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귐을 삼가라

 

1982. 6. 27. 주후

 

본문:마태복음 10장 11절~13절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길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한 지식을 주는 말씀입니다.

어느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서 주인을 정할 때에 사람을 먼저 잘 살펴 가지고  주인을 정하고 또 한번 정했으면 중간에 변동하지 말고 그 성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비단 전도자가 전도하러 가  가지고 하는 그것을 하나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신 것은 그와 같은 이치의 모든  것을 다 총칭해서 하나로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모두가 다 증인 생활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증인 생활 하는 것이 자기의  천직이요 본분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방편 저런 방편 그 방편은 심히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농부 일하는 것으로, 장사하는 것으로, 정치하는 것으로, 또  교육하는 것으로 이런 것으로 다 증거해서 증거의 방편은 다르지마는 실은 다  증인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 생활인데, 이 증인  생활을 다시 분류한다면 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증거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살더니마는  과연 하나님 앞에 영과 육이 아울러 복을 받아 그 개인도 잘 되고 가정도 잘  되고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이 다 잘 된다. 과연 예수교는 세상 복도 받고  사람이 참 만들어지는 그 복을 받는다. 이것 보니까 하늘나라도 있는 것같이  보여진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해서 전도를 받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아, 저 사람 예수믿는 것 보니까 그까짓 예수교는 참 몹쓸  교다. 저렇게 예수를 믿는 것들 보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훼방받게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얼마 지나고 나면 그 사람이 형편없이 절단이 납니다.

절단나면 안 믿는 사람들도 ‘야, 예수는 그거 믿을려면 잘 믿어야 돼. 잘못  믿으면 탈나. 아무것이 그 사람 예수믿는다고 그 꼬라지를 하더니마는 영 그만  절단나 버렸어.’  이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으로, 또 예수님은 진노해서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이렇게 증거를 해서, 좋은 증거를 하든지 제가 망하는  것으로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으로 증거를 하든지 증거 생활은 증거 생활입니다.

제가 뭐 명패를 안 붙여도 그 뒤에 따르는 보응이 그대로 됩니다.

믿는 사람들이 당장에 잘 믿는 효력이 안 나온다고, 당장에 잘못 믿는 벌이 안  온다고 어떤 자는 하나님을 무심하다고 원망하는 자도 있고 어떤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도 있고 이렇게 있지마는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는 절대자이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활은 이런 증인 노릇 하든지 저런 증인 노릇 하든지 반드시  증인 노릇을 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 사람의 미래를  불택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합니다. 불택자는 세상에서 죄와 마귀로 더불어  살다가 지옥 갈 자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우리가 판정을 못  하지마는 택한 자들에 대해서는 환하게 판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 그  사람의 현재까지의 생애가 이런 것 보니 성경대로 말하면 그 미래는 이럴  것이다’ 하면 그대로 대개 됩니다. 물론 자기 행위가 변해지면 그것도  변해지지마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보상과 보벌은 참 정확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전도자가 아니라도 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잘 복음대로 믿으면 복받고 복음대로 믿지 아니하고 복음을 거슬려 복음의  영광을 가리면 복음이 말씀하신 대로 벌을 받고, 이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줄 알고,  제가 그 보응이 당장 안 오니까 꺼덕거리고 돌아다니다가 다리를 부질러 가지고  죽기도 하고 그런 것 얼마나, 우리 교회 벌써 제가 오고 난 다음에도 많습니다.

교회 잘 나왔는데 부모네들이 기어코, 처음에는 불량한 게 교회 나오니까 좋다고  이래 했지마는 교회 얼마 나오니까 그 부모의 행위를 자식이 본받지 아니하고  사람다운 길을 걸어갈려고 하니까 이것을 억지로 … 하나님은 모든 것을 관찰하시고 선포해 놓은 계약의 말씀대로 호리도 틀림없이  당신이 의와 죄에 대해서 처리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은  지 벌써 30년이 되면 다 환하게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에 먼저 살펴 가지고 조심있게 사람을 사귀라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데에는 사람과의 관계를 안 맺을 수가 없습니다. 상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과 손을 잡게 되고, 농사하는 사람도 그렇고,  공부하는 사람도 그렇고, 정치를 하는 사람도 그렇고 모두 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마련입니다.

그저 아무나따나 달콤하다고 그만 사람하고 관계를 맺고, 우선 달지 않다고  사람을 피하고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 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인인관계를 맺을 때에 신중히 살펴 가지고  인인관계를 맺어라. 이 사람과 무슨 관계를 맺든지, 사업적 관계를 맺든지  경제적 관계를 맺든지 활동적 관계를 맺든지, 또 친우적인 그런 관계를 맺든지  먼저 사람을 잘 살펴서 인인관계를 맺어라. 그리고 한 번 관계를 맺었으면  중간에 어떻게 변동이 있어도 너는 변하지를 말아라. 떠나기까지 그 관계를  그대로 가져라.

기독자들이 복음 생활 하는 데에 사람과의 주객의 관계를 맺을 때에 이렇게  맺으라고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일치기요. 당일 그만 당장 친구가  됩니다. 하룻동안에 친구가 되고, 또 하룻동안에 서로 원수가 됩니다.

세상이 지금은, 내가 아직까지 보지는 못했지마는 말을 들으면, 우리 나라에서는  그게 지금 아직까지 되는지 안 되는지 몰라도 저 어떤 나라에서는 결혼도 한 달  결혼이면 멀다 한답니다. 한 달 결혼이면 멀고, ‘일생동안 어찌 그렇게 살아?’  한 달 기한하고 결혼해 가지고 한달동안 살다가 또 괜찮으면 한 달 더 연기해  살고 그렇지 않으면 한 달 살고 그만 치우고, 보름 결혼, 요새는 일주일  결혼까지 있답니다. 그것이 바로 망하기 직전으로 망할 원인이라 그말입니다.

배부르고 등따신 그런 강대국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북은 죄가 무슨 죄인고 하니 하나님 없다는 죄 그 죄가 그들에게 죄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반대하는 죄 그게 죄요. 뭐 돈이 제일이라 하는,  황금만능이라는 것이야 어느 나라 사람 없이 다 그렇습니다. 그 나라에 제일  나쁜 죄악이 무신론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그게 저거가  저주받을 행동이요 망할 행동입니다. 다른 면은 좋은 점도 있습니다.

언제 내가 신문에 보니까 ‘학생들을 일을 시킨다. 그런 놈의 나라가 있다.’  이북 사람들 흉을 보는데 ‘학생들을 일을 시킨다.’ 그걸, 그 흉을 보는데  흉보는 그게 망할 놈입니다. 학생이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그래 해야 되지 이남  학생들 모양으로 학생이라 하면 학생으로 돌아다니면서 데모나 하고 방탕이나  하고 그래 지도하는 것이 바로 지도하는 것입니까? ‘아, 부인들이 나와서  노동일 한다.’ 그게 무슨 흉이오? 잘하는 것이지. ‘한숨 자고 나면 놀 여가  없이 거기에는 일을 지독스럽게 시킨다.’ 일을 많이 해야 건설이 되지. 그거는  다 흉이 아니오.

거기에는 민주주의 치하와 같이, 민주주의 정치와 같이 거기에는 이성의 문란한  일은 적습니다. 그러나 좀 배부른 소련 같은 나라는 공산주의 나라이지마는  형편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테레비니 뭐 여기에서 좋은 것도 나오지마는  괴상토 아니한 것들을 자꾸 해 놓으니까 그게 제일인 줄 알고,  내가 어떤 사람 말을 들으니까 아이를 테레비를 보지 못하게 해. 저거 아이를  ‘못 본다.’ ‘왜 못 보게 하느냐?’ 내가 물으니까 아 거기에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뭐 거석하면, 옳은 말 하면 제 비위에 맞지 않으면 팩 삐꿔 가지고  팩 돌아가고 삐쭉삐쭉 하고 그저 책임도 지지 않고 입을 내불내불하면서 지껄여  대고 한 시간에 몇 번이나 얼굴 인상을 달리 변해 가지고 하는 그 도무지 볼 수  없는 더러운 것을 배워 가지고, 아이가 배우기 때문에 한 번만 더 보면 테레비를  때려 부숴 버릴거라고 이렇게 하는 소리를 내가 들어 봤어. 그 사람 알속있는  사람이요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성경은 말하기를 사귀었으면 버리지 마라. 피차 버리지 마라. 친구도 한  번 사귀었으면 버리지 마라. 왜? 처음에 잘못 알고 사귀었습니다. 잘못 알고  사귀었으면 버릴 건가? 잘못 알고 사귀었으면 그 잘못된 것을 책임지고 제가  고쳐야겠고, 정 고칠 수가 없으면 나뉘어야 될 것이고, 이러니까 모든 일을  책임을 지고 해라.

네가 아무 마을에 가서 전도할 때는 한 번 주인을 정했으면 떠나기까지 주인을  이 주인 했다가 좀 비위 맞지 않는다고 저리 가고 저리 가고 그렇게 하지  말아라.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생활은 다 증거 생활인데 사람 사귐을 조심있게  하지 않으면 다 헛일입니다. 물이 그릇의 모양을 따라서 가는 거와 같이 사람은  제가 사귀는 그 사람 따라서 가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보면, 대번 보면 못된  것 압니다.

내가 언제 밑에 가니까, 주일학생인데 아주 이놈이 못된 놈인데 그 반사  선생님은 그거 하나라도 놓치면 안되겠다고 못된 버르쟁이를 고쳐 주지 못하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 내가 야단을 쳤습니다. 야단을 치고 이러니까 삐꿔서  달아나면서 교회를 욕을 하고 달아나. ‘이놈 다시 오지 마라.’ 야단쳐  놨더니만 그 뒤에 얼마 후에 보니까 그놈이 왔어, 다시. 택한 자는 택한  자이니까 와요. 왔는데, 오고 난 다음에 보니까 다시 그 행실을 하지 않아. 그래  내가 보고 ‘너 회개했니?’ 머리를 숙이면서, ‘이제는 네가 좋은 사람  돼야지.’  반사들도 고 밑에 나쁜 학생이라고 못 오도록 하라는 것은 아니고, 그 학생이  어떤 학생이며 질이 어떠하며 어떤 그 나쁜 독소가 들었으며 동무들을 어떻게  못쓰게 해독을 끼칠 학생이며 또 청년이며 남자며 여자며 하는 것을 바로 파악지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신앙 지도를 해 나갈 것입니까? 아무나따나 교회나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 죄악이 들어서 판을 치도록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매를 맞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사귈 때에는 신중히 살펴 가지고 한 번 사귀었으면 책임을  지고 변하지 아니하고 해야 되니, 제가 그 일을 책임을 못 져서 상대방의  세력으로 인해서 제가 망칠상바르면 피난을 가야 될 것이고, 안 가도 그 관계를  끊을상바르면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선포를 하고 딱 단절을  해야 할 것이고, 실력있으면 듣든지 말든지 제가 나를 마다하고 도망치기까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서 이렇게 사람의 그 인격을 길러 가야  되고 행위를 고쳐 가야 되고 축복을 받도록 건설해 나가야 되지, 우선 저거  재미있도록만 해 가지고 날뛰는 그런 자는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지 못하고 얼마  안 가서 ‘저런 자는 하나님이 진노해서 징계준다’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 사귐을 아주 조심해서 해야 됩니다. 아무나따나 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결혼은 아니지마는 결혼과 마찬가지요. 친구를 사귀는 것도, 결혼은  일생동안 같이 지낼 참 배우자인데, 서로 친구간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과  일생동안 관계를 많이 가지게 되는데 잘못된 친구 하나 친해 놓으면 자기의  행복이 모래 구멍 뚫어진 것처럼 그리 빠져 달아나서 일생동안 자기 해야 헛일  합니다. 자기 인덕을, 신덕을 쌓아 놓은 것도 그리 다 빠져 달아나 버리고  축복받은 것도 일해 놓은 것도 다 절단이 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루를 사귈 사람이라도 사람을 조심해서, 낯빤데기 보고 사귀지  말고, 대개 낯빤데기 좋은 것이 속에 좋은 것이 참 흰쌀에 뉘만침 드뭅니다.

그러나 낯빤데기가 정말로 좋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낯을 보고 판단하는 것을 가리켜서 상이라 하는데 상도 거의 맞습니다. 왜? 그  사람의 상이라 하는 것은 이제까지에 산 생활 그게 들어서 상을 만들었습니다.

상에는 뼈따구 생긴 상보다도 그 상의 외부에 나타난 그 피부의 상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피부는 그 사람의 생활에 따라서 바꾸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도 어떤 자는 그 지식이 돈 많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 뛰엄 잘 뛰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노래 잘 부르는 것 좋아하는 사람 이거 모두 각각 다 그  욕심과 취미가 다른 것처럼 상도 그렇습니다. 뻔들뻔들하면 그것만 좋은 걸로  치는 사람, 보고 ‘아, 그 남자 책임성이 있겠다. 그 여자 진실하겠다.’ 이런  면을 보고 선택하는 사람, 꼭 개가 핥은 죽사발 모양으로 낯빤데기가 뻔들뻔들한  그것만 위주해 가지고 결혼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뒤에 사십 오십 되면  비참해집니다.

제가 여기 오고 난 다음에 울면서 와 가지고 어려움 말하는, 이혼하느니  이혼당하느니 그런 사람들, 다는 안 그렇지마는 보면 모두 용모 보고 선택한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오면 그것부터 묻습니다. 남편하고 이리이리 해 가지고  이혼하게 됐다 하기 때문에 묻기를 ‘그 남편이 어떻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지?  얼굴은 제법 잘 생겼지?’ 이래 물으면 뭣 때문에 묻는지 모르니까 ‘예, 뭐  인물은 잘 생겼습니다.’ ‘네가 그거 보고 결혼했기 때문에 망하는 거 당연하지  않느냐? 인물 보고 선택했으니까 그 사람도 너 인물 볼 것 아닌가? 그러니까  처음에 인물 고왔지만 나중에 보기 싫으면 버림 당할 것 아닌가?’ 우리는 첫째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어떤가 그것 보고 평가해야 되고,  둘째로는 그 사람이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나 그거 둘째로 봐야 되고,  셋째로는 그 사람이 몸이나 신주나 그런 것이, 육이 건강한가 그것 보고, 그만  그 세 가지 봤으면 뭐 지식 그까짓 것은 국민학교도 졸업 안 한 것이 서울 대학  참 아주 일류로 졸업한 사람들을 밑에다가 수십 명을 데려다 놓고 종으로 잡아  부리는 사람도 쌔 버렸는데 학교 지식 그것은 그렇게 큰 것 아닙니다. 이  자연에서 배운 지식이 아주 큽니다. 이러니까 지식도 그것도 본다고 해도  몇닢푼치 안 되는 것,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본다고 해도 몇닢푼치 안되는 것,  직장도 몇닢푼치 안되는 것, 기술도 몇닢푼치 안되는 것.

하나님께 대해서, 사람에게 대해서, 그 사람 심신이 튼튼하냐 요 세 가지 보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뭐 용모도 봐야 되겠습니다. 얼굴도 밉상스럽게 생긴 것은  자꾸 그럴 터이니까 얼굴도 그 다음에 봐야 되지. 이런데 이 순위가 거꾸로 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 잘하는 사람이면 일등입니다. 거짓말 참말,  거짓말을 마구 허풍을 떨면서 주 대면 ‘아따 그 사람 잘났다. 그 사람 참  위대하고 부자인가보다. 훌륭한 사람인가보다.’ 이래 가지고 속는 인간들  많습니다.

그래 내가 말하기를 ‘중매할 때에 그 총각이 허욕이 많으냐? 허영이 많으냐?  허영과 허욕이 없느냐? 그 처녀는 허영과 허욕이 있느냐 없느냐? 허영과 허욕이  많거든 그 처녀와 총각이 아는 사람은 중매하지 말아라.’ 아는 사람은 사람이  어데 자기의 허영에 만족이 되고 허욕에 만족될 사람이야 그까짓 거한테 가는가?  안 가지. 이러니까 아예 아는 사람은 속일 수 없으니까 아는 사람은 소개해야 제  허영과 허욕의 백분지 일도 안 찰 터이니까 아예 안 되니까 그런 중매 하려고  하지 말아라.

허영과 허욕이 많은 인간은 중매를 하려거든 저 모르는 사람을 중매를 해라.

모르는 사람을 중매를 하면서 거짓말은 할 수 없고 그 사람의 단점은 다  내비두고 그 사람의 장점만 들어서 말해라. 그러면 장점과 단점을 계산을 하니까  장점이 단점에 합해 놓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게 돼 버리지만 장점만 말하면 안  좋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옛날은 중매할 때에는 ‘거짓말을 잘해야 중매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중신아비 온다’ 이러면, 그때는 참 곡식이 귀할 때인데, 이웃의 섬을 얻어  가지고 짚을 썰어 가지고, 여물을 썰어서 한 나락섬을 스무 나무씩 재 놓습니다.

이래 떡 재 놓고, 먼데다 재 놓고, 선보러 떡 가면 먼저 보기를 그때 보는데  ‘야 그 나락섬이 재 여 있더라. 가면 배는 안 곯겠더라.’ 그래 가지고 속에  짚여물 쌓아 가지고 채워 놓은 걸 그걸 몰랐습니다. 그래 가지고 중매를 하고, 또 이놈이 어떻게 허영과 허욕이 많았던지 중매를 하면서 ‘다른 것은 다  좋다.’ 장점만 말해 주니까 제 욕심에 됐거든. ‘그런데 좀 멀어서 그렇지 뭐  딴거는 없다.’ 먼거야 뭐 상관있겠냐고. 그래 나중에 결혼하고 보니까 눈이  멀었거든. 눈먼 봉사 해 준다고. ‘처음부터 내가 먼게 문제라고 하지 않더냐?’  이거 모양으로,  그러기에 그런 인간은 그리 알고, ‘삼대 적선을 해야 한 마을 혼사를 한다.’  적선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됐기 때문에 모든 일을 말만 가지고 안 하고 실천과  그 결과를 보고 이렇게 진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모든 걸 아는 데  혼사하지 모르는 그거야 말뿐이지, 말로는 어떻게 못해? 진실한 사람이라야  거짓말쟁이를 압니다. 진실한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에게 많이 데였으니까,  거짓말쟁이는 저도 거짓말쟁이니까 으레 그런 것이라 하고 하니까 그거 뭐  예사로 생각하지.

그래서 결혼을 시키면 모두 다 저 속이는 데 먼데 가서 결혼하고 아는 데서는  말을 하면 안되는 그런 사람들 그 합당한 열매를 일생동안 먹는 걸 나는 많이  봅니다. 그게 내나 친구 사귀는 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아무나따나 일시 바둑 두는 재미 있다고 바둑 두는 친구 정해 가지고  그 친구와 사업도 하고 모든 것 해 가지고 그래 망합니다. 바둑 두는 데는  친구가 될지라도 장사하는 데는 친구 못 될 사람이 있습니다. 춤추고 죄짓는  데는 친구가 되어도 옳은 일 할 때는 친구가 못될 자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어쩌든지 사람을 살펴서 ‘이 사람과 사귀면 끝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되니까 이 사람의 과거가 어떠며 현재가 어떠며, 과거와 현재가 어떠며, 사람을  10년을 두고 그 사람을 다룬다고 하면, 10년 역사를 거머쥐고 다룬다고 하면  대개 10분지 8, 9는 압니다. 8, 9는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동네 혼사한다 말은 벌써 10분지 8, 9를 정확히 아는 자에게 하지 속는 데 안  한다는 그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적선하는 사람이지.

‘아무데든지 들어가거든 사람을 잘 살펴 가지고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사람에게 네가 머물게 하고 떠날 때까지 그 주객을 바꾸지 말아라.’ 그러기에, 기독자는 책임성을 중하게 다룹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책임없이  그저 일시 어떤 것만 보고 당장에 친구 되고 당장에 원수 되고 당장에 좋고  당장에 나쁘고 그것은 몹쓸 사람입니다. 기독자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또 그 다음에 “네가 뉘게든지 사람 만나거든 축복해라” 축복하라 말은, 평안을  빌라 말은 축복을 빌라 말인데, 네가 누구든지 만나거든, 원수든지 친구든지  상관없는 사람이든지 그 사람을 만나 가지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네가 생각을  가질려거든 어떤 생각 가질래? 축복하는 생각 가져라. 만나거든 그 사람이  잘되기를 네가 원하는 마음을 가져라. 그 다음에는 네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후회없이 뒤에라도 부끄럽지 않게 이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해라.

유익을 끼치되 일시 눈가림으로 간교하게 그 사람의 마음이나 얻기 위해서, 그  사람을 내 사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외식적으로 간교한 더러운 마음을 가지지  말고 어떤 사람이든지 만나면 먼저 복을 빌어라. 복을 빌라 말은 그 사람이  복되기를 원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손해 보이지 않고 유익을  줄까? 유익을 주되 참유익을 줄까?’ 내가 무슨 유익을 줄 힘이 있습니까?  이러니까 ‘내가 이 사람에게 이 사귐을 인해서, 나 때문에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나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화를 용서받아야겠다.’ 이 마음을 네가 가져라.

가지면 이 마음이 그 사람 좋게 했는데 하나님은 네 마음을 보시고 그 사람 좋게  한 그 마음에 하나님이 너를 좋게 해서 그 사람하고 너하고 둘이 똑 같이 좋은  것을 나누도록 하나님이 하신다. 만일 그 사람이 그것을 받지 아니한다든지 너는  그렇기를 원했지마는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복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고  하면, 합당치 아니한 사람이 됐다고 하면 그 빈 것이 그것이 다 네게로  돌아오리라. 그러니까 합당치 않은 자에게, 저주받을 자에게 축복을 했으니까 그  축복에는 자기 모가치가 한 모가치입니까 두 모가치입니까? ○○○씨, 예? 한 모가치라? 그 옆에, 그 옆에는?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 두  모가치. 그 사람에게 내가 준 것 나한테로 돌아오지, 또 거기에서 하나님이 내게  한 모가치 준 것, 내 몫 한 몫 있지. 두 몫.

그러기 때문에 만나거든, 사람을 만나거든 들장 그 사람 복되기를 네가 원해라.

영육이 복되기를 원해라. 그 다음에 행동은 복되도록 빌어라. 그러면 그 복이  네게 한 몫 왔고, 그 사람이 합당치 아니한 사람이면 그 복이 도로 네게로  돌아오리라. 요 성경에 말하지 않았소? 합당하면 너희 빈 평강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강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이와 반대로 그러면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 만나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가  유익을 볼까? 내가 잘 될까? 내가 위에 올라갈까? 이 사람을 이용할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꺾어지고 절단나고 내가 올라설까?’ 둘이는 안 되니까 하나가  망해야 하나가 흥해지지. ‘사다리를 삼을까?’ 이렇게 마음 가짐을 가지고  언행심사를 하면 이것이, 곧 그 사람에게 행한 그것이 조물주가 그것을 옮겨서  자기에게로 옮겨 줘 버립니다. 자비한 자는 자비함을 받을 것이요, 축복하면  내게 축복할 것이니라.

이러기에, 사람을 접할 때에 요 비밀을 알고 접해야 합니다. 되나 안되나 사람만  만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제 유익될 것만 도모하는 그것은, 이것을 가리켜서  병신이라, 구걸하는 병신이라. 지난주에는 이런 사람은 구걸하는 병신이라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사람을 사귀어야 됩니다.

제 마음 짚어 남의 마음 안다고 이것은 제가 그런 사람이니까 ‘아, 그분이 나를  미워한다. 그분은 나 안되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그러니까 의인들도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하면 어쩔 것이오? 그리 하면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저주한 그 저주를  그리 보내고 내게는 축복을 해 주십니다. 이런 인간 이면에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됩니다. 껍데기만 보고 살 것이 아니라.

이러니까 그 사람이 참으로 나를 해치면 그걸 내가 복수하려고 하다 보면 재를  저지를 것이고, 그럴 때 할일 뭐이요? 그 사람은 나에게 저주하는데 나는 그  사람에게 축복합니다. 조물주가 볼 때 어떻겠소? 조물주를 보면서 사는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아주 다르고 행동이 아주 다르고 비판과 평가가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해하기를 원하는 그것이 속에 있으면 영생이 네  속에는 없다. 네 구원은 헛일이다. 그게 떠나기 전에 하나님의 축복은 절대 안  옵니다. 여러분들, 다른 사람 불행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떠나기 전에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할 수는 없고, 그에게 저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인관계 배후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죄와 의의 공평된 그 심판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살아야 됩니다. 이것도 우리 신앙 걸음의 지식입니다. 오늘  신앙 걸음의 지식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도 알고 살아야 됩니다.

또 “네가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그 성에서 나가서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소돔과 고모라성이 이들의 받을 심판보다 경하리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듣지 아니할 때에는 그 자리를 떠나라. 예수님도 복음을  전할 때에 듣지 않고 떠나기를 원하니까 주님이 그 성을 떠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기어코 쌔워 대 가면서 고집을 피우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을  떠나라 떠나는데 네가 조심할 것은 발에 먼지를 떨어 버리라’ 이것은 하나의  형식을 가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상대방이 나를 해하는 것이든지, 나를 해하는  것이든지,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든지 내가 보기에 나쁜 것이든지 네가 복음  전하러 갔으면 복음만 그들에게 주고 그런 것은 가지고 오지 말아라. 왜? 그것을  가지고 오면 공평된 하나님이 보실 때에 복음이 복음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분이 나에게 못할 일을 했으니까  마음에 괘씸해서 분개한 마음을 가지고 나오면 그게 될 건가? 안됩니다.

제가 이상한 말 한번 들었는데 함양군에 가면 서상이라는 데가 거기 있습니다.

그 골짜기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천씨인가 노씨인가 내가 오래 돼서 그만 성은  잊어버렸습니다. 거기 부자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옛날 양반들이 있어서  그 조그만한 마을에서 저 밭끝에 셋 고을, 세 고을에 전부 곡식을 싹 거둬  가지고 그리 싹 들어온다고 합니다. 옛날은 양반이라 해 가지고 권세를 팔아  가지고 아주 착취하는 일 많이 했습니다.

그 부자집인데, 복음을 전하러 가니까 전도하는 사람을 잡아다 놓고 ‘여봐라’  하니까 하인들이 와 가지고 ‘예’ 하니까 ‘이놈 잡아 엎어라’ 그래 잡아  엎으니까 ‘때리라’ 실컷 맞았습니다. 맞고 질질 끌려 나오면서 그분들이  말하기를 분해서 ‘하나님이여, 이집을 교회 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분개한  마음을 가지고 참 기도를 하고 나왔는데, 삼년이 되는데 그 집이 홀딱 다 망해  버렸고 그 집에 그 사랑채에 예배당을 해 가지고 교회를 세웠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들었는데, 제가 서상교회 집회를 갈 때에 그 마을에 잠깐 들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들렀는데, ‘이곳에 교회가 있습니까?’ 하니까 그때 그래 가지고 된  교회가 있긴 있는데, ‘교인이 몇 명이나 됩니까?’ 하니까 교회는 있는데 불과  한 3, 4인에 지내지 못하고 그 후에 내가 들으니까 그 교회가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상에 오행선 장로님이 세운 교회가 많았었는데 그 교회가 거의  문을 닫고 마쳤습니다. 그 끝이 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그렇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분들이 그렇게 핍박을 한 그집이 망하고  거기 예배당이 섰다 하는 그것을 그때는 내가 증거를 했는데 지금은 솜솜히  생각하니까 ‘그때 그분들이 전도를 잘못했다. 잘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분들이 매를 맞았으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매맞은 거와 같은 참 값있는 매를  맞기는 맞았는데, 그분들이 나올 때에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오니 이들의  죄를 정하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교회를 세우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그 가정이 망하지 않고, 여봐라 하는 그 가정이 더 예수믿는 복받는  가정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빌었더라면 그들이 간 보람이 있었고 승리를 할  것이고 주님 보실 때에 참 기쁨이 되었고, 주님은 떳떳이 그걸 붙들고 일할 수  있는 교회 씨가 되었겠는데 이거 교회의 복음 전도가 잘못되지 않았느냐?’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못됐다. 그 교회 된 것이 하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증거로  하나의 복수를 하신 것이지 복음은 아니다’ 하는 그것이 생각이 나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에게 복을 빌어서 복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사람에게 어떻게 복을 줄 수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 내가 이 사람을 만나서 말 한 마디 하는 것, 행동 하나 하는 것  이것 보고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도록 이렇게 이 사람에게 삼가  말해야 되겠다. 내 뺨을 때릴 때에는 내가 참아야 이 사람에게 복을 주지,  참으면서 기도해야 복을 주지. 내가 이 사람에게 하는 것은 계명대로 해야  하나님께서 내 성의를 보시고, 내가 그것 때문에 그거 바라고 하는 것이니까 내  행동에 갚아 줘야 될 터이니까 복을 줄 것 아닌가? 이러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복받게, 영육이 복되게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영육을 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영육의 복을  주시도록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 영육의 복을 주시도록 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를 성경대로 맺고 성경대로 푸는 이 길 외에 사랑하는  것이 없다 하는 것을 결론에서 말한 것입니다.

전도할 때는 반드시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하나님에게 그 전도한 것을 부탁을  하고, 하나님이 나 한 일에 감동받아서 계대해서 당신이 책임지고, 나는 죽어도  당신은 안 죽으시기 때문에 책임지고 그 일을 기어코라도 이루어 주실 수 있도록  이렇게 인인관계를 가져라 하는 것이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떤 전도부인이 심방하러 가 가지고, 심방하러 가니까 돈만 아는 부자가 전도  부인이 오니까 마구 얼룽달룽하게 찬란한 것을 내 놓습니다. 내 놓으니까 고만  이 전도부인이 눈이 그만 아주 바짝 그만 변해졌습니다. 이것도 보니까 욕심나고  저것도 보니까 욕심나고 욕심나서, 그만 거기서 어떻게 그것만 욕심나고 자기  신세가 가련하고 비참한지 ‘아, 내가 그만 젊을 때 그만 일찍 그만 시집이나  갔더라면 좀 나도 이렇게 한번 잘살아 볼 걸. 그만 전도부인 이런 것 하지 말고  어떻게 했더라면.’ 거기에 바짝 탐스러움이 나 가지고 이러는 걸 그 부자도  보니까 보인다 그말이오. 부럽기는 부럽다 말이오.

‘아, 그런데 권사님, 권찰님, 권찰님에게 이거 뭐 하나 사 드려야 될 터인데’  이러니까 ‘아이구 돈많은 것 내가 뭐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것, 뭐 그런 것 사  주시겠습니까?’ ‘아이구, 하나 사 드리지요.’ ‘아이, 뭐 그저 나는 없어도  됩니다. 그만 하지 마이소. 냅두이소.’ 이러고 또 돈뭉치를 한뭉치 떡 내  놓으면서 ‘요새 생활이 얼마나 곤란합니까?’ 떡 내 놓으니까 ‘아이구, 이거  뭐 이래 쌓습니까?’ 고만 그러니까 병신 놀음을 더 합니다. 배 고프다는 것도  말하고 그만 경제 곤란한 것도 말하고 이러는 것은 전도하러 갔다가 마귀를 홀빡  받아 가지고 오고, 멸망의 죄악을, 세상을 한뭉텅이 받아 가지고 배껏 채워  가지고 오니까 그 전도한 것이 헛일입니다. 그런 사람, 욕얻어 먹으니까 분해서 ‘아, 보자. 하나님께서 복수 안 하시는가? 하나님이  하시지. 하나님께서 복수하시지. 하나님에게 네가 벌을 받아야지. 분하다.’  벌받아라 소리 안 해도 속으로 ‘분하다. 섭섭하다. 제가 나를 그렇게  멸시하다니, 나도 돈 보고 살았으면 그렇게 살았을 터인데.’ 이렇게 좋은 것  나쁜 것 모든 것 다 뚤뚤 뭉쳐서 물을 들여 가지고 다 이렇게 감염되고 변질이  돼 가지고 오면 전도 헛일입니다. 한 번에 헛일이오.

전도하는 데에는 가 가지고 물들지 말라는 것, 전도하는 사람이 못난 사람에게는  만만히 전도하지마는 잘난 사람에게는 그만 거기에 눌려 가지고 전도를 못 하는  그 사람은 전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제가 가진  것보다도 낫다고 생각하니까 저자세가 되고 그 사람은 고자세가 되겠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라.

손양원목사님은 ‘너는 도야지다. 네가 도야지가 아니고 뭐이고? 오늘 네 영혼을  부르면 네가 어찌 될 것이고? 불쌍하고 가련하게, 내게 있는 능력은 보배지만  네게는 너를 속여 망치는 것뿐이다.’ 이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자기가 가지고  오면 안됩니다. 그이가 자기에게 나쁜 것을 했으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  복을 빌고, 복을 빌어 놓고 왔으면 됐습니다. 그 뒤에 ‘그 사람이 나를 묶어다  국개통에 넣었으니까 내가 그 사람을 기도해야지’ 하는 것도, 그 사람은 나를  묶어 넣었는데 나는 그 사람을 축복한다는 그것도 반동인데, 반동, 원동의  소산으로서 원동 거기에서 피동되어 온 반동이기 때문에 그 기도는 위험성  많습니다. 그 기도는 복수성이 되기 쉽습니다. 만용이기 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복빌고 오면 그만이라. 그것으로 끝나 버렸어.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이 말씀을 귀너머 듣는 행위는 소돔  고모라성이 멸망하는 거와 같은 그 멸망시킬 요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귀너머 듣게 합니다.

어떤 귀가 복있는 귀냐? 천금만금이 앞에 있어도 정함이 없는 물질이니 물질이  약값으로 변해질런지, 이 물질이 송사비로, 소송 비용으로 변해질런지, 이  물질이 사기 횡령을 당해 가지고 내가 속병이 일어날 속병으로 변해질런지,  요 집에 있던 사람 돈 3천만 원이, 그 사람 말 들으니까 여러 수십억인데 돈  3천만 원 그거 원청 원통하게 떼였다고 3천만 원 떼인 그것이, 3천만 원이  들어서 속병이 돼 가지고 그만 병이 됐는데 암만 해도 안 돼서 병원에 가 보니까  ‘이제 너는 수술을 해야 되지 수술을 안 하면 안된다. 벌써 간이 병이 들어  가지고 수술해야 되지 수술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니까 그때사 ‘내가 이제 수술하다가 죽으면 그만이가? 내가 어릴 때  주일학교 다녔고 주일하교 반사까지 했는데 내가 돈 이것 때문에 이러고, 돈  이놈 때문에 내가 그것도 못 했고, 내가 일생동안 아끼고 사랑하면서 모아  놨더니만 돈 이놈이 들어서 내 간병을 겨우 만들고 말았구나.’ 깨달았어.

깨달아 가지고 ‘네. 내가 집에 잠깐 다녀와 가지고 수술하겠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니까. 가족들에게 와 가지고 자기 일생 후회된 것을 말을 하고  ‘예수 잘, 예수믿읍시다. 지금부터 예수믿읍시다. 믿기로 작정하고  예수믿읍시다. 이제 나는 수술해도 죽을런지 살런지 모르니까 예수 믿읍시다’  하면서, 그 말을 하고 그날 밤 자고 그 이튿날 수술하러 갈려고 했는데, 그날  밤에 그만 딱 떠나 버렸어. 그날 밤에 죽었어.

그 집에 다니는 누님인지 누가 한 분 있는데 그 분은 신앙이 있어. 저 ○○교회  교인, 그 계통의 교인이요 그 남편은 그 계통의 장로인데, 이분이 여기 왔다가는  여기 새벽기도 나와 보고 어쩌고 하니까 ‘아무래도 인도하는 데는 이  서부교회로 인도해야 구원이 바로 이루어지지 안되겠다.’ 이래 가지고 자기  남편 장로는 장례식을 저게서 하려고 그리 인도하려고 하고 그 부인은 이리  인도하려고 하고 시비가 있었습니다. 시비가 있으면서 그가 와 가지고  ‘여기에서 주례하고 이쪽 식으로 장례를 하려고 했으니까 와서 출상예배를 봐  주십시오.’ 그래 가서 예배를 봤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집에 준 성구가 그  성구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그 말씀을 내가 그때 증거를  했어.

그 집이 잘 믿어서 여기서 서울로 갔는데, 서울로 가서 나는 사직동교회에  소개를 했더니마는 사직동교회 가 가지고 그만 ○○○목사님 따라가 버렸습니다.

갔는데, 그분이 그렇게 있는 동안에 돈 그놈에게 끌려 가지고 그만 일생을 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천천금은을 얻는 것보다 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귀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이단이라 이단이라 말을 해서, 어떤 말 들으니까 그분이 신앙생활  한 거는 분명한데 이단이라고 현재 교회들이 다 매장을 시켜 보냈는데, 그분의  책을 내가 읽어 보니까, 물론 옛날이니까 교리적으로는 틀린 교리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분이 신앙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이적과 기사가  그이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보고 한 마디 내가 외워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분의 책에 그게  기록돼 가지고 있습디다. ‘육의 사람은 돈을 만났을 때에 기뻐하고 성령의  사람은 한 진리를 깨달을 때에 수만금 돈을 얻은 것보다 기뻐한다.’ 고걸  기록해 냈어. 성신의 감동의 말이라. 그 참된 진실의 말이오. 그 책 한 권 볼 때  내가 그 한 마디를 기억했어. 다른 책은 열 권 봐도 한 마디도 쓸모 있는 말이  없어. 그런 책이 많아요.

이런고로, 네가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복음을 듣지 아니하는 그자는 소돔  고모라성이 유황불비에 멸망받는 것보다 더 심하리라.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봐도 속에 들어오지 아니하고 설교를 들어도 귀너머 들려지고, 이 말이  예사로 들려지는 그것이 자기의 영육을 망칠 자입니다. 그게 자기가 아니고  원수요.

보면 이 사람 친하면 이 말씀이 삼가 좀 들려지고 세상 말은 들을 때에 아니라는  것이 좀 비판이 되어지고 또 그 말은 그리 취미가 없고, 저 사람을 접하니까 이  하나님 말씀은 멀어지고 하나님은 멀어지고 세상의 마귀의 쓰지 못할 그 말과  그것은 가까와지고 이러면 네가 누구를 사귀어서 망하고 누구를 사귀어서  구원얻을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람을 삼가라.

제가 금정산 집회할 때, 그때는 범위가 좁으니까 내가 보기에 꼭 저거하고  저거하고는, 여자인데 조거하고 조거하고는 꼭 동질인데, 같은 건데, ‘저게  보자. 이번 집회 가서 어쩌는가 보자.’ 생전 모르는 사람이지요. 집회 가  가지고 어찌 서로, 다른 사람은 인사를 하지 않고 그 둘이 딱 인사를 해. 얼굴에  저거도 아는 모양이오. 자기와 같은 자는 아는 모양이라. 둘이 딱 인사를 하는데  사흘 만에 만나서 인사를 하더니마는 고만 둘도 없는 친구가 돼 가지고 요것은  저것 죽이고 조것은 요것 죽이고 둘이 서로 죽이는 행동을 계속 해 버리고 말아.

그래 둘 다 망했습니다.

여러분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이 두렵지 아니하고 이 말씀이  실상인 것을 느껴지지 아니하고 이 말씀이 그렇게 귀너머 들려지는 이것이  뭐이냐? 그것이 소돔 고모라성과 같이 멸망할 요소입니다. 멸망케 하는 요소요.

그 사람 만나니까 그만 세상하고 가까와지고 천국과 멀어지고, 저 사람 만나니까  천국은 가까와지고 세상은 멀어지고, 이 사람 만나니까 장래야 어찌 됐든지  그것도 다 없어져 버리고 현재만 좋도록 현재만 좋도록, 미래에 대해 생각지  못하는 그런 인간이 돼 버리고, 이 사람을 접촉을 하니까 자기의 장래에 대해서  자꾸 생각이 문득문득 나지는 것이 사람이 마구잡이로 할 수가 없고 사람이  어깨가 좀 축 처지는 것이 벌로 덤빌 수가 없고, 이렇게 사람이 좀 신중해지고  모든 일이 좀 장구히 자꾸 생각이 되어지고 해지면, 그러면 자기가 망하고 흥할  것을 알 수가 있지. 지상현실주의는 멸망입니다. 지상예비주의라야 복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땅 위에 모든 생활은 다 예비로 해, 준비로.

그런고로, “듣지 아니하면 소돔 고모라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6절에 “보라 내가 너희를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이 보낸다” 너거에게 입에  딱 들어맞고 기분에 들어맞는 좋은 환경을 너거에게 만들어 주지 아니하고, 아주  너거에게 참 아주 불행스럽고 불리하고, 이리의 환경을, 양떼의 환경을 이리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 환경이 얼마나 불행스럽겠습니까? 양에게 이리와 같은  그런 환경을 닥치는 것을 저절로 닥친다고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이러한 환경을 내가 너에게 만들어 준다. 네게 달콤한 환경을 만들어 주거든  마귀가 주는 줄 알아라. 네게 가시밭과 같은 이런 환경을 만들어 주거든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만들어 주는 줄 알아라.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만들어 주는가? 만들어 주는 것은 앞에 사랑하는 목자가  있지마는, 목자가 있지마는 아무 일 없으면 양 이놈들이 암만 가지 말라고  호각을 불어도 제 마음대로 뛰면서 제 가고 싶은 대로 달아납니다. 이렇지마는  저게서 벌써 이리 소리가, 이리는 개 울듯이 울어요. ‘아우~’ 이래 우는데,  이리 소리가 아이 울듯이 웁니다. 이리 소리가 나면 그만 이 양들이 도망을 쳐서  목자에게로 달려옵니다.

이와같이 네게 닥치는 것은 모든 불행의 환경이 닥치도록 내가 만드는데 불행의  환경이 닥치도록 만든 것은 그 불행의 환경으로 인하여서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주님과 가까이 관계를 맺게 되면 사막이 변하여서 생수가 터집니다.

자산에 푸른 초장입니다.

이렇게 이리와 같은 이런 험한 환경이, 네가 그 환경에서 나와만 가까와지면  나로 인해서 그 험한 환경이 초자연의 능력으로 평강의 환경으로 바꾸어진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이 현실을 당하게 해 주는데 이것을 모르면 원망 불평  낙망하고 만다 그거요.

그러기에, 자기의 환경이 가시밭같이 되어지는 그 환경은 성도에게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환경이 미끌 미끌 형통하게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반드시 미끄러져 가지고 끄트머리에 떨어지면 박살이 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문득 문득 그것을 보여 주고 경고해도 안 들으면 자기만 알  수 있는 증거로 징계를 주시다가, 징계를 주셔도 안 들어도 부득이, 아끼기  때문에, 많은 대중이 속해 있으니까 거기에서 조금 알 수 있는 것 보이다가  보이다가 안 되면 마지막에 ‘이 모양으로 예수믿으니 그 결과가 봐라’ 하는  것으로써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으로 제가 증거를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 거와 같은 이 사랑의 비밀을 알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지혜는 뱀과 같이 하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은,  배암은 마귀를 말하고 비둘기는 성령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마귀의 지혜와  성령의 은혜를 겸해서 가져라.

그러면 이 말씀은 다른 성경에서 찾아 보면 두 가지 지식을 가지는데, 네가  배암의 지식도 가지고 성령의 지식도 가지라. 세상 지혜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도 가지라. 어떻게 하려고? 세상 지혜를 가지는 것은 거기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세상 지혜를 가지는 것은 세상 지혜에게 끌리지 않기 위해서, 세상  지식을 가지는 것은 세상 지식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세상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세상 지식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세상 지식을 가지되, 성도들이 배암의 지식을, 성도들이 그 지식을  어떻게 자기의 모든 생사 화복을 좌우하는 자기의 생활의 선생으로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배암의 지혜를 어떻게 성도들이 자기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그  지혜로 그것을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지혜는 배암같이 하라 말은 배암의 지혜는 네가 그것을 다스려야 하고  네가 종으로 잡아 부릴지언정 네 지도로는 삼지 말아라. 네 선생으로는 삼지  말아라. 배암의 지혜라는 말은 마귀의 지혜 아니오? 네가 네 행복을 배암의  지혜에게 묻지 말아라. 네 망할 것을 배암의 지혜에게 묻지 말아라. 배암의  지혜는 네 망할 것은 물으면 잘될 것이라 그렇게 가르칠 것이고 잘될 것은  물으면 망한다 이렇게 가르친다 그말이오.

배암의 지혜에는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가져야 되고, 이것을 네가 이용하기  위해서 가져야 되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네가 이용하면 죽는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삼킬려고 하면 입도 째지고 배가 터져서 죽는다. 네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네가 사용치 못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네가 거기에 복종해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네가 거기에 복종하기 위해서 가지고, 배암의 지혜와  지식은 네가 종으로 잡아 그것을 자유 자재로 이용할지언정 그에게 통치는 받지  마라. 배암의 지혜 지식이 시키는 대로는 하지 마라.

배암의 지혜 지식 가운데는 과학의 지식도 있으니까, 언제 누가 여기에 편지를  써 놨는데, 그 편지를 장로님들에게 보이라 하기 때문에 내가 회람을 시킬 건데  아직까지 시키지 못했습니다. 언제든지 시킬 것입니다.

과학의 지식, 과학의 지식도 배암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면서 배암이  벌써 권리를 가졌어. 인간을 승리했기 때문에 배암이 권리를 가졌어. 그러면 이  과학은, 과학은 어떻게 해? 과학도 네가 배암의 지식이기 때문에 네가 사용만  하지 배암의 지식에게 네가 다스림은 받지 말아라. 배암의 지식이 있을 때는  반드시 배암 지식 위에 하나님의 지식이 그 위에 주격으로 있다. 하나님의  지식에 맞추어서 배암의 지식을 사용해야 되지 하나님의 지식을 맞추지 않고  배암 지식으로만 사용하면 그를 인해서 네가 망한다.

그러기 때문에 광도에 원자를 던지게 한 그 사람이 그 뒤에 삼 년을 근신하면서  회개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야 배암의 지식위에 하나님의 지식이 있는  것을 그가 생각지 못했겠지요.

17절에 “사람들을 삼가라” 사람들을 조심해라. 사람은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사람이니 네가 사람을 믿고 무슨 일을 하지 말아라. 요새는 믿고 사는 세계가  되어야 된다고 이러면서, 언제 보니까 그거 어쩐 말인지. ‘그걸 믿어야 될 것  아니냐?’ 믿었다가 그만 돈을 홀빡 떼였습니다. 그런데 또 신문에 내기는  ‘믿고 사는 사회가 되어야 된다.’ 이러니까, 믿었다가 돈 떼였지마는 그 말은  서로 믿고 돈 안 떼어 먹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라 그말이겠지요.

성경은 사람은 믿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믿고, 그러면 사람은 믿지  말고 하나님은 믿고 진리는 믿어. 거짓말쟁이 입에서 나와도 진리면 믿어.

거짓말쟁이라도 옳은 일에는 동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을, 인간을  하나님의 종들로 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옳고 바른 것을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옳은 주장 옳은 행동에 협동하고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협동하고 동참하는 것이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제까지는 내가 신용할 수 있는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삐뚤어진 일을 해도 ‘이 사람이 이제까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 일만은 삐뚤어졌지마는 옳지 않겠나’ 하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사람에게 인도받는 것이지 진리와 하나님에게 인도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니까 이제까지 인도 받았다가도 아니면 그 자리에서 돌아섭니다.

그러기에 ‘모든 권세에 복종해라.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권세에게 복종해라. 이 세상 모든 정권 잡은 자들에게 복종을 해라.

복종하지 않으면 네가 심판을 받으리라.’  그러면 정권잡은 자의 행위가 정확무오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오. 하나님이 원리  원칙으로는 세상 모든 것도 당신이 주권해 가지고 통치하기 때문에 통치자가  하나님의 법칙에 합당한 것을 명령하면 하나님이 네게 명령하신 것인 줄 알고  거기 복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거역하면 심판받는다. 그러나 이제까지 바로 하던 그 권세가 하나님의 진리에  삐뚤어진 것을 말할 때는 당장 거부해라. 이것이 정권자에게 복종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복종이요, 삐뚤어진 걸 하든지 말든지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자에게 복종하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사귈 때에는, 사람을 사귈 때에는 조심을 해라. 네가 그  사람에게 행한 것이 반드시는 모르지만 네가 그 사람에게 한 것이 그 사람이  너의 정반대 입장에 서서 너를 두 가지 종류의 법정에 고소할까 두려워 해라.

총독을 말하는 것은 세상 법정을 말하는 것이고, 공회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법정과 사람 법정에 네 하는 것을 지금은 철통같이  하나이지마는 나중에는 정반대로 원수가 돼 가지고 고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고 삼가라. 사람들을 삼가라. 사람들을 주의해라. 네가 공회에 끌려갈 것이요  총독에게 끌려가리라. 이러니까 끌려가지 않을지라도 끌려갈 줄 알고 인간  사귐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 법에 고소할 사람이, 송사할 사람이 너를 지금  송사거리를 마련하려고, 티잡을 것을 마련하려고 너를 지금 사귀고 있는 것처럼  네가 생각하고 삼가 사귀라.

이렇게 네가 삼가 사귀면 후회할 것이 없을 것이요, 뒤에 공회에 끌려가고  법관에 끌려가도 후회할 것이 없도록 네가 오늘에 조심있게 사귀고,  또 네가 그런 데에, 공회나 총독에게나 끌려가 가지고 끌려가서, 고소를 당해  끌려갔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네가 그때도, 처음에 사람을 사귈  때에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을 하고 깨어서 인인관계를 하고, 인인교제를  하고, 만일 그런 일을 당했으면 그때는 네가 ‘아, 그렇게 삼가했으니까 후회  없다’ 하는 사람이 됐든지, ‘벌로 했더니마는 이렇게 참 이럴 줄은 몰랐다.’  하는 사람이 됐든지,  어떻게 됐든지 만일 그 앞에 섰거든 네가 거기에서도 증인 노릇 해라.

거기에서도 네가 요렇게 조렇게 꾀를 써 가지고 ‘요래야 내게 유익하겠느냐  조래야 유익되겠냐?’ 네가 요렇게 조렇게 꾀를 써 가지고 네가 하면 또 네  꾀대로 해 가지고, 과거에 하던 네 꾀대로 인간 사귀어 가지고, 내가 시킨 대로  안 하고 네 꾀대로 인간 사귀어서 네가 오늘에 이 낭패를 당했고, 낭패당한  여기에서도 네 꾀대로 또 처리하면 또 네가 또 낭패되고 또 망한다.

이러니까 네가 과거에야 어떻게 잘못됐든지 잘못된 과거는 어떻게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없지마는 네가 섰으면 이 자리도 하나님의 도를 증거할 자리니까  이것을 네가 잊지 말고, 네 생각대로 말하지 말고 네 속에서 말하게 하는 성신의  감화대로 해라. 죄를 지어 사형을 받아도 사형 자리 이 자리에서라도 네가  영감대로 해라! 그러면 초자연의 하나님의 도움도 입을 수 있고, 그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참 복음의 증거도 될 수 있다.

이런고로 평안무사시 사람을 사귈 때도 네가 이렇게 장래를 생각하면서  사귀어라. 네가 어떤 불행에 다 송사를 만나 가지고, 죄짓다가 잡혀 가지고 와  가지고 송사를 만난 그 자리라도 네가 지나간 송사거리를 벗어날려고 하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만유의 하나님이 계시니까 거기에서, 내가 이제까지는  그리스도를 가리는 행동을 했지마는 이 자리서라도 주님은 누구시라는 것을 내가  여기서 밝히 나타내서 복음을 증거하겠다는 이 네 사명심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말하지 말고 네 속에서 말하게 하는 성령의 감화대로 네 양심대로 증거해라.

그러면 거기에서 전파되는 것은 복음이 전파될 것이고, 하나님이 너를 다시 도울  수 있는, 도움을 입을 수 있는 그 길을 네가 마련하는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세상살이를 첩첩이 단속시켜서 참 지혜롭게 슬기롭게  후회할 것이 없는 반석 같은 걸음을 걷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덤비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덤비는 사람은 신앙생활 못하요. 덜렁 덜렁한 사람은  신앙생활 못하요. 차근차근 심각히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신앙 선배 주기철목사님은 신앙의 훌륭한 분인데, 그이에 대해서 내가 한갖  들은 말이 있는데 그는 가장 성경 가운데서도 베드로전후서를 애독했는데, 혼자  성경을 보다가 울고, 눈물을 출출 흘리면서 말없이 울고, 또 성경을 보다가  아무도 안 보는데 자기 부인이 떡 보면 좋아서 기뻐서 못 견뎌서 감사하면서  기뻐 못 견뎌 하고 이렇게 성경으로 울고 성경으로 웃고 성경으로 두 주먹을  쥐고 고함을 지르면서 결심을 하고, 성경으로 머리를 숙여서 죄인이라고  꺼꾸러지고,  이렇게 성경과 사귄 그 이면에 성경 안에 있는 성령과 사귀었고 주님과 사귀었기  때문에 그가 한국 교회가 왜정 말년에 평양노회에서 뻘뻘 떨고, 뭐 군대와  순경이, 지금은 군대를 우리가 많이 봤지만 그때는 칼찬 것만 봐도 겁이  났었습니다. 이제 군대와 경관들이 꽉 둘러섰는데 신사참배 결의를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은 다 거기다가 동의하고 결의하고 손을 들을 때에 주기철 목사님 한  분만이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고함을 지르고 그때 그것으로서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런 용기가 천추만대에 내려가. 그런 용기가 다 일찍부터 인간  사귐에 조심해서 살아 그렇지 조심 안 하면 안됩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살았어. 다니엘이 ‘그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죄가  되도록 그렇게 만들어 놔야 그거 정죄할 것이 있지 그 사람에게 무엇으로 흠과  점을 암만 찾을려 해도 찾지 못한다. 자기의 직책이나 모든 것을 봐야 아무리  티를 잡을래야 티를 잡을 수가 없다.’ 지금은 한덩어리가 돼서 입의 밥을 서로 내 먹을 만치 이렇게 뭐 ‘총장님  총장님’ 그때 총리인가? ‘총리님 총리님’ 이래 쌓아도 언제 송사자가 될런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조심해서 살았기 때문에 다니엘을 송사할 빙거를 잡지  못했어. 잡지 못했으니까 사자구덩이에 넣을 그런 계획이 꾸며졌어. 그 계획이  꾸며졌기 때문에 사자구덩이에 들어갔고 사자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에  유명해졌고 그 나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케 했지.

이러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에게 대해서 뺨을 때려도 축복, 욕을 해도 축복,  그를 매장시킬려 해도 축복 전체가 합동해서 그 사람을 위하는 것 외에는  역사에서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길이 우리에게 있소. 나만  신앙생활 하면 그 사람이 나를 해하려고 철통같이 꾸며 놓은 것이 철통같이 나를  유익하게 되는 일이 결과적으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인데 어쩌란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평안무사시에 사귈 때에도 장래를 생각하면서 사귀라.

장래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사귈꼬? 반드시 그 사람이 너를 하나님 앞이나 또 이  세상 법정에나 송사하리라 생각을 하고 송사해도 송사할 거리가 없도록  다니엘처럼 살아라.

또 네가 억울하게나 합당하게나 억울하게 당했든지 만일 법정에 끌려서 정죄를  받아 가지고 됐으면, 그 자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 자리에서는 네가 거기에서  헤고 나올려고 생각하는 또 그 일 하지 말아라. 네가 전번에 조심하지 않고  했으면 송사거리 될 것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현실에서 어쩌면 현실의  불행을 헤고 날까 하는 그런 생각에서 하지 말고 네가 다시 천직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의 증거를 한 너이기 때문에 이 천직으로 다시 돌아가서 천직을 네가  잡아라. 천직을 잡고 난 다음에는 네 쪼브라운 두뇌 가지고 요래야 수지가  맞을까 조래야 효력이 날까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네 속에 전지 전능하신 분이  계셔서 너에게 말하게 할테니 너 양심을 통해서 꼭 요게 옳겠다 바르겠다고  생각하는 고대로만 말해라. 이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너에게 일할 수 있고 그것이  변하여서 너를 구원이 될 수도 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켜 가지고 그 옥사장이 바울을 구원하고 그날 밤에 교회가 섰습니다.

○○○목사님이 오다가 인민군에게 붙들려 가지고 이랬는데, 거기에서  ○○○목사님이 ‘이제는 인민군에게 붙들렸으니까 내가 죽기는 죽는 것이고  어쩌든지 여기서 복음이나 전하고 기도나 하고, 전하고 기도하고 가자.’  그러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들에게 나는 예수믿는 ○○○목사인데 예수믿으라고  이렇게 탁 펴 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머물 머물해 가지고 숨겼으면 그만 되겠다 싶어서 ‘이때 내가 목사라  소리 안 하고 어떻게 숨겼으면’ 이런 마귀의 유혹이 많았지마는 ‘나는  예수믿는 목사라. 당신도 예수믿으십시오.’ 이래 떡 전하니까 저게 있던 사람이  있다가, 그 말이 퍼져 나가. ‘그놈이 예수믿는 목사란다. 그 놈이  ○○○목사란다.’ 이러니까 거기에 대장이 하나 있다가 말하기를 ‘그놈  ○○○목사라? 잘 잡았다. 그놈을 잘 잡았다. 어쩌든지 그놈은, 그놈 하나  잡았으면 뭐 백명 천명 잡은 것보다 낫다. 잘됐다. 이놈을, 어쩌든지 내가  처단하겠다. 네가 이놈 ○○○목사라?’ 하면서 큰 소리 한번 꽥 지르더라고.

‘볼끈 묶어라. 이놈은 내가 총살한다. 이놈은 내가 총살한다. 이놈아 가자.

끌고 저리 깊숙히 사람없는 데로 무인지경으로 가 가지고,’ 이러니까, 하도  분개해 있으니까 그 부하들이, ‘물러가 있어.’ 이러니까 ‘아마 저분이 무슨  과거에 무슨 아마 복수가 있고, 저분은 원청 무신론주의에 강한 자이니까, 저  ○○○목사는 유신론주의니까 저 아마 원수가 됐는가 보다.’  저 깊숙히 가더니마는 다 끌러 놓으면서 회개를 하면서 ‘나도 예수믿는 자인데  이꼴이 됐습니다. 목사님 부디 요리 요리 가면 아무 걸리지 않을 터이니까 요리  요리 가서 부디 남한에 가 가지고 잘 전하십시오.’ 그래서 그분이 이제 살아  나와 가지고 복음을 지금도 전하는데 어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뭐 동래에 어디 있다 말을 들었는데 뒤에 못 들었습니다. 그 뒤에는 소문이  별로 안 나.

그대로 하면 삽니다. 여순반란 사건 때에 그때에, 고 환란 당했을 때에 환란을  피하려고 제 꾀대로 말한 사람들은 다 죽었소. 여수 교회의 청년들 다 죽었어.

고 청년 박선생이라고 하나 있는 그 사람은 그때에 제 생각대로 하지 않고 이제  ‘예수믿느냐?’ 예수믿는 사람 그때 손양원 목사님 두 아들 죽이고 할 때인데,  마구 놔 죽이는 판인데 부인을 못 하겠더래요. ‘나는 예수믿습니다.’ 이러니까  ‘요놈, 예수믿는다고 담대히 말하네. 요놈 감방에 가둬 놔라. 우리 해방시켜  놓고 요놈은 찢어서 잔치하자.’ 딱 넣어 갔는데,  그만 그 청년 그때 뭐 일곱이라든가 여덟이라든가 내가 숫자는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가다가 예수를 팔았지마는 그것이 자기 본의가 아니니까 또 만나면 또  예수 부인해야 되겠고 이런데 마침 하수구가 이만한 게 있으니까 ‘우리 저리  들어가자. 저리 들어가 가지고 피해 가지고 밤으로 어떻게 하자.’ 이래 가지고  그리 들어갈려고 이래 들어가니까 저 밑에 인민군들이 오며 보니까 그리  피난갈려고 하는 것 보니까 정상은 아니라 그말이오. 그만 따발총으로 다르르르  놔서 다 죽어 버렸어.

이 박선생 이 사람은 감방에 갇혀 가지고 이제는 죽기는 죽는 것이니까 막  기도를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모르는데 그 이튿날이라.

무엇이 벼락처럼 쾅 하는데 깜짝 놀라게 문을 확 열면서 ‘이놈 어떤 놈이고?’  ‘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제까지 기도했으니까. ‘아, 수고했습니다.

우리는 국군입니다. 참 어떻게 살았소, 그래?’ ‘예수 믿는다고 잡아 가둬서  이래 있습니다.’ ‘참 수고했습니다. 잘 믿었습니다. 예수 덕 봤습니다.

가이소.’ 그래 살아 나와서 그 사람이 오랫동안 저를 따라 다녔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도 늘 여기에 와 가지고 다니면서 ○○신학교에서 여기  온다고 주목을 당하고 당하면서도 오랫동안 여기에 왔다가 목사되고 난 다음에도  왔는데 그 뒤는 어떻게 됐는지 아무 소식을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을 사귈 때에 평안할 때에 뒤에 다 너를 송사할 자인 줄 알고 살아라.

하나님과 법정에 송사할 자인 줄 알고 네가 삼가 사람을 사귀라.

네가 어떤 어려운 지경에 닥쳤을 때에 어려운 지경 거기에서 벗어날려고 하지  말고 거기서 천직을 다시 찾아라. 거기에서 네 맘대로 하지 말고 네 속에  영감대로 해라. 그래야 네가 천지가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이리하여 이곳에서 쫓겨나거든 저곳으로 가고 저곳에서 쫓겨나거든 이곳으로  가고 온 이스라엘을 다 다니기 전에 내가 올 것이다. 너는 이리 쫓겨가면  거기에서 증거하고 저리 쫓겨나면 저게서 증거하고, 가난한 자, 가난하게 됐을  때는, 가난한 사람으로는 복음 안 전하거든. 가난하게 돼 가지고 ‘저렇게  가난해도 예수 잘 믿는구나.’ 병들면 ‘병들어도 예수 잘 믿는구나.’ 이래  가지고 어떤 처지로 하나님이 인도해도, ‘네가 잘 믿지마는 건강할 때 잘 믿지  병들면 잘 안 믿지.’ ‘병들 때도 나는 믿을랍니다.’ ‘보자. 네게 암병 줘  보자.’ 우리 ○○○집사님 세상 떠났는데 암병을 줬어. ‘암병 줘 보자.’ 평안에,  건강할 때 예수 잘믿으니까 ‘암병이 들리면 낙망있을 것이라.’ 암병이 들어도  한 번도 낙망이 없었답니다. 암병이 들려도 한 번도 원망 불평이 없었답니다.

암병 들어도 그 감사가 변함이 없었답니다. 암병이 들려도 웃음과 기쁨이 없지를  아니하고 끊어지지를 않았답니다. 이게 증거라.

이러니까 조금 다리만 아파도, 머리만 띵해도 주일을 범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  앞에 이런 성도들이 떡 나서면, ‘이렇게 지독스레 아픈 병에도 주를 신앙함이  변하지 않았는데 너는 뭐 어째서 그랬지? 주일을 어째서 범했지? 뭐 때문에 너는  낙심했지? 장사가 잘 안된다고 낙심해? 병이 났다고 낙심해? 돈 떼였다고  낙심해?’ 우리는 어떤 처지를 주든지 천직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형편  처지에서라도 제 생각은 전부 자기 죽이는 생각이오. 자기 신앙양심 속에  우러나오는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생명입니다. 그분 한 분 외에  아무 권리가 없소.

그런고로, 마지막 하나 좀 어려운 것 이것만 말하고 그만두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24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이 세상에서 복음의 걸음을 걸어갈 때에 세상이 예수님에게 대우하는  대우와 같은 대우를 하는 것이 예수님과 같은 그 대우를 받는 것이요, 껍데기로  보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이요, 속으로 보면 예수님의 대우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요, 영원을 바라보면 예수님과 같은 이 성공을 하는 것이요, 깊숙히 보면  자기가 예수님과 같은 요소로 변해진 요소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세상이 보고  증거하는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손양원 목사님을 감방에다 넣어 놓고 사형시키러 갈 때에 증거한다고, 입으로  증거한다고 ‘입을 닥치지 못해?’ 하면서 총부리로 입을 때려서 모두 이가  부러지고 피가 나오고 한 그것이 손양원 목사님을 홀대했소 손양원 목사님을  영원히 존대했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예? 인간 보기에는 홀대이지마는  그것이 무궁세계의 영원한 존대가 됩니다.

총부리로 때리고 사형장에 가면서도 형제를 사랑해서 ‘여러분들, 지금이라도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만 믿으면 지금이라도 사형을 받아도 구원얻습니다.’  총부리로 때려도 변하지 않고 했으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을 몰랐지? 그  사랑의 큼이 무궁세계에 나타나지. 그가 인간을 사랑함이 나타나지. 그가 복음에  진실하고 충성됨이 나타나지.

이러기 때문에 껍데기만 보고 살지 말고 알맹이를 보고 깊숙히 보고 영원히  보고, 모든 일에 무식한 자 되지 말고 모든 일에 아는 자 되어 믿음 있는 자  되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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