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매오는 바로 나

 

1987. 3. 4. 새벽(수)

 

본문: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사라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마지막절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소경이 보지 못하는 병이 있어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는 모든 면이 불행하게 됐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시로 보지 못하는 그 병이 나았고 병이 낫고 보니 예수님을 길에서 좇으니라 이랬습니다.

이 바디매오의 이 사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것이 예수님은 눈 띄워 줄 수 있다 하는 그런 치료의 능력이 있다고 그렇게만 본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특별히 받을 은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성경에는 소경 눈뜬 일이 여게만이 아니고 눈뜬 일이 여러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러번 기록된 것이 다 소경이 눈뜬 그것인데 그 눈이 병신으로 있다가 눈이 떠서 보게 된 그것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계시라고 하면은 그렇게 여러번을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경 눈뜬 것이 여러번 있을지라도 그 사실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가는, 구원 이루어가는 구원 도리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이것을 깨닫고 자기가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시는 것이니 이 표적은 어떤 구원 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인가 하는 것을 그것을 자기가 깨달을라고 하면 여러 군데 기록한 그것이 우리는 한 군데라도 보지를 못하면 구원 도리에 대한 귀중한 그런 방편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경 바디매오가 이렇게 소경되고 거지되어 있다가 눈을 떠서 예수님을 길에서 따른 이것이 곧 우리들이 보지 못함으로 불행된, 보지 못함으로 불행된 그 불행을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 보게 됨으로 모든 불행이 다 해결됐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곧 바디매오라, 이 바디매오를 말한 것은 우리 택함을 받고 다 중생돼서 예수 믿는 사람을 이 바디매오로 이렇게 바디매오의 이 형식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친 것이다 하는 것을 깨닫고 내가 곧 바디매오라, 예수님 믿는 나는 바디매오를 가지고 가르쳐 주신 내가 바로 바디매오라 하는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게서 구원 도리를 바로 받아 누구든지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디매오는 곧 나를 가리킨 것이요 바디매오의 그 모든 형편은 내 형편을 가리키신 것이니까 막바로 내가 바디매오다 하는 그것을 생각하고 깨달았다면 여게서 모든 구원 도리는 누구든지 다 깨달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바디매오가 그는 거지고 소경이고 아주 형편 없는 불쌍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불행된 그 원인이 무슨 다리가 병신돼서 불행이 됐다든지 머리가 나빠서 불행이 됐다든지 자기의 무슨 수족이 나쁘다든지 무슨 다른 이유가 아니고 단 자기의 이 바디매오의 불행은 보지 못한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다 하는 요것을 여게 나타냈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가 영만이 아니고 영이나 육이나 금생이나 영원한 내세나 모든 불행한 원인은 이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 그 불행의 원인이다. 막바로 예수님 믿는 내가 이 다른 것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고 보지 못하는 요것 때문에 불행한 바로 바디매오다. 그러면 내가 보지 못함으로 불행된 바디매오가 바로 내니 내가 보지 못함으로 불행된 그 이유가 뭐인가? 성경에, 아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로 아는 그 방편이 있고 세상 사람의 지혜로 아는 방편이 있으니 하나님의 지혜로 볼 때에 비참한 그 사람이 그 지혜를 바꾸지 못하고 세상 지혜로 비판해서 자기는 비참한 줄을 모르고 부요한 줄로 알았다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도 “네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부요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을 하였거니와 너의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거는 아는 지식이, 아는 그 감각이 정반대로 되어 있는 그것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든 비판하고 평가하는 그 원인인 세상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는 거와 평가하는 것이 정반대다 하는 것을 그런 데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바디매오를 가르친 것은 우리를 이 세상 지식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대로 우리를 비판하고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 바디매오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바디매오가 불행하게 된 원인은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보지 못하는 것이 그 불행의 원인이 됐으니 나는 이 바디매오로 나를 상징한 것이라고 하면 나는 보지 못함으로 불행된 그것이 뭐일까? 내가 바디매오는 바로 나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바디매오라 하는 그런 그 사람을 하나 예정하시고 창조하셔 가지고 기르시다가 그때가 되니까 나타내셔 가지고 이런 이 역사의 한 토막이 이루어져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니, 그러면 이 바디매오의 모든 형편은 내 형편을 바디매오를 가지고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택한 자들을 구원하는 이 구원에 대해서 이 면으로 불행한 그 불행에서 구원하고 저 면에 그 불행에서 구원하는 모든 구원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계시인데 이 바디매오의 보지 못함으로 그가 불행하게 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바디매오를 벌써 영원 전 예정을 하셨고, 또 때가 되매 그 순서로 바디매오를 나게 했고, 눈먼 자로 그렇게 거지로 자라게 했고, 또 그때에 길가에서 앉아서 예수님 지나가시는 것을 기다리게 했고, 그 뒤에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서 호소하게 됐고, 그 뒤에 여러가지 방해한 일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호소하게 됐다.

그러면 요와같이 된 요것이 영원 전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그렇게 자라다가 그때가 되니까 나타내셔 가지고 우리에게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 계획적이다.

모든 것이 우연히 그런 병자가 있으니까 그때 그런 형편 있는 것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알린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에 이치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영원 전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때가 되니까 요런 그 형편의 순서를 이루도록 하셨고 눈뜨고 보게 됐고 그것을 우리에게 문서로 계시해 가지고 주셨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첫째로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바로 바디매오는 내다. 나의 그 모든 형편을 바디매오로써 그 형편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니까 바디매오의 이 거지된 면은 나로서는 무엇이며 바디매오의 이 눈먼, 눈이 어두워서 봉사된 면은 나에게 대해서는 무엇이며 또 바디매오가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이와같이 받아서, 예수님 지나가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비참한 가운데 있으면서 불쌍히 여게 달라고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이라는 것을 볼 때에 그 사람이 멸시당한 것이 분명하니까 이렇게 나는 지금 멸시를 당하지 안하고 있는데 이렇게 여기 멸시당한 이것이 바디매오라고 하면은 이 바디매오가 멸시당하고 있는 그것은 내게 대해서는 무엇인가? 또 바디매오가 길가에 거기서 앉았으면서 예수님을 기다린 그 길가는 무엇인가? 또 예수님을 부르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렇게 말한 건 뭐인가? 그렇게 길가에서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 것은 내게 대해서는 무엇인가? 내게 대해서는 어떤 면을 가르치는 것인가? 이라니까 많은 사람들이 꾸짖으면서 잠잠하라 이렇게 했으니 이것은 무엇일까? 내게 대해서는 이것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그 소경이 잠잠하라 할수록 “그가 더우기 심히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이거는 뭐일까? 내게 대해서는 이것은 무엇인데 내게 대해서 무엇을 지금 가르치고 있는가? 바디매오를 가지고 나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 모든 사람이 잠잠하라고 할 때에 바디매오는 더욱 심히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으니 요것을 뭐일까? 이렇게 크게 부르니까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셨다. 이렇게, 그때 그만 잠잠하라 할 때에 잠잠했으면 예수님은 그저 지나갈 것이고 자기는 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안했을 터인데 잠잠하라 한 이거는 뭐일까? 잠잠하라 할 때에 잠잠하지 아니하고 더욱 심히 큰 소리로 부르짖은 이것은 뭐일까? 이라니까 예수님이 머물러 서셔 가지고, 머물러 서셔서 “오라 하라, 그 소경을 오라 하라.” 이렇게 했으니 그때에 모든 사람이 잠잠하라 할 때에 잠잠하지 아니하니까, 예수님께서 보니까 잠잠하라 하고 더 고함을 지르고 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보시고 머물러 서셨으니 이거는 뭐일까? 그러면, 거게서 잠잠하라 하는데 잠잠하지 안하고 더 큰 소리로 호소하니까 예수님이 머물러 섰다. 그러면 예수님이 머물러 서신 거는 뭐일까? 그 소리를 그렇게 지르니까 머물러 섰는데 머물러 선 것이 뭐일까? 그 머물러 서고 나니까, 서면서 ‘오라 하라’ 이라니까 그렇게 잠잠하라고 야단치는 그 사람들은 이 소경 바디매오의 하는 행동에 반대였고 또 바디매오의 소원을 이루는 데에 다 방해물이 됐고 반대됐는데 우리가 이 소원 이룰 때에 방해물은 뭐이며 반대하는 것은 뭐인가? 요것을 우리가 깨닫고, 방해하고 반대할 때에 거게서 방해와 반대를 받지 안하고 더 심히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니까 불렀으니 이거는 뭐일까? 내게 대해서 무엇을 가르친 것일까? 그렇게 부르니까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셔서 그를 오라 하라. 그러면 예수님이 머물러 서셔서 오라 하는 거는 뭐일까? 오라 하고 보니까 그 모든 대중들이 이제는 이 바디매오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전부이 바디매오를 반대하지 안하고 ‘안심하라. 너를 부른다.’ 그러면 그때 대번에 그 바디매오의 이제까지에 불행한 것이 예수님이 ‘오라 하라’ 하는 그 말씀 한 마디에서 바디매오의 대우는 아주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아주 멸시 천대를 했지마는 그 말 한 마디 떨어진 후부터 모든 사람들은 바디매오에 대해서 협조하는 사람이 돼졌고 바디매오를 ‘안심하라’ 행복된 사람으로 그렇게 아주 대우를 했으니까 우리 신앙 생활에서 요렇게 부르짖을 때에 환경에 반대하는데 반대할 때에 그 방해받지 안하고 심히 부르짖으니까 예수님이 머물러 서셨으니 머물러 선 그거는 소경은 몰랐을 거라 말이오. 소경이니까 못 봤다 말이오. 머물러 선 걸 못 봤지마는 예수님이 머물러 서니까 모든 사람들의 그 모든 이 병신에 대한 보는 점이, 관점이, 아주 병신관이 달랐다. 바디매오관이 아주 달랐고 바디매오에 대한 대우가 아주 달랐다.

바디매오를 아주 협조하는 모든 것으로 돌변되고 말았다. 이거는 뭐일까? 그것을 또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와 가지고, ‘안심하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 이렇게 하니까 그들이 부르신다고 이렇게 전달하는 소리를 소경 바디매오가 들었으니까 전달하는 것을 소경 바디매오가 들은 거는 뭐인가? 나로 말하면 들은 거는 뭐인가? 그걸 내가 알아야 일이 되겠는데.

그러면, 전달하는 그 전달 소식을 바디매가 들은 것은 나로 말하면 뭐일까? 듣고 나니까 바디매오가 그 소리 듣고 난 다음에 이제 오라 하니까 ‘그러면 아무래도 내가 갈라 하면은 지금 뭐뭣이 필요하니까 뭐뭣을 이제까지 소경되었을 때에 필요한 이것 저것 그것도 다 사람이기 때문에 갖추어 필요한 요긴한 것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 그 요긴한 것 중에 겉옷도 버린 것 보니까 자기에게 이제까지 필요해서 갖추어 있던 필수품 그 모든 것 다 버린 것이 분명하니까, 저가 이제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그 모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다 필요 없이 되어 그 모든 걸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고 이렇게 버리고 예수님께 갈라고 이렇게 했으니 그 모든 것을 버린 거는 뭐인가? 그가 그 모든 것의 필요성을 없이 느껴서 겉옷까지 버렸으니까 자기의 필요해서 갖췄던 모든, 필요해서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갖추었던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다 필요 없는 것으로 돌변한 그 바디매오의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필수관, 자기에게 필요한 필수관이 완전히 바꾸어졌으니까 이제 그 모든 필요한 것이 하나도 필요가 없고 다 버려 버렸다 해. ‘버려 버렸다. 버렸다. 내어버렸다.’ 이래. 내어버렸다 이랬으니까 그 필요관이 그렇게 바디매오는 아주 달라졌는데 나는 이거 어떤 것이 이렇게 모든 그 필요관이 달라지는 것일까? 또 그후 바디매오가 그거 버리고 일어서서 걸어갈 건데, 그거 내가 양산동 그 기도산에서 어떤 사람이 나한테 말을 하는데 ‘바디매오가 사람들은 다 일어서야 뛰지, 일어서야 뛰지 그 일어서지 안하고 뛰기부터 먼저 뛰었으니까 그게 뭐인지?’ 그것을 저한테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래서 나는 거기 대해서 말을 하지 안하고 모두 다 몇이 있었는데 그 말 하고 저는 그 말을 내 속에다 새기기만 새겼습니다.

나도 “뛰어 일어섰다” 이랄 때는 급히 속히 일어섰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그분은 ‘일어서야 뛰는데 일어서지 안하고 어떻게 뛸 수가 있나? 그 일어서지 안하고 뛰는 게 뭐일까?’ 그 말 한 것은 그분은 ‘이거는 뭐일까?' 하는 것을 하나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무관심하고 생각했던 것을 그분은 관심있게 생각했으니 그게 뭐일까? 그걸 제가 생각해 가지고 과연 그것이, ‘일어서서 뛰어갔다’ 일어서서 뛰어간 게 아니고 뛰어 일어선 그것이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하는 그 믿음이란 그 믿음 중에 한 가지다. 하나다. 하나가 들어 있다.

그 뛴 그것도 바디매오의 믿음을 칭찬한 그 칭찬받은 믿음 중에는 뛴 것, 일어서 가지고 뛰지 안하고 뛰어 가지고 일어선 그것이 주님이 인정한 믿음 중에 하나니까 뛰어서 일어선 것은, 뛰어서 일어난 것은 뭐인가? 그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나로 말하면 뛰어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 가지고 예수님에게 가니까 예수님이 바디매오에 대해서 “내가 네게 대해서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내게 대한 소원이 뭐이냐?” 이렇게 소원이 뭐이냐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말씀했으니 그것은 예수님이 그때에 어떤 분인고 하니 그 바디매오가 만일 어떤 것이라도 소원을 한다면 그 소원한 것을 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해 줄 수 있는 분으로 알았기 이분은 자기의 모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불행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모든 순서로 이래 가지고 와서 이렇게 부르짖었는데 예수님께서 네 소원이 뭐이냐 이래 물은 그것은 뭐일까? 네 소원이 뭐이냐 이렇게 물은 그것은 뭐일까? 요걸을 바로 깨닫지 안하면 거게서도 탈선돼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물을 때에 거게서 ‘나는 지금’ 뭐 이제까지 그가 필요로 느꼈던 것은 돈도 필요로 느꼈고, 뭐 집도 없을 것이고, 돈도 없을 것이고, 옷도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이 다 없으니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지 않겠습니까? 이랬는데 그 필요한 그것을 자기가 가진, 자기가 가진 자기 처지로서 가졌던 것은 필요한 것은 다 버렸지마는 자기가 들어서, 눈은 감아 있어도 어떤 그 영광 영광 모든 그런 것 필요한 것이 많이 있었을 거니까 이 소경 신세가 거지요 소경이니까 그가 보지 못했을지라도 부러운 것도 많았을 것이고, 소원되는 것도 많았을 것이고, 자기가 그 불행, 남만 못한 그 불행이라 하는 그것이 뭐 여러가지 종류가 있었을 거라. 자기가 불행한 점이 여러 면이 있었을 것이라 말이오.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많은 게 있는데 “내가 너한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에 이 바디매오가 아무것도 원하지 안하고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만을 원했으니까 그거는 뭐일까? 하나만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그게 뭐일까?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는 이 믿음은 바디매오의 모든 불행이 완전히 해결돼 버렸는데, 그 믿음은 완전히 해결을 준 믿음이요 또 이 바디매오가 길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으니까, 예수님을 좇았다 말은 예수님을 따랐다 말인데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라 말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을 뭐일까? 우리가 생각하면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랐다 하면 될 건데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다” 좇았다 말은 따랐다 말이오. 예수님을 배워간다 말이요, 닮아간다 말이요, 본받아간다 말이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간다 말이요, 예수님과 같이 되어져간다는 말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허다한 무리들이 올 때에 “내게 오는 자는 이렇지 이렇지 안 하면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랬는데 여게 그렇게 눈떠 가지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으니까 이 사람이, 이 성경에 이와같이 기록한 이것이 우리에게 이 구원 도리로 주셨으니까 그 사람의 따른 것이 그 구원 도리로 주신 요것으로 깨달으면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으니까 길은 무엇이며 예수님을 따랐으니, 예수님을 좇았으니까 그는 예수님의 완전한 제자가 됐다. 길에서 좇았으니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완전히 따라갔다. 예수님을 좇아갔다. 예수님을 닮아갔다. 예수님을 배워갔다. 예수님의 그 형상을 완전히 이루어갔다.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

예수님과 같은 자가, 예수님과 함께 가는 자가 되어졌다.

이걸 얼마든지 이래 우리가 생각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그 믿음이 뭐인가? 그 믿음을 우리가 생각해서 그 믿음은 네가 대해서 그 어떻게 어떻게 된 믿음인데 그 믿음인가? 요것을 바로 내가 바디매오라. 바디매오를 가지고 내 형편을 가르쳐서 나로 하여금 길에서, 길에서 예수님을 좇도록, 길에서 예수님을 좇도록. 이 길은 지난 시간에도 많이 말했지마는 이 길은 우리를 가리켜서 행인이라 이랬습니다. 이 우리를 가리켜서 행인이라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길에 있는 사람이 말이오.

그라고 “네가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해라” 했으니까 그 길은 곧 우리의 믿는 그 믿음을 지켜 믿음 생활 하는 그 모든 여생을, 믿음 생활하는 그 여생 전부가 다 길 가는 생활이라 하는 것을 성경에 말해 놨기 때문에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다 했으니까 좇은 거는 뭐인가? “네 믿음이” 하는 그 믿음은 뭐인가? 요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비교해 봐. 요거는 무엇이며 요거는 무엇이며 요거는 뭐인가? 요것이 내게는 어떤 형편을 가리킨 것인가? 이렇게 자기가 본다면 차차 차차 깨달음이 있을 것이고, 그 몇 가지 제가 그것을 보고서 산에서 깨달은 것은 내가 그거 기록한 노트를 내가 두고 왔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열일곱 가지를 깨달아서 과연 바디매오로써 내 형편을 문서로 말로 가지고 가르쳐서 안 되니까 바디매오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나를 똑똑히 보여서 이 바디매오는 바로 내다.

바디매오의 이 모든 순서는 내가 구원 얻는 순서요 내가 예수님의 제자되는 순서다 하는 그것을 제가 거게서 기록을 하면서 이거는 참 틀림없는 바로 나를 가리킨 것이다 하는 것을 깨달아서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경된 이 보지 못하는 여게 대해서 제 불행인 것을 느꼈고 그라고 나서 차차 차차 이래 볼라 하니까 눈이 떠 보니 뭐 참 모든 것이, 요 믿음의 눈인데 믿음의 눈이 뜨이기 전과, 믿음의 눈. 믿음의 눈은, 믿음의 눈, 믿음의 지식은 뭐냐 하면은, 믿음의 지식이라. 믿음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이렇다 할 때에 아는 것이 믿음의 지식입니다. 주님이 이거는 콩이다 할 때 콩으로 아는 것이 믿음의 지식이요 이라면 죽는다 하는 것을 주님이 죽는다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죽는 줄로 이래 아는 것이 고거 믿음의 지식입니다.

주님이 신구약 성경에 우리에게 가르치신 그대로의 지식을 가리켜서 믿음의 지식이라, 그대로의 소망을 믿음의 소망이라, 그대로의 그 부요를 믿음의 부요라, 그대로의 가난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가난이라, 이거는 이렇게 한 것이니까, 그 믿음으로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계약으로 나타난 요 계약의 그 실상을 내가 성경이 말한 대로 그대로 보는 것, 성경이, 신구약 성경에, 성경에 기록해서 보여 주는 기록의 실상,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계약은 하나 그저 논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신구약 성경은, 이 세상에는 실물은 없는데 말만 있는 것 아닙니까? 실물은 없는데 말만 있는 것이지마는 그게 아니고 이 신구약 성경은 말씀해 놓은 것은 실물 없는 말로만 이래 말한 게 아니고 그 실물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지 그 실상 없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실상 없는 걸 가르쳐 준 거는 하나도 없는데 이 신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모든 각종의 것의 그 실상을 우리가 보는 데서, 실상을 우리가 보는 데서 모든 행동은 나오고 모든 행동은 예수님께서 신구약 성경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르쳐 주신 그 가르쳐 주심의 그 실상, 가르쳐 주신 그 모든 종류에 그것의 그 실상, 그 실상을 자기가 아는 것만치, 실상을 만분의 일을 알면은 실상을 만분의 일을 이룰 수 있는 행동이 나오고, 만일 실상을 다 백프로 다 바로 정확하게 봤다면은 실상을 백프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모든 신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요것을 기록해 놓은 계약을 네가 일단 그대로 행하기만 행하면 이 신구약에 있는 이 모든 것은 실상이 네가 되어진다.

그러면 우리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소망, 기록되어 있는 소망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 소망은 네가 요것을 요 소망을 이루는, 요라면 요 소망이 이루어진다 조라면 조 소망이 이루어진다 했는데 각각 요 소망은 요렇게 하면 이루어지고 조 소망은 조렇게 하면 이루어진다고 기록했는데 어느 부분이든지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 방편대로 네가 행하면 실상된다 하는 그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에, 신약이나 구약이나 기록되어 있는 이 모든 소망, 하나님께 대한 소망, 하나님께 대해 내가 어떻게 가질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소망, 또 모든 자체에 대한 소망, 우리가 자체에 대해서도 이거 뭐 하나님같이 된다면은 그 이상 소망 없어. 우리가 자체에 대한 소망, 또 모든 인류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소망, 모든 이 세상에 대해서 소망, 이 세상은 전부 참 보배로운 선물인데, 성경이 가르치기를. 또 이것이 우리에게 미혹 주는 음녀라고도 말했는데.

그러면 세상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이 모든 것은 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은 이것이 문서만이 아니고 이것이 곧 실상인데, 이 문서 이걸 문서 그대로 하면 실상인데, 문서 바로 문서가 막바로 실상이다. 문서가 막바로 실상이다. 네가 받기를 이 실상 있는 것을 문서로 내놨기 때문에 문서로 네가 받으면 실상을 네가 받는 것이다. 문서로 받으면 실상을 네가 받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믿음은 모든 소망하는 것을 실상으로 만드는 것이 믿음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서 우리가 이 보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 이 바디매오는 그것만이 원인이라 하는 걸 이래 본 것처럼 나도 이렇게 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 계시를 이 사실을 내가 믿는 병이 들어서, 믿지를 못해서, 믿을 대로 믿으면, 인정할 대로 인정하면, 만분지 일을 인정했으면 만분지 일이 이루어질 것이고 억만분의 일을 인정했으면 억만분의 일이 이루어질 것이고 자기는 만의 만을 다 인정했으면 다 이루어질 것이고, 이러니까 우리가 인정하는 거라면 아는 것 우리가 보는 것, 그 실상을 보는 여기서 이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거는 다 내것이 될 수 있고 또 이것을 그 실상을 내가 알지 못하고 실상을 부인하는 데서 하나도 이루어지지 안하니 신구약 성경에 계약으로 우리에게 나타낸 이 사실, 이 실상, 이 실상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이것이 우리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이스라엘을 홍해 바다 앞에서 애굽 병정은 추격하고 그 어려운 그 입장 그것도 이 입장을 그래 해 놓은 것을 하나 지나간 역사로만 볼 게 아니라 이것이 나에게 이 신구약 성경은 내게 구원 도리로 주셨기 때문에 그러면 그때 입장 당한 그게 뭐일까? 그때는 어떨까? 그때에 그분들의 그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평안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나는 이 사람도 될 수 있고 이 사람도 될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자기인 것을 깨닫고 거게서 그 행복된 여호수아 갈렙 같은 그런 사람이 될라고 애를 쓰면 될 수가 있고 또 보여질 수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신구약 성경은 전부 나를 가리킨 것이고 내게 구원 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이것이 내게 대해 뭐인가? 이 소경은 내게 대해, 문둥이는 내게 뭐인가? 이것을 자기로서 생각하면 거게서 다 해결되고서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보지 안하는 것이요, 또 우리 통틀어 말해서 신구약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은 전부 실상인데 그 실상을 이래 기록돼 있는데 그 실상으로 인정하면, 이 실상으로 알면 전부 제것 다 만드는데, 신구약 성경에 있는 행복이라 하는 그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이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뭘로 주시느냐? 이 행복을 인정하고, 행복 이게 행복이라는 거 그 실상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뭐ㅡ 힘드는 게 아니고ㅡ 인정만 하면 필연한, 힘드는 게 아니고 인정만 하면 다 되는 것이니까 인정만 하면 다 제것을 만드는데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기 때문에, 요 사실을 사실로 알지 않기 때문에 병들었다는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잡아서 느껴야 일이 돼지지 그리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뭐 우리가 행하는 것에 뭐 어렵겠다. 뭐 어렵겠습니까? 믿으니, 주를 위해서 이와같이 고난당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죽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난다 했으니까 예수님의 죽은 그것이 예수님의 성공이라.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신 게 성공이라. 우리도 이 자연인으로 되어 있는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자연인이 아니고 비자연인 특수인이 되고 말았다 말이오.

특수인이 됐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지금 하루 살면 뭐입니까? 하루 살면 늙어지는 생명입니까 하루 살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이 육의 생명입니까? 우리 육의 생명이 뭐입니까? 육의 생명이 안 믿는 사람의 육의 생명과 우리의 육의 생명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그들의 육의 생명은 하루 살았으면 그만치 생명이 줄어졌습니다.

생명이 줄어졌는데 우리는 하루 살면은 이 생명이 줄어졌습니까 이 생명이 이 모든 제한받는, 영원이 되지 못한, 완전이 되지 못한 이 생명이 완전화되고 영원화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죽어지는 것입니까 이것이 영원화되어서 사는 것입니까? 우리의 육의 생명이 하루 살면 이것이 사는 것입니까 죽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사는 것인 것을 성경에, 이걸 실상으로 믿으면, 믿으면 누구든지 어서 주를 위해서 죽고 싶지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있기를? 우리가 이 못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게서 사고났다 요것을 꼭 잡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오늘 아침에 말씀한 거와같이 이 바디매오는 바로 내다. 바디매오는 내니까 바디매오의 이 형편은 내 무엇이며 이 형편은 내 무엇인가? 또 나면서 눈먼 자 있는 요거 내다. 나면서 눈먼 자 있는 게 내니까 나면서 눈먼 자 요거는 무엇이며 고거 대중이 ‘이거 뉘 죄이니까?’ 하는 거는 뭐이며 또 예수님이 요렇게 해서 방편을 해 가지고 눈을 띄웠으니까 요거는 내게 뭐인가? 요 전부 하나도 내게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전부 나를 가리킨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 도는 온 세상에 둘만한 그 양이 많은데 요 축소해서 요것을 말한 요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고 또 이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완전히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바로 나를 문서로 가르치고 또 어떤 형식으로 가르치고 하셨으니 형식도 나요 문서도 나라. 이러니까 문서에 있는 이 수많은 것은 이것은 실상을 보면은 다 행할 수 있고 행하면 다 제것 만들어.

믿음으로, 계약되어 있는 이것에, 계약되어 있는 이 문서로 계약되어 있는 이것의 실상을 보는 사람은 이것은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희망 있는 실상이지 자기 것은 아닌데 이제 하나님 앞에 내것으로서 다 예비되어 있는 그 실상을 내가 보는 것만치, 보면은 이것을 실지로 영원한 내것을 만들 수 있다.

이 성경 가운데 있는 것은 앞으로 내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내것 되어 있는 것이지, 약속으로 내것 되어 있는 것이지 내것 실상은 아닌데 그 약속돼 있는 그 실상을 보는 그 사람은 영원한 자기의 실상의 것으로서 만들어 가질 수 있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알면 뭐 참 기가 막혀 놀랠 일이지 이 외에 더 거기 대해 할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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