전 17장 11절-15절/ 85081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255 목양법/ 요한게시록 1장 3절/ 841102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254 목양실기/ 마태복음 23장 37절-38절/ 87020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
253 목양의 자세/ 마태복음 23장 37절-39절/ 890707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