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

 

1986. 1. 26. 주일 오전

 

본문:누가복음 17장 5절∼6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을 증거하지 안하고 여러분들에게 제가 생각나는 대로 가르쳐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은 여게 강단에 서지 못할까 이랬었는데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설라고 했는데 힘을 주셔서 오늘 오전에 설교하게 됐습니다. 설교하면서 만일 내가 설교를 하나로써 끝을 마친다고 하면은 어떤 설교를 하고 끝내는 게 좋겠나 하는 그것을 생각할 때에 또 역연 이 겨자씨 믿음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가져서 또 설교합니다.

이 겨자씨 설교를 오랫 동안 계속했지만 이 겨자씨 설교에 대해서 제가 중간반이든지 주일학교서든지 또 이 강단에서 증거하는 사람들이든지 이렇게 봐도 아직까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겨자씨 설교에 대한 지극히 우리에게 보배로움을 입술로만 말하지 속에 느끼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빙빙 그렇게 돌고 있습니다. 이래서, 거게 대해서 뭐 설명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다 알아서 깨달을 만한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기독교의 그 원리 중에 하나인 예수님은 성공하신 것이 무슨 성공을 예수님은 하셨는가? 예수님이 성공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이룬 것이 예수님의 성공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신 것이 예수님의 성공입니다. 예수님의 성공은 이 외에 딴것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형상을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그 신성이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은 신성이요, 또 예수님의 인성이 아버지와 꼭 같은 인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는 말씀하시기를 ‘이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똑똑히 나타내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할 때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너희들이 이렇게 같이 있으며 보고도 알지 못하여서 또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또,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나타내서 보여 주신 이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데 그 본질과 본성과 속성이 다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은 형상이요, 아버지의 모형이요 아버지의 형상이요, 또 그 소원하시는 그 모든 소원이 아버지의 소원을 가지셔서 아버지의 소원과 꼭 같은 소원이시요, 또 행사가 아버지가 행사하는 그 행사와 꼭 같은 행사를 하신 것이 예수님의 행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대속을 하시고 또 삼 일 만에 부할하신 그 모든 예수님의 사활의 역사가 알맹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요, 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내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신 것은 볼 수 없는 아버지의 그 소원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나타났습니다. 껍데기는 예수님의 대속이요, 그 알맹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에 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그 성품,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소원,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그 사랑과 모든 계획 그대로를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유형의 형체를 가지시고 나타내서 이루신 이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과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내 말이 아니고 곧 내 안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내 말로 통하여 나타났다고 내가 하는 행사는 나 혼자 하는 행사는 하나도 없고 아버지가 내 안에서 행사하는 그 행사가 곧 나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설명은 말로 할라면 시간 모자라는데 예수님은 볼 수 없는 아버지의 형상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시요 한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나타나기는 여러 수억만으로 이렇게 나타내서 역사하지마는 단일성의 하나님이십니다. 단일성이라는 그 단어는 좀 알기가 어렵고 해석이 많아서 그저 그렇게 듣고만 있으면 됩니다. 어린 신앙에게는 뭐 그렇게 거게까지 나아가는 그런 신앙의 투쟁이 있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셔서, 신인 양성 일위이신 인성을 가지셨는데 인성을 가져서 우리를 대속하는 데에는 양성 일위가 됐지마는 언제나 인성은 피조물이요, 신성은 창조주요, 신성은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사람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성공은 우리의 성공인데 우리를 대표해서 하신 역사요, 예수님이 성공하신 것은 곧 그 성공이 우리를 대표해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성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공은 무엇이 예수님의 성공인가? 예수님의 성공은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과 일위가 돼 가지고서 인성이 신성과 털끝만치도 배치됨이 없이 하나 된 그것이 예수님의 성공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인성이 예수님의 신성 곧 하나님과의 털끝만치라도 모순됨이나 이질점이나 배치됨이 있으면 예수님의 도성 인신하신 그 목적도 다 실패요. 또 예수님의 인성도 다 실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공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예수님의 신성과 꼭 같이 된 그것이 예수님의 인성의 성공이요, 양성 일위가 꼭 하나님 아버지와같이 된 그것이 예수님의 성공이십니다. 이거 여러분들이 좀 알기가 어렵고, 그렇게 이 세간 이 교계에 나서 가지고 있는 흔한 말들이 아니기 때문에 좀 알아 듣기가 어렵지마는 신앙 생활을 할라고 하면은 여게까지 나아가지 안하면은 그 신앙은 중간에 마귀의 유혹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아직까지 어린 데에 유혹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성으로서 완성한 것은 어떤 것이 예수님의 인성으로 완성인가? 곧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된 것이 예수님의 인성의 성공이니, 하나 됐다, 말은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아서 거게 이질적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고 동질 동성의 완전히 하나된 고것이 예수님의 성공이요, 예수님의 인성의 성공이요, 예수님의 인성의 성공은 곧 우리를 대표한 성공이기 때문에 우리의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다 완성을 해 놓은 구원을 우리가 지금 받아서 우리 각자들이 자기의 구원으로 실상을 만들어 가질려고 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노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새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가 공짜로 은혜로 받아 가지고서 자기 것으로 강직하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저 먼저 ○목사님이 여게 신학 강좌 할 때에도 그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 펠라기우스라 하는 사람은, 구원을 인간이 노력해 가지고서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그것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고, 그 뒤에 회개를 하고서 이제는 펠라기우스주의가 반펠라기우스주의로 다시 회개를 했습니다. 그 회개한 거는 반은 하나님의 은혜요 반은 사람의 힘으로 된다 하는 그 반펠라기우스주의도 그것도 이단으로 정죄받고 그것은 용납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해서 그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 대표해서 다 이루어 놓은 것을 우리가 지금 자기 위해서 대신한 것인 것을 알고 이 구원을 입고 벗지 안하면 됩니다. 이 구원을 입고 벗지 않는 데에는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 다 걷힐 때에는 그런 것을 다 내어놓을지라도 예수님이 이루어 주시는 이 은혜의 구원을 빼앗기지 아니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로 주신 이 구원을 우리가 강직하기에 지사 노력을 해 가지고 간직한다고 해서 지사 노력이 우리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신 그 구원을 간직하는 간직의 노력에, 보존의, 보수의 노력에 불과한 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이룰 구원은 무엇인가? 우리들이 이룰 구원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성공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완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성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형상을 덧입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성공은 아버지와 꼭 같이되는 것이 예수님의 성공이요, 우리 성공은 예수님과 꼭 같이 되는 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온갖 요소가 있고 몸의 온갖 요소가 있고 영의 온갖 요소가 있는데 영은 주님을 완전히 닮았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고 또 우리의 몸도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구원을,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가 입는 것인데, 곧 입으면 예수님의 인성과 꼭 같은 우리의 인성이 되어져야만 우리의 구원의 성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성은 예수님의 신성과 ‘털끝만치도 배치된 일이 없었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하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라는 이 인성이, 내 영육으로 되어 있는 내가 곧 예수님의 인성에 연결돼 가지고 예수님의 인성의 그 중보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인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질된 것은 다 심판에서 불살라 망해지고 맙니다. 이질되지 안하고서 완전히 동질되어서 그리스도화된 것만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다 심판을 이기고 무궁세계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같이 있으면서 살고 있지마는 언제나 창조주는 창조주요 피조물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 구별은 되어 있고, 이 차이는 무한히 되어 있으나 창조주와 피조물이 조금도 이질적인 것이 없고, 본질과 본성으로도 이질의 것이 없고 다만 창조 피조, 자존자요 피조물이라는 그것만 다르지 이질의 것이 하나도 없고 움직이는 거는 순전히 자존하신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움직여지는 그 움직임으로 되어져 있는 것이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움직이심과 배치되는 움직임은 거게는 털끝만한 것도 없습니다. 배치된 거는 다 유황불 구렁텅이로 다 태워 버리고 순전히,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하나님의 그 본질과 본성과 꼭 같이 된 성화된 것 그리스도화된 것 하나님의 모형이 된 것 고것만 하늘나라 가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하나님화되는 이것을, 우리 사도들은 천 인이면 천 인, 만 인이면 만 인, 천태 만상의 모두 다 이질적의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천 명의 마음이 각각 다릅니다. 만 명의 마음이 각각 다릅니다. 성질도 다르고, 뜻도 다르고, 욕심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전부 다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이 세상에서는 말하기를 이것을 사람들의 개성이라 이렇게 말을 해 가지고 세상에서는 개성을 살려서 개성 그대로 성장시켜야 된다 하는 것이 세상의 통계요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의 천만의 인간의 개개성이 있으나 그 어느 누구를 따라갈 것도 아니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다 죽여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그 형상을, 그분의 본질과 본성을 완전히 닮아서 그분의 본질과 본성과 꼭 같이 되는 이것은 다 성화요 영생이 되고 나머지기는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우리는 다릅니다. 수많은 개성을 죽여 예수님 한 분의 그 단일성에 다 귀속, 화합, 성화되려 하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요, 세상은 천이든지 만이든지 얼마든지 갈라지고 갈라져 가지고서 다 갈라져서 개별적으로 그렇게 나가도록 하려는 것이 그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이 이루어지는 데는 뭘로 이루어질 수가 있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그러면 이루어지는 데에는 어떤 그 지역에 대통령이 위대하니까 이 지역은 이 대통령을 따라서 다 닮아가야 되겠고, 저 지역은 어떤 철학가를 따라서 닮아가야 되겠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마귀들이 내놓은 모든 사이비한 모든 거짓 종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이 교주를 딿고 저 교주를 고 그러나 기독교는 영원 자존하신 창조주 대주재 주권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단일 심판을 가지시고 단일 통치로 통치할 그분을 향하여 배워가고 닮아가고 본받아 가서 그분과 꼭 같은 것만 하늘나라에 용납하고 거게 배치되는 것은 다 멸망을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공심판이요, 또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리스도 인으로서도 이질적의 것은 다 멸망시키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을 따라서 닮아가기 때문에 닮아가는 이 구원은 다른 방편으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방편 외에는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이라 말은 내가 따라간다 그말입니다. 내가 따라간다, 천인 만인의 사상이 있어도 다 버리고 주님 한 분의 사상을 따라가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 사람이 천태 만상의 그 모든 인간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인간 개성을 다 버리고 주님 한 분의 그 개성, 자존자의 그분의, 그 한 분의 모든 본성을 따라가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하나님을 배워간다. 닮아간다, 본받아 간다. 하나님과같이 되어져 간다. 이래서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되어져 간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닮아갈라고 하니까 부득이 닮아가는 데에는 하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도 하나님을 닮아가야 되니까 하나님이 하는 그 말을 내가 따라서 해야 하나님 말과 내 말이 하나가 되겠고, 같이 되겠고, 또 성질도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따라서 그분의 성품을 따라서 내가 성품을 써야 그분 성품을 따라가게 되겠고, 내 마음도 그분의 마음을 내가 알고 원해서 그분의 마음을 내가 배울라고 따라갈라고 애를 써서 그분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이 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된 마음이라. 영생하는 마음이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뭐이라는 것을 너무 복잡하게, 사람들은 이쪽 면을 말할 때에 그 면만 강조하다 보니까 그것이 큰 것 같아서 기형이 돼 버리고 말고, 저쪽 면을 말할 때에 저쪽 면을 강조하다 보니까 그것이 또 크게 되어서 기형이 되고 말아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체계적으로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이것을 잘 구별하지 못해서 어떤 사람들은 참 코끼리를 보고서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게 구원이라 저기 구원이라’ 이렇게 체계 없는 이런 구원을 가졌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백 기독교가 되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간추려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이, 아버지와 꼭 같이 되는 그것이 예수님의 성공이요, 꼭 같이 돼 가는 게 아니고, 아버지와 꼭 같이 되어왔는데 세상에서 같이 되지 못하게 온갖 방해물이 있을 때에 그 방해에 제재받지 안하고 끝까지 하나됨을 변동하지 안하고 하나로서 끝까지 승리한 그것이, 사탄은 졌고 예수님은 승리했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리해 놓은 그것을 우리가 입고 살라고 할 때에 입지 못하고 벗으라고 하는 방해물이 많을 때에 방해받지 안하고 벗지 안하고 끝까지, 죽어도 끝까지 예수님이 이루어 놓은 인간 완성을 그걸 우리가 끝까지 가지고서 보수하고 보장하면은 그는 완성자로서 승리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이것은 다 그를 따라서 된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를 따라서 돼? 그분을 따라서 돼야 된다. 성질도 따라가야 된다. 마음도 따라가야 된다, 소원도 따라가야 된다. 뜻도 따라가야 된다. 지식도 따라가야 된다. 비판도 따라가야 된다. 평가도 따라가야 된다. 그분만이 완전하시고 그분의 것만이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을 향하여 내 불완전한 것이 시비하지 안하고, 동듯될 것으로나 시비를 하지 안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를 따라서 이렇게 가는 이것으로써 우리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 따라가는 것은, 따라가서 그걸 이루는데 영이 구원 얻은 것은 단번에 이루었지마는 심신은 수억만도 더 되는 그런 요소들이 다 있기 때문에 몸도 그 분자가 요새는 뭐 세포란 말이 많이 나 있지마는 실은 이 몸도 수억억만도 더 되는 분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것보다도 더 많은 분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수많은 분자들이 개별 개별이 하나님을 닮아서 따라서 그와 같은 동질의 것이 되어 지는 그것은 상상으로만 되어지는 것 아니고, 또 그것은 논리로만 되어지는 것 아니고 실상으로 되어져야 되기 때문에 실상이 움직이는 것은 현실에서만 움직이지 다른 데서는 움직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도 현실에 인정하는 것이라야 인정이지 현실에는 인정하지 안하고 과거로나 미래에서 그런 계획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후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고 고 현실에서 인정하는 고것이 실상이기 때문에, 그러기에 기독자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 하면은 곧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질로 되어 있는 타락한 우리들의 심신의 모든 것이 예수님이 대신해서 이루어 놓은 그것을 내가 입고서 벗지 안함으로써 내가 한 것같이 되어져 가지고 입는 것이니까 내가 하나님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데는 현실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을 벗어나서는 할 수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생각하면 논리로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에서만 가능한데, 그러면 현실에서는 수많은 현실로 자꾸 이렇게 교체돼 나갑니다. 교채돼 나가는데, 우리는 모르지마는 우리의 복잡한 현실을 만드신 이는 다 주님이 만드셨는데 우리는 조브라운 우리 주관을 가지고서 그 현실을 맞다 안 맞다 손해다 유익이다 뭐 좋다 하잖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화 시켜서, 하나님화시키면은 어느 정도나 하나님화되느냐? 하나님의 지체요 하나님의 몸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머리가 되기까지 우리를 하나님화시키겠다고 했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화시켜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용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수족같이 이렇게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여질 수 있는 거게까지 되어지도록 하나님이 하실려고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현실에서는 내 마음의 요 요소가 하나님을 닮아가고, 또 요 현실에서는 내 성질이 닮아 가고, 내 뜻이 닮아가고, 내 소원이 닮아가고 이래 닮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만났을 때에 반드시 자기가 만난 현실은, 자기가 만난 그 현실은 자기는 이해를 못 해도 그 현실은 하나님과 이질적인 것, 하나님과 이질적으로서 멸망받을 그것을 하나님과 동질을 만들라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노력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닮도록 하시는, 하나님 편에 있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 하나님의 것이 우리에게 나타탈 때에는 본체가 나타나지 안하고 그 영감이 나타나고 영감이 나타날 때에 진리가 나타나고 진리가 나타날 때에 그 말씀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내라는 심신의 요소와 대립이 되어 있는 상대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대립이 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심신은 이래야 되겠는데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이라든지 영감이라든지, 진리와 영감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해서 나와 배치되는 현실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입니다. 반드시 배치가 되지. 일치되는 일은 약간 있지마는 별로이 없습니다. 내 현실에는 내라는 편의 요소는 이랄라 하는데 그 상대방의 하나님 편에 속한 그 요소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서로 이래 대립이 되는 것을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면, 대립되는 그것이 대립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안하고 대립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은 성장되지를 못합니다.

왜? 대립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참되고 온전한 것이요 내게 속한 것은 이것은 다 잘못 되어 있는 사망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과 대립이 될 때에, 대립이 될 때에 그를 배척하고 대립된 나를 세워 가지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악령 악성 악습으로, 옛사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멸망을 받게 되는 것이고 대립될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그를 따라서 내 성질도 그를 따라가고 내 마음도 그를 따라가고, 내 소원도 그를 따라가고, 현실에는 소원이 나타날 때 있을 때는 내 소원이 그를 따라가고 현실에 또 성질이 나타날 때는 내 성질은 이라면 좋겠는데 그 성질은 이렇게 하라 하니까 성질이 따라가야 될 때도 있고, 마음이 따라가야 될 때도 있고, 소원이 따라가야 될 때도 있고, 취미가 따라가야 될 때도 있고 뭐 여러 가지 내 요소가 현실에서 하나님의 요소와 내 요소가 배치되는 이런 것을 우리가 볼 때에, 배치될 때 그때에 내가 이것을 부인하고 그를 따라가면 하나님과 이질이요 배치되는 것이 그이화됩니다.

그이화되어서 그를 따라서 내가 움직이게 되니까 그를 따라 움직이게 되니까 그 능력은 나를 주관했고 나는 그 능력에게 완전히 피동이 됐고 그 능력에게 완전히 삼키워졌기 때문에 그 능력화, 그 사상화, 그 주장화, 그 진리화, 그의 본질 본성화되어서 그것이 비로소 옛사람은 죽어지는 것이요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이요 그리스도화되는 것이요 성화되는 것이요 그것이 이제 고쳐서 죽은 것이 사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죽은 것이 사는 것이요 썩은 것이 이제 썩지 안할 것으로 되바꿔지는 것이요, 약한 것이 강한 것이 되어지는 것이요,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 되어지는 것이요,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요, 악령 악성 악습의 것이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로 변화되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것, 이거 암만 말해도 안 믿으면 소용없습니다. 믿는 자는 반드시 그 능력을 만나 볼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만하면 다 되고 제가 지금 읽겠습니다. 요걸 받아 쓸 사람들은 받아 쓰고, 가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읽고 뜻을 깨달으십시오.

이 시간 내게 있는 악마와 죄와 사망을 멸하고 내 세상을 양식으로 먹어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갈 수 있는 전지 전능한 영생력은 내 현실에 가득 쌓여 있다. 받아 가지면 된다. 무엇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진다. 다 내어놓고도 겨자씨 믿음 산 믿음만 가졌으면 뽑고 옮기고 심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되어 모든 피조물을 상속받고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계속된다 현실에 하나님의 영감에 직접 순종은 다 영생력이다.

녜, 그만 쓰고 이제 고거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단단히 들으십시오.

‘이 시간에, `이 시간’ 우리가 지금은 예배보는 시간 아닙니까? 이 시간은 자기 현재라 말입니다. ‘이 시간 내게 있는’ 우리에게는 악마와 죄와 사망이 언제든지 우리 안팎에 숨어 있고 둘러싸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악마와 죄와 사망을 멸하고’ 이걸 멸하면 우리는 사망이 없습니다. 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이걸 멸하면 육적도 망하는 일이 없고 죽는 일이 없습니다. 죄 이놈을 멸하면 모두 망하는 것은 죄값으로 망하기 때문에 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악마 그놈이 멸해지면은 우리를 유혹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원수는 악마와 죄와 사망이 우리 원수인데 이 세 가지 원수를 원수로 모르는 사람은 저는 일생 동안 천하를 차지해도 비참하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마귀가 우리의 원수입니다. 마귀 요놈은 언제든지 우리를 삐뚤어진 생각, 삐뚤어진 마음, 삐뚤어진 정신, 모두 다 삐뚤어진 취미. 삐뚤어진 옥심 삐뚤어진 것만 가지게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러기에, 마귀는 죄를 낳습니다. 죄는 삐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 삐뚤어진 거 가지고 망합니다. 자기 일생 사는 가운데에 삐뚤어진 말, 삐뚤어진 생각, 삐뚤어진 소원, 삐뚤어진 취미, 삐뚤어진 것 잠깐 한번 맛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일생 그 댓가 내느라고 다 죽자껏 고생하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원인이 어데서 온 것인지도 모르고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망, 망하는 것 죽는 것 이것을 멸하고 이것을 멸하는 능력 말이오. 이것을 멸하는 능력을 받아야 되겠는데 내 현실에서 나를 해치는 악마와 죄와 사망을 멸하는 능력을 내가 받아야 되겠는데, 그 능력은 내 현실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이놈 멸하는 능력을 우리가 가지지를 못합니다.

또, 그걸 멸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양식으로 먹어’ 내 세상이라 말은, 내 세상은 어떤 것이 내 세상인가? 내 세상은 내 현실은 내 세상입니다. 내 현실은 내 세상입니다. 내 현실은 내 세상이라는 말은 자기가 지금 자기 현실에 사람의 활동 범위에 따라서 자기 현실에 어느 한 회사가 자기 현실에 관련돼 있는 사람도 있고, 나라와 관련돼 있는 사람도 있고, 세계가 관련돼 있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활동 범위에 따라서 자기 현실에는, 어떤 사람은 여게 앉았지마는 자기와 관련돼 있는 것은 세계와 관련이 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그것이, 다 자기 현실에 그거는 자기 세상입니다. 자기 세상. 이거 아주 넓은 말입니다. 얼마나 큰 말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이런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큰 말인지 모릅니다.

‘내 세상을’ 내 현실에 관련된 모든 것은 내 세상입니다. 자기에게 무슨 이 기후가, 천연 기후가 무슨 바람이나 무슨 전쟁이나 이런 무슨 비나 뭐이든지 그런 거와 관련이 되어 있으면 그것도 다 내 세상입니다. 내 세상인데, ‘내 세상을 양식으로 먹어’ 그 모든 것이 나를 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결국은, 내 양식 먹으면 내가 자라는 것처럼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자라고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힘을 얻고 그것으로 내가 유익보는 온 피조물이 내 양식이 될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상을 양식으로 먹어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예수의 분량이라 말은, 예수와 같은 자로, 예수와 꼭 같은 자로, 그리스도와 꼭 같은 자로, 우리가 무슨 돈으로 자라고 세상 지식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예수로 자라고 그리스도로 자란 것, 예수의 요소로 자라고 그리스도의 요소로 자란다 말입니다. 예수로 자라고 그리스도로 자란 것, 예수로 자라는 것은 어떤 것이 예수로 자라는 것인가? 신인 양성 일위가 예수입니다. 예수로 자란다 말은 하나님하고 나하고 하나되는 것으로 자라는 것이 예수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자라는 것은 제사장 선지 왕, 모든 천상 천하의 피조물의 중보자가 되고 피조물에게 복의 기관이 되고, 피조물을 통치할 수 있는 그걸로 자라는 것이 그리스도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큰 말인지, 다른 이종교는 이렇게 큰 말이 없고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 말에는 이렇게 큰 말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갈 수 있는’ `악마와 죄와 사망을 다 멸하고 내 세상을 양식으로 잘 먹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갈 수 있는 전지 전능한 영생력은’ 전지하고 전능한 그 영생하는 영생력은 영생하는 그 능력은, 힘은, ‘내 현실에 가득차 있다.’ 우리 현실에 가득차 있습니다. 요것을 믿는 것이 요것이 문제인 것입니다.‘가득차 있다 받아 가지면 된다’ 현실에 가득차 있는데 받아 가지면 된다. 현실에 가득찼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내 현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요렇게 해라’ 직접 `요렇게 해라' 네가 요 마음을 가지라, 네가 이 시간 요 성질을 가지라, 요 뜻을 가지라, 요 소원을 가지라, 네가 요 주장을 가지라, 요 말을 해라, 요 비판을 해라, 요 대립을 해라, 요걸 주장을 해라, 요 행동을 해라, 요 마음을 네가 가지라’ 그것이 내게 있어서 악령과 죄와 사망을 다 멸하고 온 세상을 양식으로 잡아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갈 수 있는 실력입니다. 자라갈 수 있는 실력입니다. 요 실력을 믿는 것이 요것이 문제입니다. 요것을 믿지 않습니다. 요거 믿는 것이 요것이 능력입니다.

‘받아 가지면 된다’ 그러면, 내가 받아 가지면 된다. 주님이 이 시간에 `아, 네가 요 마음을 품어라.’ 할 때에 내가 고 마음을 품으면 전능을 받았습니다.

전지를 받았습니다. 영생력을 받았습니다. 요 마음 가지라 할 때에 고 마음 가졌으면 고 마음 가진 고것이 전능 가진 것이요 전지 가진 것이요 영생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렇게 똑똑히 요래 가지고서 똑똑히 알려서 요렇게 알려 놓은 글이 없습니다! 암만 말해도 믿음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듣지를 안합니다.

받아 가지면 됩니다. 내가 이 시간, 환경에는 수많은 사이비한 것들이 가득히 많은데 주님이 내 현실에 ‘아, 너는 요 말을 해라’ 할 때에 내가 그 말을 할라고 하면은 거게서 어떨 때는 생명을 내대야 될 때도 있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있고, 사자 구덩이에 들어가는 일도 있고, 불미 속에 들어가는 일도 있고, 고 말 요 말을 해라 할 때에 고 말이, 마귀를 잡아 먹는 것이요, 죄를 잡아 멸하는 것이요, 사망을 멸하는 것이요, 세상을 대항하는, 세상을 내가 완전히 밥으로 잡아 삼켜서 완전히 양식을 삼는 것이요 예수와같이 그리스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내가 자라가는 그 능력인 것입니다. 요 능력을 요 능력으로 알고 나가면 왜 다니엘과 같은 것이 다 우리에게도 다 있지 없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을 현실에 내가 받아 가질라고 할 때에 ‘무엇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진다’ 무엇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진다 하면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요 현실에 전지 전능의 영생력인, 하나님이 요 성품을 가지라 할 때에 고때에 고 성품 가지면 그게 전지 전능의 영생력인데 고 성품 가질라 하니까 죽일라 합니다. 고 성품을 가지면 내가 죽고 불에 들어갑니다. 고 마음을 가져도, 고럴 때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겨자씨 믿음입니다. 그게 산 믿음이요 생명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가 그것을 가질라고 하면은 ‘내가 이때 현실에서 주님이 요 마음 가지라 할 때에 요 마음 가지고, 요 말 하라 할 때에 요 말 하고 요 성품 가지라 할 때에 요 성품 가지고 요 뜻 가지라 할 때에 요 뜻 가지고, 요 주장하라 할 때에 요 주장하고 요 행동하라 할 때에 요 행동하고 그거 뭐 가지면 되지’ 어림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진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가서 새기십시오.' `무엇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진다’ 가지고는 못 가진다. 아무래도 내가 살아야 될 거 아니가? 내 생명은 내가, 재산이야, 그 지위고 권세고, 직장이고 다 냅두고 내가 생명 하나는 가지겠다 네가 생명 하나 가지고는 못 가진다. 소유도 몸도 생명도 다 뼛겨도 요것만은 내 주지 않겠다 하는 요거 아니면 안 된다! 안 된다! 뭐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진다.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고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하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요렇게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독자가 천물이 됩니다. 왜 기독자가 왜 세상을 못 이깁니까! 왜 나라를 못 이깁니까! 왜 공산주의를 못 이깁니까! 뭣 때문에 왜정 일본 나라를 못 이깁니까! 못 이깁니까! 하나님을 반대하는 그 국가 세력을 왜 못 이깁니까, 못 이기기를! 요걸 믿어아 합니다! ‘무엇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진다. 다 내어놓고도’ `내 내어놓고도 소유와 몸과 생명과 직장이나 모든 걸 다, 가족이나 어떤 걸 다 내어놓고도, 왜? 가지고는 못 가지니까. 가지고 가질라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가서 ‘이것 가지면 안 된다’ 그러면 그거 내어놔도, 나중에 가서 목숨 ‘네가, 네가 살라면 이거 하지 말아라’ 그때는 목숨을 내어 놓고라도 요 겨자씨 믿음, 그 현실에서 내게 대한 하나님이 뜻,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이 성품 가지라, 이 마음 가지라, 이 뜻 가지라, 이 말 하라, 이 주장하라 이 소원하라, 네가 이 사람이 돼라 하는 요거 가진다는 것이 쉬운 거 아닙니다. 전지 전능의 영생력이기 때문에 그리 쉬운 것 아닙니다.

뭐이든지 가지고는 못 가집니다.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고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과 꼭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다 내어놓고도 겨자씨 믿음, 생명 있는 믿음’ 하나님께 직접 순종하는 이 순종, 영감 순종, 하나님께 직접 순종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서 내가 마음 가지는 것이, 하나님이 요 마음 가지라 할 때에 그 마음을 가지는 것이 힘이 들어도 그 마음 가지는 그것은 전지 전능의 영생력을 가진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양보하지만 안하면은 온 세상은 나한테 반드시 굴복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반드시 정복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내 세상은 내가 밥으로 먹어서 완전히 소화해 가지고서 그로서 자라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요걸 믿어야 합니다! 암만 해도 요걸 믿지 않습니다! 깨닫지를 못해. 믿지 안해.

껍데기로 훌훌 이라니까 그게 깨달아질 리도 없는 것이고 믿어질 리도 없는 것입니다.

‘겨자씨 믿음 산 믿음만 가졌으면, 그 역사로 나는 죽는 줄 알았는데 가졌으면 그 사람이 죽을 때가 됐으면 순교로 죽어서, 그 죽을 생명이 참 폐물 이용으로서 영광스럽게 되고, 그 생명이 남아 있으면 온 세상이 달라들어도 절대 못 죽입니다.

불 속에도 넣어도 못 죽입니다. 사자 구덩이 속에 넣어도 못 죽입니다.

공산주의가 막 둘러싸도 못 죽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밥이 됩니다! 밥이 됩니다! 그거는 나의 이용물이 되고 맙니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커집니다! 자랍니다! 그것은 완전히 나에게 정복을 당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뽑고 옮기고 심어’ 뽑는 역사 옮기는 역사 심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때 나는 우리는 뽑을 것 심을 것 모릅니다. 내가 믿음을 지킬 때 뭐이 뽑혔는지 역사 후에 뒤에 가 보면 알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오랜 후에 알지, 나는 뽑을 것 ‘이것 이라면 뭐 뽑나?’ 그것 모릅니다. 나는 산 믿음 지킬 때에 그때에 반드시 뽑히고 옮기고 심기는 역사는 있지, 없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면 거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고 예수화됩니다.

그리스도화됩니다. 되어, 모든 피조물을 예수님같이 상속받고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우리에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 하나님의 영감에 직접 순종은 다 영생력인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감에 직접 순종은 영생력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현실에! 영감에! 직접 순종은! 다 영생력이다! 요걸 믿으십시오. 내가 현실에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은 손을 움직이라 할 때도 있고 발을 움직이라 할 때도 있고 눈을 움직이라 할 때도 있습니다. ‘너는 조것을 봐라’ 할 때 내가 보면은 그 보는 것이 아무리 힘이 들고 어떤 애로가 있어도 보는 그거는 영생력을 가졌습니다. ‘네가 이거는 네가 말하지 말아라’ 할 때에 말을 안 할라 하면은 힘이 들지만 말 안 하는 고거는 영생력을 가졌습니다. 네가 요거는 보지 말라’ 할 때에 내가 안 보면, 안 보는 그게 안 보기가 힘이 드니까, 아이구 뭐 안 볼라 하니까 그게 힘이 들고 좀 보라고 그래 쌓는데 안 본다고 말이지, ‘국기를 바라봐. 저 신상을 바라봐, 바라보라 할 때에 바라보지 안하고 떡 이와같이 꿋꿋하게 이래 섰을라 하니까 눈을 뺄라고 달라듭니다. 눈을 뺍니다. 안 빼는 게 아니라. 눈을 빼. 그 얼마나 어려운지? 빼도, 그거는 영생력이라 뺄 것같이 보여지지마는 빼서 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존귀가 되어 가지고서 유익하면 눈을 뺐을 것이고, 그에게 손해가는 일은 절대 되지를 않습니다. 요거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되고 하나님의 전지 전능을 믿어야 되고 영생력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이가 보디발의 아내가 말할 때에 그때 고 현실에서 그 여인에게 미혹받는 것은 영감의 명령은 아닙니다. 미혹받는 것은 그 여인에게 피동되는 것이지 영감에 피동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의 영감에 피동돼 가지고서 그 미혹을 받지 않는, 미혹받지 않는 고 행동은, 미혹받지 않는 고 마음이나 미혹받지 않는 고 행동은 고것은 영생력이라. 영생력이기 때문에 전지 전능의 능력이라 애굽 그까짓 거 전부보다 세력이 더 커.

우리가 현실에서 영감에 피동되는 내 언행 심사는 영생력 가진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요걸 믿어야 됩니다. 믿고 요 영생력을 양보하지만 안하면! 이길 자가 없습니다! 어떤 세력에도 이깁니다! 왜 못 이깁니까 못 이기기를! 뭣 때문에! 오늘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요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확실히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 놓지 마십시오. 그것이 영생력이요 그게 전지 전능의 능력이요 그것이 곧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이요 그것이 하늘과 땅의 것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장자의 권위를 자기가 가진 것입니다.

요것을 많이 자꾸 읽어 보고, 요걸 많이 읽어서 고 뜻을 깨달으십시오. 깨달으면 혹 오후에 거게 대해서 덧 붙여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강령을 좀 줄기를 할 수 있으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너무 벅차서 힘이 없어서, 그거 역설을 해야 되는데 내가 힘이 없으니까 뭐 역설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뭐, 주는 대로 하지요.

할 수 있으면 할 것이고 또 힘이 없으면 또 못 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겨자씨 믿음을 놓지 마십시오. 내 현실에 영감의 인도는 천하보다 낫습니다.

우주보다 낫습니다 현실에서 주님의 영광 고거 내버리고 천하를 차지해도 저는 패전자입니다.

<기도>믿음은 주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저희들이 경험에도 체험에도 확신합니다. 겨자씨 믿음을 말씀하였사오니 아무 공로 없는 저희들이지마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인하여 영감과 진리가 우리들을 밝게 하시고 깨닫게 하사 확신을 주시옵소서. 이리하여서 점점 이 겨자씨 믿음, 현실에서 주님의 영감대로 움직이는 것은 온 천하를 다 구원하는 것이며 점령하는 것이며 승리하는 이 능력이 되는 것을 확실히 믿고 현실에서 확고한 주님의 뜻을 양보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현실에서 주의 뜻인 것을 확실히 알았으면 이거는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요, 이기면 생명도 죽어도 다 살고 거게 있는 것인 것을 확실히 깨달아서 이 겨자씨 믿음을 놓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것이오니 믿음을 주셔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주님 모시고 살므로서 이 나그네 세상을 염려 없이 지나가고 주의 법도대로 사는 것은 다 생명과 평강인 것을 깨닫고 이 법도를 떠난 그 모든 것으로써 자기를 찌르고 자기를 망치고 자기를 고통케 하는 그런 어두움의 행위를 벗고 다시는, 주님의 인도 따라서 염려 없는 평강 가운데 사는 저희들이 되도록 항상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전도하느라고 수고한 종들에게도 더우기 인간을 구원하는 그 사랑의 불이 붙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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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 산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26주후 선지자 2015.11.03
» 산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26주전 선지자 2015.11.03
821 산 소망/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81009주후 선지자 2015.11.03
820 산 소망/ 베드로전서 1장 3절-4절/ 881009주전 선지자 2015.11.03
819 산 제사/ 로마서 12장 1절-13절/ 810118주전 선지자 2015.11.03
818 산 제사- 산 제물/ 로마서 12장 1절/ 810301주후 선지자 2015.11.03
817 산기도, 예수님과 말씀 순종/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30716토새 선지자 2015.11.03
816 산믿음 죽은믿음/ 신명기 28장 1절-6절/ 851209월새 선지자 2015.11.03
815 산제사를 드려야하는 이유와 방법/ 로마서 12장 1절/ 800418금새 선지자 2015.11.03
814 살리는 반사직/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840408주새 선지자 2015.11.03
813 살리는 방편/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20509주전 선지자 2015.11.03
812 살리는 복음/ 베드로전서 1장 24절-25절/ 820704주새 선지자 2015.11.03
811 삶의 가치/ 누가복음 12장13절-21절/ 800108교역자회 선지자 2015.11.03
810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6월새 선지자 2015.11.03
809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전 선지자 2015.11.03
808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1수야 선지자 2015.11.03
807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4토새 선지자 2015.11.03
806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새 선지자 2015.11.03
805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후 선지자 2015.11.03
804 삼 단계 믿음/ 히브리서 11장 7절/ 810225수새 선지자 201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