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세리


선지자선교회 1981년 7월 5일 주후

 

본문 :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세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하심을 받고 갔고, 바리새인은 이와  정반대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이 두 사람의 비교는 참  중대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심령이 강퍅함으로 그렇게 중대한 일로  여기지를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절단이 없고  하나님 앞에 긍휼을 입는 것보다 더 큰복이 없습니다. 마치 어느 공장에 시설이  넓고 많고 또 힘있는 좋은 기계가 가득히 설치되어 있다 할지라도 전기 힘으로  많은 기계들이 움직여 참 귀한 제품을 만들어 내는 고로 값도 비싸고 참으로 그  공장의 가치가 크다 할지라도 다시는 그 공장에 전기를 쓸 수 없게 됐다 하면  그만 그 공장은 썩은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그 공장은 뜯겨야 하고 산산이  다 분산되어야 되지 그대로 있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안 믿는 사람도 그러하고 더욱이 믿는 사람에게는  그가 경영하고 움직이는 모든 일에 원동력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줄이 끊어지면 그것이 혹시 날뛰기를 얼마 동안 날뛰지만 결말은  패망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당장에 정지되지 않고 운영되어 나간다고  하면 반드시 그는 하나님께서 패망의 양을 그대로 해서는 분을 풀지 못하시기  때문에 패망의 양을 더 키워서 패망시키려는 것이지 하나님과 그 은혜에 연결이  끊어지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혹 그러면 무신론자, 유물주의 그 사람들은  어떻게 흥왕 하는가? 그것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합당치  않게 행동할 때에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권고하지만 그 권고를 듣지 아니할  때에는 부득이 이방 나라를 강하게 해서 그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는  몽둥이로 쓴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분명히 지금 공산주의는 잘 믿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채찍이 되겠고, 또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면류관을 만드는 영광을 마련하는 일이 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도 어떤 물질에게 버림당하는 것보다 큽니다.

사람들은 사람에게 버림을 당할지라도 물질은 가져야 된다고 하지만 물질이  없어져도 사람의 협조를 받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조금도 어려움 없이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협조는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부라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생들이기 때문에 인생의 생애가  결말적으로 말하면 다 패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설비해 놓은 큰 공장에  다시는 전기가 오지 못하게 됐다 하면 그 공장은 그만 철거해야 되고 폐지해야  되고 다 부숴야 됩니다. 아무리 있어 봤자 소용없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인간이 어떤 경영을 하고 어떻게 광대하게 탁월하게 경영과 역사를 늘어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벌써 손떼고 버리면 그것은 전기 끊어진 것과 같이 그만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의 하는 모든 일은 허사입니다. 된다면 부서지는 소리가 더  크게 나면서 부서지기 위해서, 키워서 부수려고 하는 것이지 멸망 받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기간 동안 힘을 써서 연구하여 일 국의 유력한 학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에 일위를 차지한 그런 과학자가 되어서 그 나라들의 모든  흥망성쇠가 그 사람 하나에게 있는 줄 알아서 그 사람을 서로 데려가려고, 안  빼앗기려고 하는 이런 대과학자 요사이는 원자로 쏠 줄만 알지, 원자로 상대방을  해할 것만 지금 발견되어 있지 원자탄 그것이 오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방어하는  것은 지금 발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방어하는 것을 발견한 과학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참 세계가 그를 보배로 여기고 굉장한 존영이 있지만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정신을 획 돌려서 그만 그 사람이 정신 이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전부 허사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무엇을 어떻다  할지라도 정신이 벌써 이상이 생겼으면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벌써  상해졌으면 헛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버림당하는 것이, 또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연구하고 연구해서 이 사실에 실상을 아는 것이  제일 큰 지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아름답고 어떻게  강건하다 할지라도 생명이 뚝 끊어지면 그것이 당장 썩어 버리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리 명예나 영광이나 무슨 권위가 있다 할지라도 그만 하나님이  손떼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가리켜서 우리들의  생명이신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능력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총명이 되신 빛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분과 결합이 되어서 이분에게 인정받는 것이 여기 기록돼 있고 이분에게  버림당하는 것이 여기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일이 이렇게 중대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 이것은 이 큼의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것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이것을 보는 것은 크나 작으나 그 사람이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써 보면 큰 것은 큰 것으로 볼 줄 알고,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볼  줄 알고, 귀한 것은 귀한 것으로 볼 줄 알고, 천한 것은 천한 것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천하 사람이 귀하다고 떠들지만 그까짓것 똥이나 그것이나 가치가 꼭 같은  것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멸시하지만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가치를 가진  것이 많습니다. 공산치하에서는 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저희들에게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리어져서 모르게 됐습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생애를 오해 해 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왜 대소를 존비귀천을 강약을 바로 보지 못하는가? 이것을 바로  보지 못하니까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되지 못했고, 소원하는 것도 바로 되지  못했고 모두가 다 거꾸로 됐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면 그만 그 다음은  전체가 거꾸로 입니다. 앞에서 비유한 대로 공장에 전기가 없으면 헛일인 것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와 끊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생명 끊어지면 송장 되는 것처럼 그의 해 놓은 모든 것이 아무리  웅장하고 위대해도 하나님이 손떼시면 그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아무리 명철하고  위대한 과학자라 할지라도 정신이 그만 변했으면 헛일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움직임이 빛이시라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분이 인간들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면  내가 어떻게 되며,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면 어찌된다는, 여기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우리가 가지지 못하는 통에 미련한 짓을 어리석은 짓을 이런 저런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 교훈이 세리는 하나님 앞에 인정함을 받고 환영을 받았지만,  바리새교인은 물리침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하다는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바리새교인의 생활이 어떻다, 세리의 생활이 어떻다 하는 것이  저희에게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필요 없는 일을 인해서 알려고 애 쓸 것이 뭐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결과에 맺어진 것이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는  끊어졌고 하나는 이어졌다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끊어지고 이어지는 이것이 제일  중대한 일이라고 하면 끊어지는 그 방편이 제일 무서운 일이요, 이어지는 방편이  자기에게는 제일 좋은 일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자기 주관대로 에누리 해  버렸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대로 신청하고, 천지는 변해도 변치 않는 이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이 사람이 참 드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힘을 써야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하나님에게 대해서 인정되는 이 일을 공부하느라고 자기가  첩첩 산중에도 들어가고 금식도 하고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의 증거라니까 그분을 아는 데에는 하나 둘 순종해 봐야 안다고 하기  때문에 아무런 효력을 보지 못하면서도 순종해서 마침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역사가 우리와의 관계가 어떻다는, 이래서 하나님 한 분이면 나의  전부라, 금생과 내세에 하나님 한 분이면 내게 부족할 것이 없는, 전부가 된다  하는 이 결론을 짓고 달리는 사람들이 자기와 세상을 다 하나님 앞에 맡겨 놓고  신앙 하나로서 살고 있는 것이고 또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 일은 고요히 생각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법칙은 세상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도 그러할 것입니다. 자기가 정권을 잡고 통치하려는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어떤 단체나, 어떤 경영을 한 사람이라도 이 법칙대로  자기는 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소속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이 법칙으로 평가할  것이요, 그러나 자기는 이 법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되면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말하기를 "네가 남이 너에게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는 그대로 네가 해라" 못된 주권자와 주관자, 책임자 거기에 주체가 되어  있는 자는 자기에게 소속하고 종업하고 있는 그 모든 무리에게 대해서 꼭 이  법칙을 씁니다. 이 법칙 안 쓰는 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매여  있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이 법칙을 쓰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세리는 바리새인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저 잘난 재미로 산다고 세리도 자기의  장점만 보는 눈을 가졌다면 아마 세상에서 긍휼을 베풀기는 저 이상 베푸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착취를 이만 원할 수 있는데 만원만  착취했으면 나는 만원을 더할 수 있는데 안했다고서 의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 들으면 안돼. 말귀를 알아들어야 똑똑히 뚫혀 속에 들어가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데 벙벙하니까 한시간이나 반시간 지내려고 하니까 기가  막힙니다. 그보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말은 알아듣겠는데 그 말에 대해서 그  도수, 그 강도가, 그 실상이 자기에게 느껴지지 않으니 그것이 큰 일입니다. 다  지혜 있고 통달한 사람이 이것으로서 죽습니다. 이 세리는 자기의 생각이 자기의  마음이 다를 것은 하나도 없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못된 것 여기에  집중됐습니다.

 아, 자기에게 있는 동업자가 잘했는데 그것을 백 프로 잘하지 못하고 구십구  프로 잘했으니, 주인은 지금 상급을 주려고 오는데 이 사람은 주인이 오니까  미안해서 '아아구 사장님 미안합니다.' '아니 무엇이 미안한데' 아, 그 백분지  일 그 일 프로 잘못된 그것을 가지고서 마음에 감당하지 못하고 그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진정 그것만 생각하고 마음에 미안스럽고 죄송스럽게  생각하니 그 회사 사장이 그 사람을 볼 때에 어떻게 보겠소? '아, 괜찮아요.

다른 사람은 오십 프로도 못하는데 구십구프로가 잘됐으니까 우리 회사 설립  이후로 이런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은 생각하기를 공연히 나를  위로해 주느라고 이렇게 하지 아무리 해도 그렇게 들리지 않고 자기의 일 프로  잘못된 그것만 가지고서 마음에 원통히 생각하면서 이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사장이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소? 상관이 그  부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이 세리도 바리새교인같은 이런 견해를 가졌으면 자기가 늘어놓는다면 얼마든지  장점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환영을 받은 그것은 무엇이냐?  자기의 장점이야 있든지 마든지 다 치워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그  점만 지금 집중하고서 그것만 전원 주시하고 거기에만 마음이 기울어져서,  이것을 잘못해서 거기에만 그 마음이 기울어진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환영을  받은 마음입니다. 요 세리가 그것이요. 멀리 서서 가슴을 친 것도 그것  때문이요. 하늘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한 그것이 그것 때문이요. 그러면 자기의  잘못된 그 점에만 자기의 전 심신이 기울어져서 그 책임감에서 머리를 들 수  없고 원통해 견딜 수 없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환영을 받는 그 하나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잘못된 것은 다 묻어 버리고 자기의 장점 하나, 둘 있으면  그것만 들고서 자랑하는 그보다 더 밉상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일 하나님 앞에 애호를 받아서 왕으로 등용된  사람이 사울 왕입니다. 그 왕이 하나님 앞에 버림당한 것이 하나님의 멸령을  자기가 다 행하지 아니하고 행한 것만 보고 내가 이렇게 행했으니, 행한 것만  봤지 행하지 않은 그것을 보지 못한 꼭 그것 하나 가지고서 사울왕은 버림을  당했습니다. 일생 동안 왕으로 지냈지만 하나님과 연결없이 저 혼자 날뛰었기  때문에 왕이었기 때문에 더 불쌍했고, 가련했고, 비참했고, 고생했고 마지막에는  비참한 죽음을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이 세리는 어떤 신관을 가졌습니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바라봤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아무렇게 해도 괜찮다 어떻게 뻔뻔스러워  '주여 주님은 나를 사랑합니다. 도우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죄를 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소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죄인을  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을 봤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인 것을 자기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죄로 인해서 가슴을 쳤고 감히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두려운 줄 모릅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두려움으로 기절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안단 말입니까?  두려움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만 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농락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짓밟고 있는 자입니다. 사랑은  두려움과 연약과 사랑 이 셋이 겸해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멸망시키는  심판과 구원 둘이 합해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멸망을 먼저 줬습니다.

구원을 그 다음에 줬습니다. 타락이 먼저요, 대속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라도 마음대로 짓고, 아주  불효막심한 자녀가 아무렇게나 행동하니 제 혈육은 똥이라도 달다고 하는  불공평하고 무지한 인간 부모의 사랑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우리  아버지 어머니야 내가 아무리 잘못해도 관계없다. 아무리 잘못해도 그는 나를  돕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책임지고 귀하게여길 뿐이다. 이러기 때문에 호로  자식이 되지, 마지막에 그 가정은 망하지. 부모와 자식이 아무리 인연이 깊다  해도 마지막에는 끊어져 원수가 되고 말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을 연구할려면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하나님의 정죄를, 하나님의 멸망을 깨닫고 원죄와 본죄로 멸망받은 자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 율법으로 정죄받아서 자기가 멸망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가 예수님의 대속이 무슨 필요있습니까? 믿어도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가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것만큼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하고 실효있게  그 대속은 역사를 합니다. 자기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두려워  떠는 것만큼 떨어 죽을 수밖에 없는데 떨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환영을 받은 것이 공장에 전기 시설이 이제  다시는 못쓰게 됐다가 전기가 다시 왔으니까 그 공장이 살아났습니다. 정신  이상자 된 과학자가 정신이 돌아오니까 다시 보배로운 사람이 됐습니다. 죽은  미인, 미남이 송장이 됐다가 다시 생기가 돌아오니까 다시 미남, 미녀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비유가 잘 안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요,  우리의 권능이시요, 우리의 지혜시요, 우리의 모든 소망이십니다. 하나님께 이  세리가 영접함을 받았고 해결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받았고 인정을 받았으니,  인정받는 이유가 의연히 세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의 잘못만 보고 그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얼마나 거리꼈다는 것, 하나님이 지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리꼈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어쩔 줄을 모르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지금 요 벌이 곧 오겠는데, 이 책임에 대한 값이 반드시 오겠는데,  하나님은 죄를 두고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죄는 소멸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히 낯을 들지 못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용서를 받지 않으면 죽을  자입니다. 망할 자입니다. 내가 주의 사람에게 주의 일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습니까, 나는 얼마나 멸망을 받을 자입니까, 하나님의 공평이 온다면 나는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야 됩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요 세  가지를 자기의 전 마음에 세 가지만 상대해서 기울어져, 요 세 가지의 마음이  됐을 때에, 세 가지 마음과 세 가지의 그 정신과 행동이 됐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환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환영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는 것은 나기전에 하나님의  예정으로, 당신의 사랑으로, 기뻐하시는 뜻으로 택한 자가 되었고, 구속을  우리도 모르게 주셨고, 우리를 중생시켰고, 했지만 일단 중생시켜 놓은 자가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실제의 행동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이 관계,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이 역사, 이것은 요 세 가지  외에는 하나님에게 역사, 기쁨으로서의 노를 푸는 것으로서의 관계를 맺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요 세 가지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고요히 생각합시다.

 우리는 에누리해도 하나님은 에누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천이, 만이 잊어버렸으니까 도매금으로 이까짓  것도 쓸어 버려라 하지 않습니다. 노아 시대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됐지만 모래 한 가마니에 쌀 한 톨 정도도 안되는 소수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의를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노아 여덟 식구를 같이 멸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전 우주보다 큰 영계에 의만 있지만 의가 많으니까 죄  하나쯤이야 할지 모르나 털끝 만한 죄도 거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털을  말했습니다. 그 '털이 희어 눈과 같더라' 하는 그 말은 그분에게는 불의라는  것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이 남의 단점만 보고, 자기 장점만 본 이것이 인식 부족입니다.

인생의 근본 요소가 같은데 하나님이 그에게 가공하시기를 다 같이 흙이고, 다  같은 선조로 그것을 만들어 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재창조로 가공하셔서  섭리하시기를 의인도 만들었고 죄인도 만들었고 꼭 같을 자인데 자기는 이렇게  만들었고 저이는 저렇게 만들었으니 오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둘이 똑같은 자가  왔는데 하나는 아름답게 장식함을 받았고 하나는 험하게 받았으면 제가 장식한  것처럼 우쭐해서 멸시하면 '야 이놈아 네게서 벗겨서 이 자에게 입히지'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저 사람에게도 입혀 주시옵소서 하든지 아니면 이것  가지고 둘이 갈라 입으면 안되겠습니까?' 하면 '안돼, 너만 입고 있어' 하시면  마음에 안됐어 하면 그 주인이 야 이것은 입혀 줘야 될 자격이 있고 앞으로 더  많이 줘야겠다 하는 이것이 조물주의 인정입니다. 이 근본을 몰랐기 때문에  바리새교인은 세리보고 멸시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근본에 대한 인식성을 아주 바꾸어야 됩니다. 낮은 자는 높아진  것으로 자랑하고 높은 자는 낮아진 것으로 자랑한다. 왜, 이런 것들이 다 풀과  같이 지나는 것들이요. 또 다 같은 진흙을 가지고 귀하게 쓰는 그릇, 천하게  쓰는 그릇을 토기장이가 만들었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에, 천하게  만들었으면 천하게 만든 이것도 조물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만족하고 이것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려 하고 높이 만든 자도 이것을 하나님이 만들었지 자기는 근본이  꼭 같은 인간으로 낮아지는 대로 돌아가는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천하에  큰 줄 안 자가 예수 믿고 보니 자기도 가장 낮은 자와 꼭 같은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고, 천하 인간 중에 낮은 자도 예수님을 믿고 보니 자기도 천하에 제일  높은 사람과 같은 그런 하나님을 모셨고 그런 소망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예수님 믿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저에게는 안주고  자기에게는 많이 줘서 됐는가 이것을 알면 저도 그와 같은 자이니 하나님이  안주면 그와 같을 자인데 하나님이 줘서 나는 이렇게 됐다, 저는 없고 나는 있게  됐으니 무엇 하려고 내게는 있게 했을까? 나 혼자 내것이라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내 독단으로 존영하라고 했을까? 성경에서는 네가 가진 것은 네 몫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몫이 씨로 왔고 또 네 몫도 있으니 씨와 양식을 주어 씨는 심고, 다른  사람의 몫은 네가 주고 주면 너는 의가 되고 네 몫은 네가 한다 이것을  바리새교인이 깨달았으면 이런 세리와 같지 않아 저는 줬으니까 세리도 저와  같은 십일조를 드릴 수 있고 정직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는 이런 사람이 되도록  한 그것이 저희에게 지금 의무와 책임인데, 바울은 이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진 자라고 말했는데 이런 책임을 지고 있으니 있는 것 가지고 없는 자에게  있게 하는 이것이 자기의 사명이요 본분이요 많이 준 그 책임인데 이것은  벗어버리고 자랑하고 없는 자를 멸시하고 하니 망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모든 면에 부요함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가 과연  오늘까지 멸망할 길을 걸었다는 것을 느끼는지 물질이든지 지식이든지  건강이든지 기능이든지 도덕이든지 어떤 것이라도 가진 자는 자기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지게 했습니다. 제가 저 된 것은 하나님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걸 아는 것이 인생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뭐 하라고, 저 되게 한  것은 저와 같이 안된 그 자를 저와 같은 자 되게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졌으니  제게 있는 것을 기울여서 저와 같이 되도록 노력하고 안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구하고 둘이 왔다가 똑 같은 거지가 왔는데 하나는 아주 잘해 줬고 하나는 아주  험하게 그대로 내 뒀으면 받은 거지가 양심을 가진 자이면 주인이 내가 너에게  줬으니까 둘이 나누어서 하라는 말을 안해도 둘이 같이 왔다가 나는 이렇게 됐고  너는 그렇게 됐으니 내가 하나라도 노력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순전히 공으로  이렇게 됐으니까 이거 참 미안하다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 미안하다. 이것을  둘이 같이 나누어서 가졌으면 좋겠다. 이러나 내가 권리가 없으니 나에게 베푼  그 주인이 허락만 했으면 좋겠다는 이 심정을 가지는 것이 양심이 아니겠소. 또  주인에게 나뿐만 아니라 저도 나와 같이 이렇게 해 주십시오. 내가 무슨 의가  있어서 그랬습니까? 그와 꼭 같은 자 아닙니까? 그러면 잘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에게도 나에게 베푼 그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양심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주인이 그래 놓고 난 다음에는 내가 네게 준 것은 네 몫도  있고, 그 옆에 있는 같이 온 그 사람의 몫도 있다. 그런데 자기 몫이 있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고 네 옆에 있는 사람 몫도 있고 또 씨도 있는데 그 다음에  양식은 두 번째 말했는데 못들은 척 하고 교만 부리고 자세부리고 멸시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멸망이 안 오고 무엇이 오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은혜를 거둬 가시지 않고 뭐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마음보다 참되고 더 강합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비판이  되거든 하나님은 더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보다 나는 이렇게 잘 합니다.

자기보다 좋은 사람도 있을 터이고 잘 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까 그 사람과  비교하면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되어 있는데 나는 저 사람만큼 못했으니까  머리가 숙여질 터인데 그 사람과도 비교하지 않고 저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고  저보다 잘 한 사람과 그 사람을 비교하라고 했습니까? 양 무리에게 본이 되라  이랬지 사람 본받아서 사람 모양 입으라는 것은 없습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아라  이 말은 성령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에 주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를 불렀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목표로 하고, 하나님을 표본으로 하고, 하나님을 원형으로 삼아서 언제든지 네  행동은 하나님같이 해야 되기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했든지 네 한 것이  하나님과 어떤가 대조해 봐라 네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서로 관계하는 그 일을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 그것을 표준해서 네가 비교해 봐라, 대조해 봐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칙입니다. 이렇기에 의인이 갈수록 죄인 된 것은  인간과 자기와 비교하면 자기는 교만하고, 원망하고, 멸시할 것뿐이지만 주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한 이것을 자기가 표본으로 삼아서 비교하고 보니 죽도록  형제에게 해도 각박했고, 자기는 빚졌고, 자기는 미달됐고, 이렇기 때문에  자기는 빚진 자라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에서 사도 중에도 사랑의 사도로 산 사람인데 그분이 밧모  섬에 가서 첫 주일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주님을 만나니까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비쳐서 눈이 부셔 견디지 못해 그 앞에 꺼꾸러졌다 이랬습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보니 했빛같이 부셔서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땅 위에서 인간들에게  배워서 행한 그것이 제법 된 줄로 알았는데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행한  그것과, 자기에게서 참으신 것과, 자기에게 대해 용서하신 것과, 자기에게  대해서 희생한 것과, 그 넓이와 깊이에 당신이 자기에게 한 그 안면이 환하게  보이니까 자기는 인간에게 한 것이 부끄러워 견디지를 못해서 꺼꾸러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빚입니다. 이 나라를 향하여 갈 우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리가 주님 앞에 요 세 가지 가지고 인정을 받은 이길 밖에는  우리가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요 틈밖에는 우리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요 좁은 길밖에는 없습니다. 요 길 걷는 요 사람이 안되면 구속주 역사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다만 대속하신 기본구원을 주신 이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탄식할 것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지 못하고 일생 동안 찾아도  하나님과 행위적인, 건설적인 연결을 가지지 못하고 일생은 끝마치고야 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범벅으로, 변덕쟁이로, 비빔밥으로 요행심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요행심을 우상이라 했습니다. 우상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요행을 섬기고  있다 그 말이요. 딱 들어맞아야 됩니다. 맞는 것만큼 구원이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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