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주의-사변론

 

1986. 12. 9. 새벽 (화)

 

본문: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여게 “성령을 좇아 산다”, 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성령의 인도와 육체의 인도가 정반대되는 것을 여게 말씀했고, 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이렇게 서로 대립되고 대적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둘이 대적을 하는 이 대적이 우리 소원하는 이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잘못하면 이 성령의 역사도 육체의 역사도 우리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라.

그 둘이 이렇게 투쟁하는 것이 우리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라 그렇게 보기 쉽습니다.

우리 구원은 성령님이 이루시지 육체는 이루지를 못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구원을 이루시는 그 일을 육체가 방해한다 그말입니다.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하는 것은 둘이 다 대적함으로 둘 다 우리 구원에 방해된다 말이 아니고 육체가 우리 구원을 방해한다 하는 그말입니다.

요것도 구별을 못 해서 잘못 나가면 ‘성령님하고 육체하고 둘이 서로 맞붙어 가지고서 싸우는 그 싸움이 있구나’ 이래서 성령님의 능력과 육체의 능력이 다 동등으로 서로 투쟁할 수 있는 것으로 요렇게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과 육체와 마구 싸우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못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요 육체는 그까짓 거는 아무것도 힘 없는 건데 서로 맞싸울 만한 그런 무슨 싸움이 있다 말 아니고 요 번역은 요래 돼 가지고 있으나 나는 그 원어는 어찌 돼 있는지 모르지마는 아마 원어보다는 요 번역한 것이 더 잘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뜻을 새겨서 번역이 됐으리라 생각 됩니다.

그러나 요 말씀은 성령님이 우리 구원을 이루실라고 애를 쓰시는데 이 육체의 역사가 방해를 한다 그말입니다. 육체의 역사가 방해한다. 서로 같아야 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 둘이, 한쪽 손바닥이 소리 안 나고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난다 하는 거와 같이 둘이 무슨 동등 투쟁이 돼서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여게 보면 그렇지마는 자세히 아래 위를 다 살펴서 보면 성령님이 우리 구원을 이루실라고 역사하시는 데에 요 육체가 방해를 합니다.

육체가 방해하면은 육체가 성령을 대적해 가지고 맞붙어서 이렇게 지금 싸워서 그런 것으로 그렇게 여게 보기 쉬운데 그런 게 아니고 성령님이 우리를 붙들고 이 구원을 이루어 줄라고 역사를 하시는데 요 육체가 우리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데 육체가 방해하는 것은 성령님하고 맞붙어서 서로 대적함으로 방해를 하고 있는가, 요 육체가 성령님과는 마주 붙지를 못하고 우리를 꾀워 가지고 자꾸 꾀워서, 우리를 꾀워서 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도록 그렇게 방해를 해서 우리 구원이 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을 잘 구별해서 알아야 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말이 조금 잘못하면 곡해하기 아주 쉽습니다.

육체가 성령을 마구 대립해서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는 성령에는 근방에 가지도 못하고 대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대적이 되는가? 우리가 그 사이에서 구원 얻을라고, 구원을 얻을라 하고 성령님은 구원을 이루실라고 하는데 이 육체의 역사가 우리를 자꾸 붙들고, 성령하고 둘이 마주 붙는 게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이 성령의 이루시는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그렇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똑똑히 우리가 구별해야 합니다.

또 그러고 육체와 성령이 대립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 이 육체라는 것이 이것이 뭐 나는 원어를 모르는데 육체라는 원어가 싹스라고 그래 합니다. ○목사님, 맞습니까? 싹스라고 하는데 제가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저는 뭐 아무 주석도 보지도 안하고 그저 성경을 누구한테 배우지도 안했고 산골에 있으면서 사람은 일 년 내내 가 봐야 다른 뭐 이렇게 교회에 있는 사람들 만나는 일이 없습니다, 산골짝에 있으니까.

그저 성경 보고 그대로 아는 대로 실행할라고 애를 쓰고, 보고 아는 대로 실행할라고 요렇게 하는 가운데에서 그저 깨달아진 거 고거뿐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그때 이제 차차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래 은혜 있다고 이라면서 사람들이 따르기도 하고 또 배우기도 하고 청하기도 하고 이래서 그때 집사로 있을 때인데 그저 면내에서, 그 면내에서 요 교회에서 혹 가끔 가다 한번 또 어느 동리에서 요래 가지고서 서로 집회를 뭐 몇 사람 모여 가지고 이렇게 집회하고 했었습니다.

이랬는데 그게 차차 차차 퍼져 나와서 저 해석하는 그 깨달음이 일반 모든 교계에서 공통되어 있는 깨달음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아서 그때에 좀 주목의 대상이 됐었습니다. ‘저거 저렇게 틀리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이랬는데, 제가 그때 깨달아 가지고서 이 육체에 대해서 해석한 것과 고려신학고 오니까 그 신학교에서 해석하는 거와 달라서 그때 그것이 들어 마찰이 돼 가지고 거게서 제가 몰리게 됐습니다.

그래서 거게서는 ‘육체는 원어가 싹스라. 이 싹스라는 것은 부패성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원어를 모르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은 이것을 육체로 달리 해석을 해서, 이 몸이 아니고 부패성인데 이 몸으로 해석을 하니 이 해석이 틀렸다.’ 그래 가지고, 뭐 저는 원어를 모르지 또 보면 전부 이 육체라 하는 것의 열매, 육체가 그 나타나는 모든 행동이 전부 죄만 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뭐 술수와” 자꾸 이런 것들, 열다섯 가지를 그 밑에 쭈욱 말해 놓은 것도 전부 죄악입니다.

그러니까 부패성으로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그것이 다 그 결과를 봐서 옳은 해석인데 저는 깨달아 가지고서 한 것이 그것이 ‘이 몸이라, 육체는 바로 우리의 몸이라.’ 그래 거기서 또 몸이라는 그 원어는 쏘마라고 이렇게 돼 가지고 있다고 이래 가지고서 해서 그 신강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여기 ○○○목사님이 그 학생으로 다니는데 제 밑에서 교훈을 받고 해서 그 사람은 원어 공부를 해서 제가 그 사람을 한번 소리를 했습니다. 이거 분명히 아니기는 아닌데 내가 뭘로 변명할 도리도 없고 이러니까 이것을 좀 물어 봐야 되겠다 해 가지고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 하는 그 육체의 원어가 뭐이냐 하면은 그 육체의 원어가 내나 싹스로 이래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 거게 예수님이 “육체가 약하도다” 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 이거 사람들의 말이 아닌데 여게서 보면은 육체가 약하다는 그런 말도 있으니까 그러면 요 부패성이라고 하면 부패성이 약하다고 그렇게 말하면은 예수님은 그라면 부패성이 강해야 좋지 약하면 안 되는가? 그래서 그걸 가지고서 이렇게 말하니까 모두 다 이해를 안 했습니다.

안 해서, 그 말 가지고서 내놨다가 또 두번째 쥐박혔습니다. ‘그거는 그런 게 아니고 그것은 육체가 약하다 말은 그때에 있는 모든 사람들 너희들의 육체가 약해 가지고서 안 된다 이렇게 말한 것이지, 그 베드로가 졸고 이러니까 그래 말한 것이지 예수님 당신의 육체를 말한 것은 아니라.’ 이라니까 분명히 내려보면은 그거는 예수님의 육체를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데도 그래 말하니까 그걸 또 뭣을 증거할 만한 무슨 뚜렷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이러면 육신이 되어서 하는 이것이 이것도 아마 이게 싹스이기 쉬울 것이다. 그래 가지고 인제 그것을 다시 또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그 ○○○ 그때 학생인데 그 원어를 뭐 이리 저리 사전을 찾아서 이래 보고, 그때 아주 초기이니까 잘 몰라서. ‘그것도 싹스입니다.

같은 그 원어입니다.’ 그래서 그때 이제 제가 확고히 잡았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부패성이라고 하면은 예수님도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 하는 말인가?’ 요것을 그때에 말하니까 그만 그때 그것이 말은 조그만하게 말했지마는 그것은 강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때 그만 고신에 있는 그 싹스라는 그 해석이 완전히 뒤비져 버렸습니다. 그래 그만 그 말이 다시는 그 신학교에서 그 말이 나오지를 안했었습니다.

이래서, 이런 것도 알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육체의 소욕은” 하는 이 육체는 이것은 이 육체의 소행은 전부 이 죄악입니다.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이랬으니까 이거 전부 죄악 아닙니까? 죄악인데 이 근거가 어데 있는고 하니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영육을 다 독립성의 존재로 창조를 하시지 아니하셨고 전부 다 피지배의 성질로 그렇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영도 독립 못 합니다. 또 우리의 이 심신도 독립을 못 합니다.

독립을 못 하는데 영은, 이것도 지금 잘 구별 안 돼 가지고 있는데 영은 독립을 못 하면 무엇에게든지 지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며 또 침노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다 이렇게들 생각해서 오늘까지에 세계에 있는 조직신학 가운데에 이 영도 이것도 모든 이 죄나 모든 불의 이런 것들에게 지배를 받을 수 있다 해 가지고서, ‘사람이 그 타락한 후에 타락은 했지마는 다 타락한 것이 아니고 그 영이 다 죽은 게 아니고 그래도 남은 기능이 좀 남아 있어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도덕을 말하고 하는 그것은 곧 영은 하나님의 형상인데 아직까지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지 안하고 남아 있어서 그것이 다 도덕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불택자고 아무리 불신자고 이종교가들도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 남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들어서 그래도 도덕을 말하고 의를 말한다.’ 그렇게들 말하는 그 교리 사상이 많이 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죽은 것이 아니라’ 이래 가지고 에베소 2장에 있는 요 성구와 마찰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을 제가 그때에 고려신학교 와 가지고서, 나는 그런 외계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에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좀 남아 있다.’ 그때 고신에 교리 이념이 그런 것은 아니고 ‘다 모두 이렇게들 말한다’ 그렇게만 말하고 거기 대해서 확실히 판정은 짓지 않는 것을 제가 그때에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나에게 하나 하나 그 연구의 과제가 되고 내 신앙과의 마찰이 속으로 됐었습니다.

이러니까 사람의 영도 죽었으나 그 사람의 영이 그래도 다 죽지 안하고 조그매 그 힘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들어서 이렇게 도덕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영이 기능적으로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그런 학자들이 많고, 또 그 사람의 영도 범죄하고 난 다음에는 마귀가 통치를 한다 하는 그런,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하는 그런 교리의 깨달음은 제가 똑똑히 모릅니다. 널리 공부를 못 했지마는 아마 ○목사님은 뭐 공부를 했으니까 그것이 지금 다 상고를 하고 연구도 했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그 타락한 영은 타락 후에는 악령이 지배하고 지배를 받는다 요렇게 그 깨닫고 있는 것이 온 세계의 공통 교리가 아닌가 그렇게 제가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확실히 그렇다 이렇게 말은 내가 참고를 못 해서 못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 ○목사님 어떻습니까? 사람의 죽은 영, 타락한 후에 사람의 영은 누구의 지배를 받는다고 그렇게 지금 돼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합니까? 누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거기 대해서도 별로이 분명한 말이 없는지? 녜, 거기 대해서 별 말이 없고 거기 대해서 말이 별로 없답니다.

그래서 거기 대해서 확고한, 마귀의 통치를 받는다 안 받는다 하는 것이 그것이 확고히 분별돼 가지고 있지, 판단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게 저는 생각을 하지마는 내가 다 듣지 못하고 상고 못 했기 때문에 거기서 판정적인 말은 못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만 지배받지 다른 것에게는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하는 그것을 제가 지금부터 한 이십여 년 전인가 대구 그 주암산 집회 때에 그 말을 하면서 가슴이 도근도근했습니다. 왜? 요 말이 나가면 또 이 정죄할 것인데, 분명하기는 분명한데 요게 어찌 되나 그래 가지고서 이라다가 내가 고신에 그때 있을 때에는 그런 말을 못 했습니다.

그런 말을 못 하고, 만일 말했다가는 거기서 당장 거석할 터인데 제가 고신에서 쫓겨나온 이후로서 제가 깨달은 교리를 차차 차차 이것을 발표를 하고 자꾸 주장을 하기가 좀 용이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혹 제가 마음에 있지만 발표를 못 하는 그런 것은 너무 내놓으면 엄청나서 이럴 터이니까 이거 똑똑히 알고 이래 거석해야 되지 잘 말을 벌로 못 하고 이러나 그 많이 말하게 됐습니다.

이래서 저는 깨달음이 뭐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은 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서 영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난 형상은 그분의 그 속성 외에는, 본성과 속성 외에는 나타난 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었다.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은 다만 하나님과의 연결이 있을 때에 하나님에게만 지배를 받지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는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조금 고차원의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만 지배받는 건데 타락한 후에 죽었다는 것은,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 사이를 끊어 버린, 죄가 들어서 끊고, 끊으니까 하나님과의 그 영이 연결성이 없어서 하나님에게 피동하는 그 피동이, 피동줄이 끊어져서 피동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락한 영으로 말하면 기능적으로는 아무 존재가 없는 것같이 완전히 죽었다.

그래서 에베소 2장 1절 이하에 “죄와 허물로 죽었다” 하는 그것은 영이 죽은 것을 말하고 영이 죽었기 때문에 그 주격이 죽었으니까 따라서 그 모든 심신의 행위도 죽은 행위한다 하는 그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영은 순전히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데 원동과의 피동의 존재와 그 사이가 끊어지니까 영으로 말하면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없는, 없는 거와 같이 완전히 죽어서 기능의 활동은 타락한 후는 그 영의 작용이나 활동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택자들은 그 영의 작용이나 활동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또 어떤 것이 이용해서 거기 피동되고 이용되지도 안합니다.

그래서, 타락한 그 후의 사람의 영이라는 것은 그것은 무용지물과 같이 무작용의 완전히 그런 존재가 되어졌지 어떤 것에게, 하나님에게 이용당하던 것이 하나님께 이용을 안 당하니까 마귀에게 이용을 당한다. 하나님에게 피동되던 것이 하나님에게 피동된 연결이 끊어졌으니까 어떤 피조물 악령이나 그런 것들에게 피동이 된다 하는 그렇게 생각을 가지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이라는 것은 다시는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도록 돼 가지고 있고 또 그 영은 활동 범위가 어데 있느냐? 어데든지 다니면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그것도 활동 범위가 단지 자기의 그 소유인 심신에게만 활동하지 그 심신 그 무대 벗어나서 활동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영은” 그거 가지고서 사람들이 많이 말하는데 “범죄한 영은” 녜, 범죄한 영은, 영이 범죄했습니다. 영이 범죄한 것은 영이 직접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범죄한 것이 아니고 영이 범죄한 것은 영의 소유가 되어 있는 심신이 범죄했기 때문에 영이 범죄한 영으로서 정죄받은 것은 그 심신의 주격이기 때문에 주격 위치의 그 책임성에서 정죄받아 가지고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영이라 하는 것은 영이 범죄를 직접 한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 어긴 것이 아니고 심신이 어겼기 때문에 그 어긴 것을 주격 위치에서 책임을 져서 범죄한 영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잘못하면 영이 범죄했다 이렇게 하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기를 전부 아마 현재에 내가 아는 대로는 일반적 세계의 조직신학의 교리는 그 영이 직접 범죄했다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 그것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게 영이 직접 범죄했다면은 사람의 영도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마귀에게 지배를 받는다 그런 결론이 나고야 맙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그렇게 깨닫지를 안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 ○목사님이 지금 인간론을 지금 아직까지 말하지 안하고 있으니까 인간 범죄론, 인론을 앞으로 하면은 요런 것을 좀 잘 밝혀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은 독립성이 없는데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만 지배받고 피동되도록 그래 돼 가지고 있고 혼자 독립은 못 하도록 돼 가지고 있고 다른 것에게 또 무슨 지배를 받거나 거게 소속하거나 피동되도록 그래 돼 가지고 있느냐? 영은 그렇게 안 돼 가지고 있고, 영육인데 육은 두 가지에 피동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은 육은 자기의 그 영에게 피동되고 또 영 밖에 악령에게 피동될 수 있도록 그렇게 지음 받아 가지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중생되기 전에는 사람의 그 심신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구와 같이 이래, 나귀를 성령이 이용해서 나귀가 발람에게 교훈한 거와 같이 그렇게 도구로 이용은 당하지마는 하나님이 직접 생리적 그런 지배를 하지를 못 하고 있다가 중생이 되고 난 다음에 성령님이 중생된 영을 통해서 그 심신을 통치하고 관리하게 됐다.

이래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라 하는 것은 심신의 우리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그 지배하게 됐다.

그래서, 타락한 후에는 심신은 영에게 지배를 받다가 영이 하나님과 끊쳐져서 기능적으로는 아무 작용이 없는 존재가 돼 버렸으니까 그 심신을 다스리지도 못하고 또 지도하지도 못하고 능동시키지도 못하고 이거는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왜? 하나님에게 피동된 그 피동을 가지고서 모든 자기 심신에게 이렇게 능동하는 이 일을 하고 있지 하나님과의 끊어져서 이는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죽어서 아무 그 기능이 없는 그게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심신은 통치받을 데가 없고 이러니까, 하나님은 직접 통치하지 안하시고 이 악령이 그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악령의 통치받고, 악령의 통치뿐 아니라 모든 이 피조물 이런 것들 저런 것들에게 다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추우면 추워서 못 견디고, 더우면 더워서 못 견디고, 배고프면 배고파서 못 견디는 이런 것은 다 악령이 아니고 물질에게 모두 피동되어서 이것을 가리켜서 본능이라 그렇게 사람들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영은 하나님에게만 피동되고 피조물에게는 피동되지 안하기 때문에 불택자의 그 타락한 후의 활동도 순전히 이 심신의 활동이지 그 영이 활동에 가담하지는 안하고 영은 완전히 죽은 시체와 같이 이라면서 죽은 영 시체되어 있는 영하고 이 심신하고 둘이 합한 것이 사람이요, 중생되지 안한 사람이요 중생된 사람은 산 영과 이제 그 심신이 합해 가지고서 영육으로 사람이라.

그렇기 때문에 중생된 후의 사람과 중생된 이전의 사람이 다르다 요렇게 우리는 구별을 해야 되겠습니다.

또 영은 범위가, 영이, 우리의 심신의 활동 범위는 자기는 뭐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이렇게 범람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은 꼭 자기 심신에 자기 육에게만 활동하지 육 범위 밖에서는 절대 활동하지 못합니다.

요것도 지금 아직까지 미상한 일로서 되어 있으니 그것은 살펴보면은 영은 자기 심신에만 지배하지 심신 외에 딴거는 아무것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것도 꼭 절대 국한되어 있고 또 영은 위로도 절대 제한돼 있고 아래로도 제한되어 있고 요 우리의 육이라 하는 것은 벌써 거게서 영에게도 지배를 받을 수 있고 마귀에게도 지배를 받을 수 있고 모든, 얼음에도 지배받아. 얼음에도 그 얼음을 닥치니까 차와서 못 견디는 것은 얼음에게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또 물질이 없어 배가 고프면 고거는 물질인 고기덩어리에게 지배받아서 배가 고파서 그때는 뭐 무슨 일이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독립을 할 수 없도록 이렇게 하나님께 지음받은 것은 하나님에게만 절대 피동되기를 어데까지 피동되느냐?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완전 피동받으면은 피조물이지마는 창조주와 꼭 같은 그런 위치에서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도록까지 그렇게 지극히 고귀한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피동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타락해 가지고 엉뚱한 것에게 피동되는 이런 작용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게 육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육체는 바로 우리의 심신의 육입니다.

심신의 고기덩어리입니다. 심신의 고기덩어리인데 왜 그러면 심신의 고기덩어리면 이것이 순전히 나타나는 열매로 말하면 죄악으로만 나타나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심신이 악령의 지배를 받아서 그때부터 이렇게 모든 하는 행동의 결과는 다 마귀의 결과로 이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육체는 자체로 말하면은 깨끗한 심신이요, 깨끗한 심신이요 또 그 행동으로 말하면 그것이 요 심신이 마귀의 지배를 받아 있기 때문에 순전히 행동은 마귀 행동이라, 요래서 그 육체라 하는 것은 마귀에게 완전 통치를 받고 있는 그 심신이라, 요것이 요 타락한 육체라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 심신이 마귀에게 지배받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지배받을 때는 요것은 의의 병기로서 요것은 깨끗한 육체가 된다.

그래서 이 심신만은 악령을 탈색하듯이 악령을 탈색시켜 버리면은 요 심신은 완전 요거 죄가 없는 깨끗한, 요런 말하자면 초목과 같이, 초목과 같이 바위돌과 같이 요렇게 깨끗해지고 죄가 없는 것이다. 또 요것이 중생된 영에게 지배받는, 다시 말하면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그 영에게 지배를 받으면은 그 심신은 대속적이요 성령적이요 진리적이다.

그래서,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거는 ‘말씀이 싹스가 되어’ 하는 그것은 거게는 예수님의 그 인성을 말한 것인데 인성이 하나님에게 지배받을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할 만치 그렇게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됐다, 그러기 때문에 요 육체라 하는 것은, 여게 “육체의 생각” 하는 것은 심신이 마귀에게 지배받은 그것을 가리켜서 말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의 심신은 순전히 악령이 지배하는 그것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중생된 이후로부터는 우리 기독자들은 이 심신이 두 가지 지배를 받게 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뭐이냐? 중생된 영의 지배도 받고 또 악령의 지배도 받게 된다.

그러면 악령의 지배받을 때에 그것은 그 소행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곧 더러운 것과” 이렇게 될 때에는 우리의 심신이 악령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악령화되어서 완전히 죄의 병기가 되고, 죄의 도구가 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서 하나님이 피와 성령과 진리가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같이 일해 가지고서 우리의 이 심신을 통치할 때는 우리는 의의 병기가 된다.

이래서, 요것이 좀 알기가 어려운 요 교리가 돼 있는 것을 그것을 잘 근거 잡아서 우리가 확고하게 잡아야 됩니다. 요것을 확고하게 잡지 안하면 중간에 들어갈 때에는 그것이 뭐 이리 말하나 저리 말하나 같은 거 같지마는 궁극적인 교리에 파고 들어가면 완전히 탈선돼서 그만 딴거 돼 버리고 맙니다.

오늘 기독교가 이렇게 흐리고 있는 것은 이것은 뭐이냐? 근본을 지금 찾지 못해서 흐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내가 말 들으니까 어떤 여기 고려신학교에서 지금 그런 뭐 논란이 나 있다고 하는데 그 영감에 대해서 말이 나서 어떤 그 하나 신학 박사는 말하기를 ‘성령 세례받는 그 성령과 또 성령으로 중생했다는 그 성령과 그 성령이 다르다’ 이렇게 말하고 또 고려신학교 거기 또 어떤 교수 목사님은 ‘그 성령은 한 성령이다.’ 다른 성령이다 한 성령이다 이래 가지고서 거게서 대단히 많은 지금 뭐 논제가 돼 가지고 있다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논문까지 났다는데 눈문이 두 분이 다 낸 논문이 나왔다고서 그 논문을 누가 좀 읽어 본다고 그걸 구했다 하는데 그걸 나는 한번도 보지도 안했고 뭐 볼 필요도 없고 이런데, 성령은 하나라 하는 말은 하나라는 말이 맞습니다. 하나입니다. 영감은 또 둘이라 하면 영감은 또 둘이라 말이 맞습니다. 영감은, 성령은 한 성령인데 한 성령이 아니고 두 성령이라는 그것은 만일 누가 그래 말했는지 모르지마는 두 성령이라면 그거 틀렸어. 한 성령입니다.

한 성령인데 다만 영감은 각각 다릅니다. 중생시키는 그 영감은 그것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없는 존재로 있을 때에 역사한 것이 그것이 중생 영감입니다.

중생 영감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와 가지고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실상적으로 역사하신 제일 초보가 그것이 중생 역사입니다. 중생되고 난 자들에게 이제 “성령 세례 받아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그전에 사도행전 1장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허락하심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너희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는 그 성구에 대해서 오랫 동안 말하고 이 성구가 난제고 아주 어렵고 이 깊고 이러니까 이렇다고 그때 그것을 내가 며칠 동안 했지마는 이 사람들이 뭐 귀넘어 들으니까 거게 대해서 별 생각을 안 가지고 들으니까, 그러니 부득이 말할 때도 이런 난제가 있다 자꾸 이런 말 나가면 인제, 왜? 내가 죽고 없어져 버리고 난 다음에는 왕창 그래 버리면 그것 또 넘어가 버리고 또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자꾸 다져서 말합니다.

이런 것도 이래 말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자꾸 미리 알아서 이렇다는 그런 신앙 상식을 가지고 이래 들으면서 오늘 비판하고 견고히 잡아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나가면 헛일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뭐 예루살렘 뭐 장사하러 딴데 가지 말라 말 아니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말은 그때 뭐 때문에 그러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난 뒤입니다. 난 뒤이기 때문에 그때 예수님을 죽였고 이차적으로 부활했다 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로마 병정들이 지키기도 했고 그다음에 많은 물의가 나서 이거 아무래도 예수교를 막 전멸을 시켜야 되지 이거 냅뒀다가는 안 된다고서 모든 정권과 모든 종교가들이 단합해 가지고서, 유대교 모두가 다 바리새교 전체가 단합을 해 가지고 하던,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라고 하는 그 일이 한 집에도 가득 찼고 뭐 꽉 찼기 때문에 암만 공산주의 속에라도 그렇츰 어려운 박해 속에 있는 때는 없는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서 다 갔습니다.

사도들과 또 거게 참 유명한 유력한 사람들만 있었지 나머지기는 다 그때 죽기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다 떠나갔습니다. 떠나가고 그때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남아 있는 사람은 일백이십 명이 또 한테 뭉쳐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그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인해서, 사활의 대속을 인해서 이 사활의 대속을 가진 사람, 입은 사람, 이 사활의 대속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안하고 그 죽음 속에 배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일백이십 명이 기도하던 그 기도는, 그 기도단은 그 죽음 속에 있는데, 죽음 속에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거게서 견뎌 배겼고 그뭐 담대히 그래 됐던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생시에, 주일을 지키라. 내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고 난 다음에는 주일을 지켜야 된다는 걸 똑똑히 명시해서 그들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주일을 지켜야 될 줄 알고, 부활했다는 그런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전달 듣고 주일을 지켜야 되겠다고 모였지마는 그 두려워서 무서워서, 두려워서 문을 닫고 낮에도 모이지도 못하고 다 깜깜하고 난 다음에 어데 구석에 가 가지고서 숨어서 그래 모였다 하는 것을 그것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이랬는데, 예수님을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만나고 나서 예수님을 처음에 만날 때에 이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말했고 그때에 그들은 “너희들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지리라”하는 그 말씀을 했습니다.

그때에 그 사도들과 거게 있는 은혜받은 사람들은 중생이 됐습니다. 그때 중생이 되고, 중생이 돼서 예수님의 사활의 이 일곱 가지 대속이 그들의 것이 돼서 그들이 일곱 가지 대속을 믿을 때에 그 속에 들어오신 것이 성령이 들어오셔 가지고서 성령이 그들을 중생시켰습니다. 그러면 이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성령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대속의 공로를 앞잡이를 세우고 대속의 공로를 통해서 그들에게 들어와 가지고서 중생됐기 때문에 중생되고 또 중생된 자들에게 사활의 대속이 그 속에서 역사를 하니까 그 죽음 속에서도 그들이 도망치지 안하고 일백이십 명이 모여 가지고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그때에 이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있었습니다. 성령 강림이 있어서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는 그 성령은 오순절 성령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중생 후에 오순절 성령 받아서 그들이 성령 세례 받았습니다.

성령 세례라 말은 성령이 임해서 성령의, 예수님의 대속을 입을 때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할 때에 예수님의 사활을 자기 자체에서 기념할 수 있다 그말입니다. “세례는 물로 씻어 그런 게 아니고, 물로 몸을 씻어 더러운 거 씻는 게 아니고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하는 그 말로 거게 발표했는데 그게 뭐이냐 하면은 곧 성령 세례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인해서 예수님과 함께 자기가 죽었고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은 자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함께 죽은 것이 됐고, 죽은 계산이라 말입니다.

죽은 것이 됐고, 그러나 죽지 안하고 있습니다. 죽은, 법적으로 죽은 것이 됐고 계산적으로 죽은 계산이 됐고 또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에게 바쳐서 예수님의 것이 됐기 때문에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은 내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 됐고 주님의 대속에 팔린 나는 주님의 것이 됐기 때문에 이제 이것은 주님의 것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죽고 예수님으로 다시 사는 그 일을 하는 것이 그것이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세례 주는 것이요 성령 세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내용에 영감 역사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기록 영감 있고, 중생 영감 있고, 또 우리에게 역사 영감 있고, 역사 영감을 분리해서 힘, 이 모든 힘이라 하는 건 똘똘 몽쳐서 앞으로 하나가 되는 그때가 바로 주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러기에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이 어린 양 운동, 어린 양에 속한 그 외에는 전부가 다 하나가 돼 가지고서 어린 양으로 더불어 대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 뿔이라 하는 그것을 달리 해석하는, 내가 요새 무슨 뭐 어데서 그런 운동이 있다고 말하더라? 요새 무슨 운동, 내가 그거 언제 새벽기도 때 말했는데.

열 뿔에 대한 해석을 그것을 잘못해서 이것을 봐서 이것이 틀렸다 하는 걸 내가 누구한테 말했는데 누가 아무 기억 없소? 그건, 시대적으로 했는데 그거 누구지? 옳지 인제 알았어.

○○○목사님이라고 대구에 계셨던 목사님인데 그분이 이제는 내가, 오랫 동안 그때 있다가서 말했는데 그때 그분이 아주 유력했습니다. 유명하고 했었는데 지금도 아마 대구에 있는갑습디다. 내가 그래서 그 ○○○목사님이라고 그분이 그전에 유명하고 거창읍에 와서 한번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집회할 때에 제가 그때에 같이 집회를 참석했는데 그 집회를 참석하고 난 다음에 좀 이상하다 하는 것은 느꼈으나 그래도 확고히 거석하지는 못했어도 그 뒤에 자꾸 제가 거기 대해서 좀 생각을 해서 그래서 그만 그분은 어떤 분이라 하고서 저는 거게 대해서는 아주 담을 딱 쌓아 버리고 말았었습니다.

이랬는데 얼마 전에 ○○○목사님이 어데 가서 설교한다고 막 은혜가 있다 이래 가지고서 테이프를 가져 왔어요. 테이프를 가져 와 가지고서 이거 한번 들어 보라고 어떤 분이 이복순 집사님이 그 테이프를 가져왔는데 그 구역 식구 사람이 어데 와 가져왔던 모양이라. 그거 누가 가져왔다 했지? 그거 여기 가져온 사람 없어요? ○○○목사님 테이프. 옳지 그래. ○○○집사님. 인제 기억나는구만.

○○○집사님이 가져왔었는데 그래 가지고서 그뭐 ○○○집사님은 그 좀 마음에 그래서 저거 그 테이프를 가져왔어요, 은혜받을라고 하는 것보다도.

그래 그걸 가져 와서 보니까 요새 뭐 많이 판을 치고 다닌답니다. 서울 양사방 모두 판을 치고 다니는데 그분이 나는 어떤 분인지 물으니 나이가 나보다 나이가 적고 이래서,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누구한테 물으면서, ○○○장로님한테도 물으면서 ‘그분이 연세가 어찌 됐습니까?’ 하니까 ‘아마 한상동 목사님이니 오종덕 목사님이니 그 같은 때이니까 지금 한 구십 안 됐겠습니까?’ 이렇게 말해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있는데 나보다 나이가 적어.

이래서, ‘그분 아닌가보다’ 그래 가지고 할 수 없어 그 테이프를 유심히 들었습니다. 왜? 그런 거 이래 자꾸 판치고 다니면 그 뭐인고 좀 알아야 되겠다 해서, 이러니까 주장으로 요한계시록 많이 말하고 다니엘서를 많이 말하고 이렇게 말세론을 가지고서 많이 말합디다.

말하는데 그분의 그 해석하는 것이 전부 예언서를 시대적으로 이렇게 국한을 시켜서 다 역사적으로 이래 해석을 합니다. 요것은 요 역사에 다 들어맞았고 지나가 버렸고 요것은 요 지역에서 들어맞고 지나갔고 요 사건에서 다 끝나 버렸고, 요라니까 사람들이 그 호기심을 가진 인간들은 거게 다 끌려 가지고서 다 절단납니다. 호기심 가진 인간들은.

그렇게 말하니까 뭐 좋거든. 뭐 요거는 아무 데 뭣이고 불란서 뭣이고 독일 뭣이고 이래 뭐 자꾸 이래 맞추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과거사만 딱딱 맞춰서 그래 말하고 미래사는 그것 다 신용 얻어 가지고 난 다음에는 미래사를 이래 쭉 말하는데 미래사 말하는 것을 한 십 년쯤 두고서 그걸 살펴보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지혜있는 사람들은 과거만 말하고 미래사는 말하지 안합니다. 그러니 과거사 말해 가지고 인기를 끌어 가지고서 이렇게 합니다.

이래서, ‘이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래 인제 아마 어째 보면 ○○○목사님 같은 데 그분인지 뭐인지 모른다 이래 가지고서 그것을 알아 봤습니다. ○○목사님한테 전화를 해서 알아 보고 또 ○○○장로님에게 알아 보고 또 이래 가지고 나중에 뭐 ○○목사님이 그 제자에게 알아 보고 이래 하니까 과연 그 연세가 칠십둘이라든가 이래서 내나 내가 아는 대로의 그분입니다.

미국으로 인제, 미국 가 가지고, 여기서 대구에서 신학을 하다가 그게 신학교가 안 되고 또 교회도 목회도 잘 못 하고 이래서 이제 그만 두고서 미국으로 그 자제분이 있어서 미국 가 가지고서 거게서 시민권 얻었는가 영주권 얻었는지? 오래 됐다 하니까 시민권 얻었는지? 그래 가지고서 거게 시민권을 두고 영주권을 뒀는지 두고 이제 여기 나와 가지고서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이래 거석하면 어데 판을 치면 또 인제 사례도 또 미국서 왔기 때문에 톡톡히 주고 이래 가지고 가고 또 가서 또 거기 놓고 와 가지고 또 이래 하고 이런데 이거 좀 그런 데까지도 좀 눈이 밝아서 넓은 면을 좀 판단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그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분이 요한계시 17장에 해석이 나하고 해석은 영 다릅니다. 거게 음녀는 누구를 가리켜 말하느냐 하면은 곧 현재 미국을 가리켜서 음녀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게 열 뿔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게 땅위에 있는 모든 힘이라는 것은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서 이제 전부는 한 덩어리 되고 진짜 예수 믿는 사람 진실한 사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진실한 사람, 진실한 사람은 성경대로의 지식, 성경대로의 행위, 성경대로의 사람이 되어 있는 그 사람 외에는 다 대적이 됩니다. 대적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 외에는 다 대적이 되고 그 사람 외에는 전체가 다 하나가 되어지는 이런 세대가 올 터이니까 우리가 어떠한 사람으로서 무장을 해야 이런 세대를 이겨서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그 이길 것인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예수님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기실 것이요 빼심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 중에는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진실이 없으면 못 이깁니다.

진실은, 진실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 외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그 외에는 다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자들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자기 것 돼 버렸고 자기는 예수님의 것 돼 버렸고 예수님의 것으로 되어 있는 대속 입은 자가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 그 외에는 진실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좀 그다음에 말할라다가 시간 많이가서 요다음에 시간 있으면은 말씀을 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요 성경대로 바로 해야 되지 이거 무슨 목회하면서 자꾸 열변만 토하면 그거 될 줄 알아도 어리석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나니” 요거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말로만 하는, 어리석어서, 어리석어서 이 과학에도 막 끌려 가지고서 사람들이 다 그 사람 돼 버리고 이 모든 이종교에도 다 달콤한 말에 끌려 가지고서, 회회교 같은 것은 세계에 그 회회교 교도가 제일 많다고 말합니다. 달콤한 말에 그러나 거기 생명은 없는 거짓 도입니다. 이런데도 그리 끌려가는데 사람을 끄는 거야 얼마든지 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끄는 게 문제가 아니오. 사람 끄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 교인들 알아 주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게 문제라. 요 자체들이 사상이 틀리니까 뭐이 됩니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요 사람이 돼야 이제 그다음에 “내가 너희 가운데에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것 만들라 하는 데에서 인간이 약한 것도 알고 비겁한 것도 알고 또 두려움도 모든 사람이 다 두렵고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지 요 외에는 다 제대로는 다 잘났습니다. 잘났기 때문에 제대로는 담대하요.

뭐 우리 총공회서도 뭐 그 오기로 말하면 지금 한 주먹으로 온 총공회원들 다 때려 뭉칠 만한 그런 지금 용기 가진 사람도 많이 있어. 그게 소용이 없어.

그러나 실상 무슨 일 닥치면은 간은 콩쪼가리가 아니라 쌀동가리만도 못합니다.

외나 거석하면 쌀동가리만도 못해. 그러나 그게 헛된 용기 그건 다 마귀의 담력이고 이런데, 세상적이요 마귀적이요 다 정욕적이지 그거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요것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요새는 또 지금 그런 말이 자꾸 내게는 들려 와요. 또 나는 그걸 처음 들은 말인데, 사변론이라, 사변론이라 사변주의라, 사변론이라 사변주의라는 그런 그 이단이 있다 그런 말을 듣고서 백 목사를 사변론이라 사변주의라 그렇게 말한다는 사람을 약간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그 사람이 와서 말하기 때문에 ‘사변론 사변주의를 말하더냐?’ 이라니까 `아이구 목사님도 그거 알고 계십니까?’ ‘나는 처음 들었어. 처음 들어도 그 사람들을 알면 그 말을 다 알 수가 있어.’ 사변론이라는 것은 생각 사 말 변자 변호사라 하는 사변론, 변증이라는 변자 아마 그걸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 생각을 말한다. 하나님의 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말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해석하고 깨달은 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면은 다른 사람과 대립돼도 성경적인 깨달음을 말한다고 하면은 그러면 그 사변주의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사변으로, 그 사람 생각으로 말하는데 생각으로 말한 것이 성경하고 딱 들어맞으면 그 생각한 그 사람이 뭐입니까? 마귀요 하나님이요? 마귀요 하나님이요? 그 사람이 생각 가지고 말한 게 하나님의 생각과 똑 맞으면 그 하나님이지 뭐. 사람이요? 그런 어리석은, 어짜든지 이래 가지고 저래 가지고 꾸 웅쳐 맬라고서, ○○목사님도 그전에 무엇을 무슨 주의라 하더라? 무슨 주의? 어? 어? 뭐라 하노? 영지주의 그거 아니고 여기 다 일반 이 학자들은 다 알고 있어. 그거 내가 그거 이름을 잊었어. 무슨 뭐 예를 들면은 펠라기우스주의 그런 거 모양으로 그거 다 무슨, 무슨 주의라고 또 한창 떠들어 댔어요. 어? 노섹트주의. 노섹트주의라고 또 떠들어 댔어요. 얼토당토 근방에도 가지도 안한, 그 쪼그매 뭐, 신학 술어 하나만 알면 그래 가지고서 떠들어 쌓으니 다 자살 행위만 자꾸 하고 있다 말이오. 그러면 아는 게 다른 사람 죽이고 저 죽이고 다 죽어요.

이래서, 내가 ○○○목사님에게 이 양성원에서 강의할 때에 제일 처음에 이거 좀 알아야 되겠으니까 ‘모두 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신학에 그 유명한 인물들을 다, 그 인물들 이름을, 인물들을 소개해 주시는 것을 좀 해 주십시오.

인물, 이런 모든, 모든 신학자의, 이름 있는 그런 신학자들 그 이름을 좀 가르쳐 주시고 그다음에는 신학에 그거 쓰고 있는 전문 단어 그거 전문 술어를 좀 말해 주이소.’ 그거 둘만 배우면 다 신학자 노릇 다 할 수 있어요.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그런 거 몰라 놓으면 인제 ‘무슨 소리인가?' 얼떨떨할 거라 말이지. 그래서 그걸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 내가 요청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단은, 이단은 그거 하나님이 내놓은 것입니다. 이단이 나와야 정통이 드러나고 또 이단이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참 올바른 것을 다 드러냅니다.

이래서 뭐 이런 모두 알미니안주의니 뭐 또 뭐 루터주의니 또 칼빈주의니 이런 것도 아주 그걸 똑똑히 말하면은, 삐뚤어진 것은, 삐뚤어진 것이 옳은 것을 해합니까 삐뚤어진 것은 옳은 것을 위해서 있습니까? 삐뚤어진 것이 옳은 것을 해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삐뚤어진 것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이겁니다, 이거요.

이래서, 알미니안주의라든지 루터주의라든지 하는 그런 것은 이 칼빈주의를 위해서 있소. 그것 때문에 칼빈주의가 뚜렷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선교회

그런고로 이 뭐 자꾸 말세에 이런 것들이 자꾸 일어나고 또 우리 교회서는 한참 판을 한번 쳤습니다.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라고, 나는 냉장고에서 뭐 사흘 동안 있었다더나 냉장고에 들어 가지고서 이 냉동실에 저 시체실 냉동실 아닙니까? 얼지 안해요? 거기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또 나와 가지고 뭐 말한다고 이래 가지고 그 테이프를 내가 가져오라 해서 나한테도 가져왔어요.

 

또 죽어서 무덤, 뭐 죽어 가지고서 얼마를 있던 사람이 나왔다고 죽은 송장이 일어나 가지고 말한다고 이래 가지고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이래 가지고 마구 판을 칩니다. 이래 놓으니까 그것도 냅두면 다 죽어 버려, 그만. 그것도 냅두면 거게 안 죽고 살 사람이 우리 서부교회도 몇 사람 안 돼. 그렇츰 가르쳐도 옳은 말은 안 들리요. 땅에 속한 말은 잘 들리지마는 하늘에 속한 말은 잘 들려지지를 안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늘에 속한 말씀을 하지마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라 하다가 마지막에 죽이지 안했습니까? 그렇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알고 마귀가 그렇게 세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조심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돼요.

 

우리 어제 장로 투표할 때 내가 설교를 어떤 설교 했느냐 하면은 민수기 16장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는 뭐이냐 하면은 모세하고 아론하고 한 편 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또 인제 그 사람들하고 이 두 편으로 이래 했는데 이래 가지고서 그 한 것이 거기 잠깐 나오고 있어요.

 

이제 그것을 읽어서 말하기를 이렇게 되어지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우리 교회에 장로들은 이래 두 편이 돼 가지고서 싸우는 이 한 편은 멸망하고 한 편은 구원 얻는 이런 자리에 있지 말고, 이 일곱 교회 가운데 한 교회만 하나지 여섯 교회는 둘이기 때문에 지상 교회는 이래 두 편 되는 것이 필연성이다, 이거는.

필연성이기 때문에 이래 되나마 내가 이 성구를 보고 향하는 것은 이래 생각하다가 내편 네편 생각지 말고 어느 말이, 네가 암만 동편에 섰을지라도 동편이 옳으나 서편이 옳으나 봐서 서편이 옳거들랑은 아예 이제까지 인정 사정 다 약속 다 싹 끊어 버리고 옳은 편으로 돌아서라.

그러기 때문에 옳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그른 것을 다 뭐 혈육이고 친척이고 뭐 부자간이고 친구간이고 다 삐뚤어진 거는 싹 끊어 버리고 옳은 데로 돌아서는 이것을 재빨리 재빨리 너희들이, 깨달아 주실 때에 옳은 데로 돌아서는 걸 네가 재빨리 해야 되지 그거 뭐 이런 정실 저런 정실에 걸려 가지고서 또 사람이 한번 약속한 거그 썩은 약속 그까짓 거 했으면, ‘사람이 그래도 도리가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이 한번 작정했는데 그럴 수가 있나?’ 그따위 썩은 마귀 인격 치워 버리고 빨리 재빨리 옳은 데로 돌아서서 너희들이 멸망을 피하라 하는 그런 뜻으로서 장로 장립 때 설교를 그 설교하고 나중에 선거할 때는 뭐 다른 거는 하지도 안하고 그래 선거를 했습니다.

 

선거를 해서 세 사람이 당선되고 일이삼만 그래 하고 나머지기 다섯 사람인데 다섯 사람도 다 전부 삼분지 이로 하면 합격될 자격이 그게 되어 있지마는, 삼분지 이입니까, 점수가? 얼마입니까? 장로 투표는 몇분지 얼마가 돼야 됩니까? 반수 이상이 돼야 됩니까 삼분지 이가 돼야 됩니까? 그것도 그런 건 좀 젊은 사람들 그 머리 안에 좀 넣어 놔요. , 삼분지 이. 삼분지 이가 돼야 되는데 그래 우리 교회서는 세 사람만 그래 일이삼등만 하고 나머지기 안 하기로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이단이 많이 들어오니까 이단이 와야 진리가 나옵니다. 이단이 나와서 하나 이단이라하면은 그 진리가 진리 같으면 아주 진리가 바로 솟아오르고 또 이단이 됐으면은 거기 그만 삼켜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어데까지 가도 진리라 하는 것은 영원히 가도 그 꺾어짐이 없고 자꾸 바로 일어서야 돼지는 것이고 성경에 바로 해석된 것은 성경을 들이대, 모든 성경을 들이댈수록이 더 옳고 더 바르고 더 곧고 더 참되고 더 돋아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이단이 많은 때에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굳게 잡지 안하면 언제 마귀 밥이 될란지 모릅니다. 그거 암만 제 혼자 내가 열심히열심 있는 그까짓 거는 소용 없어.

제가 그때에 그런 말을, 지금은 많이 안 합니다마는 고신에 있을 때에는 제가 그때 한창 서로 나뉘어지고 할 때 그런 말을 제가 많이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기가 뭐 뛰기를 한 길 뛰어오르고 아주 그게 힘이 굉장히 많다, 아주 강건하다 할지라도 이놈 그물을 널리 푹 싸 버리면 그물 안에서도 저는 저거 세계인 줄 알고 얼마든지 뛰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물이 이래 떡 싸이면서 할 때는 나중에 가서 자기는 나중에 가 잡혀 올라가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눈을 널리 뜨고서 그물을 봐라. 그물을 봐서 크게, 뭐 사상이라 이랄 때에 그물을 널리 봐야 돼. 그때 제가 무슨 때 그런 말 했느냐 하면은 이 고신에 있을 때에 ○○에 그때 가입할라 하고서 ○○를 그때 아주 정통으로 이래 가지고서 굉장히 말했습니다. ○○가 정통이라 한 그것은 지금 고려신학교에 있는 ○○○목사님이 그것을 많이 주장을 하고서 아주 그 사람 이래 가지고 뭐 정통편에 섰다고서 이래 가지고서 많이 주장하고 했는데 그걸 그 볼 때에 조금만 널리 보면은 사상적으로 조금 정치성이 띄어 가지고 있어서 좀 염려를 하고 우리는 주저를 했었습니다.

 

주저를 했는데 그때 그걸 반대하고서 그 사상을 반대한 그런 사람들은 한부선 목사님이 거기 대해서 반대를 했고 반대한 사람들은 그때 제가 알기에는 별로이 없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그때 한상동 목사님이 ○○에 갈라 하는 것을 모두 반대를 했고 거기서 박사 학위 얻어 가지고서 오시고 난 다음에 그말 듣고서 하도 기가 차서 내가, 오시던 길로 내가 바로 갔습니다. 그말 듣고 나서 바로 가 가지고서 한상동 목사님하고 나하고 둘이 있으면서 목사님 우리가 지금 시작한 것이 영감과 진리 요것만 가지고 시작했는데 이 외에 뭐 그게 뭐 학위가 무슨 필요 있습니까? 자꾸 올라갈라고 국제 무대에 나서서 어떻게 ○○의 이거 학위를 받아 가지고 왔습니까?’ 참 그때 오래 됐습니다. 옛날 얘기요.

이라니까 한상동 목사님이 그래 나한테 손을 잡으면서 형님, 나도 그걸 안 받을라고 이랬는데 어째 그래 됐습니다. 행사만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어렵지 쉽겠습니까?' 그라고 서로 나뉘었습니다. 나뉘었는데 그 말 하는 그게 또 그런 말 한다하는 그 얘기를 하니까 그 밑에 사람들이 그래요?’ 이렇게 하지 안하고서, 고거 때문에 내가 미움받은 거 중에 또 하나 더 또 미움받았습니다. ‘뭐 학위받은 게 뭐 나빠서 그럴까보냐?’고 이래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그 날은 그때 한상동 목사님하고 나하고 이렇게 됐었는데 그만 그다음에는 그만 이렇게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거 때문에도.

제가 그때 고독해 가지고 아무도 나를 안수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없었었는데, 안 해 줄라 했는데 그 ○○노회가 그때 보류노회로 돼 가지고 있으면서 나와 하나가 좀 돼 가지고 나와서 ○○노회에 내가 그때에 가입을 해 가지고 장립을 받을라고 ○○노회에 가입을 신청했습니다.

 

○○노회 가입 신청할 때 그때 같이 간 사람 여기 있습니까? 간 사람들 더러 있습니까? ○○노회 내가 가입해 가지고 장립 받을라고 할 때에 그때 같이 간 교인들 여기 더러 있었는데. 없습니까, 아무도? ? 간 사람 아무도 없어? 그때 많이 갔는데, 열 몇인가 갔는데? 이러니까 다 이거 그만 귀신이 들어서 망각성을 자꾸 이래 주니까 잊어버려. 옳은 것은, 외나 참 보배는 잊어버리요, 큰 거는.

 

그래 가 가지고서 가입 청원서를 했는데 나중에 그 회의 진행하는 데 보니까 ○○에 가입을 할라고 그때 ○○ 시찰회에서 ○○와 하나가 돼 가지고 있는데 그래 ○○에 가입을 할라고 ○○○목사님이 그때 그 회장인가 됐는데, 보류노회 노회장인가 됐는데 거게서도 ○○에 가입을 할라고서 그때 다 결의가 다 됩디다.

 

이래서, 거게서 내가 ○○에 가입하면 나는 이 ○○에 가입한 이 노회에는 내가 가입할 수가 없다.’ 그래 가지고서 빨리 그때 철회 청원서를 써 가지고서, 제가 빨리 나가서 철회 청원서를 써 가지고서 ○○에 가입하기 때문에 나는 이거 이 보류노회에는 가입할 수가 없다.’ 그래 가지고,보류노회는 고신에 있는 노회인데 고신과 정치를 같이 하지 안하고 찬성하지 안하고 우리는 지금 보류하고 있겠다 해 가지고 그래 되어진 것이 보류노회입니다. 보류노회가 그때 고신 노회 가운데에서 자기네들 그때에 좀 사상이 맞지 않는다고 해 가지고서 그때 좀 깨끗하게 하겠다고 해 가지고서 한 것이 보류노회였습니다. 이런 건 역사 모르면 어느 구석에 삼킬란지 모릅니다.

 

그 철회 청원서를 내니까 그들은 좋다 말입니다. 이래 백 조사가 들어오면 이거 굉장히 이거 큰 문제가 일어나고 우리 맘대로 못 하고 지금 이 까다로울 건데 이거 잘됐다 싶어서, 그라니까 그거 그만 자기네들이 의논해 가지고서 그러면 청원한 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이래서, 내가 그때 요청을 했습니다. ‘보류노회에서 내가 가입 청원해서 자기네들이 가입 허락을 했으니까, 가입 허락했으니까 나도 가입은 되기는 됐다. 됐는데 자기네들이 여기 ○○ 보류노회에 노회 회의록에다가 백영희 조사가 여게 가입 청원을 해서 가입 청원에 허락이 됐으나 ○○에 이 노회가 가입할라고 하기 때문에 다시 가입한 것을 철회해 달라 하는 철회 청원서가 와서 이제 철회한다 그것을 노회의 회의록에 기록하면 내가 여기서 탈퇴를 하겠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거 내가, 이 사람들이 모두 망각성이, 산 사람이 증거가 있어야, 우리가 그때 거기 갔다가 내가, 여관에 나와 가지고, 몇이 나와 가지고서, 같이 여기 서부교회 간 사람 데리고 나와 가지고 그걸 써서, ○○○권사님 거기 안 갔어요? 왜 손 안 듭니까, 그라면? 주를 위해서, 십자가가 뭐이야? 주를 위해서 생명 버려? 주를 위해서, 진리가 주님이오. 주님하고 진리하고는 둘이 아닙니다. 주님이 진리요 진리가 주님입니다. 진리 운동 위해서 자기에게 꼭 명예가 거석해질 상바르면 자기 위신이 거석해질 상바르면 탁 꺾어 버려. 그까짓 게 무슨 순교? 어림도 없습니다! 순교는 그런 자를 받지 않습니다!

 

이게 백 목사 제 자랑 아니오. 이거 진리 자랑이오. 주님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거 아니면 다 모둘때기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서 그라니까 그 사람들이 뭐 좋아서 , 그래 하지요.’ `그러면 그래 기록한 것을 나에게, 기록한 것을 여게 노회 석상에서 회의록을 읽어 주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내 보내기를 좋아했는데 그라니까 뭐 뭐이든지 그때 요청하면 다 받는다 말이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뭐 청구하면 주듯이.

그래 그라니까 회의록에 기록해 가지고서 내용으로 이래 백영희 조사가 우리 보류노회에 가입 청원을 해서 허락을 했다가 ○○에 가입을 하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서 이제 가입을 다시 탈퇴해서 철회 청원서를 냈기 때문에 우리가 이와같이 지금 탈퇴를 허락하고 철회해 줍니다.’ 그것을 똑똑히 명문으로 써라 해 가지고 명문 써 가지고 그걸 읽었습니다. 고거 여럿이 있는데 내 앞에서 고거, 그때 내가 읽어 보지는 안했어요. 보지는 안했으나 자기네들이 읽으라 하니까 그래 읽어서 그렇게 하고 했는데, ○○노회의 그 회의록에 지금 그것이 남아 있는지 그때도 그래 놓고 난 다음에 이거 뭐 냅둘 게 뭐 있느냐?’ 찢어 없애 버렸는지 남아 있는지? 없어도 하나님 앞에는 그 회의록이 그대로 영원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면 그 회의록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는 그는 정치 사상이라 해 가지고 그때 내편이 아무도 없었고 ○○○목사님 하나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있었더냐 하면은 그때에 그 강원도, 맥킨타이어씨의 그 주장하는 거게 같이 가 가지고서 가서 그리 갈라 하고 말하면서 그리 가겠다고서 거기 가서 지금 집회에 참석하겠다고 나한테 연락이 왔읍디다. 그때는 전화가 없어서 편지로 연락이 와 더딥니다.

연락이 왔기 때문에 내가 속히 편지하기를 거게는 이 정치 사상으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정치주의의 일이 있기 때문에 거기는 우리가 나가는 그 진리는 아니다.’ 이랬기 때문에 그분이 그 말을 듣고서 그 선입적 지식을 가지고서 가 가지고 참석을 해 보니까 과연 그렇다 해 가지고서 거기서 가입을 안 하고 나왔었어.

 

그러니까 보류노회 그때 ○○의 그 사상을 반대하는 것은 나와 ○○○목사 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때 내편이 그래도 ○○○목사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나가 있었고 그래서 ○○○목사님도 그때 그것 때문에 나와 함께 거게서 탈퇴를 해 가지고서 그 뒤에, 나는 그 즉시 탈퇴했고 그다음에 ○○○목사님도 그 뒤에 그 싸우면서 그것을 반대하다가 자기가 안 되니까 할 수 없어 거기서 그만 탈퇴해 가지고서 나와서 그래 ○○노회에서 ○○○목사님 난리 나 가지고서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이게 역사가 없으면 그거 뭐인지? 역사는 조그만한 게 나가 가지고 자꾸 이 크게 번지는데 그 근본을 모르면 여러분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 하는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백 목사 제 자랑할라고, 제 자랑하는 게 아니라 이 말 함으로 욕 얻어먹소.

지금 여게서도 이 말 하니까 아이고 또 뭐 듣던 말 또 그말 한다해 가지고서 여기 내가 퇴장하는 사람을 내가 다 누구 누구를 알고 있습니다. 귀에 맞지 않다 말이오. 예수 잘 믿으시오, 도적질 하지 마시오, 착한 사람 하십시오, 구제 하십시오, 자선 하십시오, 이런 말이나 제게 쏙쏙 들어가지 여게는 이 생명이 죽고 사는 이것이 있는 것인데 거게 대해서는 모르거든. 이러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다 그물입니다, 큰 그물.

그거 그때 내가 말하기를, ‘큰 그물이라. 그물 만일 지금 태평양을 다 싼 그물이라고 하면은 그물 속에서도 그 고기가 평생 왔다 갔다 해도 그물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물에 든 것은 마지막에 그물을 들면은 다 올라간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눈을 널리 떠 가지고서, 하나 옳다 그르다는 그것만 말할 게 아니라, 교훈과 우리 교리에 넓은 범위를 보고서 그 범위 속에 그물 속에 안 들어가야 된다. 큰 그물 속에서는 평생 가도 그 고기가 그물 밖에를 그 그물 구경도 못 한다. 그러나 그물 속에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물 속에 잡혀서 그거는 생명이 다 죽어지고 만다.’ 하는 그것을 그때 비유로 제가 큰 그물을 두고서 많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 이걸 알아야 되지 그거 자, 냉장고 와 가지고 거기 유혹 받았지, 또 뭐 죽었다 살아났다고서 또 그렇게 유혹받지 그거 때문에 내가 상당히 기름을 뺐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몇 시간을 몇 번을 그걸 자꾸 말하니까, 말해서 이거 설득하고 이걸 또 조사를 해 가지고 다 이러고, 그런 말 하면 잘 들려지거든.

, 여러분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어 가지고서 무덤 속에서 삼 년을 있다가, 삼 년을 있다가 그 사람이, 동리 사람들이 그 사람은 무덤 속에 삼 년 그 들어 있었는데 하마 썩었을 터인데 거기서 나왔다.’ 삼 년 무덤 속에서 나왔다고 온 동네 백여 호 천 여호 되는 동네에서 그 사람은 과연 이 동네 아무것이고 죽은 지 삼 년인데 무덤에서 삼 년 만에 나왔다하고서 그 사람이 나와서 말하면 그 사람의 하는 말을, 하는 말을 백프로 옳다고 들을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말해도 성경에 안 된 말 하면 한 마디도 안 듣고 성경에 맞은 말 하면은 뭐 성경 보고 믿지 그 사람 말 믿을 건가? 그 사람을 그 사람 말한다고 그 사람 말을 듣고서 더 자기 믿음을 소생시키고 이렇게 그 사람을 인정하고서 할 그 조그마치라도 인정 안 할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못 들어, 여러분들. 인정 안 하지 못해요.

 

성경에 그게 없어. 이래 가지고서 죽은 자가 그렇게 살아난 게 없다 하니까 그것 때문에 뭐 나사로도 살아났고 뭐 나인성 과부 아들도 살아났고 뭐 어짜고들어 주 대는데, 그것은 살아났다가 도로 죽어 버렸어. 그것은 다 우리에게 계시 이용하기 위해서 했고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세 번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부활, 택자의 부활, 불택자의 부활, 이거 생명과 심판의 부활, 이 셋 부활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 계시 이용으로 한 그 하나님의 큰 뜻을 깨달아야 되고 어데 그렇게 뭐 죽은 가운데서 예수님이 살리지 안한 그 외에 살아난 게 어데 있습니까? 예수님이 살려내지 안한 데에 죽은 자 살아난 게 어데 있습니까? 그거 뭐 뭐꼬 바울이 하는 그런 거는 엘리사도 그래도 그런 것은 하나 계시 기관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것도 다 또 예수님의 권능으로 살아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 살아났지 달리는 살아나지 안했어.

 

그분들도 다, 구약 그렇기에, 요거 요긴한 것 중요한 거 하나 있는데 구약 성도들은 신약 성도의 중생과 다릅니다. 중생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후에 중생이 됐고 구약 성도는 중생이 아닙니다. 중생 아니고 다 예약적 중생, 예약적 중생을 하고서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는 받아 가지고서 성령의 생활은 하기는 했지마는 그때 영감은 밖에서 외재 영감이고 지금 우리에게 영감된 것은 안에 내주하는 내재 영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 중생이 다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다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무덤이 열린 거는 그로써 사망의 세력이 깨진 걸 가리켜 말하고, 사망의 세력이 깨져. 세력 깨졌다고 새로 살아난 건 아니라. 사망의 세력이 깨진 걸 말하고, 자던 성인들이 일어났으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행동했다 그말이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이 생명의 소망을 가졌고 사망은 깨어졌고 거게서 다 헤어나왔지마는 산 자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행동했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인들이 일으났으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무덤에서 나와 가지고서 많은 성인들이 예루살렘에 같이 들어갔다가이제 그다음까지는 기록 안 했어. 같이 들어갔는데 무덤으로 도로 들어갔습니다. 그게 부활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은 세 번뿐이라. 요것도 변동이 없습니다.

 

,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도 구약 영감과 신약 영감이 다르고 또 중생도 구약 중생과 신약 중생이 다르다는 거 이런 것을 좀 가져야 됩니다. 목사님 어떻습니까? 중생이 구약 중생과 신약 중생이 다르고 영감도 구약 영감과 신약 영감이 다르다는 것이 그 시대 영감이 내 말이 맞습니까? 그래 생각해. 우리 저 보배, 그래 내가 교리학 교회학을 하라 했어요. 이게 맞습니다. 뭐 세계가 반대해도 맞아요.

 

이러니까 이거 얼마나 우리가 지금 이거 조심해서 믿어야 될 것인지? 이거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라고 하고 있는데 그 교리 신조가 잘못되면 제까짓 거 열심있는 거 소용 어데 있어?

고래가, 고래 그놈이 힘이 나 가지고 막 공중으로 뛰고 힘이 있습니다. 힘 있는 그게 뭐 있소? 그물 속에 들어갔나 안 들어갔나 하는 게 문제요. 그물 속에 들어갔으면 암만 힘 있어도 나중에 그물 홀치면 죽는다 그말이오. 혼자 열심 암만 있어도 소용 없소. 혼자 열심과 선과 봉사와 뭐 그뭐 어떻게 한다고 해도 마귀 그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소용 없어, 교리와 신조가 그 속에 들어 있으면 마지막에는 홀치면 다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종교 통일 이제 종교 연합 이게 힘을 쓰고 있고 거게 대해서 그래도 ○○○박사가 한번 반대했다가 혼났습니다. 이게 지금 물질 세력이라.

 

이러니까 이거 오늘 기독교가 지금 뭐 연합하자, 기독교 연합이라, 기독교 뭐 연합이라, 단일이라 이래 가지고, 교리와 신조가 달라 가지고 된 것이 그 합한 것은 좋아지는 게 아니오.

 

이렇게 화합이 좋지마는, 화합이 좋지마는 화합보다 더 좋은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로 화합이지 진리 버리고 화합되는 그거는 다 사망입니다. 알겠습니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843 사명감/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84083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03
842 사모관을 옮기지 말라/ 출애굽기20장 3절/ 840627수새 선지자 2015.11.03
» 사변주의-사변론/ 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861209화새 선지자 2015.11.03
840 사소한 명령 순종이 성공의 길/ 출애굽기 15장 25절-26절/ 810330월새 선지자 2015.11.03
839 사역자를 위한 기도제목/ 에베소서 6장 18절-19절/ 890115여전도총회 선지자 2015.11.03
838 사욕과 공욕/ 이사야 1장 1절-20절/ 851230월새 선지자 2015.11.03
837 사울 멸망의 4가지 교훈/ 사무엘상 15장 17절-23절/ 880208교역자회 선지자 2015.11.03
836 사울과 다윗의 순종/ 사무엘상 15장 22절-23절/ 850224주새 선지자 2015.11.03
835 사울과 다윗의 순종/ 사무엘상 15장 22절-23절/ 850223토새 선지자 2015.11.03
834 사은생활/ 사도행전 3장 7절-13절/ 850508수후집회 선지자 2015.11.03
833 사은의 나라 사랑의 희생의 나라/ 베드로전서 1장 20절-25절/ 861112수야 선지자 2015.11.03
832 사자의 위치- 은사 위치/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50524금야 선지자 2015.11.03
831 사직동 교회의 건/ 창세기 12장 1절-13장/ 1988. 5. 4.새벽집회 선지자 2015.11.03
830 사직동교회 분규사건/ 1988년 4월 교역자회의록 선지자 2015.11.03
829 사탄의 깊은 것/ 시편 91장 1절-16절/ 881017양성원경건 선지자 2015.11.03
828 사탄의 이적,미혹에 속지 말 것/ 창세기 2장 1절-15절/ 830701금야 선지자 2015.11.03
827 사활대속 구원 6가지와 5가지 결실/ 창세기 3장 1절-3절/ 880824수새 선지자 2015.11.03
826 사활대속 완성/ 히브리서 5장 7절-10절/ 840405목새 선지자 2015.11.03
825 삭개오의 신앙/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830412화새 선지자 2015.11.03
824 삯꾼이 되지 마라/ 요한복음 10장 11절-12절/ 810204수새 선지자 201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