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위치- 은사 위치


선지자선교회 1985년 5월 24일 금야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키고 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다 하는 이 사자도 교회의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소속시켜 주신 그 사람들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그런 위치를 가진 사람을  가리켜서 사자들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 사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의 기관인 사람을 통해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 은혜를 받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교인이라 또 신학적으로 말할 때에는 기본 교회라 기본  교권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은 그들이 다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은혜를 받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은사 위치에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일반 교인들은 어떤 사람이든지 다 한 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은혜를 전달하는 그런 책임의 위치도 가지고 있고 또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가 은혜를 받는 그런 위치도 가지고 있어서 양면 위치를  가진 것이 우리 기독자들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은밀히 말하면  사도들까지도 사람을 통해서 받는 은혜도 있고 또 하나님에게 직접 받는 은혜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라거든 하물며 일반 교인들은 다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내가 받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런 위치의 책임도 가진 것이 우리들이니 이 면 일곱 별이라고 한 이  별의 위치요 또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말씀하신 사자의 위치입니다. 또 자기는  그러면서도 사람들로 통하여서 은혜를 받는 그런 위치도 가진 것이 다 우리  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일곱 별의 위치도 가졌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자의 위치도 가졌고 또 하나님의 교회의 위치 교인의 위치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양면 위치를 다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 것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데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성령님과 교회의 사자들을  다 같이 주님이 잡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곱 영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일곱 영인고 하니, 성령님이신데, 하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그 비밀을  바로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요. 또 하나는 깨달은 대로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일곱 별의 위치를 가진 우리가 은사 교권 위치에 있는 이 위치에는 주님이 나를  장중에 잡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것과 또 성령님이  나와 함께 주 안에 있기 때문에 능력적으로나 지혜적으로 지능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은사 위치에 있는 우리들인 것을 여기에 발표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우리들은 내가 뭐 좀 좋은 점이 있어서 나  된 것이 아니고. 내가 나 같은 자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사 위치에 두셔서 우리가 그 은사 교권 위치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 하면 자기는 뭐 보조 반사를 하든지 반사든지 주일학교 부장이든지 또  지권찰이든지 그냥 원권찰이든지 집사든지 장로든지 전도사든지 목사든지 또  자기가 그런 성직은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만 한 사람 두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해서 자기가 인도하는 가르치고 그 사람의 구원을 돕는 인도를 하고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교회의 사자요, 하나님의 사자요. 교회에 파송한  하나님의 사자요 또 교회를 주께서 책임 지워 주신 일곱 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직책이 사람 보기에 좀 양이 많은 직책을 맡은 사람도  있고 적은 직책을 맡은 사람도 있고 사람들이 그 지위를 구별 할 때에 높은  위치를 맡은 사람도 있고 낮은 위치를 맡은 사람들도 있고 우리들이 이래 조직해  가지고 믿는 교회 생활에는 이렇게 모두 다 차이있게 조직들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맡은 양이 많든지 적든지, 자기는 그 높은  성직의 이름, 무슨 권찰이나 장로나 전도사나 권사나 목사의 직을 맡은 사람이나  보조 반사나 지권찰직을 맡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그런 지권찰까지도 맡지  못하고 이름은 없고 그저 자기가 전도해서 한 사람을 인도하고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다 사람 보기에는 양이나 또 그 권위나 그런 차이가 있고 그  직명도 다 각각 이름이 각각 다르게 돼 가지고 있지만 실은 깊이 들어가면 다  하나님의 교회의 사자요 또 주님의 장중에 잡혀 있는 일곱 별이요 또 주님이  저를 벌써 영원 전부터 예정할 때부터 그렇게 예정하셔 가지고 나고 자랐고  주님이 때가 되면 불러서 이 위치를 주시고 또 자기에게 하나님의 구속한 양떼를  책임지워서 양떼를 기르고 있는 이런 내용의 실상인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뿌럭지인데 이 뿌럭지를 잊어버리고 나서  자기가 그 위에서 어떻게 용기를 내고 어떻게 각오나 결심을 가진다 할지라도  마치 뿌리 없는 화초는 햇빛이 나면 그는 마르는 거와 같이 이 근원을 자기가  깨달아 확신하는 이 믿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지루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또 두려운 일이나 온갖 미혹의 일을 닥칠 때에 자기는 그  직책이 다 말라 버리고 감당치 못한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크고 작고 은사 위치에 있는 것과 또 교인 위치에 있는  이 양면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은사 위치에 있는 것도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정에서부터 시작되어 나오는 일이요, 또 자기는 어떤 사람에게  소속하여서 은혜를 받도록. 그 은혜받는 기간이 길든지 짧든지 혹은 은혜받는  것이 단 한 마디 은혜 말씀을 듣게 되는지 또 어떤 그래 가지고 뭐 그  사람에게서 신학을 전공한 그런 은혜를 받았든지 어쨌든지 그 모든 것이 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 아니고 다 창조주요 절대자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요. 임시적으로 일시적으로 그렇게 당장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 모든 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목적인 그 뿌럭지에서  하나님의 예정으로 뻗어 나왔고 창조로 뻗어 나왔고 하나님의 보존과 섭리로  차차 그것이 성장돼 나와 가지고 오늘 현실이라는 그 현실의 모든 관계들을  가졌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말을 어디서 보고 이렇게 말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라고 그렇게 말씀한 데서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에도 보면, 1장 20절에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도 내나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이가 가라사대 하는 이 별은 주님의 장중에 잡혀 있다, 주님이  붙들고 이 사자직을 감당하도록, 그 은사 직책을 감당하도록 그렇게 하신다 하는  그런 것을 여기 나타내서 말씀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자꾸 누누이 해석을 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인도자의 위치도 가지고  있고 또 내가 인도를 받는 위치도 가지고 있고 양면 위치를 가진 우리들이라,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위치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위치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라. 그러면, 가르치는 위치나 가르침을 받는 위치나 이 모든  위치가 오다 가다가 보니까 그렇게 만나지고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다 보니 어떻게 그런 형편이 부딪쳐졌다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다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그 말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그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 다 그 목적에서부터 뿌리를 박아 가지고 하나님의 예정에까지  성장돼 나오고 예정에서 창조까지 성장돼 나오고 창조에서 하나님의 보존  섭리까지 성장돼 나와 가지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이 되었고 누구 누구를 통해서 중생이 되었고 또 누구 누구를 통해서 그  복음의 도리를 가르침 받고 또 심방 받고 권면 받고 관리해 주심을 받아 가지고  우리 구원들이 되어지는 것이지, 무슨 다른 이종교와 같이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이종교들은 자기가 동서 남북으로 다니다가 어디든지 부딪치면 부딪치는  그것이 시발입니다. 부딪치는 것이 시발이요 자기의 주관이 그 마음이 동해서  그로 말미암아 작동이 시작되는 것이 그게 시작이지만 우리 기독자의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에서부터  우리는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가 뭐 있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이 계셨고 그 다음으로 둘째번에 하나님의 목적이  계셨으니 그 목적이 곧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차차 성취돼  나오기를 예정으로 성취됐고 예정에서 창조로 성취됐고 창조에서 보존으로  성취됐고 보존에서 도성인신의 대속으로 성취됐고 대속에서 내가 그 대속과  대속으로 인한 성령과 진리로 내가 중생됐고 또 중생된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조직과 모든 절대적인 그 조직 속에서 이렇게 조직되고 저렇게 연결된 그  연결에서 내가 한마디 은혜를 입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기도 하고  나와 잠깐 동안 은혜의 관계를 가지기도 하고 또 나뉘었다가서 또 다른 데로 또  은혜의 관계가 또 이동돼 가지고 되는 것도 있으나 그 모든 것이다 그렇게 지나  나가다 보니까 이 길로. 이 길로 방향을 돌이켜서 이리 됐고 저 길로 방향을  돌이켜서 저렇게 됐고. 가다 보니까 이 길도 가게 됐고 저 길도 가게 됐고 이런  인연도 가지게 됐고 저런 인연도 가지게 됐다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또 아무 계획 없이 그렇게 가다 보니까 그런 일들이 다  자연적으로 봉착되게 됐다 이렇게 우연이나 자연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쉽고, 또  그것이 자기가 이렇게 사색했고 이렇게 움직였고 저렇게 움직였고 또 이런 사정  처지가 자기에게 있어서 그렇게 그렇게 해서 됐다 이렇게들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기독자들은 교만도 나오고 또 금방 교만해서 하늘같이  올라갔다가 금방 또 공포와 비겁에 쌓여서 아주 죽은 자와 같이 그렇게 종되어  있는 그런 것이 다 철없는 주관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구원은 하나 하나의 동하고 정하는 그것이 우연이라는 거  절대 없습니다. 자연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또 우리의 주관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능동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어릴 때는 이해를 못하니까 오히려 번민스럽고 고민스러우나 그 고민은  가져야 되고 그 번민은 가져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고민과 번민을  가지고, 우리가 그 고민과 번민을 그것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인데  그 고민과 번민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요 그것이 깨끗한 양심을 가진 자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럴 때 그런 번민과 고민 있는 그것을 우리에게 잘 바로  가르쳐 주시고 잘 해결해 줘서 모든 일이 든든해서 참으로 우리가 보는 모든  존재가 내 구원 위해서 있지 안한 존재가 하나도 없고 내가 이해 못 할 어떤  순서라도 내 구원을 위하지 안한 그 순서가 하나도 없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기 구원이 이렇게 영원 전부터 뿌리 깊게 절대성의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져서 내려오는 그 유래, 자기 구원이 어떻게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져  성장돼서 오늘까지에 도달된 이것을 알 때에 자기는 모든 순서와 모든 존재가 다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으셨고 또 이것을 보존도 하시고 관리도 하시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모두 다 조화도 일으키고 해서 내 구원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이 작동하고 이용되도록 되어 있다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하는 자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자가 만나질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리리라 하는 그 말씀은 다 이런 것들을 다 간추려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을 우리가 만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렇게 오다 가다가  무엇이 잘되는 그런 다행을 우리가 찾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앙은 모험이라 이렇게 말을 하는 그런 책에  써 놓은 그런 것을 제가 더러 본적이 있습니다. 기독자의 생활은 어리석은 제  인간면에서 모험이지 모험이 없습니다. 절대 조직적이며 절대적이요 모든 것이  변동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뭐 어떻게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하고 했는데 돼지는 그런 것은 인간 주관 행위지 객관면에서  실상면에서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또 사람들은 다 꿈을 가져야 된다,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꿈이 없는 사람들은 망한다 꿈이 없는 교회는 망한다 이렇게 그  꿈을 가지고 말하면서 그럴듯한 소리를 하는 어떤 월간지인가 뭐 설교집인가  언제 한댄 내가 퍼뜩 보니까 그런 말이 기록돼 있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니고, 영원 불변의 절대성인 그것이 있는데  그것을 찾을라고 애쓰는 것이 기독자의 정상이요 찾으면 찾아지는 것이요 또  구하면 얻어지는 것이요 또 문을 두드리면 열려져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또 이것  때문에 성령을 주셨고, 이 성경과 성령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원 전부터 우리를  책임지신 대속주이신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우리에게는 이 성경 말씀이 못  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고 싶다고 보고 이렇게 보기 싫다고 안 봐지는 게  아니고, 보고 싶은 그것이 당신이 보고 싶게 정해 놨기 때문에 그만치 복되게  보고 싶은 것이고, 보기 싫은 자는 그만치 복이 덜되게 정해 있기 때문에 보기가  싫은 것이고 또 성경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그분으로  말미암아 영원 불변적의 절대성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지, 뭣이 임시 이  세상이 움직임의 풍조에 따라서, 또 인간 사회들의 지걸거림에 따라서. 거기에서  무슨 그 바람에서, 그 운동에서, 그 모든 무리들의 움직임에서 그것이 생겨져  나왔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는 절대 불변의 하나님의  예정에서부터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예정되어 있는 것이요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창조되어 있는 것이요 절대성으로서 보존되고 섭리돼 가지고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은사 위치에 있는 것이나 또 교회 위치를  가진 것이나 이 가진 것이 다 껍데기 발라 맞춰서 시대를 따라서 이것이 생겨진  것이나 또 사회를 따라서 생겨진 것이나 이 모든 어떤 풍조를 따라서 바람에서  생겨지고 인간 사회 운동에서 생겨지고 정계에서 생겨지고 그런 것들. 그런  것들에서 생겨진 게 아니라 이런 것들 위에 저 위에 그런 것들의 주인공으로  모두 있는 것이고 그런 것들은 다 이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주격이 되어 있는  이 구원을 위해서 이용되기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되었고 모든 순서들이 다  작정되어 있는 근원인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뭐 종교 통일이니 하는 그런 거, 또 기독교도 무슨  통일을 하자 어짜자 하는 그런 것도 조금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나눠진 것이  합해져서 좋은 것도 있지만 실은 그것이 자꾸 지금 타락의 순서로서 파괴돼  나가는 그런 순서가 대개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사자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내가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절대자가 나를 벌써 나기 전에. 나기 전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인 것을  정해서 너는 반사 노릇을 해라 보조 반사 노릇을 해라 지권찰 노릇해라 권찰  노릇해라 너는 집사 노릇해라 너는 장로 권사 전도사 목사 노릇해라 이렇게 벌써  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한 그대로 나와 가지고 그 직책에 자기가 취임되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관 태도는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등용 하셔서 이렇게 생명  역사에 이바지하도록 나를 등용해 주시고 또 나에게 하나님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귀중한. 한 생명이 우주보다 귀한, 주님은 우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지  아니하십니다. 우주는 당신이 엿새 동안에 만드신 것이 우주입니다. 그러면,  우주보다 크신, 당신이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대속하신 이 주님의 기업이요,  주님이 모든 것을 다 기울여서 구원하려는 당신의 기업이요 당신의 기쁨이요  당신의 영광의 찬미가 되는, 양이 많든지 적든지 그 양을 나에게 맡겨 주시고,  나를 그 양을, 나에게 잘 양육해서 하나님이 만족하실 만치 그렇게 잘 양육해서  육성시켜서 잘 조성하도록 이렇게 나를 이 영광의 생명 역사에 등용해 주신 이  일에 대해서 우리는 첫째 감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유래를 다 생각하면서 자기의 은사 위치에 등용해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한 이 감사가 있어야 거기에서 자기는 역사 할 수가 있지 이  유래를 모르면 감사할 수가 없고 또 그 결과를. 결과의 지극히 큰 것을 깨닫지  못하면 자기의 사명감에 대해서 사명감의 중량을 자기가 느끼지를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으로 알려 주시고 영감으로 알려  주시는, 알려 주시는 그대로 우리가 옳은 발자국을 떼 놓을 때에 거기에는 삼위  일체의 하나님과 진리가 그 사람의 걸음에 동행하십니다. 그것이 아니고 제가  아무리 세상을 호령치는 무슨 큰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그는 참 울리는 괭과리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일시에 어떤 사람들을 어떤 웅변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설복시키고 감탄 시켰다 할지라도 그것이 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요 또 부끄러운 일이요 참 연극 중에 그저 괴상한  연극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로 나를 등용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할 것이요,  다음으로는 나를 등용하신 분이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가지시고 나를 오른손에 잡으시고 일하시는 지극히 큰 배경이 나를 책임지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는 자기가 자기 주관대로  이거는 크다 의롭다 뭐 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뜻인 것을 자기가  판정했으면 그대로 할 것이요 또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정이 되지 안하면 자기는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에게 있는 마음과 양심과  이성과 모든 계산들을 가지고 성령과 영감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는  것이요 인도하는 길이라고 판정이 될 때에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고 그것을  잡기 전에는 동하지도 정하지도 안할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확실히 정해 주지 안한 그 일을 환경이  몰아친다고 해 가지고 그 일을 시작하거나 또 뭐 진행을 하거나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또 하나님의 뜻이라는 걸 자기가 확실히 깨달았을 때에는 그 일이  어렵다 크다 대적이 강하다 하는 그런 걸 가지고 조그마치라도 주저하거나  요동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어떨 때는 깨닫지 못하면. 혹 내가 암만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둔해서 영감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정 지워서  깨닫지 못할 때에는 자기에게 봉착된 일이 있으면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뜻  아닌지 모르겠으니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그 진리를 가지고 혹은 더듬어 찾아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까 해서 참 주저하면서 그저 어려운 걸음으로 슬금 슬금 한  걸음을 걸으면서 용기있게 걷지 안하고 무슨 일이라도. 지금이라도 당장 무슨  일이 있으면 뒤로 후퇴도 할 수 있고 피할 수도 있을 만치 이렇게 그저 슬금  슬금 걸으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봐서 하나님 뜻을 찾을라고 애를 쓰다가 하나님  섭리가 와서 하나님 뜻이라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거기에서 뭐 어떻게 이미  베풀어 놓은 일이 아무리 뭐 많은 손해를 가지고 온다고 해도 당장 돌아서고  변동되고. 하나님의 뜻인 것을 확정한 그 다음부터는 어떤 그 상대에, 또  상대방의 대적들이나 그 사건들이 아주 중량이 무거운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을 주저하지 안하고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은사 위치에 있는  사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지극히 큰 분이 자기의 배경이 돼 가지고 자기를 장중에 잡으시고  일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모든 피조물을 다 홀로 주권하고 계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내가 너희들과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례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서 또 지키게 해라.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와  같이 하겠다 이렇게 약속하셨고 또 장중에 잡고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제가 제 마음대로 동하고 정할라고 하지 않는 그것이.

그것이 항상 깬 생활인 것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이 자기를 등용해 주신 데 대해서 그 일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중요한 취직이요 등용이기 때문에. 그러기에, 카터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에  취임된 거 그것이 항상 자기는 부업이요 주일학교 반사하는 그것이 천직이요  본업이기 때문에 그 일을 아무리 다망한 정사의 속에서도 어김이 없이 그런 그  일을 잘 준행했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첫째는 감사하고 두번째는 우리는 강하고 대담해야 합니다. 우리는  강하고 대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뭐 어려운 일도  없고 쉬운 일도 없고 못 할 일도 없고 우리가 할 일도 없습니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일은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주관대로 무슨  일이든지 내가 그 사건에 그 움직임에 근원이 되면 망하고 맙니다. 근원이 되면  망합니다. 나의 움직인 것은 크나 작으나 움직임의 근원은 당신으로 인해서  움직이지 당신으로 인하지 안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런 능동의  행동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능동의 행동이 없고 항상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로 인하여 산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분으로 인하여서  움직이는, 피동으로 움직여야 하고 피동으로 움직일 때에는 그 일이 크고 작고  대적이 강하고 뭐 하는 그런 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할 것 같으면 상관이  없지만 나를 붙들고 역사하시는 그 배경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그 일에 뭐  무겁고 가볍고 어렵고 쉽고 또 방해자가 많고 협조자가 또 많고 상관이  없습니다. 협조자 하나도 필요없고 방해자 하나도 상관이 없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의 은사 위치에 있는 자의 입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감사하고, 두번째는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고 또  자기에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는 데에는 그분이 하라 하는 대로 그 분에게 피동되는 것이라야  되지 피동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도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신인  양성 일위로 있을 때에 그분이 하지 못하는 일 있었으니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가? 지극히 적고 작은 것도 당신이 능동으로 한 그런 일은 해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못 했습니다. 그런 일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인 줄 알고  아예 그런 일을 할라고 생각하지 안했고 그런 일은 털끝만치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신 그 대속을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움직이는, 당신을 등용하신 그분의,  당신의 전 배경이 되어 있는 그분의 명령 따라서 움직이는 그 움직임에서 그분의  뜻이라 할 때에는 그분에게는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죽기까지 고민한 그 일은 너무 어려워서, 당신으로 인해서  동하고 정하는데 그 일이 너무 어려우니 이거 하나님의 절대 능력의 안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그 어려움을 보고 심히 고민했었지 뭐 죽음 같은 그런 것을  보고 고민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도 죽음이라 하는 그 죽음은 물론  고문과 고형 가운데 있으면 참 말할 수 없이 변동되기 때문에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 내가 만일 고문과 고형할 때에 그때에 내게 있는 신경이나 세포가 혹은  독단 행위를 할까 두렵사오니 그렇지 않도록 해 달라고 말하고. 또 독약을  먹이든지 무슨 독침을 찌르든지 이런 것으로 할 때에 그때에 나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마시고 주님이 붙드셔서 어떤  피조물들이 어떻게 최고에 있는 것을 다 해 가지고 주님으로 인한 움직임을  움직여 나갈라고 할 때에 방해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나를 도우시면 문제없지만,  그럴 때에 주님이 돕는 일은 틀림없지만 내가 나대로 어려우니까 어려운 대로,  어려우니까 나대로 독행하는 그런 자행하는 단독 행위하는 그런 탈선 행위가  있을까 두렵사오니 내 모든 세포시키는 것까지를 주님이 주관하셔서 이런 것을  다 어려움 없이 이런 것도 다 완전히 믿음으로 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을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는 믿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한 거는 내가 다 시행하마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는 아멘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은  계약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기억해야 되겠고

 또, 셋째로는,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어려운 일인 걸 깨닫고 보면 자기의  무슨 힘으로 자기가 할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할라고 하는 그런  망령을 부리지 않습니다. '아, 나는 어학이 능하다' 어학이 그것이 뭘  하겠습니까? 어학은 뱀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 무슨 생명 역사를, 죽은 자가  어떻게 생명 역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선천적으로 모든 기능이 명철이  탁월하다, 후천적으로 또 수양을 많이 해서 모두가 다 구비해 있다, 뭐  선천으로나 후천으로나 자기가 학적으로나 뭐 자기가 활동적으로나 지혜나  총명적으로나 자기가 어떤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다 망령이요 고게서 마귀에게 꼬임받아 가지고 다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된다고 했지. 내게 능력 주시는  그 능력 가지고 한다고 했지 뭐 자기의 선천이나 후천이나 어떤 장기 가지고  한다고 그렇게 하지를 안했습니다. 그거 가지고 한다고 하는 사람은 제가 하나  성전 밖 마당을 만들지 절대로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이 간섭하고  측량하고 있는 그것은 만들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야 뭐 아무  때나 설교하는 것이 다름없고 언제 그 지중들이 염불하는 것처럼 줄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한 자는 그것이 모두 구비가 되지 안하면  벙어리가 되고 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셋째로는 이 일에 지극히 큰  일이라는 것을 자기가 생각하며 자기 무슨 가진,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 줘서  가졌지만 자기라는 이적 요소 가지고 이 일이 가능하다고 이런 망령된 생각을  가지지 안하게 됩니다. 그 일을, 나는 누구보다도 학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언변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설득력 있기 때문에, 나는 조직력이 있기 때문에.

지혜와 총명이 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정치력이 있기 때문에 한다고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그자는 그것이 곧 우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는  멀어지는고로 저는 생명 역사에는 반드시 그게 들어서 적이 되어지지 그것이  도움이 된다는 거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제가 무엇을 할라고, 제 힘 가지고 할라 하는 이런 행동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라 말은. 무슨 일을  해 놓고 제가 건설했다 하는 자는 넘어 질까 조심하라 말은 조심하면 안  넘어진다 그 말 아니오.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은 반드시 넘어지기 때문에 네가  돌이키라 그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등용하심에 대해서 감사가  진정 있어야 되겠고, 그 일이 얼마나 큰 일이며, 그래서, 사명감과 감사해야  되는 감사가 있어야 되겠고. 지극히 큰 배경이 있는 것을 자기는 믿어야 하겠고,  또 이제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하지 자기가 단독으로 독단적으로 능동적으로  하는 행동을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그것을 못을 박아서 확정을 해  놓고, 또 자기 힘으로 뭣을 할라 하는 그런, 자기 힘 가지고 자기 자본 가지고  할라 하는 그런 망령을 가지지 안해야 되겠고, 다만 가질 것은 뭐이냐? 그저  충성뿐이라, 내가 할 것은, 내가 할 것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나 할 일이라 하는 요것을 구별해서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등용하셨다, 또 나에게는 큰 배경이 있다. 등용한 데  대해서 감사할 것이고 큰 배경이 있기 때문에 나는 강하고 담대하고 든든할  것이요. 또 내대로 동하고 정할 것이 아니라 그분 시키시는 일만 할 것이요, 또  그라는 데는 내가 할 수 있다고 그런 망령된, 제 힘으로 알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망령된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요. 다만 할 것은 뭐이냐? 그저 충성할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자유롭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성령님이 같이 있기 때문에 지혜에 대해서  능력에 대해서 모자랄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네 가지를 기억을 하고.

 둘째로 생각할 것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사자에게 편지를  하면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구역에는 실상이란 말이 있는데 여기에는 '죽은 자로다' 이랬는데, 고  죽은 자나 복 같은 말은 말이지만 '실상은 죽은 자로다' 그렇게 가지면 더  깨닫기가 쉽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주님이 이 사데 교회 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기에는 사데 교회 사자와  주님과 이인칭으로, 이인칭으로 단 둘이 대화적으로 말했지 거기에 삼인칭이  거기에 없습니다. 다만 단 둘이 주님하고 사데 교회 사자하고 단 둘이 말하면서,  네가. 내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보지 못했다, 2절에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여기에도 보면 '너는 이인칭입니다. 서로  주님하고 사데 교회 사자하고 단둘이 대화했습니다. 거기에는 삼인칭이 없고 단  그저 이인칭으로서 단 둘이 그렇게 대화를 했습니다. 했는데, 사데 교회 있는 그  모든 일을 사데 교회 사자에게 잘하고 잘못한 것을 네가 잘못했다 네가 잘했다  요렇게 말했지 네가 맡은 사데 교회의 교인들이 이런 교인 저런 교인들 잘못했다  잘했다 하는 그런 것을. 또 네가 그 교인들에게 좀 잘하라 해라 이렇게 삼인칭  적이 없고 책임도 단 이인칭이요 또 거기에 대해서, 책임도 이인칭이요, 책임도  이인칭이요 또 책망도 단 이인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것을 단단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데 교회에 보면 아주 횐 옷 입고 다니는 좋은 사람도 있었고 또  아주 나쁜 사람들도 있었는데 잘못된 데 대해서 책임이 사데 교회 사자, 그  사자에게 책임을 지워서 말씀했고 또 사데 교회를 살리는 데 있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사자에게 대해서 네가 이렇게 남은바 죽게 된 것을 네가 굳게  하라 너 죽은 것을 네가 굳게 하라 그러면, 죽은 것 또 사데 교회에 죽은 것도  다 사자 네가 죽은 것이고, 네가 죽이 있고, 또 사데 교회가 살아나는 것도 네가  살아나야 된다고 말씀을 했고, 또 잘못된 것도 네가 잘못됐다 사데 교회 사자  네가, 네가 지금 하나도 옳은 행위가 없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을. 비밀이라 하는 것은 알기 어려운  것을 비밀이라고 말씀하는 것인데 여기 20절에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금 촛대의 비밀과 일곱  별의 비밀이라' 이렇게 이 말씀을 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깨닫기 어려운 걸  가리켜서 비밀이라고 말했는데. 그 교회와 교회 사자. 은사 위치에 있는 자와 그  은혜를 받는 자, 거기에, 거기에 속해 가지고 은혜를 받는 자, 또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붙여 주셔서 자기가 책임지고 그것을 길러야 하는 자 요것은. 요  둘에 대한 비밀은 무엇이냐? 비밀은 자기가 책임진 자의 그자에게 대한 모든  것은 책임진 은사 위치에 있는 그자에게 매여 있다, 그자에게 책임지워 있다  하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밑에서 은혜를 받아서 있는 기본 교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고 고 위에는 은혜를 끼칠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고. 고 위에는 곧  주님이 있습니다. 고 위에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에게서 그 책임 맡은  자를 통해서 은혜 받아서 이루어 나가야 할 요 자에게 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흠이 없습니다. 주님은 아무 이행이나 모든 일에 흠이 없고 또, 없기  때문에. 고장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은사 위치에 있는 요게 고장이 생겼는데,  이게 안 들어서 그렇다는, 안 들어서 그렇다고 '안 들어서 그렇다 회개를 안  해서 그렇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어. '회개를 안 해서 그렇다. 그가 믿지  안하니까 어짤 수 없다' 하는 그것은,  이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맡은 자기의 양떼로, 자기에게 소속한  교인으로 자기가 책임진 그 양떼가 있는데 그 책임진 양떼에 대해서 그를  하나님이 정하신 양이 얼마나 되든지 그 정한 양만침 그것을 구원 할라고 할  때에 그가 듣지 안할 수 있고 반항할 수도 있고 또 그게 어디로 도망칠 수도  있고 이렇게 할 수 있으나, 요거 우리가 좀 잘 알아야 되겠는데, 할 수 있으나  주님이, 주님이 그에게 대해서 맡기신 그 사명의 양은. 주님이 맡기신 사명의  양은. 주님이 그 양은 완전 감당입니다. 그 양은 완전 감당이요 또 그 완전  감당을 맡은 그 은사 위치에 있는 그 사자는 또 어떤 것이냐? 주님이 맡긴 양은  요 은혜 받아 가지고 구원 이룰 수 있는 기본 위치에 있는. 은혜 위치에 있는 요  교인 위치에서 은혜를 받아서, 은혜 받을 그 수은의 위치에 있는 고 자에게  대해서는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흘러 내려오는 그 양은. 그 양은 정확하게  사자에게 오고 그 사자에게 온 그 양은 정확하게 자기가 맡은 양떼에게 갈 수  있는 것이 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인, 은사 위치에 있는 나, 또 내나 반사들이, 보조 반사나 뭐  반사나 장로나 전도사나 권사나 권찰이나 또 주님. 주님이 이 사람을 나를  통해서 구원하기로 정한 양은 주님이 그 은혜의 기관인 은사 위치에 있는 자에게  고 양은 정확하게 줬고, 정확하게 줬고. 이는 양을 정확하게 받아 가지고  요에게는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다 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다 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다, 이런데, 이것이 되지 안한 것은 그러면 여기에서 주지  안해서 그러냐, 주지 안해서 그러냐, 또 이것이 받지 안해서 그러냐, 받지  안하고 반대하는 마귀들이 꽉 찼지만 여기에서 주는 것은 거기까지 다 완전히  그만한 양은 완성할 수 있도록 여기에서 주셨고, 여기에서만 고장나지 안하면  여기에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서 완성이 되어지는 것인데 고장은 여기에서 고장이  났다. 이러기 때문에, 총 책임을 사데 교회 사자에게 지웠습니다.

 내가, 내가, 내가 볼 때에 네 행위의 온전함을 내가 보지 못했다. 네가  살았다는 것은 있으나 실상은 네가 죽었다,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네가  굳게해라.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네가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해라 요렇게 단 대화적으로. 단 둘이 대화적으로 했지 거기에 복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너 너 이렇게 단수를 이렇게 말했고 주님 또 사데 교회 사자  요렇게 대화적으로 이인칭이지 거기 삼인칭이 들지를 안했습니다. 단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가 맡은 바의 그 양이 많든지 적든지 그 양에  대해서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그 양은 그것은 제가 어디로. 공간도 그 일을  위해서. 공간도 그 일을 위해서 있고 시간도 그 일을 위해서 있고 모든 존재들이  그 일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거는 방해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주님에게서 전달되어 나오는 것이 그 사자에게 왔는데 그 사자에게서 거기에  전달된 것이 그것이. 다 잘못된 고장은 거기에서 났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서  확정 지우는 것이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다음에 보면 네가 회개치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오리라하는  그 말은 네 세상에서 사는 생애는 다 헛일되고 만다, 사는 생애는 하나도  하늘나라 가지고 갈 것은 없고 다 세상에서 주님 오실 때 없어질 것. 주님  오시면 없어질 것. 다 주님 오시면 없어질 것들만 가지고 살고 없어질 것들만  위해서 일했기 때문에 일생 동안 네가 뭐 어떻게, 피 땀 흘려 일했다 할지라도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그때 너는 네 모가치는 하나도 없다. 다 헛일만 하게  된다. 네 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그것도 말하기를 사자에게  대해서 말했습니다. 네가 다 도적맞는다, 네가 도적맞는다, 네가 그리 하면 모든  사데 교회에 있는 교인들이 도적 맞는다 그렇게 말하지 안하고 네가 도적  맞는다, 네가 손해 본다, 네가 깨야 된다. 네가 회개해야 된다. 네가 생각해야  된다. 네가 지켜야 된다 이렇게 했지. 거기에 도무지,  여기에 보면, 잘못 보면 이 사자에게 그랬으니까 사자 그 사자에게 무엇이  잘못됨이 있는 갑다. 잘못된 게 사자 자체에게 잘못됨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 사데 교회 있는 모든 잘못 그 전체가  다 사자 그 자체에 잘못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기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래서, 저게 몇 명이 있는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다니리니' 하니까. '다니리니' 하니까 미래사로 이렇게 보여집니다.

앞으로, 지금은 안 다니는데 앞으로 다닐 것이다, '나와 함께 다니리니'  이라니까 미래사로만 보는데. 미래사는 미래사입니다만 고 속에 뜻은 무슨  뜻인고 하니 네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을 네가 볼 것이다  지금이라도 봐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나와 함께 다닌 자가 있다. 다닌 자가  있다 그렇게 과거사로 말하지 안해도 내가 나와 널 동행할 터이니까. 동행할  터이니까 네가 지금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동행하는 자를 네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거는 앞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와 같이 횐 옷 입고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그러나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몇 명이 네게 있어' 여기에는 이제 복수입니다. 여기에는  복수입니다. 그러면, 잘 해서 잘 되어 있는, 잘 되어 있는. 잘 되어 있는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흠없이 구원을 잘 이루어 가지고 있는 그자에게 대해서는 다만  이 사데 교회에 사자에게 이런 자가 있다 하는 그것을 보고하는 이런 자가  있다는 것을 알린 것뿐이지 거기에 대해서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런 자가  있다 하고 칭찬하는 말은 여기에 한 마디도 없습니다. 칭찬하는 말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사데 교회 사자에게는 책임지는 말만. 또 책망하는 말만, 또  앞으로 책임질 말. 책임져야 되는 말, 또 책망 받는 것, 또 잘못된 것 이런 것만  사데 교회 사자에게 말을 하고,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 횐  옷 입고 나와 같이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 사데 교회의 말단에 있는. 사데 교회의 말단에 있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해서 이 사데 교회에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 이  죽은 자에 대한 이 죽은 자를 사데 교인이 죽었다고 말하지 안하고 죽은 자를  사데 교회 사자 네가 죽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데 교회 사자 네가  죽었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 사자가 죽었다고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그러면, 사데  교회의 사자가 죽은 것인가? 이것은 사데 교회에 사자가 죽은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몇 명이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니라' 그러니까, 사데  교회에도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아주 성자같이 되어 있는 온전한 깨끗한  자도 사데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면, 사데교회에 있는 그거는 사데 교회 사자로  인해서 그 사람이 구원을 이루어서 온전한 자가 된 것인 것입니다. 온전한 자가  된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 사자에게 대해서도 네라고 말하지 안했으나 고  사데 교회 잘못된 흠과 점이 되어 있는 고 흠점, 병들어 있는 거, 고 잘못되어  있는 거 그것은 사자 너에게 병든 점이 있고 잘못된 점이 있고 흠점이 있다  그렇게 요게 말씀을 하신 것을 요거 다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래서, 은사 위치에 있는 자는, 좀 어려운 말들인데. 위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첫째 책임을 졌고, 고 다음에는 사자가 책임을 졌고 고 다음에는 교인이 있고  이러기 때문에, 이분이 책임진 것은 당신이, 당신이 여기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책임을 질 수 있는 그런 은혜를 당신이 주지 안 하고 책임을 지라고 하면  이분이, 이분이 허욕쟁이요 이 분이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여기에서 이 소속한 자기  양을 만들만치, 만들 것만치 만들 수 있는 그 능력을 여기에서 주었고 이는 그  능력 받아 가지고 이걸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능력 주지 안하고 능력  준 그 이상의 것을 요구를 한다면 이 능력 주신 주님에게 과오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죄가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이 당신이 이 은사 위치에  있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 것만치 여기에다가 하면 할 수 있도록 다 그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서 하지 안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좀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네가 살았다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이니 네가 죽게 된. 남은 바  죽게된 것, 남은 바 죽게 된 그것을 네가 다시 굳게 세워서 네가 살려라, 네가  살려라, 네가 살아라. '죽은 자로다' 2절에. '너는 일깨 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죽게된 그것을 다시 굳게 하라 말은 살아라 그말입니다.

굳게하라 말은. 굳게 하라. 다시 강건하게 해라, 강건하게 해라, 그러면, 네가  강건하게 해라. 네가, 네가 지금 병들어 있으니 네가 그 병을 치료받아라, 네가  강건하라, 요게서 고 사데 교회의, 흠있는 그 흠을, 그 흠을 네가 맡은  교인들에게 흠이 있으니까 그 교인들을 치료하라 이렇게 말하지 안했고. 네가  흠이 있으니 네가 치료하라 또 네가 점이 있으니까, 못 쓸 점이 있으니까 그것을  다 수술해서 치료하라. 네가 지금 다 죽어 살고 있으니까 네가 어서 네가  살아나라 이렇게 모두 다 보면 사데 교회 사자에게 그런 흠점이 있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요것 좀, 그러면, 사데 교회의 사자가 그렇게 흠점이 있었다.

교인들에게 흠점이, 사데 교회 사자에게 흠점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것도 틀린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옷을 더럽히지 안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로 이  사데 교회 사자가 길러 놓은 자 있습니다. 길러 놓은 자 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잘못도 책임이 있고 잘한  것도 칭찬 있을 것 같습니까? 이래 잘한 것도 사자가 했는데. 그걸 봐서 그 사데  교회 사자가 그렇게 잘못된, 사자에게, 사자 자체에게 잘못된 그 잘못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이 아니고 사데 교회에 말단 교인에게 잘못돼 있는 그것이 곧  사자의 잘못으로 이렇게 계산을 해 가지고 말씀을 하신 것인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세히 자꾸 생각해 보면 이것을 딴 데로 뭐 달리 그렇게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데 교회는 장점이 있었는데. 장점도 있었고 또 잘못된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잘못된 교인도 있었는데 잘못된 교인 그것은 다 여기  성경에 보면 잘못된 것이 네가 잘못 가르쳐서 잘못됐고 아직까지 지금 덜 가르쳐  잘못됐다 그러니까 네가 잘 가르쳐라 그렇게 삼인칭으로 말하지 안했고 단둘이,  '네가 잘못돼 있다, 네가 병들어 있다. 네가 지금 병이 들어 있다, 네가 지금 다  죽어 가고 있다' 그렇게 '너. 너' 단 주님과 대화적으로 네라고 하는  이인칭뿐이지 거기에는 삼인칭이 들어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거 좀 복잡한 말이지만,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님이 은사  위치에 있는 자에게 맡긴 양이 있어. 맡긴 양이 있으니 그 양은 반드시 이  양떼에게 이 교인에게 그만한 양은 완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겁니다. 여기에서  주신 것은 그것을 완성, 어느 정도까지에 자기에게는 어느 정도를 맡았는지 자기  맡은 사명은 완성할 수 있도록 완성할 능력을 줬고 또 그 능력 가지면 자기가  맡은 양은 완성을 할 수가 있다, 완성을 할 수가 있다. 완성을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주님이 안 쥐서 그렇겠느냐? 이분이 안 받아 그렇겠느냐? 이분이 안받고  받는 거는 상관이 없다 말이오. 이 능력으로 가지고 구원하기 때문에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도록 해 가지고 하는 것이 이것이 능력이지 안 받아서  그렇다 책임을 지울 수가 없고. 이거는 그가 어떻게 할지라도 여기에서 이 은사  위치에 있는 자에게 능력 준 이 능력은 이 자가 뭐 암만 마귀가 서둘고 또  자체가 어떤 죄악이나 사망이나 그런 것이 아무리 뭉쳐 가지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여기에 능력 그것 다 알고 다 정해 놓으신 분이 했기 때문에 여기에 준  것은 그 모든 환경이나 그 모든 조건 다 그것이 있는 거기에서 완성 할 수 있는  능력을 네게 줬다 그말입니다. 알아듣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자기 맡은 양을 지금 구원을 이루어 가는 책임을 맡은 것인데 구원을  이루어 갈 때 여기에는 지금 구원 이루어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환경에 마귀가  유별스럽고 세상 대적들이 유별스럽고 친구들이 유별스럽고 환경이 유별스럽고  가족들이 유별스러워서 도무지 여기에는 다른 사람 천 명 만 명 구원 이루는  것만치 어렵다 합시다. 어려운 자라 합시다. 어려운 자이면 주님이 이 사람을  통해서 이걸 구원할라고 하셨을 때에는 주님이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양을  여기에서 주실 때에 어려우면 여기에서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은사  위치에 있는 자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 주신 것이 보통 사람에게는 되지만 이  어려운 자에게는 할 수 없는 그런 양을 줬다고 하면 은혜 주신 주님이 불실이라.

주님에게. 주님에게 책임이 있고 점이 있다 말이오. 주님은 그런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 말이오. 여기에 어떻게 어려워도, 어려워도 이걸, 어려워도 능히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그 양을 여기에서 줬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그 양을 줬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양을 줬는데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여기에서 고장이  나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환경이 어떻다 그 자체가 어떻다 그런  핑계를 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맡은 양에게 대해서는 자기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양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이리 저리 핑계할 수 없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것을 결정을 지워야 하겠느냐?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양에게 대해서는. 주님이 나에게 어느 정도의 그 양을 내게 맡겼는지,  어느 정도의 성화를 맡겼는지, 구원을 맡겼는지 주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그  양은. 그 분량은 내가 그를 구원할 수가 있다, 구원 할 수가 있다. 할 수 있는  양을 주님이 내게 주셨다, 구원 할 수가 있다 그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  기억해야 되겠고, 또 그러면, 그 은사 위치에 있는 하나님의 사자로 말하면,  은사 위치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자는 자기에게 이 흠점을 어떤 것을 자기의  흠점으로 삼을 것인가? 자기의 흠점이 가기 마음 안에 있는 흠점인가 자기 생각  안에 있는 흠점인가 자기 몸 안에 있는 흠점인가 자기의 그 활동 속에 있는  흠점인가 그 흠점은 어디 있는 흠점이 자기의 흠점인가? 그 흠점이 사데 교회의  말단에. 사데 교회데 말단의 주일학교 학생이라든지 뭐이든지. 말단에 제일 그  신앙으로 제일 말단 교인의 그 흠점이, 말단 교인의 그 흠점이 누구의 흠점인가?  그 흠점이 누구의 흠점인가? 그 흠점이 사데 교회 사자의 흠점이라 사자의  흠점이라.

 그러면, 사데 교회의 사자의 흠점이라면, 그 말단 교인의 흠점이 사데 교회의  사자의 흠점이라면 그 책임진, 책임진 그 책임 위치에, 책임 위치의 흠점인가?  책임 위치에, 책임을 졌기 때문에 그게 안 되고 있으니까 그 흠점이 사데 교회의  사자의. 사자의 흠점이라 그렇게 책임상 흠점인지 책임상 흠점인지, 그렇지  안하면 책임상 흠점이 아니라 실상의 그 자체의 흠점인지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자체의 흠점인지 책임상에서 흠점인지, 책임상에서 흠점이라고 한다고  하면. 책임상 흠점이라고 하면 삼인칭이 들어가야 될 터인데 삼인칭이 되지  안하고 단 이인칭으로서 '네가 병이 들었다, 네가 병들었다. 네가 지금 죽게 돼  가지고 있다, 네가' 단 이인칭으로서 둘이 상대적으로만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흠점이 책임상, 교인에게 있는 흠점이 책임상 흠점인지 그 사자에게  흠점있는 그것이 그 교인에게 흠점이 되어서 교인의 흠점과 그 사자의 흠점이  동일한 흠점인지, 여기에 사자에게 있는 흠점이 치료되지 안했기 때문에 자기  맡은 그 교인에게 흠점이 치료되지 안해서 그런 것인지, 여기에는 괜찮은데  거기에 책임 맡은 양떼에게 흠점이 있으니까 책임상 네가 맡은 양떼에게 흠점이  있으니까 네 흠점이 아니냐 책임상 네 흠점이 아니냐 그렇게 책임상 흠점인지  자체의 흠점인지 이것이 어떤 흠점인지, 그래 어떤 흠점이라고 여러분들  생각합니까?  여기에 본문에는 책임상 흠점이라는 것을 암만 찾아 볼라 해도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해석 할 수 없습니다. 그 자체의 흠점이라 고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체 흠점으로 나타났지 책임상 흠점으로 나타나지를 안했습니다.

책임상 흠점이라면. 책임상 흠점이라면 벌써 거기에는 삼인칭이 되니까, 주님,  또 사자, 또 양떼 삼인칭이 될 터인데 삼인칭이. 삼인칭이 도저히 나타나지'  안하고 주님과 고 사자와 단둘이. 이인칭으로서 단 둘이 등장돼 가지고 서로  대화하고 있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면, 그 흠점이 사자에게. 사자 자체에게  있는 흠점이라 하는 것을 여기에다가 표시를 해 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맡은 학생이든지 교인이든지 그 교인에게. 만일  미치괭이가 있다 하면, 자기 맡은 양떼에게 미치괭이가 있다면 그 미치괭이를  치료하는 데에 그 미치괭이를. 내가 그 미치괭이를 고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은  다 잘못된 치료요 외식일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자기에게 미치괭이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거기에, 그게 치료되지를 못하고, 자기가 자체가 치료되지  안했기 때문에, 자체의 모형이 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치료되면 그건  치료됐을 터인데 그게 치료 안 된 것은 본체에 치료되지 안한 것이라.

그림자에게 치료되지 안한 것은 그 본체에 치료되지 안한 것이라, 모형에게  치료되지 안한 것은 원형에 치료되지 안한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그것은  원형인 그 자체에 그것을 찾아 가지고 치료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요. 만일 마귀가 들렸다 하면. 마귀가 들렸으면 마귀가 들린 그것은  그에게 마귀 들린 그걸, 그에게 마귀 들린 것은 네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난 그  모형이요, 모형의 근원은 원형인 네게 마귀 들린 것이, 마귀 들린 것이 있기  때문에 네게서 마귀 들린 고것을 찾아 가지고 고것만 고치면 고것은 저절로  고치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네가 앞서 걸어가면 그 모든 것은 염려할 것이 없이 따라온다.

네가 모든 교인들의 원형이기 때문에 네가, 원형된 네가. 너만 되면 그 모형들은  다 그대로 모형이 되어지고 있다, 네 원형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네 원형이요  너는 주님의 모형이요 너는 교인들의 원형이요 교인들이 너의 모형인데, 이제  주님은 그 원형 노릇을 바로 했기 때문에 네게 대해서 그분에게 원형이 흠점이  있어 가지고 네게 있는 게 아니고 거기에는 흠점이 없는데 그 고장은 지금 그  모든 교인와 말단의 형형 색색의 어떤 것이 있어도 그것이 있는 것은 곧 성경이  사데 교회에 말씀한 대로 내게 있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게서 찾는 것이  그것이 중요하다. 찾아서, 내게 찾아 가지고 원형인 내게 그것이 치료가 되면 그  다음의 것은 치료할 것이 없이 이게 치료되면 저절로 치료된다. 그러기 때문에,  앞서가면 그 모든 것은 따라온다. 네가 원형이 바로 되면 그 모형은 저절로  원형을 따라 가는 것이지, 원형을 따른 사진이지, 촬영을 할 때, 사진을 박을  때에 원형에 없는 것이 박혀지지 안하고 원형 그대로 박혀지는 것 아니냐? 그와  마찬가지로 너대로. 너. 너 모양대로 박혀진 것이 그것이 교인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를 모르거든 교인을 봐라. 그러기 때문에, 네게 흠점을 모르면 교인의  흠점을 보고 교인의 흠점은 곧 네게 있는 흠점이기 때문에 교인 흠점을 보고  그걸 고칠라고 네가 애를 쓰지 말고 네게 있는 그 흠점을 찾아서 고치면 그것은  저절로 고쳐지게 된다 하는 것을 여기 사데 교회서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에는 이 사데 교회에 대해서 시발적으로. 그러면 우리는  첫째 나를 등용해서 나를 나 되게 하셔 가지고 나를 나 되게 만들어 가지고  등용하신 이 주님 앞에 감사를 해야 되겠고 다음에는 주님이, 지극히 큰 배경이  내게 있으니 그 배경을 힘입어서 우리가 일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내 힘으로  일 할라고 하는 그 행동을 버려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내 주견대로, 나 하고  싶은 대로 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당신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에게는 그  무한한 능력이 다 저의 능력이 되어지는 것이고. 자기. 자기의 의견대로 하는  자는 자기의 힘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할  때에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가 다 나와 함께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고, 내 의견대로 할 때에는 주님의 권능은 하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저 혼자  저 혼자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등용하신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를 해야 할 것이고 또 주님이 내게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배경이  되어 있으니. 주님이 나를 등용하셨고 나에게 등용하시고 난 다음에 무한한  능력을 배후에서 가지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조심할 것은  뭐이냐? 내 마음대로 할라고 하는 그 생각 가지지 말고 주님에게 피동으로 할  것이고. 그러면 주의 능력으로 하게 되고. 내 마음대로 하면 주님의 능력은  상관없으니까 내 힘으로 해야 될 것이고, 또 주님의 능력. 주님에 피동되어  주님이 하라는 일 한다 할지라도 제 힘으로 할라고 하면 그것은 결국은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안할라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것이니까 자기 주장과 자기  힘이라는 거. 자기의 지능이라 하는 것을 이것을 엄금해서 자기의 기능을.

자기의 기능을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는 아주 대금물이기 때문에 이것을  용납지 안 해야 된다는 것, 그라고 난 다음에 할 일은 뭐이냐? 충성하는 것,  그런데, 마지막으로 또 하나 더 생각할 것은 뭐이냐? 모든 교인들에게 있는  모든 것은 사자의 모형이라. 사자의 모형이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있는 흠점은 그  흠점이 사자에게 흠점이 있기 때문에 그게 치료되지 안하기 때문에 사자에게  흠점만 치료하면 교인에게 흠점은 저절로 다 된다,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는  성경을 봐서 자기를 알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좋은 지혜요, 또 그거는 내적  증거요, 외적으로서는 자기에게 속한 교인들의 모든 형태를 봐서 자기 형태를  알고 교인들의 모든 흠점을 봐서 자기의 흠점을 알고, 모든 교인들의 흠점을  치료할라 할 때에 자기에게 있는 흠점만 치료하면 그 교인들의 흠점은 저절로  치료가 된다 하는 요것을 마지막으로 오늘 밤에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서, 기억해서 그렇게 우리가 굳게 섭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지만 틀리면 함께 하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진리를 바로 깨닫고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옵니다. 큰  능력이 와 가지고 우리와 같이하고 잘못 깨닫고 삐뚤어진 데는 자기가 뭐 생명  내놓고 뭐 자기 배를 갈라트리고 활복을 해도 하나님은 꼼짝도 안 합니다. 꼭  진리에 들어맞는 데에만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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