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어부


선지자선교회 1985년 10월 7일 교역자회 

 

본문 : 누가복음 5장 1절 1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말씀을 지난 주 오전 오후 또 그 전에도 많이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고, 또  오늘 아침에도 이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또 이 시간도 이 말씀을 증거하여야겠다  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서 증거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획 하나도 변함이나 가감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너무도 불신하는 죄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고, 모든 것이  위에 있고 아래는 있지 아니하고,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아니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빌려는 주지만 구차해서 빌릴 것이 없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또 천하 만민이 너거 예수 믿는 사람을 두려워하리라, 두려워하리라  이렇게 성경에 말해 놨는데 실은 정반대입니다.

 오늘도 제가 어디 갔다가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리 이 예수 믿는 사람 이거  단단히 고쳐야 되지 이래 가지고는 참 우리도 불쌍하고 가련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큰 화를 끼쳐 주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어깨가 축 쳐진 게 그저 얼굴은 전부  노리탱탱하이 해 가지고 반송장같이 돼 가지고 아무 활기나 생기가 없이  꺼죽하이 이래 가지고, 또 속에, 선한 척 하지만 뭐 이중 삼 중의 욕심은 또  어떻게 엉큼하게 많이 가지고 있고. 믿는다고 이렇게 말 하지만 도무지 인간미가  없고 사람들이 접촉할 맛이 없다고 이렇게 평함이 있는데 그런 평이 좀 정평  같습니다.

 그 전에 아현교회 교인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뭐 옷 입고 다니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참 괴물로 볼 만치 추접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광단목 옷을 한복을  해 입고, 또 물은 새카맣게 들이고, 또 고무신, 신고 또 고무신에는 서로 섞일까  싶어서 앞에다가 뭐 실로 가지고 이래 떠서 이래 딱 만들어 가지고 이래 신고,  머리는 빡빡 깍고, 뭐 세상에서 괴물로 볼 수밖에 없지만 그 사람들은 보면 저  아현교회 교인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머리 깎은 거 보고 아는 그것도  있지만 어깨 쩍 벌리고 천하 내가 제일 잘났습니다. 막 어깨 벌리고 막  이랍니다. 시장에도 가면 막 이래도 이리 뭐 어깨 벌리고 이라는데 그만 그 외에  것은 다 보면 느준하이 그래요. 그 왜 그런가? 속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 돼서  그렇든지 그렇고, 또 자기의 갈 길을 바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용기가  없고, 저 할 일이 뭐인지 똑똑히 잡아서 제가 누구보다도 참 행복되다는 이걸  확실히 잡았다면 너무 교만하고 뒤로 넘어갈까 싶어 염려지 뭐 그렇게 우울하게  그렇게 되든 안 할 터인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두 어리숙하니 병신 같은지, 그런  중에도 우리 서부교인이 제일 그렇습니다.

 오늘도 저 기도실에 거기에 기도하러 왔는데 온 사람마다 전부. 내가 차 타고  오면서 그랬습니다. '오늘 기도하러 온 사람들은 이 동리에는 저런 사람 하나도  없다.' 전부 누에 늙은 거 모양으로 누루팅팅하게 뭐 어떻게 송장같이 더러운지,  전부 다 그래요. 그게 그만 무슨. 본같이 돼 버렸어, 이래서, 그게 예수 믿는  좋은 멋인 줄 알고 그만 그래 가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전부 병신같이 보여지고,  그게, '저거 어째 그런가?' 이거 내가 좀 반성을 하며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그만 이거 좀 인제 기름도 바르고 입에 구찌베니도 좀 바르고 좀 이래 가지고 좀  뺄가이 좀 기운이 팔팔한 모양으로, 입술이 그냥 안 붉으니까 구찌베니라도  발라야지 뭐. 바르고 좀 기름도 빤질빤질 바르고 그래 옷도 좀 반드리하이 해  입고 그래 다니면 아마 그럴란가, 내가 그래 꺼죽하이 있으니까 다 그런가  이래서 이걸 인제 교회다가 광고를 해 가지고 이거 고쳐야 되겠다 하는 그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어떻게 뭐 꺼죽하이 그런지. 서부교인이 제일 많이 그렇고  다른 교인들도 다 같습니다. 저 보면 예수 믿는 거 표가, 예수 믿는 표가 나는  것이 향기가 나서 예수 믿는 표가 나는 게 아니라 보면 엉큼하이 눈은 반쯤  그수름해 가지고 속에는 엉큼한 게 환하게 보이고, 도무지 명랑하고 활발하고  그렇게 참 다정하고 한 그런 인간미가 없는 것이 기독자요. 그거 우리가 고쳐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암만 겉으머리로 고칠라고 해 봤자 고쳐질 수 없는 것이. 자, 다른  사람이 생각지 않는 거 기도하지, 하나님 생각하지, 또 죄 생각하지 이러니까  항상 마음이 흐리텁텁하게 께끄름하게 하나도 해결이 되지 못하고 전부 그저  기합만 눌려 가지고 있으니까 안 그럴래야 안 그럴 수가 없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이거 좀 고쳐서, 돈도 있어야 되겠고 나는  어제는, 어제 아침인가 오늘 아침에는 돈, 돈 부자 돼라고 말했어요. 돈 부자  돼라고. 이거 모두 전부 거지가 돼 가지고 있어 놓으니까 연보해야 연보가  나와야지요. 뭐? 연보가 안 나오니까 빚이 얼마가 져 가지고 있느냐 하면 한  팔천만 원 빚져 가지고 있어요, 팔천만 원. 팔천만 원 빚져 가지고 있으니까  이거 인제 돈을 떼고 없으니까 전부 이자를 주고 있어. 인제 전세로, 인제  전세로 가지고 이자 주고, 뭐 반사들도 자꾸 모두 거처할 집을 줘야, 방을 줘야  될 터인데 줄 때 돈이 없으니까 전부 월세를 주고 있어. 월세 이자 나가는 것이  뭐 내 계산하니까 팔천만 원이라. 팔 천만 원이면 얼맙니까? 이자가 얼마요? 일  부 오 리면, 예? 백 이십만 원 이라? 예. 이래 나가고 있어 전부 거지가 돼  놓으니까, 예수를 잘 믿어서 부자가 되면 좀 연보를 많이 내가지고 이거 모두 다  분교하는 데도 뭐 얼마, 열 세 군데라 하더나, 몇? 얼마? 몇 군데? 스물 한  군데! 스물 한 군데라면 그 대지 한 군데 살라고 하면 일억은 해야 되고 집  지을라 면 일억 해야 되고 이억씩이면 사십 얼마, 사십 몇 억이 있어야 될 터인  데 빚만 떡떡 져 가지고 있으니까 이거 뭐 할 겁니까? 이거 전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 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뿐이라. 뭐 그대로라.

 이래서 아무래도 이거는 내가 가르치기를 잘못 가르쳤으니까 이거 내가 이제  회개를 하고 이제는. 가르치는 일을 회개를 해 가지고 고쳐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겠습니다. 고쳐야 될 것은, 자꾸 이거 하나님의 말씀을 또 이 말씀  증거해 가지고, 그 말씀을 알지도 못하는데, 알고 자기가 익숙히 급할 때도 이  말씀이 척척 나와야 되겠고. 또 무슨 일 닥치면 이 말씀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그런 것을 알 수 있어야 될 건데 책보고 간신히 알  만하면 또 그래 놓고 또 딴거 말합니다. 이래 놓으니까 교인들도 버릇이 돼서,  설교 듣고 나서 알지도 못하면서 '아, 저거 언제 한 번 들은 말씀이라, 들은  설교라' 들은 설교라 하는 기억만 있으면 그만 그 다음에 성경 보면 그만  좁니다. 그만 졸아요. '에이고, 또 그때 언제 설교하던 그 설교 또 할란갑다. 저  본문 읽는 거 보니까.' 이래 놨으니 이 교역자들이 전부 교인들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은 참 읽고 듣고 지켜 행해야 복이 된다고 했는데 이거 뭐 들을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르지 그저 대략 그런 제목이나 떡 알면 그걸로 다 된  줄 알고 이러니까, 또 교역자는 '아 이거 내가 언제 설교했으니까 교인들이 다  알고 있을 터이니까 똑똑히는 모를 것이나 그래도 대략 짐작하고 있을 터인데  인제 이 설교 말고 다른 설교해야 되겠다.' 교역자는 또 그 교인들에게 처음  듣는 설교하려고 죽자 살자하고 날뛰니까 그것도 주님 볼 때에 주먹으로  쥐어박으면 싶을 거라. '야, 이 자식아, 네가 하나도 실천은 시키지 안하고  실천을 해야 뭐 복이 되든 가 하지 실천은 시키지 안하고 뭐 한다 그 지금 또 딴  설교 지금 연구한다고 하고 있느냐?' 그만 매초리로 가지고 때려 줄거라. 안  그렇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이거부터 회개해야 되겠어. 회개해서. 많은  설교 하려고 하지말고 한 설교라도 해 가지고 내가 먼저 걸어가고 그 다음에  교인들이 걸어가도록 꼭 이것이 지금 이 세대에 필요한 줄 압니다.

 우리가 반사든지 교역자든지 자기가 앵무새 모양으로 이렇게 그저 말만 알고  외우는 것으로 전하면 그 교인에게 암만 잘 전해 봤자 그래 밖에는 안  전해집니다. 내가 앵무새 봐 보니까 그거 뭐 척 들어가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라데요. 보니까, 뉘가 있는가 보니까 새라. 그래 또 문 열고 나갈라 하니까  '안녕히 가십시다' 이래. 길을 들여놓으니까.

또 무슨 얘기를 하니까 저도 따라서 얘기를 해. 그게 속에 말 뜻은 하나도  모릅니다. 그뿐이지 그거 모양으로. 우리가 앵무새 모양으로 이렇게 설교를  하니까 듣는 교인들도 그 음이나 듣지 그 속에 뜻은 모르는 것이고 또 내가  다같은 설교를 하되 그 설교에 속의 뜻을 내가 깨닫고 전하면 그 음성과 그  언어와 그 속에 뜻이 같이, 다는 안 전해져도 전해질 것이고. 또 내가 거기에  대해서 실행을 하면서 전하면 또 그 설교 말씀과 깨달음과 실행이 그이에게  다소라도 전해질 것이고, 내가 또 이 말씀대로 해 가지고 내가 참 변화를 받아서  그 말씀대로의 변화 받은 사람이 돼 가지고 전한다고 하면 그 전한 것이 듣는  사람에게, 자, 지식이 전해져. 또 거기서 깨달음이 전해져 또 실행이 전해져, 또  거기에 경험과 체험이 전해져. 자신이 변화된 사람이 전해져 이래 전해지니까  우리가 인제 이 면을 자꾸 힘을 써야 이제 하나님의 노를 풀고 이거 뭐이 목회가  돼지지 이거는 힘쓰지 안하고 자꾸 말씀만 많이 이래 하니까 사람들을 길바닥을  만들어서. 이제 하나님 말씀 암만 들어 봐야 자꾸 듣는 말이니까 마음만  강퍅해져 가지고 암만 들어야 감각 없는 이런, 마대같은 그런 심령만, 길바닥  같은 그런 심령만 만들지 아무 이거 구원이라 하는 건 참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 말이오. 이래서, '아무래도 이거 좀 고쳐야 되겠다'  나는 인제,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장, 늘 설교하는 설교만 하니까  교인들이 그만 배척을 해서 이제는 할 수 없어 사면을 하고 이제 가게 됐는데  마지막 주일날 설교하니까 '아마 오늘 주일은 설교 좀 딴 설교 한 번 하지'  했더니만 내나 그 설교하더라고. 그라면서 말하기를 '당신들이 실행을 안 하니.

실행을 해야 구원이 되는데 실행을 안 하니까 실행 안 하는 말씀은 자기를  정죄하기 때문에 정죄밖에 안 되는데, 성경에 말하기를 그 말씀이 정죄한다고  했는데 정죄밖에 안 되니까, 자기들 구원을 할라 그 내가 여기 왔지 정죄하려고  온 것 아닌데 구원은 하나도 안 되고 정죄만 되니까 내가 어떻게 다른 설교를 해  줄 수가 있느냐? 이러니까 내가 이 설교를 마지막하고 간다' 이러니까 그  교인들이 '야, 우리가 실행을 안 하니까 다른 설교 안 해 주고 만날 그 설교만  하는 것이로구나. 그러면. 우리가 실행을 할 터이니까 딴 설교 해 주겠느냐?'  '그러면. 실행하면 내가 딴 설교 해 주겠다.' 그래 그 실행 다 하고, 모두  실행하니까 또 딴 설교하고, 실행하니 딴 설교하고 이래 가지고 그 교회가 참  신령한 교회가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얼마 전에는 제가 말하기를 '지금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말세라. 말세니까 설교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설교야 뭐 뉘든지 다  청산유수인데, 설교는 누가 해도 지금은 설교 뭐 다 정통 아닌 사람 없고 신조와  교리에 들어맞지 안한 설교하는 사람 없고, 전부 대설교가입니다. 옛날 뭐  사도들이고 뭐 속사도들이고,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했지 사도시대의 사도들이니  속사도들이니 그런 분들 설교가 요새 지금 설교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백지 우리가 지금 그래 생각해 그렇지  이러니까, 설교는 들으면 전부 다 정통이요 대신학자요 대부흥사요  설교가이니까 지금 세대는 세대가 뭘 요구하고 있느냐? 설교야 다 잘하는데  설교야 다 백 점인데 뭐. 다 백 점이라. 어느 교회 누구라도 설교는 다  백점이니까 이 세대는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하다. 왜? 기적 그거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니까, 기적 그거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하니까 사람이 하는 거 설교는  다 같이 다 일등 설교가이니까 그 사람이 진짜 목사인지 가짜 목사인지, 진짜  설교를 하는지 가짜 설교를 하는지 이것은 하나님이 증거하는 표적이 나타나야  되지 표적이 안 나타나면 이거는 소용이 없겠다 아마 이 세대의 교인들은 이것을  원하겠다, 하도 지금 덮어 가뤄 놓으니까 교인들이 깜깜해서 모르지만,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그때 뭐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를 믿게 하는 표적이  뭐입니까?' 설교 들을라고 하지 안했어. 설교 뭐. 무슨 설교 들을라고 설교 그거  말하지 안하고, '자, 믿게 하는 표적이 뭐이냐, 증거가 뭐이냐 표적을 요구했어.

 그거 모양으로 지금 이 교인들이 어두워 그렇지, 너무 막 칼빈주의니 뭐  정통이니 마구 이거 신학 가지고 원청 대가리를 뚜드려 깨 놓으니까 정신이  없어서 지금 '아. 이거 뭐 신학적이 아니면 안 되고 이거 또 칼빈주의적이  아니면 안 되고 이렇다' 하는 그런 소리, 뭐 이적이니 그런 거 표적이니 말하면  다 저거는 기독교도 아닌 괴악한 그런 사교같이 이렇게 여긴다 싶어서 사람들이  지금 말 못 하지만 실은 속으로 그럴 거라. '야, 뭐 설교야 어느 목사들도 다  일등 설교가인데 그 목사가 진짜 목사인지 가짜 목사인지 그걸 알 수가 있나,  어디? 또 보통 생활하는 거야 일반 생활인데 일반 생활 다 그래서 뭐 누가 목사  쳐 놓고 지금 술 안 먹는 목사가 어디 있으며, 담배 안 피는 목사가 어디  있으며, 주일 뭐 안 범하는 목사가 어디 있으며, 뭐 어디 거짓말 안 하는 목사가  어디 있으며 다 이런 세대니까 뭐 그거야 뭐 다 그런데 뭐. 설교는 또 다 잘  하는데' 이래 놓으니까 이거 도무지 진가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 지금 교인들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방송 설교를 하니까, 하도 집에 앉았다가 예배당에 가기도 싫고  이랬다가 방송 설교 하니까 그 설교 듣고 난 다음에 '아 방송 설교 하니까  이분이 나은갑다' 싶어서 또 방송 설교로 또 쭉 들이 몰려갑니다. 이리  몰려갔다가, '아, 거기에는 인제 방언 한단다' 하니까 또 방언으로 밀려갔다가,  불파로 밀려갔다가. 지시파로 몰려갔다가, 또 이렇게 마구 뚜드리고 굴리는 또  그 파로 몰려갔다가, 갈 길이 앞으로. 길을 몰라 놓으니까 이리 자꾸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이것이지, 갈 길을 모르기 때문에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예수를 믿고 싶기는 믿고 싶은데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하는 그 길을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몰라? 모두 설교를 다 잘하는데? 잘하지만, 설교를 다  잘하니까, 잘하지만 아무래도, 그들이 말하기를 '설교는 꼭 같고 뭣이 좀 뭣이  있어야 되는데, 있어야 되는 데' 이라면서, 설교는 잘하는데 아무것이 없다  그거요.

 내가 어떤 데 그런 소리 들었어. 교인들이 '뭐인가 좀 가면 뭣인가 좀 끌리는  게 있고 뭐 자극되는 게 있고 눌리는 게 있고 뭐이 그런 게 있는 데' 그래 그  사람이 온 교회 돌아다녀 본대요. 부산에 있는 사람인데. 부산에 양사방  돌아다녀 보니까 '아, 어느 교회가, 그 교회 가니까 그게 좀 조금 있더라' 벌써  있다 하면 그 교회는 몇천 명이 모였다 말이오. 또 '아, 그 교회도 보니까  있더라' 그만 그 교회도 몇천 명이라. 이제 교인들이 지금 이거는, 뭐 표적이니  뭐이니 이런 소리하면 아예, 칼빈주의 신학에 장로교 교리에서 이적하는 것은  전부 이단같이 이래 가지고 볼끈 어떻게 뚜드려 잡아 놨는지 고만 병 낫는다고  하면 그만 시시하이 안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것은 말을 못 하고, 저거가  이제 뭐 트집도 잡지 못하겠지만 양사방 돌아다니니까 '아무 데 가니까 뭐인가  좀 좀 끌리는 게 있고 뭐인가 좀 자극되는 것이 있고 뭐 그래도 뭐인가 좀  끌리는 무슨 그런 뭣이 있는 거 같더라' 인제 그걸 짐작하고 다니는 거라. 그걸  짐작해서 '보자. 이 교회는? 아 그 교회 뭐 그게 있다' 거기 갔다가서 나중에  가서는 '요새 우리 교회는 그게 없는데' 그게 없으면 인제 그거 있는 데로  다닙니다. 그게 뭐인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거 있는 데로 돌아다 그 가 가지고  또 딴 교회 보니까 '아 거기에 있더라.'  이러니까. 이 부산은 요새, 서울은 몰라도 이상한 분위기가 됐습니다. 뭐  쩌릿쩌릿한지 뭐 어쩐지 그 사람들이. 발표를 그 사람들도 잘못 해요. '뭐인가  끌리는 게 있고 뭐 자극되는 게 있다' 이러니까 그거 있다 하면 그만 그리 쭉  몰려듭니다. 이러니까. 이리 쭉 올려드니까 담박 쪼그만 한 교회가 왈칵 처지고  또 커졌던 교회가 왈칵 줄어서 그만 작아져 버리고 이래 지금 변동이 많습니다.

인제 뭐인가 그거 뭐, 그게 사실은 그들이 몰라 그렇지 성신의 감화라 그  말이오. 성신의 감화. 감화를 그걸 그 사람들이 표시를 못 해도 그래 짐작을  해요.

 이러는데, 이걸 누가 자꾸 외쳐서 말하면 이단이라 하든지 뭐이든지 '설교는 다  공통으로 다 동등. 다 백 점 설교 다 한다. 백 점 설교 다 하니까 그 설교하는  것이 가짜 목사인지 진짜 목사인지 그걸 알라면 표적을 보이라고 해라. 어찌됐든  간에 인제 거기 뭐 거기에 표적이 있거들랑 뭐 병 낫는 표적이든지 뭐 무슨  기적이든지, 생활의 기적이든지 표적이든지 실지로 하나님의 역사가 그 설교하는  데에 이제 그 교인들에게 그 말씀대로 사니까 나타나는 그 기적이나 표적이나  무슨 그런 것이 있거들랑은 '너희들이 믿고 그거 없는 거는 전부 가짜다' 이런  사람이 뉘가 나서 가지고 좀 외쳐 댔으면 좋겠어. 외쳐 댔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왜, 표적이 있지 왜 없겠습니까? 왜 이적이 있지 왜  없겠소? 왜 기적이 있지 없겠소? 우리가 뭣 가지고 살겠습니까? 기적과 축복으로  살지. 성경에 다 보면 뭐 일 이루어진 것이 다 기적으로 이루어졌고 축복으로  이루어졌지 뭐 뭐로 이루어졌습니까? 내가 이 말씀을 지금 자꾸 이래 지금 하고  있는데, 오늘은 ○목사님이 전화를 해 가지고 '아, 그거 지금, 그거 성경에  이런데, 이런데' 그런 말을 해서 '아 예. 그래요?' 내가 그라고 말았었는데,  그러면 내가 이게 이러니까 안 할까 이러겠는데 내가 더 합니다. 오늘 저녁에 또  해요. 그 해석이 맞습니다.

 이런데, 오늘은 뉘든지 고만 오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기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 어쩌든지 진리 말씀 설교는. 진리 설교는 뉘든지  다 할 수 있다, 이거는 뭐 서당개 풍월이라'. 서당개가. 개를 서당에다. 옛날  한문 배우는 서당 서재라고도 합니다. 서재에다 서당에다가 개를 키우니까 삼  년을 키우니까 그 개가 시를 읊어. 이거 모양으로 하도 설교 많고 이래 놓으니까  이제 뭐 뉘든지 그만 참 대설교가입니다. 우리 교회 이거 반사들 시켜 놓으면  대설교가요. 뭐 기도시켜 놓으면은 참 대기도가요, 뭐 부흥가요 전부  일등입니다. 이러나 실상 행위에는 통통 비어서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 순전히  말만 가지고 지금 해 대는 이 세대가 됐다 말이오.

 이러니까, 말은 다 잘하고 설교는 다 백 점 설교를 하고 있으니 그 사람의  설교에나 그 사람 목회에 기적이 나타나느냐. 표적이 나타나느냐 그걸 봐라.

그거 없거든 가짜인 줄 알아라. 이 소리를 누가 하고 다녔으면 참 좋기는  좋겠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데 지금 그걸 안 한다 그 말이오. 그게 없으면  가짜입니다. 기적과 표적이 목회에 나타나지 안하고 있으면 그 목회가 가짜요.

목회자가 가짜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 또 표적이 나타나, 이게 진짜 목사고  하나님이 같이 한다는 증거 아닙니까? '하나님 이같이 한다는 증거가 너거  사람들 보기에 뚜렷이 나타나면 그 목사는 진짜 목사이고, 암만 입으로는 그래  쌓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가 나타나지 안 하거든 가짜인 줄 알아라' 이 말을  가지고 외쳐 대며 다니면 이거 마구 산사태 난 목사들이 전부 떠내려 가 가지고  다 죽어 버릴 거고 산 목사는 살고 이래 나타날 건데 이거 뭐 가짜가 너무  많아서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런 때가 됐다 그거요.

 그런데, 지금은 인제 그보다도, 이거 표적을 내가 얼마 전에 말했지만 '아,  표적, 표적 그것도 좋지만, 표적 그게 뭐 몇 사람이 보지 다른 사람은 다  보겠나? 그것보다도 전부 자기 속에 있는 자증이 있어야 되겠다. 자기 속에 있는  내증이. 자기 속에 잇는 내적 증거가 있어야 되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경험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뭐, 말은 표시는 못 한다  할지라도. 꿀 먹은 뭐 벙어리라던가. 꿀 먹은 벙어리라 하던가 발표는 못 해도  자기만큼은 체험과 경험이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걸 교인들에게 보여야 되겠다' 이 세대는 뭣을 주님이 제 알  원하시고 양 떼를 끌어 모으는 데는 제일 뭣이 중요한 것이냐? 목회자가  '이래라' 이래라 시켜 가지고 어쩌든지 안 하면 안 되니까 안 하면 소용없으니까  그저 열 번 백 번 말해서 이래라 해 가지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한  대로 지켜서 복을 주실 거라 말이오. 주시니까, 실지로 교인들에게 실천을  시켜서 교인들이 그 실행으로 말미암아 복을 실지로 받으면, 받아 보면 그  사람들에게, 듣기 싫다고, 열 번이고 백 번 말하니까 듣기 싫다 했지만 그대로  하니까 거기에 대한 복을 받았거든. 복 받고, 난 다음에는, '자, 너 지금 그래  하고 나니까 복 받았나?' '아, 받았습니다.' '너 그라면 그렇게 실천 안 하고,  설교 백 개 듣고 하나도 실행 안 해 가지고 복 하나도 못 받은 과거가 좋으나 백  번 한 설교만 해 가지고 네가 그대로 실행하니까 이제 복이 왔으니까 그게  좋으나? 어느 게 좋아?' 그게 좋다 할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오늘 세대는 주님이 뭐 요구하시느냐? 너희들이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실상은 공경하지 안하는 이런 거짓부리 외식하는 세대가 됐으니까 너는  양떼에게 한 마디라도 가르쳐서 지켜 행하게 해라. 지켜 행하게 해라. 지켜  행하면 행하는 것만치 그에게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나타나면 이것이 뭐  빨리는 못 가도 앉은뱅이 모양으로 살살 걸어가도 자꾸 전진해서 걸어가게  되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 되는데,  말만 허풍선이 모양로 자꾸 떠들어대고 이거 말 위주로 해 놓으니까 이놈의  외식하는 이 세대 하나님이 막 부숴 버리면 싶을 것이라 이거. 부숴 버리면 싶을  거라. 이렇게 해서 전부 거짓부리로 이래 놓으니까. 말뿐이지 지금이라도 무슨  환난이 오면 사람들이 아무 실천해 가지고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환난에도,  환난이 와도 능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게 믿어져야 뭐이 될 건데, 한  번 도 실행해 보지 안했으니까 경험이 있어야지? 체험이 있어야지? 믿어져야지.

뭐? 그분을 만나 봤어야지?  이러니까 요번 이 교역자회에서는 이거 우리가 공동으로 한번 회개합시다.

회개해 가지고, 설교 많이 하려고 하지말고 그거 꼭 하나 해 가지고, 하나 하면  대개 거기 보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모든 법칙과 모든 제도와 방편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나는 요거 지금 누가복음 5장 1절로부터 요래 된 요거 가지고  지금 교인들에게 자꾸 내가 설교를 좀 얼마든지 하려고 쌓고 있습니다. 해서, 꼭  이렇게 실행하도록 실행하면, 실행하면 당장 올 거라 말이오. 그래 내가 그랬어  '너희들이 삼 년을 말씀대로 실행을 해 봐라.' 삼 년이면 다 부자 됩니다. 삼  년이면 다 부자 돼. 나는 그거 내가 많이 경험을 했어. 삼 년이면 부자 돼요.

마귀가 주는 거는 처음에 부자 줬다가 뒤가 망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는  처음에 망하, 는 거 주고 뒤에 부흥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법칙  아닙니까?  이래서, 꼭 이 방편을 지금 써야 되겠다, 그러니까, 오늘 세대에 우리가 지금  쓸 방편은 뭐이냐? 설교 준비하는 그거. 그거는 그만 준비 안 할라 그 해도 들은  것만 해도 많이 있고, 뭐 전부 다 들어서 다 신학자요, 다 정통 학자요. 요새  무슨 대신학자라고 뭐 신학 강의 한다고 떠들어 쌓아도 일반 주일학생들이 다  알고 있는 거라. 모르고 있는 거 새 것 뭐 있습니까? 다 그거 아닙니까?  이러니까, 그것보다도, 자, 내가 목회하든지, 내가 설교를 하든지. 내가 기도를  하든지. 내가 뭣을 교회를 뭐 정치를 하든지 뭘 하든지 내가 하는 데에 하나님이  동행해 주는 이걸 보여 주는 이게 제일 중요하다 말이오. 내가 하는 데에  하나님이 동행해 주는 거.

 '아, 이거는 암만 말해 봤자 이제 말은 다 잘하고. 교인들이 말은 신임 안  합니다. 안 하니까 당신이, 내가 하는 말이 당신이 기뻐하시고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그 교인들이 아는 데는 당신이 표적을 보여야 되지, 내 말이,  인간 말이 지금 암만 해야,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인간 말은 이  교인들이 안 듣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하는 일에 당신이 함께 하신다는 걸  보여줘야 이 교인들이 믿고 따라오지 그래 안 하면 따라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이 표적을 주시옵소서.' '야, 이 목사가 목회하고 설교하는 것은 내가  함께 하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하지 않는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는 것이 그들도 보면 알게 되니까 이것을 교인들에게 보여 줘 가지고  교인들이 '아, 과연 여기에는 하나님 말대로 이와같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교인들이 알아야 되겠으니까 이 표적과 기적 나타나기를, 표적과 기적  나타나기를 이것을 우리가 힘을 써야 되겠다 이것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이호는  뭐냐?  그게 일호이고 그 이호는 교인들에게 어쩌든지 설교를, 뭐 듣기 싫다 하든지  말든지 자꾸 설교를 해서 설교를 할 때에 벌써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아 한  번 설교 해 놨는데 두 번 하려고 하니까 이거, 다 또 알고 있는데 이거  미안스럽고 열적다' 그러면, 그러면 제가 두 번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설교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또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아이구 이거 내가 또  잘못 증거했다.' 내나 그 설교를,'잘못 증거했다.' 잘못 증거한 것은 무슨 말을  잘못한 게 아니라도 거기에 대해서 내가 이건 참 요와 같이 하면 되는 건데 이거  된다는 것을 내가 말한다는 것이 제삼 자가 들으면 거짓말하는 척 하게 그래  들려졌지 요게 이렇게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내가 전하지를 못했다. 내 말을  들을 때에, 거짓말로 한다 할지라도 '야, 그 말 하는 거 보니까 참말이다'  이렇게 들어야. 들어야 될 터인데 내가 증거하는 것이 벌써 거짓말이라고 인정할  만치 그렇게 증거 했지 내가 이렇게 내가 힘있게 증거하지 못했다. 이러니까  증거하고 나서도 또 증거해야 되겠으니까, '아, 또 증거해야 되겠다. 또 해야  되겠다 또 해야 되겠다' 백 번이라도 또 해야 되겠다며 또 하면 역사가 있다 그  말이오. 이래 가지고 어쩌든지 이제는 교인들에게 실행을 시키는 이 일에 주력을  해 가지고, 실행을 함으로,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는 그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대로 하나님이 현저히 갚아 주셔서 저희들아 받은 경험이 있고 체험이 있다  말이오. 이거라야 돼지지 이거 안 하고 그냥 말로 만 가지고 자꾸 이 말 저 말  구경시키는 이런 일 해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이거 우리가 요번에 이것을  고쳐서 회개를 합시다.

 해서, 나는 가만히 있고 그러면 하지만 내가 그대로 실행을, 내가 실행하려고  하고 보니까, 실행을 하려고 하고 보니까, 암만 논리적으로 연구한 것도 제가  실행하려고 보니까 또 좀 더 세밀하다 말이오. 실행하려고 보니까 '아 내가  가르치는 거는 순전히 외식이고 실지로 행하려고 하면 들어맞지도 안하는 실상에  들어맞지도 안하는 그런 말만했다' 싶고, 또 자기가 더 좀 실행하고 나서 또  보니까 또 말한 게 그와 같이 또 거짓 부리고 또 좀 실행하고 나서 보니까 또  거짓부리고, 그와같이, 그런 가운데서 차차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고 보니까' 또  말한 게 거짓부리고, 이러니까 내가 거짓부리면, 뭐 다른 말하는가? 내나 그  말을 해도, 그말을 해도 속이 다릅니다. '아, 내가 외식 말했다. 거짓부리  말했다. 이래야 되는 건데' 자기 속에 그렇게 느껴지고 새로 깨달아지고 자꾸  증거가 돼 지는 것이지, 뭐 녹음은 해 놓으면 똑 같은 말일 거라. 녹음은 같은  말인 데 설교하는 사람도 지금 '아, 이건 외식이다. 이거 참 설교를 해야  되겠다.' 더 진실한 설교를 한다고 본인이 느낄 것이고, 또 듣는 사람들도 다  그래 느낄 것이고, 녹음기에 녹음은 하면 꼭 같은 설교일 것입니다. 녹음은 하면  녹음기에는 꼭 같은 설교일 건데 설교하는 사람도 딴 설교이고 듣는 사람도 딴  설교로 들을 것이고 다 그 변화가 달리 되어질 것자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제  참에 나아가야 되지 이렇게 외식으로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언제 ○○○목사님이 ○○○교회 가 가지고 뭣을 공과 하나를 일 주 간 내내 일  주간이 아니지만 뭐 나흘 동안인가 공과 하나만 공부하는데 그거 하나만 자꾸  이래 공부하니까 교인들이 좋아서, 나중에 가서 다른 공과를 이렇게 하나  읽으니까, 아이구, 하던 거 그거 하라고, 그거 해 달라고. 나중에 또 한 개 또  내나 하니까 또 그거니까 아 좋다고. 그래 가지고. ○○○목사님 어디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이소. ○○○목사님 떡 여기서 한번 설교를 시켰더니만 그  설교를 하면서, 그렇게 일주일 내내 했는데, 일 주일이란다 나흘 동안인가 닷새  동안 했는데 그래 좋아서, 뭐 아주 큰 은혜를 입은 모양이라. 그래 가지고  설교를 해요. 그러니까. 내가 ○○목사한테 그 ○○○교회 제가 소개를 하면서,  집회하러 갔는데, '뭐 가서 뭐 주의할 거 없습니까?' 그래 내가 그때 그랬어 말  구경만 시키지 말고 한 말이라도 실천 시키고 오너라. 내가고 말 딱 한 마디  했어 ○○○목사 어디 있어? 내가 그때 그말 했지? 내가 그말 했어. 그말 했는데  참으로 가 가지고 그래 했던 모양이라. 그래 놓으니까 교인들이 그만 뒤집어져.

이러니까, 이제 우리 요거 회개하고 요거 고칩시다

 오늘 이 봉독한 말씀에서 한 가지는, 이 시몬 베드로는 이때가 처음 만난 때가  아닙니다. 여러 번 만났습니다. 제일 처음 만난 것은 요한복음 1장 그때가 제일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고, 또 누가복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있는 것은 두 번  째 그 사실이 기록됐는데 그건 딴 사실입니다. 이제 시몬 베드로에게는 두 번 째  나타나 가지고 된 일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낙심하고 돌아간 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찾아가셔 가지고, 어디까지 갔더냐? 그 해변까지 가 가지고 그 배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배에까지 들어가서 배 속에서 지금 베드로에게 가르칠 때에,  가르쳐 주지 안했어. 배 안에 들어가 가지고 한 말이 있습니다. '시몬의 배라'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여기에 묘한 뜻이  있습니다. 이걸 '아, 너무 육지에 딱 붙었으니까 좀 멀찍하게 띄우면 뭐  자연스럽게 띄워 가지고 그라면, 무리들이 있으니까 멀리 좀 띄워야 말이 들릴  것 아닌가' 그래 생각하지만 이 가운데에 우리 믿는 도리에 대해서 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조금 띄우게 하시고' 그러면, 우리가. 믿음 있는 사람이 믿음 자기보다 적은  사람에게 관계를 가질 때에는 믿음 있는 사람이 믿음 적은 사람에게 찾아가는  그것이 원리입니다. 찾아가는 거. 세상 사람들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찾아가지만  기독교 안에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원리입니다.

찾아갔지만, 찾아가 가지고, 찾아갔으니까 베드로에게 끌려간 거 아닙니까,  베드로 따라갔으니까, 찾아갔으니까. 찾아 갔지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워라'  이러니까 시몬이가 '예' 하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웠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시몬에게 찾아가서, 시몬에게 끌려가서, 찾아갔으니까 끌려갔지만  거기서 방향을 전환시켜 가지고, 주님에게 시몬으로 하여금 끌려오도록 방향을  전환시켜 놓고 그라고 난 다음에 그 뒤에 교훈을 했습니다. 요게 중요합니다.

교역자든지 무슨 뭐 반사들이든지 또 전도 부인이라든지 전도사든지 교인들에게.

신앙 어린 자에게 찾아가 가지고 그 사람을 구원하는 건 찾아가는 거는 정한  이치인데 찾아가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 그 심방  가고 그 사람을 권면하러 가는 그보다 신앙 위에 되는 그 위에 있는 사람에게,  밑에 있는 사람이 신앙 위에 있는 사람에게 수종하는 그 순종함의 그 방향  전환하는 순종하는, 말을 똑똑히 안 해도 속으로 그걸 순종해서 끌려오게 하는  그 중심을 가지고 방향을 전환시켜 놓고, 전환하도록 해 놓고 교훈을 해야 되지  제가 심방 가 가지고 얼마든지 그 사람에게 방향을 전환시키지 못하고 제가 암만  교훈해서 이래 봤자, 거기 붙어서 아부해 봤자 아무 효력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들이 교인의, 믿음 없는 교인의 뭐, 믿음 없는 장로,  믿음 없는 부자, 믿음 없는 집사, 그런 사람에게 가면 어쩌든지 그 사람에게  찾아가 가지고 이렇게 옹호를 해 줍니다. 이렇게 뭐 높여 주고 이래 가지고 막  저게 내가, 거기에 속하고 거기 따라 붙은 사람같이 거기에 속해서 하는 거같이  뭐 이렇게 해 줘도 그 중심에 속에는 이것을. '내가 네게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발에 먼지도 붙이지 않는다.' 딱 그걸 속에 두고 '이것을 이제 내가 끌어서  주님 앞으로 끌어당겨서 주님과 끌어 붙이겠다' 한, 속에 이 중심이 그것이  요동치 안하고 그래 가지고 그 사람으로서 하나님께로 끌려오는 그것을 다문  조만한 뭐 문지만침이라도 그 일을 시발시키면서 하는 그것이라야 생명이 있지.

성공이 있지 그래 안 하면 성공을 못 하는 것을 여기에 지금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아무에나 가 가지고 전하다가 듣지 안하거들랑 그 성에서 나을  때에 발에 먼지를 떨어 버려라.' 먼지 그거 뭐 뭐 묻혀 가지고 오면 어떨까이?  디룩더룩 주먹덩이만큼 붙여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교훈이라 그  말이오. 뭐이냐 하면, 내가 도를 전하려 갔으면 도를 전해 주고 오지 네가  그에게 가 가지고. 도 전하러 갔다고 하는 자가 아 그 집에 가 보니까 돈이 많다  뭐 사업이 크다 뭐 어쨌다 이래 쌓아니까 그만. 교역자라 하는 것이 가 가지고  세상 거 이런 거 저런 거 그래 하니까 그만 얼떨떨해 가지고 그것이 부러운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벌써 귀신이 됐는데 무슨 목회를 할 것입니까? 목회자들  보면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전도 부인들 떡 가 가지고 이러면 '아, 요새  곤란하시지요?' 이라며 돈이나 한 봉지 떡 주면 '에 이, 뭐 괜찮습니다. 뭘  곤란해요?' 이래도 벌써 주면 좋아 하면, '돈이 야 제일이라. 교회도 돈이라. 아  돈이라야 되지 돈 없으면 소용없어. 돈이라' 이리 되면 벌써 그 사람 영은 죽여  놨습니다. 유익이 없어.

 손양원 목사님이 어떤 집에 가 가지고, 그말 유명하지 않습니까? 돌아다니며  실컷 보이고 난 다음에 이제 '아, 아이구 참 대단합니다.' 이 소리 할 줄 알고  떡 이래 하니까, '아. 예. 참 좋습니다. 좋습니다.' 이래 쌓아니까 이거 딴에는  부자는 또 흥기가 나 가지고 내가 이렇다 싶어서 이라고 떡 나중에 문 밖에 나와  가지고 전송하려고 악수를 떡 하면서 이래 그라니까, '아, 뭐 어떻습니까?'  '이라니까 '당신은 돼지로소이다' 이 말 한마디 한다는 그게, 그게 참 뭐 보통  말이 아니라 발에 먼지를 떨어 버리라 하는 요거,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보다 더 좋은 어디 가든지 '아이구야, 그거 좋다.' 거기에 자기  마음이 끌려가고, 마음이 끌려가는 게 있으면 그거는 귀신 됐습니다. 마귀의 종  됐어. 있어 봤자 그거는 소용도 없어. 목사가 돼 가지고 뭣이 복음 외에 딴것이  뭐 부럽고 좋고 뭐이 있다는 그런 게 있으면 그거는 양의 껍질을 입은 이리지  그거는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다 회개해요, 뭐.

 아 제가 믿으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요 하늘과 땅의 것이 나 내건 데 뭐이  부러울 게 있습니까. 부러울 게? 어디 부러울 게 있으며 어디 큰 게 뭐  있습니까? '아따' 크다고 우리가 있으면 주님 외에 크다고 보이는 그 것도 망령,  좋은 게 있다고 보이는 것도 망령, 부러운 것도 망령. 그대로 평가하기는 평가  하지만 우리가 거기 조그마치라도 그런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 벌써 성신이  떠나고 권능은 없습니다.

 그라고 내가 요새 지금 강조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이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제일 처음에 만날 때에는 세례 요한의 소개로써. 세례 요한의  소개로써 안드레가 믿었고 안드레가 믿고 난 다음에 즉시 그 이튿날 자기 형  베드로를 청해 가지고 이제 메시야가 왔다 하면서 전도를 해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그때 믿을 때에 거기에 이름 나기를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네  이름을 게바라 해라' 게바라 말이 베드로라 말입니다. 반석이란 말이오. 그때  제일 첨 만나서 그 이름을 줬으니까, 그 이름을 주기까지 했으니까 얼마나 서로  관계가 가져졌으며 얼마나 예수님과 그렇게 벌써 단합이 됐습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 뭐 여러 군데 기록은 안 됐지만서도 벌써 관계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라다가 예수님 따라다녀 봐야 뭐 별, 이적과 기사는 자꾸 나타나기는 나지만  그것도 한 번두 번 볼 때 그렇지 뭐 자꾸 봐 쌓아니 뭐 취미 있을 게 뭐  있습니까? 이래 놓으니까 다시 게네사렛 호수가에 고기 잡으로 갔던 것입니다.

갔었어. 이제 성경에 망령 두 번 부린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5절에는 게네사렛 호수가에 다시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 기록돼 있고 또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는, 요한복음 2장 5절에 보면 또 망령을 부리고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 나타나서 있습니다. 이렇게 다녀도 아무 맛이 없으니 예수님을 떠나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따라다니는 것이 맛이 없어 그렇겠습니까? 맛이 없는 그런 거는  아니오. 예수님 따라다니는 것이. 자. 인간이 모르는 막 하늘나라의 보고를 열어  놓고 무진장의, 뭐이 세상 이런 거 억억만 배도 더 되는 무진장의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는 거 참된 거 이렇게 좋은 걸 주는데 왜 베드로는 취미  없었습니까? 제가 변해져야 되지, 땅딸보 좋아하는 자에게 신사의 암만 무슨  역사를 보여 줘도 그게 재미가 있을 게 뭐 있겠소? 이러니까 제가 변화되지  안했기 때문에 재미가 없지만, 예수님의 도를 참 알뜰히 받아 가지고 자기가  변해졌으면 재미가 있을 건데 고마 안 변해지니까 재미가 없다 말이오. 재미가  없으니까 그만 가 버렸어. 예수님이 어디 그 뭐 실행시킬 여가가 있습니까?  실행시킬 여가 없고 자꾸 이래 교훈만 하니까 예수님의 교훈이 그렇츰 크지만  실행 안 하니까 그들이 맛을 못 보니까 그만 가 버리고 재미없으니까 갔다  말이오. 그런 거 아닙니까? 나중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그물 던지라'  실천해서 던졌거든. 던지니까 고기가 올라왔다 말이오. 한번 척 실행해 가지고  맛을 보고 나니까 막 죽자 살자하고 예수님에게 달라들지 안했습니까?  우리가 교인들 떨구는 게 뭐이냐 하면 교인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실행을 안  시켜 놓으니 이게 맛을 못 봤다 그거요. 암만 고량 진미가 있지만 먹어 봐야  맛을 알지. 예수님이 그렇츰 설교 뭐, 우리가 암만 잘해도 예수님만큼 설교 잘  하겠소? 이렇게 설교를 잘 했지만 그 시몬에게 요래 봐라 조래 봐라 시켜서  그와같이 한 그런 것이 그만 몇 가지 해 봤지만 그거 또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고  그게 없으니까 뒤로 돌아 갔다 말이오.

 여기서 우리에게 뭣을 가르치고 있느냐? 벌써 택자들이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것은 나기 전에도 다 입고 있지만 예수님의 대속의 효력을 실상으로 입은 것은,  실상으로 입은 것은 중생이 처음이요, 중생이 처음인 데 중생은 주관은  모릅니다. 순전히 객관 역사입니다. 이러고,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주관 역사로  나는 것은 예수 믿기를 시작하는 것이 그것이 벌써 부르심을 받은 것이요  그때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는 벌써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  성화구원, 건설구원, 행위구원, 영광구원 이 구원을 벌써 입혀 줄라고  하나님께서 성화구원에 착수를 하신 때라 그 말이오. 착수하신 때. 착수하기  전에야 베드로가, 내나 그 바다요, 그 그물이요 그 바다요, 그 그물이요, 그  배요, 그 고기 잡는 그 법칙이요, 그 수단이요, 그 방법이요, 거기 가서 뭐  얼마든지 고기 많이 잡지 안했습니까? 잡았지만 일단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이  그를 구원하시기로 착수를 딱 하시고 난 이후부터는 다릅니다. 이것을 여기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착수하시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베드로가 옛날  예수님 만나기 저 그 바다, 그 그물, 그 배, 그 방식, 그 기술, 그 목적 가지고  아무리 밤새껏 해도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어. 이걸 우리 교인들에게 딱  알려서 이걸 실천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이 믿고 난 다음에 제가 재미없고 하니까, 재미없는 것은  제가 눈이 어두워서 재미가 없고 귀가 어두워서 재미가 없고 맛을 안 봐 재미가  없지요, 왜 재미가 없어? 썩을 것이 재미있고 썩지 않을 것이 재미없는가? 약한  것이 재미있고 강한 것이 재미없는가? 욕된 것이 재미있고 영광스러운 게  재미없는가? 혈육의 것이 재미있고 신령한 것이 재미없는가 이러니까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교인들이 그만 재미가 없어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 뭐  날마다 별스러운 게 없고 이래 가지고 권태를 느끼는 그런 때가 있다 말이오.

그런 때가 있으니까 그것이, 권태 느끼는 그걸 뭐로 가지고 방비하겠어? 그  방비할 도리가 없어. 베드로의 권태 느껴 가지고 저 게네사렛 호수가로  고기잡으로 가는 그 권태를 뭐로 취해줬소? 다른 걸 취해 줄 수 없어. 떡 시켜  보니까, 하나 예수님 시키시는 대로 그물 던져 보니까 뭐 권태 다 달아나  버렸어.

 그래 가지고 밤새껏 해도 얻은 건 하나도 없다, 밤이 지나가는 걸, 우리를  하룻밤 나그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밤은 우리 육체의 일생 동안을  하룻밤이라. 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는 날까지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 떠나서 옛날 수단 방법, 불신자의 수단 방법. 처세법 그거  가지고 암만 해 봤자 자기 수입은 하나도 없습니다. 유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유익 있다고 하면 그거는 큰 화를 초래하는 화근이지 그것이 유익된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자기가 안 망하면 자손이 망해도 망하고 오늘 안 망하면 내일  망해도 망하고 또 그것이 죽는 날까지. 자 육신의 것이 안 망한다 합시다.

육신의 것이 안 망하고 그 재산이 그 대로 있고 그 지위가 그대로 있고 그  직업이 그대로 있고 그 권세가 그대로 있고 그대로 있었으면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자, ○○○조사님 한 번 대답해 봐. 왜  망했을꼬? 구원 이룰 기회에 구원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썩을 것만 자꾸, 썩을  양식만 위해서 일하다가서 마지막 끝났으니까 그거 망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게 아주 야나지게 망한 것이고. 큰 저주 받았고, 이제 그래 가지고 당장 그게  불이 나 가지고 타 버리든지 그리 아니면 무슨 환난을 당하든지 이래 가지고  그게 그만 절단이 나 버리면 거기서 정신 깨 가지고 이제 그게. 보이는 그  세상적의 그게 망하면 신령한 것은 그래도 덜 망하고 손해 덜 볼 것이고, 만일  그게 안 망하면 신령한 것까지 영원히 다 망할 터이니까 이거는 뭐 어쨌든지 다  망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다 계산할 수 있지 안해요?  이러니까, 다 망한다는 거 이걸 우리가 교인들에게 똑똑히 알립시다. 그 망할  것이 일시에 올 때는 좋은 것같이 오는 수 있지 않습니까? 마귀란 놈이 꼬우는  것은 언제든지 성공 같은데 마지막에 실패되는 것이 마귀 역사입니다. 마귀가  주는 것은 처음에는 성공, 결말이 멸망, 주님이 주시는 거는 처음에는 멸망,  나중에는 성공. 그 정반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교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하든지 간에 어쩌든지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어떤 일을 해도 일단  예수 믿기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불신자와 방편대로 하면 다 망한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꼭 인식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빌고 난 다음에는 그만 세상일은 안 해야 될 건가?  왜 안 해? 베드로가 내나 그 바다에서, 그 그물로, 그 배로 거기에서 고기를  그렇츰 많이 잡지 안했습니까? 어째 그렇습니까? 세상 일 하지만 예수님시키시는  대로, '저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지라' 시키시는 대로 하니까 고기가 그렇츰  잡혔다 그거요. 큰 성공했다 그거요. 깊은 데 가서 고기를 잡아라고 예수님이  지도하는 그 지도가, 지도가 베드로 마음에 맞았겠습니까? ○○○목사님 해석한  거 보니까 베드로가 주님이 그와같이 말씀하시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니, '밤새껏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니 내가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참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그래 했다 하지만 믿음 가지고 했으면 뒤에 가서  무엇 때문에 기절할 것이오, 기절하기를? 뭣 때문에 죄인이라고 '나를  떠나십시오' 할 것입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말이오. 우리가 다 경험하지  안했소? 은혜가 있을 때에는, 은혜가 있을 때에는 교역자가 금 쪼가리같이  보이고 눈이라도 빼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뚝 떨어지고 은혜가 떨어지고  반대가 돼지기 시작하면 그만 뭐 교역자나 신앙 지도자가 뭐 그냥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쏴 죽여 버리면 싶어요. 안 그렇습니까, 다?  이랬는데. 이제 따라다니다. 가서 아무 거석이 없어서, '에 이, 뭐 별 게,  재미가 없다 말이오. 저거 옛사람의 욕심이 하나도 달성하지 못하니까 재미있을  턱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다시 어부노릇으로 돌아가 가지고 이래 있으니까  예수님이 와 가지고 또 뭐 듣기 싫은 설교 실컷 하고 나더니만 이제, '고기 뭐  잡은 게 있나?' 이러니까 '못 잡았습니다.' '못 잡았어? 그라면 저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 이러니까 이제는, 몰 라. 그거 사실이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 그래 추측이 돼져. 내 마음에는 말이오. 나 같으면  그렇겠어. 딱 그라니까 속에 '이제 됐다. 이제는 뭐 코가 납작하게 되게 콧방을  한번 줘야 되겠다. 됐다' 싶어서 '예. 우리가 밤새껏 수고해도 얻은 게 없지만'  '선생님' 안 했어. '선생' '선생이 말하니까 그 말에 의지해서 던져보겠습니다.'  이라면서 자. 그럴 때, 내가 베드로의 심리를 내가 생각하는 대로는. 추측하는  대로는 그래요. '한 마리도. 피리 새끼 한 마리도 안 잡혔으면 좋겠다. 선생님,  이거 고기 뭐 있습니까? 피리 새끼 한 마리도 안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하면  좋을라고 그렇게 제가 생각을 철통같이 그런 마음 가지고 요래 해 가지고  있었는데 들어 올리니까 고기가 이거 뭐 그물이 찢어질 만치 두 배에 가뜩  잠기게 잡혔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베드로가 제가 굴복 안 할 수 있습니까?  제가 굴복한, 그 발 앞에 꿇어 엎어지고 그만 굴복당한 그거는, 그게 하나 형식  계시이기 때문에 그렇게 영원 전부터 예정해서 그래 우리를 구원 도리를 주시기  위해서 만든 거라 말이오. 그 베드로가 무엇 때문에 굴복했어? 완전히, 처음에  예수님 말씀에. '아. 뭐 낮에 고기 잡아? 낮으로는 고기가 저 물 속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고 밤으로 나오는 것인데 낮에 고기 잡아? 낮에라도 또 물이 얕은  데는 떡 던져 내리면 이 고기가 이래로 못 내려 가니까 턱 걸릴 수가 있지만  깊은 데는, 그물은 시르르르르 내려 가고 고기로 말하면 그물의 십 배도 더  빠르게 달아나는 건데 뭐 그물 내려가기 전에 다 달아나 버리지 뭐 잡힐 거라고  하는가?' 이래 가지고 비쭉거리며 했는데 제가 그걸 안다 말이오.

 이랬는데, 이제. 주님의 말씀은 저거는 얼토당토 안 한 소리를 한다 이랬는데  나중에 실지로 이루어지고 보니까 그대로 상상도 못 할 만치 돼졌다 말이오.

이러니까. 하, 이거 내 생각. 인간의 통계, 인간의 모든 경험 체험, 인간의  방편, 인간의 모든 것 다 이것, 인간의 모든 거는 내편이었는데, 인간의 모든  거는 내 편이었었고 또 예수님의 말씀하신 거는 예수님 편이었는데 예수님과 내  편과 정반대됐으니까, 지금 예수님의 편의 것을 납작 누를라고 했는데 정반대로  이게 의외에 고기가 그렇츰 많이 잡혔으니까 자기의 모든 기존 지식과 선입적  관념, 체험, 경험, 통계. 이제까지 주장하는 방편, 완전히 예수님의 발 아래  굴복을 당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실행을 해 봐야, 실행을 해  봐야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게 돼지고 주님을 이렇게 앙망하게 돼지지 실행 안 해  보면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할 때에 실행할 때에 우리가 두 가기  있습니다. 실행할 때에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인간 법칙에 세상 법칙에  하나도 위반되지 안하고 동반될 때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디까? 주님의 말씀대로  해도 세상 법칙에 걸리지 안하고 이래 동반될 때가 있다 말이오. 동반될 때가  있는데, 장 그러면 하지만, 동반되다가 가다가는 뜻밖에 주의 말씀대로 하려고  하면 이 세상 일이 다 절단 나겠고 세상 일 이거 절단 안 나게 할라 하면 주님과  주의 말씀을 배반해야 되겠고 이런 단계에 이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거  많이 보지 안해요? 그거 때문에 예수 믿기 다 고통당하고 있지 안해요?  이라는데, 자, 이제까지는 세상 법칙에도 맞고 주님 법칙에도 맞았으니까  신앙생활 한다고 지켜 나왔지만 이제는 이거,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하나라  하는 이게 떠 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럴 때에 자기가 주님을 믿으면 자기  부인하고 주님 믿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안해요? 자기 부인하고 주님 믿는 거  아니오? 자기 부인하고 주님 믿는데, 자기 부인한 거는. 자기로 보기에는  '이라면 망한다 망할 수밖에 이거는 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은 다  버려 버리고, 인간의 힘으로 되는 거는 다 전패 전멸이 되어지고,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자. 여기에 대해서 주님이 책임을 져야 되겠소 안 져야 되겠소?  어떻습니까? 져야 됩니까 안 져야 됩니까?  우리 사람들도 자기가 지도를 할 때에 지도받는 그것이 등신이면 더 기가  찹니다. 지도할 때 그게 지도를, 뭘 시키면 속으로 꾀를 파 가지고 요래  하면서는 '아마 이런 건' 듣는 체 하고도 속으로 저렇게 딱 구멍을 파고 또 이래  뭘 하면 그 쪼매만, 뭐 다 순종하는 거 같아도 순종하는 거 몇 개 있고 몇 개  순종 안 하고 이라면 부담아 적어져요. 부담이 적어져. 왜? 그러니까 뒤에 안  돼도, 안 돼도 내 마음에 '조놈이 그거대로 꼭 시키는 대로 했으면 될 건데  시키는 대로 안 해서 그렇다' 이러니까 부담이 적습니다. 그렇지만 저게 등신  같은 게 철통같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다 했는데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해서 내가, 지도대로 하기는 꼭 하기는 했는데 그 일이 안 됐으면 어찌  됩니까? 사람으로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내가 경험한 대로는. 내가 경험한  대로는 내가 뭐 해 가지고 만일 그리 됐다고 하면 그거 내게 힘이 없으면 그거  배상을 못 해 주지만 힘이 있으면 배상 다 했지 배상 안 해 본 일 없습니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자, 아무라도 그래 시켜 놨는데 그대로 철통같이 했는데 안 됐으면. '됐느냐?'  그게 안 됐으면 '그래?' 그라면 이걸 좀 한 번 해 보지. '그거 할라 하면 그만,  그만 그때 그만 있는 돈 다 써 버리고 지금 뭐, 그거 뭐 안 해도 괜찮습니다. 뭐  돈이 있습니까?' 하면 어짜겠소? 내게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돈이 있으면  '아. 돈이 여기 있으니까 또 한 번 해 봐라.' 내가 지도를 잘못했으니까. 그  지도가 안 됐으니까 또 딴 지도를 시켜 가지고 또 한 번, 또 한 번 시켜 볼  수밖에 없다 말이오. 시켜 봐 가지고 또 그게 실패했으면 내가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더 미안해서 세번째, 두번쌔 자본을 처음에는 대 주지 안했고 두번째  자본 대 주면서, 자, '에이고, 그놈 자꾸 이와같이 해 가지고 이거 뭐이 이거  자본 이래 대줄라 하니까 밉상이다' 이래 보입니까? 자본 대 주면서도 미안타는  감이 그래 생기고, '내가 이거 미안하다. 이거 내가 잘못 시켜서 그래 가지고  해도 그게 시세를 못 맞춰서 그만 헛일했구나.' 내가 그 사람 두 번 헛일한 것을  두 번 자본을 대 준다 할지라도 잘못 지도해서 그랬으니까 내가 책임감이 있고  미안할 감을 가지고 '이걸 어떻든지 이거, 이거 한번 성공을 해야 되겠다' 이래  생각이 나지지, 사람 쳐놓고도 그런 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아, 철통같이,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이거 세상 절단나게 되는데 절단나도 당신  말을 믿고 당신 하라 한 대로 딱딱 해 놨으니까 그 일을 하나님이 책임을 안  지고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러니까, 그럴 때가 하나님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말씀대로 삶을 인하여서  역경을 당해서 말씀대로 살라 하면 큰 낭파가 되고 큰 뭣이 파멸이 되어지는  그때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때요, 하나님의 기적이 축복이 나타날 때라 하는  것을 우리는 잡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와서 하시는 그 일이 올 수 있는 그런 때라 말이오. 그런 시기라  말이오. 이런 좋은 시기가 올 때마다 다 떨궈 버리니까 뭐이 됩니까?

 그래 가지고 베드로가 떡. 예수님이 그래 턱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한 번 했다  말이오. 시키는 대로 한번 하니까 고기가 그리 잡혔으니, 자, 베드로의 신앙의  권태증도 다 달아나 버렸지, 그라고 난 다음에, 시키고 난 다음에 재미있는 일이  뭐 있어요? 재미있는 일이 세 번이나 있어. 고만 그 앞에 꿇어 엎드러졌지. 그래  나는 그거 봐. 이거 교인들에게 자꾸 시켜야되겠다 뭐 하나 시켜, 말씀대로  시키기만 시키면 이제, 시키는데, 말씀대로 시키는데 말씀대로 시킬 때에 이  세상 법칙과 하나님 말씀과 둘이 동반되는 그때만 그때는 시키기는 좀 수월해요.

수월하지만 그때 시킬 때가 재미가 있습니까 동반이 안 되고 서로 배치가 될  그때 시킬 때에 재미가 있습니까? 어떨 때 재미있습니까? 예? 배치가 될 그때에  재미가 있다 그 말이오. 왜? 배치될 때 그때 하나님의 솜씨가 직접 와서 역사할  것이거든, 그래 한번 턱 그 고개만 척 넘겨 놓으면 그라고 난 다음에는 큰  소리할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심방 가도, 그런 걸 좀 많이 봐요. 심방 가 가지고 그때는 뭐 암말도  안 하고 떡 모르는 척 하고 그라면. '아이구, 뭐 어떻고 저렇고 '그래? 그래  됐어? 그거 참 잘 됐구먼' 이래도 그만 그 교역자에게 마구 딱 들어붙고 막  이렇게 존경하고 이래 가지고 뭐 뭐이라도, 한 번 그라니, 자, 한 번 그라니까  또, 시켜 놓으니까 그래 됐어 두 번 그래 봤어, 세 번 그래 봤어 그라면 그 뒤에  그 사람이 그 교역자에게 뭐 명령하는 대로 '예'로 순종합니까 안 합니까? 하요  안 하요? 할 수밖에 없지. 다 그래 가지고 권위가 선 거지 뭐 말하기를.

○○교회 교인들은 모두 등신이 그 모두 미개인들이 돼 놔서 목사 시키는 대로  한다고 이라자만 아니오. 그분 시키는 대로 해 가지고 경험하고 체험했기 때문에  다 그런 것입니다. 무식하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이 순종 더 잘  안 합니다. 강퍅은 더 부리요  이러니까, 우리 권위가 여기에 있어. 그러니까. 이거 우리 교역자들이 이 거  권위있는 교역자 되려면 자꾸 이제 말씀대로 시켜야 돼요. 어쨌든 간에 강제로  시켜야 돼요. '해라. 해라' 시키면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터이니까.

능력 나타나고 난 다음에는 이게 권태도 다 의심도 낙심도 다 없어져 버리고  이제 예 예로 복종하겠다. 교인들 복종시키는 방편이 여기 있구나 하는 그것을  제가 좀 깨닫고 인제 자꾸 지금 나는 그랄 작정입니다. 그거 어때요?  그런데, 이제 교역자가 믿음이 없으면 안 돼. 떡 그라다가서, 말씀대로 하는데  말씀대로 할라면 분명히 이거 망하고 말씀대로 안 하면 성공하고 요럴 때는 되면  교역자가 그만 의심이 있어서. '야. 이거 꼭 시켜 놨다 가 만일 안 되면  어짤꼬?' 이러니까, 벌써 교역자가 믿음이 없어 의심해 놨으니 뭐이 되겠어.

되기를? 하나님 말씀은 변치 않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게, 보면 안다 말이오.

요게 그런데. 요거는 이 말씀대로 하는데 이 거 말씀대로 하지만 요게. 거룩한  고기를 옷자락에다가 이래 싸 놓으니까 고기만 거룩하지 옷자락에 하나 쌌다고  옷자락이 어디든지 대이면 대이는 대로 다 거룩해질 게 아니라 말이지. 고저  하나 순종했다고, 순종은 했지만 다른 거 순종 안 한 면이 있으니까. '그거 그래  해 봐야 안 된다. 네가 이것도 순종하고 조것도 고쳐라. 야, 너 그거 성질  고쳐라 야 너 거짓말하는 입술 그거 고쳐라. 야 너 취미 그거 고쳐라. 네가 정신  그거 고쳐라. 너 왜 저 동무 따라다니며. 자꾸 이거 나쁜 동무를 친하는 그거  고쳐라. 너 안 갈 데 뽈뽈 가는 거 그거 고쳐라. 너 욕심 그거 고쳐라. 너 허영  허욕 고쳐라.' 아, 교역자가 보면 알지 안해요? 그거 대략 아는 대로 떡 떡 떡  이래 고쳐도. 고쳐 놓으면 그만 벌써 표가 납니다. 그거 이래 고치라 하다 보면  나중에 뭐 기적으로 무슨 복이 안 와도 고치다 보니까 더러운 게 나가 버리고  좋은 게 나오니까 그만 그 사람이 그만 살아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거는 실천을 시켜야 되겠다, 이래야 우리가 성공을 하지  이거, 이거 안 시키면 우리 목회 하기에 골만 빠지지 헛일이고, 저거도 곤란  교역자도 곤란 다 곤란이겠다 이래서, 나는 이걸 자꾸 지금 가르칠 작정입니다.

그러면 다 성공합니다. 이건 저도 경험했어.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데  좋은 거는 하나만 좋으면 그것만 좋지만 나쁜 거는 하나 나쁘면 다 나쁩니다.

이러니까, 열 가지 가운데에 9가지를 고쳤습니다. 아홉 가지 고치고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한 가지 남아 있으면 한 가지 그거 때문에 9가지 고친 것은  그대로 있습니까 아홉 가지 고친 것도 지금 정죄받고 있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정죄받고 있습니다. 정죄받고 있어. '하나 잘못했는데. 아흡 가지는  잘했는데.' 아니오, 그래도 그거 정죄받고 있습니다. 죄와 의는 다른 것입니다.

의는 하나 의롭다고 모든 게 의로운 게 아니지만 죄는 하나 죄되면 그 한 죄  때문에 모든 게 다 죄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자꾸 그걸 '요거 고치라 조거 고쳐라' 듣기 싫어도 자꾸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걸 실천해 놓으면 우리가 이거 부자가 안 되겠나, 첫째는,  일호에는 자연 은총의 부자 되고, 부자 되고, 인제 자연 은총에, 예수 잘 믿어  가지고 가면 은총으로 부자 되고, 부자 되고 난 다음에는 부자 그 놈만 보고  바라고 앉았는 자는 그거는 육덩이 사람이기 때문에 희망이 없어 . 나중에 가서,  그거만 보고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그거 냅두면 구원 못 이룰 터이니까,  부자가 뭐 천국 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 가기보다 더 어렵다 했으니까  못 가니까 하나님이 치실 거라 말이오. 치시기 전에 또 예언을 한다 말이오.

'야, 너 이것만 보고 살 것이가? 네가 이렇게 해서 믿음 지켜서 이런 거 된 걸  봐서 믿음 지키면 신령하고 영원한 것이 돼지니까 그 신령한 데 욕심을 내도록  자꾸 눈을 띄워 주라 말이오. 띄워 줘 가지고 일차 복 자연의 축복받고, 자연의  축복받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의 양심을 살려 주면 자연 축복 받은 사람이 세 가지  회개됩니다.

 세 가지 회개라니? 하나 무슨 회개됩니까? ○○○목사님, 무슨 회개 되지요?  봐. 인제 부자 되는 방법 싫구만. 교인들이 막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달라붙는  그런 지금 목회 하기가 싫어? 여기 조화가 있는데. 이제 첫째 회개는 뭐이냐?  자꾸.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전, 그물로, 그물 던지기 전 그것을 자꾸  과거를 반성하도록 만들어야 돼. 과거를 자꾸 반성을 하며 보니까 과거에 주님은  이렇게 말했는데 저는 이랬거든. 정 대립이거든. 그렇지 않습니까? 정  대립이었는데 이제 주님의 말씀이 이겼으니까 자기가 굴복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자기의 인간의 주관과 주님 말씀과 대립된 데에서, 주님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이 권위있는 걸 알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이 객관 타율, 타율인 주의 말씀과 자율인 이것과 둘이  이와 같이 됐을 때에 이 자율을 부인하고 타율을 신앙한다는 이것은 그 사람에게  강제로 실행을 시키고, 실행을 시키는 거 외에는 자기 부인시키는 길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시키는 길이 없고. 그 타율인 주님의 말씀을 신앙케 하는  그런 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억지로 시켜요, 시키기를. 뭐 베드로가 이래 한 거는 이거 뭐 제가  하기는 했지만 비쭉거리며. 믿으며 했습니까? 안 믿으며 해도 좋습니다. 안  믿으며 해도 좋아요. 안 믿으며 해도 주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그것을 일 단계는 축복을 줍니다. 이제 그러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의 형식으로  살고, 양심으로 살고, 그 다음에는 말씀으로 살고 그 다음에는 영감으로 살고  자꾸 단계가 올라가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 자기 자율과 타율과 이래 비교하다가  결국은 자율이 주님의 법도 아래 굴복을 하게 되기 시작하면, 그만 하나 하기  시작하면 자꾸 돼 나갑니다. 그러니까 뭐 일취 월장이라. 자꾸 돼.

 그라고 난 다음에 나중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죄인이로소이다' 그거 무슨 소리입니까? 죄인이 뭐이 죄인이지요? 예? 삐뚤어진  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 나는 전부 삐뚤어졌습니다.' 이제 이것이 나와야  이제 신앙이 됩니다. '아. 내 생각도 삐뚤어졌다, 욕심도 삐뚤어졌다. 취미도  삐뚤어졌다 참 인간성도 삐뚤어졌다' 이제 모든 걸 볼 때에 자기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고, 행동도 그렇고 모든 사상이나 비판이나 평가나 전체가 삐뚤어져  자기 삐뚤어진 걸 그거 확실히 알아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자기는 전체가 삐뚤어진 뭉텅이라, 이러기 때문에 주님과  자기와는 도무지 이렇게 화합할 수 없다는 자기를 부인하는 이 단계의 회개가  나오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떨었습니다. 떨었어. 아마 뭐,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라 하니까 그러면 되게 떨고 그래 무서워하고 떨었던 모양이오. 왜  떨었겠습니까? 떤 것은 '아,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다 무시했는데, 무시했는데  보니 주의 말씀은 전부 다 말씀대로 다 되니 다 되니, 전부 성경 말씀대로 다  되니까 내 행동은 성경 말씀을 부인하고 전부 했다 보니까 성경 말씀대로 다  되는 날이면 자기는 어찌 되겠습니까? 자기, 자기는 전멸이 될 수밖에 없고  이라다 보니까 이제 주님은 지극히 크시고 높으신 분이니까 주님이 두렵지.

주님이 이 두려운 주님이 돼 버렸지, 또 주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모든 것이  판단될 터이니까 자기에게는 전보 전멸될 것밖에는 없지, 그러니까, 자기는  멸망덩어리요, 멸망 덩어리요 삐뚤어진 덩어리요 전부 거짓말 덩어리라,  굴복한 거는. 거짓말 덩어리라, 너는 죄인이라, 삐뚤어진 덩어리라. 떠는 것은  나는 멸망할 덩어리라. 이 단계 되고 난 다음에 '네가 이제부터는 사람을  취하리라.' 그라고 나면. 그 단계에 지나가면 비로소 그 사람이 인간의 갈급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 무엇보다도, 돈보다도 천하보다도 사람이 옳은 사람  돼야 되겠다. 참, 참 음은 사람 바른 사람은 참 가치 있다. 우주보다 참사람은  가치있다. 영계보다도 참사람은 가치있다. 모든 피조물 전부의 전부보다  참사람은 가치있다' 하는 인간의 가치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사람,  취할 수 있는 그런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교인들에게 꼭 실천을 한번 시킵시다. 실천시켜서, 요  월례회에서 그저 우리가 자꾸 말씀 구경만 시키지 말고 꼭 한 말씀이라도 실행을  실천을 시킵시다. 실천시켜서 보면 이상해요. 교인들 가만히 보니까 자꾸  새김질. 처음에는 안 들을라고 쌓는데 억지로 강제로 불러다가 새김질을 시킨다  말이오. 이 구역장들이. 구역장들이 요새는 지금 교인들 데리고 가  새김질시킵니다. 자기가 지금 뭐 하려고 해도 거석하니까 녹음기 하나 사 가지고  이거 테이프 가지고 저 산골짜기 데려다 앉혀놓고 시켜. 산골짜기 데려다 앉혀  놓으니까 뭐 여기서보다 좀 잘 들리거든. 그래 또 들리고 또 들리고 또  들리니까, 자꾸 들려 놓으니까 이게 그만 맛이 어 가지고 안 듣고는 못 견뎌.

자꾸 들을라 해. 자꾸 들을라고 해 가지고서 뭐 그만 듣는 사람은 안 빠져요.

자꾸 들어요.

 자꾸 듣지 이라니 또 쪼끄매씩 실행을 해 보면, 실행을 하니까 그것이, 아  이것도 보면 쪼그만한 일이라도 이것도 안 될 것인데, 주의 말씀대로 하면 이  사람하고는 안 될 것인데 그게 됐거든. 이러니까, 새끼 이적을 봐요. 새끼  이적보고 새끼 표적 봐요. 새끼 이적 표적 보면 그만 얼굴이 윤기가 나고 용기가  있어. 이제 뭐 살 구멍이 나왔으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이 부자 방망이를 만나  놨다 말이오. 이거 만사 해결의 살 길 만났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니까 자꾸 그라는 사람, 그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은 자꾸  지켜 행해요, 보니까.

 연보도 보니까 연보해 가지고, 연보해 가지고 보니까 '하, 요번에 기적이라요.

기적이라요 연보하고 난 다음에 축복받아 기적이라 하는 거는 자꾸 연보해. '뭐  그만 하면 되지 그래 너무 지나치게 하면 안 된다.' 또 해 자꾸 해. 자꾸 하는데  자꾸 주거든. 인제 권찰들도. '자, 요번에는 연보를 아무것이가 어떻게 했다.

어떻게 했다. 이런데 자, 너거 현상 봤지?' 이래 떡 자꾸, 자꾸 연설하는 거라.

'자, 너거 현상 형편이 이렇지? 또 연보를 너거 어떻게 했지?' 나중에 그라고 난  다음에, 연보하고 난 다음에 한 반 년이나 일 년이나 지나고 난 다음에 그때  '어떻지?' 자기가 적어 놨거든. 다 적어 놓고 난 다음에 '자, 그때 연보 이렇게,  이렇게 냈는데 지금 어찌 됐지?' 연보한 그대로 딱 정확한, 정확한 숫자로  말이지, 과학적으로 딱 보응이 다 됐다 말이오. '자, 이러니까, 너거 그때 봤지?  지금 어떠노?' 이걸 말하니까 그게 증거라. 이래 놓으니까 '야야, 참. 참, 참,  참' 그러니까 '나도 한번 해 보자' 남 보고 '나도 한번 해 보자' 달라들고 제가  해 가지고 몇 번 재미본 거는 뭐 하지 말라 하면 그거 죽지 안 하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 살 길이, 살 구멍이 있는데 이 살 구멍일랑 막아 놓고 공연히  설교 준비하느라고 야단만 지기고 애만 먹었다 그 말이오. 인제 오늘 우리 그거  회개합시다. 어쨌든간에 다 꼭 실행을 시킵시다. 거기서 성공이 있습니다.

 다 같이 한 번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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