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참 도인


선지자선교회 1984년 1월 3일 교역자회

 

본문 : 요 12:47-50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좋고 읽는 것이 좋지마는 실행에  옮겨지지 안하면 도로 그것은 화가 됩니다.

 사람에게 배우라고 하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에게 배우라' 그 말씀이  어디 있지요? 디모데후서에 있습니까? 녜, 디모데후서 3장14절,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배우고 확신한데 거하라, 그러면 사람에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배우는 데에는 확신이 그 뒤를 따라야 그것이 배운 것이 되지 사람에게  배운 것만으로 확신이 뒤따르지 안하면 배운 것이 못 됩니다.

 또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하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여기는 또 사람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이랬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사람에게 배우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또 요한  1서 2장에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가르쳐도 그저 문자적으로 언어적으로 그렇게 가르칠 따름이지, 그 배운  것이 그 사람에게 구원이 되기까지 가르칠 능력은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가르치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감동과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따라서 다소 다르기는 다르지마는 그  가르침을 받을 때에 성신의 감화가 오는 것이나 권능이 오는 것이나 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있는 것보다 배우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다릅니다. 예언하는 영이 예언하는 자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준비를 잘못해 가지고 있으면 그 예언이 그 사람의 준비 불충분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그 효력을 많이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르치고 배우는  데에는 그 가르치는 사람에치도 있지마는 배우는 사람에게 더욱 많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배운다고 해도 그 본인에게 구원이 되기까지 배우는  데에는 본인의 준비와 노력 여하에 있는 양이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가르침 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생각 할때에  그렇게 빗나기가 쉽겠습니다. 그러면, 교역자와 그 교인 사이에는 이대로  해석한다면 가르치는 교역자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느냐 교인에게 책임이 전부  있지 않느냐 또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나, 또 성경에 말하기를 교인과  교역자 그 관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 그렇게 말씀을 했고, 그 교역자가 참  목자의 음성을 낸다면 양들은 늘고, 다른 이의 음성을 내면 양들은 도망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사람에게 배우는 이것이 그 뒤에 확신이 따라야 효력이 있지  확신이 안 따르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확신이라 하는 것은 두 가지 믿음인데.

배운 그 지식에 대해서 확실히 인정하고 확인, 확신, 단행 그것을 다 합해서  확신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행함이 빠지면 그 믿음은 온전치 못한 믿음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왜  하는고 하니, 우리가 사람에게 배울 정도의 성경은 다 배운 것은 아니지마는  배울 만침 배웠고 여기에 확신이 딿지 않기 때문에 지금 확신을 마련하는 이것이  우리 할일이지, 자꾸 배우기만 하니까? 그게 그만 지식만 돼져 가지고서 도리어  교만이라는 결과를 맺게 되고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심판의 그 자, 심판자만  마련하는 일이 되어 집니다.

 제가 여덟시 반부텀 시작해서 모두 다 간증하는 소리를 오층에서 들었는데 참  이번에 그 교역자회 모이는 이 이런 뜻이 이제 오늘 여덟시 반부터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실효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역자들 가운데에 아주  핍절한 중요한 요소였지 말씀을 배우는 그것은 필요가, 나는 없다고 나는 단언을  짓습니다. 왜? 그것은 도리야, 나태하게 만들고 사람을 교만케 만들고 지금 배운  그 지식을 확신만 가지면 뭐 거기에서 순교도 할 수 있고 순생도 할 수 있고  어떤 처지에서라도 기쁘고 즐거움으로 만족히 그 신앙을 할 수 있을 만한 그런  많은 진리를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 간증하는 것을 듣고 저도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모두 소망이 있다. 모두  생명의 씨가 움이 트고 또 이 교회의 부흥의 움이 트니까? 그저 과거는 움틀  준비를 한 기간으로 보고 움만 트면 앞으로 좋은 그 성장이 나오리라 그렇게  생각됩니다.

 ○○○목사님이말하는 그 간증도 꼭 그만 맞습니다. 딴 거 하나도 섞이지  안하고 바로 됐습니다. 그만 그 깨달음을 놓지 아니하고 그것인 줄 알고 그 병만  고치면 뭐 다입니다.

 또 ○○조사님이 이제는 호별 방문하겠다 하고서 여기에 와 가지고 까지 라도  어제 그 숫자를 채웠고 오늘도 시간있는 대로 기어코라도 그 숫자를 채우겠다  그것을 빼앗기지 안하면 그만 됩니다. 그거 빼앗기지 안하면 그 하나가 한  줄기가 살아남으로써 모든 줄기가 살아납니다. 사방이 병든 몸도 오늘 일부가  소생되면 그로 인해서 차차 차차 전신이 다 소생이 되어서 건강 회복이 되는  것처럼 그러합니다.

 그 ○○○조사님 간증한 대로 다 실력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가면은 게을 하다고  다 꾸중듣지, 몰라서 실력이 없어서 못했다 하는 그런 사람은, 나는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해 나가면서 그라다가 또  병나면 좀 들어누웠다가 또 하고 이래서 이 충성이 있어야 될 것인데 참 충성이  너무 빈약한 셈입니다.

 그리고 일은 젊을 때 하지 늙으면 일 못 합니다. 지금 제가 조금만 하면 이거  힘이 없이 딱 풀어져서 못하고 이래도 새벽기도 나와서 설교하고 나면 내가 그만  춥고 이렇다고서 일어서 나가면 나 나가고 난 다음에 십분 만이면 싹 다 가  버립니다. 하나도 없이 다 가 버리요. 또 내가 거기에서 그렇지마는 이 모두다  교인들이 양떼들이 보니 이거 할 수 없다, 내가 여기에서 앉았어도 앉았어야  되겠다 하고서 참 삼십분 앉았으면 삼십 분 앉았다가 봐도 또 교인들이 거의  그대로 있습니다. 사십 분 앉았다가 가면 그 중에는 개인의 사정이 있어서  가지마는 그때까지 또 앉아서 뭘 중얼 거립니다. 아 이러니까?, 나이가 많아서  송장 같은 늙은 영감타구도 그 본을 보고서 지금 따라갈라고 이라는데 하물며  젊은 교역자들이 하는 일이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열 시간 기도한다고 하면은 교인들이 한 다섯 시간  하면은 참 성적 좋습니다. 그리 안하면 열 시간 하므로 그것이 기도할 생각을  가지는 자도 있습니다. 그만 아홉 시간 하면은 그만 기도할 생각을 안 가집니다.

이렇게 의로 이끄는 일은 이렇게 힘이 들고, 또 타락은 정 반대입니다. 교역자가  하나 잘못됐으면 밑에 그 교인은 십 배나 잘못되고도 마음에 만족과 위로를  받습니다.

 이러니까? 그저 오늘 간증한 대로 이런 불충 저런 불충 모두다 우리가  불충이지, 몰라서 못 하는 것 아니고 힘없어 못 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 못하는 것 아니고 다 하나님께도 연결됐고 진리도 배웠고 힘도 있고  이러니까? 요는 그저 게을입니다.

 ○○목사님이 하나씩 빼다 보니까? 빗짜루 한 개 두개 빠지다 보면. 스르르  흘러 버리고 없다 하는 것 비유한 거와같이 이 하나씩 둘씩 그만 빼 버리면 그만  없어집니다. 하나씩 둘씩 자꾸 이렇게 뭘 해서 시작해서 움직이면 그래도 무엇이  돼 갑니다.

 그전번에 여기 서부 교회에서 기도회를 작정하고서 시작해서, 그때 얼마  동안이나 나갔던가 그 뉘가, 기간이 얼마나 계속했던가 뉘가 기억하고 있습니까?  뭐꼬, ○총무 기억하고 있어? 일년 정도 계속을 했던가 그랬습니다. 그때 우리  서부 교회에 교인들이, 주일학교도 모두 많이 올라갔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작정되기를 주일학교는 그래도 한 만 오천은 아무리 좁은 지역이라도 나올 수  있겠다, 중간반은 사천은 나올 수 있겠다, 장년반은 오천은 나올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곧 될 것같이 마음에 믿어 졌습니다. 그라고 교인은 그때  많이 불었습니다.

 그때도 그 기도하는데 뭐 끌기는 늙은 영감타구가 제일 앞서 끌었습니다 젊은  사람 저거가 끌지를 안해요. 이러니까?, 내가 지금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이래도 내가 목회자로 있는한 주님이, 이 전부 이십대 이 젊은 사람들을 끌 수  있어야 이것 되어지지, 끄는 대로만 따라오지 앞서 가지는 안하니까? 이 끄는  힘을 줘야 되지 안 주면 어짭니까?, 내가 지금 요새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못 나올 때는 못 나와도.

 그리고 그만 그 뒤에 내가, 그렇게 기도를 계속하다가 그만 병이났었습니다.

병이 나가지고 병나자 그만 제가 그 뭐 안 하니까? 그만 기도회 시시하이 그만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이번에 또 새로 시작하게 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압니다. 새로 해야 되겠다는 그런 영감을 받고서 시작을 했는데 그 시작한  후부터 장년반이나 유년반이 지금 수는 그렇게 많이 올라가든 안해도 벌써  올라갈 수 있도록 내부 치료가 다 되어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는, 건강하면  성장해 가는 그것이 앞으로 과정이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이래 나가면  장년반이 제일 앞서 목표 달성이 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제 마음에 듭니다.

우리가 이래 나가다가 이 교역자회를 아무래도 이걸 해야 되지 이래가지고 안  되겠다 해서 또 교역자회 하기로 그렇게 우리가 모두다 그 공동심이 되어서  작정을 하고 이렇게 이거 시작한 이것이 반드시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이 되고  오늘 그 간증한 데에서 '아 이것이 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반드시 우리  각자들이 다 소생함을 받겠다' 모두 보니까? 84년도라는, 신년도라는 그것보다도  이제 교역자회라는 이것을 시작한 데에 다 마음이 새로워지고 거기에서 새로운  욕망을 가지게 되는 이것이 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는 일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지식으로 받고 내가 확신할라고 애를  쓸 때에 그때에 영감이 와 가지고 우리를도와 줍니다. 이래서, 그것이 몇  장입니까?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씀, 8장 몇절입니까? 녜? 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주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말은 주의 말씀대로 실행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산다는 말은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거하면'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이 말로밖에는 우리가  해석을 못 하겠습니다.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러면 참 제자가 된다는  건 제자되면 제자되지 참 제자 된다 말은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 아닙니까? '참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같이 된다는 그 말 아니겠습니까?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믿는 것이 진리를 알아야, 그대로 행하는 것이  믿는 것인데 또 진리를 무슨 진리입니까? 주의 말씀이 진리지. 주의 말씀대로  실행하면 사람 변화되고 변화되면 처음에 그 말씀대로 한 말씀을 새로 다시 재차  알게 된다는 것이니까? 지식으로만 아니라 벌써 지식과 권능과 함께 다 자기가  가진다는 말이지요. '진리를 알지니' '내 말에 거하면' 내 말이 진리 아닙니까?  주님 말씀이 진리 아닙니까? 그 진리대로 행했는데 그라고 나니까? 사람  변화되고 사람 변화되고 나니까? 그 말씀을 새로 압니다. '진리를 알지니'  그러면,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 아는 것은 처음에 자기가 주의 말씀 듣고 행한  그도 진리요 또 그 뒤에 진리인데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그 진리와 그  진리대로 행하므로 자신이 변화돼 가지고 새로 깨달아 가진 그 진리와는 다른  진리 아닙니까? 내나 그 진리라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이래 깨달은 그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이 자유는 중생된 새  사람의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진리와 성령으로 난 자 그자의 자유는 진리대로  사는 것이 그 자의 자유요 또 성령 대로 사는 것이 그자의 자유 아니겠습니까?  '이 진리대로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이렇게 행해 가지고서 깨달아진 그  진리에는 진리와 능력과 성신의 감화와 그 생명 역사를 가진 그 진리로 자기가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영접하게 됐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인해서 자유하게  된다.

 그러면 자유하는 것은, 그것은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것이 우리 소원이요  소원되는 것이 자유니까? 이 자유는 옛사람은 죽는 일이요 진리와 성령대로  중생된 새 사람의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니까? 참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서는, 그래서, 금요일날 오는 것을 그만  중단하고 우리가 교역자들이 모여 가지고서 우리 스스로가 흠이 뭐인지 그 흠도  배우고 또 미비점도 갖추고 또 치료도 받고 서로 서로 좋은 점을 본받아서 따라  가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는 그때 교회가  부흥이 됐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해서 우리가 모두 이것을 생각해  가지고 이렇게 모이게 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말이 들리기를, 그런 말이 들립니다. 네가 뭐 많은 다른 외인을  접하지 못하지마는서도 우리 동역자들께 듣는 대로는, 모든 교회는 다 점점 그  쇠퇴해지는데 총공회 저 사람들 교회는 어디든지 전부 부흥이 된다 그런 말이  나고, 그것이 무슨 이유겠느냐 그만 교역자가 집에서 얼른 할 일 하고 난 다음에  다 기도실로 가 가지고서 기도실에, 그들이 외부적으로 알기는 기도실에 가  가지고 성경 보고 기도하니까?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느냐 이래 가지고서 다 모두  이 기도실 만들어야 되고 기도실로 올라 가야 되겠다 하는 그 말이 아마 일반  교계에 공통적으로 다 그렇게 떠돌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자 우리의 깜박거리는, 그만 등대 빛이 다 꺼져 버리니까? 그 사람들이  내나 그렇다 하고 소문듣고 그런가 보니까? 그만 꺼져 버렸으니까? 그 사람들도  처음에 소리듣고 움직이던 것이 다 그만 좌절돼 버리고 말았고. 그래서 이  교계에 기도실 짓는다는 것이 그것이 그만 차차 흐려져서 그것이 성립 안된 줄  압니다.

 만일 우리가 그때에 참 교계에서 말한 대로 저 사람들은 어짜든지 교회가  부흥이 된다 그 기도실에 가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다 일반 교계에서 그렇게 본  대로 우리가 기도하고 교회가 부흥되고 했으면 그○○○씨가 뭐 사이비 종교  거석한다 하면서 암만 산간에 있는 우리 기도실을 뜯을라 해 봤자 하나님께서  뜯지 못하구로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까짓 것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못 뜯게  하면 못 뜯는 것이라.

 그런데 저도 다른데 내가 기도실에는 보지를 못했지마는서도 요 부산에 있는 그  기도실은 바로 그 밑에 제가 기도실이 있기 때문에 봤습니다. 제가 위에 하다가  그때는 너무 좀 힘이 가빠서 밑에 내려와서 기도실 해 놓고서 이래 보면 그 하는  것이 하나도 감동되지 아니하고 마음에 '아, 저 교역자들이 저렇게 힘을 쓰고  저러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는 그런 기도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안하고 그저 마음에 처음에는 염려되고 걱정되다가 나중에는 밉상스러운  것뿐이지 '저거 저 따위로 저러니 기도실 뜯어 버리고 없애 버리야 되지' 그 내  마음에 수십번 나오고 난 다음에 그 기도실이 뜯어졌습니다.

 그때 여기 ○○○목사님도 그 기도실에 다녔고 ○○목사님도 거기 다녔고 또  누가 거기 다녔지요? ○조사님 다녔고 또 ○○○목사님 다녔고 또 그런데  ○○○목사님은 뭐 똘똘 놀지 그 목사님은 거기 하나도 참석 안합니다. 꼭 그는  혼자 그렇게 하고 있고 거기에, 파에 어울리지 안했습니다. 이 세 분 여기  ○○○목사님 저기 있네.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  여기 왔지요. 어디 계십니까? 녜 와서 거기 있는데 의논하는 것이 순전히 귀신  이야기만 합니다. 전부 마귀 운동만 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 의논해서  결의했다는 것이, 한다는 것이 전부 마귀 노름이요. 그래 놓으니 그때  ○○○목사님도 사고 방식이 그렇츰 나는 다를 줄 몰랐어. 정반대라 옳은 것의  정 반대라 사람이 귀신들어가 놓으면 그렇제 정반대 되어져요. 별 사람  없습니다.

 내가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그래 옳은 것의 정반대로 그래 생각하노  참 걱정을 많이 했었는 그 뒤에 차차 차차 그래 가지고서 이제 그것이 다 깨지고  헐어지고 헐어지고 이래 가지고 지금은 바른 정신이 돌아와서 저 순천에서 그 두  교회를 합할 때 그때는 좀 무엇을 해볼 생각을 가지고 이랬는데 그릇이 접시라.

합해 가지고서 교인 최고로 올라간 것이얼마 올라갔지? 백칠 명 올라가니까?  '아이구' 그만 물이 찰찰 찰찰 넘어서 암만 부어야 안 찹니다. 그만 그릇이  그뿐이라. 그릇을 키우십시오. 뭐 누가 병나고 병나고 그것이 아니라 그까짓 거  지엽인데 지엽이 병난다고 무슨 상관이 있어. 원 교역자에게 있지. 그만 뭐 사모  병난다고 뭐 교역자에게 그것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거 오진이요. 진찰을  잘못했어.

 그만 만족한데 거기에서 그랬어.

 아 어떤 사람은 교인 한 칠 팔 명, 한 사오십 명 되면 그것으로서 만족 한다  그거요. 만족하고 벌써 게을부터 부리고 그거 전부 게을이라. 그때에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가 부흥이 되고 이래 나갔더라면은 ○○○씨가 암만 해도 그 모든  미신 그런 데만 깨트렸지 뭐 기도실은 하나님이 시켜서 자꾸 짓도록 그래 했을  것이고. 아마 우리 전국 교회에 기도실이 다 있었을 것이고, 막 주력을 했을  첫이고. 교회가 부흥이 크게 됐을 터인데 그만 그래 놓으니까? 기도실 지을라고  하다가. 그 사람들도 뭐 기도실 지어야 안 가는 같던데 뭐 가면 가 가지고서 뭐  누워서 자러 가는 곳이고 거기 가서, 거기 가서 뭐 실컨 저거 끼리 모여서  이야기나 하고 그 뭐 아무 뭐 효력도 없고 또 교회도 지금 자꾸 내려가는 것  같더라고 이래 놓으니까? 그래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이 바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그 위력인지  모릅니다. 한 교회가 바로 된다는 건 얼마나 큰 위력인지 모릅니다. 우리  총공회도 우리 서부 교회가 이래 차차차 올라가서, 장년반도 올라가고 중간반도  올라가고 유년반도 올라가고 이라면 여러분들에게 좀 힘이 될 터인데 이것이  내려오니까?, 장년반 한 칠팔 인 거느리고 있어도 삼천 명 되는 교인이 안  올라가는 그것이나 칠팔 인에서 더 떨어지지 안 하는 그것이나 꼭 동등으로  봅니다. 그 유비지가 있는 것이요. 큰 것 만치, 현존이 크면 큰 것 만침  유지비가 들고 유지비 들고 난 다음에 여유가 있어야 그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명 유지비와 억만 명 유지비와 그 같겠습니까? 그 값이? 억만금  유지비를 다 없애 버리고 한 명에다 붙여 보이소. 그 뭐 얼마나 늘어트리고  자라지겠는가?  우리가 빛을 참 나타내는 조그만한 산골에 앉아서 목회하는 조그만한 교회  목회에서 세계 교회를 부흥을 시킬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와 반대로  침체되게 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이래서,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보다도 우리가 이제 이 확신이 뒤를 따라야  되겠는데 좀 알아야 되겠는데 껍데기로 이러니까? 수박 겉할 듯이 줄줄 이렇게  속에 뜻을 아무것도 모른다 이거요.

 제가 공과를 만들기를, 공과 만들라고 하면은 월요일부터 한 번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합니다. 고민 고민 이래 가지고서 참 어짜면 화요일날 그리 안하면  수요일날 뭐 오후 한 두시쯤이나 되면 그때 가서 겨우 될까 이래 봐도 줄줄  외우면 다요. 외우면 그것으로 다라. 내가 이 주일학교나 중간반이나 이래  가르치는 것을 봐도 그 중에는 ○목사님이 좀 낫고, ○목사님도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과를 가르칠 때에 그 중에 제일 낫게  깨달아요. 부장들은 첫주일 가르치면 조금 낫고 둘째 주일 가면 조금 낫고 그저  속에 내용이 뭐인지를 자기네들이 한번도 명상하지 안했고 또 한 번도 그  감각적으로도 체험하지를 안했다 그 말이요. 그 현실 닥치기 전에는 자기는  앉아서 감각적으로 그런 환경도 자기가 만들어 닥쳐 보고 그때에 어떤 애로가  있다는 것을 느껴보고 이래야 돼지는데 그 연습 많이 해 놓으면 실지 닥칠  때에는 뭐 놀며 가고 웃으며 가지 될 것이 뭐 있습니까? 그것이 명상인데.

 그래서 엊저녁에도 세 가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에 대한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그 무한한 광대한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우리의 지극히 큰 소망에 대한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이것도 자기가 명상을 해서 그 자기와 이 진리와 생각이  같고 뜻이 같고 소원이 같고 소욕이 같고 성질이 같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그  행위가 어떻게 안 따라. 그 행위가 어떻게 안 같을 수가 있습니까? 아는 거와  행위가 같고 그라다 보면 그 사람도 꼭 같은 사람이지 별 것 뭐 있습니까? 그  사람이 그래 돼 놨는데 그걸 어떻게 변질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큰 환난  당할 때에는 그렇게 된 지식 가지고는 안 되고 그렇게 된 행위 가지고도 안 되고  그렇게 사람이 됐어야 그 사람은 일시에 변질 못 시킵니다. 못 합니다.

 요한복음 10장한번 펴 봅시다. 10장 1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의 우리에 들어가야 자기 양을  볼수도 있고 알기도 하지 인도하는 것이 전부 음부의 친구 지옥 친구 그것만  우루루루 갖다 해 놓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와서 말하기를, '이 장로를 내가 세워 놨는데 내가 세워 놓은  장로한테 지금 내가 쫓겨납니다.' 내가 말하기를, '목사님이 장로를 세웠으면  그렇지 않을 것인데, 목사도 그 껍데기가 목사지 속에 목사가 아니고, 그 장로도  껍데기가 장로지 속은 장로가 아닙니다. 다 제일 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처음에 장로 장립 시킨 그 일이나 지금 쫓겨나고 쫓아내는 일이나 같은 일이요.

같은 사람이 같은 일하고 있는 것이요'  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그러면,  자기 양을 아니까? 자기 양을 인도한 후에.

 사람이 아주 껍데기적으로라도 얼마 동안 있으면 심방 갈 때가 없습니다.

교역자가 나서야 심방갈 데가 없소. 아무 심방갈 데가 없어. 전도 갈 데도 없고  갈데가 없어. 갈 데는 테레비나 보고 뭐 그런데나 갈까 아무 심방 갈데도 없고  전도 갈 데도 없고. 이거 밤은 열 시가 다 되어가도 '이제 안 가면 안 되는데'  가야 될 데가 어떻게 많은지. 안 가면 안될데가 어떻게 많은지. 그런데 어째  되면 그만 나서 봐야 갈 데가 없습니다. 갈 데도 없고 갈 필요성도 없고 안 가면  안 될 그런 뭐 딱한 사정도 없고.

 그러기에, 자기 양을 안다는 것이, 자기 양을 안다는 것이 그것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야 자기 양을 알고 또 양도 자기 목자를 안다 했어. 아니까? 딱  들어붙지. 그러니까? 양이 도망치지 안하고 따라오고, 다른 사람은 가 봤자  도망친다 했는데. 그러면, 자기 양이 뭐이겠습니까? 자기 양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자기 양이 뭐이지요?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그 양들이 그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이 타인은 누구며  자기 목자는 누구입니까? 따라오고 도망치는 그 양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이랬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그러면  '문으로 들어온다' 문으로 들어오는데, 문으로 들어 오는데 그 문지기가 안 열어  주면 문으로 못 들어옵니다. 문지기가 그를 위해서 문을 열어 준다고  이랬습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그 일에 이 문지기가 뭐이겠습니까? 문지기가 무슨  사람이겠소 뭐이겠소? 문지기가 성령님 아닙니까? 내 피와 살을 먹는다 하는  것은 그 힘 힘이 소생되는 그 면으로 가르쳐 말한 것이고 여기 양의 우리에  문이라는 것은 이라면 전체가 새로와 지는 것을 가리켜서 새 것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야 새사람이 됩니다. 새사람. 새사람이라야  새사람하고 맞지 새 사람에게 옛사람 설교를 하면은 옛사람이 듣습니까?  정반대인데.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먼저 온 자라 하니까?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 온 모든 도리 아닙니까? 절도요 강도라. 그러면 그것이 다 무슨  사람이겠습니까? 절도와 강도라, 타락한 사람이지. 원죄와 본죄로 살고 있는  사람이지. 영은 죽었고 육과 마음 그 두 가지 면으로 사는 육체로 사는  사람이지. 육체로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까?  정반대고 원수요 해만 끼치지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중생된 사람 새 사람에게 무슨 들리겠습니까?  이 양들은 예수님의 피공로로 중생한 사람들이 양 아니겠습니까?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우리 구원도 요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됩니다. 요 문으로 안 들어가면 구원 안됩니다. 암만 제가  뭐 몇십 년 목사 노릇하고 부흥회를 하고 돌아다녀도 문으로 안 들어가면  헛일입니다. 완전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질되고 변색되고 변형되어 변종되고  완전히 변해진 걸 말하지 않습니까? '들어가면 구원 얻고' 그래야 자기 구원도  얻지.

 우리 표준은 그냥 성경보고 절절 신앙생활하면 구원이 될 줄 알아도 안 됩니다.

사데 교회 보니까?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라' 왜 죽었느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 행위에 온전한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온전한 것을  하나도 못 봤으니까? 예수님의 대속으로 산 자라는 말뿐이지 이름뿐이지 실상  심신의 성화된 것 변화된 것은 없다 그 말이요. 죽을 것이 썩을 것이 혈육의  것이 이것이 신령한 것으로. 죽을것이 죽지 안할 것으로,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된 것은 없다 그  말이요. 변화는 온전한 행위를 통해서만 변화된다는. 요 표준이 이래야 될  터인데 그냥 제가 하루종일 얼마든지 죄악을 짓고 이렇게 이래 살면서도 이름만  가져도 이거 가지고서 구원이 된다는 이 구원, 건설 구원의 표준이 거기에  틀렸습니다. 건설구원의 표준이.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꼴이 이것이 뭐이겠습니까?  양들에게 먹이는 양식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아니면 그 말하는 그것을 중생된  자는 그걸 먹지를 못합니다. 중생된 자는 뭔 말인지 모릅니다. 왜? 원수의  말이기 때문에, 도적질하는 말이요 죽일라하는 말이요 절도 강도의 말이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러기에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 그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의 화친의 우리가 아는 대로 참 죽어 새것이 되어 예수님의 것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것이, 예수님의 것이, 완전히 예수님의 것이 보는 것.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것은 내가 죽은 것처럼 예수님의 것이 디 되고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 이것이 중생, 죽음이 살아난, 하나님 향하여 사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완전히 옛것은 죽어 버리고 완전히 새것된 것. 예수님이라는 그  예수님이라는 그 이 대속의 이 공로라는 이 도가지 속에서-그걸 문이라  가르쳤는데-이 도가지 속에서 완전히 변질. 변색. 변성. 변욕. 변명, 완전히  변해져서, 완전히 변해진 그것이 될 때에 그것이 될라고 할 때에 문지기가 문  열어 줘. 문지기는 그 성령의 도우심 아닙니까? 우리가 그거는 체험을 잘 다하고  있는 줄 압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그런 토막이 가다가 혹 일주일에 한번. 어떨  때는 한 달에 한번, 며칠 만에 한번, 차차 그라면 몇 시간 만에 한번, 분명히  내가 바로 서서 예수님으로 완전히 변화돼서 될라고. 예수님으로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완전히 변화가 될라고 할 때에 그때 영감이 와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도 알 그 영감이 와 가지고 역사할 때에 그때에 눈이 밝아진 것도  알고. 또 욕망이 달라진 것도 알고, 사람이 달라진 것도 알고, 그 우리가 누리는  평강과 기쁨과 담력도 달라진 것도 알고,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걸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라다가 이 현실이라는 현실에 그만, 이 현상에 그만 거기에 끌려  가지고서 빼앗기고 잃어 버리고, 그걸 가리켜서 자기를 잃어 버린 걸 말합니다.

자기를 잃어 버린 것. 무엇 때문에 잃어 버리느냐? 세상 때문에 잃어 버렸다  말이요. 아 모처럼 그 사람 찾아 가지고서 지금 그 사람이 자기인데-찾아 가지고  이라다 보니까? 그만 이 세상의 무엇 때문에 잃어 버렸다 말이요. 잃어 버려  가지고서 그 사람으로 살면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변화되는 것 확실히  자기가 보는데, 참 더러운 것이 그 영화로운 것으로 이와같이 그 즉시 변질되고  변화되는 것을 보는데 그만 이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의 미혹으로 인해서 다  빼앗겨 버리니까? 자기 잃어 버린 사람이라.

 이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땅 위에 무슨 소욕을 가지고서 네가  네것될 것. 현실에서 네 것될 것, 네 기능 되고 너 되고 네 살이 되고 네 피가  되고 네 기능이 되고 네 지혜가 되고 네 실력이 되는 너될 것을 현실에서,  세상에 뭘 탐하다가 다 빼앗겼느냐! 빼앗겨 버리고 나니까? 온 천하를 얻어도  그만 가치가 못 하다. 네가 무엇 때문에 널 잃어버려 널 잃어 버렸느냐! 자기를  잃던지, 자기를 잃어 버린 것. 어디서 잃어 버렸느냐? 이 세상 때문에 잃어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아 온 세상모든 것보다 내가 크다, 천하를 다  얻는 것보다도 현실에서 나 만드는 것이 그것이 크다.' 우리가 거기서만 꼴도  얻는다. 자기 구원도 된다. 거기에 통과한 그 사람이 양의 목자다. 통과한 그  사람에게 주의 양은 딿는다. 주의 양이 알기 때문에 가라 해도 안 간다  따라온다. 또 그가 문으로 통과한 그가 가면 줄줄 따라온다. 또 그가 자기 양을  알기 때문에 불러낼 수 있다. 불러 내고는 앞서가면 뒤에 따라 온다. 양도 알고  목자도 알고 서로 알기 때문에, 교인들도 압니다. 교역자가 이것이 참 문으로  들어와서 참 목자가 돼 가지고 있을 때와 목자가 아닌 때를 그 양들도 압니다.

양이 껍데기 사람 아는 것은 또 껍데기를 좋아하요. 양들도 껍데기가 있어서  껍데기는 껍데기 좋아하고 알맹이는 알맹이를 좋아합니다.

 이러니까?, 문으로 통과할라고 해도 그게 바로 되면 문지기가 문열어 준다  이랬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이 일은 영감의 도움이 아니면 변화를 못 받습니다.

 이러니까?. 지난밤에 ○○목사님 설교할 때에 옛사람 새사람 말했는데 그  순전히 옛사람이 설교하고 옛사람이 목회하고 옛사람이 분발하고 그러니까?,  그거는 참으로 주의 양인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 자기도 모르게,  새사람을 제가 압니까? 하나님이 객관 역사로 중생시키기 때문에 중생된 거는  본인도 모릅니다. 중생된 거는 저거도 모르고 평생 중생된 사람이 중생된 자기  영을 못 만나보고 죽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된 영이기 때문에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온 그 목자는 어째 오다 가다 만나도 만나면 통해지는  것이 알아진다 그 말이요 또 안다 그거요.

 이러니까?, 양을 아는 것도 이끄는 것도 양식을 먹이는 것도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도 그 양을 구원하는 것도 이것도 전부 이 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그  문은, 내가 양의 우리의 문이라 똑똑히 말하지 안했습니까? 예수님을 통과한 것,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는데, 주님의 그 크심과 사랑의 광대하심과  소망의 지극히 크심 이 전부 셋은 합해서 하나입니다. 셋은 합해서 하나.

이러니까?, 자기가 법적으로 따져서 그 법적으로 따져서 그 법적인 절차를  말해서 중생됐으면 그것은 다시 범죄하지 못한다 하는 것이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생된 그것도 죄짓는다 하는 그것은 법리적인 해석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순서의 절차가 자기에게 느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야 뭐  쉽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내 죽으심이라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같이, 내게 죽을 것이 같이 나는 안 죽었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대신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 죽음이 동참해서 내가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죽은  것으로 살라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이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된다 말이요.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내가 다시 새로 부활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은 다시 새로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을  만났을 때에, 이 사람으로 살 때에 양들은 알고 따를 수가 있고 이 사람 되는  그것이, 성령의 도우심 문지기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일이 안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같이 죽는 것 예수님의 살으심에 같이 사는 것 예수님이 사죄를  주셨으니 우리는 그 죄에 대해서. 나는 형벌 안 받았지마는서도, 예수님이  대신해 죽어서 법적 해결은 했지마는서도 그 현실적인 죄의 형은 내가 느끼고  깨달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 죄의 형이 얼마나 중하며 얼마나 크며 얼마나  길며 얼마나 깊으며 얼마나 오래 동안 가는지 그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받은  은혜에 따라서 각각 범위도 다르겠고 양도 다르겠고 그 또 질도 조금 차차  다르겠습니다. 점점 양질로 화해지지 않겠습니까?  이러니까?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 교역자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깊이 가서  좀 생각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절도요 강도가 내가 아닌가 그 절도와  강도라는 그 면을 발견해 가지고서 절도와 강도인 그것을 지금 뽑을라고 애를 쓸  때에 그때에 절도가 되지 아니하고 목자가 되어야 하는 그 입장에 서서 지금  노력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럴 때에 성령은 우리에게 오고 그때에 참으로  양떼에게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을 자기가 꼴을 받을 것이고 그때 깨달을 것이고  그때 깨달은 그 깨달음을 중생된 영에게 줄 때에 중생된 영이 먹고 강건해지면은  제 마음도 지배하고 제 몸도 지배 해 가지고서 차차 심신의 행위도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문지기가  문열어 준다 했으니까? 문지기가 무엇인지, 나는 절도와 강도가 아닌지….

절도와 강도는 양을 해치기만 하고 도적질만 하고 상우기만 하지 하나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하자면 내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이 돼 가지고  하지 안하면 전부 하나님의 교회를 해치는 것뿐이지 하나도 도움은 못 줍니다.

또 중생된 새사람이 돼 가지고 꼴을 얻지 중생된 새사람이 아니며 독초를  가지고서 양을 죽이는 것만 가지지 양을 먹일 수 있는 그 꼴을 얻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에 그때 꼴 얻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참  몇층어리로 얼마나 외식인지 모릅니다. 이것을 알아서 깨달아서 하나라도 배운  데에 확신이 뒤따라 가지고 이래 뭐 변화가 돼져야 되지 전부 말하는 것이  앵무새 한가지요, 저 먼저 지난 금요일날 밤을 ○○○ 목사님이 설교했소.

○○○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내가 보니까? 순전히 앵무새 또 저 녹음기,  녹음기보다도 뭘 배워 가지고 흉내 내는 그 꼭 앵무새 말 사람 흉내 내는 것  앵무새지 그 속에 영감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옛사람이 지금 설교하고  있다 말이요. 그러면 그 교회 절단납니다 그냥 노트 보고서 그래 가지고서 뭐  외우고 하는 그게 아니야. 그거는 남 속이기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으로 들어가서 문화(門化) 되어야 뒤니다. 문으로 통과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뭐이요? 그라다 보면 자기가 어디 있습니까? 벌써 죽은 지 오래 돼  버렸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통과해서 그 공로를 정말로 입어서 그 공로를  입은 자로, 그 공로의 대속받은 자면 자기는 죽은 지가 오래 됐는데, 벌써  매장한 지가 오래 됐는데, 그것을 죽이고 또 한층 더 들어가고 또 한층 더  들어가고 벌써 죽은 것은 저 밑에인데 그것이 언제 발견되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가 이 구원의 표준이 참,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다른데 보니 성품도 다해서 이 다해서 주의 도를 지켜야  그래야 영생이 된다 했는데 다 한다는 것, 이것다 하는데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다 하는 것인지 그 명상해 봤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다 하는  것인지. 이거 하나만 명상해도 전부 거짓 부리요. 아 다 했으면 딴데 없지 다  했으면 딴데 쓸 것이 없이 다 했으면 거기 다 했는데 딴데 어데 남을 것이 뭐  있습니까? 남았으면 다한 것이 아니지.

 그 말씀이나- 이거 다 건설 구원에 관한 말씀인데- 그 말씀이나 죽도록  충성해야, 충성하라 그래야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하는 그 말씀이나 행위가  온전해야 건설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는 그 말씀이나 꼭 같은 말 아닙니까?  우리가, 이 표준을 너무도 제 마음대로 정해 가지고서 이렇게 헐하게 싸게 쉽게  이래 정해 놨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해지고 방종해집니다. 왜? 자기 속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속습니까? '스스로 속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사람이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아  하나님의 보응은 너무 무섭습니다. 자기 행위를 자기가 먹지 아무도 먹을 사람  없습니다. 다른 것이 가져 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의 상당한 그  보응이 자기에게 오는데 이것이 고칠 수 있는 기회에 오면 하지마는서도 온다는  것은 벌써 고칠 수 있는 기회는 다 지나간 후에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  후회는 소용이 없어. 후회는 앞 세우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모든 선배들이  말했고 이 선지 사도들이 말 했지마는서도 우리가 참 강팍해서 안 들려집니다.

 우리가 어떤 그 현실을 보면,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이 십지마는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데에는 얼마나 힘이 드는지. 우리가 그 현실을 만났을 때에 이런 현실을  닥쳤으니, 이 사람을 닥쳤으니. 이 물건을 닥쳤으니, 이 일을 닥쳤으니 이걸  어떻게 하나. 이것을 성경대로 해야 될 것 아니냐 하면 이것을 흠없이 잘한 줄로  그렇게 압니다. 자기에게 이런 무엇이 와서 턱 부딪혔는데 부딪힌 그걸 거머쥐고  이것을 성경 말씀대로 해야 되겠다 하면 그만하면 다 된 줄로 알지마는서도  그러면 자기에게 닥치는 그대로 했으면 지금 자기가, 자기라는 것이 첫째로  누구에게 끌렸습니까? 자기의 움직임의, 움직임의 그 원동은 뭐입니까? 원동은  그 무엇입니까? 원동은 뭐이지요? ○ 목사님. 예? 아니야 지금 말귀를 못  알아듣고 있어. 그 말귀를 못 알아듣고 있다 말이요.

 우리가 지금 사람 하나 안 만났습니까?, 물건 하나 안 만났습니까?, 또무슨  사건을 만나지 안했습니까? 만났을 때에 그러면 만났을 때에 아 이것이 내게  닥쳤으니까?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여기에 대해서 성경대로 할라면 어떻게  하느냐 성경대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성경대로 할라고 생각을  하면 자기가 일차적으로 무엇에게 피동됐습니까? 닥친 그것에게 일단 피동된 것  아닙니까? 그 믿음이 아니라 그 말이요. 일단 거기 피동 됐으면. 우리는 자꾸  그렇게 살기 쉽다 말이요. 그럴 때에, 자 끌리기는 내나 그놈한테 끌렸는데  그놈이 날 지금 인도자인데, 끌려 가지고서 거기에 대해서 제 지식으로 상대하는  것 있겠고 또 제 욕심으로 상대하는 것 있겠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상대하는  것 그런 방편이지, 방편이지 끄는 자는 그 자라 그 말이요. 일차적으로는 거게  피동이 됐다 그 말이요. 그리 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보는 것으로 움직이지 말고  믿음으로 행해라' 그러면 뭐이 닥쳤든지 하나님에게 나는 연결돼 가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라는 그대로 내가 그 닥친 그것을 그대로 하는 것이지  닥친 그걸 하나님이 거석할 때에 만나게도 하고 집어 던지라 하기도 하고 대답  하지 말라하기도 하고 그것이, 그것에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따라서 내가 피동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야 왔든지 가든지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한 거기에 피동해 가지고서 그것을 접하는 그것이, 그걸 접하든지  안 접하든지 하는 그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는 세밀해서. 아 이 세상의 과학이라 하는 것도, 그  물리라 하는 것도 호리가 틀리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틀려지는 것입니까? 이런데  우리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세밀한 것인데 그만  이것을 뚤뚤 뭉쳐서 이래 가지고서 우리가 하기 때문에 암만 말해야 저는 제대로  듣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 말을 천인이 있어도 천인이 제대로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구원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과 하나님의 사랑의 그  무한한 광대하심과 또 우리에게 지극히, 큰 소망이 셋이 합해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이 셋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되겠고 이 셋에 대한 행함이  있어야 되겠고 이 셋에 대한 이 셋대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셋이, 이 셋이 나를 변화시켜서 이 셋에게 변화를 받는다 그  말이요. 그것이 믿음으로 된 것이라. 이 셋이 나를 변화해서. 그 크심이 나를  변화해서 그 크심이 내게 이 지식을 넣어준, 그 크심이 넣어준 지식이라. 그  조심이 내게 넣어준 지식이요 그 크심이 내기에게 움직이게 하는 그 움직임이요.

그 크심이 내게 대해서 알게하고 또 움직이게 하고 그라다 보니까? 그만 그  크심이 들어서 내가 자연히 그만 변질이 됐다 말이요. 변질이 되고 변화가 됐어.

내가 그 큼을 보고서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 이 종교들입니다. 이건 다  주관종교요. 우리 기독교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 크심이 들어서 나를 변화시켜.

나는 변화를 받은 것뿐이요. 내가 능동이 아니고 그분에게 피동되어서 된 것,  근본이 우리가 중생된 것이 그렇게 됐습니다. 중생된 것이 그래 됐고 지금 이  성화의 구원도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서 우인적 요소가 함께 동참해  가지고서 같이 협동해서 하는 것 뿐이지 되는 것은 전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 그것이요. 이것이 기독교요.

 기독교와 이종교와는 판이하게 다르요. 이종교는 그것이 철학입니다.

이종교들은 철학이요. 철학은 어떤 것이 철학이냐 철학이라 하는 것은 자기  주관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서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연구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철학이라 합니다. 철학은 전부 자기의 주관 역사요. 주관역사. 그러면 이종교는  다 주관역사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계시 종교라 그 말은 하나님이 이렇게  알려 주니까? 알려줌을 받았소. 내가 주체가 되어 가지고서 뭐 연구해서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그런고로, 요 믿음의 지식이라 믿음의 행위라 믿음의 사람이라 요것도 자기가  껍데기로 알 것이 아니라 깊이 깊이 느끼면 이 하나에서도 자기는 참 뭐  겸손해지지 안할 수 없고, 어데 그렇게 큰 벼락을 맞았는데 어데 살아 가지고  나머지기가 나아가지고서 뭐 저를 나타내고 뭐 제 위신을 생각하고 그렇게 절  생각한 그 사람은 아직까지 참 감감해서 천리 만리 멉니다.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지난번 그 탄일 때는 제가 그것을 증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늘에서부터 이래 오신 것은 우리에게 세 가지 멸망을 구출하실라고 오셨다. 세  가지 멸망의 하나는 고난이다. 고난 하면 죽음만도 못한 것이라고 보지만 죽음은  고난에 다 속한 것입니다. 하나는 고난의 멸망이요. 하나는 가난의 멸망이다.

사람이 껍데기로 하면 가난 그것이 무슨 큰 것이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가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도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가난. 뭐 좀 돈이 적으면 가난하다 그것은 다 외부에 아주 많이  나가서 껍데기 껍데기 많이 나온 껍데기 중에 껍데기 그런 것들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 일면을 말하면은 하나 예를 들면은 예수님께서 보인 거와 같이,  홍포입은 부자는 그 사람은 거기에 자기가 사모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물이라는  그 요소 하나 없습니다. 그거 하나 없으니까? 그렇츰 갈급했고 암만 요구해야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지옥은 어떤 것이 지옥인가? 하나님 은혜 필요없다. 하나님 은혜를  배은했다 말이요. 배은 배은해서 하나님 은혜 필요없다 내 힘으로 살지 뭐  내것만 하면 되지. 그 사람에게 너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도 필요 없고 네것으로  사니까? 내것은 다 찾을 것이고 내것 없는 데에서 살아라 하는 그것이  지옥입니다. 하나님 은혜 하나도 없는 것이 지옥이요. 고거 시작의 외부의  하나를 그 불 가운데 있어서 수분이 제일 필요한데 물 한방울 요구해도 없다  하는 그것이 내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없는 것도 하나님 은혜 없다는 이걸 가난이라 말하니까?, 이  가난의 범위가 어디까지며 어디까지 속하며 어디까지 강하며 어디까지 어려우냐  하는 그것도 자기가 많은 명상 가운데서 느껴 찾은 데서, 그거 하나만 찾아도  사람이 변화돼 버려. 뭐 자기가 나타날 것이 뭐 있소 있기를. 어디라고 지금  자기를 나타내며 어디라고 자기가 뭐 키우며 뭐 반감이며 복수며 뭐 그런 것이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그저 당신의 긍휼밖에는 긍휼을 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되는 것입니다.

 그 멸망 중에 하나는 절망이라. 절망. 아무 희망없는 것. 그 절망 하면 그것도  사람들이 별로이 느끼지를 못한다 말이요. 그 사람이, 보면, 어떤 사람 보니까?  결혼할라고 자꾸 했다가 그 뭐 남자 꽉 찼는 남자 그 남자 아니면 남자  없는가-고게만 잠깐 동안 절망만 되어도 보니까? 바짝 바짝 마릅디다. 그 사람이  정신적 절망이나 또 자기의 가정적 절망이나 자녀 절망이나 자기의 무슨 면의 그  절망이라 하는 것은 사망보다도 더 강한 것입니다. 사망과 절망이 있을 때에  사람들이 사망으로 달아난 것은 사망보다 절망이 더 기막히기 때문에 절망을  피해서 가는 것이 그게 다 자살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자기가 공부해 가지고서 그 대학 시험에 입학못 했다고  해가지고 자살하는 학생들 신문에 그래 났데요. 그거 다 그런거 다 절망인데  그런 절망이야 일부적인 절망이 아니겠소? 그거는 착각적인 절망이 아니겠소?  그것도 절망은 절망이라. 궁극적인 이 절망. 이것이 우리의 세 가지 멸망인데 이  세 가지 멸망을 구출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오셨다.

 그러면 이 세 가지 멸망이라 하는 껍데기 껍데기 백 껍데기도 천 껍데기도  넘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번에 모두다 보니까? 불우 이웃 돕겠다고서 어떤  사람은 뭐 이억 칠천만 원까지도 냈습니다. 한 사람이. 이랬는데 그런 것도  그것이 가난을 돕겠다 하는 것인데 그들은 모르니까? 그것으로 그들의 의가  되겠습니다. 불신자로서는 그들이 의요 그것으로 참 족한 일이겠지마는 우리는  그게 아니라.

 가난 속에 가난의 원인이 있으니 가난의 원인이 뭐입니까? 가난의 원인이  뭐이지요? 녜, 가난의 원인 하나님에게 연결돼서 그분에게 피동되는, 그분에게  피동되어서 그분에게 순종되는 요거 없어지는 것이 가난의 원인이다. 이것도  안다는 것이 그렇게 들으면 쉽지마는서도 그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이것도 좀 궁구해서 알아야 되요. 이래 놓으니까? 이 가치를 몰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이 그날 그날 우리에게 뭐  세포가 얼마 산다더라. 아 이제 여기 물으면 알겠구만. ○장로님, 우리 세포가  얼마나 수명이 깁니까? 얼마나, 제일 긴 것이. 얼마나 됩니까? 세포 수명이. 네.

사십 일이랍니다. 사십 일이 되면은 그거는 죽어 버리고 세포 다 죽어 버리고 딴  세포 새 세포가 나오고 나오고 자꾸 이래 하는 것이 몸에서 얻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하나심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꾸 그때 그때 얻어 가지고서 우리가 유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없는 것이 하나님에게 지음받은 이것이, 이 모든 요소.

백도 천도 넘는 이 모든 요소가 그때 그때 하나님에게 자꾸 얻어 가지고서  우리가 유지하고 자라고 또 보존도 되고 수많은 면으로, 보존면으로도 얻어  가지고 보존되고 성장도 그러하고 이런 것인데 그 하나님에게 얻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 연결 되어서 하나님에게 피동 순종 하나님을 따라 순종하는 그  순종이라는 그 꼭대기를 통해 가지고서만 우리에게 당신의 것이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온다 그 말이요. 이러니까?. 이런데 그것이 끊어졌소. 그 끊어진 것을  연결 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 가운데에 무슨  대속입니까? 그것이 칭의의 대속입니다. 칭의의 대속 모든 고난의 대속이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고 제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이 세 가지 중  그것이 우리에게 고난의 원인입니다. 그걸 정리하기 전에는 아무리 임시 뭘 줘서  고난을 면해 봤자, 그 고난에는 정신적 고난도 있겠고 자기의 또 그 연구적인  고난 사업적인 고난 행위적인 고난 자기의 계획적인 고난 자기의 모든 그  전진적인 고난 별 고난이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 고난의 원인은 죄인데 죄를  해결할라고 와서 사죄를 주셨지요. 자기가 모든 절망의 원인은 절망의 원인은.

그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을 인해서 소망 있습니다.

우리 소망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 하나님 내 하나님 삼아  놓으면 영원토록 계속해서 자꾸 새것이 무진장으로 와. 하나님은 우리 소망의  전부요. 이런데, 하나님을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과 딱, 하나님의 원수가 돼  버렸으니까? 이 전연히 몰라 그렇지 소망이라는 그것이 지금 자꾸, 있던 소망이  자꾸 절망화 되어져가는 것이 인간의 세상 살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 사람은 제 딴에는 무슨 소욕을 이루었다 하지마는서도 하나 하나  점점 그 소망이 끊어져서 절망으로 완전 절망 끝났을 때가 죽음의 그  시간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 연결을 시켜 줘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에서 구출 할라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어디  까지인가,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는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거기에서부터 사랑의 넓이가 거기서부터 거기도 가서 있습니다. 목적을 정하심  또 우리를 사랑함으로 예정하심. 창조하심 보존하심. 섭리하심, 주권적으로  개별적으로 섭리하심, 십자가에 대속하심. 모든 예정 창조를 우리 대속을 위해서  운영해 주심 성령과 진리와 피가 보증이 되심 이것이 다 주님의 사랑이요 그  사랑의 넓이가 얼마 어디까지 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측량 못합니다. 우리가  가는 하늘나라에 억만 년, 예를 들면은 억만 년 가야 처음으로 초면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억만 넌을 가야 처음으로 만나는 것도 있을 것이라 말이요. 억만  년을 가야 처음으로 만나는 것도 있어. 억만 년을 가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나는  처음으로 만났는데 벌써 주님의 사랑은 그와 나와 벌써 화목의 이 공로를 설정해  놓고 길을 닦아서 그와 나와는 화목이 되어서, 화목이 되어서 그는 나를  기다렸고 나는 그들을 몰랐지마는서도 나는 그를 반가워하고 이렇게 모든  존재에서 그 넓이도 깊이도 높이도 길이도 측량 못 해요. 이것을 명상하는  가운데에서 사람이 감사도 나오고 커지기도 하고 장성해지기도 하고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요동치 못하는 그런 사람으로 점점 화해져 나가는 것입니다.

 ○교는 자기가 암만 생각해 봤자 큰 것이 없다 그 말이요. 암만 생각해 봤자  인간밖에는 연구할 거 없어요. ○교는, ○교와 이종교는 인간뿐입니다. 인간이  넓어 봤자 인간 넓이 깊어 봤자 인간 깊이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넓이가  하나님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좀 한적한 시간을 가지고서 깊이 명상하는 시간이되어서 참  이 생명의 도를 점점 알아가는 가운데에서 자라가야 되겠고 자라가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광대해지고 담대해져가고 그러면 우리가 조브라움이 없습니다. 이  성경에는 극단으로 조브라진 그런데 대해서 말한 것이 있습니다마는서도 그런  것은, 뭐, 그런 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상관이 없어. 이 세 가지 그 멸망과 구원.

그러면, 절망이 소망으로 바꾸어지고 고난이 평강으로 바꾸어지고- 평강이면,  거기에는 생명까지 다 포함된 것입니다. 가난이 부요요, 가난이 부요면 얼마나  부요한가? 하나님의 충만이 다 내것 되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부요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멸망이 우리에게, 세 가지 종류라는 이 멸망이 우리에게 몇  면으로 오느냐? 몇 면 몇 각도로 오느냐 몇 면으로 오느냐? 그래서 그것을 제가  간단하게 생각해서 다섯 각도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물질 각면 물질면 물질로 인하여서 가난 오는것 물질로 인하여서 고난  오는 것 물질로 인해서 절망이 오는 것, 물질이 주는 절망도 상당히 큽니다.

물질 그걸로 인해서 우리는, 물질은 세상에서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은 영원히 우리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 그 모든 인격 존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 그 밖의 것은 전부 물질인데 그 모든 거와 관계를  영원히 가집니다. 그것으로 인한 가난 그것으로 인한 고난 그것으로 인한 절망.

우리는 우리의 활동적으로, 활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말하면, 우리가.

사역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사역면의 가난 사역면의 고난 사역면의 절망, 사역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절망이요 고난이요 가난이라 그 말이요. 우리의  신체면으로 우리의 마음면이라면 마음은 수백 종도 더 되지 않습니까? 정신 또  감정감각 또 기억성 뭐 이성 양심 그 종류가 수많은 것이 있지 일겠습니까?  그것들이 다 가난의 참 불행을 당하는 것 고난의 불행을 당하는 것 절망의  불행을 당하는 것 그런걸 우리가 자꾸 이렇게 느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정신적 절망은 얼마나 범위가 넓으냐 감정적 절망은 얼마나 그러냐 욕심의  절망은 얼마나 그러냐,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이렇게 명상해서 이 우주가 크다  하지마는 이래 돌아다녀 본 사람우주 그 까짓 거야 얼마 안 됩니다. 우주 그거  보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넓은 세계가 우리 정신이 세계요. 우리 마음의  세계입니다. 그보다 큰 것이 우리의 영계요. 무한히 큰 것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아무리 돌아다녀도 끝이 없어. 전부가, 여기 가도 무한이요 저기  가도 무한이라. 그분의 사랑이 무한이라.

 그 다음에 우리의 영면이 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 하나를 이 성경 말씀에서 그 다음에는 우리 양심에서  양심이라는 것은 맑은 마음이라 그 말이요. 어두운 마음, 먹장 같은 어두운  마음은 어떤 것이 어두운 마음이냐? 먹장갈이 어두운 마음은 그것은 그만  이세상에 있는 땅의 것만 생각해 버리면 깜깜 어두운 마음 돼 버립니다.

땅에다가 소망을 두면 그만 그 마음이 캄캄 어두워져 버리요. 또, 어데 치우쳐서  자기가 명예나 지위나 지식이나 무슨 기능이나 무슨 행락이나 무엇이 어떤 그게  딱 찔렸으면 그만 그 마음은 화인을 딱 맞아서 아주 둔탁해져 버립니다.

고것밖에 몰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러니까? 그 마음이 물질만 보는  사람은 물질만 보지 딴 거는 하나도 도덕이나 예의나 체면 그런거는 하나도 못  봅니다.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서도 이제 인간을 보고 도덕을 보고 예의를 보고 체면을  보고 의리를 보고 자꾸 이런 것을 이렇게 자꾸 인제 보면 우리 마음이 조금  맑아집니다. 깨끗하게 맑아집니다. 맑아지지마는서도 빛은 없어. 거기에서  비로소 하늘나라를 생각하고 하늘나라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빛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그 어두운데 빠지지 안할 수 있는 광명의 마음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보물이 있는 곳은 네 마음도 있다, 그러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그  마음이 밝아진다 그것을 가르쳐서 네 마음도 있다. 네 눈이 흐리면 온 몸이  어두운 것처럼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얼마나 어둡겠느냐 하는 그것을 마음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그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만 소망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좋게 할라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할라고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나님의 뜻 대로만 하나님만 소망하고 하나님만 상대하면 우리 마음은  넓어지고 길게 보고 길게 보고 넓게 보고 또 정확히 보고 하나도 구부러짐이  없이 흠이나 점이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그런 광명한 빛의 그 마음의 눈이 되게  됩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아무래도 좀 명상하는 시간이 많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자꾸, 운동이 좋지마는서도 운동만 해도 안 먹으면 그 사람 나중에 기진해  자빠지고 또 운동 안하고 자꾸 음식만 먹어도 안 되지 안해요? 또 그 사람이  밥먹고 운동하고 밥먹고 운동하고 그라면 그 두뇌가 바보가 되어서 아무  발달이나 아무 진보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요소를 구비하게 이리저리 해  가지고서 되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성경도 읽어야 되겠고 심방도 해야 되겠고  전도도 해야 되겠고 기도도 해야 되겠고 또 묵상도 해야 되겠고 성경 말씀이  가라 하는 데까지 넓게도 가 보고 천리든지 만리든지 한번 넓이도 한번 뛰어  보고 깊이 파고도 한번 들어가 보고 길게도 천년 후면 어찌 되겠느냐 만년 후면  어찌 되겠느냐 거기도 가 보고 이 성경이 가르쳐 놨기 때문에 내가 이제 몇십 년  후에 죽으면 어찌 되느냐 아 죽음 후에 봤다 죽음 다음에는 어찌 되느냐 부활이  있다 부활 다음에 심판이 있다 그 다음에는 어찌 되느냐 그 다음에 어찌 되느냐  가서 이제 억억억억만 년 뒤에 까지도 우리는 멀리 보면서 파고 들어가서 구경  할 수 있고 명상할 수가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야 이 마귀라는 놈이, 그는  마귀는 공중에서 쫓겨 나서 지금 세상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기  전에는 마귀가 공중에 권세 잡고 있었지마는서도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공중에서 쫓겨났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에는 마귀가 막 우굴 우굴해. 한 사람 속에 마귀가 몇 천  마리가 들어 가지고 있는지 몰라요. 마귀가 들어 있으면 그 자기는 몰라도 알아.

'아 저 사람이 저라는 것 보니 그 귀신 들었다 귀신 들었다' 그 말을 자꾸 자주  하면은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말 안 했지마는서 성경에는 그래  놨습니다. 귀신이 안 들었으면 성령이 들었고 성령 안 들었으면 귀신들었다  둘중에 하나는 들어 있지 성령도 귀신도 안 든 때에는 한시도 없다 찰나도 없다'  그렇게 성경이 말했지마는 그걸 자꾸 귀신 귀신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해서  마귀라는 놈이 덮어 쓰워 가지고서 저거는 귀신 많이 말하는데 귀신 도인가보다  이럴 것이기 때문에 귀신을 말을 못 해 그렇지 실은 귀신이 우리에게 가득  바글바글합니다. 귀신 그놈이 들어 오면 정 꺼꾸로 해석하게 돼 버립니다.

에덴동산에 그 배암은 귀신인데 귀신이 그놈이 들어오니까? 영 아주 그만 비판과  평가가 완전히 꺼꾸로 돼 버리지 안했어요?  그런고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영감받아서 기도로 명상으로  이렇게 벌써 장성해서 마귀, 땅을 점령하고 있는 마귀 보다도 쑥 위에 커  올라가면은 그놈이 와 가지고 들어붙지를 못해요. 벌써 장성해 올라 갔기  때문에, 그런고로, 그놈에게 걸리면 죽습니다. 걸리면 아 그놈에게 걸리면 뭐 참  걸리면 몇 해라 하는 것 그런 거는 그만 한시간 같이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우리의 지식의 그 범위가 체험의 범위가 우리가 지금 그  교섭을 하고 활동하는 범위가 이 마귀의 범위를 벌써 넘어서 한계를 넘어서 이래  갔을 때에 마귀는 우리보다 유치하기 때문에 그 유치한걸 알지마는 우리는  좁은데 그놈은 넓으니까? 넓은 걸 가지고 자꾸 우리에게 말하면 우리는 처음보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에게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거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성경만 읽어 가지고는 암만 해도 안 되요. 성경  읽고 실행하고 또 기도하고 그 전부가 다 뭐인데? 그 전부가 하나님 가르친  것이고 나와 다른 사람 사람 가르친 것이고 금생 가르치고 내세 가르친  것이니까? 가르친 그대로 하면은 우리는 점점 장성해 가겠습니다. 그래서 산다씽  그분은, 교리적으로는 약간 좀 틀린 것 있지마는서도 그분은 말을 그래 해. 이  이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거기에 생명은 없지마는서도 이종교를 믿는 그런  도인들이 밭은 잘 개간해서 마련했다. 밭은 잘 개간해서 마련해 놨다. 이제  타락한 사람으로서는 발달시킬 대로 발달 시키고 명상할 대로 명상하고 상상할  대로 상상하고 구할 대로 궁구하고 이렇게 했기 때문에 것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만 심어져서 그가 완전히 하나님 한 분만이 주재이요 그분에게만  생명이 있고 그분으로 향해야 산다는 요 방향만 전환해서 생명의 이 복음의 씨만  심어지면은 가속도로 장성하기 때문에 이제 믿어도 여러 수십 넌 믿은 사람보다  그 사람이 구원에는 앞서갈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수가 있다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것이 그게 우상 안 되면 선물 됩니다.

세상 아는 것이 우상 안 되면 것은 선물되요. 세상의 지식이 우상이 되기 때문에  자꾸 말하는 것이지 우상 안 되면 선물되요. 선물되면 그로서 빠르게 그 구경도  하고 이렇게 모든 관찰도 하고 모든 것을 체험도 하고 실행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요 세 가지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고 하나님의 그 무한히 크심을 자꾸 연구해요. 그분의 크심을 연구할  때에 그분의 아들된 우리는 커집니다. 그분을 따라 우리가 커졌을 때에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니 이러니 말하는 그것이, 그것이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주 어떤 폭 속에 들었기 때문에 그것 상대할 수가 없고 거기에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제 일 큰 지위를 준다 할지라도 그게 너무  작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할 수는 없어. 그걸 가지면 그거  가지고 다시 다른 것으로 활용이나 할까 그대로는 쓸것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우리는 참 도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한번 기도 합시다.

 주님! 우리를 사랑하사 주님의 피공로로 인한 계시의 도를 주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보증하신 성령님과 주의 무한한 영원한 주의 뜻과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우리 안팎에 있사오니 마음대로 힘입어서 얼마든지  영광된 구원 곧 주님을 영원히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기까지 이  하 욕망으로 달리게 하시옵시고 죽여야 할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 주관 이  무서운 강퍅. 완고. 완패 이로 더불어 싸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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