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1980. 6. 27. 오일 밤

 

본문 : 요한복음 14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선지자선교회  

(기도)

영원히 구속받은 저희들의 전부가 되려 하사, 전부가 되심을 알게 하시고, 힘 입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주의 은총을 감사합니다. 다만 저들이 어둡고 어리석고 완패하여 이 지극히 큰 은혜를 안에 있으면서도 은혜를 보지 못하여 스스로 주관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도 내 좌로 후군같이 덮여 있는 것을 다 이것을 벗겨 주시고 주님만을 진심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함께 하시고 주님의 피로 받은 성도들 어데 있든지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찾지 말며, 위의 것을 항상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아 땅의 모든 것으로 위의 것을 이루어 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신 이 너희는 우리 택함을 입고 중생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 가리켜 너희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불택자 불신자에게 대한 말씀 아니고 곧 택함을 입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들을 가리켜서 너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왜 벌써 처음부터 조울라 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말씀은 마음에 고통을 당하지 말라 하신 말씀입니다. 마음에 고통만 당하고 몸에 고통은 포함하지 안했는가? 몸의 고통도 포함했고, 또 자기 사업의 고통도, 자기의 가정 고통도, 자기 소유의 고통이나 어떤 것이나 다 포함한 이치의 말씀입니다.

마음만 근심되고 몸은 고통되지 아니하고, 마음만 고통되고 자기의 사업은 고통되지 아니하고, 마음만 고통되는 것을 말씀한 것 아닙니다. 우리는 사업의 고통이 있으면 몸의 고통도 따라 있고 마음의 고통도 따라 있습니다. 또 자기 가정에 걱정스러운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자연히 몸도 걱정 고통하고 몸도 그 고통을 격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마음의 고통을 당하지 마라 하는 이 말씀은 마음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대한 일체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고통 당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말아라 또 염려하지 마라 손해보지 마라 실패하지 마라 망하지 마라 하는 그런 뜻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하신 것은 너희들은 망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고생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손해보지 말아라. 너희들은 불행스러워지지 말아라. 천해지지 말아라. 실패하지 말아라. 이제 모든 좋지 못한 거, 사람에게 는 좋은 것과 나쁜 거, 행복스러운 것과 불행스러운 거 이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모든 해로운 것을 당하지 말아라 하는 그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당하기가 다 싫지마는 당하기 싫다고 그것을 안 당해집니까? 어데 당하기 싫어도 원치 안하는 그런 것이 당해지는 것이지요. 이 근심하지 말아라. 그런 사람 되지라. 당하지 말아라. 망하지 말아라. 손해보지 말아라. 이렇게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당하지 아니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면으로 추호도 해를 보지 않을 수가 있는 우리들입니다. 금생뿐 아니라 내세 영원무궁까지도 털끝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는 그런 길이 완전히 우리에게서 다 없어졌지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길이 우리에게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조금도 영육간에 모든 사업이나 소유 금생 내세 추호도 손해보지 아니할 수 있는 그 길이 있다고 하면 그 길이 무엇인가? 그 다음에 말씀을 해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추호도 이런 해를 보지 아니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짝을 지워서 이 말씀의 정반대로 되는 그 말씀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반대는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는 우리 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 길은 전부가 손해요. 하나도 유익은 없다 하는 것을 여게서 매듭지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 중보자 예수님을 믿으면 영육 금생 내세 모든 면에 하나도 해를 당하지 아니하고 이 반대로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을 안 믿으면 금생과 내세 영과 육 모든 면에 유익은 하나도 없고 전부가 손해뿐이다. 그것을 여게서 꼼작 못하게 못박아 결정을 지우시고 우리에게 선포하신 게약입니다.

고 본문을 보십시요. 달리 해석을 못합니다. 마음에 근심만 말했지 혹 그렇게 조브랍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마음에 고통은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 그 전부가 다 통일 돼 가지고 희로애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 돼서 고통도 당하고 또 평강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게 무엇이든지 하나를 말할 때에는 그 전부가 다 포함된 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으면 근심할 것이 없어. 손해 볼 것이 없어. 그 반면에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을 안 믿으면 유익될 게 하나도 없어. 전체가 손해뿐이라. 이것을 우리가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는 거짓말쟁이가 말해 놓은 말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머리에서 생각해 놓은 말은 그 말을 주관하는 것이 악령이기 때문에 거짓말입니다. 혹 옳은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관련된 다른 말이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위 말하기를 반 거짓말이라 반 거짓말은 온 거짓말을 할 터인데 반 거짓말로 한 것에는 미혹을 시켜서 온 거짓말로 하는 것보다 멸망시키는 효력이 반 거짓말 더 효력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반 거짓말을 인류 시조 아담과 하와 때부터 사용을 한 것입니다.

그 물리라는 이 과학은 맞지마는 물질과 그 인간이라는 것이 관련을 끊을 수 없는 것인데 물질과 인간과의 통합된 그 관계를 가진 것인데 물리는 맞다 할지라도 거게 대한 인간의 그 진리가 맞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다 사람에게 해만 주는 것 뿐이지 유익이 없습니다.

이십세기의 문화가 많이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그 공로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마는 결론을 지을 때에는 그것이 인간을 망치는 가속의 운동이 되고 말하지 하나도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면으로 털끝마치도 해 볼 것이 없고 유익만 된다 그것을 여게 말씀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 외에 어떤 피조물을 믿고 의지하든지 그것은 자기에게 추호도 우익은 없고 전부가 해가 된다 하는 것을 여게 단정을 지워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지식을 확고히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주님을 믿는 것은 어떤 것을 믿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은 어떠한 하나님이신 것을, 또 하나님의 모든 생명과 평강과 온갖 그 은헤를 하나님께서 이 말씀과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신구약 육십육 권 도리는 곧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이 성경 중에 나타나 계시고 또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이 성경에서 만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주시는 온갖 축복을 이 성경 말씀에서 받을 수 있고, 영감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나타내신 책이며, 또 하나님은 이 성경 안에 계십니다. 이래서 우리가 보는 이 성경은 세상 지식과 같은 하나의 이치만으로 끄침이 아니고 이 성경 안에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안에 계셔서 역사하십니다. 그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성령님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성경과 자기에게 감동시키는 영감을 배반하는 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요 환영하는 것이 하나님을 환영하는 것이요 곧 영감과 이 진리와 동거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과 막바로 직접 동거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신구약 성경과 영감을 믿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관계는 사귈 수 없고 만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 없고 그 은택을 입을 수 없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감과 신구약 성경 이 도리를 믿되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믿으라 하는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영감을 믿으라는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과 성신의 감화를 먼저 참되다 인정하고 참된 것임을 참된 이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고 영감과 진리 영감과 진리는 정확무오하고 한 획이 천지보다 큰 이 사실을 조금도 가감할 수 없고 변동할 수 없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그것이 믿음의 반쪼가리요. 또 참된 것임을 가감할 수 없는 참된 것임을 인정하고 자기가 인정하는 그대로 언행심사를 생활하는 그 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이 그것이 또 반쪼가리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참됨을 인정하는 것과 인정한 그대로 자기가 사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영감과 진리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접해서 이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라. 하나님 인도대로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의 털끝만큼도 해는 오지 못한다. 이렇게 하면 너에게 해는 털끝만큼도 오지 못하고 전면적으로 너희에게 유익만 된다. 사망은 오지 못하고 생명만 온다. 고통은 오지 않고 평강만 온다. 실패는 오지 않고 성공만 온다. 금생과 내세 영육이 다 그러하다.

그와 반대로 이 영감과 말씀으로 나타나신 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또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활의 법칙을 주신 이 법칙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다른 것들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법칙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다른 것들이 주는 법칙을 지키고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을 떠난 것입니다. 이 믿음을 떠난 이 행위는 영과 육 금생과 내세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거 그 전부의 해 뿐이요 유익은 하나도 없다 이것을 여게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확정지워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양심 속에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신앙 양심이라면 성경 지식을 가지고 옳고 바른 것을 찾으려고 하는 고것이 고 마음을 가리켜 신앙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기독자의 신앙 양심, 불교도 신앙 양심이 있고 그들이 신조와 교리를 생각하면 그들의 불교인의 신앙 양심이 있고 기독자의 신앙 양심이 있습니다.

기독자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근거해서 올바른 것을 찾으려고 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인데 기독자 양심인데, 이 성경 말씀과 기독자인 자기의 양심에 나타난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그 지도 교훈 법칙 이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래 하면 우리 기독자는 해는 하나도 없고 전부가 유익뿐이고, 이 길을 떠나면 해뿐이요 유익은 하나도 없다 요것을 견고히 잡아야 됩니다.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악령은 어떤 악령인가? 에베소 2장에 보면 악령은 믿음 없는 불신자의 마음 가운데에서 일하고 있는 영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자를 믿도록 하려고 애를 씁니다. 다시 말하면 영감과 진리를 믿도록 하려고 애를 씁니다. 영감과 진리를 인정하고 고대로 순종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불신자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악령과 악령의 일꾼이 되어 있는 모든 세상 지식 모든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일 곧 영감과 진리대로 순종하는 영감과 진리를 인정하고 이대로 순종하는 이 순종을 인정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 두 싸움 사이에 이 두 싸움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 두 사이에서 그들은 다시 말하면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백방으로 노력을 합니다. 이중 삼중으로 대비해서 우리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로 이치를 보여줘서 이 자연의 이치로 하나님과 주님을 믿도록 또 신구약 성경 말씀과 영감으로 우리를 믿도록 하려고 이렇게 직접 간접 이중 삼중 뭐 몇 중으로서 우리를 믿도록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이 사이에 우리가 끼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매사에 이 두 시비가 없는 우리 현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두 시비가 없는 현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두 시비가 없는 사건도 하나도 없습니다. 이 두 시비가 없는 인간 접촉도 사물 접촉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 두 시비는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거게서 우리는 성패 생사 화복 준비 귀천 이것이 결정됩니다. 이것이 결정되는 것을 성경이 지금 말씀합니다. 이것이 결정됩니다. 그 결정은 거게서 두 시비가 있는데 우리 인간에게는 유한한 자유이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 다음으로 온전자 완전자를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그런 자유는 없지마는 하나님에게 비해서 제한된 자유지마는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의 의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든지 이 두 가지로 결정됩니다. 결정되지 아니하는 사건에 하나도 없고 현실이 다 하나도 없고 인간이나 사물 접촉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둘은 반드시 같이 있으면서 서로 땡기는 이런 시비를 하고 있는 이 시비 속에 두 세력 속에 끼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현실마다 그 현실 거게는 보이지 않는 이 두 세력이 서로 시비하고 있고 또 보이지 않는 이 두 영의 시비 그 외부에는 보이고 들리는 모든 이치를 말들 문서들 운동들 이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자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 이 길을 택하면 거게는 모든 면에 해는 추호도 오지를 못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유익은 영육 금생 내세 자기 자체 자기에게 관련된 모든 소유 그 전부가 다 유익뿐입니다.

여게서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법도를 인정하고 중보자로 말미암아 자기가 받을 것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과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시 말하면 성경 진리와 영감을 배반하고 자기가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단체든지, 어떤 세력이든지, 권세든지, 물건이든지, 어떤 말이든지, 어떤 학문이든지, 어떤 법칙이든지 어쨌든지 하나님과 예수님 그 나타내시는 영감과 진리 이 외에 다른 것이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잡고 그것을 택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따르면 택한 자에게는 해뿐이요. 유익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금생과 내세, 영과 육, 자체와 소유, 모든 것의 살고 죽는 것,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영광스러워지고 천해지는 것, 망하고 흥하는 것 요것을 자기가 접선하고 있는 현실 현실에서 요것이 결정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요것이 결정지워져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심령이 어두워서 모르나 요것은 결정지워져 가지고 고 결말이 언제 지는고 하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상을 떠나는 그 시간에 고것이 결말됩니다. 결말 되면 그 성패에 판정과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부활해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것이 판정됩니다. 한 현실의 것도 지나가는 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하나에 비유하면은 녹음기라는 것도 또 촬영이라는 것도 그것이 한 마디도 숨소리도 빠지지 않고 고 다 기록되지 않습니까. 고 모든 것이 다 사진에 박히지 않습니까. 이런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성경에 행동록에 다 기록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판정이 됩니다.

판정되면 생사화복으로 나타나는 것은 언제 나타나는가? 그것은 영원무궁세계에 나타납니다. 불택자는 다 멸망으로 나타나고, 택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하늘나라에 가지마는 자기가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었느냐? 제가 자유성 가지고 현실에서 하나님을 일생 동안 안 믿었어. 배반했어.

세상 것만 믿고 이랬는데 그에게 기본적인 구속을 줬지마는 네가 믿은 대로 행동해 봐라 하고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은 내 두고 그것은 해결이 됐지마는 그 역사의 면에서 자기 생애면 활동면 자기 활동과 자기의 생애면 그 면에서 받아라 받아라 할 때에 자기가 부인하고 받지 안했기 때문에 지공 지성법을 대속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 통과돼서 무궁세계 하늘나라는 가지마는 자기가 역사적으로, 활동적으로, 생애적으로 거기에는 이 구속을 다 배반했기 때문에 그것은 저희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 갔지마는 구원은 얻었지마는 불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고 했습니다. ? 자기가 세상에서 건설한 것이 풀과 나무와 짚으로 건설한 것처럼 불로 태우니까 다 타버리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은 타지 않는 것처럼, 믿음으로 자기의 이 세상살이를 건설한 자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설한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에 심판으로 심판해도 그것이 심판에 걸리지 안하기를 마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이 불로 태워도 타지 안한 거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에 정죄되지 안해서 그것이 통과되지마는 풀과 나무의 짚으로 지은 거와같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피조물을 인정하고 피조물을 따라서 산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판당할 때에 그것은 다 뜻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다 정죄받아서 멸망하는 것이 마치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 불로 태우면 타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심판하니까 다 그것이 정죄받아서 소멸됐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기는 갔지마는 공적이 다 불탔기 때문에 그는 불 가운데 구원얻는 거와 같이 부끄러운 무궁을 맞이하게 된다. 자기 건설이 하나도 정죄받아 멸망하지 아니한 그 사람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과 같이 불타지 아니한 그 사람은 무궁세계에 그 영광을 다 누리게 된다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불택자와 다른 우리들은 불택자는 말할 것 없고 그들은 이런 새로운 길이 나지 안했습니다. 인간의 원죄에서 정죄돼서 다시는 살아난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중보자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 길이 우리에게 열러졌다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이 두 가지 시비하는 그 사이에 끼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으면 모든 해가 없습니다. 영육에 금생 내세에 명예에 지위에 권세에 소유에 아무 해도 없습니다. 하나도 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일을 버리면 세상에 무슨 일을 제가 했든지 그것은 전멸되는 것 뿐이지 자기에게 유익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하신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현실을 만난 이 현실에서 사는 것은 믿는 것 뿐이요. 성공하는 것은 믿는 것 뿐이요. 존영해지는 것은 사는 것은 믿는 것 뿐이요. 유익되는 것은 믿는 것 뿐이요. 자기 짧은 눈에 보기에는 실패로 보이든지 말든지 그 자기의 주관이나 자기의 짧은 견해에 따라서 판정지우지 말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공 되시고 주권자시며 주재가 되신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을 의지해야 됩니다. 이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의지해서 인정해서 자기는 자기 현실에서 믿으면 모든 것이 생명이요, 평강이요, 성공이요, 영광이요, 존영이요 믿는 것을 버리면 전부가 멸망이니 자기가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 일, 곧 영감과 진리를 인정하고 고대로 순종하는 일, 이 일 하는 것이 자기 조브라운 견해에서 볼 때에 이러면 죽는다 이렇게 보여져도 그렇게 보여지는 것은 자기 주관을 믿는 것이요. 인간의 그 통계나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식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현재에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 해도 그것이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떠나야 됩니다. 믿고 가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참되다 인정하는 거게서 이제까지 부활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잿떠미가 사람되는 일이 없었는데 잿떠미가 사람이 돼 가지고 아이 낳는 일이 없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참되다 인정하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이삭이 그 혈통으로 이삭의 혈통으로 이삭의 신앙 혈통으로 신앙 계통으로 이렇게 나는 것이 바다의 모래 수와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데 그 믿음의 계통만이 아니라 육으로 나는 자손도 그렇다 이래 숫자가 많다 한 것을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신 그 말씀을 자기가 참되다 인정하기 때문에 이삭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시니 제사를 드리면 이삭은 재가 되는데 재가 되는데 재가 아이를 낳으니 재가 장가 가고 아이를 낳으니 이 재가 다시 사람으로 살아난다 하는 그걸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참되다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기 때문에 거게서 인간의 좁은 것이, 인간들의 적은 것이, 인간들의 작은 것이, 인간들이 어두운 것이 다 사라지고 완전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현실에서 다니엘은 자기는 그렇게 하나님 믿는 것이 사는 것인 것을 자기가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 거 외에는 사는 길이 없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거 외에는 죽는 길이 없다는 것을 견고히 잡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는 사자 구덩이에 들리 들어가면서 자기가 거기서 살아 나올 그런 생각도 안했고 죽을 생각도 안했고 어쨌든지 이것이 사는 길이다. 나는 살았다 하고 들어갔습니다. 만일 그가 사자에 삼켜져 죽었으면 그는 살지 안했습니까? 그는 일 분 일 초도 일찍 죽지 아니했고 그 끝까지 자기의 생명은 정한 대로 살았고 다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 것처럼 생명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큰 관게만 맺었고 사자에게 삼켰다 할지라도 다니엘은 죽지 안했습니다. 다니엘은 죽지 안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순종하다가 죽은 사자밥이 됐다 할지라도 사자밥이 된 그 고기덩어리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았습니다. 존귀한 몸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으로 끝이 아니고 부활이 있습니다. 무궁세계가 있습니다.

이러기에 이 자리에서 손해가 되도 고 다음 자리에서 유익이 되는 그거기 때문에 여게서 손해가 아닙니다. 어린아이 학생이 공부할 때에 고생을 해도 공부할 때에 고생을 해도 고생 넘어 장성해서 영광스럽게 살 수 있는 그것이 연결되 있기 때문에 이 학생이 고생하는 이 고생이 고것으로 끝났으면 하지만 끝이 안나기 때문에 그 고생이 고생이 아니라 그 고생은 영광스러운 그 영광에 싹이 튼 것이요. 그 고생은 영광의 앞잡이기 때문에 그 고생은 막바로 그것이 영광과 연결된 그 영광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견고히 잡읍시다. 첫째는 인정, 다음에는 순종, 오늘밤에 좀 말씀하는 건 그 다음을 좀 말씀하려 했는데 벌써 시간이 자나갔습니다. 물론 그 실제도 있고 또 사람들이 자기네들 생각대로 자기네들 생각도 자기네들 견해도 거게 다 첨부가 돼 가지고 맺는 것이지마는 그 순교자라고 하는 그 어제밤 저 아래밤에 두번에 순교자에 대한 그 테레비가 나왔는데 그걸 제가 봤습니다. 봤는데 네 그분들이 다 순교는 순교입니다. 순교는 순교지마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늘 성경에서 보고 말하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 곧 그들이 믿는 주님 주님은 자존자시며, 완전자시며, 영원 불변자시며, 전지 전능자시며, 저희들을 유일로 사랑하시는 자시며, 그는 창조주시며, 모든 것의 주재시며, 주권자시며, 지극히 작은 거 하나도 빠짐 없이 당신이 혼자 개별 섭리하시는 주시며, 저희 안에 계시는 주시며 이분이 하시는 이분을 그때에 죽음 앞에서 믿는 게 믿음입니다. 이분을 믿었으면 그들이 그렇게 그 공포 중에서 순교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돌이 돌무더기가 와 가지고 그 투석 속에서 묻혀 가면서 그의 얼굴은 어떻게 기쁘고 즐거웠든지 모든 사람이 보고 광채가 났습니다. 기쁘고 즐거워 하면서 이제 주께서 나를 기다리고 저게 서서 계시는 것을 보면서 주님하고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그 교제의 기쁨, 또 그때 알지 못해서 돌 던지는 그분들에게 대한 그 마음에 민망스럽고 안타까운 그 위험성, 이래서 돌무더기 쌓여 있으면 주여 안면은 기쁨이 충만했고 한 면은 근심하는 빛을 가지고 '이 무리들이 알지 못해서 이런 죄를 범하는 것이니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참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걸 바로 공산주의 그들이 하나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너희들이 참 나를 믿나 안 믿나 시험하는 시험이며, 그때에 평소에 만들어 놓은 믿음이 있어 믿음을 써 먹을 껀데 만들어 놓은 믿음이 없었어. 믿음에 합격이 되면 하나님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고 이미 있는 믿음을 써 먹을 때에는 주관적 평강이 오고 그때에 고통스러우면서도 죄를 그 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은 믿음을 만드는 믿음입니다. 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다니엘과 같은 그런 아니 스데반과 같은 다니엘과 가은 그런 평강이 없었어.

그렇게 영광스러운 믿음을 가지고 나타냈을 때에 그를 죽이는 두목이 되었던 사도 바울은 암만해도 이상합니다. 그게 자기에게 숙제요. 가면서 다메섹을 가면서 사람 죽이려고 지금 예수 믿는 사람 죽이려고 다메섹을 가면서 암만 생각해도 그분이 돌조산 속에서 그의 얼굴에 충만한 기쁨은 자기는 평생 구경을 못했어. 그분이 부러웠어. 그 돌조산 속에서 원수를 위하여 간절한 사랑의 기도, 그 인격이 그의 인간성이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그것이 부러웠어. 이래서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 밖에 없는 가까운 맑은 깨끗한 심령으로 갔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났을 때에 그는 즉시 하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현실은 믿음을 시험하는 현실이요, 있는 믿음을 써 먹는 현실이요, 믿음을 만드는 현실이니, 현실은 우리의 이 세상 보배 중에는 보배입니다. 우리가 시간 중에는 시간이 자기에게 몇 십 년 그 산다 할지라도 자기에게는 고 현재라는 요 시간이라는 요 시간 외에는 자기 시간 아닙니다. 요 시간 외에 자기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습니다. 이 시간 외에는 자기 시간일지 아닐지 압니까.

이 시간 외에 또 그 시간은 있다 할지라도 자기는 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이요. 현재는 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리 세계가 넓어도 자기가 있는 고 땅, 자기가 있는 고 자리 고것만이 자기 것이요. 수많은 종류가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직접 접촉하고 있는 고 사람, 고 물건, 고 사건 고것만 자기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계보다 자기에게는 큽니다. 온 세계보다 자기에게 큽니다. 수십 년 시간보다 자기에게는 큽니다. 수많은 종류의 그 물질보다 만물보다도 자기에게는 큽니다. 고게서 살고 죽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거게서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하나님 영접하느냐 그게 있습니다. 거게서 영접하지 않고 평소에 주를 위해서 눈물 암만 흘리야 소용 없고 아무리 밥을 먹어야 소용 없습니다. 고 자리에서 고 시간 고 자리 고게서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하나님을 영접하느냐, 어떤 것을 영접하고 속하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확정을 지웁시다. 오늘밤에 우리는 자기라는 고 현실에서 거게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에게 근심이 없어진다. 하나님과 나를 믿지 아니하고 어떤 것을 바래보고 의지하고 믿는다 할지라도 그 전부는 너를 속이고 망치는 것 뿐이지 딴 것은 없다 한 것입니다. 그 이북에서 6.25때에 순교당한 그 열두 순교자들이 평소에 믿음을 만들어 놓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을 써 먹는 주관적 평강이 없었습니다. 다 고통 가운데서 모두 다 순교했습니다. 주관적 평강이 없었어.

다니엘 같은 그런 평강이 없었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그런 평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믿음을 가지고 써 먹어야 되지 믿음을 만들지도 않고 무슨 일 닥치면 그때 제가 믿음 쓰겠다고 그때 평강이 옵니까? 안 됩니다. 믿음, 이미 과거에 만들어 놓은 그 믿음을 가지고 주관적 평강이 옵니다. 그때 울며 불면서 순종하는 것은 믿음을 만드는 것이니까 그 믿음 만든 것은 그 다음에 써 먹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세상이 어떤 고통을 줘도 나를 고통시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있는 이미 있는 믿음으로 인해서 주관의 평강이 온 그것입니다. 그 믿음에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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