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

 

1988.10. 9. 주일오전.

 

본문: 베드로전서 1장 3절∼4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신 분이시며 한 분뿐이십니다. 동서양에 하나 님이라는 그런  비슷한 이름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을 존대하는 그런 모든 관념들과  상식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유교에서도 불교에서도, 다른 모든 이종교에서도, 여러 철학이나  문학이나 세상에 어떤 사상이나 주의든지 다 하나님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앓지 못하는 분을 추측으로 추상으로 그렇게 추론해 놓은  것입니다. 이래서, 하늘님이라 하는 것도 우리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한울님이라고 하는 것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아닙니다.

 또 천주니 하는 것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또 천어중 주신이 라고, 이  주신이라고, 하늘의 주인되는 그 주신이라고 믿는 것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래서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한울님, 이것은 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부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 자존하신 한 분뿐이신 이라고 해서 하나라고 해서 하나님이라고  하나이신 주재를 가리켜서 하나님이라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부릅니다. 땅위에는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는데 다만 하나님 당신이 당신의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계시해서 성령이 감동으로 기록해 주신 하나님의 지식에서 하나님을  말씀하신 하나님이 계시니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바라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 홀로 계시는 분이신데 그분은 스스로 계셨고 완전하시고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그분의 역사는 수많이 나타나나 그 모든 역사는 다  단일성의 역사입니다. 단일성의 역사입니다. 수많은 역사가 있으나 그 역사는 다  하나의 역사요 하나의 이치요 또 하나의 완전에서 다 발상돼 나온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이 그를 상대하지 못하고 다만 인류 시조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상대한 것으로 그렇게 기록돼 있으나 그는 곧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당신이 신비하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이시요 또 완전이시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자마다 소멸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크신 하나님을 사람들은 상대할 수 없는 것은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완전이 우리에게 없으므로 상대하지 못하고 또 그는 지극히 성결하기 때문에  더러움을 가진 우리 사람들은 상대하지 못 합니다. 그분이 전지한 지혜로 입법해  놓으신 그 입법은 생명의 자유법인데 그 자유법이 있게 붰고 자유법에 따른  하나님의 공심판이 있게 돼서 사람들은 다 완전한 그 완전법, 자유법, 생명법에 다  저촉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유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고, 또 하나님과의 직접 연결된 은혜를 받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셨고, 또 영원 전부터 주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시기 위해서 첫째는 우리에게 자유의 법을, 생명법 자유법을  주셨는데 자유의 법의 그 일부분의 일조가 되는 그 법에서 범죄해서 영원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원수가 된 사람들이 됐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사랑으로 버려두지 못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려고  하나님이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는 데에는 중대한 문제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문제는  우리가 범죄한 그 죄의 값은 사망으로 하나님의 공법에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범죄로 영원한 사망을 우리가 받게 되는 그 죄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는 첫째 순서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이 돼야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킬 수가 있지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망에서 해방시킬 수가 없으니 사망 안에 있는 자에게는 아무 구원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를 사망 안에 있는 이 사망에서 구출하는 데에는 이 죄를 없애야  하기 때문에 죄를 없애는 베에는 죄는 권리로도 없앨 수 없고 지혜로도 없앨 수  없고 죄라는 것은 형을 받아야 그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사망케 되는 이 죄를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형을 대신  받으실려고 사람되어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범죄한 그 형은 사람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 형을 대신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습니다. 이래서,  당신이 친히 우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우리 각자들에게 분담시키고,  그러면 나기도 전에 그분이 우리의 범할 죄를, 나기도 전에 우리가 범할 죄를 다,  우리에게 부담을 시킨 그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다 우리 대신 죄를 부담시켜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다 대신 맡아서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서 정죄받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정죄받으시고 그 죄의 형을  대신 받으셔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의 삼위 일체의 하나님 중에 제  이위인성자이신데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은 우리 죄름 담당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쥐의 형을 대신 받기  위하셔서 형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과 또 하나님의  법을 이행하지 못한 것과 하나님에게 속해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배반한  배신한 이 세 가지 죄값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 전지의 입법을 다 이행을 해야 정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전지의 입법에 완전 이행자가 되지 않으면 정죄받는고로 전지의  입법을 완전 이행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 대신 당신이 전지의 입법을 대행하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대행하셔 가지고 비로소 이 대형으로 사죄 주시고 대행으로  칭의를 주셨습니다. 대신 행함으로 하나님의 지공하신 이 심판에 우리를 의로운  자로 통과를 시키셨습니다.'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불목한 죄값으로 대신 죽으셨고 하나님과 화친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전부를 다 기울여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서 완성을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과 완전 화친을 가져서 생명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비로소 아버지로  부르게 됐습니다. 이러면,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우리 세 가지 죄로 인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 없는 자의 위치에 섰고, 또 하나님의 공심판에 의로  인정받은 그 위치에 섰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의 부자의 그 위치에 서게 된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 가지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죽으심으로  우리는 사죄 칭의, 화친의 이 공로를 입어서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래서, 죄에도 자유, 마귀에게도 자유, 사망에도 자유, 하나님에게도 자유하는 이  자유자가 되었는데 이렇게 공로는 베풀어서 우리는 죄에, 사망에, 마귀에,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공심판에 자유자는 되었지마는 이 자유를 누릴 만한 그런  존재가 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이 구원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우리 대신 부활하시는 이 부활을 당신이 개척했습니다. 이래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인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그 길을 여는 데에는  하나님이 또 사람되어 영원히 피조물의 형상을 가지지 않으면 이 죽음에서 새로  부활이라는 이 개척이 있을 수가 없어서 우리를 죽은 가운데서 영원히  부활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는 우리를 죄의 문제를 완전 해결지웠고, 의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지웠고, 하나님과 불목된 문제를 완전히 해결은 지우기는 지웠지마는  이 구원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새생명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이 구원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새생명을 주는 데에는 죽음에서  부활하는 이 부활의 길이 열려야 되기 때문에 이 부활의 길을 열기 위해서  주님이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것은 당신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우리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 끝을 냈으니까 이것으로써 우리의 사죄, 칭의, 화친은  완료가 됐기 때문에 당신은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되고 사람을  입지 않아도 되고 사람되지 않아도 우리는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은 받은  자가 됐습니다. 우리는 죄없는 자 됐고 의로운 자 됐고 하나님과 화친되어  부자간이 되는 이런 친목을 가지기는 가졌지마는서도 살아나지 못하니까 이  구원을 누리지를 못하게 되는데 이 구원을 누리는 데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사람되는 이 사람을 입어서 하나님이 영원히 피조물되는 이 피조물의 이 위치를  당신이 취해서 피조물이 되어져야만 우리에게 죽음에서 부활하는 이 부활의 길을  열 수가 있어서 예수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혹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육체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부활했으니까 이는 참 죽은 것은 슬프고 고통이고 희생이지마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영광이요 성공이요 기쁨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지마는, 예수님이  일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피조물되신 그 고난도  컸지마는 영원히 피조물이 되셔서 우리에게 이 부활을 보존하는 이 일은 더 큰  희생이 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들을 죽은 가운데서 중생하는 이 중생을 줬습니다. 이래서 3절 끝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중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중생을 하지 못합니다.

 비유가 잘 안 되지마는 그가 평생 죄수로서 평생 징역을 정죄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거게서 다른 사람이 그 형을 대신 해서 거게서 죄없는 자로  해방을 하고 출감을 했다 할지라도 생명이 없으면 그거는 송장이 해방받은 것  한가지일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그 사죄, 칭의 화친을 누릴 수 있는, 누릴 수가  있는 존재가 없게 된 그것을 우리로 그 존재가 되게 하셔서 사죄, 칭의, 화친의  구원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영원한 피조물을 입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중쟁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한 것은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세 가지, 공로로  영생할 수 있고 그는 완전자로 살 수 있는 이 배경과 자원은 됐지마는서도 이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죄, 칭의, 화친, 죄없는 자.

하나님의 공심판에 인정받아 통과된 의로운 자. 하나님과 화친된 자 이 자가  되기는 됐지마는 이것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하고 죽어 있기 때문에  여게서 다시 살려야 되는고로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중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중생한 것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를 사죄, 칭의, 화친의 구원을 하셨고 다시 사람되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중생하는 은혜를 헛습니다.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사람으로  부활하게 하셔 가지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이 중생의 은혜를 줬습니다.

 우리가 중생한 것은 세 가지로 중생했습니다. 세 가지로 중생했으니 하나는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으로 우리가 중생의 자본이 됐습니다. 이 중생한 것은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인데 영생하는 생명은 죄가 없는 무죄가 근거가  돼야 되고, 또 하나님의 공심판에 의롭다 인정하는 것이 근거가 돼야 되고,  대주재이신 자존자이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되는 이 근거가 있어야만 되지 이  근거 없으면 영생하는 생명은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중생된 것은 세 가지로 중생됐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의 공로가 우리 중생된 근거가 되어졌습니다. 중생된 근거가  되어져서 우리가 중생된 근거가 되어졌고, 자본이 되어졌고 또 예수님이 영원히  사람되어, 피조물되어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중생된 근거가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중생된 것은 영원히 멸망 가운데서 법적으로 사죄됐고 칭의됐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은 됐지마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살 아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신 주님이  피조물로 영원히 다시 피조물을 입고 나섰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영원한  생명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지 않는 영생하는 이 생명으로 우리가  중생되는 거 중생이라 말은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씀한  것인데 우리 육이 아니고 영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는데 다시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이 세 가지 공로와 또 부활하신 공로, 예수님의 사활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세 가지 우리를 구원하신 대속하신 공로가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다시 날 수 있는 영생할 수 았는 근거가 되는 이 대속이  있어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는 중생하게 됐습니다. 이 사활의  대속으로써 중생할 수 있는 밑천이 됐습니다. 중생할 수 있는 근거가 됐습니다.

중생할 수 있는 바탕이 됐습니다. 중생할 수 있는 자원이 있게 됐습니다.

 우리가 죽은 가운데서 영생으로 중생하는 것, 영생으로 중생한 이 우리 중생은  이 중생의 자본이 어떤 자본인가? 중생의 자본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과  사람되어 가지고 모든 우리의 형을 대신 담당해서 죽은 형을 받은 것과 또  우리가 행하지 못한 것을 우리 대신 행하신, 이 대행의 의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대신 화친케 하신 이 죽음으로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의 공로와,  영원히 피조물을 입고 계시는 영원히 피조물로 부활하신 이 큰 희생의 공로로  우리가 중생할 수 있는 자본이 됐습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중생하는 밑천은 예수님의 사활이 우리 중생하는 밑천입니다.

우리가 중생된 것은 예수님의 도성인신 하셔서 우리 대신 사활하신 이 공로로  인해서 우리들이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자본은 됐고 근거는 됐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생을 한다 할지라도 이 예수님의 대속의 죄 문제가 해결 안 돼도 헛일,  또 칭의 문제가 해결 안 돼도 헛일, 화친 문제가 해결 안 돼도 헛일, 또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 문제가 해결이 안 돼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 가지 해결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한 가지 해결 이 네  가지 해결, 곧 둘이라면 둘, 둘이면 하나를 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대속을  말하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대속한 것을 말해서 둘이라면 둘이고 나눠서 말하면  넷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이 우리가 중생된 자본이 되고 근거가 되고  밑바탕이 되고 기초가 됩니다. 이래서 우리의 이 중생한 것은 그냥 하나님이  살렸다고 살린 것이 아니고 그 기초에 자본이 예수님의 사활이 자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 가지 우리 대신 한 것이 자본이 됐고 영원히  피조물을 입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영생의 한 가지 자본이 되어서 이 네  가지가 합해 가지고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이 자본이 됐습니다. 자본이 됐으나  자본은 됐지마는 우리가 실지로 살아나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래서 자본은  가졌으니까 살수는 있는데 사는 그 능력이 문제입니다.

 이래서 이 네 가지 자본과 두 가지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두 가지로  살아났는데 한 가지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감동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감동으로 우리가 살아났고 하나는 진리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살아난  것은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살아났는데 살아난 그 밑천은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 부활 이 네 가지로 자본이 돼 가지고 완전히 자본이 된 여게다가 성령님과  진리가 우리를 살려서 우리가 중생된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중생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으로 중생된 것입니다. 영생으로  중생된 것인데 우리의 영은 단번에 완전 중생을 했고 우리의 심신은 법적으로는  중생을 했지마는 이것이 실질적으로서는 완전 중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이 영원히 죽지 아니할 이 마음으로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으로 살아나기  위해서 이 구원을 입고 갖주는 것이 지금 성도들이 땅위에 살아 있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된 것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 나게  하사' 했다 말은, 거듭나게 했다 말은 우리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은 죄와 허물로 다 죽었습니다. 안 죽온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다 죽었습니다. 부정모혈로 난 일반인은 전부 원죄와  본죄의 값으로 다 죽었고 하나님과 다 원수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산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류에게는 산 자가 하나도 없고 다  죽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이 감추었기 때문에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저는 산 줄로 알고 하루 살면 '하루 살았다'또 일 년 살면 '일 년  살았다' 이렇게 생각하나 성경은 그 도리를 가르쳐 주고 있기를 그에게 하나님이  너는 얼마 동안이라는 그 기간을 통해서 완전 사망을 하도록 완전 사망하는 그  기간이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하루 동안에 완전 사망하는 자도 있고 또 백 년  동안에 완전 사망하는 자도 있고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 동안에 완전 사망이  됐습니다.

 그러면 사망하는 기간이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는 것뿐이지 사람들은  다 완전 죽었기 때문에 완전 죽은 그것이 죽음이 끝나는 것이 언제냐 하는  끝나는 것은 세상을 뜰 때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사는 줄 알지마는  하루 살았으면 그 생명은 그만치 감소됐습니다.

그래서 감소되고 감소돼서 마지막에 백 년을 살기로 했으면 구십구 년이  감소되고 마지막 일 년도 또 하루 이틀 감소되고 감소하다가 완전히 죽어 있는,  그 남아 있는 생명이 완전히 죽는 그것이 세상 떠나는 마지막 시간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 같은 것은 그 청청한 나무를 베어 놓으면 그 나무를 보는 사람은  아까운 나무 죽었다 이렇게 말하나 무식한 사람은 볼 때에 그 나무가 아직도  잎이 청청하고 꽃이 만발해 있으니까 아, 그 나무 참 좋다 이렇게 말할 것이나  그걸 똑똑히 보는 사람은 이 나무가 둥치에서 끊겨졌기 때문에 이는 그만  죽었구나, 아까운 나무 죽었다 그렇게 말하나 그 죽은 것이 어떤 나무는 보름도  가고 한 달도 가고, 오동나무 같은 거는 삼 년이 돼야 완전히 죽습니다.

이러니까, 그 죽는 기간이 오래 가는 것도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일주일만에 아주  죽는 사람, 또 나던 길로 몇 시간 동안에 아주 죽는 사람, 요새도 뭐 칠십에 아주  죽는 사람, 팔십에 아주 죽는 사람, 백이십에 아주 죽는 사람, 역사에 제일 오래  죽은 사람은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년 만바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은 사는 줄로 알지마는 하루 하루 지내는 거게서 생명이  단축돼서 이미 사형받은 것이 그것이 완전 죽는 그것이 지금 계속해서 죽음이  자꾸 더 짙어져 가지고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상에는 산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산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셨는데 창조주와 그 연결이 끊겨지지 않고 잇겨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와 연결이 잇겼을 때에, 피조물은 조물주와  연결되었을 때에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지 피조물이 창조주와 관계가 끊어지면  그것은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창조했을 뿐 아니라 그분이 계속  보존의 은혜를 주어야 그 은혜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보존되는 것인데 그분과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그는 다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땅위에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안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정모혈로 난 사람들은 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다 죽은 사람들인데 다만 죽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세 가지 대신한  이 대속을 베푸셨고 또 다시 영원히 피조물을 입으신 지극히 큰 희생인 이  사랑의 희생으로 하나님이 영원히 피조물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중생하는 이 길을  열어 가지고 중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는 이  거듭나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 가지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났는데 영은 완전히  살아났고 이 심신은 살아나지를 못하고 법적으로만 살아났는데 이 심신이 실지로  살아나는 것은 언제 살아나느냐? 그 현실에서, 현실에서 한토막 한토막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은 단일체기 때문에 단번에 살아났으니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종합체입니다. 마음도 여러 수 억의 세포도 더 됩니다. 이  몸뚱이도 여러 수백만의 세포를 가지고 있는데 몸도 이것도 종합체입니다. 이래서  이것은 종합적으로 중복적으로 이것이 살아나는 이것이 영은 단번 살아나고 몸은  중복적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가 거듭난 것은 네 가지로 거듭났습니다. 네  가지로 거듭났는데 거듭난 밑천은 뭐인가? 거듭난 밑천은 예수님의 네 가지 이  대속이 밑천이 됐고 대속이 밑천이 된 이 밑천 속에 새 움으로 돋아 오르는 이  새 움으로 살아나고 돋아 오르는 것은 뭐이냐? 두 가지 움으로 돋아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중생된 바탕은 예수님의 사활의 이 네 가지 대속이 바탕이 됐고  이 바탕에 새 움이 영생하는 움이 터 나온 그 움은 곧 성령과 진리의 움으로  우리가 터 나와 가지고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고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이 있게 했다 말은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영생하는 생명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산 소망을 가졌습니다. 산 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산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산 소망은 땅위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므두셀라는 구백육십아홉 살을 살았지마는 그 다음이  죽습니다. 이러니까 세상 것은 다 죽는 것들이요, 죽는 것들이요 죽은 것들입니다.

죽은 것들 죽는 것들 이러기 때문에 산 것은 없습니다. 산 것은 없는데 다만  거듭난 사람들은 산 소망이 있습니다. 산 게 소망입니다. 산 게 소망이요 산 게  희망입니다.

 그러면 땅위에 우리가 과거 예수님 믿지 못할 때에는 우리의 희망이라 하는  것은 다 죽을 희망입니다. 죽을 것들의 희망이요 소망은 죽을 소망입니다. 전부  죽은 거 소망, 죽은 것 소망 죽는 것 소망. 죽은 것을 소망했고 죽는 것을  소망했고 전부 그렇기 때문에 죽는 소망밖에는 없었지 산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소유도 죽은 것이요, 지위도, 권세도 죽은 것이요, 건강도 죽은 것이요,  생명도 죽은 것이요, 명예도 죽은 것이요, 모든 미도 죽은 것이요, 행락도, 영광도,  존귀도 다 죽은 것입니다. 전부 죽은 것뿐인데 이제 거듭난 사람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산 소망이 있다 말은 이 산 소망은 산 지위, 산 소유, 산 실력, 산 지혜,  산 영광, 산 기쁨, 이는 살았다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시공을 다 초월한 완전 세계 영원을 말하기 때문에 산 것은 영원히  산 것을 살았다 말하고 죽은 것은 현재 살아 있어도 죽는 것은 천 년 후에  죽든지 만 년 후에 죽을 것은 다 죽은 것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했고 산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산 것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했습니다. 산 거 그것이, 전부  산 것이 우리 소망, 산 소망이라 말은 산 것이 우리 소망이라 말입니다. 영원한  것이 우리 소망이요 영원 불멸의 것이 우리 소망이요 영원히 끝이 없는 영원히  살아 있는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라 말은 살아  있는 것은 뭣을 가르치느냐 하면 조물주와 하나 되어 있는 그것이 산 것입니다.

조물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조물주와 하나되어 있으니까 그 조물주가 살아  있으니 그가 살고 조물주와 하나되어 있으니 그에게는 조물주의 산 것이 저의 산  것이요 조물주의 것이 저의 것이기 때문에 제게는 산 소망뿐이지 죽은 소망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그러니까  우리가 중생한 자들이 자기가 가질 기업은 뭐이냐? 중생한 자들이 자기의 업을  가질 것은 뭐이냐? 자기의 기업, 자기의 소유를 가질 것은 어떤 것들인가? 썩지  아니할 것들입니다. 썩지 아니할 것들. 금도 썩습니다. 금도 썩습니다. 금도 다  변질됩니다. 이 금은 불에 타면 안 녹아지니까 금은 있는 줄 알지마는 아니오. 이  금도 예수님 재림 때에는 완전히 원소로 돌아가 버리고 금이 없습니다. 왜? 없는  것은 성경에 말하기를 모든 각 종류들이 다 없어진다 했습니다. 다 종류들이  없어지니까 금이라는 종류도 없어지고 다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누릴 것은  썩지 않는 것, 영원히 썩지 않는 것, 억 억억억억 년 영원히 썩지 않는 것. 썩지  않고 더럽지 않는 것, 더럽지 않는 것, 추해지지 않는 것. 영원히 추해지지 않는  것. 새로움이 끝나지 않는 영원히 추해지지 않는 걸 가리켜서 더럽지 않고  말했습니다. '더럽지 않고' 영원히 쇠해지지 않는 것, 영원히 더러워지지 않는 것,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것, 영원히 쇠해지지 않는 이런 것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시간이 가는 데 따라서 그것이 노쇠해지거나 약쇠해지거나 그것이 그런, 쇠하는  것은 차차 시간에 따라서 그것이 변질되고 시간에 따라서 능력과 가치가  줄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쇠한다고 말하는데 쇠하지 않는다 말은 아무리 시간이  가도 어떻게 가도 그는 갈수록이 새로와지지 다시 더러워지거나 약해지거나  쇠해지지 않는 그런 기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를 위해서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하늘에  간직했다 말은 이 공중에 간직했다 말이 아니고 영계에 간직했다는 말도 아니고  하늘에 간직했다 말은 지고한, 가치적으로 높은 걸 말하요. 가치적으로 높은 것.

 그러니까 지극히 완전한 완전 속에 감추어 있고 지극히 고귀한 속에 감추어  있고 전능의 도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변동없는 것을 가리켜서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런고로, 우리는 요것으로 간단한 해석을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3절에  '찬송하리로다' 찬송하리로다 하는 이 말씀은 필연적으로 찬송하게 된다  그말입니다. 필연적으로 찬송하게 된다. 그러면 찬송하게 된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구원을 우리들이 차차 차차 알고 생각해 깨달아 갈 때에 이 구원이  어떻게 지극히 큰지, 이 구원에 대해서 감사함과 또 이 구원의 가치가 크기  때문에 이 구원에 내 욕망이 다 기울어지는 것과 또 이 구원을 베푸신 이 구원의  근거에 대해 가지고 우리들이 깨달아져서 내 심령과 모든 것이 거게 다 기  울어져 쏟아지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찬송하리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짧은 시간에 다 말하지 못하나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에 대해서 '이  구원을 베푸신 그 사랑이 어떠한가 하는 그 사랑을 우리는 평생 동안 궁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가?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사랑의 역사로 하신 일이  무엇인가? 그분이 사랑으로 어떤 역사를 하셨는가? 이 사랑과 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사랑의 희생하신 이 희생을 우리들이  점점 연구하여 알아가고 또 이 구원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연구해서 알아가면  주님의 이 구원을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이 구원의 크심과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이 사랑의 어떤 그 희생의 투자를 하셨는가 하는 이것을  자기가 깨달아 느낄 때에 깨닫는 것만치 그 사람에게는 감사와 기쁨과 찬송이  끊칠 수 없는 그 사람이 필연적으로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찬송하리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할 일은 뭣이 우리의 할 일인가? 이 구원이 어떠한가 하는 이  구원을 아는 것이 우리가 첫째 할 일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아는 것, 이 구원을  알아봐서 이 구원에 대해서 차차 차차 상세하게 알고 깊이 넓게 높게 확고하게  이 구원을 연구해서 아는 데에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야 되겠고, 또 이 구원을  우리가 받아서 누리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야 되겠고, 또 이 구원을 우리가  기념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연구함에,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 가지고서 한 달을 걸리든지 두 달을 걸리든지 몇  달이 되든지 이 구원에 대해서 알려고 이 구원 대한 확고하고 구비한 지식을  가지려고 이 구원을 아는 데 노력하는 이 노력과 이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누리는, 이 구원을 자기가 받아서 이 구원을 누리는 이 노력과, 이 구원을 자기가  아는 노력과 누리는 노력과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기념하는, 이  구원을 기념하는 이 노력 이 세 가지 노력이 우리 기독자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첫째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또 이 구원을 내가 실지로  받아 가지고 누리기 위한 노력에 기울이는 것, 셋째로는 이 구원을 내 생활에서  기념하는 이 기념을 우리가,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이 세 가지 노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노력은 자기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원을 기념하는, 기념이라 하는 것은 어떤 한 때에 있던 그 일을 그 뒤 많은  시간에 그와 같은 것을 사람들이 추억하면서 계속 그 행사가 되는 것을 가리켜서  기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일시에 된 행사를 그 후 많은 시간에 그를 기억하고 그와 같은 것이  계속 누리는 것을 가리켜서 행사하는 것을 가리켜서 기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연구하는 것-여러분 단단히 기억하십시오-이 구원을 아는  연구, 이 구원을 알기 위해서 노력할 것, 하나는 이 구원이 어떤 구원인가 이  구원을 자기가 실제로, 입술로만 말할 게 아니라 이 구원을 실제로 자기가 받아  가지고 누리는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노력할 것,  또 셋째로는 이 구원을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기념하는, 이 구원을  기념하는 것을 우리가 노력할 것. 이 세 가지를 우리가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이 구원을 연구한 사람마다 다 주님의 이 사랑에서 주님의 이  사랑 안에서 자신이 없어지기를 다 원했습니다. 이 사랑 속에서 자신이 없어져서  이 사랑 속에서 자신이 완전히 녹아져서 이 사랑 속에서 자신이 없어지기를 다  원한 것이 이 구원을 궁구한 사람들이었고 또 그 사람들은 다 이 구원 세계에서  주님이 구속하신 이 구원 세계 안에서 살고 구원 세계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이  구원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 모든 깨달아가는 사람들의 생애였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으로써 자기 여생을 기울인 것이 모든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래 오전에는 간단하게 요것만 하고 마칩니다. 오후에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오전에 이제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구원하신  이 사랑을,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  사랑의 구원과 그 역사, 그 역사를 우리가 알기 위해서 첫째 노력할 것,  둘째로는 이 구원을 자기가 실지로 받아 가지고 누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  그러면 셋째로는 이 구원을 자기가 실지로 자기 하루 하루의 생활에서 이 구원을  기념하는 이 기념에 노력할 것. 그러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세 가지로 노력할  것.

이리 되면 그 결과는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 하면 이 사랑 밖에 나가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이 사랑 안에서 자신이 완전히 이 사랑 안에서 녹아져서 이 사랑화 돼  버리고 자기가 완전히 이 사랑화 되어져서 자기는 없어지고 이 사랑이 완전히  자기가 되어지는 이 사랑 속에 자기가 완전히 없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다  성도들의 그 소원이었습니다.

 또, 이 구원 세계 밖에 부귀, 영화, 존귀, 뭣이 있다 할지라도 이 구원 세계 밖에  일 초라도 가기를 싫어하고 이 구원 세계속에서 살기만 원했습니다.

이 큰 구원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이 이  구원을 다 받아서 누릴 수 있는데 이 구원이 중단되어 있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다 이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여생을 다 바치는 것이 다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지금 세 가지 세 가지, 여섯 가지를 가르쳐서 오전에  증거했습니다. 오후에 이 여섯 가지를 따라서 저게 대해서 더 이제는 해석을 해서  우리들이 다 같이 나누어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억합시다.

(기도)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는 세상으로 더러워졌고 악령의 감화에  물이 들어 양심도 흐려졌고 심령이 어두워져 모든 것을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알아서 잘못 소원하고 노력하는 저희들입니다. 긍휼히 여겨 주사 주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으로 어떠한 희생하사 어떠한 구원을 주신 것을 점점 아는  가운데서 자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이 구원을 깨달은 성도들마다 주님의 이 사랑 속에서 떠나지를 안했고  이 구원 세계에서 밖을 보지 아니하였고 이 구원의 그 영광스럽고 한없이 즐거운,  그리하여 이 구원을 누리는 자마다 그의 언행 심사와 용모에 하나님의 사랑이  반사됐고 이 구원의 지극히 큼의 행복과 평강이 언행심사에 반사되어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원 누리는 그 실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고 이 구원을  엿본 자마다 다 땅위에 있는 모든 마음을 다 거두고 묶어서 이 구원 하나에  전폭을 기울여 주님 사랑 속에서 주님의 구속하신 이 구속 속에서 살았고 이  구원을 어두운 형제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다 바친 것을  저들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은혜로 날로 더하여 주셔서 이 피곤한 세상  거짓된 세상에서 이리저리로 상하고 있는 여기에서 주님의 구속 안으로 들어가  평강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형제들을 구출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들은 이와같이 생명의 평강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주님을 주로 모시고 염려없이 세상살이를 평강으로 승리해  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을 구원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더욱이 사랑의 능력으로 더하여 주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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