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선지자선교회 1984년 5월 14일 월새 

 

본문 : 마10:16-22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화목과 거룩과 겸손과 충성을 늘  생각하고 힘을 쓰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입니다. 범사를 잘 구별해서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되지 안하도록, 또 사람에게 거리낌이 되지 안하도록 이렇게 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서도 화평을 가지고, 또 사람으로 더불어서도 화평을 가질려고  애를 씁니다. 또 모든 일에 나 할 일을 내가 잘 감당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안하도록. 첫째는 정신 부담이 되지 안 하도록 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안하도록 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이런 노력이나  물질이나 그런 면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안하도록 이렇게 할려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 기독자의 생활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해도 환경에 있는 세상은 우리를 마땅치 않다고 해서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훼방하고 훼방한다 말은 헌다 말입니다. 삣고 깍아서 헌다  말입니다. 훼방하고 그렇게 자꾸 불목하려고만 자꾸 그렇게 애를 씁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살이가 기독자의 살이인 것을 생각할 때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잘못하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하는데 세상은 내게 대해서  이렇게 한다.' 이렇게 해 가지고 잘못하면 그만 이 신앙에 대해서 재미와 열심을  가지지 못하고 잊어버리기 쉽고, 또 세상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과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식어지기 쉽고, 또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원망스러운 그런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시면서 왜 그렇게 되는가?'  이렇게 오해를 가지기 쉽습니다. '말뿐이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신다면 이렇게 나는 내대로 그래도 똑똑히 구별해서 살라고 애를 쓰고, 또  어짜든지 서로 화평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려고 애를 쓰고, 범사에 부담을  주지 안하려고 내가, 조그만한 부담이라도 내가 부담을 하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삼가 조심을 해서 살기는 사는데 왜 세상은 우리들을 헐고 이렇게 자꾸  삣고 깍고 이렇게 대항하게 될까?' 이렇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공연히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권하지 안하는 것이 없다.' '주권하고  계시면 왜 이렇게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는가? 또 저거보다는 훨씬 저희에게 내가  잘했는데 왜 이렇게 나타나는가?'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 가지고 선을  행하다가 그만 나중에 짜증나고, 권태나고 피곤하고. 그 다음에는 힘이 떨어지면  원망, 불평, 낙망 이렇게 사람이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아시고 미리 선포를 했습니다.

'너희들을 내가 세상에 믿음 준비를 해 가지고 영원을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세상은, 너는 세상에게 대해서 양같이 그렇게  부드럽게 순하게 하는데 세상은 네게 대해서 이리와 같이 그렇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역부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 다음에 내리 보면 아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환경이  그러니까 내가 환경에 대해서 봉사하고,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고, 그러나 그들에게 마음과 정은 붙지 안하고 마음과 정은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해도 그리 되는 세상이 돼 놓으니까 잘못하면 원망하기 쉬울 만침 그만침  돼지는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모든 우리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모든 정성을 다  주님에게 기울여서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그게 정상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하는 정상이고. 또 성도는 '세상이 미워하니 나도 미워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고, 용서할 수밖에 없고, 참을 수밖에 없고 또 그들을 어짜든지  북돋우고 그들을 구원해서 복되게 해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저주를 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축복을 해야만 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하고 사랑하고  화평해서 사람을 돕는 것이 우리 할 일이지 세상이 어떻게 한다고 해도 일 대  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 세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이유가 뭐인가? 순전히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향하여서 주님에게만 더, 그럴수록 자꾸 주님에게만 마음이 가고, 주님에게만  정성이 가고, 주님만이 존경되고 숭배되고 주님만 사랑하게 되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에게만 참 의논할 수 있고. 주님에게만 맡길 수  있고, 주님에게만 부탁할 수 있고. 주님의 인도만 받을 수 있지 그 외에 다른  데에는 아무런 그럴 만할 것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세상의 그 내용의 진상을  알아서 미혹을 받지 않고 목자에게로 점점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  것입니다.

 이리가 있는 것은 이리에게 잡아먹히라고 목자가 양을 그렇게 보낸 것이 아니라  이리 떼가 있으니까 이리에게는, 이리라는 것을 알고 이리에게는 정을 붙이지  아니하고 이리가 있을수록 목자에게 더 가깝게 붙고 또 의지하고. 또 목자에게서  떨어져서 이리에게 삼킬 만한 그런 거리를 두지 아니하고, 어짜든지 이리가  달라들어도 목자로 인해서 상하지 아니할 수 있도록 목자에게 가까이 하는 이런  밀접한 관계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세상과는 사이가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세상을 이리를 만든 것은 세상을 이리를 만들었다  그말이오. 세상을 하나님이 이리를 만드시고 우리는 양을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세상과는 멀어지고, 세상은 항상 두려워하고 주님은 사랑하고, 주님은 든든히  의지하고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길 수 있어서, 주님과는 가까워지고. 세상과는  멀어지고, 세상과 멀어지게 되는 그것이 주님과 가까워지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셨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에게 이리가 되게 하시고. 우리는 세상에게 대해서 뭐이  되게 하셨는가? 우리는 세상에게 대해서 그들의 구원이 되고, 그들을 건지는  사람이 되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이. 되기를  마치 주님은 우리에게 대해서 이와 같이 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돼 가지고 있고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도록 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가까이 접촉을  해서 구원하려고 애를 쓰는 우리가 되도록 하시고 또 세상은 또 우리를 자꾸  멀리 떠날라고 애를 쓰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이 뜻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일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 때문에 하는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주님이 좋아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기 때문에 이 일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그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내가 은혜를 갚는다. 그가 나에게 필요하니까 나도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 이렇게 그들을 우리가 일 대 일로서 이렇게 되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우리에게 주지지 안했습니다. 그것은 막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순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위함으로써 주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뭐이냐? 주님이 이 죄인들을 구출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해서, 그걸 사랑하면 주님을 사랑함이 되고 주님이  좋아하시고 주님이 만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를 위해서  세상에 있게 하고, 세상은 우리를 멀리 하고 미워하고 하는 것이 그것이 고  조화를 바로 맞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꾸며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으로 더불어, 자기 신앙의 후배로  더불어 신앙의 후배, 자기보다 신앙이 낮은 사람, 어린 사람. 신앙의 후배로  더불어 정이 붙는 것은 죄악입니다. 정이 붙는 것은 그것은 뭐인가 잘못 돼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거기에 주님에게만 정이 붙고,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믿을 수 있고, 주님에게만 맡길 수 있고  그렇지, 자기보다 신앙 낮은 사랑에게 주님으로 더불어 관계 가질 그 관계가  가져진다고 하면 뭐인가 잘못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너희는 나에게 사망을 주고 나는 너에게 생명을 준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양이 목자를 보고 눈이라도 빼줄만침, 사도 바울을 보고  눈이라도 빼줄만침, 또 천사와 같이, 주님과 같이 대접하니까 얼마나 목자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목자를 사랑하지만 목자가 그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이  목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목자를 죽이는 일이요, 목자를 삼키는 일이요, 목자를  망치는 일이요, 목자를 사망하게 하는 그것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고. 그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허허하고 좋아하고 이래 하는 것이지  거기서 오는 것은 전부가 다 사랑밖에는 오는 것이 없다 하는 것을, 요것을  똑똑히 자기가 구별해서 느끼지 안하면 실은 그것이 벌써 목자가 주님을 향하지  안하고 꺼꾸로 돌아섰기 때문에 그 다음에 결과는 좋지 못한 결과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신앙이 없는 사랑은 신앙 있는 사람은 죽이고 신앙 있는  사람은 신앙 없는 사람은 살려고 신앙이 어진 사람은 신앙이 장성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죽이는 일을 합니다. 좋아한다는 것이 죽이는 일 하요.

좋아한다는 것이 죽이는 일 하고 신앙 장성한 사람은 신앙이 어린 사람이오.

살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저 우리로서 주님을  좋아하지 주님을, 우리가 주님을 좋아하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주님을 죽이는  일이요, 해치는 일이요, 주님은 우리를 돕는 도움의 일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거는 조금 여러분들이 어려워서 알아듣기가 어려울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무엇을 한다는 그것은 주님을 뜯는 일입니다. 주님을  뜯어서 내가 먹는 일이오. 주님을 뜯어 먹는 일이오 우리가 연보를, 주를 위해서  무엇을 물질을 바친다는 것은 주님을 돕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가 뺏드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연보하는 그것이 잠깐 동안 보관하고 있는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결과가 되어지고 주님을 위하는 것이 결과로 자기를 위함이 되어지고, 주님에게  바쳤다는 것이 내나 주님의 제 모가치 삼는 그것이지 주님에게 아무 드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주를 위해서 뭐 이런 제사 저런 제사를 드리는 고 제사 드리는 것이 말하자면,  속죄제, 또 화목제, 번제, 속건제 이래 피를 흘려 가지고 제사 드리는. 이 네  가지 제사가 있고 다른 제사는 그 피 흘린 제사를 인해서 그 제사끝에 다른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사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만, 그것은 전부 다 주님을 죽이는 일이요, 주님의 생명을 뜯는  자이기 때문에 그 뜯는 일이 모이고 모여 가지고 마지막에 유월절에 당신의  생명을 다 내놓아서 줬던 것입니다. 주님이 안 주시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구약에 모든 제사를, 양을 잡아서, 저거 돈을 내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같이 그렇지만 그 제사 드리는 그것은 아무리 해도 그것뿐이면 다  헛일이 되는 건데, 제사 드리는 그 제사가 제물이 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양이  돼 가지고 제물이 되시고 또 그들이 제사 드린 그 드리는 제사장 한 일을  예수님이 그 대신 제사장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지 안하면 그 모든 제사는  다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게 인간 보기에는 드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여러분들이 조금 차차 어리나  깨달아져 가면 깨달아져 갈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보는 주를 위함이 아니고 주님에게 받는 것이라, 주님의 것을  내가 뜯어서 내것 만드는 것이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눈이라도 빼  달라면 빼 줄라고 하지 안했느냐?' 하는 빼 줄라고 그렇게 사도 바울을 위할  때에 위하는 그것이 사도 바울은 그들이 위하니까 그저 그들에게는 좋아하고  이렇게 하기는 하지만 속에 그들이 위한다는 그것이, 그게 다 사도 바울을  죽이게 하고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속으로 구별을 가지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사랑을 받는 듯이 하고 그들을 이와 같이 관계를 가지는  것같이 이렇게 하나,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유익이 없고 해를 끼치는 것인 줄  아나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익을 끼치는 것같이 그렇게 하는 그것이 없으면  넘어집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이렇게 말씀 하셨는데, 물을 달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여인을 위해서 물을 달라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물 달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해서  그에게 구원이 되고 유익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지, 그것이  주님이 목마르니까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하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래도 또 이해가 잘 안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으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받으시는 것이지 당신을  위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하는 것이 되지 당신을 위한  것이 안 된다 그거요. 은사 교권은 다 그러합니다. 은사 교권은 신앙에 어린  사람이 신앙에 장성한 사람 은사 교권이라고 말하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은혜  기관이라 말입니다. 은사 교권에 은사의 위치에 있는 그 사람을 밑의 사람이  대접할 때에 그 대접을 하는 그 대접을 받는 것이 상대방을 위해서 대접을,  정말로 상대방을 위해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도움을 받는 것이  됐다면 그것은 비참한 것이요 헛일인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그 대접을  받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대접을 받는 것이 되어야 하다니?  대접을 만일 한 냥짜리 대접을 했는데 그거를 한 냥짜리 대접을 받는 그것으로서  두 냥이나 석 냥이나 넉 냥이나 닷 냥쭝을 그이에게 주는 그 결과가 되지  안한다면 그거는 다 헛일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기독교는 이렇게 되어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데 이  기독교가 속화가 돼 가지고 이 정반대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은사  교권에 있는 사람들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착취를 해 가지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용물이 되어진다 이래서 교회는 구멍가게와  같이 되어졌다, 그렇게 누가 말하는 것이 그 진상을 말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너희는 절도요 강도라. 절도요 강도라. 삯군이라' 그렇게 요한복음  10장에 말씀한 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밑의 사람이 위의 사람을 대접할 때에 그 대접하는 것을 받을 것  안 받을 것으로 구별되는 그것은 뭘로 구별하느냐 하면, 내가 그에게 받음으로써  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는 것이 되어지는, 받는 것으로 인해서 그에게 큰  것을 주는 것이 되어져서 하늘나라에 가 보면 그이에게 내차 유익을 끼치고 내가  그에게 준 그것이 되어지지 안하면 그것은 안 받아야 됩니다. 받고 안 받을 것을  그렇게 구별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받아주는 것이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신령한 것이 가지고 그로 말미암아 더 유익이 되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부담이 돼서 안 받지만 그를 위해서 받는 것, 그를 위해서 받는 것.

 그러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자기가 그에게 받는 것을 아주, 받는 것을 그에게  내가 받음으로써 그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그가 나에게 바침으로 써 주님과 더  가까워져 가지고 그분이 신령한 것이 더 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의  축복을 은혜를 더 받고 그가 나에게 주기 전보다 준 후에 주님과 가까워지고  주의 은혜를 받아서 나한테 주기 전보담도 준 후가 그가 훨씬 나아지고 좋아지는  그런 결과를 맺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 주는 것을 받지  안하려고 박하게 하면 안될 때에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말 없는 가운데 무언중에  어디로 해도 물질은 물질로 갚아 버립니다. 갚아서 그것을 빚지지를 아니합니다.

 또 그것을 받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유익이 되어질 때에는 그 사람이.

받음으로 유익이 되어지는 것 유익은 전부 주님으로 말미암아 유익 돼지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 그걸 받지 안하면 그 사람이 나와 관계가 맺어지지를  못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관계가 맺어지지 안하면 주님과 나와 관계  맺어지지 안한 것이 주님과 나와의, 주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맺어지지 안하는  일이 될 때에는 받아 줍니다. 또 어떨 때는 그 사람이 전연히 은사 교권의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지 못함으로 그 사람이 주님과 그거 지장이 돼 가지고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 '너 와  그렇게 하느냐? 좀 대접을 해라.' 말을 해 가지고 대접을 하도록 합니다. 대접을  하는 데에, 대접하는 그것이, 대접을 하니까 내게 도움이 된다 해서 그렇게 하면  벌써 그거 삯군이오. 대접을 하는 그것이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고 필요가  없으나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람이 이제는 차차 주의 종들과 가까워지고 주의  종들과 가까워짐으로 주님과 가까워지고, 이래 가지고 그 사람이 신령한 면에  눈이 뜨여지고 연결이 되기 시작해서 차차 차차 더 연결이 되어져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 때에 도움이 될 때에는  그렇게 합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어떤 것이 기독교냐? 주는 것이 기독교지 받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만일 어떤 교역자가 그 교회에서 사례를 십만 원을 받든지  백만 원을 받든지 몇 백만 원 받든지 받는 그것이 그 교회에게 적어도 몇 배,  그렇지 않으면 몇 백 배를 그들에게 주지 못한다면 그거는 삯군이 되고 말아요.

결론으로 삯군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역자가 그 교인들이 대접하는 것을 가지고 먹고 살고 있지 않느냐?  먹고 사는 그것이 교역자가 자기가 벌어서 자기가 먹고 살 수 있는데, 먹고 사는  그것보다 자기는 그거 먹고 사는 것을 벌지 안하고 교인들이 주는 것을 먹고  살면. 못 먹고 사는 것을 자기는 자기가 벌어먹고 사는 것보다 더 몇 배 노력을  하고, 자기가 먹고 사는 그것을 버는 것은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일반인과 같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자기 먹고 사는 것 그것밖에는 벌 수 없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기술이 있어서, 기도의 기술이 있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기술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전해 주는 기술이 있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술이 있고 이러니까 자기 기술을 가지고 그렇게 함으로 썩을 것을 자기가 받고  썩을 것을 받고 썩을 것을 위해서 일할 사람이 '썩을 것은 너거가 썩을 것 해라'  하고 썩을 것을 그 사람들이 해서 받고, 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 썩지  안하는 것 신령한 그것을 그이에게 줘서 그들은 보기에 저들은 나를 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을 주고 저들은 나 준 것이 보여지고 나는 그들에게 주는 것은 볼  수 없는 건 주고 그들은 나에게 받는 것은 보지 못하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정확하게 다 계산하기 때문에 마지막은 '아, 나는 그에게 만날 대접하는 줄  알았더만 그분에게 이렇게 큰 빚을 졌구나. 그분에게 이렇게 크게 혜택을  입었구나'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 가지고 고대로 나타나야 그 심판에서  부끄럽지 안하지, 볼 수 있는 것 받고 그 가치도 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삯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면 여러분들이 조금 깨달아집니까?

 우리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눈에 보이는 물질과 노력이 있고. 또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그 다음에는 더 깊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신령한 것이 있고 이래서,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세상 것,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세상 것. 보이지 않는 세상 것이 어떤 것입니까? 보이는  것은 돈, 수고. 이런 노력이고, 또 세상 것으로서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은 보이는데 들어 보면 잘 보이는데, 들어 보면 잘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의 축복. 보이지 않는 세상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거는 또 보이지  않아요.

 이러니까, 상대방은 자기에게 보이는 물질을 주고 보이는 수고를 도왔는데  자기는 그에게 보이지 않는 세상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에게 빚졌습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축복을 주지 안했으면 빚졌습니다. 축복을 주는 것은 자기가 축복을  줄 무슨 축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축복이 그에게 갈 수 있게 해서, 과연  그는 썩은 것을 나에게 썼는데 나는 그이에게 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에게 쥐서, 그는 준 것은, 나에게 준 것은 몇닢푼치 안 되고 나는 그에게 준  것은 많아서, 그는 제것을 나에게 준 줄 알지만 나는 내가 그이에게 하나님의  것을 줘서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제가 풍부하니까 거기서 십분지 일쯤이나  혹은 백분지 일쯤이나 약간의 것을 대접하고. 그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받고  보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것과 주고 또 그가 위해서, 날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위해서, 교역자 위해서 기도하니까, 교역자를 위해서 기도하나 교역자는  그이에게 기도보다도 그이에게 보이지 않는 성화 은혜를 그이에게 더 많이 주는  그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주는 나라지 받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주는 나라고 받는 나라가 아니라 그말이오. 이거 좀 어려운  말인데 조금 신앙생활 해 보면 대번 알아요. 신앙생활 해 보면 다 압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좀 제일 가치가 적은 것은 눈에 보이고 그 다음의 것은  자세히 생각해 봐야 보이고, 마음으로 볼 수 있고 그 안의 것은 참 양심으로  생각해 봐야, 양심의 눈이라야 겨우 보이고 그 안에 있는 보배는 성신의 감화로  살아난 중생된 영이 봐야 보이고. 그 안에 있는 것은 영도 성신의 감동을 받아야  보일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러기에 언제든지 기독교는 주는 도라. 왜 주는 도라?  그러면, 천한 것 받고 귀한 것 주니까 주는 것이오. 천한 것 받았을 때에는 귀한  것을 허야 되고 적은 것 받았을 때에는 많은 것을 줘야 되고, 없어질 것을  받았을 때에는 있어질 것을 줘야 되고, 또 없어지지 아니할 그것을 그를 위해서  영감의 노력으로 했다고 하면,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무궁한 영광을 그이에게 주지 안하면. 어쨌든지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많지 않으면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할 때에  세상은 우리를, 우리를 해하는 세상이요 우리는 그들을 유익하게 하는 세상이요,  세상은 나를 미워하는 세상이요 나는 그를 사랑하는 세상이요, 세상은 나를  헐뜯는 세상이요 나는 그들을 북돋우는 세상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과 본성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리 됨으로써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기독교는 자꾸 그리  되면 어찌 되느냐? 그리 됨으로써 내가 내기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줬을 때에 나는 그라면 어찌 되느냐? 할 수 있는 것을 줬을 때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받습니다. 내가 천한 것을 증을 때에 귀하 것을 내가 받습니다. 적은  것을 줬을 때에 많은 것을 받습니다. 뉘한테 받습니까? 뉘한테 받아요? 하나님께  받아. 그러니까 기독자들이 유지가 되는 것이고 점점 줄수록 자꾸 복되고 커지고  왕성됩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당신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으므로 손해 간 게  아니오. 주셨으므로 이제 하늘과 땅에 있는 것과 아버지를 완전히 다 받았기  때문에 전부 총 주권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를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 거와 같이 이렇게 세상에서 살 때에  세상이, 나는 그들에게 참 양으로 대하고, 그들에게 아주 양같이 대하는데  세상은 내게 대해서 이같이 대하는 그것을 이상스럽게 여길 것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놨다 그거요. 그래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것은 뭐이냐? 만들어 놓은  것은 주님에게로 가까이 달라붙게 하는 것이요 주님의 도우심을 입게 하는  것이라. 주님의 도우심을, 목자의 도움을 입게 하는 것이라.

 윌리엄 부우드가. 그 사람은 좀 물질적으로 많이 했는데, 물질적으로 가지고  복음을 위해서 봉사한 사람으로서는 아주 제가 책을 읽을 때가 지금 한 사십 년  전인데 사십 년 전에 그때까지는 윌리엄 부우드보다 물질로 인간 구원에 봉사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많이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군  창설자입니다. 창설자인데 구세군에서, 우리 한국에서도 아주 중도시, 또  시골에도 그렇게 모두 다 병원이라든지 또 감옥 앞에 마다 다 구호 기관을 해  놓고 사업을, 모든 기업체를 만들어 놓고 감옥의 죄수들이 감옥 생활하고 나오면  그 사람들이 거 기 들어가, 직공으로 들어가 가지고 그 생계를 유지하고 이래  하도록 감옥에 나온 사람들 병든 사람들 이런 사람들 구원하는 겆은 전부  구세군에서 다 했습니다. 구세군에서 다 했는데, 인제 그 뒤에, 구세군에서  했는데 그 후에 이 개혁교라든지 천주교에서 우리도 해야 되겠다 해 가지고  거기에서도 병원도 만들고. 또 학교도 만들고 이래 가지고 그 일하는 것이  그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그것이, 그분이 그렇게 한 것은 외형을 했다 그거요. 외형을 해서  그분은 평상에 줬지 안 주지 안했습니다. 물질로 줬다 말이오. 껍데기 보이는 걸  줬다 그말이오. 내가 말할라 하는 것은 보이는 걸 줬는데, 보이는 걸 줬는데  윌리엄 부우드가 뭐 처음에 나설 때에는, 내가 그 전기를 읽어보니까, 두 내외,  자녀도 없고 두 내외 딱 나섰는데, 나설 때에 돈 한 푼도 없이 빈 손 쥐고  나섰어요. 빈 손 쥐고 나섰는데, 물질 봉사로는 역사에 제일 많이 한 것이  그것이 누구 것을 가지고 했느냐 하면 주님의 것 가지고 했다 말이오. 주님의  것. 주님 한 분만 모시고 주님에게 무한이 있으니까 주님의 것으로 하겠다 이래  가지고, 그는 그렇게 많이 했는데 그분은 가난하지 안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할 마음을 가지고 하면  하나님이 주셔서 하고 하고 이래 가지고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는 주는 도라, 주는데, 그러면, 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줘서, 준 자는 하나님께 더 많이 얻으니까 가난해지지 아니하고 더  많아져요, 이런데, 우리 중보자 되는, 신앙의 선배되는 사람, 또 신앙의 으뜸이  되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도 자기 신앙 후배에게 어데까지나 주는 것이  없으면 삯군입니다. 주지 많으면 삯군이오. 그는 나에게 봉사를 이만큼 했는데  나는 그에게 봉사한 것이, 그가 날 봉사한 것보다 내가 그에게 봉사한 것이  적었다고 하면 그것은 벌써 삯꾼이 됐습니다.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물질을 받았으면 그에게 보이는 물질을 받은 것보다 그에게  간 축복이 더 커야 하나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그가 나에게 빚 졌지, 나는  그에게 썼지 그에게 빚지지 안하고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빚지지  딴 데는 빚져서는 안 되는 그런 법칙과 제도와 본질과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들이 또 신령한 것이면 더 신명한 것을 더 많이 줘야 됩니다.

 그래서 교역자를이 자기가 교회에서 사례 줘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교역자들이  어떤 교역자는 적게 받을라고 애를 쓰고 어떤 교역자들은 더 많이 발을라고 애를  쓰는데, 적게 받을라고 애를 쓰는 교역자는 좋은 교역자고, 많이 받을라고 애를  쓰는 자는 나쁜 교역자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는 껍데기요, 적게  받을라고 애를 쓰는 그 교역자가 그들에게 이해를 주기 위해서, 적게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아직까지 마음이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저희들에게 더 은혜가 되어지고 그 신앙이 자라가게 될 때에 그것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별 문제고, 그렇지 안하고 내가 적게 받아서  저들에게 좀 유익이 되도록 쓸모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다면  유물주의자입니다. 또 많이 받기를 원해도, 많이 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래  가지고 저희들이 하는 것을, 무엇을 많이 받기를 원해도 많이 받은 것을 그에게  유익이 되도록 한다고 하면 그것을, 적게 받아 가지고 유익되게 하는 것보다도  많이 받아 가지고 더 많이 유익되게 하면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여기에 양복쟁이 하는 사람, ○○○씨가 그때 양복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씨에게 '네가 한 달에 칠천 원씩을 내라' 이라니까 그 사람이  그때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칠천 원씩을 냈어. 칠천 원 냈는데, 일곱 달인가  냈습니다. 칠칠은 사십 구, 사만 구천 원. 사만 구천 원 하면 지금은 아마 사만  구천 원이 아니라 한 사백 구십만 원 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때 돈은  지금보다도 더해요. 힘이 들어요. 그래서 그건 나중에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만해라' 하고. 중단을 하고 내가 말하기를 '네가 사만 구천 원 나한테 바친  것 그것은 네가 일생 동안 네 재물을 가지고 너를 위해서 쓰고. 일생 동안 네  재물을 가지고 전부 다 두드려 뭉쳐 봐야 요 재물만 못한 것이다, 그것보다 양이  많다.' 내가 그걸 말했습니다. 그때 그것 가지고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그 돈 가지고 세웠는데 그 ○○교회는 저만치 컸습니다.

 이래서, 그 사람이 그 뒤에 그 ○○교회를 가서 알아보고 이라고 난 다음부터는  '아, 요게 요렇고 요게 요렇구나' 하는 것을 눈을 떠 가지고, 그 사람이 지금  장로 됐습니다. 장로 됐는데. 교파가 다른 데 가서 매여 놓으니까 그 사람들이  자꾸 백 목사 이단이라고 뮈 어짜고 욕을 해 쌓으니까 그 사람이 오지 못하고,  여기서 은혜 받은 고것은 제가 기억하고 그대로 살고 있는데 장로가 되고, 지금  아주 그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전적 봉사하고 산다고. 언제 한번 찾아 왔습디다,  장로가 되고 난 다음에 한번 찾아 왔어요. 찾아 왔는데, 인본들이 가리워  가지고, 진리냐 은혜냐 그것 중심이 아니고 인간들 관계 중심을 앞세웠기 때문에  고게 어두워져서 고만 가려워져 가지고 있다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  가려워지고 막힐 필요가 없고 이유가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층 위에 또 문이  있고 한층 위에 또 문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려진 것 있으면 가려지지  안한 데까지는 가지만 그 이상은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게 주는데 세상은 나를 해친다' 그렇게 하는 그런  생각이 그것이 기독교를 바로 파악하지 못해 그런 것이니까, 세상은 나에게  이리인데 나는 세상에게 대해서 양으로 대해 줘야 된다. 세상은 나를 해치는  자인데 나는 그들을 유익하게 하고, 세상은 나를 헐뜯는데 나는 세상을  북돋우고, 세상은 나를 죽일라 하는데 나는 세상을 살리고, 그러기 때문에  주님만 보고 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이거요.

 그러면, 제가 그에게 하면 저는 주님에게 받습니다. 저는 사람에게, 그것도  껍데기요.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르게 그들에게 축복을 해 주고 그들을  위하도록, 영이 좋도록. 축복을 받도록, 그들의 사람이 되어지도록, 참 신령한  축복을 주니까 저는 줬지만, 저는 그거 줬지만 그것 줌으로써, 그것 줌으로  세상이 볼 수 없는, 주님에게 자기가 받는 그런 신령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껍데기 주고 알맹이 받습니다. 언제든지 그렇소.

 그런고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냈다는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합시다. 계속해서,  요 말씀을 계속해서 나갈 것인데,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앞으로 어려운 난제가  뭣 때문에 닥치는가? 그 닥치는 것을 요게서 해석을 해서 배울 터이니까 빠지지  말아요. 빠지면 몰라요. 빠지면, 모르면 무식하고, 모르면 그 사람은 바로 할  수가 없어. 아는 것이 힘입니다. 알면 막 힘이, 알면 힘이 나서, 알면 그까짓 것  시쁘게, 알면 아주 쉽게 일 할 수 있는데 모르면 죽자껏 힘을 쓰도 일이 안 된다  그거요. 아는 데에서 힘이 나오고 모르는 데에서 모든 실패가 나오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여기에 수원지에 기도하러, 꽃마을에 기도하러 가는 것은 오르막이  있어서 차가 다니기가 영 안 됐습니다. 이러니까, 수원지에 가는 데는 여기 일반  모두 다 그 칠십 세 미만 된 사람들은 갈 때에 전부 밑에. 층층대 밑에까지만  태워다 놓고 돌아와서 또 좀 수가 차면 또 몇 차. 이래 하면 많은 사람이 가서  기도할 수가 있고, 올 때도 그러하고, 아주 원로 권사님들 이런 분들은 그  위에까지 가니까 그 위에까지 가는 차는 한 번만 가면 될 것이고, 그 밑에는  여러 행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나이 많은.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다 그런 게 아니라 주를 위해서 다 바쳐 서 늙어진 사람 한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거는 자꾸 그렇게 차별 대우를 안 할 수 없어.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그분들이 가서 한 마디 기도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열 마디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나아요. 바로 기도를 해요. 이러니까 그게 다 전부  건설이라 그말이오.

 등록된 사람은 오천 칠백구십일 명입니다. 또 어제 기도한 사람은 팔백육 명이  기도했고, 여기 장로님들은 네 분이 기도했고, 권사님들은 네 분이 기도했고,  목사님들은 한 분, 두 분, 세 분, 네 분, 다섯 분이 기도 하고 이랬는데, 꺼꾸로  되는 세상은 세상이오. 꺼꾸로 해 놨는데 그래도 쓰기를 제일 먼저 권사님들  쓰십시오. ○선생, 네, 제일 먼저 권사님 쓰고 그 다음에 장로님 쓰고, 왜?  장로님보다 권사님들이 훨씬 위에 있습니다. 왜? 그들이 교회의 공로자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사도행전에 '장로들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으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여성들은 이름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개인의 이름을 불러 가지고  성경에 말을 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우리 구원에 대해서 공로자. 또  우리 구원에 대해서 일을 많이 한 사람, 또 신앙이 제일 앞서 자라 가지고 있는  사람. 장로님들은 아직까지 어려요. 장로님은 다 큰 줄 알아도 아직 어립니다.

어리고, 권사님들은 벌써, 여자는 장로를 안 내기 때문에 권사로 냈는데, 권사는  장로 중에는 아주 원로 장로 택입니다. ○○○장로님이 우리 교회 장로 중에는  제일 원로 장로님인데 원로 장로 ○○○장로님보다 권사님들은 훨씬 원로  장로요.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그래도 권사님들 먼저 기록하고, 우리 교회서는  그래요. 또 그 다음에는 목사님들 기록하고, 그 다음에는 장로님들 기록하고,  그렇게 순위를 그렇게 잡아 줘요. 대우를 그렇게 해야 된다 말이오. 이것도  세상에 가면 다 말을 하지만, 이러니까, 세상에서는 이제, 장로교도 곧 아마  금년이나 명년이나 장로교회서도 여장로가 다 선출 될 것이고 또 여목사님들이  다 선출이 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런 말씀을 은혜로 받지 못하면 시험에 들어요. '뭘 별스럽게 뾰족하게'  뾰족한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되는 것이니까 어짜든지 말하는 걸 은혜로 들어서  아멘으로 하면 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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