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것을 생각하고 들은 것을


선지자선교회 1988, 5. 3. 화 오전집회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지난밤과 오늘 새벽 두 시간을 걸쳐서 사람병 고치는 역사를 주님이  하셨습니다. 사람병이 고쳐지면 그의 모든 지식도 생활도 행위도 그 인격성도  모든 속성들도 다 고쳐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병 고치고 나면 남은 병은  고깃덩어리병 그것만 남습니다.

 사람병이 고쳐지면 건강체는 모든 병들이 다 저절로 다 약화되고 또 치료되고  다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원력이 약해지면 모든 숨어 있던  병들이 다 나타나서 합동 세력을 가질 때에 사람은 거기에서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병 고쳐지면 금생도 내세도 모든 것은 다 고쳐짐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병 고치는 거기에 대한 말씀을 두 차례로 증거를 했는데  처음으로 듣는 사람들은 재미있게 듣고 아주 달콤하게 여깁니다.

 그런 사람들은 앞으로 ‘입에는 꿀같이 다나 네 배에는 쓰리라’ 하는 그  말씀대로 자기가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그때에 그 쓰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새 고통을 만나도 소화하고 나야  자기의 영양이 되고 힘이 되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그 사람은 표준하는 것이 어데 있는  고 하니 이 말씀대로의 자기의 구원을 이룰려고 하는 그 표준보다도 자기는  자식으로 아는 것으로써 표준을 정한 그 사람은 아주 큰 병이 들었는데 그것을  고쳐야 되지 그거 고치기 전에는 그 사람은 점점 세월이 갈수록 이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지니까 그 사람은시야가 좁아지고 또 그 사람은 소망이  근시적이고 이러기 때문에 실패를 잘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 말씀을 돌을 때에 자기가 사람 고치는 이 치료를 받고 있는  이 말씀으로써 치료를 할라고 애를 쓰고 치료 받기에 힘을 쓴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다 꺼꾸러집니다. 왜? 자기가 매일 씨름하는 것이 이 말씀으로 씨름했는데  매일마다 이 말씀에게 정죄받고 책망받고 또 자복해야 되고 그저 이 말씀 앞에는  열 번, 백 번, 천 번 늘 자복했기 때문에 제일 두려운 것이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나오면 그만 발발 떨고 두려워서 이렇게 돼지는데 그렇지 안한 자는  이 말씀이 오면은 자기는 다 이루어진 것처럼 그만 교만하고 또 뻔뻔하고 이  말씀을 점점 무시하는 사람이 돼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라고  애쓰지 안하는 자는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무시할 말씀은 없습니다. 왜? 이  말씀은 당장에 행하지 안해도 누가 그 나서 가지고 왜 네가 이 말 하지 안하느냐  그런 이가 없고 다 자유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세상 말은 그게 말한 이가 있고 거기에 또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행하지  안했으면 당장 거기에 대한 댓가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했느냐 이렇지만 하나님  말씀은 뭐 일생동안 버려도 하나님은 왜 네가 이 말씀 버렸느냐 하면서  직접적으로 나타나게 대항하는 일은 없고 보이지 안한분이기 때문에 처리도  보이지 않게 처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는 줄 모르게 말라서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아는 말씀이라, 그 사람이 이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달라드는 것은 그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행할라고 애쓰지 안하고 이  말씀과 관련을 꿇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정말로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명령에 복종할라고 했으면은 그 여러 수천 번  자복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거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행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러면 한 번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이러니까 이 말씀이  나타나면 반갑고 두렵고 떨리고 또 하나님이 이렇게 새로운 희망으로써 재시를  치르도록 해 주시니까 소망 중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점점 겸손해지고 자기 알기는  점점 죄인 되어지고 다른 사람 볼 때에는 점점 의인이 되어져가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성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주장대로는 의인인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점점 죄인되어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경험과 체험에서 생겨지는 그 형태인데 이 말씀대로 실행할라고 하지  않는 그 사람들은 경험과 체험이라 하는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거 내가 생각이 나서 말하는데 우리 진영 가운데서도 목회하는 사람들이나 또  목회하지 않는 일반 평신도의 생활하는 사람 중에 크게 나누어서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생각이 됩니다.

 하나는 뭣인고 하니 하나는 젊은 층을 상대하는 그런 사람 하나 있고 또 늙은  층을 상대하는 그런 사람 있고 이렇게 사회생활이나 또 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렇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말 들으니까 어떤 진영인데 그거 좀 아마 정통 있는 그런 좋은  진영입니다. 우리 서부교회에 있던 사랑들이 다시 그 진영으로 돌아갔는데 그래  그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서, 그분이 요새 평안하시냐고, 그래 그분이 그전같이  그렇게 지금도 열심히 그렇게 모든 일을 하고 있느냐 이래 물으니까 그 사람은  보이지도, 나이 말은 사람은 보이지도 안하고 젊은 사람이 있다가 ‘아이구 그  사람이 나이가 얼마인데 지금 뭐 일합니까? 그런 사람이 무슨 일 합니까? 다  젊은 사람들이 일하지.’ 이라면서 벌써 그 사람 죽지도 안하고 살아 있는데  그거는 쓰지 못할 완전히 폐물이라 못쓰고 아주 젊은 층을 나서 가지고 우리  젊은 층들이 뭐 일하지 그 모든 노인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 그렇게 말하면은  오히려 묻는 사람을 부끄러울 만치 볼 것 없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서. 그런 말  내가 전달해 들었습니다. 내가 들을 때에 그 교회는 망한다, 그 교회는 근시자가  된다 그렇게 생각을 했고 틀림없이 그대로 나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나이 많은 늙은 층을 귀중히 여겨서 상대해서  붙들고 일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또 젊은 층을 붙들고서 일하는 사람 있고  두 가지 있는데 둘 다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그 장단점이 있느냐 하면은 젊은 사람들은 시작하는 일과 일을 진행하는  일을 빨리하고 힘있게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걸 좋아합니다. 또 나이  많은 층은 장점이 무슨 점인고 하니 많이, 경험해봤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를  벌로 시작하지를 안하고서 일을 시작하기를 싫어하고 일을 할 때에 또 느리게  합니다.

 이라니까, 늙은 사람의 단점은 일을 빨리 시작하지 않는 것과 일을 할 때에  힘있게 용감스럽게 앞뒤도 생각지 안하고 열심있게 해 나가는 그 일이 약한  그것이 약점입니다. 장점은 모든 일을 생각해 가면서 참 깊이 생각하고 이래  가지고 하는 그점이 장점입니다.

 그것이 어데서 나왔는고 하니 자기가 모든 일을 해 보니까 거기에서 경험의  지식이 생겨졌고 체험의 지식이 생겨졌으니까 이거 벌로 날뛰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서 어떻게 일을 꼼꼼히 할라 하고 또 무슨 일을 하자 해도 어뜩 그만 젊은  사람은 ‘예 합시다.’ 그만 이래 달라드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그렇게 썩 담대하지를 못하고 그저 멈춤멈춤하고 자꾸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뭐 하자 하면 그만 당장 하자 이렇게 대번입니다.

 이러니까, 결과적으로 젊은 사람들을 거머잡고 일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모두가  다 육체적이요 또 비경험적이요 비체험적이요 모두가 다 근시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패가 많습니다. 또 나이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서 하기 때문에 천천히 가서 급행은 아니고 완행으로 가기는 가지마는  실수가 적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진영에 교역자들도 차차차차 일을 해 보니까 늙은 층들은 하자  하면 뻐뜩 잘 동하지 안하고 느릿느릿하고 뭐 하자 하는데에 반대가 많고. 젊은  층들은 하자 하면은 ‘예 합시다.’ 막 불같이 와닥딱딸라드니까 경험 없는  교역자는 젊은 층을 좋아하고 친하다가 마지막에 자기도 망하고 그 교인도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눈이 어두워 못 봐도 온 교계를  보면 다 볼 수가 있고?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그러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겠느냐? 지혜롭게 걸어갈라면 모든  경영과 시발은 늙은 층을 거머쥐고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늙은 층을 거머쥐고  시작을 하고 그 일을 진행해 나갈 때에는 젊은 층을 등용해 가지고서 진행해  나가면 이 모두 노소가 아롱아롱해서 그것이 아주 보조가 잘 돼 가지고서 잘  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되 그 사람이 고대로 실상을 이룰라고  애를 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은 전혀 모릅니다. 그  경험과 체험한 사람은 아무리 둔해도 그 자기가 실행의 경험이라 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나타냈어요. 체험이라 하는 것도 나타났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사람들은 산 생활의 결과는, 뭐이  되고 마는가? 아, 별수 없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하셔야 돼지 하나님이 안  하시면 안 된다. 하나님이 인정해야 되지 인간 인정 계획 그거 아무 힘없고  소용없다. 차차차차 하나님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만드는 사람이 돼지고,  실행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나중에 얼마 지나가다 보니까 전부 제가 잘나서,  저, 또 저 아니라도 인간, 인간들의 지식, 인간들의 말, 이라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머쥐고 눈감고 생각할 그런 뭐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만 당장 자기 생각대로 해 치워 버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차차차차  하나님께 대한 경험이 없고 체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두려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절대자인 절대성도 모르고 하나님의 신실성도 모르고 하나님은  차차차차 가치가 희박해지고 인간들의 가치는 커지기 때문에 인간 말은 가치가  커서 인간의 지식인 모든 신학의 좀 수준을 높이자 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이거 다 대학을 졸업 맡고 난 다음이라야 뭐이 된다’  그런 것도 필요하지마는 그것보다도 신학의 수준을 높이는 데는 이거 그래  신구약 성경에 뭣이 있나 없나 그거나 짐작해야 되지 신구약성경에 뭐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알지 못하고 어느 한 절이나 그거나 알고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이 광대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겠느냐? 이러니까 신학 수준을 높이는 데에는  이 성경 지식을 높여야 되겠다 이런 소리를 저거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합니다.

모릅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속에 없는데 그 말이 나오겠소? 그거는 다 경험  없는 사람이요 체험 없는 사람, 신앙의 경험 없는 체험 없는 사람의 행동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것은 전부가 다 경험이요 체험이요 또 진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어데서 나오는가? 모두가 다 순종에서 나옵니다.

 혹 생각할 때에 아브라함을 백세에 낳은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 했는데  아브라함이 밤새껏 잠을 안자고 나무를 팼다 하는 데 대해서 견해가 모두 각각  다릅니다. 얼마나 잠이 안오고 기가 막혔기 때문에 백지 나무만 툭툭 팼겠나  그래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야, 아브라함은 좋아서 못 견뎌서 지금 초저녁부티,  모리아산에는 뭐 나무 꽉 찼는데 뭐 할라고 장작을 지고갈까? 이러니까, 아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는 오십 점짜리로 바치는 것보다도 팔십점짜리가 낫고  팔십점짜리보다 백점짜리로 바치는 게 낫다. 어째야 좀 더 기뻐하도록 만족히  바칠까 그 면만 자꾸 생각하니까 장작을 팬 것입니다.

 그것이 어데서 나왔는가? 그 아브라함의 신앙에 나왔다 했는데, 신앙에서  나왔는데,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나왔다 발이 무슨 말입니까? 저게 OOO교회  O장로님, 아브라함이 그렇게 번제 드리라 할 때에 어기지 안하고 머뭇거리지  안하고 순종했는데 그 순종이 어데서 나왔느냐? 믿음으로 그렇게 순종했다,  믿음에서 나왔다 이랬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 드리라는 그 순종이 믿음에서  나왔다 하는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믿음에서 나왔다는 말이 무슨 말이요?  순종해 본 경험과 체험에서 나왔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말씀대로 순종해 보고는 그 사람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다 자기가 짐덩이로 지고 가지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필요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왜? 아무리 평신도라도 교인도 그렇게 순종한 교인이라면 목사는 자기의 짐이  되지 필요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필요고.

 목사가 짐된다 말은 목사님을 위해서 자가가 책임이 있으니까 기도해야 되고 또  거기에서 자기가 여러 모로 자기 의무와 책임을 하고 하니까 전부 이 목사님을  이렇게 짊어지고 가야 되는 그것이 되어지는데 경험 안 하고 체험하지 안한  사람은, 그런 게 없는 사람은 하나님은 필요 없고 인간만이 필요한 사람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삼십 팔 년된 환자나 모든 환자들을 예수님께서 고쳐 놓으시고 난 다음에는  평상을 들고 돌아가라, 또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돌아가라 하는 그 자리나  평상이나 같은 뜻인데 그것은 자기가 참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입기 전에는 그  모든 것에게 다 짐이 되었고 모든 것에게 다 신세를 지웠고 모든 것에게 들어  얹혀서 짐덩이가 돼 가지고서 살던 그 모든 것을 예수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은  새사람이 되면은 과거 짐덩이가, 내가 과거에 그에게 짐덩이 됐던 것은 그것들을  내가 내짐으로 짊어지고 걸어가지 안하면 안 되는 그런 입장이 완전히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진영에서는 모두 말하기를 ‘이거 뭐 젊은 사람들이라야지 늙은  사람들은 안 된다.’ 이러니까 ‘뭐 나이가 지금 정년이면 칠십이 정년인데 그  늙은 사람들이 뭘 해요, 지금? 다 젊은 사람이 일하지. 늙은 사람이 뭣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늙은 사람이 뭐 일해요?’ 이라면서 볼축 없이 말하더라고. 그게  뭐이냐? 너는 멸망 길을 걷고 있다. 너거 목사도 멸망 길 걷고 있다 하는 그거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의 장단점이 있고 늙은 사람의 장단점이 있으니까 젊은 사람의  장단점은 날뛰기는 부지런히 날뛰지마는 실패가 많은 그것이 단점이고 부지런히  날뛰는 것이 장점이고, 나이 많은 사람의 장점은 실수 없고 성공하는 것이  장점이고 모든 것을 좀 천천히 하고 열심있게 날뛰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  단점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인고 하니 앞뒤도 생각지 안하고  전후도 생각지 안하고 장래도 생각지 안하고 과거도 생각지 안하고 현재에만  맞춰 가지고 말하는 사람은 못 할 말 없고 말에 어려울 게 없습니다. 막  재불재불하게 막 웅변으로 마구 해재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말  못하는 사람이오.

 말 잘하는 사람은, 과거를 자기가 알고 있는데 과거와 관련 있는 말을 해야  되겠고 또 앞으로 지금 영원에 관련이 있는 말을 해야 되기 때문에 이거  말하기가 힘이 들고, 또 자기는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지 않는 그런 모든 면을  많이 보기 때문에 말을 잘하지를 못합니다.

 이래서, 말 잘하는 사람은 앞뒤를 가리지 안하고 그렇게 마구 주 지꺼리는 것을  말 잘한다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 있고, 그 사람이 말하는 그 말은 벌써 보는  범위가 넓었고 또 어느 개체만 아니라 전체를 봐서 그는 가고 가고 암만 가도  모든 면을 다 봐도 그 면에 모순됨이 없고 실수됨이 없고 후회됨이 없을 수 있는  그 말을 더듬어서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이렇게 하면서 그렇게 더듬어 말해도 그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또 많이 지꺼리는 사랑을 잘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그런 것도 보면 그만 망하고 홍하는 것 다 아요.

 이러니까, 뭐 잠깐만 행동해도 ‘이거 저거는 고쳐야 되지 안 고치면 안  되겠는데, 저거는 저런 데에는 무슨 실패 무슨 실패 저게는 무슨 성공 무슨  성공이 있으리라.’ 하는 것을 환하게 못박아 놓은 거와. 같이 그렇게 아주  정확합니다.

 이래서, 창세기 49장 거기에 아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을 해 줬는데 그  축복해 준 것은 야곱이 자기 자녀에게 대한 그 현상을 고대로 자기가 하나님을  말씀으로 판단께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 야곱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라도 그렇게 치우쳐서 그렇지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서 똑똑히 분석해 가지고서 말했기 때문에, 야곱이 말해  놓은 그 말은 예언이라 하는데 예언이 아니고 현재에 된 그 상황을 바로 그대로  말했으니까 그대로 보응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이 말씀대로 자기가 실행할라고 하지 안하면은 아무 맛도  없고 재미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실행할라고 하는 데에서 어려움도 있고 재미도  있고 자기 약점도 알고 자기의 무한한. 그 희망점도 알고, 그 희망점은 전부  하나님으로 희망점입니다. 자가가 해보면 ‘아이구’  이래서,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진 걸로 자랑하고 가난한  자는 자기의 부한 것으로 자랑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서 실행을 해보니까 자기가 과거에 컸다 높았다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또 자기는 아주 인종지 말자요 이거는  희망없는 아무짝도 못쓸 인간으로 알았는데 예수님을 척 믿어 보니까 자기같이  희망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래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아주 자기가 납짝 땅 속에 파묻혀지는. 그것이 또  자기가 아주 아무것도 없는 자가 참 말할 수 없는 그 유망한자로 강하고 아주  장대한 자가 되어지는 것도 이런 것은 다 신앙 경험 체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 일은 시키시는 것이면 다 된다. 시키시는 것은 안 되는 게 없다.

 그러면, 시키시기를 어떻게 하나님이 시키셨는가? 신구약 성경 말씀은 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지도를 하고 시키시는 그 말씀입니다.

 말씀은 그거는 다 된다는 말인데, 그러면 믿음이 능력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믿음이라 믿는다는 그것이 능력 있는 줄로 그렇게 착각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믿사옵나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 믿으라.’  아니오.

 믿음 그 자체에는 아무 힘없는 것입니다. 아무 힘없어. 아무 힘없는데 다만 그  믿는 것이 말씀하신 그분이 내가 그분의 말씀대로 행할 때는 말씀하신 그분이  책임지고 이행해 주신다는 요것을 인정할 때에 그분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능력 있지 우리가 뭐 믿는다는 그게 능력 있는 것 아니오.

 그러기 때문에, 뭣이든지 기도하고 이렇게 이루어질 것을 자기가 인정한다 해서  인정하는 그것이 무슨 능력 있는 게 아니고 말씀하신 주님이 내가 말씀대로 행항  때에 말씀하신 그분이 책임을 지고 그대로 하는 나에게 이행해 주시는 그  신실하신 그분에게 능력이 있어 그분이 해 주신다 하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이거 다 복습하는 것인데,  세상에 지식은 두 가지 지식이 있다 했는데 일반인에게 두, 가지지식이 있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중생된 자들에게 두 가지 지식이 있지 중생되지 안한  사람에게는 한 가지 지식뿐입니다. 그것은, 인간 지식, 사람 지식, 세상  지식뿐이오.

 하나님의 지식도 그들은 인간 지식 중에 한 종류로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들은  전부 사람의 지식이라 이렇게 하나로만 보고 상대하는 사람들이요, 중생된  자들에게 인간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 죽은 지식과 산 지식, 죽이는 지식과  살리는 지식 이 두 가지 지식이 있지 사람이라고 다 가진 것 아니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다 ‘장인이 버린 집 모퉁이 요긴한 돌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시온에 둔 반석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 하나님의 지식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무시한 것만치 깨어진다 그걸 가리켜서 돌에 떨어지면  깨어진다 이래, 돌에 떨어지면 깨어진다. 이 말씀에 자기가 배척하고 대항하면  대항하는 것만치, 부인하는 것만치 그는 깨어진다. 이 반석이 그 위에 떨어질  때에는 가루가 된다.

 이제 이 말씀을 오늘에 배척하는 것만치 부정하는 것만치 자기는 망하게 되고  이 말씀이 마지막에 그를 거머쥐고 심판할 때는 완전히 영원한 전멸이 되고 만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 지식 죽은 지식이 있다. 또 살리는 지식과 죽이는 지식이  있다 하는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 두 가지 지식이 있는 것이지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죽이는 말씀 저것도 죽이는 말씀 다  그들에게는 뭐 그것뿐이지 두 가지 지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지식, 두 가지 갈래길이 있습니다.

 이래서,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시간으로서 제일 가치로 삼고 보배로운 시간은  어느 시간인가? 현재라는 시간 그것만이 자기 시간이기 때문에 거기에만  시간으로는 가치를 둬야 되고 딴 데는 가치를 하나도 둘 곳이 없다.

 거기에만, 그 시간에만 가치로 두고, 또 모든 존재에 대해서는 현재에 자기가  접촉하고 있는 그 현실에 관련된 그것만 자기에게는 가치가 있지 딴거는 가치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딴 데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그것도 또 마귀가 오면은 ‘그래도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는데’ 내일이 누가  있다 하더냐? 주님이 있게 하셔야 있지, 있게 하시면 또 그거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획이 없느냐? 현재라는 그 현실이라는 현실에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현실에 관련된 것이 있고 또 과거에 대한 모든 반성도  현실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시간적으로 현재라고 하는 것은 현재에는 과거,  미래, 현재 이 세 가지를 한테 합해 가지고서 현재라는 그 현재에다가 다 집결을  시켜 가지고서 현재를 하나님의 지식으로 돋파나가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또,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자기는 현실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자, 모든  존재와의 과거에 내가 어떤 관계를 가졌더냐? ‘그것은 과거는 과거로  청산하고’ 절대 안 됩니다. 어떻게 과거로 과거가 청산이 돼집니까?   과거가 있으니까 모든 존재와 과거 관련 있으니 과거 관련 그놈을 거머쥐고, 또  미래 영원한 관련이 있으니 미래 영원한 관련을 거머쥐고 그 과거에 관련 미래에  관련 그것을 요 현실에 주 끌어다가서 그것을 종합을 해 가지고서 현실에 관련을  자기가 가져야만 바로 가질 수가 있고 이제 실수된 과거를 다시 재생하지 않을  수 있고 치료될 수가 있고, 또 미래에 대해서 모든 허영과 헛된 계획을 그것이  다 수정해서 바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와 조화를 맞추는 그 삼각이 바로 되는 데에서 가치가 생겨진다.

삼각을 바로 되는 데 가치가 생겨지는데 삼각관계를 바로 맺을라고 할 때에는 그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지식이 둘이 있나.

 이러니까, 산 지식의 지도를 받으면 산 결과를 맺을 것이고 죽이는 지식의  지도를 받으면 죽는 그 결과를 맺게 된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다 택함받아  중생된 사람들에게 이런 소망이나 희망성이 있는 것이지 택함받지 안한  자들에게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밤과 오늘 아침까지의 말씀에서 단단히 잡기를, 그러면 시간은  현재, 존재는 현실, 나와의 관계, 관계를 맺는 데에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관계를  맺으면 생명이 이루어지니 하나님의 지식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나님의 지식은  과거 미래, 현재 이 그 삼 계단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서 과거 미래라는 요것을  현재라는 요 현실에다 집결시켜 가지고서 현실이라는 요 구멍으로 통과가 돼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의 생애를 짜 가지고서 나가는 사람에게는 절대  후회하는 길이 없습니다. 후회가 없습니다. 또 그에게 실패도 성공이요 성공도  성공입니다.

 그라다가 맞아 죽어도 그것도 잘 죽었고 그래 가지고 그라다가 존귀해져도 잘  존귀해졌고 실패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단단히 잡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 사람이 된다고 하면은 아주  사람병이 고쳐져서 아주 이제는 약할지라도 건강체가 됐기 때문에 앞으로 살면  산 것만치 자꾸 건설해 나가고 또 성장돼 나가고 모든 것을 다 점령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지난밤과 오늘 아침에 사람병 고치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 사람병 고치는 이 방편을 쓰지 안하고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  지금 영원한 영광이냐 수치냐 하는 자기를 지금병 고치는, 인간병 둔 그것을  고치는 지금 좋은 의사가 와서, 치료하고 좋은 약을 주는데 자기 고칠라고는  하지 안하고 이것을 자기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 족한 줄 알고 자기 고칠 줄  모르는 그자는 어리석은 자요.

 하나님 말씀을 들으니까 잠이 옵니까? OOO목사 잠이 와요?’잠와? 안 와? 이  말씀은 들으니까 무서워 시뻐? 이 말씀 들으니까 미안해 업수히 보여져? 자복할  것 있어?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서 이 말씀에서 힘도 얻고 또 자기는 꺾어지기도  하고 근심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그 회로애락, 지정의, 언행심사가 이  말씀으로 인하여서 움직이는 요것만이 산 건데 우리가 고것을 할라고 애를 써도  그게 일조 일석에 되지 않습니다.

 그게 사람병이 그거 지금 치료되는 것인데 그렇게 쉽게 치료가 됩니까?  그러니까, 말하기를 하늘나라는 힘쓰는 자의 것이지 힘센 자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꾸 이렇게 우리가 부절히 계속해서 힘만 쓰면 그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지극히 작은 것에 힘썼는데 지극히 큰 것도 가능하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약으로 선포해 놨습니다.

 1절에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이랬는데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켜 말합니다. 일곱 영은  성령님, 이 성령님은 우리를 중생시키신 성령님인데 여기에 일곱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완전 역사를 하시는 그 성령을 가리켜서 일곱  영이라 그렇게 여기에 표현했습니다. 일곱 영이라, 우리에게 완전 역사를  일으키시는 성령님이라 하는 것을 일곱영으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일곱 영.

또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일곱 별은 하나님의 교회의 사자들이기  때문에 이 사데 교회의 사자를 하나님의 장중에 잡고 있다 이렇게 하는  말입니다. 장중에 잡고 있다. 그러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하는 말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데 교회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주님과 관계가 맺어져있다 하는 걸 말합니다. 관계가 맺어져  있다.

 그러면, 사데 교회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주님과 관계가 맺어져 있다.

그러면 사데 교회 사자는 주님의 장중에 잡혀 있고. 또 성령의 은사를 그가 벌써  연결해 가지고 있다 그걸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러기에, 이 일곱 교화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 일곱 교회가 못되게 나갈 때에는  ‘나는 이런데 너는 어째 그러냐?’ 반대의 주님으로 나타나셔 가지고서 회개를  독촉했고, 또 바로 행할 때에는 ‘나도 이렇고 너도 이런데 너와 나와 갈다’  하는 것으로써 위로하시고 소망의 강한 힘을 주셔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데 교회는, 사데 교회는 하나님의 장중에 잡혔고 또 성령의 은사를  벌써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받아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장중에 잡히고 성령의 은사를 배아  가지고 있는데 일곱 별을 붙잡았다는 이것은 무슨 뜻을 말하는, 것인고 하니  사데 교회가 주님의 장중에 잡혀서 주님의 수족노릇의 그 역사의 행위가  시발됐다 하는 것, 시발됐다. 또 성령은 하나님의 이 교훈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이 교훈과 지금 연결이 돼 가지고 있다 그런 말입니다. 연결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사데 교회는 이 모든 행동이라는 행정으로서는 주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고 교훈으로 성령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일곱별을 잡으시고 일곱 영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데 교회는 교훈적으로 주님과 결함이 됐고 또 이 역사적으로  주님과 결함이 된 사데 교회라. 이러기 때문에 이 사데 교회는 너희들은  살았다는 이름이 있다. 살았다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죽은 자다.

 그러니까, 살았다는 이름이 있다 이랬는데 그 다음에 가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5절에 ‘이기는 자는 이와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이러니까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됐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책에 기록 이 홑다는 그 증거인데 생명책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과 연결책이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이 돼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결에 벌써, 연결에 다 가입돼 있다. 하나님과 연결이 가입돼 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자꾸 요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를 딱 잡아서 ‘과연  그렇다’ 이거는 뭐 이래도 저래도 자꾸 융통성 있는 게 아니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아무나따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이래 끌어다 붙이는  게 아니고 ‘이거는 변동할 수 없는 요 한 길밖에 없다’ 요것을 또 똑똑히  잡아야 그에게 생명이 되어지는 것이지 그 둘로 잡을때는 이거 생명은 안됩니다.

둘로 잡았을 때는 생명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학자들이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그렇고’ OOO박사님의  조직신학을 그때 한 몇 페이지 봤는데, 한 대여섯 페이지 봤어요. 봤는데 거기에  보고서, 뭐 그만하면 다 알아요. 봤는데 보니까 그분은 아주 다른 학자들의 그  학설을 인용을 했는데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그분이 아주 독서를 많이 한  분이고 알기를 많이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혹 조직 신학에 대해서 무슨 재료를 자기가  수입할라고 하면은 그 누구의, 벌코프라든지 하지라든지 어떤 분들보다도  OOO박사의 그 조직신학을 보면 그분이 많은 독서를 해 가지고서 기록을 했기  때문에 그거 읽어 가지고서 나도 그것을 인정하면 다 내것이 되고야 맙니다. 그  많은 독서를 해서 많은 사람들의 깨달음을 거기다가서 인용해 놨습디다.

 이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는다 말은 생명책에 벌써 녹명이 돼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흐리지 아니하고  하는 그말은 생명책에 이미 기록이 돼 가지고 있다 그말입니다.

 생명책에 이 사데 교회는 생명책에 기록이 돼 가지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결책에 기록이 돼 있다 말인데 하나님과 연결 명록에 ‘하나님과 이는 연결돼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연결된 자로 벌써 등록이 돼 가지고 있다 말이오.

하나님과 연결된 자로 등록이 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흐리지 아니 하겠다’ 하는 말은 생명책에 등록된 것을 그대로 둬 둘  수도 있고 삭제할 수도 있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보입니다. 삭제 할 수도 있고  그대로 보존할 수도 있는데 내가 삭제하지 않겠다.

 어떤 자에게? ‘이기는 자에게’ 이기는 자에게는 삭제하지 않겠다 그랬습니다.

이미 그러면 등록은 돼 가지고 있는데 이기는 자는 등록된 것을 이것을 삭제 안  할 것이고 진 자에게는 이 등록된 것이 삭제된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말씀을  합니다.

 또,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 이름을  시인하겠다. 그 이름을 시인하겠다는 이 이름은 그의 모든 행위를 다 가리켜서  이름이라 여기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름이 죽은 것은 행위가 죽은  것이요 이름이 산 것은 행위가 산 것이요, 또 이름이 커지는 것은 행위가  커져가는 것이요 이름이 차차차차 파묻히고 존재가,   이름과 그 모든 생애와 그 자체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나쁘면  이름이 나빠지고 자체가 못쓰게 되면 이름도 못써지게 되고 또 행위가 자꾸  나쁘면 이름도 나빠지고 행위가 좋으면 이름이 좋아지고 그 사람의 행위와  자체가 자꾸 위대 해지면은 그 사람 이름이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름이라 하는 건 자체의 모든 행위와 그 전부를 총칭해서 한  말로 이름이라 그런게 말했습니다.

 ‘그 이름을’ 그 자체와 그 모든 행위 전부를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 그러면 그 이 자체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천사들 앞에도  인정하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인정하겠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 효과 천사들 앞에서  인정한다는 말은 시인한다 말은 내가 책임지겠다 하는 말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그러면, 그 자체도 ‘이는 뭐 이는 됐습니다. 이는 다 통과하십시오. 또 행위도  ‘이 행위도 다 통과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것, 주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은 그 이름을 인정한다 말을 그 자체와 그이의 모든 이력 전체를  소유와 그에게 관련된 모든 소속을 다 하나님께서 시인한다 옳다 인정한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양성원 학기 경건회 시간에 제가 언제 말할 때에  ‘인정받기를 노력해라’ 하나님에게 인정 안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인정받기를 애쓰는 사람 있습니다. 그 혹 천인 만인이 말해도 주님이  인정 안 하면 안 된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이라면 주님 앞에 인정받겠나 안  받겠나’ 인정 하나를 가지고서 그 사람은 자가의 모든 생애를 다 심사해 가지고  빛의 생활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이래서,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흐리지 않겠다. 이미 녹명돼 가지고  있다 말이오. 녹명돼 가지고 있다. 또 그의 이름을 아버지앞과 천사 앞에  시인하겠다.

 시인하겠다. 이것은 미래사입니다. 시인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제 네가 이기는 생활을 하면은 이미 녹명되어 있는 것은 삭제되지 안할  것이고 또 네가 이기는 생활을 이렇게 하면은 네 생애는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거는 심판을 말하는데 심판대 앞에서 인정을 내가 하겠다.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생애를 네가 할 수 있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인정받을 만한 그 생애를 할 수가 없고 또  인정받을 만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하나님의 공심판은  전지자가 입법한 그 입법의 심판에 통과되는 것인데 어떻게 전지의 입법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입법을 다 이행한 자로 인정을 받습니까?   이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이것도 얼마나 커서 이것도 많이 울어야 됩니다.

그렇게 쉽게 여러분들이 차지할라고 하지 말고.

 이 뭐 조그만한 지방 장관, 시장한테도 인정받는 사람될라고 애를 쓰고, 찍해야  뭐 금년에 보니까, 어찌 됐습니까? 오 년입니까 칠 년입니까, 지금? 인제 오  년인데 오 년 인정받아 봤자 그거 효력이 오년밖에는 안 갈 것인데 대통령에게도  인정받을라고 모두 사람들이 애를 쓰고, 학교서는 학교 선생한테 인정받을라고-  애를 쓰는 것,   그 권한이 끝날 때까지는 그분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만 제일입니다. 그분에  인정받으면 다 되지 않습니까? 알파와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라, 끝이 없는  이 주님 앞에 인정받고 하나님의 공심판에 인정을 받아야 그 생애가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다 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 보니까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하나님 앞에서 온전타 인정을 받은 그 행위라야  그 영생이 되는 것이지 그냥 인간들 천인 만인이 인정해야 소용없어. 그분이  인정을 해야 돼.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인을 맞아야 된다. 성령이 인정을,  성령이 도장을 꾹 찍어서 됐다 인정을 해야 된다 그말이오.

 이런데, 사데 교회는 이길라고 힘만 쓰면은 이미 생명책에 녹명이 돼 가지고  있는 이 녹명이 삭제되지 아니할 것이고 또 이 이기기를, 힘만 쓰면 그 모든  행위는, 그 이름은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인정을 하겠다, 내가  인정하겠다 말은 주님이 인정하시면 주님이다 책임지시니까 그 뭐 못 들어갈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이 대 형, 대행, 대화친의 완전 공로를 설정했기 때문에  그분이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어떻게 해도 그분이 옳다 인정할 때에 어떤  피조물이 정죄할 것이 있으며 송사할 자가 있습니까? 송사 못 합니다. 그분이  인정하면.

 그러기 때문에, 그분 한 분에게 인정받기를 힘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그 일에 몰아넣어 가지고서 거기에서  ‘네가 여기에서는 멸망이지’ ‘하나님이 여기에서 인정할 때 아무도 너를  손대지 못한다’ 인정하는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해 가지고 인정을 시키는  역사를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 당신의 뜻대로 이렇게 해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꾸 이렇게 경험과 체험으로써 확신을 길러 갑니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인정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데  교회는 하나님이 표준하기를 어떤 것을 표준하느냐 하면은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

 그 우리 행위가, 온전이라면 이 백점입니까 오십점입니까, 구십 구점이요? 백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렇게 백점입니다. 백점인데 이  백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간의 인정에 백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온전을 이루는 이것을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데 아 온전을 이루는 이 온전이 가능하다고 했습니까  불가능하다고 했습니까? 가능하다고 했습니까 불가능하다고 했습니까. 저 뒤에?  저 뒤에, 가능하다고 했습니까 불가능하다고 했습니까? 네,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가능한 그 이유가 뭐인가? 그것이 생명책세 녹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생명책에 녹명 됐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됐나 안  됐나 하는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그것이 생명책인데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을 한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는 그것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가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예수님이 당당히 이는 온전하다 이렇게 인정을 해서  거기에서 당신이 보증이 되시고 당신이 증인이 돼 가지고서 ‘이는 온전합니다.

이는 뭐 통과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는 온전합니다.’ 이렇게 인정할 수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내가 네 이름을  시인하겠다’ 그 시인하게 되는 그런 완성을 어떻게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것을 우리가 단단히 깨닫고 믿어야 됩니다.

 이 세상에 예수 밖에 도덕으로나 사상으로나 그 무슨 행위로나 털끝만한  것이라도, 온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온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이걸 안  믿어. 이걸 모두 다 교회들이 안 믿어요,   뚱딴지같이 뭐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은 게 아니고 조그매  남아 있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이 도덕심이 있고 뭐 이런 다  인간들에게도 무슨 선량한 점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죽지 안하고  조그매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의 작용으로써 그와같이 지금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좀 남아 있다.’ 이렇게 말하는 학설이 그것이 크고  많은데 그 학설이 정통 보수에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지마는 이제 일반 교회  백에 구십 구는 지금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전적 타락이라 전적 부패라 완전히 죽었다는 것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고 그저 시덕시덕 조그매 그 좋은 점만 죽고 그저 아주  찌끄러기 그런 점은 남아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일반 목사들이요 일반  신학자들입니다. 그것은 다 이단이요, 그거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완전히 죽었습니다. 전적 부패입니다. 완전 사망입니다.

 이런데, 이런 자가,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도 인정받을라고 요새 보니 뭐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야단을 한 번 쳤는데 그 사람에게 인정받을라 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하물며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지자가 입법해  놓은 그 입법에 통과라! 이 입법에 통과라!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이런  행위가 무슨 행위인가? 온전한 행위라 그말이요, 온전한 행위.

 온전한 행위인데 이 온전한 행위가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느냐?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 있다는 걸 소망을 가지고 달라 들어야 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거룩하심같이, 깨끗하심같이  깨끗하라 하는 그 성구를 어떤 내가 그 사전에 요거 뭐라고 해 놨는가 보려고서  내가 찾아보니까 ‘그것은 사람이 아무 교만한 자라도 하나님 앞에 교만을  부리지 못하도록 네가 이 법 지켰나 할 때에 아이구 나는 그 법은 못 지켰습니다  사람을 꺾어서 억압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그런 법을 내 놨다’  이렇게 말을 하고 ‘온전해지는 이건 도리는 인간은 그렇게 가능성이 없다’  그렇게 말을 해 놨더라 말이오. 그거다 사람을 유혹하는 말이요 불신의  말입니다. 가능합니다.

 왜 가능하냐? 가능한 것은 왜 사람이 죄를 안 짓고 살 수 없어? 죄를 안 짓고  살 수가 있다 말이오. 가능합니다. 우리가 현재 죄 안짓고, 죄를 완전히 짓지  안하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 못 되어서 있을 지라도 우리는 완전히 범죄하지  안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털끝 만한 죄도 짓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은 다 이행할  수 있는 이런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의 희망이 확실히 있습니다.

 이것은 뭣 때문이냐? 생명책에 녹명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과 연결이 됐는고로 그분과 연결된 그 능력이 들어서  그와같이 하는 것이지 다른 게 들어서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지능이라 하는 것은 다 ‘주 예수께서 그의 주시는  힘으로 하라, 그의 힘으로 하라, 그의 지혜로 하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분에게 피동되면은 그분에게 연결돼서 그분의 그  온전하고 충만한 것이 자기 것이 되어서 그분이 곧 자기를 통해서 온전함이  나타나시기 때문에 가리켜서 그분의 지체라 몸이라 이렇게 성경에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래서, 그 가능성 있는 것은 벌써 생명록에 기록이 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인정받는 그 생활, 심판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도 인정받고 하는 그 생애를 할 수가 있어.

 할 수가 있는 것은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자기가 패전해도 ‘나는 이 시간  나는 일어서서 나는 온전함을 잡고 나는 온전할 수 있다’ 하는  그 소망을 가지고 일어설 때에 그 사람은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넘어졌다  할지라도 그 생명록에서 제명이 되기 전에는 가능합니다.

 그러면, 제명이 안 되느냐? 제명이 됩니다. 제명이 되는 것을 그위에 말하기를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는  그 말씀은 제명되는 때가 있다 그말이오. 자꾸 참고 참고 있지마는 언제든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제명할 때가 되면은 제명해 버리면 그만이라.

 이러거 때문에 히브리 12장에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그가 한 그릇 식물에다가 장자의 기업을 팔고 그 뒤에는 기업의 축복을 받을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했지마는 다시 그걸 고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일깨워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를 터인데’ 도적같이 이른다  말은 그 자기에게 있는 권리고 모든 것이 다 뺏겨진다 그말이오. 뺏겨진다.

 그러면, 뺏겨지는 것은 주님이 뺏는 게 아니라 그거 때가 되니까 그것이 다  제거돼 버리고 만다 그말이요, 제거된다. 기회가 지나가 버리니까 제거돼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언제든지 무기회가 아니라. 당신이 정해 놓은 그 기회는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는데 그 기회가 되면 딱 제거돼 버리면 그만이라.

 그러기 때문에, 회개라 하는 것을 내가 아무 때든지 회개 하면 되지 생각하는  그것이 굉장한 강퍅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게 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지 회개하게  하실 째가 지나가면 회개 못 합니다. 강퍅을 부리면 나중에 가서 그만 강퍅해서  하나님께서 제거해 버리면 다시 회개를 못 해요. 제가 아무리 회개 하고 싶어도  회개가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회개는 하나님이 회개케 해 주셔야 회개가 되는 것이니까 그  기회를 놓치지 안하고 ‘주님이 이 회개하는 이 기회를 제거하지 마십시오. 나를  회개시켜 주옵소서.’ 하고서 매달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회개야  내 자유로 하는 것이니까 내가 할라면 하고 말라면 말고 뭐 밤에 할라면 밤에  하고 낮에 할라면 낮에 하고 금년에 할라면 금년에 하고 이 사업을 해서 성공해  놓고 할라면 성공 후에 하고.’ 하는 그런 것을 가지는 것은 강퍅한 행위입니다.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는 말은 이 녹명된 것이  제명되는, 하다 하다 안 되면 제명을 해 버리요. 제명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안 됩니다.

 사람들 보면 그 사람이 벌써 ‘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 녹명이 제명이  됐다’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다’ 연결이 끊어졌으니까 그  비참합니다. 비참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항상 맑은 정신  가질 수 없고 맑은 그 기쁨을 가질 수 없고 살아 있으나 그 사람이 보면 저 속에  그 하나님의 생명 역사가 없다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시에 너희에게 이를는지 알지 못하리라’ 이 녹명이 돼,  가지고서 있기 때문에 이 녹명된 것을 가리켜서, 녹명이 돼가지고 있으니까 제일  처음에 사데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일곱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이 사데 교회 사자에게? 일곱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그러면, 사데 교회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의 이 은혜를 사데 교회 사자는 가지고  있다, 이 가진 주님이 말한다 그말은 네가 지금, 사데 교회 너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주님이 장중에 잡으신 이 은혜를 네가 가지고 있다, 받고 있다 고걸 요게  말합니다.

 요거 단단히 여러분들이, 달리 해석을 해 봐요. 못 해요. 달리 해석하면 이래  해석하면 여기가 틀리고 저래 해석하면 저기가 틀리고 자꾸 삐뚤어져요. 바른  해석은 천 군데로 만 군데로 쥐어짜도 자꾸 해석할수록 이 더 견고해지고 더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 연결을 가진 자는 그 행위에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는 그 이유가 뭐인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이렇게 그 연결은 가지고 있으면서, 연결을 가지고 있으면서 네가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말은 네가 이길라고 힘쓰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표현하기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다. 생명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는 있다.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는 있는데 네가 실상은 죽어 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연결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연결이 돼 가지고 있느냐? 거기에  내려보면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그러면 이거 살아 가지고 있습니까 죽어 있습니까? 살아 가지고 있다  말입니까 죽어 있다 말이요? 살아 있다는 말이오.

이렇게 성경을 자꾸 새겨서 그 속에 뜻을 그걸 깨달아야 되는 것이지 줄줄 읽어  가지고 이래 놓으니까 그뭐 껍데기만 알고 속에 알맹이를 깨달아서 참된 이치를  모르면 우리에게는 생명의 역사의 능력이 안됩니다.

 ‘너는 일깨워’ 일깨운다 말은 이제 그게 생명은 벌써 속에 들어가지고 있다  말이오. 자고 있으니까 깨면 내나 산 사람 생활 할 것이고 그만 활동 안 하면  활동적으로는 죽어 있다 그말이오.

 ‘일깨워 남은 바’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남은 바 죽게된  것이라 하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들은 다 죽었습니까? 이제 과거로 현재까지는 다  죽었는데 아직까지 미래에 남아 있는 것은 살아 있다는 말입니까? 미래 남아  있는 것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는 왜 죽었습니까? 죽은 것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살았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지 죽은 자라’ 하나님과 연결돼서 연결됐다는 명단만 네가,  연결된 명단만 거기에 얹혀 가지고 있지 네가 연결된 그 효력은 네가 얻어  가지지를 안하고 써먹지를 안했다. 그 효력은 써먹지 안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그러니까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죽게 된 것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  말이오. 죽어 가고 있는 것. 죽어가고 있는데 현재에서 그 모든 죽어 가고 있는  것을 중단해 가지고 거기에서부터 산 생활을 시작하라 그말입니다. 이제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굳게 하라 그말은 죽지 않도록  하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그러므로 네가’ 이제 다시 연결된 것을, 요 연결된 것을 다시 네가  찾아 가지고서 연결의 효력을 입으라. 연결의 효력을 입으라.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그러면 받은 것은 무엇을 말하며 또 들은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들은 것은 성령에 관련된 이 교훈을 말하고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이  역사에 대해서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받은 것은 행정에 속한 것이고 들은 것은 교훈에 속한 것인데 이  성령님과 우리와의 연계되는 그 연결은 뭘로 연결됩니까? 교훈으로 연결됩니다.

네, 지금은 여러분들이 졸졸 다 아는데 그만, 다 알아 뭐. 다 알지마는 그만  자꾸 버리기 때문에 몰라요.

 일곱 영과 연결은 교훈으로 연결됩니다. 교훈으로 연결되고 또 ‘일곱별을  잡으시고’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건 그 역사는 뭐이냐 하면은 우리에게 ‘어떻게  받았으며’ 받는 것으로 됩니다. 받는 것으로.

 받는 것은 교훈 받고 난 다음에 자기가 깨달음으로 받는 것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자기가 받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 가지고 그 교훈으로 어떤  의로운 행위함을 받는 것도 있고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능력받는 것도  있고 자기가 또 경험받는 것도 있고 체험받는 것도 있고 자기가 또 여러 가지로  고침받는 것도 있고 자기가 사람병 고침 받는 것도 있고 자기가 기도의 응답받는  것도 있고 자기의 하는 일에 하나님이 동행해 주심을 받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받는 일이 많다 그거요,   받는 일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심이 나와 동행하는 역사의 흔적을 내가  사건에서 받는 것도 있고 역사에서 받는 것도 있고 내 자체의 인품, 인질에서  받는 것도 있고 우리가 받는 것이 많습니다.

 ‘어쩐지 요새는 주님이 내게 와 가지고서 이상하게 역사해서 내가 평소에 안  되던 의로운 생활이 돼지네’ 또 어떨 때는 ‘나는 내나 꼭 같이 힘을 쓰는데  요새는 자꾸 실수만 하고 자꾸 그리 돼지네’ 언제는 실수만 돼지네 언제는  의롭게 돼지네.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나한테 이래 하는 것은 참 하나님이 도우심이라 그 사람  마음이 왜 그렇게 나한테 독사 같은데 또 변해지노? 또 그 사람이 나한테 어제.

게 좋아졌는데 그만 독사와 같이 변해지노? 독사가 양같이 그래 순해지노? 모든  인간관계나 사물 관계 모든 데에서 당신이 나에게 역사해 주시는 그 증거를  우리가 받는 그것을 가리켜서 받는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교훈면으로,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배우든지 해 가지고서 교훈을 내가 받는 것은 하나님과 어떤 면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까? 어떤 면이 연결되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설교를 배우든지 이래 하는 것은 어떤 면 연결입니까? 어떤 면 연결입니까?  성령님과 연결입니다.

 성령님과 연결되는 것이고 또 자기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은 뭐와 연결됩니까?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주님의 그  장중에 내가 붙들려서 그분과 나와의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연결, 주님의 역사와의 연결 그 연결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러면  성령님과 연결은 뭘로 연결됐습니까? ‘어떻게 들었는지’ 지금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금 듣고 있습니다. 이 듣고 있는 이것으로써 성령님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와 가지고 우리 생활에나 우리 자체 안팎에 와가지고서  그분이 친히 역사하셔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의 증거를 받는 일이  있으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받은 것을 말합니다.

 성 나는 것도 받은 것이겠고 자기가 깨달은 것도 받은 것이겠고 하나님이 와서  역사하셔 가지고 사람이 변화된 것도 받은 것이고 생애가 고쳐진 것도 받은  것이고 이제 성령은 우리의 이 모든 언행 심사가 이것이 변화되도록 하는 것은  당신의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고 또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성경이 알려 주는  것인데 다 물과 피와 성령은 셋인데 하나라 이랬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을 할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리를 알려 주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이 알려 주신 그 도리를 통해 가지고서내 자체가  변화되든지 생활이 변화가 되든지 또 하나님이 나 하는 일에 도와 가지고서 객관  역사가 도와 가지고서 이거는 분명히 하나님이 도우신 일이다. 하나님이 도우지  안했으면 이 일은 안 된다. 하는 거 그런 것도,   이번에 우리가 여기에 우물을 팠는데 이 우물이 인제 대구서는 물이 제일  좋습니다. 말할 것이, 대구에는 제일 좋다 그래 담대히 말할 수 있어. 어느  물이든지 가져와도 이 물만한 물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거는 그렇소.

 부산에서는 서부교회 물만한 것은 부산 시내는 없습니다. 제주도 물이 좋다고  제주도 물을 실어와 가지고서 뭐 요런 한 병에 얼마씩인데 부산에 모든  음식점마다 다 이거 갖다 놔도 썩지도 안한대요. 오래 갖다 놓고서 조그만한  컵으로 하나 ‘이거는 요거는 제주 생수이고 요거는 서부교회 생수입니다. 이  서부교회 생수가 제주 생수보다 훨씬 오래 나가고 좋습니다.’ 그란대요. 그거  지금 뭐 그저 한밤 중에나 좀 숴까 계속입니다. 계속. 이 물도 인제 좀 있으면  이거 대구 시내가 생수라고 계속할 것입니다.

 그분들이 물 파는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팔라고 하면은 공중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이 모든 산맥이나 이런 지맥을 짚어 봐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서 이리  물줄기가 나갔다 이라는데, ‘그 근방에 물줄기 나간데 여기는 분기돼 가지고서  조그만한 가는 물줄기가 나갔다 여기는 큰 물줄기가 나갔다’ 이라는데 그 작은  물줄기라도 잘 맞으면 그저 물이 거기에서 계속 펌프로 저으면 나올 수가 있는데  여기에는 말하기를, 아마 혹 몇 십 번 여기에 저게 자꾸 이래 새로 또 새로  시험하고 또 시작해서 또 헛일하고 이라면 된다 하는데 대번에 와 가지고서 그만  꾹 찔렀는데 그만 정맥을 찔러버렸어. 이래 가지고서 이거는 참 이거는 뭐  자기네들이 말하기를 이거는 뭐 몇 백 번 몇 천 번씩 해도 이거는 이럴 수는  없다고서, 정맥을 찔렀다고.

 그래 놓으니까 틀어 놨는데 물이 말이요, 그 물이 좀 호수를 가지고 한 번 대  보지 몇 길이나 올라가는 고. 아마 뭐 끝이 없이 올라갈 거라, 끝이 없이. 안  그렇겠습니까? 지금 우리 탱크에 오는 것도 그거 뭐 펌프 없이 그만 전부  넘어습니다. 저절로 그리 솟아올라서 많이 나와요.

 그런데, 그 물을 여기 대구 계시는 O장로님이 부탁을 해 가지고 심사를 했는데  아주 식수로는 일등 식수라고서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 말이지. 그래 가지고서  이거 물장사 하면 되겠다고 이렇게 말하는데 인제 물을 공으로 받았기 때문에  물장사는 안 할 거고 공으로 줄 터이니까 많이 자시도록 광고를 해요.

서부교회는 그 물 많이 갖다 먹습니다. 그런 것도 그게 뭐이냐? 하나님이 돕는  섭리라 그말이오. 하나님이 돕는 섭리. ‘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순종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은 기적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 해 보면 ‘하, 이것도 참 기적이다.’ 전부  기적이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전부 기적에 살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전부 뭘로 삽니까? 한번, 대답 해봐요.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제  맘대로 하는 사람은 전부 뭘로 살지요? OOO목사님, 뭘로 살지? 몰라? 우리 저  O목사님, 답이야 쉽지 어데 그걸 못 해?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전부 기적으로 삽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셨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셨다.’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게 분명하거든. 그래  놓으니까, 억지로 끌어다 붙이면 그것도 죄라요. 하나님 앞에 어데 그런’억지  그런 소리 하고 있어요? ‘이것도 분명히 하나님이 화셨다’ 전부 기적으로  살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제것으로 사는 사람은 평생 전부 제것으로 삽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도 이거 내가해서 됐다. 내가 해서 됐다. 전부이 제가 해서  됐다 해 가지고서 그라니까 제가 커지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커지고 저는  아무것도 낮아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제것으로 사는 사람은 제가 커져 가지고  하나님 되고서 하나님은 제게 없어지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홍포입은 부자와  같이 비참한 그 결과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여기에서 지금 우리가 단단히 기억할 것은 사데 교회는 성령이  그의 성령이 됐고 또 주님이 저를 장중에 잡으시고 이랬는데 이 사데 교회는  하나님과의 그 연결이 된 것을 가리켜서 생명록에 기록이 돼 있다 말했습니다.

 그러면, 생명록에 기록이 돼 있으면 택자들은 다 생명록에 기록이 돼 있습니까?  아니오. 중생 생명은 기록돼 있지마는 이거 행위구원에 대해서 다 하는 말인데,  행위구원에 대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 생명록에는 기록도 되고 또 제명도  돨니다. 제명도 돼. 언제든지 있는 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기본구원, 택함받는 것이나 중생받은 것은 그것은  영원히 변동이 없지마는 우리 행위구원이라 하는 이것은 이 구원에 연결이  됐다가, 끊어졌다가 이렇게 하는 것인데 사데 교회는 이 하나님과 연결이 됐고,  역사 하나님과 연결이 됐고 또 그 계시 영감과 연결이 됐다. 성령과 연결이 됐고  하나님의 역사의 이 섭리와 연결이 됐다.

 그러면, 연결이 됐는데 이 연결이 됐기 때문에 너는 온전한 행위의 가능성이  있다. 온전한 행위의 가능성이 있다. 온전한 행위의 가능성이 있다 하는 것을  본문에 어데다가 말해 놨습니까? 어데다 말해 놨습니까?   온전한 행위를 이룰 수가 있다 하는 ‘이룰 수가 있다’ 그 가능성, 이룰수가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이 본문 성경 어데서 보고서 그걸 가능성이 있다고 우리는  담대히 확정을 지울 수가 있습니까?   남은 바 죽게 된 걸 굳게 하라 이랬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그 말이지요?  소망이 있다 말이지요? 소망이 있다. 그래도 그거는 그저 한 사십 점이나 오십  점이나 될까 뭐 그것도 안 됐는데. 남반에 한 번 대답해 봐요. 나와 함께  다닌다? 흰옷 입는다? 생명책에 흐리지 않는다? 흐리지 않기야 뭐 지금도 뭐  죽은 자도 흐리지 안했는데 아직까지 뭐. 몇 명이 있다? 거기에 있는데도 그걸  모르는 거라, 참.

시 인하리라. 시 인하리라.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내가 네 이름을  시인하겠다. 그러면 시인은 나쁜 걸 시인해요 온전이 됐기 때문에 시인해요?  시인한다 했으니까 온전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걸 거기에 말해 놓지  안했습니까? 이런데 자꾸 엉뚱한 말을 하기 때문에 그래 믿어 가지고는 헛일이라  그말이오.

 그 시인하리라 이랬는데 이렇게 사데 교회는 참 성령님과 연결이 되고 또  하나님의 이 역사와 연결이 돼서 장중에 잡혔는데 이런 보배로운 이 연결을  가졌는데 이 연결을 가리켜서 생명록에 너는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의 명록이 있는데 사데 교회는 하나님과  연결된 그 교회로서 녹명이 돼가지고 있다 말이오. 녹명이 돼 가지고 있어.

얼마나 보배로움입니까?   이렇게 녹명이 됐는데 이 녹명되기를 뭐 어떻게 해 가지고 그런 귀한 녹명을  받았는가? 어떻게 해서 그런 연결을 가졌는가? 어떻게 해가지고 그런 연결을  가졌습니까? 그 연결을 어떻게 해서 가졌지요? 저 뒤에 한 번 대답해 봐요.

어떻게 해 가지고 그 연결 가졌지? 어떻게 해서 이 연결 가졌소?   성령님과 연결이 되고 또 주님과 연결돼. 주님의 장중에 붙들렸지 또 성령님을  사데 교회의 성령님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지 이런데 성령님과  역사의 주님과의 이 연결을 가졌는데 그 연결을 어떻게 해서 그 연결이  가져졌습니까? 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은 것, 받은 것으로써  연결됐고 들은 것으로 연결됐습니다.

 주님의 이 역사의 섭리의, 주님의 역사의 섭리와 그 혜택을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해서 크고 작은 게 상관없어. 자기는 조그만한 무좀이 하나, 예배보고  나니까 무좀이 나앗다. 그거는, 여러 해 동안 안 나았는데 그래 나은 거는  그거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요 역사하신 것  아니요?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했으면 하나님의  역사에 어렵고 쉬운 것이 있겠소 없겠소? 없어. 당신은 뭐 전능자기 때문에  어려우나 쉬우나 그게 없어. 다만 우리 이 받는 데 있어서 너무 약한 자에게  금덩이라도 약한 자에게 많이 지워 놓으면 치여 죽어. 그렇지 안해요? 힘에  알맞게 줘야 되지.

 이러니까, 우리의 힘의 그 차이로서 하나님의 하시는 은혜가 크고 적게 오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 하기가 어렵고 쉬워서 그런 거는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지극히 작은 것을 해도 하나님이 내게 전능하신 능력의 사랑의  주님이 역사하셨다 하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솜씨와 나와의 연결된 것은  내가 받은 증거라. 그분이 나에게 준 그걸, 줬기 때문에 내가 그분이 주신, 것을  내가 받았어. 내가 알게 받았어. 또 말씀을 가르침을 받았어, 가르침을 받았어.

 이러니까, 이렇게 당신이 우리에게 연결되는 것은 자, 말씀은 누구든지 다  가르칩니까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 지금 대구에 사람이 많은데 대구에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택함받고 중생된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았지마는 그 시민이 많지마는 택함 받지  않고 중생이 되지 안한 사람들은 가르침을 못 받았다 그말이오.

 또 예수, 믿는 사람도 가르침이 달라요. 다른 것이 그저 ‘성경은 성경이라’  이 사람은 성경은 예수 믿으면 성경은 가지고 다녀야 된다 하더라 해서 그저  예배당에 갈 때나 가지고, 예배당에 갈 때도 그저 바쁘면 가지고 가지 안하고 또  ‘성경은 성경이라 이뿐이지’ 성경에 대해서 그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가르침  받지 못한 그런 사람도 있다 말이오.

 여기에서는 여러분들이 지금 해마다 가르침 받는데 그러면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다 받습니까 여기에 온 사람이 가르침 받습니까? 여기에 온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다 말이오.

이 가르침 받았다가서 그만 여기에 6·25전쟁 때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만 그  불행을 인해서 서로 갈라져 가지고서 한참 이산 가족을 찾는다고, 떠날  리(離)자, 홑어질 산(散)자, 모두 떠나 가지고 있는 가족들을 찾을라고 그때  애를 써서 그거 참 좋은 일을 해서 더러 찾았지요.

 이거 모양으로 그만 우리 총공회도 요번에 그만 이산 가족이 돼 버렸습니다.

이산 가족이 돼 버렸어. 그만 얄궂은 마귀 그놈 역사로 말미암아 이 모두 이  자리 모아서 예배보고 은혜받을 터인데 그만 쭉 갈라지게 돼 버렸어. 갈라진  사람들 만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지난 주일 새벽에도 내가 OOO목사님에게 전화를 했어, 전화를 해서 그래  그분하고 전화해서 그분도 마지막 결론은 ‘어짜든지 목사님 용서해 주이소.

내가 한 번 찾아 가겠습니다.’ 또 그렇게 말하고, 그만 그분은 그래, 말하고  OOO목사님은 ‘그저 너무 마음 상우지 마이소. 제가 언제 찾아 갈 겁니다.’ 또  그렇게 말하고 또 OOO목사님은 OOO목사님을 통해서 내가 ‘어짜든지 이래도  이거는 거석이니까 자주 전화나 하고 통화나 하자’ 이라니까 그래 말하기를  언제 찾아 온다 했나 뒤에 전화한다 했나? 전화한다 했어? 찾아 온다 소리는 안  하던가? 뒤에 온다 말이 그거 찾아 온다 말 아니가? 왜 그런 말을 째노? 그말이  귀한 말인데. 너거는 그거 예사로 보지마는 그 한 번 찾아와 서로 만난다는 게  얼마나 좋으노?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말하기를 어짜든지 전화를 자주하고 나뉘지 말자. 여기  이산 가족되면 큰일이라. 우리가 전부 한군데 다 갈 사람인데 이 마귀 이놈이  공연히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이 들어 가지고서-이래 벌어 뜨려 가지고서 쭉  벌어져서 이거 참, 그것들의 그 마귀 연극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는 거라,   뭐 상대방이 나빠 봤자, 상대방이 나쁜 그거야 눈이 있다가서 코가 나쁘다  하지마는 코가 나빠도 제 코지 뭐 딴게 뭐 있겠어? 코 나쁜게 눈에 우사고 눈  나쁜 게 코에 우사지 뭐 딴 몸 같으면 하지만 한몸이니까 내나 한가지라. 그런데  그만 이래 가지고 떡 못 듣게 됐다 말이오.’  그래 내가 ‘요번 집회에 와서 좀 그 은혜받고 또 그라면 안 좋으나? 그래  하면서 또 그래 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래 가지. 가도 은혜받는 거야  어째?’ 이렇게 말을 하니까 ‘예, 어째 한 번 찾아 가겠습니다.’ 이라고  말았는데, 그래 피아노 하는 그분은 피아노를 잘 타서 그리워서 내가 전화를  할라 하다가 그분한테는 내가 전화를 안 했습니다.

 전화를 안 했는데, 그래 내가 보니까 오늘 피아노를 치는데 그분이왔나 싶어서  내가 그래 인제 이 뒤로 돌아볼라 하면 한 번 돌아보지를 못했어. 그분이 왔는가  이랬는데 치는 거 보니까 그분 비슷해. 뚱땅뚱땅치는 것이 그분 비슷해요.

하나님이 큰 망아지가 나가면 작은 망아지가 큰 망아지 대신한다 하더니마는  하나님이 대신 은혜를 주는 모양이라. 뚱땅뚱땅 잘 쳐, 보니까.

 이래서,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안했습니까? 이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그만치 성령과 연결이 그만치 못 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서 이  말씀을 들은 이 말씀으로써 그 듣지 못한 사람보다 들은 사람은 그만큼 연결이  더 많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우리가 연결되는 데는 뭘로 연결됩니까?’ 성경말씀으로  연결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자기가 많이 읽음으로 성령과 많이  연결되고 또 성경 말씀을 전연히 안 읽고 다른 소설이나 잡지나 그런 걸 읽는  것으로써 성령님과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또 자기는 이런 집회 때에 하나님 말씀을 자기 혼자 성경을 봐도 모르는 도리와  교리를-깨달음 말이오-성경에 자기 혼자 봐도 깨닫지 못하는 그 깨달음을, 요래  믿어야 되겠다 하는 신조를 자기가 깨달았으면 배워서 깨닫든지 읽어서 깨닫든지  깨닫는 그것이 성령님과 나와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이라.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유일한 방법이라.

 그랬는데, 이것이 연결이니까 연결된 이 연결을, 연결을 보존하는데에는 어떻게  보존해요? 들은 것은, 들어서 성령님과 연결됐는데 이거 연결된 것은 그 연결을  없애지 안하고 그 연결을 잘 보존시켜서 살리는데에는 어떻게 하면 살리게 돼요?  ‘지켜’ 지켜 회개하면 돼. 지켜서 자꾸 고쳐 나가요, 지켜서.

 지키면서 또 고치고, 지키고 보니까 ‘못 지켰다’ 고치고 지키고 보니까,  지키고 보니까 못 지켜진 것만 고치게 됩니까 지켜 나가니까 또 새로 지킬 것이  발견되니까 자꾸 새로 지킬 것이 발견되니까 또 지키지 못한 것이 발견되고 자꾸  이 연결된 이 말씀을 가지고서 지켜 회개를 하니까 이제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완성의 끝이 있는 게 좋아요 없는 게  좋아요? 공연히,  끝이 인제 그거 지금 완료했다. 그 완료의 끝이 있는 게 좋습니까 없는 게  좋습니까?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없는게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잘 깨달았어요. 없는 게. 좋아요. 이래서, ‘믿음, 사랑,  쏘망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거 끝이 없어.

 이러니까, 자기가 지킬 것을 또 새로 발견해 또 지키고 또 지키고 또 지키고  지킴에서 지킬 것을 발견하고 회개에서 회개를 발견하고 이러니까 점점 온전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우리는 유한한 자인데 무한하신 하나님을 목표하고서 가니까  우리가 자꾸 얼마나 나가도 그분은 무한하니까 자꾸 가도 받을 것이 있으니까  새로 받을 것 있고 또 새로 믿을 것 있고 또 새로 소망할 것 있고 이러니까  그것이 우리에게는 영생이 되고 좋은 것입니다.

 이래서, 요 방편을 여러분들이 잃지 말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하는 이것으로써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나와 연결된다. 연결된다. 연결이 돼서  생명록에 기록 이 된다. 생명록에 기록이 돼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연결이 된다.

 하나님과 연결은 성령님과 연결도 하나님과 연결이요 주님과 연결도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곧 주님이 성령님이요 성령님이 주님이십니다. 성령님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했고 또 그 성령님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요것을 단단히 잡고,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나와의 연결은  돈으로 연결 못 합니다. 또 세상 학문을 아무리 통달해도 연결 못 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뭐 대대학을 공부를 해도 하나님과 성령님과 나와의 연결은 못  합니다. 연결은 못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고귀한 학위를 많이 땄다 할지라도  그거 가지고 연결은 못 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과-그리스도의 영-성령님과  우리와의 연결은 무엇으로만 연결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연결할 수 있어,  이분, 요분  말이요, 요분. 자기. 인제 잠 깼네. 말해 봐. 대답 한 번 해 봐요. 하나님과  우리와 연결된, 성령님과 연결되는 데는 월로 가지고 연결해요? 뮐로 연결해요  말해 봐. 대답해 봐. 몰라? 왜 한자리 듣고 몰라? 또 이 앞에 사람들은 그라면?  뭘로 연결돼요? 뭘로? 네,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배우든지 하는 것으로만  연결이 됩니다. 딴 걸로는 연결 못 해요. 꼭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절  읽었으면은 그만치 연결이 됐어. 또 내가 하나 배웠으면 그만치 연결이  됐습니다.

 여기에서는 계속해서 지금 성령님과 연결하는 역사를 여기에서 지금 하나님이  베풀고 계시고 우리들은 성령님과 나와의 한덩어리 되는 이 연결되는 그 은혜를  지금 받고 있습니다. 있는데, 이것이 뭐이냐? 생명록에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연결이 끊어지면 그만 도적같이 와서 연결이 끊어지면 죽어  버립니다. 그러면 이 연결이 되기는 돼 가지고 있는 것은 가리켜서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그말은 네가 생명록에 기록돼 있기는 있다, 실상은 네가 죽은  자로다.

생명록에 기록 이 돼 가지고 있기는 있는데 현실에 척 죽여 버리고 현실에 죽여  버리고 자꾸 현실에서는 자꾸 죽이고 있습니다. 생명록에 기록만 돼 가지고 있지  현실에서는 자꾸 죽입니다.

 죽이는 것은 요 들은 말씀을 지켜 회개치 안하니까, 들어서 지켜 회개치  안하니까 한 시간 들어 회개치 안했으면 그 시간 죽었고 일년 들어 지켜 회개치  안했으면 일 년 죽었고 자꾸 죽기 때문에 ‘죽게 된 바’ 지금 죽어 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덜 죽고 남아 있는 그것을 네가 일깨워서 굳게 하라.

 그러면, 연결하는 것을 여기에서 배웠습니다. 성령님과 연결되는 것을 배웠어.

 성령님과 연결되는 것을 배웠는데 하나님이 나를 장중에 잡으신 것은 뭐라고  말했느냐? 역사의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해서 역사의 하나님에게 내가 붙들려서  하나님의 역사와 나와 연결이 돼 가지고서 하나님의 역사에 내가 피동되고  하나님은 나를 붙들고 역사하셔 가지고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역사의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은 뭘로 연결이 됩니까? 뭘로 연결이 됩니까? 뭘로 연결이 쇄요?  여기에는 교역자들, 뭘로 연결이 돼요? 받은 걸로 연결 돼요, 받은 걸로.

 우리가 뭐 힘쓰는 게 아니고 받은 걸로 연결되는데 받은 걸로 연결된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안하고 그 연결의 효력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어떻게 하면? 아니야. 생각하면 돼요, 생각하면. ‘나는 아무데 가서’ 무좀이  나았다. 나는 나도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들으시더라.’ 들어 주신 것, 뭐 자기가  둔한데 날마다 자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 걸 자기가, 들어 주니까 안  알아요? 한 번만 들어도 하나님이 내 기도 들으시면 ‘내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 나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보니까 당신이 하도 내가 둔해서 당신이 일하지마는 ‘우연히  됐다. 자연히 됐다.’ 이렇게만 자꾸 영광은 우연과 자연에다 돌리고 영광은  제가 다 따먹고 제 솜씨에 다 따먹고 말지 고거 못됐다 말이오.

 이랬는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섭리하시고 은총을 베푸신 그것을 아는 것이  그것이, 아는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역사의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라.

 그러면, 그 아는 것이 연결됐고, 자기가 ‘나는 받았다’ 아는 것이 연결됐고  그것을, 연결된 것을 자기가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살 때에 그때 뭐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온전한 것이 이루어져 나간다.

온전한 것이 이루어져 나간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뭐 그 사람이 옆에 사람이 볼 때, 저 사람이 참 은혜  많이 받았다고 이래 말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래 말하는데 저는 항상 불평하는  그자 있습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주먹으로 쥐박아서 뒤에 가서 납짝해  가지고 다시 개갈개갈 거리면서 숨도 못 쉬구로 그렇게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

 나 같으면 그래 하겠어요. 그렇게 좀 좀 쥐박아 줬으면 좋겠다 그라는데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을 기뻐하시고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오래  참으셔. 오래 참으시니까 언제든지 참으십니까 그것도 때가 있습니까? 때가  있어요. ‘도적같이 온다’ 언제가 끝인지 모른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자, 권능의 사람이라면, 자기가 권능의 사람, 권능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사람이 권능의 사람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권능의 사람이 돼서 권능적 행위를 하는, 권능의 신앙생활, 신앙에 권능  신앙생활을 하는 유일한 법칙은 뭐입니까? 그것만 알면 그만 하겠는데, 열 한시  사십 사분인데 그것만 알면,  자, 하나님의 권능의 장중에 잡혀서 하나님의 권능의 사람, 그 사람이 보니까  전도하는 데도 권능이 있고 일하는 데도 권능이 있고 말하는데도 권능이 있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주님이 따라다니면서 한번도, 쫄쫄 따라다니시요,  주님이. 그 사람 말하는 데는 쫄쫄 따라다니셔. 그 사람이 이래 말하면 거기에  또 책임지고 또 이새 주고 또 하는 행동 언행심사에 하나님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의 언행심사 한 것을 책임을 지고 다 이루신다 그말이오. 이루셔.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원하는대로  다 이루리라’ 이러니까 그 사람 소원은 다 이루어져, 원하는 대로다 이루어져.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니까 그 사람 소원이 하나님과 먼저 일치된 것입니까  자기 소원에 하나님이 따라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에 자기가 따라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니까 하나님은 또 뜻대로 움직이는 그 일을 당신은 또  성쉬를 해야 된다 그말이오.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목회하는 사람들이 뭐 세상 이런 일 저런 일을 붙들고  걱정하는 것은 다 그 사람이 그 죄값을 받는 연고입니다. 제가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것만치 모든 일이 나타나면 제가 할라고 애를 쓰고 근심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입어서 한 사람은 크고 작으나 모든 일을 그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맡겨 두고 하나님과 함께 동하고  정하기만 힘을 씁니다.

이래서,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소원 성취가 다 되리라.’ 그 소원 성취 다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된 것이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니까 그 사람이야 무슨 소원하든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까? 일치가 됐기 때문에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이 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장중에  잡혀서 하는것인데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는 것,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면은  그것이, 받은 것을 받을 줄 모르면 안 되고 받은 것을 받은 줄 알고 난 다음에는  장 생각해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셨다. 이런 걸 이래 했다.’  이렇게 자꾸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리는 그 승리의 생애를  계속하게 되는 방법이요 점점 성대해나가는 방법이요 확대해 나가는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사람들이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제일 무능한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 저  믿어 봐야 아무 효력도 없는, ‘저거 예수 믿는다 하는데 네가 무슨 효력 있노?  예수 믿는 그 효력이 뭐 있노? 예수 믿어 무슨 소용 있노?’ 이렇게 조롱받고  예수 믿는 효력이 아무것도 없는 그 사람이 되어지는 방편,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어떤 자에게는 같이 해주는데 어떤 자에게는  같이 해 주시지를 안해. 같이 해 주시지 안하니까 저 혼자 날뛰고 했다 하면 제  자랑이나 하고 그만 이래 가지고 자꾸 이래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  모처럼 하니까 ‘주여, 요거 하나님이 해 주셨습니다.’ 그것만 거머쥐고  ‘하나님이 요거 해 주셨다. 하나님이 했다.’ 그것만 밤낮 자랑만 하고 자꾸  ‘하나님이 요런 것도 해 주셨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실 것이라.’  요라면 될 터인데 모처럼 고거 하나 했는 것도 영광은 제가 따먹어 버립니다.

 ‘헤, 하나님? 내 솜씨고 내 언변이고 내 의지고 내 무엇으로 이렇게 됐지  됐느냐?’ 이렇게 그것 따먹으니까 그만 하나님께서 그 종자를 하나 딱 심어  주니까 싹 뽑아 먹어 버리고, 뽑아 가지고 그만 초장에 돌돌 무쳐 가지고 그만  먹어 버렸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뭐이 나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의 섭리를 받아서 권능의 섭리에 움직여서  하나님의 지체로 하나님의 몸으로 이렇게 권능 있는 승리의 생활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고’ 하는 것이 요것이 중요합니다.

 그해서, 자꾸 하나님이 자기에게 섭리하시는 것을 생각을 자꾸 하면은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이 이거 해 주시니까 이것도 해 주실 것. 아니냐, 이것도 해  주실 수가 안 있나?’ 자꾸 이래 가지고 또 그렇게 이것도 해 주시니까,  ‘하나님이 이거 해 주시니까 이것도 해 주실 것 아니가?’  이러니까, 그 일이 사람으로서 될 줄 알면 사람의 방편을 쓰고 사람씩 수단을  쓰고 사람을 붙들고 협력해야 되지마는 하나님이 해 주신 그것만 자꾸 말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걸 빌으니까 하나님에 거스리는 사람 교제도 할  필요가 없고 이것 저것 뭐 수단이나 방편이나 꾀나 그런 것도 쓸 것도 없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 법도대로 하면 하나님이 해 주신다 이라니까 벌써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걸 생각하는 거기에서 차차 옳은 생각 들고 옳은 소견이  나오고 옳은 지애가 나오고 옳은 소원이 나오고 옳은 방편이 나오고 그래 자꾸  돼진다 그말이요, 자꾸 돼져.

 이러면, 나중에 가서 뭐이냐?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한다’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고 천사들이 인정한다, 심판에서 인정할 수 있는 온전을 이룰 수  있는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다 요것을 찾고서 굳게 잡아야 됩니다. 그거  놓으면 안 돼요. 그랬서, 자꾸 아침에도 내가 보니까 답답해서, 그 마귀란 놈은  그만 떠드는 걸 좋아해요. 마귀가 오면 징 치고 뚜드리지 안해? 징 메고 광광  뚜드리고 막 떠들고 이래 가지고 그 뭐 이래 가지고 야단을 지깁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의 하나님이요 떠드는 그 훤화하는 하나님이 아니요  복잡한 것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모든 게 질서 정연함의 하나님이시요  깨끗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데, 이 말씀을 들었으면 벌써 잊어버리기 쉬운데 이걸 자꾸 생각하면서 또  이래 생각해 보고 저래 생각해 보고 해서 ‘하, 맞다. 맞다. 그 이치가 맞다.

옳다. 그렇다. 요게 한 진리다. 요래 걸어가는 것이 요게 참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요게 올바른 생명의 도리다.’ 요렇게 따지는 사람은 사람에게 꼬임  받아요 안 받아요? 따져보면 대번 알 터인데 ‘그게 그 허무한 일이다’  ‘이거 뭐 총공회는 독재라서 정치를 독재한다. 강제로 이래 한다. 이라는데  자, 암만 예배당을 지어 놔도 자기가 가고 싶다 하니까 보내고 또 아무리 또  딴데 오라 해도 가기 싫다 하니까 안 가고 교인들이 안 보낼라’ 하면 안 보내고  이게 하나도 독재한 일 안 하고 저거 소원대로하고 우리는 순응 했는데 독재는  뭐 독재라고 말하느냐?’ 그거 좀 생각해 보면 알 터인데, 생각해 보면 알아.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지 안하는 데서 다 죽습니다.

 그 어떤 분 그라는 분이 있어요, 내가 위천 있을 때에. 우리 저 OOO목사님  장모되는 어른이라. O집사님이라고, 잘 믿었어요. 잘 믿고 교회 충성하고  이래요. 열심이 있어요. 이런데 내가 거세 있을때, 거기에서 한 일 년 반 동안  있었는데 나하고 잘 마찰이 돼. 마찰이 되면 말하기를 ‘조사님 내가 이렇게  조사님한테 이라면 내가 또 하나님 앞에 징계받을 줄 압니다’ 그때 그분은  징계라 말 안 하고 벌이라 해. ‘내가 벌 받을 줄 압니다. 벌을 받아도 안  되겠습니다.’ 이라고 그 패역을 부리고 이래요.

 그라고 난 뒤에는 또 반드시 하나님이 사랑해서 벌을 내리요. 내리면 조사님 나  이거 벌 받았습니다. 내가 또 회개합니다.’ 그래 나오기를 일 년 반 동안에  수십 번 했어요. 여기에 그 큰딸도 여기에 와 있구만요. 이랬는데, 참 잘  믿었습니다. 그래도 교회 이야기는 그분에게 안심하고 할 수가 있었고 의논할  수가 있었고 또 은밀한 거는 주님의 영광 중심이니까 주님의 영광에 손해가는  일은 하지 안해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가 잘못할 때에 어떻게 하시나 또 잘할 해에 어떻게  하시나? 자기가 상을 줄 때도 있고 벌을 줄 때도 있으니까 그것을 생각해야  돼요. 어떻게 받았는지, 징계를 받았나 상급을 받았나, 도움음 받았나 정죄를  받았나, 네 앞길을 막아 주시더냐 틔워 주시더냐, 이 어떻게 받은 요것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의 역사와 바로 직접 직결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요게 없이는 그 이루어지는 방법이 없어요.

 그라면, 오늘 오전에는 사데 교회가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연결이  됐다. 연결된 것은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연결되는 것은 연결되는  방법이 몇입니까, 손가락으로? 저 뒤에도 손가락으로. 모르는가배, 지금도.

이제까지 배워도 몰라요? 연결되는 방법이 몇이요? 이것 봐. 이 손가락 못 든다.

몰라. 자, 둘을 드십시오. 둘. 연결되는 방법이 둘이라. 들은 것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든지 듣는 것으로 성령과 연결됩니다. 또 하나님이 하시는 그 역사를  자기가 역사를 받음으로 연결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받음으로 연결되고 그  연결된 것을 보존하는 데에는, 성장시키는 데에는 생각하는 것으로써 성장이  됩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번 집회에서 주님과 연결이 더 많이 했어요? 적게?  됐어요? 많이 됐어요? 적게 됐어요? 저 OOO장로님? 많이 됐어? 많이 됐다 하거든  손 한 번 들어 봐요. 그래, 많이 됐어. 많이 된 것, 많이 된 요 연결을 끊지  말아요! 많이 된 연결 요걸 끊지 말아요! 끊지 말고 자꾸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해서 연결이 끊치지 안하면 우리는 뭐 지극히 천한 자가 지극히  존귀한 자가 금생 내세에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섭리와 자기와 연결되는 데는 하나님의 능력의 섭리가  자기에게 있은 것을 깨달은 거라. ‘어떻게 받았으며’ 자기가 능력의 섭리는 상  주는 것만 연결의 섭리입니까, 벌 주는 것은 연결의 섭리 아닙니까? 벌 주는  것도 그거라.

 이라니까 매 맞았다. 이라니까 하나님이 삐꿔 돌아가시더라. 이라니까  좋아하시더라. 이러니까 어찌되더라. 그것을 자기에게 닥치는 일을 과거에  하나님이 자기와의 관철된 데에서 그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요것을 살피면  물샐틈없이 하나님과 자기와는 관계돼서 망하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망하고 흥하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흥하고 천해지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천해지고 존귀해지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귀해진다 하는 요  외에 딴 길이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기독자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멸망할 길을 걷지 안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공될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모두가 좋은 날과  앞으로 생명의 날만 오지 딴게 오지를 안해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고요히 생각하면서 잠깐 통성으로 한 번 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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