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하나님

 

1979. 11. 4. 주일오후

 

본문: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자기를 하나님에게 비해서 부인하고 자기를 하나님과 비교해서 하나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아 하나님에게 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또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자기역사와 비교해서 자기역사보다 하나님의 역사가 더  좋고 권위 있기 때문에 자기역사를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취하는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자기를 세상에 어떤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 아니요. 또 자기  행동을 세상의 어떤 행동과 비교해 가지고 자기 행동을 부인하라는 말 아닙니다.

 해 아래 있는 모든 행동이 다 인정 못할 만한 움직임이요. 또 자기 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마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를 따라갈 만한 그런 인물은 없습니다.

 믿음이란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 자기를  부인하는가? 하나님에게 비해서 하나님은 그 자체가 완전자시지마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하나님 보고 자기 볼 때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표본으로 삼는 것이요 행동도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는 하나님보다 못하기 때문에 자기 내어놓고  하나님 차지한다는 말이요. 행동도 하나님의 행동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자기  행동을 이제는 버리고 하나님의 행동을 자기 행동으로 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자기 버리고 하나님 따라가는 것이요. 자기 행동 버리고  하나님 행동 따라가는 것이요. 자기 것 내어놓고 하나님의 것 취하는 것이요.

이것이 믿음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 이 세상은 아무리 자기  것이 나쁘고 상대방의 것이 좋았다 할지라도 그것 바꾸자고 해도 안 바꿔주고 제  것 나쁜 것 그런 것 버리고 좋은 것을 따라갈라 해도 잘 주지도 않고 따라가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당신의 것, 이것은 참 완전인데 우리와 우리의 것은 이것이 전부 잘못 되어서  정죄 받은 것이요 저주받은 것인데 사망에 벌써 매여있는 이것이기 때문에 이  더러운 것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온전한 것을 가지는 자가 되어지도록 이것을  주러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기와 하나님과 이렇게 비교해 보고 나보다 하나님이 낫다,  하나님은 흠잡을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이 자체나 그 실력이나 이게 완전하기  때문에 내 것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것으로 내 것을 삼겠다 하는 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을 삼으려고 하는 요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을 쫓는 것이요. 요것이 일반말로 하기를 믿음이라 이랬는데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후히 주시고 얼마든지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것을 얼마든지 주시는데 그러면 주시는 이 하나님은 어느  정도에 주시는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기쁨은 이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이것을 바꾸어 가질 때에 바꾸어 가질 때에 그는 참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우리가 바꾸어 가지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이것 뿐이요 . 왜? 하나님은 우리 잘 되는 것을 기뻐하시고  우리 못되는 것을 근심하시는 이것 두 가지 뿐이지 그 외에는 하나님을 기쁘기  할 수도 없고 근심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망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근심이 되고 우리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내게 온갖 잘못되어 있는 병들어 있는  이것이 하나씩 고쳐질 때에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되고, 또 내게 영원히 멸해지지  아니할 완전성 불변성 이 생명과 평강성 이런 것이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하나씩  둘씩 생겨지면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사망을 보지 않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에게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들이냐? 심판과  정죄와 저주와 사망을 당하지 아니할 완전한 것뿐입니다.

 우리 자체에게도 그러하고 우리 행동에도 그러하고 우리 소유에게도 그러합니다.

우리 소유든지 우리 행동이든지 우리 자체든지 여기에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이 온전한 것이 온전한 것이 있으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됩니다. 요것이  온전히 기쁨이 됩니다. 우리에게 일시로 어떻게 아름답고 영광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것이 혹 몇 해 혹 몇 십 년 몇 백년 이렇게 지나가면 이  모든 것이 멸망 받을 불완전한 것 이 모두 잘못된 것 수많은 것들에게 침노를  받아서 멸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으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근심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쓸려면 멸망 받을 것들을 다  제거하고 영존 영생할 완전한 것들을 갖추어 가지게 되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신 것도 그렇고 우리와 지금도 관계를  가지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 자체의 이 완전성 당신 자체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신 역사입니다.

 십자가의 대속도 그러하고 지금 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완전한 이 신성, 하나님의 완전한 이 신성 이  신성을 우리에게 주셔 가지고 이것이 우리의 인격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속역사를 시작하시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까지 이것을 운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같은 온전한 우리 자체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완전케 하면 어떻게 당신의 완전한 신성, 당신의 완전하신  신성과 같은 요 인격성을 갖추어 가지려고 하는 요것이 하나님의 첫째  목적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신성과 같은 인격성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설비하시고 설정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오. 또 당신의 움직임과  당신의 행동과 같은 온전한 행동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도 당신같이 온전한  행동하는 자 온전한 이 행동을 하기에 능한 자 온전한 당신의 행동 같은 온전한  행동을 능히 할 수 있는 이런 실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영원한 영광이라든지 존귀라든지 명예라든지 기쁨이라든지  평강이라든지 당신이 가지신 것과 같은 온전한 것을 우리로 하여금 소유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십자가의 대속과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서 어떤 하나님이시냐? 이제 말한 대로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원하셔서 이 세 가지를 주시기 위해서 모든  설비를 구비하시고 모든 것을 구비하셔 가지고 섭리하시는 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첫째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가든지 심방을 가든지 가정에서 가정 일을 하든지 사회 일을  하든지 혼자 있든지 여럿 있든지 우리는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일차창조로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일차창조의 혜택을 입은 우리들을  이차창조로 우리에게 역사 하셔 가지고 이차적으로는 하나님 자체 완전성 하나님  행위의 완전성 하나님 소유의 완전성 이 완전성과 같은 완전한 이것을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심히 연약하여져 있는 우리에게 영원히 강하고 온전한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어서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해. 사망은 저주에서 나왔고 저주는 죄에서 나왔고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데서 나온 것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가지신 거와  같은 당신의 온전하심과 같은 자체 당신의 온전하심과 같은 행동 당신의  완전하심과 같은 그 소유 이것을 우리에게 주어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도록,  만물 심판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어.

하나님의 지으신 시간이나 존재나 어디서나 거리낄 것이 없고 피해를 입을 그런  연약함이 없고 모든 것을 능가하면서 모든 것에게 다 환영을 받고 화평을 이루는  이제 세로나 옆으로나 모로나 전체면이 온전하고 구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우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차적으로 이것 주시기 위해서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나타난 하나님인 이 사실을 주시되  완전 무결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인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뭐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무슨 품앗이라든지 또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시험하시는 것이라든지 또 이렇게 저렇게 밀고 당기는 것이라든지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어. 그 근본으로 따지면  없는데 그 중간 역사에 있어서 표현상 방편으로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근본은  하나님은 완전한 소유 완전한 행동 완전한 자체 이 세 가지로 일차 아담으로  불완전한 것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서 실패한 여기다가 이것을 되살려서  이차적으로 완전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일차창조의 것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에게 받은  이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여기에서 요 사망이라는 요 멸망이라는 요 변동이라는  것이 생겨진 것입니다. 이래서 이차적으로는 이제는 어떻게 해도 변동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항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이런 완전무결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원 대속으로 영원 사죄 영원 칭의 영원 화평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기초적으로 주어 놓고 그 다음에 이 삼대공로를  힘입어서 우리가 건설구원 이 성화구원 세 가지 완전함을 얻은 여기서 이것을  토대로 해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을 이 세 가지 온전함을 힘입어 가지고  이것을 자본으로 해 가지고 이것을 밑천으로 해서 두 냥쯤 주니 두 냥쯤 다  가지고 장사했고 닷냥 쯤 주니 닷냥 쯤 다 가지고 장사했고 한 므나를 주니 한  므나를 다 가지고 장사했고 이 비유가 이것인데 우리에게 예수님의 대속으로  자체 행동 소유 이 세 가지에 온전하고 완전한 이 종자가 되고 기초가 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것을 활용해 가지고 장사 밑천 모양으로 이것을 활용해  가지고 이 은혜를 힘입어서 자기가 힘써 이 기본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소유 온전한 행동 온전한 자체를 우리가 받아 가지고서 이것을 가지고  영원무궁토록 영광의 나라에서 시민의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 처음 아담 해와 때에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지  받지 아니하신 하나님이고,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잘 될 때에 기뻐하시는  하나님이고, 둘째 아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도 순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역사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이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주시는 하나님이시라. 무엇을? 완전한 소유와 완전한 행위 완전한 자체 이것을  불완전한 첫째 아담으로 지음 받은 여기다가 입혀 버립니다.

 이것 비유가 될는지 모르나 마치 베 조각에다가 아주 흉한 물을 들여 이 베  조각 전체는 흉한 베 조각이 되어있는데 이 베 조각을 흉한 색을 다 빼버리고  탈색을 시켜 그 색을 빼버리고 그 다음에 참 아름답고 고운 이상이 없는 지상의  아름다운 이 색깔을 물들이는 것처럼, 첫째 아담으로 지음 받은 여기다가 악령이  와 가지고서 악령의 그 근성 악령의 그 행동 악령적인 그 소유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물을 들여 사람들에게 입혀서 사람들을 완전히 이것으로 마귀와  꼭같은 자가 되어진 소유는 영원히 멸하고 없어질 것이요 행동도 영원히 정죄  받아 없어질 것이요 또 자체도 영원한 사망을 받아 멸망할 것들인데 이것을  이차적으로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일차 아담이 대표한 것처럼 둘째 아담이  대표해 가지고 이것을 혼자 책임을 지고 이 삐뚤어진 문제, 또 바로 되는 문제 또  앞으로 영원히 없는 가운데서 온전한 것으로 있게 하실 이 하나님이 시은의  창조주의 이 분과의 결합 이것을 완전히 대속하심으로써 이것을 해결 지어  놓으시고,  그러면 소유적으로 잘못된 것, 행동적으로 잘못된 것, 자체적으로 잘못된 것  이것을 해결 지은 것이 사죄요. 또 소유적으로 온전하고 행동적으로 온전하고  자체적으로 온전케 된 것이 내나 칭의를 입힌 것이요. 소유나 행동과 자체가  절대자이신 이 창조주요 시은자로 더불어 결합을 가져서 영원무궁토록 얼마든지  거기서 받아 가질 수 있는 요 관계를 맺는 것이 예수님이 양성일위로 다시 죽은  가운데서 새로 양성일위를 입으신 이 공로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 대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이 기본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를 통해서  지금 이 은혜를 입어 이 은혜를 입은 자로서 성령과 진리의 도우심을 입어  가지고 성령과 진리의 도우심과 자기 힘을 합해 가지고 자기 힘 뭐 예수님의 세  가지 구속을 입은 진리요 성령으로 중생 된 그 자의 힘 말이요. 그 자의 힘과  성령과 진리의 도우심을 입어 가지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온전한 소유 완전한  행위 완전한 자체 이것을 지금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쓰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받아서 준비기간이라는 나그네 시간에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이 기간이 지나가기 전에 내 소유적으로도 하나님에게 받아 없어지지 아니할  완전한 것을 갖추어 가지고, 행동적으로도 하나님에게 받아 영원 완전한 것을  갖추어 가지고, 자체도 하나님에게 받아 완전 영원 불변의 자체로 이렇게 갖추어  가지도록 하나님이 요것을 권면 하시고 요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상대한 하나님은 요 하나님이요. 그러기에 바울이  말하기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하늘에 있다는 말은 무궁세계에 있다는 말 아니요. 하늘에 있다는 말은 지고 안에  있다 말이요 지고 안에 있다 말이요. 지귀, 지극히 귀한 진리 안에 있다 말이요.

지고 안에 있다 말이요. 지성안에 있다 말이요 . 지공 안에 있다 말입니다.

 완전 안에 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완전 안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완전  안에 있는 것이 있는데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이 세상에 있어. 탄식하며  탄식을 한다 말은 전심전력을 기울려도 마음에 조급이 생기니까 전심전력을  기울여도 이게 너무 허무하고 빈약하니까 탄식이 나오지요.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고에서 오는 지고 높을 고(高)자 지고에서 오는 지성에서  오는 지극히 거룩한 지성에서 오는 지공에서 오는.

 다시 말하면 완전에서 오는 모든 것에게 강압적이 아니고 유기적으로 그들이  좋아하고 환영하는 음부에 있는 것도 주는 예수님을 주라 시인한다 했습니다.

거기 강제가 아니요. 다 자유성 있는 자유성을 가지고 환영한다는 말입니다. 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소원하노니 우리의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소원하노니. 옷 입듯이 이 소유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온전한  소유를 입어 이 소유 속에 내 소유가 있고 하나님의 완전한 지능의 행위 속에 내  행위가 되고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 속에 나 라는 이 인격성이 내주 할 수 있는  이 처소. 처소란 말은 집이란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어. 우리를 집이라 성전이라 말씀했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너희들이 알리라 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 안에 능력 안에 지혜 안에 은총  안에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이 시은 안에 있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를  우리의 거처할 곳을 하는 이 말씀은 우리가 그 속에 거처한다는 말이니 우리의  소유가 그 속에 거처하고 우리의 행동이 그 속에 거처하고 우리 자체가 그 속에  거처하는 이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서 탄식으로 지금 고대하고 노력한다,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소원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이렇게 입는 것은 이 온전을 입는  것은 내 행동에 더러운 것은 다 벗어버리고 마귀적이요 정죄적이요 저주적이요  사망적이요 멸망적인 불완전한 모든 거짓된 이것들을 내가 완전히 벗어버리고  원죄와 본죄로 말미암아 당겨 올린 이 모든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나니. 이렇게 입음은 이렇게 입을려고  노력하는 것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렇게 저렇게 살아 죽으면 일단 죽는 것도 일차적인 이  준비생활을 다 끝내는 것인데 준비생활을 다 끝내고 나면 준비하던 심신과 같은  이런 것은 되바꿔서 다시 영원성을 가진 이 존재로 변화를 받아 가지고 부활을  합니다.

 죽으면 기독자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부활을 하고 불신자는 재림 후 천년왕국에  부활합니다. 이제 부활을 하면 그 다음에 거기서부터 연습해 가지고 무궁세계에  들어가는데 그때에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부활해 가지고 부활해 가지고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와야 되는데 부활해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오니까 자기 소유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지귀, 지성, 지공 이 완전에 완전성을 입지 못한 소유는 전부다  거기서 심판에서 걸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 것 내 것이니 가지고 갈랍니다. 안 된다. 여기 좀 두어라.

통과 안 해 줍니다. 내가 이렇게 세상에서 했던 모든 기능 내 모든 사업 모든  영광 모든 승리 성공 이 것 내 것 입니다. 그래, 못 가지고 간다. 여기 두고 가라.

이 지식 이 기능 이 예술 이 기술 이 권위 이것이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 이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것만 가야되지 갈 수 없는 것을  입국시킬 수가 없다. 너는 이것을 입지 못했다. 너는 너의 자체에 온전성을 입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죄 칭의 새생명 받은 기본구원만 너는 완전성을  이루었지 너의 건설이라는 것은 하나도 완전한 것이 없다. 이것은 네 기능을  제거해야 된다. 네 지식을 제해야 된다. 이것은 다 폐해진다. 이것은 다 두고 가라.

이래서 그때에 거기서 벗은 자로 나타나면 그는 영원히 그것은 입지를 못합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기능을 입어야지 그 나라에 가서는 덧입지를 못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입어야 되지 그 나라에 가서는 신성을 입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피조물이 좋아할 수 있는 이런 덕과 행위와 사상과 정신과  방편을 입어야지 그 나라에 가서는 하나도 입지를 못합니다. 이러기에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기 위함이라. 이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자가 성령의 사람입니다.

 돈을 입었으면 그것이 몇 일을 따라오겠소? 권세를 입었으면 그것이 몇 일을  따라오겠소? 여러분들, 너무 요 시간이라는 시간 짤막한 보따리 속에 파묻히지  맙시다. 우리는 영원한 시간이 우리의 것입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라. 이제 잠깐 동안 입고 있는 이 장막. 장막이라는 말은  분명히 벗을 집이란 말이요. 아무리 존귀한 지위라도 벗을 지위요 아무리 존귀한  지위라도 벗을 지위요. 아무리 천하가 우러러보는 영광스러운 위치라도 벗을  위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장막이라 이랬소. 자기가 거처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시간이 갈수록 더 늘린다. 마음이  눌리고 걱정이 더 된다 말이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죽자껏 애를 써도 또 실패 또 실패 또 부족 또 부족 또 어리석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몇십 번 또 건설을 해도 또 미달 또 미달 또 부족 또  부족 온전하고 구비하지 못한 이 점을 가지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탄식. 무거운 짐 진 자 같이 탄식하는 것은 뺏고자 함이 아니요. 우리가 이  세상살이를 하기 싫어서 어서 그만 자살하는 사람처럼 이 귀찮은 사람처럼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 장막 집을 벗고자 함이 아니라  어쨌든지 실패를 해도 이 장막 집이 있을 동안이라야 다시 재판이라도 할 수가  있지 이 장막 집 끝나 버리면 안되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되겠다 하는 말입니다.

 이제 또 하나님이 죽는 것을 명하는데, 어겨서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어쨌든지 이 세상에서 어서 장막 집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것을 벗기 전에 이 장막 집이란 첫째 아담에 속한  이것을 벗기 전에 못된 마귀 적인 모든 잘못된 정죄, 저주, 사망에 이 처소를 벗고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이 처소를 덧입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게 하려 함이라. 죽은 것이 산 사람에게 먹혀지면 산 사람이 피도 되고 살도  되고, 죽은 고기가 삶은 고기가 산 자가 먹으면 산 자의 피도 되고 살도 되는  것처럼 비유의 말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고자 하려 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죽은  것뿐인데 내 자체도 죽었고 행위도 죽었고 소유도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이 생명 속에 들어가서 이 생명에게 삼키워져 이 생명의 것이 되어 산 것이 되게  하려 함이라.

 5절에 곧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이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이루도록  하시고 어쨌든지 멸망 받을 처소를 벗고 멸망 받을 내 자체가 멸망 받을  인격이라는 그 인격을 입고 있는 인격을 버리고 내 움직임이 멸망 받을 내  행동을 벗고 내 소유가 멸망 받을 이 성질의 불법의 것을 벗고.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이것을 벗고 입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성령이니라.

 보증으로, 이것의 담보자 책임자 이 일을 이루시는 책임자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이 책임을 성령님이 지시고 이 일을  이루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지고 흩어지지마는 무거운 짐 진 것과  같이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이것이 무너지기 전에 하늘의 영원처소, 사망이나  저주나 노쇠나 제한이나 이런 것들이 다시 가까이 오지 못하는 영원처소를  덧입기 위해서 무거운 짐진 자와 같이 힘쓰는 데도 이것이 잘되지 안 해서  탄식으로 죽자껏 해도 안되는 그 면 때문에 탄식하면서 가는 것이 영원한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종이 아닙니다. 이십세기의 사람들은 다 물질의 좋이 되어서  만물의 영장, 물질 이까짓 것은 저급의 것이요. 이보다 신비한 물질. 돈이 많은데  그런 것들에게도 장사로 모든 것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통치할 위치를 가진  우리들이 물질의 종. 공산주의는 물질의 종입니다.

 남한의 기독교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은 물질의 종입니다. 물질의 종.

물리라는 이 과학에게 종이 되어서 이것 있으면 될 줄 알고. 만능이라 전능이라  말하는데 요것을 믿고 의지하고 이 세력을 이 법칙을 요동치기를 자기의 처소로  마련한 자는 이것이 멸망 받을 때 그것도 다 멸망 받습니다. 이 세상 불탈 때  나도 타리라. 웬 말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그 성도가 탄식되어서 말한  것입니다. 이 책임자를 성령으로 주셔서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어디 담대히 세상에 대해서 담대히 죽는 것이나  벗는 것이나 굶는 것이나 고문이나 고행이나 두려울 것이 없어. 세상에 대해서  담대해. 왜? 우리의 소망이 이렇게 지극히 높은데 있고 땅위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참으로 인하여 진리로 인하여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을 쓰므로 바로  쓰므로 이것이 살게되고 바로 움직이므로 이것이 살게되고 완성은 하나님이  바꾸라는 이대로 바꾸면 완전히 다 된다 말이요.

 어떤 사람은 속성하고 어떤 사람은 완성하고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하나도  바꾸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표요. 우리의 성공이요. 땅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법칙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땅위에서 있는 것을 이렇게 없앤다 저렇게 없앤다 뚜드려 어떻게 친다 매장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대로 내가 거기 움직이면  여럿 사는 것보다 하루 있는 것이 낫고 백 년 없어지는 것보다 일 년 없어지는  것이 낫고 일 년 없어지는 것보다 당일 없어지는 속성이라 말이요.

 이것이 바로 바꾸어지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 바꾸어지면 많은 시간을 거칠  필요가 없어. 이렇기 때문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어서 바꾸는 것이라. 어서 바꾸는 것이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바꾸어 가질 것은 없어지고 완전히 바꾸는 것이라. 함께 거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무엇.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이  주시는 소유를 당신이 주시는 행위를 당신이 주시는 형상을 내가 지체 안하고  쏠박 쏠박 받아 한 시간 통해 당신은 죽어 근심으로 걱정으로 주시고 내가 받아  가졌을 때에 기쁨이 되고 또 그 다음 그 다음 순서에서 당신은 원하고 원하셔서  이 세 가지 완전을 주시고 이 완전을 내가 받아 가졌을 때에 당신은 영원한  기쁨을 가지시는 이것만이 세상에서나 하늘에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곧  내가 바로 되고 온전히 되는 것,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것만 힘써 주님 기쁘시게 한다는 이 말 착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자 되라. 이 말은 주님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주시는 것을 내가 받아 잘되는 이것 힘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완전지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드려서 거짓 인간들 도적 인간들  독사와 시랑이 같은 인간들 남을 삼켜야 하는 요 인간들이 기뻐하는 이 기쁨과  다르요. 하나님은 당신 같은 우리의 독실한 완전자가 되는 이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노라.

하나님이 나를 온전한 자 되기를 힘쓰는 요대로 내가 온전한 자 되기를 힘쓴다.

온전한 소원 온전한 행위 온전한 자체가 되기를 힘쓰노라.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것을 힘쓰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요것 된 자는 기뻐한다.

 이것에 손해 가는 죽음은 죽기 싫다. 이것이 손해 가는 세상살이는 살기 싫다.

기쁘시게 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공심판은 면해서 지옥은 면했지마는  하늘나라에 가는 자로서 그 계급이 어떠하며 실력이 어찌되며 영광이 어찌되며  만물이 기다리는 그 기대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을 심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라는 말은 사랑과 도덕성을 가지고 심판하고 지혜와 지식성을  가지고 심판하고 능력성을 가지고 심판하는데 이는 만물에 대한 도덕과 사랑문제  만물에 대한 지혜 지식 문제 만물에 대한 능력의 중보자 되는 이 문제 이 실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는가 하는 이것을 심판하는 이 심판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인데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하나님 중심으로 유일의 하나님  위주로 살았든지 자기의 피조물의 중심으로 위주로 살았든지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을 면하지 못합니다.

 부활만 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처럼 반드시  기독자라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요 불신자라면 예수님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공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때에 심판해서 자기가 어느 중심 어느 위주로 살았든지 하는 그대로  하나님에게 필요하면 모든 존재에게 필요하고 하나님에게 필요 없으면 모든  존재에게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무슨 필요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실 때에 받는 자가  하나님에게 필요 하요. 모든 만물에게는 어떤 자가 필요합니까? 저희들의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받아 가지고 저희들에게 줄 수 있는 자가 필요 하요.

이것이 무궁세계의 자기 위치입니다. 자기 위치요. 하나님에게 하나도 받지를  못해. 받을 것이 없어. 세상에서 안 받고 반대하는 일만 했으니까 반대하는 일만  했으니까 받는 일을 하지 안 했으니까 받는 그 실력이 없어. 하나님에게 하나도  받는 것이 없어. 피조물들에게 하나도 줄 것이 없어. 주어야 할 자에게 하나도  주지 못하는 그 위치.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받지 못하는 그 위치.

이것이 구원을 얻으나 불로 얻은 구원과 같다 하는 부끄러운 영생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믿음이 없으면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예수  믿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나에게 소유적으로  행동적으로 자체적으로 완전 무결의 영원한 것을 손에 들고 나에게 주시려고  원하고 원해서 내 현실 거기에서 서서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이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한 가지 일 모든 된 것은  내버려 두고 앞을 향해서 달음질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바 나의 상을  향하여 다 얻도록 달린다 말했어. 하나님의 손에 내 몫아치 상이 들려 있는데  손에 들려 있는 요것을 다 받도록 하기 위해서 달음질 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유적으로 행동적으로 자체적으로 이 완전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손에  들고 이 완전을 이 현실에서 받아라, 요 현실을 통해서 받아라, 요렇게 들고  원하셔서 계시는 이 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받기 위해서 달음질 친다. 들고, 요  분이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드시 그가 계시는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작으나 크나  이 문제 하나님 찾아야 하겠다. 이 문제 하나님 만나야 하겠다. 크든지 적든지  소유나 행동이나 자체나 어떤 것이든지 인간 찾지 아니하고 제가 단독이 날뛰지  아니하고 어떤 무엇 과학이나 만능이나 무엇, 뭐 사회나 권세나 인간이나 이런  것들 찾지 아니하고 이것은 하나님 찾아야 이루어진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찾아야  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 하는 것처럼 하나님 찾아야 된다 하여 하나님으로 해결  지으려고 하나님 찾는 자에게 모든 것이 완성되고 상 주신다. 모든 것을 승리하고  모든 것을 완성하고 완성했다고 칭찬의 결과가 오기까지 하나님은 알뜰히 다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분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이 하나님을 오늘에 보이지도 않는 이 하나님을 믿는 이 공로가  오늘에는 희미하지마는 보이지 않는 이 분으로 보이는 모든 것보다도 더  신성하고 이 분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아 사는 이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당신의 것을 다 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땅위에서 보이는 모든 것보다 그 분을 크게 여겨 이 분 하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을 의존하고 모든 것을 해결 지으려고 그 분 한 분으로 동하고  정하여 그분의 약속을 따라서 이루려고 하는 이 자가 이 자라면 무궁세계에  하나님과 접하여 하나님 앞에 역적노릇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것  가지고 모든 피조물에게 넉넉히 충만으로 하고서 남음이 있기 때문에 이 자에게  줍니다.

 내가 적은 것 가지고 배신했는데 영원한 것을 주겠느냐? 내가 적은 것으로  충성했기 때문에 큰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맡긴다. 네가 없어질 불의의 재물  가지고도 하나님에게 충성치 안 했는데 누가 영원하고 참된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것이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한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는 깹시다. 그렇게 티끌 속에 파묻혀서 돈 속에 파묻혀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풀의 꽃과 같이 없어지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포부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소망 있는 사람들이요. 소망이 없는 수성에 속한  불택자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안 믿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택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이 소망을 다  가졌소. 이렇기 때문에 어떤 자가 불택자 인가 모르기 때문에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소망 없는 막 살이의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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