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하나님

 

1979. 11. 4. 주일 오전

 

본문: 히브리서 11장 5절 - 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도록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5절과 6절에서 가르치시는 큰 뜻은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했다 하는  말씀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워졌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했다.

이것이 오늘 이 두 절수를 우리에게 주신 중요점입니다.

 죽음을 보지 아니했다는 이 말씀 속에는 그는 어떤 이치로도 삐뚤어 졌다고  정죄를 받지 아니 했다. 그는 모든 이치 모든 비판 모든 논란 모든 존재들에게  정죄 받지 아니했다. 이것 삐뚤어졌다, 이 면으로 볼 때에 틀렸다, 어떤 존재도  틀렸다고 그렇게 정죄하는 일이 없었다 말이오.

 하나님도 그를 정죄하시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잘못된 걸  지적하지를 못하고 해서 아무것에게도 심판을 받되 정죄를 받지 아니했다 그  말입니다. 정죄 받지 아니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를 해하려고 해도 해할 수  없었다.

 또 하나님도 그를 해하지 아니하셨다. 어떤 것에게라도 이것 틀렸다 하면 반드시  거기에는 심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것 틀렸다 하면 틀렸으면 살펴보자 조사해  보자 심사해 보자 하는 심판이 있게 마련이고 심판해서 과연 틀렸으면 그는 틀린  값을 내야 합니다.

 그러기에 틀린 것은 용납지를 안 합니다. 틀린 것은 사망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틀린 것은 사망합니다. 자기가 자기네끼리 자기 집에서 소곤소곤 할 때에는  의논이 맞았지만 그밖에 사회가 있어서 사회가 그것은 가정보다 크기 때문에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심사 판단할 때에 틀렸으면 그는 못 섭니다. 세울려고 하면은  그 사회에서 그 가정은 박살이 돼야 될 것이오. 또 조그마한 지역적인 사회에서  옳다 인정했을지라도 그보다 더 큰 국가에서 그것을 심사해서 정죄를 받을  때에는 그 세력보다 국가 세력이 크기 때문에 또 거기에서 수정을 받든지 그리  안하면 제거를 당하든지 해야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라도 저거 나라끼리 옳다고  이렇게 해도 세계의 각국의 그 유엔이라는 모든 나라들에게 심사를 받을 때에  삐뚤어 졌으면 반드시 그것은 제거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안되면 그 세력을  대결할 수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아주 세계에 제일 잔인 무도한  정치가라 해도 그 자가 서서히 그 유엔이라는 그 세력에게 삐뚤어 졌으면 차차  도태를 당하게 됩니다. 모든 면으로 상종하지 아니하고 또 모든 면으로 서서히  사격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이 대립되어 가지고서 망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  전 인류가 옳다 인정을 한다 할지라도 인류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심사에 걸리면 또 그 분과 대결이 되니 그 분으로 인해서 전 인류의  응원으로 그 분의 저주나 사망의 해를 방비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은 서로 서로 관련성을 가졌고 또 크고 작은 자가 있어서  질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안 했다 하는 말은 어떤  것에게도 정죄 받지 안 했다 하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이랬습니다. 사망이 무엇으로  인간을 죽이느냐? 망하게 하느냐? 죽이고 망하게 하는 그것은 죄가 하는데  그러면 죄가 어떤 세력을 가지고서 망하고 죽게 하느냐?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랬습니다. 이제 율법이라 말은 참된 이치라 말이오. 또 곧 하나님의 의사라는  말입니다. 참된 이치에 삐뚤어져 가지고서 망하는 것도 죽는 것도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안 했다 이 말은 에녹은 어떤 것도 삐뚤어 졌다고  정죄 하지를 못했다. 심사 심판이야 모든 것이 자유로 하지마는 그 결과로 이는  삐뚤어졌다 이렇게 정죄를 하지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저주하지  못했고 창조주도 저주하지 아니하셨고,  그러면 정죄 받지 아니했고 저주받지 아니했고 또 그는 망하는 해나 죽는 해나  그런 해를 보지 안 했다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그만 마치 뜻 없이 흉내내는  앵무새 모양으로 아무 감각 없이 소리만 전달하는 녹음기 모양으로 인격성의  아무 작용이 없이 그저 녹음된 대로 나타내는 것처럼 들은대로 말하고 들은대로  갖다가 기억하고 이런 인격성의 작용이 없는 이런 하나의 참 물체 하나의 기구  이런 거와 같은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모든 것에게 정죄를 받지 안 했다 하는 이 말씀은 심히 크고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모든 존재 가운데에 참 털끝 만한 것인데 모택동이 죽고 난  뒤에도 그 뒤에 이런 심사 저런 논평들이 많이 나와서 이렇다 저렇다 얼마든지  거머쥐고 논평합니다.

 거기에 과연 정죄를 받으면 그는 이미 죽었을지라도 그의 해 놓은 일은 다  박살이 되고 맙니다. 새 시대가 바꾸어지니까 감히 그를 얼마든지 논평할 수 있는  자유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는 모든 존재 개미 한 마리도 언론 자유 심판  자유 논평 자유 있어서 이는 틀렸다 못했다 이는 지나갔다 미달이다 하는 것을  다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고 또 이것이 절대적인 효력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으로만 판정이 되어지는 그것이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면서 베풀어  놓은 만물심판인 것입니다. 만물 심판. 이 심판을 앞두고 만물들이 인간으로  말미암아 탄식되는 이 불만 불평을 말하고 있는 것을 성령이 로마서 8장에  기록해 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존재들에게 심사를 받는다. 우리 일동 일정의 생애가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영원 불멸의 존재라 인간은 영원 불멸의  존재인데 그저 살다가 죽으면 그만 자살하면 그만 그만이 아니라 그이의 행위와  그 행위로 인하여 이루어진 그 자기라는 그 인품은 영원을 두고 세상살이로써  심판을 해서 그 응보는 영원으로 이루어지는 그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이들 말로 참 떫더라 요만한 게엄 한 개 그까짓 거야 못 먹겠나  하는 것처럼 이 세상 잠깐 지나가는 한 토막 생활이야 고생이면 어떠며 평안이면  어떠며 부요면 어떠며 가난이면 어떻겠느냐? 하룻밤과 같이 퍼뜩 지나가고 마는  것인데. 그러나 영원무궁이 인생에게는 기다리고 있다. 그 좌우가 한 토막 세상  자기의 살이 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행심사의 그 생애가 만물 심판과 창조주의 심판을 받을 줄  알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말에나 행실이나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로 알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해라. 야고보서 1장 12절이하에 있습니다.

 그래, 이렇게 우리는 정죄 받지 안 했다 하는 이 말을 쉽게 들어서 지내보내  치워 버릴 게 아니고 우리는 모든 존재에게 우리의 언행심사가 다 영원의 보상과  보응을 두고 심사에 나아간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이것을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언행심사가 만물 심판을 향하여 가고 있고 그보다도  조물주의 심판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이 사실을 포함해서 우리의 생각을 가지기도  하고 소원도 가지기도 하고 행동을 가지기도 해야 합니다.

 이 커다란 문제를 다 제거시켜 버리고 참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의 욕심 하나만  표준 해 가지고 요 욕심에 이러냐 저러냐 맞으냐 안 맞으냐 손해가 가느냐  유익이 되느냐 더뎌지느냐 이게 성취화가 되느냐 이것이 성취가 못되느냐  요렇게만 그 편벽된 지극히 소 부분만을 표준해서 모든 것을 경영하고 산다는  것은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이는 참 사람이지만 성경에 말한 대로 육체가 되었다,  완전히 짐승이 되었다 말씀한 그대로의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기에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는 그저 이 시간 잘했든지 못했든지 해서  지나감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낱낱이 만물 앞에 심판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에녹은 이 심판에 걸리지 안 했다. 만물  심판에 정죄 받지 안 했고 하나님 심판에 정죄 받지 안 했고 이러니까 만물이  그를 해하지 못했다. 만물에 저주를 받지 안 했다. 하나님의 저주도 받지 안 했다.

 이러니까 그는 망하는 것과 죽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는 말입니다. 망하는 것과  죽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죽음을 보지 않고 얼마나  큽니까? 이 법이 와 가지고 심사할 때에 이 죽음을 보지 않는 그보다 실력 있는  것이 어디 있으며 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들 역사에 크다 힘있다 하는  것을 열거해서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이마 저마의 정죄가 정죄를 받을 것이 아니고  이마 저마의 저주거리가 아니고 또 그뿐만 아니라 전체가 망할 것과 죽을 것  그것 만입니다.

 무지자의 행동을 무지자들이기 때문에 인정을 했지 무지자의 행동을 영원히  무지자들이 심사한다면 문제가 적겠으나 무지자의 그의 지능은 하나인데  무지자의 그의 실력이 없으니 실력 없는 그것이 스스로 도태되고 당해도 자멸  당해도 당하고 마는 것이니 뭐 있겠소?  이러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너무도 허무한 것입니다. 땅의 것이 너무 허무하요.

너무 소경의 참 생활이요. 비참하기가 짝이 없고 이러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부가 유익되게 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이나 취하는 것이나 빼앗은  것이나 뺏긴 것이나 모두가 나 속이고 속는 것. 이 두 가지 안에 다 포함됐지 이  이상은 넘지 못했다. 성경이 말했습니다.

 죽지 않고 옮기웠으니, 어디로? 심사와 정죄와 저주와 사망을 아직까지 자기  문제로 두고 있는 그 세계에서 이런 것들은 완전히 통과하고 초월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없는 세계로 옮기워졌다 하는 말입니다. 에녹이 옮기워진 세계는  죽음이 없는 세계입니다. 쇠약이 없고 병드는 것이 없고 아픈 것이고 곤하는 것이  없고 삐뚤어진 것이 없는 의의 나라며 진리의 나라며 사랑의 나라며 영원 완전  불변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 에녹은 이렇게 창조 2천여년 그  사이에 에녹처럼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에녹 같이 실패 없는 참 실속 있는  걸음을 걸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 분은 신령한 나라로 옮겨졌고 생명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함이라.

 최고의 하나님 창조주 주재 주권자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영원 자존자 이  분이 그를 정죄 할 것이 없었고 저주와 사망을 줄 것이 없어. 생명의 나라로  옮기셨다.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지 못했다 그 말은 아직도 사망과  저주와 정죄와 심판과의 관련을 가지고 있는 그 세계에서 옮겨갔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보지 못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에녹이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범위를 잡았고 공간적으로는 멸망의  세계와 영생의 세계 피조물의 세계와 창조주의 세계 심히 넓은 범위, 본질과  본성으로는 완전 무결의 이 완전성을 가진 참 광대하고 심히 크고 높고 빛나고  깨끗한 이 생애를 이루어 하나님이 그를 진리와 사랑과 생명의 세계로  옮기셨으니 옮기우셨으니 다시는 사망이 보지 못했다. 저주가 다시는 보지  못했다. 심판이 보지 못했다. 그런 것들과 상관이 없어. 그런 것들이 근방에 오지  못하고 상관없는 이 승리자로 옮기웠으니 그가 대체로 세상에서 어떻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나? 그런 그 형편과 사정이 우리와 어떤고? 그것을 한 번  대조해 볼 만 합니다.

 그런 그 사정과 형편이 우리보다 탁월해 있었느냐? 모든 조건들이 좋았느냐?  성경에 보면 그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심히 복잡하고 잔일 많고 사고가  계속 연발되는 아무리 좋아도 제일 싸움을 많이 해야 되고 원수를 많이 맺어야  되고 또 화목을 해야 되겠고 또 용서를 많이 해야 되겠고 하는 어디보다도 제일  복잡한 가정이라는 이 문제를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정 문제를 가지고  있었어.

 인간이 보금자리 칠 자리도 가정이지마는 자기 세대에 자기 세계에 온 천하에  제일 복잡다다한 피곤한 곳이 가정이라는 것이요.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특수한 은혜를 줘서 그날 그날에 누구보다도 많은 싸움을 했지마는 그래도 다시  화합을 하고 누구보다도 원수를 맺고 단언을 많이 했지마는 그런 것들이 다  취소가 되어지고 이런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있어. 그렇지만 복잡한 것인데  모두 다 이것 때문에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에도 노아 때와 같다 하면서 그 몇 가지 들어  말하기를 가정 문제를 들어 말했고 의식주 문제를 들어서 말했고 인간의 이렇게  활동성 교환성 사교성 이것을 들어서 말했는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가정  문제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녹은 우리와 같은 가정을 가졌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았소. 그래  우리보다 에녹은 입장이 좋은 게 뭐 없었소. 조건이 좋은 것이 없었어. 그가  우리보다 특수한 무슨 특수인이 아니오. 내나 원죄가 있었고 본죄가 있었고  악령이 계속 따라 다녔고 지저분한 세상 죄악들이 와 가지고 그저 병균  들어붓듯이 마구 들어붓는 이 속에서 에녹은 살았는데 그 중에 이와 같은  완전무결의 생애를 이룬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이제 나옵니다. 에녹은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하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존재들에게 심판 받지 않을 수 있는 정죄와 저주와 사망을  창조주와 피조물에게 받지 안 할 수 있는 이 생애, 다시는 이런 것들이 상관할 수  없는 다시는 이런 것들이 만나보지도 노려보지도 못하는 생명 세계로 옮기워져  간 그 이유가 입장과 처지와 자체도 우리와 꼭 같았는데 다른 점이 뭐 하나  있었느냐? 다른 점이 뭐 하나 있었느냐? 다른 점 있는 것은 그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인정을 받았다 했습니다. 요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요거 하나 가지고 이렇게 모든 해를 다 꿰뚫고 이기고 생명과  진리와 평강의 세계로 옮기워져서 다시는 이런 정죄나 심판이나 저주나 사망이나  어떤 유혹이나 침노 이런 것들이 보지도 못한 세계로 옮기워져 간 그 원인은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거. 이거라. 여기 표시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쁘시게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는 문제입니다. 에녹이나 우리나  꼭같은 자본 꼭같은 처지 꼭같은 형편 꼭같은 가정 꼭같은 마귀 꼭같은 지저분한  많은 거짓말들 꼭같은 원죄와 본죄를 가졌는데 에녹은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거 하나 가지고 요거 하나만을 위주로 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거  하나만을 전심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는 인간 성공을 했다. 피조물로서의  성공을 했다.

 그러므로, 그런데 우리는 에녹과 같은 이 희망이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불리한 조건이 많아도 에녹도 나와 같은 조건이기 때문에 그 조건을  극복하고 능히 이룰 수 있는 이 지극히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아무리  못나도 병신이라도 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이 소망을 가졌다면 이 소망을  달성하는 그 실제의 방편에 있어서 그게 무엇인가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됩니다. 그것을 여기 가르쳐서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기쁘시게 하는 그 방편을 기쁘시게 하는 일, 이 일을 하면 이  일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인정받으면 이 성공이 성공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6절에 이제 기쁘시게 하는 그 방편을 기쁘시게 하는 그 실상을 여기 말씀 해  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없으면 기쁘시게 못한다.

믿음으로만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믿음으로만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대단히  어려운 말입니다. 믿음으로만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대단히 어려운 말입니다.

믿음으로만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것 잘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자기의 있는 몸과 생명을 하나님에게 다스려서  자기의 있는 몸과 생명을 하나님에게 다스려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이것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안됩니다. 자기의 재산을 다 하나님에게  바친다고 해도 이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안됩니다. 자기가  일생동안 수고하기를 하나님 위해서 일 한다고 해도 이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안됩니다. 왜 안되는고 하니 제가 드려 봤자 하나님이 짓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것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엿새동안에  우주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걸 지으신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무슨 노동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소?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다 할지라도  저희에게 오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것이요. 안 드려도 제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하나도 자져가지 못하고 몸뚱이까지도 딱 세상 딱 두고 가야 하는데 안 드리면  어쩔 것이오?  이게 아닙니다. 여기 말씀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믿음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이것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믿음으로만 기쁘게 하지 믿음 외에 딴 거로는 기쁘게 못한다.

 이제 그러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이제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믿음에  정의를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 주관적인 정의를 내려서 실은  다 삐뚤어진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간단하고 쉽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방편의 형태를 말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요. 그러나 이 믿음의 실상을 말하면 이깁니다. 믿음의  실상을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주실 때에 이것을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주실 때에 내 것이 좋지 당신의 주시는 것은 싫습니다. 하는  이것이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기뻐하신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과 지능으로 없는  가운데서 만드실 때에 만드신 그대로 만들어진 그것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됐습니다. 하나님에게 기쁨이 됐어.

 그러면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당신의 뜻대로 그대로 당신의 성미대로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역사 하신 대로 그대로 만들어졌을 때에 만드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됐습니다. 이것은 일차창조에서  하나님이 기쁨을 누리신 것이요. 그러나 이것은 변동될 기쁘심이요, 또 변동될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도 변동되지 아니하실 영원한 기쁨 또  하나님이 영원한 기쁨이 되는 변동되지 아니할 것들 이것인데, 이것은 이미  일차창조의 것에게 이차적으로 진동되지 안 할 것,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낡아지지 아니하고 생명과 신령에 속한 영원 완전무결 영생의  이것을 하나님께서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첫째 아담으로 된 여기에 변동될 이  일차 피조물에게 영원히 변동이 없을 완전 무결 영원의 것을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줄 때에 이것을 받는 이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성과 같은 완전한 그 형상을 우리에게 줄  때에 그 형상을 내가 받아 가지는 것이 그것이 입는 것이요. 그를 따르는 것이요  그를 따르는 것이요. 그걸 받으면 그를 따랐습니다. 그걸 받았으면 그와 꼭 같이  됐습니다. 그걸 받았으면 그를 쫓아 그를 닮았습니다. 그와 같이 됐습니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인데 나대로의 것을 버리고 당신대로의 것이 되어지는 그것이  당신에게 끌려가는 것이요. 그것이 당신을 따르는 것이요 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흠이 없는 이 성화를 하나님이 주실 때에 이 참된 그 인격성을  주실 때에 하나님의 이 속성 같은 속성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이것을 받아  가지는 이 방편이 믿음입니다.

 자기의 행동으로서는 하나님의 그 지능이 지혜대로의 그 지혜를 자기가 받아서  하나님의 전지의 지혜를 받아 그 지혜를 내가 받아서 내 지혜 삼고 그 능력  받아서 내 능력 삼고 그 신성 받아서 내 인격성 닮고 삼고 그의 속성 받아서 내  속성 삼고 그의 언어 받아서 내 언어 삼고 당신의 가지신 그 가치와 영광과 존귀  그것을 받아서 내 것 삼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는 그 방편, 받는 그 시공의 역사의 상태를 말할 때에 믿음이라  이랬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보호해서  하나님으로서 제 것을 삼으려고 그를 향하는 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요.

그걸 따라 그것 받아 내 것 삼아 내 것을 부인해 버리고 그걸 받아 내 것 삼는  그것이 내가 당신을 따라 가는 것이요. 당신을 본받아 가는 것이요. 당신과 같이  되어 지는 것이요. 당신의 것으로 가지고서 내 것을 삼는 이것인데 이것 만으로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기뻐하시는가? 우리가 망하는 것을  당신에게는 큰 근심 걱정이 되고 망하는 것을 우리가 벗어 날 때에 당신에게는  근심 걱정이 떠나게 되고 우리가 생명과 신령에 속해서 완전 무결의 것을 내가  받으면 받은 것만치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모든 정죄 심판 저주 사망 모든  수치 이것을 벗어남이 당신에게 근심 걱정을 이제 덜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없는  에녹처럼 온전함을 이루어 나가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주관적이요 언제든지 사욕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하면 아 제 맘 짚어서 남의 맘 안다고 제가 사욕장이니까  아 하나님 기쁘게 한다 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이 나 주니까 좋대. 나 높이니까  좋대. 나 위하니까 좋대. 이것 모양으로 하나님도 하나의 이기주의자요  사욕쟁이요 그 이렇게 사시는 하나님이니까 우리 인간 마음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기쁘시게 한다 하는  이 성구를 우리가 볼 때에 이 부패성에 이 지식과 법칙으로 생각해서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은 나의 희생으로  인해서 부요 부강해지는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니 능력이 크시고 높아 그렇지  사상이나 주위나 목적이나 방편은 우리 악인들이나 죄인들이나 다를게 뭐  있겠노? 이런 오해와 곡해를 가지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성구들을 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주저하고, 자기 안에서 내 위해 그  투자. 자기 안팎에 투쟁이 생겨 가지고 기껏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아  하나님이 나 위해 기쁘시게 했으니 나도 서로 여수 사랑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이랬으니까 품앗이 사랑으로 하나님이 나 위해 이렇게 했으니까 나도 이렇게  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정도의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다시 낙엽처럼 되돌아가서 자기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하나님에게는  근심걱정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존자시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자시요 완전한 자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는 것이 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요 생겨진 것이요  당신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인데 이것은 당신의 본체에 도달하지 못하고 본체에  가까이 가지를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으로 당신에게 드려서 기쁘게 하고 당신을 높여서 기쁘게  하고 당신을 섬겨서 기쁘게 하고 당신에게 주어서 당신을 도와서 기쁘시게  한다는 이런 사상은 완전히 우리 지식에서 제거 해 버려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 외에는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내가 받는 것이 내게는 완전 무결이 성장되고 저축되는 것이고, 나에게 완전  무결 영생의 것이 저축되고 성장되는 이것이 하나님 당신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기쁨은, 이렇게 이루어 진 것들이 집합되어 있는 하늘 나라는  당신의 기쁨의 나라가 되고 기쁨의 것이 되고, 이것을 받지 아니하고 이것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지어준 이것까지도 죽고 망하게 만드는 그  일로로만 가서 망하고 망하여 영원히 망해지는 지옥의 영원히 망해지는 이것이  하나님에게 영원한 근심과 고통이 되어지는 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모든 사망의  해를 받는 이것을 치료하시려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적극 소극적 역사요.

이렇게 죽어지고 썩어질 이것을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낡아지지 아니하고 다시는 정죄나 저주나 사망이나 심판이나 이런  것들을 받지 아니 할 자로 하나님의 것을 주어서 이렇게 이런 자를 만들려  하시는 이 하나님의 역사이신 것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일은 두 가지 뿐이요.

 하나는, 우리를 모든 면으로 치료하시는 일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주어 새로 고쳐 주시고 치료도 하시고 기르기도 하시고 구비도 하셔서 모든 면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당신의 사랑의 만족을 이루는  그 시은의 자리에 만족을 이루는,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목적의 달성,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모든 면에 능치 못함이 없는 이 자가 되게 하시려는  이 두 가지 만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일찍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달아 이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치료를 의심치 않고 받았습니다. 의심치 않고 받아 그가 치료받을  것을 다 치료받았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병균이나 정죄 라는 병균이나 저주라는  병균이나 사망이라는 병균이나 이런 것들이 하나도 해 할 수 없는 치료를 받았고,  이런 것들에게 해를 받지 안 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을 다 방비해서 치료받았고,  하나님께서 생명과 신령과 사랑과 진리와 온전과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 되어서  생명으로 영광으로 존귀로 되어 있는 이 나라의 것들로 이렇게 충만 시켜 주시는  이것을 주저하지 아니하고 받았습니다.

 에녹은 이것 두 가지만 했어.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에게 일면으로 소극적으로는  치료하시는 일과 적극적으로는 자기를 온전케 하시는 이 두 가지 역사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전지전능의 하나님이심을 에녹은 믿었습니다. 에녹은  인정했습니다. 인정했기 때문에 그가 하시는 일에 하나도 주저하지를 안 했고,  사심치를 안 했고, 지체하지를 안 했고, 염려하지를 안 했고, 언제든지 예의대로만  치료했고 온전하고 구비성을 갖췄기 때문에 에녹은 창5:1-11 이래 자꾸  죽었습니다.

 이러다가 이제 21절에 보면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사람에게만 죽음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만 죽음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에녹은 이것을 깨닫고 우리와 꼭 같은 세상살이에서 그의 목적이 하나  밖에 없었어. 하나님께서 에녹 자기에게 이런 요구 저런 요구 이런 부담 저런  부담 아무것도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에게 멸망의 것들을  치료하시는 일과 영원 완전 무궁의 것을 나에게 주어서 완전케 하시는 이 일만을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는 이것 만 했어. 하나님이 자기에게 단  일이든지 쓴 일이든지 급한 일이든지 누그런 일이든지 세상 사람이 볼 때에는  시시비비를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지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 이것은 자기의 멸망을 치료하시는 것과 자기로 무궁의  영원 세계에 갈 수 있는 것으로 구비하시는 이 일, 두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기가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일을 상대해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모든 일이 감사라. 치료니 감사고 새로운 영원한 건설이니 감사고  치료든지 건설이든지 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일생동안 감사하면서 이 소망으로 인해서 피곤함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와 같은  인생 현실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가'하면  '가' '나'하면 '나' '다'하면 '다'.

 이제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한 하나님의 주시는 대로 받았다  말입니다. 이것 하다가 갔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보지 안한 에녹의 생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에서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우리의 열심에  구원을 믿지 않습니다. 안되니까 친히 사람 몸을 입고 오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이 목적을 인정치 아니하고  의심하고 주저하는 이 죄를 우리가 회개를 해야 되겠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당신의 완전을 받아 가지는 것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고 내 멸망을 당신의  은혜로 치료받는 이것만이 당신의 기쁨인 하나님의 기쁨이 뭐이냐? 하는 이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지식의 정의를 바로 가져야 되겠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 어떤 일을 하고 계신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이 사실을 우리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에녹은 알았기 때문에 그는 피곤함을 몰랐습니다. 모든 지저분한  세상살이가 두 가지. 하나님이 무한한 치료하시는 치료에 작용을 일으키고  하나님이 영원 건설의 작용을 일으키는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세상이  진정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영원을 결정 지우는 하나의 종자와  같은 세상 짧은 살이로 알았기 때문에 그는 피곤치 않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걸음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회개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가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에누리하지 맙시다. 세상에서 다 기만의 말들이 가득 찼고,  과장의 말들이 가득 찼고, 실상 없는 무책임한 말들이 가득 찼기 때문에 이런 말  많이 듣고 지저분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 말씀의 사람 권위를 인정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서 밟은 길바닥과 같은 심령이라고 인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결심합시다. 작정합시다. 이 외에는 가치 있는 생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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