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이르려

 

1980. 4. 7. 월새

 

본문: 빌립보서 3장 11절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순종생활인데 한 현실을 만날 때에 그 현실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야 되는 그런 방편이 열도 넘고 백도 넘습니다. 천도 넘소.

그렇게 살아갈 방편이 열도 백도 천도 넘는데 어느 방편으로 살아갈 것이냐 하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 맘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 알고 순종한다고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대부분이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다 헛된 수고 헛된  신앙 헛된 건설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까지 사람들에게 인정하게 가치성과 정의성을 가졌느냐 하면은 666,  하나님의 수는 7수인데 이것은 6이니까 하나님 다음으로 옳은 것입니다.

도덕면으로 맞추어 봐도 사회면으로 맞추어 봐도 정치면으로 맞추어 봐도  통계면으로 맞추어 봐도 다 맞는데 하나님께는 안 맞는다 그 말입니다. 다  맞는데 하나님에게는 안 맞습니다. 그 하나를 찾아 가지고서 순종하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하는 것 보다 찾기가 어렵습니다. 행하는 것 보다 찾기가 어렵소 찾은  사람이면 다 행합니다. 벌써 그것을 바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 해서 바로  찾았다면 바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행한다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은 찾는 것이 행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저는 찾는 것을 60프로나  70프로로 보면 행하는 것은 3, 40프로입니다. 너무 외부적 외식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지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요것도 증거 할  때에 귀신 들어간 사람은 안달입니다. 귀신 들어간 사람은 안달이요 그는 평생  믿어도 헛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주관대로 믿는 것이지 헛일이요 제가 여기서  안면을 다 보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제가 암만 신앙으로 산다 해도 신앙은  없습니다. 그걸 돌아서야 되지   다 찾는 것 보다 행하는 것이 어렵다 찾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됩니까? 말씀도 그에 비슷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그 중에 어느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에 마귀도 말씀가지고 시험했습니다.

그것 다 현실에 합당한 말씀입니다. 해당 된 말씀입니다. 합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은 666으로 인용했습니다. 바른 대답은 예수님이 하셨고 그는 비슷한데  바른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인간 스스로 바로 선택해서 찾을  수가 있는가 이는 하나님이 선택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주심을 받을  자가 누군가 그는 정확하고 진실하고 구별하여 그것을 어짜든지 바로 찾으려고  애를 쓰고 구별하려고 애를 써서 이렇게 삐뚤어지면 죽는 줄 알고 바로 찾으려고  애를 쓰고 이 구별하고 구별하는 그 소원을 가진 자에게 주십니다   이거나 저거나 이것도 그것 같고 저것도 그것 같고 뭐 이거나 저거나 뭐 그렇게  까다롭게 할 것이 있는가 하는 그 사람은 생명의 패전자들입니다. 둥글둥글 하는  자들이 다 신앙의 패전자입니다. 믿음도 없던 그런 사람들은 환란이 오면 다  사람이 자기 결심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그것 소용없습니다. 자기 결심으로만  '내야 할 수 있지' 말 큰 소리하는 그것 가지고 장담하는 그것 가지고 제 결심  가지고 제 배짱 가지고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당장에 폭풍 앞에 등불 같이  꺼져 버리는 것입니다. 배짱이 뭐이며 장담이 뭐입니까 시험은 그 사람의 전부를  다 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돕는 하나님의 돕는  도우심으로만 이길 수 있는 그것이 시험입니다.

 정도에 따라서 이러기에 "모든 시험은 불로 금을 연단하는 것보다도 더 연단  하는 믿음의 연단이라" 그 말은 순전히 하나님의 지혜 지식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소원 요것만으로 된 것은 남았고 나머지는 다 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시험에 한번 졌으면 진 것 그것을 인해서 다른 것을 깨달아야  되지 인간 인정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아도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  인정 그것이 좋은 것이지마는 아무것도 아니요 매우 적은 것입니다. 또 자기가  인정하는 그것도 인간들이 인정하는 그것보다는 힘이 있지마는 그것도 매우  빈약한 것이요 허무한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 순전히 다른 것은 다 태워 버리고 정금만 남는 그것보다 가치  있는 믿음의 연단이라 말 아닙니다. 불로 연단 한 금보다 나은 그 낫다는 말은  정금보다 가치가 연단 받음 믿음이 가치 있다 그 말 아닙니다 그 말이 아니고  불로 금을 연단해서 거게 잡철이 다 타버리고 순금만 남는 그것보다 인간 행위의  인적 요소 인간으로 된 것 땅에 있는 모든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소원으로 하나님의 지혜 지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순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요것만 남고 그 외의 남은 것은 다 잡철같이 불타지기를  순전히 인본의 것은 다 없어지고 하나님으로 인한 그것만 남아 있는 그것이 금을  불로 연단해서 순금만 남아있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잡것이 없이 한다 그  말입니다.

 연단 받은 믿음이 정금보다 가치 있다 그 말입니까? 아니요. 정금, 정금  그것보다 잡것이 없이 깨끗하기를 그것보다 더 깨끗하다 그 말입니다. 시험해서  잡철을 다 제하고 순금만 남는 것처럼 깨끗하기를 더 인간의 것이나 땅의 것은  다 타버리고 순전히 하늘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으로만 된 그 깨끗이 마치  비유컨대 정금을 만드는 그것보다도 깨끗하게 구별해서 인간의 것 땅의 것은 다  제거되어 버리고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의 것으로만 되어있는 것을 가르쳐서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 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그것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순전히 창조주 한 분의 힘으로 된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어제도 설교를 해야 알아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구역장들도  하나도 못 알아들어 여러분들은 병들었소. 설교야 백 번 천 번 외우지 지금 다  외우고 있지 그래도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진리는 몰라 여러 날  그렇츰 해도 듣기는 싫지 환난 오면 다 떨어집니다   어떤 것이든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심판에서 합격된 것은 껍데기는  사람이요 그 속에는 진리요 그 속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가지고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승리하는 것 아니요 진리의 힘으로만 승리하는 것  아니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순전히 하나님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슨 말인지 암만 해 봤자 못 알아들어 배우기야 여러분들이 백 번 천 번  배우지 배우는 것 가지고 되는 것 아니라.

 그러기에 어떤 승리든지 승리가 이루어지는 데는 그 사람의 노력은 어떤  노력이냐 그 사람의 노력은 진리가 와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진리를 영접하는  그 노력입니다. 제가 그 이기는 것 아니요 다 제가 이길 줄로 알았던 사람들은  다 헛일입니다. 자기 부인한 사람들이 이겼고, 그러기에 평소에 허울 좋은  부흥사들은 떨어졌습니다. 부흥사 쳐놓고 환난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요 진리 하나를 거머쥐고 옳으냐 그르냐 그렇게 씻고 눌러지고 그것을  구별하려고 애를 써서 이것이 확실히 진실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구별하고  구별해서 요기라 하는 참의 다시는 딴 것이 없는 완전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것을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안하고 자기의 연구 제목으로 두고있는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그렇게 세밀한 사람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자기의 신앙을 한 토막 한 토막  걸어가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이겼습니다.

 이긴대도 수많은 정도입니다. 제가 6.25 때에 어떤 목사 한 분이 그 분이  6.25가 지나가고 난 뒤에 우리가 간증을 할 때에 자기는 아주 6.25때에 두려움이  없이 그렇게 평안하게 담대히 이겼다고 믿음으로 이겼다고 이렇게 말하는데 여게  그런 사람 중에 하나 또 있습니다.

 여게도 저 우리 ○○○ 씨가 이겼습니다. 와 가지고 6.25때 나한테 한번 찾아  왔습니다. 와 가지고서 자기는 담대히 이긴 것 같은데 내가 보기는 전부다  틀렸습니다. 다 패전이요 그래 내가 자기는 담대하게 평안하게 이라는데 자기는  평안하고 담대한 그것이 신앙인 줄 이렇게 알고 있는데 전부 다 마귀 것이  되가지고 있는데 그거야 평안하고 담대하지 뭐 두려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어떤 목사가 그 지경이라. 무엇이든지 인민군이 거석해 인민군 만나도 인민군  만나면 뭐 두려울 것이 있는가 거 인민군이 나와 같이 지내고 인민군 찾아다니고  인민군이라도 하나도 거리낄 것 없고 하나도 두렵지 안하고 이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디다. 그것을 제가 듣고 저 껍데기  외식자 네가 전부 다 실패되어져 있는데 너는 승리한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탈이다 그것을 그 사람에게 직접 말하지 아니하고 그 교역자 회의 모였을 때에  비슷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은 안다 이거요 마찰입니다.

 또 거게 ○ 집사라고 한 분이 있었습니다. 내나 ○ 뭐고 ○ 목사인데 저  아미동에 있습니다. 관계가 ○○○ 목사님의 처남 되는데 그 목사님의 동서 되는  사람입니다. 그 목사님의 처형입니다. 6.25 때에 그 사람은 아주 다른 사람은  인민군을 부득이해서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그 사람들을 할 수 있으면 안  만나려고 애를 쓰고 부득이 해서 만날 때는 속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고 생명 내  놓으면 그냥 괜찮고 이래 지내는데 그분들은 뭐 아무 두려움 없이 인민군들에게  조금도 두려움 없이 상관없이 이렇게 마구 섞여서 지냅니다.

 '뭐 인민군이 뭐이 두려워 믿음이 없어 그렇지' 믿음이 없으면 두렵지 안  하지요 믿음이 없으면 두렵지 안 하지요 믿음이 있으니까 두렵지. 두렵지 안한  것은 믿음이 없으니까 두렵지 안 하지 그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 목사는 인민군이 두렵지 안한 것은 무엇을 방편으로 삼았더냐? 인민군  만나면 '아, 수고하십니다' 아, 그것 잘해요 그것 못한다 그 말이요. 어떻게  그분들이 무신론이 자기 사욕으로 하나님 인정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막  끌려갔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수고라. 그들이 하는 데에 하나도 참 뭐 하려고  하니까 거석하고 마음은 전부가 반대가 되기 때문에 말이 나오면 전체가 반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를 만나면 지금 반드시 생명을 내 놓아야 되기 때문에  두려워지지 이렇지마는 그 사람 만나 가지고서 '수고하십니다' 그게 피난처라  그것은 그들의 동참이라 인민군에 동참 죄라 인민군으로 정죄 받는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그 후에 목회가 실패입니다. 또 그 부인이 ○ 집사라는 분인데  그 분은 뭐 인민군에게 이랬는데 '네가 믿음이 없다' 내가 불러 놓고 '네가  믿음이 없다 네가 담대한 믿음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네가 목숨을  내어놓아서 담대하냐 네가 네 안에서 참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못 보는  것이 목숨 손해 보는 것도 또 표어로 정해 가지고 담대하냐 네가 하나님  의지하느냐 인간 의지하기 때문에 완전히 네가 인간이 되고 말았고 믿음에서  떠났다' 자기네들의 무슨 또 사촌 시동생 시숙 이 사람들이 전부 내무 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부 내무 서에서 인민군 지금으로 말하면 지서 모양으로  인민군의 지서요 파출소요 그 내무서원들입니다.

 그 내무서원들이니까 이것 의지하고 담대합니다. 인민군 암만 만나도 '아무  것이가 우리 무엇입니다' 그것 한 마디로 다 돼. 하나님이 그것 모릅니까? 그것  다 잡탱이 신앙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것을 바로 찾아 가지고 이기는 것이  문제고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기지 못합니다. 요것 중요한  말입니다. 크나 작으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666 이하에 있으면 헛일입니다.

777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면이나 큰 면이나 그것이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이  되지 안으면 그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세계가 놀랄만한 큰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시발되었고 하나님이 시공했고 하나님에게 딱  들어맞은 것이 아니면 남아 있지를 안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아무나 따나 이렇게 이거나 저거나 같다고  흐리멍덩하게 그 정확하지 안하고 그만 '이거나 저거나 같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런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신학자들이 수많은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저래 말하고 저래 말하고 저래 말하는데 너는 어느 것이고 뭐  이거나 저거나 다 같지 그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에게는  인기가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다 정죄돼 버리고 남아있을 것이 없습니다. 옳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수많은 것이 있는 가운데 비판하고 비판하고 비판해 가지고  요것 하나다 하는 그걸 찾기 전에는 중단하지 않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것을  찾아 받기 전에는 중지하지 않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걸 찾아 가지고서 보다 요것 보다 요것 보다 요것 보다 요기 조것 보다 요기  이렇게 해 가지고 이상은 더 찾을 수가 없다 요것은 흠이 있느냐 잘못된 것이  있느냐 요것은 요리 보아도 조리 보아도 아무리 보아도 흠점이 없다 하여 찾은  요것이 자기 거룩입니다. 그것이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소. 그러나  자기로서는 거룩에 속한 사람이라 말이요 자기로서는 그 이상 찾을 수가  없으니까 그 이상 찾을 수가 없는 거기에서 중단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은 거룩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그게 맞습니까? 안 맞는 것도 있지요. 그러나  자기로서는 자기 지식으로서는 자기 노력으로서는 그 이상 찾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거룩입니다.

 그래가지고 "거룩함과 진실함이라" 거룩하고 진실한 자가 말씀하신 진실이라는  그것은 이제 그렇게 해서 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참이 둘입니까 셋입니까  넷입니까? 어떤 사건에서든지 거기에서 어떤 사건에서 참 아는 것, 사건을 참  바로 하는 것 참이라는 것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  씨도 그 면으로 노력해야 해야 됩니다   그 면으로 노력하는 것은 지금 흐리멍덩하이 666 이 걸려서 죽기 싫습니다.

날카로워져야 됩니다. 세밀해져야 됩니다. 그러면 평안 무사 때는 신앙생활  하지마는 마지막 극단에 가서는 다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평안 무사할  때 신앙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살려야지.

 진실이라는 참이라는 거기에 도달한 그것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입니다.

그것이 불타지 안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은 인간 좋다는 말이 듣기  어렵습니다.

 자기는 아무리 좋아하려고 해도 상대방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너희들은 나에게 사망을 주고 나는 너희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그것이 사도 바울이 한 말입니다. 왜 그 사람에게 고쳐질 것 깨어질 것 그러니까  새사람이야 좋아하지마는 예수님을 좋아했습니까?   제자들도 예수님을 좋아했지마는 자기네들이 깨어지는데는 다 싫어서 갔다 왔다  이래서 간 뒤에 성령이 오셔서 붙들어 주셔서 주를 좋아하지 그전에는 따라  다녀도 항상 그 반대하면서 비웃으면서 엿보면서 그래 따라 다녔습니다.

이러니까 요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우리의 노력은 뭐이냐? 우리의 노력은 거룩의  노력입니다. 거룩의 노력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윤곽적으로 주신 신구약 성경  말씀 요 말씀을 요것을 요게는 요 말씀에 해당하느냐 저 말씀에 해당하느냐  요것을 거기에 대한 진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의 노력입니다. 그  진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그 노력을 보시고 진리를  그에게 알려 주십니다. 인간 힘으로 진리를 찾는 것 아니요. 인간은 무엇이든  하나님에게 받는 노력의 받을 수 있는 준비 노력이라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자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그에게 줍니다 주면 그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잡고 진리를 그 진리를  굳게 잡아 설 때에 굳게 잡았을 때에 그 사람에게는 진리로 인한 안보가 옵니다  진리를 잡았을 때에는 사람이 생명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담력이 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생명 내놓을 수 있는 그 실천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자기 주관적  결심이고 주관적 소원이지 거 있을 때에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승리를 줍니다. 충성되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승리는 하나님이 주시지 제가  하는 것 아니라 그 말입니다.

 그런고로 환란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셔야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데는  진리를 잡아야 되고 진리를 잡는 데에는 자기가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구별해  가지고서 그 요기라 하는 그것을 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사건을 당했을 때에 '나는 이렇게 살겠다' 처음에는 결심을 하지요  또 자기가 설교를 듣고 이 설교를 들으니까 '이렇더라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결심했다' 아무리 결심해 봐도 그 힘은 아주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트를 가졌다가는 나중에 성구로 돌아가라 성구로 포기하는 노트라 설교라  그것을 늘 내가 말하는 그것입니다.

 자기가 이 사건에 '내가 이렇게 하겠다' 싶어도 그것은 붕 뜬 자기의 일반적  마음입니다. 자기 주관적 마음입니다. 자기 주관적 결심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떨어집니다. 그럴 때에 '요것은 요 성구 요 성구에 해당되는 때에 요 성구니 요  성구니 나는 요것을 어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그 자기가  요렇게 하면은 '요 성구에 저촉된다 또 성구가 요렇게 하라고 했다 요 성구가  요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면 그것을 어기면 무엇이 되고 요 성구가 요렇게 하라고  했다' '확실히 성구에 이러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요 성구를 바로 하는  것이다 요 성경말씀을 범하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범하는 것이다 요렇게 하는  것이 성경말씀을 이기는 것이다' 그 성구를 잡아 가지고 그 성구를 범하느냐 그  성구를 지키느냐 요것이 자기에게 있을 때에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은  해서는 안되겠다 그런 것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신앙 상식적으로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야 된다' 그것 가지고는 힘이 없습니다.

거기에 해당되는 성구를 찾았을 때에 '요렇게 하면 요런 죄가 된다' 그 성구를  찾았을 때에 그것을 자기가 전적으로 대항하는 마음이 있고 대항해야 되겠다는  책임이 지워지고 '요기에 대한 요 성구가 요렇게 하라는 요 명령이기 때문에  명문 되어있는 명령이라 바로 요 성구가 요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요기 요 성구가  요기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다 이러니까 내가 요것을 해야 되지 안 하면 안 하는  것은 직접 주님의 명령을 거슬리는 것이요 주님을 대항하는 것이다'  요것이 확실히 단정이 되어질 때에 그 사람으로서는 자기 있는 힘을 다  기울이게 됩니다. 그렇게 기울이게 되는 그것이 그 성구가 들어서 그 사람에게  그런 힘을 주었습니다. 제 힘이 아닙니다 그 성구를 찾았기 때문에 그 성구가  들어서 그 사람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 성구로 인해서 그 힘을 얻어 가지고  요렇게 지키는 것이 주님을 바로 영접하는 것이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며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 내가 요것을 주님에게 맡기는 것이라 자기가 요렇게 확실히 깨달아지기  때문에 그 성구로 인해서 그 명령되는 성구를 잡았기 때문에 이래서 자기로서 이  성구가 주는 힘을 힘입어 가지고 자기가 처음에는 자기 단독 힘으로서 성구를  찾다가 성구를 만나고 난 다음에 성구의 돕는 힘으로서 이만큼 자기에게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강한 사람이 된 것이 제힘이 아닙니다 성구가 준 힘입니다.

진리가 준 힘입니다. 진리가 준 힘을 가지고서 그만큼 강해졌습니다. 그만큼  진리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그 만큼 강해졌을 때에 그 사람에게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완전 승리를 그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자기가 '그렇게  살고 싶다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하는 소원만이 아니고 결심만이 아니고 작정만이  아니고 그 일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가버립니다 이루어집니다 성사가 됩니다.

성사가 되는데 거게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고통으로 승리한 사람도 있고 자기가 고생을 당하면서  승리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고생 없이 승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생 있게  승리한 사람이 있고 고생 없이 승리한 사람이 있고 고생이야 왔던지 말았던지  고생 없이 승리한 사람이 있고 고생 있게 승리한 사람이 있고 두 승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요 일을 승리하셨는데 십자가에 승리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고생 있게  승리했습니까 고생 없이 승리했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 씨 (고생 없이  승리했습니다.) 고생 없이 승리했다 고생 없으면 우리 위해서 고생을 안  받았습니까? 네 답이 맞습니다. 고생 있게 승리했는데 자기 주관에는 고생 없이  승리했습니다. 고생 없습니다. 고생 있는 것은 외부요 고생 없는 것은  내부입니다. 환란에서도 고생 있게 승리하는 것은 고생 당할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고생 없이 승리하는 것은 고생 당할 것이 고생 당할  요소가 없으니까 고생이 암만 들어 와도 고생이 됩니까? 그 예수님은 고생 있게  승리한 것은 당신에게는 고생 있게 승리할 것이 없는데 우리 때문에 우리 것을  짊어지고 고생 있게 승리했습니다. 당신에게 대해서는 고생할 것이 없기 때문에  요소가 없기 때문에 고생 없이 승리했습니다. 이것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습니까?  우리가 실지로 나가는 데에는 거게까지 나가게 됩니다.

 범사에 큰 생활이나 작은 생활이나 그 생활이 실지로 생명이냐 사망이냐 정점에  가 가지고 최고 절정에 가 가지고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갈래길이  된 거기에는 그 초점에 도달하는 데에는 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느냐 진리가  함께 하시느냐 자기 혼자 단독이 하는 것이냐 자기와 진리와 하나님이 합해서  하나님이 진리를 통해서 당신이 나타나시고 진리를 통한 하나님과 진리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내어 자기가 승리가 되는 것이지 자기가 하는 것 아닙니다. 언제든지  여기에 도달되어서 여기에 종착이 된 여기에 도달된 그것이라야 심판을 면하고  그것이 연단해서 불타지 안하고 종점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평소에 성경을 배울 때에 이렇게 둘둘둘 뭉쳐서 이런  귀에 듣기 좋은 것은 받지 마십시오 성구를 꽉 잡으십시오. 그것 때문에 자꾸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요 성구는 뭘 가르쳤는가? 성구를 거기에 자기가 귀속되어서 '하, 요 성구는 뭘  가르친다' 그 성구를 잡아야 되지 성구잡지 안으면 안 된다 그거요. 아무리 귀에  즐겁고 아무리 시원하고 해도 성구와 자기와 딱 잡히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하는 이것을 말해서 말은  외우지마는 그것을 느끼지를 못해.

 이것이 부활절을 부활해서 좋아하는 그것이 다 일반적으로 지금 이 성령의  사람이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하노니" 하는  여기에는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하는 그 성령의 사람이 원하는 것이 뭐이며  성령의 사람의 사상이 뭐이며 성령의 사람의 기뻐하는 기쁨이 뭐이며 그 성령의  사람이 어떤 생활을 원하는 그것으로서 원하는 것인가 여기에 도달하지 안하고  죽는 것은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라 고생이요 이제 부활은 고생이 다 끝났으니까  이제는 평안이라 십자가의 죽으심은 십자가의 죽으심에 그 생활은 끝났다 그  생활은 끝났고 이제 죽음의 그 죽음의 반대 이제 투자의 반대되는 수입이 오는  때다 우리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 죽는 그 생활은 다 바쳐 희생하는 다 바쳐  투자하는 그 투자의 생활은 끝났고 이제는 투자한데 대해서 이제는 대가를 받는  그런 부활이라 이렇게들 생각을 합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이 죽음 이 죽음 이 투자 이 희생 그것이 없으면 제사장 노릇 못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투자해야  제사장 선지자 왕 노릇이 되어지지 그것 안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투자하는 것 희생하는 것이 이것이 어서 끝나고 투자와 희생이 없는 그  부활을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까 투자와 희생이 죽음으로 끝났습니까 투자와  희생이 죽음으로 끝났습니까 또 있습니까 십자가의 희생이 죽음으로 끝났습니까  또 있습니까? 또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여반에는 왜 안  들어. 아무래도 벌로 해도 못 알아들어. 어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죽음으로  이제 죽지 안 했소 다 투자 희생하지 안 했소. 자,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이소.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것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러면 죽는 이  죽음을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죽는 죽음과 같은 이 투자를 영원히 계속하기를  원한다는 그 말이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하는 말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손  한번 들어 보이소 여반은 큰 일이라. 여반은 헛일이라. 계속 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렇게 아는 사람이 없다 그 말이요. 이렇게 부활 주일을 지키고 부활을  맞이하는 사람이 없어.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가고' 하는 찬송 그 잘못 지은 찬송입니다. 실은 우리가  부르기는 부르지마는 찬송을 부를라해야 부를 찬송이 없어. 이러니까 '복의  근원' '예수의 이름 권세 7장'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이런 찬송도 부르면  참 깨꾸름합니다. 성경에 맞지 안 해서 교리와 신조에 맞지 안 해서 모두가  인본주의 자들이 지은 찬송이 많다 그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을 안 할 수가  없고.

 누구든지 제사장 생활을 선지 생활을 왕의 생활을 이 직책을 감당하는 것이  어짜든지 빼앗아 놓은 거야 못 먹겠나 거저 죽자 사자 허리띠를 졸라매어 가면서  얼마동안만 수고하자 그라면 그 다음에는 평안이 온다 이러니까 거저 이 제사장  생활 선지 생활 예수님의 모형생활 예수님의 계대 생활 이 생활이 괴롭고 아프고  어렵고 하지마는 입을 다물고 하면 요것 있는 것만 다 투자해서 그렇게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런 것이 없는 평안이 온다 하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아직까지 자기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 안 하면 안돼서 하는 것 아니요  하나님이 그것 하신 것이 당신의 즐거움이요 하고 또 하고 영원히 하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이요 그것이 당신의 생애요 그것이 유일한 당신의 목적이요  소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실천하는 데만 알게 됩니다.

어떤 복음 전도자가, 권찰들도 약간 맛을 보기는 보았을 것입니다. 왜 자기가  권찰직을 하면서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해서 이렇게 하는데 '아이구, 이것 어서 이  일을 다하고 나면은 뒤에 쉬고 다시는 이 일이 없을 터인데 그 일이 하기 싫어서  하기 싫어서 어서 끝내버리면 좋겠다'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자기에게 힘만  있으면 이 일을 하고 또 하고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집을 방문하는데 힘있으면  두 집하면 되는데 세 집하면 세 집하고 백 집하면 백 집하고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하고 싶은데 힘이 없어 모지래 힘이 있기를 원하는 요것이 영생에 속한  제사장 선지자 왕의 본질 그대로 된 요 요소입니다. 억지로 하는 말이요? 부득이  하는 것 아닙니다 즐거움으로 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즐거움으로 하는 자 이 즐거움이 세상에서는 유한한데 부활에는 이 즐거움이  무한히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에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 성령의 사람의  소원입니다. 그것이 부활을 원한다는 것이요 어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는  것 중간반 반사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부득이 함으로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 즐거움으로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즐거움으로 하는 자도 부득이 함으로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즐거움으로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자기에게 있는 것이 다  드려지니 아까움으로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있는 힘이 모자라서 더 있으면 더하면  싶으므로 할 때도 있을 것이니 하나는 옛사람이 하는 것이요 하나는 새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이 될는지 모릅니다.

 통성으로 기도 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여러분들이 성구를 잡아야 됩니다. 요 부활도 요것이 뭐인지 노트 가지고서  성구 그것을 잡기 위해서 요 성구 요기라 하는 것을 확실히 잡고는 노트는  불태워 버려야 됩니다 없애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 의지하면 안 돼. 성구를  잡기 전에 꼬아 넘기는 것 같이 내가 상식적으로 이러니 뭐 '설교가 이러니'가  아니라 설교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람이 설교 의지한 것을 설교는 이렇게  하기도 하고 저렇게도 할 수 있지 뭐 설교는 이런 설교도 있고 저런 설교도 있지  않던가 그것은 나중에 생명을 내 놓고 자기가 다 절단 나는 그 때는 변명이 많이  나옵니다 갈래길이 많이 나오요.

 이러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배운 그것이 하나 있으면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하지마는 마지막에 죽을 때는 그렇게도 말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 이런 설교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도 주장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지 않느냐? 그럴 때에 탈선되어 나갑니다. 장사가 전부 이리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 성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성구가 있지 않느냐 성구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구를 대항하는  것이 하나님 막 바로 대항하는 것인데 이것으로 하나님 대항하는 것으로 하고  해야 된다 여기에서 돌아서서 성구가 자기에게 그 힘을 받아 가지고서 성령이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알아듣기 위해서 까끌까끌하게 자꾸 이렇게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고 이런 것을 암만 말해야 모른다 그 말이요. 성구에 접선시키려고 말하는  거라 그 성구를 알기 위해서 그것이 아니면 다 소용이 없어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아 알속이 없어. 그래 믿는 사람들 많이 있어 여게 그래 믿는 사람들  생활을 보면 알아 그 생활이 철두철미 하지를 안 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뭐인지를 모르고 질팡 갈팡이라 그 생활이 질팡 갈팡이라면 그 사람이 교리와  신조가 그렇다 말이요 깨달음이 그렇다 말이요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그러면  그 깨달음이 그렇다 말이요 그러나 아무 절정이 없어.

 김현봉 목사님이 어떤 사람의 주석을 보고서 이 사람은 아무것이는 이렇다  아무것이는 저렇다 다 이렇게 말하니 성구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는데 너는  다른 이야 상관없어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다 맞다 자기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것이라.

 그러니까 그 사람의 생활은 팔방미인의 생활이라 아무 정함이 없어 그 사람은  믿을 수 없어 그 사람의 가는 길이 무슨 길인지 몰라 가속으로 속화될 수밖에  없어 환경과 주의와 형편에 따라 변해질 수밖에 없어 사람보고 믿나 그 사람보고  믿어 천인 만인이 이렇게 말하지마는 요것도 나와 같다 요것도 아니다 요것도  믿을 수 없다 요것도 믿을 수 없다 거기에 하나 뿐이라도 요걸 하나 긍정한다  요걸 내가 받아들인다 이와 나와 한가지다 그 사람은 그것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몰라도 자기 거룩은 가질 수밖에 없다 그 말입니다. 구별하는 사람이라  그 말이요.

 어찌 둘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거룩을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옳은 것을 주십니다 이것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신학자들 보면은 거 논설한 것 보면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는데  자기는 자기 의견은 없소 소개만 했지 자기 주장은 뭐인지 없다 그 말이요.

거기에 거룩은 거기에 태점을 조금을 탁 치고 테이지를 안 해. 동정이라는  타협이 안 돼. 섞이지를 안 해. 하나 요렇게 꼭닥스럽게 꼭 구별이 되어지지  마찰이 되어지지 테이지를 안 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좁습니다.

좁으면서 실은 전부요 진리는 무한히 넓은 것입니다. 흐리멍덩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옳으냐가 아니라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요것을 꼭 구별해  나가야 됩니다 팔방미인으로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하면 안 돼. 요거는  요래야 되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데 그게 아니야 요거면 요거고 저거면  저거지 그렇게 좀 진실한 사람 거룩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64 부활과 생명/ 요한일서 5장 4절-9절/ 811108주후 선지자 2015.11.02
63 부활과 이단의 미혹/ 고린도전서 15장 36절-45절/ 880523월새 선지자 2015.11.02
62 부활관/ 고린도전서 15장 50절-58절/ 890312주전 선지자 2015.11.02
61 부활관/ 고린도전서 15장 52절-58절/ 890312주후 선지자 2015.11.02
60 부활관/ 요한계시록 20장 4절-6절/ 890317금야 선지자 2015.11.02
59 부활받는 매 주일/ 요한복음 11장 25절-27절/ 830403주전 선지자 2015.11.02
» 부활에 이르려/ 빌립보서 3장 11절/ 800407월새 선지자 2015.11.02
57 부활의 소망/ 이사야 1장 1 8절-20절/ 890724월새 선지자 2015.11.02
56 부활의 소망으로 산 것은 헛되지 않다/ 890623금새 선지자 2015.11.02
55 부활의 소망으로 산 것은 헛되지 않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58절/ 890723주후 선지자 2015.11.02
54 부활의 영광의 차이/ 고린도전서 15장 40절-44절/ 881130수야 선지자 2015.11.02
53 부활의 차이와 심는 일/ 고린도전서 15장 42절-44절/ 880616목새 선지자 2015.11.02
52 부활한 몸/ 고린도전서 15장 42절-44절/ 881201목새 선지자 2015.11.02
51 부흥되지 않는 이유/ 에베소서 6장 18절-19절/ 890122남전도회 선지자 2015.11.02
50 부흥의 비결/ 이사야 49장 20절-22절/ 880731주새 선지자 2015.11.02
49 분망, 아담하와의 실패원인/ 창세기 2장 15절-17절/ 1988. 8. 8. 오전집회 선지자 2015.11.02
48 불건전한 신비주의/ 베드로후서 1장 17절-21절/ 850703수야 선지자 2015.11.02
47 불기둥과 구름기둥/ 출애굽기 13장 21절-22절/ 810329주후 선지자 2015.11.02
46 불로 연단한 금/ 요한계시록 3장 18절/ 871028수야 선지자 2015.11.02
45 불목은 사망 화평은 생명/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871206주후 선지자 201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