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1980. 6. 28. () 새벽

 

본문: 요한복음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선지자선교회

(기도) 이 시간을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영원히 지내가 버리는 현실에서 영원한 존재의 불변과 영생에 속한 이 일을 이루어 받게하시는 이 지극히 비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영원한 주의 목적을 이루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는 주로 인하여 시작되었고 주로 인하여서만 들을 수 있고 알고, 깨달을 수 있고, 주님으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짐을 확신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여기에 추호도 관련을 가질 수가 없음을 압니다.

주님 모든 것을 홀로 하신 모든 이것을 가지고 더욱 영원히 홀로 하신 것을 나타내서 영광과 찬미를 받으려 하시는 주의 영영하심을 찬양하며 소망합니다. 이 시간에도 피로 값주고 산 저희들이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믿음을 이루는 성신의 감화 감동으로 우리들을 사로잡아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라나이다. 아멘.

 

다 기록하려면 천하에 두어도 기록한 책을 둘 수가 없을 만큼 그만큼 양이 많은 내용을 간단한 육십육 권에다가 포함시켜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단순히 문자 그대로만 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문자로 된 이 성경 도리 안에는 살아계시는 완전하신 영원하신 주권 주재자이신 성령님이 내주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서 천하에 두어도 둘 곳이 없을 만한 그 내용을 이 말씀을 믿는 자에게 그 믿음을 통해서 알려주시고 또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버뜩 일어나 주면 됐지 그럴 때 일어나 주면 옆에 사람이 일어나 주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가기 쉽지)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노트에 기록했으니까 그것만 있으면 된다 그것도 어느 정도 유익이 있습니다. 그보다도 녹음기에다가 녹음했으니까 더 정확하니 이만하면 됐다 그것도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녹음 보담은 필기가 낫고 필기보담 필기 않고 자기가 진리와 영감과 능력을 자기 전 인격 받아서 그 시간에 자기의 전부가 이 진리에게 성령님에게 붙들리는 것이 제일 낫습니다.

그러기에 노트에 기록된 것이나 자기가 녹음을 한 것이나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외우려는 그런 것보다도 이것이 과연 이 성경 안에 내포되어 있느냐, 이 성경 안에 포함돼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을 밝히 구별해 가지고 곧 성경 본문대로에 그것은 아니라. 본문은 아니지마는 성경을 그대로 나타낸 성경이라. 정확무오한 이 성경은 아니지마는 성경이 그대로 나타난, 인간을 통해서 다시 나타난 성경 말씀이니 정확무오라고는 할 수는 없지마는 보니까 내나 그 말씀이 성경이다. 성경과 하나인 이것을 깨닫고 성경을 잡아야 합니다.

성경을 잡아서 아 이 말씀은 아무래도 성경에는 이 말씀이 아닌데 이 말씀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씀이 아닌데 이리 됐을 때에는 그것은 다시 생각해서 이 본문은 아니지마는 이 본문은 아니지마는 이 성경 말씀이라는 육십육 권 이 범위 내에는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없다 이 본문에 있다 이것을 확정을 지워서 성경으로 확정지울 때에 자신도 주관적인 자신도 이는 성경 말씀이니 성경을 어기는 것이 하나님 어기는 것이요, 성경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 이렇게 자기에게 주관적으로도 어떤 사람에 말보다 성경 말씀을 믿는 그것이 영감으로 이렇게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 생겨지고, 또 주관보다 무한히 큰 그 객관 역사가 자기가 성경 말씀인 것을 믿어야 무한하신 하나님이 거게 역사하실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성경 말씀으로 믿지 아니하고 어떤 유력한 사람의 말로 믿을 때에는 무한하신 성령님이 그게 역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관 면이 다르고 객관 면이 다르고 주객 면이 다 다른 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해야 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한다는 이 성경 말씀은 세상 지식만을 말하는 거 아닙니다. 거게 세상 지식이라는 구별이 없고 세상 지식이나 하나님의 주신 이 성경 지식이나 다 전체를 포함해 가지고 지식이라 말한 것입니다. 세상 지식도 사람을 교만케 하고 하나님의 지식도 사람을 교만케 한다.

세상 지식은 그거는 있는 것 만큼 그 만드는 것은 교만 외에는 아무것도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교만도 만들 수가 있지마는 겸손과 능력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지식만 받으면 반드시 그에게는 교만이 되지 교만의 결과를 맺지 그가 실상 있는 그런 신앙은 되지를 못합니다. 구원은 못 이룹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과 영감과 능력을 같이 받아서 이 말씀은 다만 외부에 싼 테두리요 영감과 능력은 그 냉용으로 그러면 자기가 받은 것은 영감이요 자기가 받은 것은 능력이라. 그 받은 말씀이 능력과 영감이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자타의 구원을 이루는 영감과 능력 없는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교만을 이룹니다.

제 딴에는 잘한다 하는데 객관 역사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에게 따라서 동행하는 역사가 없고 또 자기 아닌 다른 그 듣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도 역사가 없습니다.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왜 저는 잘한다고 하는데 왜 교회가 자꾸 쇠퇴해지고 교인들은 자꾸 배척을 하고 목회가 못하게 되어지고 그래도 또 세상 것만 가지고 잘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끌 수가 있습니다. (문선명)이라든지 (박태선) 이런 사람도 많은 사람들을 끌고 있습니다. 천주교도 많은 사람들을 끌고 있습니다. 유명한 교파들도 다 많은 사람들을 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세상 방편만 해도 육백육십육만 해도 사람들이 끌릴 수 있다 그말이오. 거게서 그것을 밑뿌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무엇인가 자기에게 만족이 안돼도 끌려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현실들을 주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세계적인 현실은 예수님의 재림이요. 노아 홍수 때 같은 것은 세계적인 시험이요. 또 지역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예수교의 전성 시기인데 어떤 나라에서는 큰 박해 시기가 되어져서 그 지역적으로, 한 국가적으로, 한 지방적으로 또 다른 이는 온 교인들이 다 관계 없는데 한 개인적으로 그에게 시험되는 그런 일들이 부딪힙니다. 부딪히면 그 시험에서 자기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환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신 그 현실이라는 그 현실은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을 자기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실력 없으면 낙제라. 실력 있으면 합격이라. 그 합격되고 낙제되는 것이야 그것은 시험 치르고 나면 환하이 알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 현실에서 아주 멸망이 오기 전에 현실에서 자기는 믿음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을 자타가 다 알도록 해 가지고 이것으로 경고하는 나팔입니다. 이것이 마치 군대가 자는데 그대로 자면 죽을 터인데 이제 적이 오는 그 소식을 나팔을 불어 가지고 경고시키는 것처럼 이렇게 네가 이대로 가면 멸망할 터인데 네가 믿음 없는 걸 알아야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음 없는 것을 왜 그들은 다 같은 시대적인 현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은 너와 같은 그 개인 형편을 만날 때에 다 믿음으로 통과했는데 왜 너는 통과하지 못하느냐? 너는 믿음 없는 자인 것을 네가 알아서 지금 당황해 가지고 준비를 해야 되지 믿음을 준비하지 않고 그때 믿음 써야 될 그때에 가 가지고 네가 믿음 쓰면 되지 하니 네가 인정하는 그 믿음은 네 주관적 믿음이요 실상의 믿음이 아니고 마귀가 너를 안주는 그런 믿음이기 때문에 닥치면 너는 절단난다.

열 처녀 중에 다섯 처녀가 기름을 미리 준비했던 것이 그때 밤 중에 쓰여졌지 밤 중에 그때 기름 준비는 안됐고 또 그때에 준비 안한 기름을 불 켜려고 쓸려 해봤자 안된다는 그 비유를 주신 것은 평소에 믿음을 만들어 놓은 그 믿음이 이제 그 환란 때에 밤 중에 쓰이지는 것이지 그 믿음이 그때에 쓰이지는 것이지 만들어 준비해 놓지 안한 그 믿음이 무슨 그때에 쓰여질건가.

그러면 그 믿음이 뭐인가? 그 믿음이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가 셋이 삼합된 그것이 그 기름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라 말이오. 믿음이라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 셋이 합한 것이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교회 생활입니다.

그러기에 그러면 아는 것인데 그래도 제가 믿음 없는 표가 났습니다. 표가 나면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 이것으로 끝이고 다냐 이번에는 그랬지마는 이번에는 네가 그런 이것이 경험이 되고 이것이 체험이 되니까 이 다음에는 그렇지 않도록 네가 단단히 결심해라' 그러면 자기는 완전히 패전자요. 그대로의 것을 실패라는 그것을 생각지 못하고 결심만 하면 된다고 해서 미래는 전부 결심으로서 다 그만 다 빠져 나가버립니다.

과거는 경험에 후회로 다 빠져서 아니 지나간 때 이런 후회 될 일을 했으니까 앞으로는 이렇게 잘해 보겠다. 이 과거 미래를 전부 현재에서는 결심과 후회로 다 처리해 버리고 맙니다. 그게 아무 소용 없어. 미래에 대해서 어떤 결심 해도 소용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결심이 소용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미래에 대해서 결심이 소용 있다고 그거 가지고 무엇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과거를 아무리 후회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 후회를 많이 한 가롯 유다가 멸망받은 그것을 우리에게 하나 후회만으로서는 소용 없다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후회도 소용 없고, 각오도 소용 없고, 결심도 소용 없고 다 소용없습니다. 후회 결심하는 그것이 소용이 있으려면 각오와 결심은 언제 소용있느냐? 자기 현재에는 소용있습니다. 현재, 그러면 앞으로 결심한 그것을 현재에 지금, 현재 이 시간에 써야 됩니다. 미래를 두고 결심한 그것을 현재 이 시간에 써야 되고, 과거에 후회된 그 후회를 이 시간에 써야 되지 이 시간에는 쓰지 않고 앞으로 미래에 대한 각오를 미래에 붙이고 과거에 후회를 과거로 붙여서 그 회라는 것이나 결심이라는 그것을 현재라는 요 현재에 쓰지 안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마귀란 놈이 어쩌든지 현재를 이거 벗어나게 합니다. 현재를 벗어나게 해서 지금은 이번은 이번은 그렇지마는 앞으로는 이번만 그러고 앞으로는 고거에는 그랬지마는 앞으로는 이렇게 사람들을 미혹을 시키기 때문에 그 미혹에서 실패를 합니다.

그러기에 지난밤에 증거한 거 같이 첫째 문제가 무엇이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말은 고통하지 말란 말이요. 불안하지 말란 말이요. 불행하지 말라 말이요. 모든 불행 불리 그 다 사망에 속한 거 아닙니까 사망하지 말라 말이요. 크게 말하면 자기에게 좋은 것 나쁜 것 두 가지로 와 있는데 근심하지 말라 말은 좋은 것을 네가 차지하지 말라. 아 참 나쁜 것을 차지 하지 말라 그말이오.

나쁜 것을 차지 하지 마라. 우리 믿는 사람은 나쁜 것을 안 차지할 수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나빠도 죽어도 제가 안 차지할 수가 없소. 차지를 안할 수 있고 모든 좋은 것을 불신자는 암만해 봤자 하나도 저희들은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좋은 이 참된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해서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중보자로 인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왔으면 이것을 만드는 것은 뭘로 만드느냐?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믿어라' 신성의 은총을 힘입어 가지고 이 일이 된다 그말이오. 다시 말하면 힘입어 가지고 내가 만드는가 내가 만드는 것 같지마는 내가 만드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은총을 입어 가지고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는 그 은총을 입어 하나님이 만드신 그것을 자기가 받는 것이라 그말이오. 자기는 만드는 게 아닙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합동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둘이 같이 만들어 가지고 되는 것이다 그것은 껍데기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은 그 교회가 틀리지 안했지마는 속속들이 사람이 거게 가담해 가지고 뭐 만든 것이 있느냐 하는, 있다고 하면 그건 교리적으로 틀렸습니다. 순전히 하나님 혼자 만드는 것이요. 새 것이 온 것이요 위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세계의 교리적으로 되어 있지마는 이 교리를 인정, 교리적으로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정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늘의 것만이라 위에서 새로 창조되는 것뿐이라. 하나님 혼자 하는 것뿐이라. 이제 칼빈에 그 전적 은혜라는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구원이라는 이것을 말로는 하지마는 실상은 안 믿는 그러니까 그걸 지식으로만 가졌지 칼빈이 편집했고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다 깨달아 가지고 있었고 칼빈도 깨달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받은 영감과 능력은 받지 아니하고서 지식만 가지기 때문에 교만해서 진리도 칼빈이 말한 책에 기록한 그게 아니면 다 이단으로 정죄를 하니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요.

오늘은 칼빈보다 나아야 됩니다. 칼빈 깨달음이 옳게 깨달은 것이라도 칼빈이 깨달은 그 위에 지금 또 새 움이 깨달음이 있어야 이 세대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정론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논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그 본체논이라는 것도 그것도 칼빈이 말한 그 이상의 것을 그 이상의 것을 지금 뭐 진화된 것이 아니고 임의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알려 주셔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알 필요가 없으실 때는 안 알려 주십니다. 필요가 있을 때에 알려주시니까. 지금 시대에 하나님이 그걸 토대로 하고 거게 이 시대에 알려 주시는 그것을 알아야 되지.

그런데 사람들이라는 것은 오만한 자리에 앉기가 쉽습니다. 여게도 오만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교역자들이 많습니다. 이만하면 되는데 이 금요일날 내가 오라는 거 아니요. 오지 마십시요. 그 오는 것이 네게 속으로는 기쁨이 되고 그 겉으로는 짐이 됩니다. 그 여러분들이 안 오면 내가 금요일날 마음에 그렇츰 눌리지 않을 것인데 아 전국적으로 이래 오는데 여게서 하나님의 심부름에 조그만치라도 어긋나면 어찌되느냐 이러니까 네게는 조금만치도 짐이 되고 고통이 되지 아무런 뭐 껍데기는 그렇소.

그러나 속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것을 들어 필요한 것을 많이 들어 많은 사람이 들어서 하나라도 더 들어 가지고 주의 주시는 구원을 받아 가진다면 이게 얼마나 좋은냐 속으로는 좋으면서 겉으로는 싫습니다.

이런데 무슨 여게 오는 것을 내가 내 영광이 되고 내 존귀가 되고 이래서 내 안면 보고 오고 안 오면 지목을 해서 그 사람이 목회하는데 불리하니까 부득이 오기 싫은 걸 온다 혹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내 안면 위해서 오려는 그 사람은 벌써 오만한 자리에 앉아서 암만해도 제가 있는 것만 지금 팔아 먹고 뜯어 먹고 있지 새로운 창조는 없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의 역사는 없는 줄 알아야 됩니다. 내 그런 사람들 압니다. 그것이 돌아서 올 뿐만 아니라 그건 증거고 그 전에 그래도 대략 추측할 수가 있고 또 밟히 보면 껍데기에 다 나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지금 목회하는데 무슨 목회하고 있다. 인본을 가지고 하고 있다. 사람을 인정적으로 사람을 수단과 꼬우는 것으로 기만으로 인정적으로 사람을 붙드는 그게 목회인 줄 알고 하고 있다. 저 사람은 사람 붙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그 사람이 붙들리도록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들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이 그것을 붙들도록 만든다 그러면 자기는 거기서 완전한 소개자요 중매장이요. 그 자기는 그 사람들과 차차 갈 수록 관계가 없고 하나님과와 완전 관계를 맺어지도록 그렇게 한다 그것을 다 목회를 해도 다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하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사람에게 육의 불행이 영에 행복되는 거 있고, 또 육의 행복이 영에 해로운 해가 되는 것 있고, 육의 불행이 영에 유익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오늘에 유익이 내일에 해가 되는 것도 있고 오늘에 해가 내일과 미래에는 유익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영원을 다 한테 막라해 가지고 이 시간적으로 유익이 돼야 되겠고, 또 이 공간적으로도 요 자리서만 좋고 요 자리 감옥 가운데 들어 있으면서는 고기 좋습니다. 감옥 가운데 들어 앉아서는 여러분들이 그 영화를 봤는가 몰라도 감옥 가운데 들어 앉아서는 그 ()목사가 유익입니다. 유익이지마는 고 밖에 나가서 보니까 이제 그는 하나에 그 실수한 범죄한 죄인이요 그 면류관 못 썼습니다. 그 면해집니다.

그 또 실수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그걸 다시 이용하시려고 그걸 끌어 내 가지고 회개를 시켜서 나는 지금 새로운 신앙을 신앙 걸음을 걷겠다 하는 것이 낙망에서 소망을 가지고 지금 나를 보낸 그 살려 보낸 이유가 있으니까 그 사명을 해서 내가 과거에 실수한 굴지를 매우자 하는 또 고것을 했단 말이오.

이러니까 모든 것 전체를 막라해 가지고 수지 계산이 돼야 되지 장사를 일 년 동안 했으면 사고 팔고 사고 팔고 사고 팔고 사고 팔고 또 머물고 오만 이리 다해도 섯달 그뭄날 계산할 때에 수입이 있었어야 그게 장사 잘한 것이지 그날에 아무리 많이 샀더라도 섯달 그믐날 계산해 보니까 본전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건 장사 잘못한 사람들이요.

이러니까 우리는 유익과 해로운 것을 제 조브라운 눈에서 어찌 아느냐? 내일을 내일이 뭐 있을지 없을지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내일에 대한 내일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도 모릅니다. 실은 안다는 것이 그것이 잘못 알았소.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됐다 할지라도 자기가 그걸 바로 안 것 아닙니다. 그것은 모른다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요.

생각한 대로 됐는데 안될 때 있거든 안될 때도 있고 될 때도 있고 그것이 뭐이냐? 안될 때는 왜 네 생각과 달라졌느냐? 그것은 틀렸다 될 때는 맞았다. 맞은 게 아니라 제 생각이야 이렇든지 인간들이 미래는 모든다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모르게 해놨소. 그러기 때문에 영원은 더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내게 유익이 되겠다 해가 되겠다. 분명히 내게 유익한 거와 해가 되는 게 있고, 분명히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분명히 성공이 있고 실패가 있고 두 종류가 있기는 있는데 어떤 것이 성공이며 어떤 것이 실패인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 우리는 이 시간만 살고 끝나는 것 같으면은 알 수 있지요. 있지마는 우리는 영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에 이렇게 되는 것이 내일에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 그말이오.

요셉이가 그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그게 불행입니다. 그러나 그게 미래를 두고 그게 없어서는 안됐던 미래로 이래 보면 없어서는 안될 그런 행복에 그 순서였던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런 것은 뭐이냐? 계시로 가지고 그 짧은 토막을 가지고 우리 영원한 토막을 알려주는 것 뿐입니다.

자기가 고 현실과 같은 고런 현실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이치를 가르친 것이요. 이치를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현재에는 그렇게 불행스런 것 같지마는 그것이 영원히 행복의 원인이 된 그것을 알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분명히 불행스러운 것과 행복스러운 것 둘이 있는 줄은 알지마는 어떤 게 불행스러운지 어떤 게 행복스러운지 모른다. 모르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에게 불행스러운 그 불행을 네가 받지 말아라 불행을 받지 말라. 그 말은 행복을 받으라 그말입니다.

행복을 받으라 행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받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면 행복을 받는다. 그러면 불행은 어찌 됩니까? 하나님과 나를 믿지 아니하고 어떤 인간이든지 정권이든지, 나라든지, 세력이든지, 세상 지식이든지 그런 것을 그 믿으면 너는 전체가 불행이요 행복이 없다. 네 보기에 행복 같으나 그 행복이 큰 불행의 원인이 되니까 그 행복이 행복입니까? 이런데 인간들은 어리석고 어둡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지식을 하나님은 지식으로 여기지 않고 지혜를 지혜로 인정하지 안합니다. 다 자기 꾀에 빠져서 멸망받는다 그렇게 말씀해 놨소. 그래도 사람들은 세상 지식을 하나님 지식을 그 비교할 때에 그 비중을 달 때에 비중을 달라고 달라듭니다. 그게 틀렸소. 또 비중을 달아서 그것이 오히려 높다고 그를 택합니다. 그건 죽은 자요.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이 행복과 불행이 둘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고 우리 중보자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하면 믿는 것이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 우리의 중보자가 계셨지마는 중보자가 모든 일을 해놨지마는 그분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없게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니까 그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바로 그분을 우리가 믿을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이 육십육 권의 이 도리요 영감이시다.

그러면 육십육 권의 도리인 그 진리가 하나님이란 말 아닙니다. 그 이치요. 무인격 존재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시고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 말씀과 동행하면 하나님과 동행함이요. 이 말씀을 배척하면 하나님을 배척함이요. 이 말씀을 모시고 떠나지 안하면 전능자를 모시고 떠나지 아니함이요. 또 그 안에서 역사하는 그 영감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감동의 역사기 때문에 그 영감을 영접함이 하나님 영접함이요 영감과 동행함이 하나님과 동행함이요 영감을 소멸하는 것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라.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 영감과 진리를 모시고 떠나지 안하면 하나님과 주님을 모신 것이요 영감과 진리에 복종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복종함이요 영감과 진리의 그 안에 떠나지 아니하고 살면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요 주님 안에 있는 것이라.

그러면 또 그런데 자기 속에 이 영감을 소멸하지 않고 모시면 하나님은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이라. 자기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이게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요. 이래서 실제로 자기 안에 계시고 자기 하나님 안에 있지마는 사람이 어리기 때문에 그 인식하지 못하니까 사람의 지식에 따라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이 육십육 권 도리요 또 성신의 감동이라 그거요.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이 유익하고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이렇게 자! 그러면 육체에 영에 금생에 내세에 요걸 여러분들이 똑똑히 인정해야 됩니다. 믿어지지 안하면 헛일이요. 영 육, 금생 내세 모든 면 하나님에게 그 순종하는 거, 믿는 거 요것이 를 예를 들면 요셉이가 그 보디발 집에서 자기 아내가 그렇게 할 때에 그때에 거절한 그것이 하나님을 믿으며 또 구주를 믿는 것입니다. 그게 믿는 것이요. 고 믿는 고것이 고것이 모든 불행을 다 제거하고 행복을 취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볼 때에 그로 인해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뭐이 그렇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을 믿는 일, 주님을 믿는 일 버리고 인간 생각대로, 인간 판단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했더라면 그때에 그 여자가 얼마나 좋아할 터인데 애정도 붙어 좋을 것이고 또 그뿐만 아니라 그 여자가 보디발 남편에게 요셉에 대해서 얼마나 추켜 올리고 얼마나 옹호를 했을 것이요 이러면 만 가지가 다 형통하고 좋지 나쁠 것이 없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계명을 지킴으로 인해서 하나님 믿고 주님을 믿는 그걸로 인해서 큰 불행을 당했다 말이오.

불행을 당했지마는 그 불행 그것이 요셉이의 자기의 모든 불행을 제거한 것이 결과적으로 됐고, 자기 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불행을 제거한 것이 됐고, 자기와 민족에 유익을 위하는 게 됐고 자기의 민족과 자기에게 유익을 취하는 것이 세상뿐 아니라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돼서 영 육, 금생 내세에 전대 유익이라 그말이오.

유익이지만 인간 견해는 그게 틀리지 않했는가? 그러면 다니엘이 그 다리오 왕하고 서로 늘 휠란을 하고 있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 요 믿는 고 믿음이 당장 사자 구덩이에서도 그것이 다니엘을 죽음에서 살려내는 유일한 방편이었더라 말이요. 그래 들어가 가지고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고 하고 살아 나오니까 모든 사람들의 어두운 소견들이 '아이구 다니엘의 하나님이 계신다. 이분을 거슬렸다가는 큰일난다.' 그들의 그 강팍한 어두운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원하는 그 방편이었다 말이오.

아무리 하나님이 구원해서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런 순서를 통과하지 안하면 어두운 백성들을 살리는 어두운 백성들에까지 유익이 되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유익이 되는 이 범위 넓은 유익은 취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고 현실이라는 고 현실에서 첫째는 하나님을 믿으며 나를 믿는 그것이 나와 내게 속한 사람 내게 속한 소유 금생 내세 전부에게 불행스러움은 다 제거된다 유익된다 요것을 평소에 굳게 잡고 지식해가지고 있고 요것을 고 현실에서 고것을 자꾸 연습해 봐야 됩니다. 현실에서 조그만한 손해 요기 손해라도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나를 믿는 요것이 손해를 물리치는 것이고 유익을 취하는 것이다. 요렇게 요렇게 해 가지고예를 들면 지난번에 이 그 2526일날 순교자에 대한 그 테레비 본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 테레비 본 사람들 한번 손 들어 보십시요. 모두 강팍하네. 이 서부교회서는 내가 그것을 말했는데 며칠날 말했지 25일날 뭐이요. 무슨 요일이고? 수요일날 내가 설교 때 말했는데 나 오늘 저녁에 그 테레비 보겠다고 6.25 때 순교자에 대해서그 순교가 어찌 됐는고 물론 그 정확성은 없지만 성경 같으면 정확성이 없기 때문에 내 정확성을 헐뜯을 터이니까 성경 영화라면 안 됩니다. 못 봅니다. 그건 안 봐야 됩니다. 이렇치만 요거는 사람들이 생활한 사람 생활 영화기 때문에 그게 뭐 가감이 있어 봤자 의례히 가감이 있는 것이고 하니까 봐도 된다 말이요. 내가 본다 했는데 안 보니까 여러분들이 거기 대해서는 아무 소망이나 그런 것 없어.

잡아다 놓고 그 열네 목사를 잡아다 놓고 거게서 고문과 고행에서 눈이 빠져서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팔 다리 뿔라진 사람, 허리가 뿔라진 사람, 또 허벅다리 살을 다 빼겨서 뼈가지만 남아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그럴 때라 그말이오. 고때에 믿음 없는 자 될 수도 있고 믿음 있는 자 될 수 있습니다.

고럴 때에 고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나를 믿는 거, 고때 고 믿음 그것이 참 최종적인 성공을 하게 되는 것인데 사람은 요거 아십시요. 순생이 있고 순교가 있습니다. 순생이라 말은 일생 동안 생활을 주를 위해서 죽으면서 나는 날로 죽노라 이제 자기는 죽고 주님은 자기에게 살아지는 고것이 순생 생활이면, 그 육십 년을 믿었으면 육십 년 동안 주를 위해서 죽는 생활한 고것이 순생 생활이요 고 중량이 십근이라면 마지막 죽는 고 죽음을 이제 주를 위해서 죽으면 고기 십근입니다. 언제든지 삶이 반이고 죽음이 반입니다. 그 중량이 같소.

이러기 때문에 그때에 고 믿음을 가졌으면 일생 동안 산 것만큼 큰 수입할 터인데 그때 믿음을 가지지 못했으면 일생 동안 산 그것만한 그만한 큰 손해를 단 시일에 본 거라. 그때에 고것도 현실이요. 고 현실 그 현실에 하나님 믿고 주님 믿는 거, 고 현실에 영감과 진리를 인정하고 영감과 진리에 복종하는 거, 고 현실 고 현실에 영감과 진리에 복종하는 영감대로의 사람 진리대로의 사람, 영감대로의 생각 진리대로의 생각, 영감대로의 사상 진리대로의 사상, 영감대로의 행위 진리대로의 행위, 희로애락이 영감대로의 진리대로의 되는 고것이 고때 믿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고 현실에 고 현실에 믿을 수 있는 고것은 도수가 놓은 것 뿐인데 고 현실에 믿는 것이나 지금 현실에 믿는 것이나 같은 것인데 지금 현실에 믿는 요것을 연습을 해 가지고 숙달이 돼서 고 현실에 믿는 고것이 밤중에 신랑올 때에 등불 들고 신랑 맞이 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고것 뭐 기름 준비한 고기 뭐이냐? 그 지금 현실이라는 현실에서 영감을 소멸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어기지 않고 영감과 진리에 복종하는 요 현실 현실로 걸어가는 요것이 뭐이냐? 기름 준비요. 요것이 어떤 현실이 닥쳐도 요동치 안할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들이 그 아마 지금 삼부는 없다 하는데 삼부가 앞으로 명년 네는 나올란지 모르겠습니다. 나오면 그 삼부는 또 무슨 변동이 있을런지 모를 것이요. 열두 사람 순교한 사람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 가지고 순교를 했는지, 참 부끄러운 순교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그저 뭐 어떻게 굽히는 그런 일을 다소에 했어도 그래 당한 그런 무슨 협의가 있는지그런 일이 없이 그 신 목사가 데리다 놓고 증거하듯이 '봐라 이 신 목사는 지혜가 있다. ()목사와 같이 너희들도 지혜를 써라. 이 목사는 지금 우리가 하라 하는 데로 구했기 때문에 굴복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은 보낼 것이요. 또 이 사람의 교회나 모든 것도 잘되게 옹호할 것이요. 전적으로 우리가 이 사람을 옹호해서 밀어 줄 것이다. 너희들도 다 그렇게 해라' 해도 그 열두 사람은 하나도 거기서 긍정하지 안했습니다. 수락하지 안했소.

수락하지 않고 '우리가 죽는 것은 다 헛된 것이 아니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늘나라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늘나라가 있다.' 고것을 자꾸 말했고 부활이 있다는 그런 말은 그때에 나오지를 안했어요. 고럴 때가 고럴 때가 뭐이냐?고럴 때에 그 증거하기를 '우리는 아무래도 죽을 거, 이것은 이미 죽는데 주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그 일생 동안 산 것보다 큰 수입인 순교인 큰 수입이 이 죽음을 이것을 잃지 아니하고 이 죽음이라는 큰 폐물을 이용해서 일생 동안 신앙 생활한 것보다도 중량 높은 수입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부활한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 우리가 거게서 판단될 것이다. 영원무궁이 있다. 또 우리 주님이 창조했다. 지금 이 인민군 저 사람을 우리 주님이 만들었다. 우리 주님이 저 사람을 붙들고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 시험이다. 우리 시험에 합격했다. 이 주님의 그 섭리다. 주님이 홀로 주관한 것이다. 저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저것도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자기가 그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는 것, 주님을 어떤 주님으로 믿는 것, 주님 중보로 말미암아 그렇게 됐다 말이오. 하나님이 우리와 그런 관계를 가지셨어.

이러니까 그때에 평소에 만들어 놓은 믿음이 있었으면 일생 동안 끝나는 시간인 것을 성경을 보아 아는데 일 분 일 초도 일찍 죽는 건 아닌데 마지막으로 주님과 영원한 밀접한 관계를 맺는 특수한 연애 기관이요. 이제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원한 관계를 맺는 당신도 생명보다 나를 사랑했고, 나도 생명보다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지는 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 뜨겁게 생명을 초월한 그 사랑을 가지고 싶은 그 사랑이 이루어졌고 또 자기가 어떤 데에서라도 하나님만 높이고 딴 것을 높이지 안한 그것이 실현되고 이러니까 자기의 소원하는 사랑에 도수가 이루어졌어. 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요구에 최고 요구에 응해졌어. 그 기회를 못 만났으면 마음에 소원이라도 안될 터인데 그런 기회를 만났어.

모든 것을 생각하면 바울이 빌립보 그 옥중에서 기뻐서 그만 이래 생각하니까 못 견뎌서 그만 주님을 찬양했다 말이요. '주여 감사합니다.' 고함을 질러 버렸으니까 옥문이 열러버렸단 말이요. 이것이 튀어날 터인데 그분들은 평소에 만들어 놓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제 그 고통스러운 모든 것을 믿어지지 안하니까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었단 말이요. 기쁜이 없고 그렇치마는 배반할 수 있느냐? 이래서 고통스럽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어기지 안했습니다. 보니까 기쁨의 앞면이라는 거는 없어요. 즐겁고 마 소원하고 소원해서 닥친 참 반갑고 기쁜 그런 것은 없어 보니까 그게 보이지지를 안해. 스데반이 돌조산 속에서 누렸던 그것은 보이지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 불란서 골이라는 그 거리에서 그 전도자가 형벌받는 그 전도자에 그의 기쁨이 없어. 불로 찌찌고 마구 껍데기를 벗기고 이래도 어떻게 기쁨이 충만해 가지고 그 주님에게 감사를 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 전하고 이러니까 '이놈 얼굴 이 기쁨을 없앨 수 없느냐?' 암만 해 봐야 그 기쁨이 안 없어져. 기쁨이 안 없어졌단 말이요. 기쁨이 없어지지 안하니까 마지막에는 아무래도 기쁨을 오만 형벌을 다해도 기쁨을 없앨 수 없고 기쁨에 감사에 넘치는 그 넘침을 없앨 수 없어서 마지막에는 '모가지를 끊어 보자 없어지는가' 모가지를 끊으니까 그 끝났으니까 그게 없애 버렸지. 뭐 끝나버렸지.

그게 뭐이냐?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 그거요. 그런데 그거는 평소에 만들어 놓은 믿음으로 됩니다. 그것은 기름 준비한 것 가지고 됩니다. 그때 그들이 죽자건 두려워 하면서 떨면서도 계명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배반치 안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보니까 배반치 안했는데 그거도 끝난 게 아니고 그 다음 또 장면이 있으니까 어찌 됐는지 또 몰라. 위험 하다 말이요. 위험해.

그때 결사적으로 떨고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을 순종한 고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그 순종은 그것이 믿음에 합격입니까, 믿음을 써 먹는 것입니까, 믿음을 만드는 것입니까? 어떤 어데 속했습니까? 어데 속했소? 믿음을 만드는데 속했습니다. 만드는데 속했소.

그래 가지고 그 사람들이 죽지 아니하고 뒤에 놓여졌든지 살았으면 됐을 것입니다. 살았으면 '하 그때 사자구덩이 들어가도 하나님의 능력이 사망에서 살릴 수 있었다. 죽는 것도 좋지만 그런 능력 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걸 내가 알았다. 그들이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시니까 살았다. 거게서도 하나님은 능하셨다.' 이것이 믿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런 일이 있어도 그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되지지 그런 고통이 되어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때 맺던 믿음을 써 먹는 것이요.

그런고로 믿음을 만드는 것과, 써 먹는 것과, 믿음에 합격이 되는 것 믿음의 시험에 합격이 되면 거게 효력은 뭐입니까? 하나님이 믿음 시험할 때에 그 현실은 믿음의 시험이요, 현실은 믿음을 써 먹는 것이요, 현실은 믿음을 만드는 것인데, 자 믿음에 합격이 되면 거게 유익은 뭐입니까? 이거 또 다 잊어버렸네. (병철)씨 예? 크게 해. 네 믿음을 믿음에 합격이 되면 객관 역사가 오는 것입니다. 믿음에 합격이 되면 객관 역사가 있는 것이요. 믿음에 합격됐기 때문에 그 객관의 역사가 만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 가지고 그게 하나님의 역사가 역사하실 수 있었다 그말이오.

믿음을 써 먹을 때에는 무슨 결과가 있습니까? () 무엇이고 저 ()조사 (상남)교회 믿음을 써 먹을 때에는 주관적인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평강. 믿음을 만들면 현실은 믿음을 만드는 것이요. 그거는 울면서든지 평강. 믿음을 만들면 현실은 믿음을 만드는 것이요. 그거는 울면서든지 불면서든 의심을 하면서든지 어쨌든지 영감과 진리에 복종하는 현실로 통과했으면 믿음은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고 다음 다음이 있으면 고 다음에는 고 믿음에 효력을 자기가 주관으로 느껴서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 바다 바로 옆에서 온 이스라엘은 다 밤새도록 놀래서 지금 기절하고 있는데 모세와 여호수가 갈렙은 기쁘고 즐거워서 백성들은 죽는다고 야단인데 그분들은 즐거워해서 '야 놀라지 말아라 오늘 하나님이 무슨 일 하는고 큰 솜씨 한번 바래보자.' 그들은 그때에 그 고통이 해할 수 없는 벌써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 그들은 기쁘고 즐거움이 돼서 오늘밤에 무슨 능력을 베푸는고 보자 과거에 경험이 있거든 과거에 해 보니까 그렇더란 말이오.

경험과 체험이 있는 그 믿음이기 때문에 그들은 기쁨을 누렸소. 다른 사람 다 기절하는데 그분들은 기쁘고 즐거움을 누린 그것이 무슨 효력이냐? 과거에 신앙에 경험과 체험의 효력이라 그말이오. 이미 자기가 순종했던 그 믿음을 써 먹는 그 순종했던 그 믿음에 효력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기 없었기 때문에 효력을 못받는 것이라 그말이오.

제가 이번에 이 6.25 때 순교자들을 볼 때에 믿음을 만들기는 만드는 것이지마는 그때 그분들이 그 현실에서 '주님은 이것도 창조하신 창조주다. 네가 하지마는 너도 나의 사랑하시는 주님이 내 구원 위해서 창조했다. 너는 나를 위해서 창조를 받았다. 하나님이 혼자 지금 네가 그러는 것은 네가 하는 말이 네 말이 아니고 하나님 혼자 지금 역사하는 나에게말하게 하는 것이니 껍데기는 네 말이지만 실상 주님의 말씀이다.'예수님를 내놔야 된다 할 때에 그를 건너가서 그 다음에 주님을 보시고 '주님 저는 참 그런 자입니다. 아 이제 말에서는 이럴 때에는 주님을 배반하기 쉬운 자입니다. 그렇치마는 내가 과거에는 그랬지만 주님을 배반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 그 이렇게 시험하시는 것을 제가 압니다. 주님의 말씀인 것을 내가 듣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말인 것을 내가 듣습니다.''이렇게 과거에는 비겁해서 이럴 때마다 다 주를 배반했는데 나를 이럴 때에 주님이 나에게 그 나팔을 통해서 그 마이크를 통해거 그 스피커를 통해서 그 주님이 만드신 내 구원에 필요하게 요때 쓰려고 만든 요 있는 인민군 요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깊은 사랑해 가지고 말씀하실 때에 내가 여게서 주님을 부인치 아니할 수 있는 자로 나를 길러 주신 주님 앞에 감사함을 드립니다.'이제 그러는 그 사람이 말하는 죽인다 살린다 그거는 둘째 두고 죽인다 살린다 그 이면에 주님하고 둘이 얘기 하고 있습니다. 주님하고 둘이 얘기를 주고 받고 '나를 이래까지 장성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이 이렇게 하심 감사합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내가 과거에 그랬던 것을 자복합니다. 이 후로는 내가 그렇치 아니하도록 주님이 나를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인민군을 그 사이에 두고서 실은 주님하고 자기하고 둘이 연애하고 있소. 둘이 교제하고 있소. 과거와 미래를 들추어서 의논하고 있소.

이러니까 주님 만났으니 기쁘지 즐겁지. 주님의 개별 섭리니까 그것이 주님 섭리지. 주님이 지으신 것이지. 내 구원에 필요해서 그것 만드신 것이지. 주님이 그것을 작용하시지. 그것은 내 것이지. 주님이 나를 지금 내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그것을 시험하는 것이니까 이때 시험할 때 합격을 하자. 마구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주님 사랑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고것을 나타내려는 고게 집중하니까 죽는지 사는지 그 사람이 뭐라 하는지 그런 것은 다 간곳 없다 그말이오.

이러면 그것이 스데반이 돌조산 속에서 말할 때 그거라. 이러니까 그분에게 대해서 주님 생각하고 난 다음에는 그분들 생각해서 그분들 위해서 기도할 것 그 외에는 자기의 할 일이 없어. 그게 안보였다 그말이오. 우리 아들한테 가서 뭐라 해라. 우리 가족들 한테 가서 뭐라 해라. 또 뭐 하는 그런 것 그것도 좋은 말인데 어쩌든지 우리는 그럴 때에 스데반과 같은 그 기쁨, 다니엘과 사드락 메산 아벳느고와 같은 떳떳한 그런 신앙에 그 떳떳한 신앙, 그 신앙 인격 그것을 가지고 통과하는 데는 오늘이란 현실이나 그때 현실이나 꼭같은 현실입니다.

오늘의 현실에 우리가 쉬은 것을 연습해 놓으면 요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 일 예수님을 믿는 일, 영감과 진리를 그 믿고 복종하는 일, 요것을 현실에서 연습하면 자꾸 요 현실에서는 현실에서 하나님과 주님을 믿는 일을 연습하면 고 다음 현실에도 고 다음 현실에도 고 다음 현실에도 자꾸 이러니까이제 그러니까 어떤 현실로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하는 고런 현실이나, 또 다니엘이 닥친 현실이나, 요셉이가 닥친 현실이나, 6.25 때 그들이 닥친 현실이나, 손양원 목사님이 닥친 현실이나 어떤 현실이라도 여게서 발자욱 걸어가지 거기도 한 발자욱 밖에 안 돼.

천메다 산이라도 내가 한 자욱 한 자욱 걸어 왔으면 천 메다에서 다 걸어도 나머지 한 자욱이 남았으면 얼마나 높습니까. 거게서 한 자욱 걸어가는 것도 산발치에서 한 자욱 가는 거와 같은 힘이야 늘 걸어가는 사람은 별 게 없어. 이러나 안 걸어가고 있던 사람이 천 메다 마지막 자욱이야 날라가고 올라가고 됩니까. 인간은 불가능하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라는 요 현재 요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해. 현재는 천하보다 내가 있는 요 자리, 요 자리는 천하에 넓은 이 우주보다 내겐 요게 가치 있습니다. 요것은 우주보다 내게 더 가치 있고 필요 있소. 요 현 시간이라는 요 현재라는 요 시간, 요 시간은 내가 수십 년을 산다 할지라도 그 수십 년보다 요 시간이 중요합니다.

어떨 때는 돈도 만나고, 어데 사람도 만나고, 어데 짐승도 만나고, 어떨 때는 공산주의도 만나고 그런데 무슨 종류를 만나든지 요 종류는 내 몸 밖에 수많은 종류가 있지마는 요 종류가 나에게 제일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인민군이 닥쳐 가지고 그들을 죽이려고 협박하고 구타하고 고문하고 하는 고 사람이 천하에 자기 가족들도 있고, 친구도 있고, 신앙 동지도 많이 있지마는 자기에게는 고 사람이 필요합니다. 고 사람이 필요하요. 자기를 고문 고행하는 고 사람이 자기 가족보다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고 사람이 내게 필요해. 고 사람에게 자기 요긴한 것이 있어. 이러기 때문에 고기 없으면 안 돼.

이러기 때문에 요 현실에 필요성을 깨닫고 우리가 평생에 작은 현실에서 고요한 요 현실에서 자기가 이것을 만들어 나가야 되는 것이지, 신앙을 만들지 않고 자기는 한 자욱씩 걸어가면 약자라도 천 메다 올라갈 터인데 한 걸음씩 걸어가지 않고 내가 마지막 가도 훌떡 뛰면 되어지지. 이래 가지고 제가 천 메다를 한 자욱에 올라가려 하는 그런 어리석은 자와 같은 자입니다. 현실에서 믿음을 만들지 않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으면 그때하지 안 됩니다. 어리석지를 말아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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