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1981. 11. 22. 주전

 

본문 : 로마서 10장 13절 - 15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이루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 후서 11장 24절 - 12장 5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여기에 삼층천에 이끌려 올라가 가지고 거기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는데 그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못한다.' 이랬습니다. 삼층천에 이끌려 갈 때에 이끌려  가는 그 사람이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그의 심령만 이끌려  갔는지, 몸채로 이끌려 갔는지 그는 자신은 분별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은 제 삼자 같이 이렇게 말했으나 앞뒤를 맞춰보면 실로 사도바울 자신을  가르친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일층 이층 삼층이  되는 삼층천에 가 가지고 그가 보고 들은 그것은 사람의 말로는 아무리 표현을  할래야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이요. 또 '말 을 할 수가 없다 말을 하면은 도로  폐단될 것이기 때문에 유익되지 못하고 폐단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자타의  폐단을 인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 가지고 보고 듣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우리에게는 좀 궁금하게 되겠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그 후 그의 행동을 인해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같이 주의 구속을 받은 사람이요. 또 사도들도 하나 뿐  아니라 십이 사도나 되는데 사도 중에 한 사람이요.

그런데 하필 그분은 일반 사도와 같이 살지를 안 했습니다. 사도들의 그 생애가  사도 바울의 생애를 따라가지를 못 했습니다. 그분의 산 것은 여기에 약간 말한  것도 옥에도 여러번 갇혔고, 매도 수없이 맞고, 무엇 때문에 이 복음 운동  때문에 이 복음운동을 위해서 감옥에도 많이 갇혔고 한 번 감옥에 들어갔으면  다시 두 번 안들어갈 터인데 감옥에 갇혔다가 나와 가지고 또 감옥에 갇혀도  외치고 또 갇히고 무엇 때문에 이 복음 운동 때문에 이 복음 운동을 이 전도하는  일 이것 때문에 옥에도 여러번 갇혔고 수고도 형언 못할 만한 그런 수고를 했고  또 이 복음 때문에 매도 수없이 맞았는데 여러번 또 죽을 뻔했다.

이 복음 때문에 참 하나님이 살려줘서 그렇지 살려주지 안했으면 죽을만한 그런  죽음을 많이 닥쳤고 유대인들에게는 사십에 하나씩 감한 매를 세 번 맞았으면 이  사십에 하나 감한다는 것은 그 매를 사십을 때리면 누든지 사람은 다 죽기  때문에 살인이 되기 때문에 사십을 때리면 그 사람이 다행이 안 죽고 생명이  남아 있어도 그거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그 형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십을 때리면 살인자로 법에서 사형을 받게 되기 때문에 사십은  때리지 못하고 사십의 하나씩 감하고 설흔 아홉 개씩을 때렸으니까 그 매를 친  그 도수가 얼마나 그들이 뭐 사십 설흔 아홉을 때렸지만 사십보다 더 이상의  그런 참 심한 매를 맞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면 이 복음 때문에 복음 때문에 감옥에도 많이 갇혔고 수고도 형언  못할만침 했고 또 사십에 하나씩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또 세 번은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로 맞고, 세 번은 이 복음 전하기 위해서 배 타고  가다가 배가 파선이 되서 배도 없이 바다 가운데 빠져 가지고 하루밤씩 지낸  것이 세 번이나 있었고 우리가 그 상상을 이렇게 해 볼 때에 어떻게 했을까? 참 이만하면 이 복음  전하는 이걸 위해서 전하는 것을 피해서 몇 천리고 만리고 도망을 쳤을 터인데,  여러번 여행 중에 강의 위험과 복음을 전하러 복음 때문에 사람에게 전도한다고  가다가 오도 가도 못해서 강물에 막혀 가지고 그 참 하나님이 살려서 그렇지  죽을 만한 그런 위험과 강도의 위험 복음 전하러 가다가 이 강도의 위험, 동족들이 그들이 믿는 유대교를 전하지 아니하고 유대교의 반대인 이 예수교를  전한다고 그 동족들이 없는 데가 없이 꽉 깔리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서  집중적으로 사격해서 바울이 그들에게도 사도행전에 보면 죽을만한 그런 고비를  얼마나 넘긴지 모릅니다. 위험과 또 이방인의 위험과 안 믿는 나라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하려 하니까 저거 나라의 합당치 안한 도를 전한다고 대원군 때도  우리나라에 그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와 같은 그 무릅써 도를 전하면 의례히 죽이려고 하는 그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지 안하고는 견디지를 못했고 이래도 자꾸 가서 전한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가다가 복음 전하러 가다보면 날 저물고 인가 없으니까 맹수 속에 그 광야에서  숲 속에서 거기에서 지나게 될 그 모든 위험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과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였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음과 이랬지마는 이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 날마다 그 마음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걸 보아서 바울이 표현을 안하지마는 삼층천에 올라가 가지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다는 것을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참 자기가 빌립보서에 말한 것같이 그저 밤이나 낮이나 쉴새없이 늘 그  마음에 소원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다고 했습니다. 주님 외에는 그에게 사모가 없었고 그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고 고생하고 생명까지 바쳐서 복음에 일을 했지마는 그는 로마서 1장에  보면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하여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 빚진 자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있는 충성 다하고 몸과 생명을 다 바쳤는데 하나님이 살려줘서 나는 있는  것이지 한 번도 이 복음 위해서 몸이나 생명이나 뭐 자기의 안일이나 자기의  수고나 고생을 하나도 애끼본 일이 없고 이 복음 위해서 있는 것을 다  바쳤지마는 그렇게 맞고 갇히고 온갖 위험을 만났지마는 그것은 생각이 없고  그것은 고사하고 그건 생각이 없고 마음에 눌리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염려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이 이렇게 삼층천에가서 무엇을  봤기에 무엇을 들었기에 인간의 말로 말할 수 없는 그것을 보고 들었는데  '그것을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또 그걸 말하면 도리어 결과적으로  유익이 없을까 해서 말을 안한다 또 자기를 지나치게 높으게 인정할까 해서  안한다 이랬지마는 그 행동을 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북에 납치되 가지고 와 가지고 여 와서 물어와 아무 말도  안하지마는 그 사람 행동을 보면 그쪽이 어떻더라 하는 것을 그 행동에서  나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이 복음을 위해서는 자기가 살지 안할 수 없었고 이  복음을 위해서 사는 이 복음 위해서 바쳐진 것을 이 복음 위해서 희생된 것을  하나도 아깝지 아니하고 오히려 희생을 못해서 마음의 고통이 됐고 또 희생하게  된데 대해서는 그는 기쁨이 층량할 수 없다고 말을 했고 이래 한 것을 보아서  삼층천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가 사도 중에는 주님을 사랑함이 뜨거웠고 또 주의 도를 전하는 것이  더우기 신령하게 유력하게 전했습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에게 사랑을 특별히 받은 사랑의 사도라 이렇게 말하는 사도 중에 참 신령한  면으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흠없는 사람이라고 실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도인데 이 사도 바울이 밧모섬에 가 가지고 주일날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  가지고 주님을 대할 때에 그 앞에 죽은 자와 같이 꺼꾸러졌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것 표현하기를 "주의 얼굴은 해와 같다" 그러면 주님이 물질적으로 환하게 그 비추어서 눈이 부시서 보지를 못한다는 그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주님이 어떻게 하신 그것으 사도  요한이가 이 육지에 있을 때에 받은 영감 그 영감보다 더 충만한 영감을 받아  가지고 주님을 더 밝히 보고 주님이 인간들에게 자기들에게 하신 것을 더 밝히  보니 그만 그분 앞에 모두 한것이 불충이요, 죄요, 황송이요, 가증스러운  것이라. 주의 얼굴이 바시서 부끄러워서 보지를 못해 얼마나 그가 마음에  자책감을 느꼈든지 그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꺼꾸러졌습니다.

이와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가 삼층천에 올라갈 때에 세상에서 자기는 참  율법으로써는 흠없는 자로 이렇게 살았지마는 삼층천에 가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문서로 우리에게 전달해 준 신구약 성경으로 이렇다 이렇다 하는 그  전달하는 그 전달한 이것을 그분이 보고 지켰고, 또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  이보다 더 확실한 것 성신의 감화를 받아 가지고 문서만 보고 지식적으로 깨닫는  그것을 탁월한 성신의 감화를 받아서 깨달아 그 실상에 가까운 것을 보고서  그대로 살았지마는 삼층천에 올라 가 가지고 이제는 문서로 증거한 것보다 영감으로 증거한 것보다  더 실상에 가까운 삼층천에 가보니까 이 성경에 나타내준 이 사실이 너무도  인간이 측량 못할만치 너무도 크고, 너무도 두렵고, 너무도 존귀하고, 너무도  가치있는 그 실상을 여기에 나타낸 그 실상을 더 똑똑히 본것이 아니겠느냐? 이러니까 바울이 그 후 모든 생애가 다른 사람보다 독특히 뛰어난 그런 생애를  하되 그분은 세상에서 어떤 위험이 왔지마는 그 위험으로 인해서 두려워 해  보지를 안 했습니다. 이 위험으로 인해서 두려워 보지를 안했고 또 이 복음을  인해서 고생을 수없이 했지마는 그 고생한데 대해서 불만이나, 불평이나,  원망이나, 불만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밤낮 충성을 다하고도 '이제는 내가  할만침 했다.' 하는 그 흐믓한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하고 늘 자기는 하지  못하는 그 빚진 자, 무익한 종, 죄인, 괴수 죄인, 만삭되지 못해서 논 자와 같은  이런 자, 자꾸 이것만 바울이 그이의 사무쳤기 때문에 그는 말하기를 시간이 지나가고  자꾸 늙어져 갈수록 마치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그분을 대하고 이 주님을 대한  것과 주님의 나라에 가서 모든 만물 앞에서 나타날 것을 생각할 때에 세상에서  이제까지 산 그 생활이 너무 자기 마음에 후회스럽고 원통해서 그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그 일이 무거운 짐진거와 같이 자기에게 눌린다 했습니다.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자꾸 갈수로기 마음이 더 눌리고 더 충성하지 못하고 더 그분  앞에서 더 시행하지 못했고 더 감사하지 못했고 그분을 높히지 못했고 그분을  아는 자로 살지 못한 이것을 그는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고통스럽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 신구약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마치  하나의 정신병자로 생각하고 또 하나의 이 불교와 같이 그는 가증으로 하나  가상으로 하나 만들어 놓고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수양시키는 수양하는 도로  이렇게 인정하고 무엇이든지 사람이 마음이 집중되지 안하면 안 되니까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 어디든지 하나 집중을 시키야 되기 때문에 집중시키는 그런  하나의 위로의 든든케 하는 그런 방편으로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는 사람, 자기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사람, 자기가 자기 인격을 다스릴 수가 없는 사람, 자기가 자기 생활과  행동을 조절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에게 이 기독교도 필요하지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스릴 수 있고 자기 행동을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참 정신이 똑똑한  건전한 사람이라면 기독교는 필요없다 약자에게 필요가 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기독교 이 복음을 그렇게 그분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고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래도 이 복음의 영생이 있는 그 영생을 이 육의 생명보다도 더  믿고 영생이 있어, 또 하늘나라가 있어, 인간들의 행동한 것이 모두가  다하나님의 행동록에 기록이 되 가지고 심판을 받아 심판에서 심판대로  영원무궁한 지옥이 있어, 하늘나라가 있어 하는 이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도  주일날이면 바쁜 것을 두고서 주일을 지키려고 또 자기 눈앞에 있는 무슨 이해  문제가 있어도 거기에 따라서만 안 믿는 사람들이 움직일 수가 없고 이 도를  준해서 못지키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하는 것은 세상 사람보다는 이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들보담은 이 복음이 조금 더 밝히 보이기 때문에 이만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믿는 사람 가운데도 이렇게 문서만 보고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그 자체가  행동보다는 영감을 양심을 써 가지고 영감을 받은 그 사람들의 그 자체의 행동이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있는 것은 그것은 이 복음을 받아 좀 더  똑똑히 보고 봐라 봤기 때문에 그런 차이 있는 사람과 차이있는 행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서 본 것은 세상에서 영감 받아 본 그것은  그것보다 이 복음이 확실히 더 있기 때문에 그 바울은 이 복음의 사람이 영감  받은 일반인보다도 뛰어난 생애를 했습니다. 또 사도 요한이도 그가 밧모섬에서  평소에 받았던 그 영감보다 뛰어난 영감을 밧모섬에 귀향 가 가지고 주일을  당해서 이제까지에 만나보지 못했던 그런 영감을 그가 받아 가지고, 이 복음에  대해서 복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작정과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이 보응시키는  무궁세계 이것을 보다 똑똑히 보고,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대한 그 불신임이 자기에게 대한 불신임  이전보다 뜨거워졌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죄인됨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소망이 더 튼튼해져서 그가 거기에 살리나와 가지고  전설에 의하면 기름가마 기름을 갖다가 펄펄 끓이면서 그 안에 집어넣어도 그는  거기에 삶기지 안하고 거기에서 그것이 해하지 안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 들어간 거와 같이 그렇게 그 자리에서 삶기지  안하고 그대로 살아나왔다 하는 그런 말을 전설에 있습니다.

오늘 지금 제가 이 시간에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외에 이 권위가 가치가 뭐 우리 눈에는  이렇게 업수이 보여지는가? 그러면 그 사실 그 실상 이 그 복음에 그 실체가 그  복음의 그 실상이 허무해서 우리가 이 복음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빈약하고 허무한가? 그 복음 자체가 허무해 그런거 우리들이 우리들 자체가  허무하고 강퍅하고 어두어져서 거기에 대해서 바로 보지를 못하고 느끼지를  못해서 우리에게 고장이 생겨서 이런 것인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반성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복음은 성경에 나타나기를 이 복음의 근원이 영원전 자존하신  하나님이 이 복음에 시발자입니다. 자존이라 말은 이 자존도 자꾸 우리가 새기야  우리 이 강퍅한 마음에 뚫고 들어와서 이 마음을 딲고, 깎고, 삣고, 자꾸  헤치고, 이 마음을 깨끗이 딱아야 자존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자존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자기가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크고  두렵고 어떤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주님에게 지음받은 것들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순전히 하나 거기에 먼지만한 것도 저절로 된건 없고 주님이  지어서 모든 것은 지어졌습니다. 세계에 인간들이 떨고 있는 유력한 사람이라도,  탐하고 있는 좋은 것이라도, 아름다운 것이라도, 큰 것이라도 이것 다 주님이  지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것으로 말미암도 아니하고 스스로 계셨습니다. 자존하신  분이십니다. 아무 것으로 인해서 있지 아니하고 홀로 계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보다 뛰어났고 모든 존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것 그러면  이분이 이 크심을 아는 것이 그분이 크지 안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적게 보고  헐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이분을 다같이 보면서도 이분을 돈 백원만침도  여기지 안해서 돈 백원과 이분과 관계있으면 이분을 버리고 돈 백원을 취합니다.

돈 백원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이분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버렸지 이분을 버리지 안합니다. 어떤  분은 이분으로 인해서 목숨을 버린 것은 감사 득지 해서 견딜 수 없는 감사를  하고 이분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목숨을 버려서 했지마는 그것이 부족해서  마음에 죄송하고 그 받히지 못한 불만에 대해서 가득찬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 차이가 어찌 되어 있는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접합니다. 사람도 접하고 물건도 접하고 사건도 접하는데 이 모든 것은 내가  믿는 내 주님 내가 믿는 내 주 하나님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 이분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이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느냐? 어떤걸 보아도 아  저것은 내 주님이 지은 내 주님에게 지음 받은 것이라 주님은 저것을 지으신  분이시라 자존하신 분이시라 영원 자존하신 이 하나님이 한 분이신 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해서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이 자존하신 이 하나님이 아무 것으로 말미암지 안하고 당신 그 혼자의 사랑으로  자존의 사랑으로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사랑이 아니고 자존하신 그분의  홀로의 사랑으로 자존하신 그 사랑이 자존하신 그 기쁨이 뭐 무엇 때문에  기쁘냐? 무엇으로 무엇에 피동되서 기쁨이 아니고 무엇으로 원인되 기쁜 것이  아니고 자존하신, 영원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분,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기쁨 아무것으로 인함이 아니고 자존하신  뜻 자존하신 뜻이 네 가지로 인하여서 생기진 것이 복음입니다. 이 네 가지에서  나온 것이 복음입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뜻, 영원이  자존이신 이 넷에서 나온 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복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곧 너희에게 전한 이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사람 볼 때에 아무리 세상에서 권세를 탐하는 사람 지위 탐하는  사람 별별 것 탐하는 사람 있지마는 약간의 이런 종류는 거쳤지마는 이렇게  하고도 고생하는 걸 생각지 안하고 오히려 이 복음에 자기 마음이 눌려서 무거운  짐진거와 같이 그와 같이 된 그 원인이 이 자존하신 이 넷으로 말미암아 생기진  이 복음인 것을 그분이 말로 되는 게 아니고 영감으로 본 것이 아니고 삼층천에  가 가지고 실상으로 이 사실을 우리보다 더 환하게 보니까 그분은 그런 생애를  해도 피곤치를 안 했습니다.

우리가 바은바은 이 복음 이 복음은 이 자존하신 네분으로 말미암아 이 자존하신  이 넷으로 네 분이라면 내나 한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의  속성이신데 이 자존하신 이 넷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온 복음이 시작됐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복음으로 내가 살 때에 또 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언제든지  여기에서 나온 복음을 내가 믿어야 되겠고 여기에서 나온 복음을 우리는 전해야  되겠습니다. 자존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뜻이  비로서 이 넷이 하나를 결정지운 목적이 있으니 하나를 결정지운 목적이 있으니  그 목적이 뭐이냐 그 목적이 곧 당신과 같은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교회를  세우려는 그분의 목적이 교회였습니다.

이 목적을 정한 그 목적이 있으니 그 목적이 교회입니다. 이 목적을 정하시고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 자존하신 하나님의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뜻이 이 목적을 정하시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영원한 미래의 예정을 베풀었습니다. 이 예정은 자존하신 분이 예정하셨고,  자존하신 사랑이 예정했고, 자존하신 기쁨이 예정했고, 자존하신 뜻이 목적도  정하셨고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또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다음에 이 자존하신 분이 첫째로 목적을 정했고 둘째로 목적에서  예정을 하시고 그러고 난 다음에 셋째로 모든 것을 이를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넷은 자존의 존재요 자존의 존재가 첫째 하신 일이 뭐인고 하니  목적이요, 둘째 하신 일이 무엇인고 하니 예정이요, 셋째 하신 일이 무엇인고  하니 영계나 물질계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영계는 어떻게 지었는지  그것은 나타나지 안했으나 마태복음 25장에 보면은 "이 세상을 지을 때에 같이  지었다" 하는 것이 거기에 타나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라는 이 물질계라는 이 우주는 엿세 동안에 지으셨습니다. 요새  모든 학자들이 지질학에서 저거 조브라운 조그마한 좁은 두뇌의 견해에서 이  견해를 보니까 이렇다 저 견해를 보니까 저랗다 해 가지고 몇 천만년 걸려  가지고 이것이 지금 진화해서 됐다고 그렇게 망령을 부리지마는 성경에는 엿세  동안에 지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지식이 좁은 자기 지식대로 인간 지식대로 말하는 것이지  조물주가 이것이 지으신 분이 말씀하신 그 말씀은 엿세동안 이 우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이 자존하신 이 넷이 첫째 한 일이 무엇이냐? 우리의 구원인 목적을  정했고 둘째 하신 일이 뭐이냐?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시고 이 모든 것을 창조해야 되기 때문에 모든  걸 창조하셨고, 이 세 가지 일을 하시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 세 가지를 합해  가지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예정하신 대로 이 창조한 것을 움직여서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이런 이 목적과 예정과 창조 이 세 가지  일을 하나님께서 함께 합해 가지고 조화를 맞추어서 역사해 나가십니다.

이 역사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섭리라 이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이 섭리를 가지고 이미 창조된 이것을 보존도 하고 예정한 그  순서대로 따라서 이 일을 이루어 창조된 것을 보존도 하시고 또 창조된 그것을  재료로 삼아 가지고 재창조 재창조도 하시고 이렇게 또 이거와 저거와 또 조화를  붙여서 화합을 하게도 하시고 이래 가지고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주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창세기 일장에서 부터 시작해서 나오시다가 그때는 예표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이 약속을 소망하도록 이렇게 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당신의 목적 안에서 목적 안에서 지음받은 이것에게 죽음과 생명을 알려주는 큰  순서의 이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을 떠나면 사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일차  아담의 그 타락으로 알려주시고 이차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합되면 살고  떨어지면 죽는다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제일 큰 순서로 이 일을 역사하시고, 그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이 사실을 알려주는 알려주면 영원히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과 떨어지면 죽으면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죽었으면 영원히 죽어야 되기 때문에 이 죽음은 안 안릴  수 없고, 이 죽음이라는 이 지식을 알리지 안하면 순종하는 지식을 알릴 수  없는고로 죽음이라는 지식을 알리면 이 지식을 알리는 데에는 얼마나 힘이  드느냐? 하나님이 친히 사람되어 오시 가지고 죽음을 알리는 이 지식이 학비를  당신이 죽음으로 내나야 되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죽어서 이 죽음으로 하나님을  떨어짐으로 삐뚤어지게 저질어논 이것을 다시 예수님이 그 댓가를 치르시고  거기에 회복시키 가지고, 이제 하나님에게 결합되는 것으로 영생하는 이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현재에 살고 있는 이 복음 생활은 이 자존하신 넷으로 말미암아  생기진 목적 이 목적이 우리의 구원이요, 이 목적을 이루는 그 역사가  복음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는 역사가 복음이요. 이 목적이 곧 하나님의 교회요  이러기 때문에 교회는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의 몸인 이 위치를  가지고 만물은 이 교회의 발등상이 되고, 하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고,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두뇌에 있는 것이 마치 이 수족으로  나타난 것처럼 이 하나의 그 상징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한 것인데 하나님은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이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교회를 통하여서 영계나  물질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무한한 것을 그들에게 영원히  충만시켜 주는 이것이 교회의 영원한 직책인 것입니다.

이런고로 우리가 받아 가지고 믿는 이 구원은 자존하신 이 넷에서부터 시작된 이  넷이 작용한 작용의 그 하나님의 목적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저하신 그 예정 하나님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  예정 하나님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창조하신 창조 여기에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인간에게 죽음을 택자들에게 죽음을 알려 다시 예수님의  대쇼■ㅗㄱ으로 말미암아 삶에 올라가는 옮겨가는 이 옮김을 받지 못한 자는 한  번 죽음으로 영원히 죽은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사망인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큰 문제 큰 무제 떠들어 싸도 죽음만치 큰 문제가 없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은 이 운동에 비추어 보면 한마디 범한 것이 이 이 기한이라는  그 죽음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 범한 것이 무수하게 일생을 범했으니 그 범한 것의 값이 얼마나  어떻게 크겠습니까? 인간의 말로 할 수 있습니까? 죄값은 삼사대 가지마는 의의  값은 천대까지 가는데 한마디 범한 것이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사망이 됐는데  한마디 순종의 그 의의 가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삼사의 천배가 의의 가치  아닙니까. 한마디 범함으로써 인간이 죽은 이 죽음에 그 반대인 하나님께 순종한  한 의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과 영광과 존귀와 그 가치가 어떻게 크겠습니까  이것을 바울이 삼층천에서 그 실상에 가까운 것을 보고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가  없어.

영감이 본 것보다 사도 요한이가 평소 영감보다도 특수한 영감을 받고 보니까  바울은 그 사도 요한이가 볼 때에는 아주 모든 것이 변해져 버렸어. 자기 본  것은 아주 허무한 것이고 껍데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서 본 것은 더 기가 막힙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분이 이  복음을 위해서 죽자껀 해도 피곤치 아니했고 오히려 부족해서 갈급해서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하지 못해 고민스러웠지 자기한테 대해서 마음에 만족감이나  오히려 지나치게 했다 하는 이런 망령된 생각은 그에게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도가 어떤 도인데 거기다 놓으시고 우리들을 연단받는 이 세상에서 아무래도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는 이 모든 죄 문제를 주님이 다 담당했습니다. 죄  문제를 당신이 담당해 주지 안했다면은 우리는 서지를 못합니다. 당신이 대신  의를 베풀어 가지고 이 의를 우리에게 입혀줬기 때문에 이 영광스러운 존귀한 분  앞에 의의 옷을 입고 이 공로를 입고 서지 그러면 그분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지은 받은 것 중에 한 존재인데 주님의 공로로 인해서 그분과  원수된 이것을 다 해결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되서 아버지 밤중에도  아버지 부르면 만유주 하나님이 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 대주재  이분이 만왕의 왕이신 이분이 밤중에도 아버지라고 부르면 대답하고 바쁠 때도  들에서도 혼자 있어도 어떤 급한 일에도 우리가 진정 마음을 가지고 당신에게  의논할 때는 당신이 대해서 서로 의논해서 우리와 더불어 함께 협조해 주십니다.

이 복음의 근원이 어데서 왔으며 유례가 어떻게 왔으며 우리가 살 때에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우리를 이 복음에 합당한 자를 만들기 위해서 복음에  합당한 자라니 자존하신 하나님에게 대해서 합당한 자 자존하신 사랑에 대해서  자존하신 기쁨에 대해서 자존하신 그 뜻에 대해서 자존하신 목적으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구비해 놓으신 이 복음에 합당한 자로 지식하고  합당한 자로 변화되서 합당한 자가 되어서 여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에 마땅한  자로 이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연단시킬려고 당신의 섭리로서 이런  현실로 바꾸어주고 저런 현실로 바꾸어 주고 우리 현실을 자꾸 교체해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인도하실 때에 어떤 현실을 닥쳤든지 우리는 복음을 받은 복음의  사람입니다. 어떤 현실을 닥쳤든지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은 거기에 자존하신  하나님과 자존하신 사랑과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뜻 자존하신 목적 아니  자존하신 분이 정하신 목적 자존하신 분이 정하신 예정 자존하신 분이 창조한  창조 이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아는 것이 이것이 의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믿음이 이것을 의로 정했습니다. 믿음이 의로 정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의입니다. 이렇게 인정하면 인정하는  것만치 그의 생애는 따라가고 그의 생애가 따라가면 그 자체가 성화되는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지 이것도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별별스런 요새는 신문지에 별별 소리가 들집니다. 또  세상에서는 뭐 이 역사의 미래라 하고 미래에 이런 말 저런 말 이런 것이 있지  않겠나 추상하는 그 보는 것도 별별 것이 들려지고 보여지고 접촉합니다. 올  때에 이 모든 것을 내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지으신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주님이 지으신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의 그 실상의 자격은 그에게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이제까지 보지못한 어떤 일이 우리 앞에서 움직여진다 할지라도 이것이  내 구원 위해서 영원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 순서가 그대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순서를 변동못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순서를 하나도 변동 못합니다.

영원 전에 내 구원을 위해서 정해놓으신 그 순서대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  순서가 변함이 없습니다. 예정대로 움직이는 이 사실 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존재 그 속에는 계시고 자존하신 하나님의 기쁨이 자존하신  하나님의 뜻이 자존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그 속에서 움직여 이루어져 가고 있는  그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큰 광대한 광대한 규모로 광대한 것을 설치해 놓으시고 이렇게  역사하시는 이 역사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구원인데, 이 구원이 이것을  간단하게 말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과 진리와 피라 이 셋을 말한 것은 이 셋은 성령은 자존하신 분이시요.

진리는 그분의 역사의 뜻이시요 예정도 다 그 진리요 이것을 우리에게 완성을  하나님이 우리 완성을 하나님이 대신 완성해 놓으시고 이것을 우리에게 실상으로  나누어서 우리의 실상이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지금  단계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그 수많은 측량못할 그 전부가 성령의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이  증거한다. 이 셋이 지금 이 복음 운동을 하고 있다. 셋인데 이 셋은 하나입니다.

요 셋이 그때는 셋이지만은 이 셋 속에는 자존하신 분에서부터 그 무궁한 예정  무궁의 그 창조 이 모든 것이 성령과 물과 피 이 세 가지 세 가지라는 이  비유컨덴 이 세 가지 관을 통해서 세 가지 관을 대롱을 통해서 무한한 것이 그리  지금 솥아 나오고 있습니다. 무한히 솟아나오고 있습니다.

이런데 이 세 가지가 이 세 가지가 합해서 하나로 솟아나오니 그게 뭐입니까? 이  세 가지가 합해서 하나로 솟아나오니 그것이 곧 구속받은 자들의 혀로 구속받은  자들이 이 입으로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고 구원 얻읍시다. 이거는 자존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뜻 이 자존한 분이 정한 목적 이 목적을 위해서 예정하신 예정  창조하신 창조 보존 섭리 모든 걸 먹이고 입히고 이와같이 운영하고 있는 모든  이 섭리 도성인신해서 우리에게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이러하고 성령과 진리와  이 공로가 합해서 역사하는 그 배경에는 무한한 배경을 가지고 무한한 배경이  합해서 이 셋으로 나타난 이 셋이 택한 자의 입술을 통해서 나옵니다. 입술을  통해 나옵니다. 한마디 말하는 것은 열방을 깨트립니다. 열방을 세웁니다.

영원히 뽑을 것 뽑아버립니다. 한번 세운 것은 영원히 섯습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말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참 내 아들 그는 육체의 아들이 없습니다. 결혼하지  안했습니다. 참 아들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하노니 내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너희에게 엄하게  말한다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서야 된다 하나님 앞에 가야 된다. 네 모든  언행심사의 행동은 그이의 심판 앞에다 심사가 되어진다. 이분 앞에 심사가  되어진다. 이분의 심사를 받고 영원히 그분 앞에 서야 된다. 이것을 두고서 엄히  명하노니 네가 기회를 얻든지 못얻든지 이 복음 전파하는 일을 네가 쉬지 마라  말세가 되어갈 수록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이 없고 자기 욕심을 따라서 멸망받을  거기에만 귀를 기울이지 생명의 복음을 듣는 자들이 없지만은 너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이 복음을 쉬지 말고 전해라. 또 네가 확신하고 네가 두려워하면서 이  복음에 합하게 사는 이 일을 해라. 내가 너희에게 마지막으로 엄하게 말한다  나는 순교의 재물이 되서 갈 때가 왔기 때문에 내가 엄하게 네게 부탁한다 네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이 복음 역사를 네가 쉬지  말아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때에 내가 복음대로 사는 예수믿는 이것이  근원이 어데며 내가 믿는 이 신앙을 위해서 모든 존재가 나 위해 지었습니다.

우리 위해 구원 위해 지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이 나라가 강하고 저 나라가  강하고 나라가 서고 깨트려지고 이렇게 되는 이 모든 것이 다 이 복음을 위해서  예정된 그대로 순서가 이루어져 나가고 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것들이 보존되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로 재창조도 되고 조화도 되고 합했다가 나뉫다가 이와같이  되어지는 여기에서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존하신 이 뜻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모든 면에 부족없이 전부를 담당하게 하시는 이 피의 역사 이  역사로 우리가 구원된 이 구원에 지극히 큰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의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알고 아는 것만치 그 사람은 이 복음에 대한 권위성과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자기는 바로 아는 것이고 또 그 사람은 바로 살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을 모르면 전부는 다 자타를 속이는 것 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데가든지 이 복음에 근원에서 부터 예정 창조 하나님의 섭리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의 공로 이로 인해서 지극히 큰 하나님의 목적인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하나님은 머리요. 교회는 몸인 이 위치를 담당할 수  있는 이것을 마련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이대로 살아야  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그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상이 없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 피조물  중심으로 악합니다. 피조물 중심으로 이렇게 전체가 홀수처럼 마구 내려가고  있습니다. 홍수처럼 내려가고 있는 거기에서 우리가 거슬려서 하늘을 향해 가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싸우지 안하면 안됩니다. 기도와 명상이 없으면 안됩니다.

양심이 없이는 보지도 못합니다. 영감이 아니면 가지를 못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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