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도, 예수님과 말씀 순종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16일 토새

 

본문 : 마14:22-3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23절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지금 우리에게는 요 면을 예수님 본받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인 줄  압니다. 우리가 늘 복잡한 가운데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과 바라보고  의지할 것을 찾지 못하도록 이 복잡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래서  성경에는 이것을 간부라고 말했고 또 이렇게 하는 모든 운동들을 음행의  포도주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복잡한 그 현실을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 있으면 족합니다.

그 이상 아무리 있어봤자 그다음부터는 보관하는 그 보관에 대한 힘만 들었지  자기에게 유익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 그 이상은 자기 탐심과 욕심이 들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속에 옛사람, 육체의 소욕, 옛사람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놀음이지 새사람 생활은 아닙니다.

 이러니까 사람이 그 복잡해서 그만 찾을 것 다 못 찾고 강직할 것 다  뺏겨버리고 이래 가지고 우리가 완전히 속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아무래도 한적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 되겠고 또  교역자들이라면 좀 한적하고, 내가 의지하는 물질이나 사람이나 뭐 사회나 일반  인간계를 좀 떠나서 인간계가 없는 좀 한적한 그런 산에 가 가지고 혼자,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으니까 좀 적적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좀 외로와지는  감도 느낄 것이고 또 아무것도 의지할 게 없으니까 혹 두려움이나 그런 생각도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는 가운데서 주님을 더 바라보고 의지하는  그 일이 이루어지고 또 자기 마음이 주를 향한 그 한 마음으로, 나누지 안하고  한 마음으로 이렇게 집중돼서 주님을 바라보고 이러는 가운데에서 좀 자기가  심령이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늘, 사람들을 접촉해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시고 난  다음에는, 물들지 안했지마는, 그 접촉하는 가운데 물들지 안했지마는 또 한적한  산에 가 가지고서 당신을 더 깨끗하게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명확하게  그렇게 자꾸 새로와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뭐 주님하고 동행을 하겠다고 이렇게 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의 명령을  사모해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움직여지겠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도  그만 사람 만나면 가다 보면 사람하고 저하고 둘이만 움직이고 있지 주님은  잊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떠나면 그 다음에 주님을 찾으면 '내가 주님  잊어버리고 또 이 사람하고 그만 접촉할 때 주님 잊어버렸다.' 그렇게 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속화되지 안하셨기 때문에 털끝만한 죄도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마는 늘  이렇게 세상과 접해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난 다음에는 언제나 새벽 미명에  산에 가서 기도하셨다, 산에 또 따로 계시면서 기도하셨다 이렇게 하셨는데  우리는 제가 결심을 하고 '오늘은 내가 주님과 동행하겠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주님하고 꼭 둘이 나하고 하 나돼 가지고 만나지 주님 사모 잊어버리고 그것과  합하지 않겠다. 주님과 나와의 연결되는 그 연결을 끊어버리고 그와 연결되는  그런 일 안 하겠다.' 이렇게 결심을 해도 하루 생활이 바로 나가지 때는 우리  들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얼마나 한적한 그런 시간을 많이 둬야 될  우리들이겠습니까?  물론 그거 다 형편에 어려우니까 산에 간다는 그런 것은 좀 어려울지라도  고요히 사람 접촉이 없는 옥상이나 그리 안 하면 골방이나, 그러면 어데 도시  같으면 공원 모통이라도, 공원 모퉁이나, 그렇지 않으면 혹은 한적한 그런  길가라도 좀 한적한 시간 가져야 되겠습니다.

 우리 서부교회는 그래도, 이 도시에서는 참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이 꽃마을을  이걸 줘서 산이 조금 너르니까 교인들이 가는 사람은 많이 갑니다. 가 가지고  산에 파서 기도하면 아마 산에 올라갈 때와 올라 가서와 다를 것입니다.

올라가서는 '또 내일 또 와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가질 것이고 자기가  분명히 새로와진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도 오면 또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거게 가 본 일이 없어요. 거기 가면 뭐 산에 가서, 그저  가려면 우리 교인들이 다 한목 가면 몰라도 거의 한목 간다고 해도 고요히  기도할 수가 있을 만치 그런 곳을 우리에게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그런 우리가  배출될 그런 곳이 하나도 없었다면 아주 갑갑해서 못 견뎠을 터인데 그런 장소를  주셨는데도 우리가 게을하기만 하고 그렇습니다.

 가 보면 자기 방에서와, 또 뜰에 나가서와, 또 윽상에 가서와, 또 좀  강변이라도 나가서와 또 산에와, 산도 더 좀 깊은 산과 아주 다릅니다. 다른  것은 우리의 이 주관을 변화시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큰 환난을 두고 이렇게 있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주님을  본받아서 산에 따로 기도하는 그런 시간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것부터가  믿음입니다.

 그저 늘 집안에서나 이래 있다가 어데 조그만한 깊은 산에만 가려고 해도 그만  무서운 그게 재미가 괜찮습니다. 무서운 그것이 주님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환경이 무서워야 주님을  향하고 주님과 연결이 잘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런 기회를 얻기 위해서 어떤 그 시기를  정해 가지고는 그저 어떤 깊은 산을 향해서, 아침 일찍 먹고 그날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서 가고 가고 가다가서 그 더 갈 수 없을 만치, 깜깜해서 지척을 분별  못할 만치만 가 가지고, 자기를 알기 때문에. 가 가지고 거기 있으면 그만 집에  오고 싶은 마음이 나고 그만 무섭다 말이오. 와 봤자, 와 봤자 산중은 산중이지  뭐 집에까지 도달은 못 한다 말이오. 암만 달음박을 친다 해도, 자기 버릇을  알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인제 가 봤자 내나 여게나 거게나 산중은 산중이니까 어라 할 수  없다. 지내자.' 그래 억지로 자기를 굴복시켜 가지고 있는 가운데서 두렵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무서워 이러니까 어짤 수 없어 주님을 자꾸 가까이하고  사모하고 그저 뭐 안 되면 자꾸 그때는 '믿습니다. 주여, 도와 주옵소서.' 자꾸  이래 가지고서 그래 그래 우리가 이 부패성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이 일을 아무래도 좀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왜정 말년에도 산에 가서 기도하는 그 사람들이 다 해방이 지나가도 부끄럽지  않게 힘을 가지고 나섰습니다. 내가 어제 어떤 목사님을 보고서 '요새 어떠냐?'  교회가 조금 생기가 난다 이러기 때문에 '조심 해라. 여기 설교하는데 처음에는  참 은혜가 충만했는데 그 뒷번에 할 때는 죽을 썼다. 아무것도 아니다. 좀  조심해라.' 이랬습니다. 아마 그 때는 좀 산에 자주 다니면서 기도할 때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이 납니다.

 그런고로 목회자들이 자신이 될 수 있는 대로 산에 가서 한적한 그런 시간에  주님과 직접 교제를 가지는 그런 일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교역자 한 사람이  살아나면 교인들은 따라서 살아납니다. 교역자 한 사람이 졸게 되면 그만  교인들은 따라서 좁니다.

 이래서 일곱 좃대와 일곱 별의 비밀이라는 이 비밀은 다른 게 아니고 일곱 별은  교역자고 일곱 촛대는 교회를 말하는데 교회와 교역자와의 그 관계가 이렇츰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그것을 가리켜서 참 이렇게 하나라는 것, 교역자대로 교인  되는 것.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역자 하나가 살면 성경에 '앞서 걸어가라 그러면 뒤에 따라온다' 뭐  오라 오라 할 것 없이 너만 앞서 가면 뒤에 따라온다. 이런 관계를 하나님이  맺어놨습니다.

 맺어놨기 때문에 우리 교역자가 자기 하나가 온전해지면 교인들은 따라서  온전해지도록 이런 관계를 만들어 놨으니까 어짜든지 산에 가서 한적한 시간을  좀 많이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여게 보니까 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 가지고 같이 하나님 말씀 듣고 이래  있다가 '바다 건너로 건너가라' 할 때에 그들이 주님이 그와 같이 하신 주님의  형상을, 주님의 형상을 그들이 자기네들 마음 속에 가든 채워서 그저 주님의  얼굴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하는, 주님의 형상이 자기들 마음 안에 가득  쌓였었고 또 주님이 '바다 건너로 앞서 가라' 하신 주님의 그 명령을 자기들이  복종하는, 주의 명령을 복종하는 그것 하나만이 자기들의 전움직임이 되어졌을  때에 그때에 배는 그저 아무 어려움 없이 바다에 잘 전진했던 것입니다. 바다도  아무 거석이 없었고.

 이러다가 그만 그렇게 잘 가는 동시에 그만 옛날 바다에서 뱃사공 노릇 하던  그런 습성이 있으니까 뭐 노를 젓고 이렇게 키를 돌리고 이러는 데에서 그만  저거 배탄 제자들 저거 동지들만 이렇게 보이고 보니까 이리 봐도 내나 같은  동무들 이리 봐도 동무들, 사람들만 보여졌고 주님의 그 형상이라 하는 것은  차차 차차 그만 흐려지게 됐습니다.

 흐려지게 되고 또 주님이 '바다 건너로 가라' 하는 주의 명령은 그만 차차  잊어버리게 되고 해이하게 되고 그저 노를 젓고 키를 돌리고 하는 그 일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그 일에만 사람들은 진중해서 나가니까 차차 차차 풍랑이 일어서  고난만 당하고 앞으로 전진을 못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로 보이신 것인데 그들이 주님의 얼굴을 생각하고  얼굴만 자기네들 마음에 생각되어 있고 주님의 명령만 순종하는 그것으로만  움직였을 때에 그때에 바다도 바람도 방해를 하나도 못 했습니다. 하나도 못  하고 그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데에 배를 드부렁드부렁 잘 띄워 줬고 그뭐  순조롭게 가기만 했지 방해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는 가운데에 주님의 안면이 자기들 마음에 사라지고 주님의  명령하시는 그 말씀이 차차 차차 잊어버리게 되고 하니까 그 반대로 풍랑은 자꾸  일게 되고 가지는 못하게 됐습니다. 요것도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밀접하게, 산에 가든지 어데 가든지 주님과 밀접하게 된 관계를  맺은 그 상태에서 주님의 그 형상을 바라보는 것과 또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 움직임에서만 있을 때에는 갈릴리 바다와 같은 온 세상 어떤 것이든지 그렇게  걸어갈 때는 풍랑이 일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고 바다가 그들에게 가도록  순조롭게 가도록 한 것쳐럼 우리가 요렇게만 가면 세상은 우리의 가는 걸음을  협조만 하지 가는 걸음에 방해하지 많습니다. 방해를 못 하게 됩니다.

 그들이 차차 주님과 주의 음성이 흐미해질 때에 물결은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일어납니다. 주님의 형상과 주의 명령이 우리에게서 차차 흐려질 때에 그때에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하는, 세상은 방해의 세상으로 일어납니다. 이 둘로써  가득 차서 움직임은 당신의 명령 따라 움직임, 바라보는 것은 주님만 바라보는  것, 이럴 때에는 이 세상이 우리의 신앙 걸음을 돕고 있지 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때에 주님이 산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그런 풍랑 만나 가지고 어려운  것을 보시고 즉시 그 바다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바울이 말한 대로  떠난 것은 몸이지 늘 당신이 기르는 유아와 같이 젖먹이는 어린아이와 같이  기르는 그 제자들, 또 뱃속에 배 가지고 있는 잉태된 배 안에 있는 아이와 같은  그 제자들, 그 제자들을 외부에 몸으로는 떠났지마는 그 마음은 순간도 떠나지  안해서 그들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알아 시험에 들지 아니하고 또 손해가지  안하도록 그들을 늘 지키고 관리했습니다.

 이 모양으로 우리도 참 육체의 자녀는 이것을 배 안에다 열 달만 있으면 기한이  차지마는 우리가 믿음의 자녀라는 것은 그 열 달만 생각할 게 아니고 그보다도  더 기간이 길고, 또 몸은 떠나도 늘 우리가 '그 사람의 형편과 사정이 어떤가?'  하는 것을, 인간이기 때문에 모릅니다. 모르지마는 주님이 알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 주신 그 양떼에 대해서 어데 가든지 몸만 나뉘었지 늘  자기 마음 가운데 그 구원을 위해서 '그 심령이 어찌 되느냐? 거게 주변에 어떤  어려움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늘 생각하면 주님께서 알려 주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산에 가서 따로 기도하고 계셨지마는 바다 가운데서 어려움  당하고 있는 그 제자들을 늘 보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걸 알았고 또 그들이  어려움으로 손해가는 그런 지경까지 이르지 않도록 이르기 전에 찾아가서 방비해  줬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회 하는 데에, 또 주일학교 반사들이 학생들을 기르는 데에,  권찰님들이 그 양떼를 돌봐서 기르는 데에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라서 산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본받아야 되겠고, 또  주님이 이 제자들에게 하신 그것도 본받아서 우리도 참 몸은 떠나 있어도 마음은  떠나 있지 안하고 늘 거느리고 늘 거기 대해서 보살피고 있는 이 일이 계속돼야  되는 것, 이것을 여게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물 위로 걸어서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오니까 그 제자들이 보고서 이제 유령이라  물귀신이라 하면서 두려워 놀랐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적인 환난을  당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그런 환난을 당해도 주님을 떠나지 안 했을 때에는 절대로 그것이  고통되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그 홍해가의 어려움이나 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다니엘이  당한 그 어려움이 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면 똑 같은 어려움을 당했지마는  주님과 주님의 명령, 주님을 참 알고 바라보는 것과 주에게 따라 순종하는  거기에는 그런 어려움들이 기쁨이 됐고 즐거움이 됐고 하나님의 솜씨를 보려는  그 소망과 기쁨이 됐지 절대 그 어려움이 되지를 안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시종을 그렇게 한 거기 대해서는 어떤 마찰이 온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시작했고, 주님의 뜻대로 진행했고, 주님의  뜻대로 계속하고 있는 거기에는 무슨 일이 온다 해도 우리에게 보통 다를 때보다  담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펑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그런 일이 있으면 그만 우리에게는  그런 담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 양심이 들어서 그렇게  자꾸 지적을 하니까 우리가 담력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오셔서 '내라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그 주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그들이 구주가 왔는데 그렇게 두려움이 됐습니다. 그  두려움은 바다의 두려움이 그 두려움이 두려움을 더 증가시켜 가지고서 더  두렵게 됐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부 주님을 떠나고 주님 잊어버리고 자기네들끼리만 상대 하고  자기네들 주관으로 완전히 돌아갔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왔었습니다. 이러니까  요걸 단단히 알아서,  제자들이 두려울 때에는 벌써 주님의 형상은 사라졌고, 주님의 명령도 다  잊어버려졌고, 사람들은 완전히 주관으로 돌아갔고, 옛사람으로 돌아갔고,  그러니까 그 오는 풍랑이 두려워졌고, 오는 풍랑이야 오든지 말든지 옛사람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는, 곧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그대로 있을  때에는 풍랑 오면 더 고시고 좋고, 군대 떼는 것 모양으로 좋고 주님의 솜씨를  볼 것으로 더 욕망에 기뻤지 그렇지 않소. 우리가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고로 세상에 모든 것이 올 때 두려워질 때는 그때는 내가 옛 사람으로  돌아갔고 그리 안 하면 옛사람과 새사람이 섞여 있든지 순전히 새사람으로 돼  있지 아니하는 때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구원의 길, 구원의 길은 구원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적으로 보인다. 구원으로 보이지 안하고 그 구원은 '이렇게 하면 망한다' 하는  것으로 보여지지 구원으로 보여지지를 아니한다.

 왜 그런가? 그 환경에서 오는 그것이 두려워질 때는 벌써 주님과 주의 명령을  떠난, 믿음을 떠났기 때문에, 믿음을 떠나고 새사람은 떠나버리고 옛사람이  가지고서 자기를 주관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에 옳은 말은 틀린 걸로 들리고 틀린  말은 옳은 걸로 들리고,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구원은 대적 원수로  보여지고 원수는 자기를 구원할 아주 친근한 것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컷은 다 확정을 지워버려요.

 세상에 어떤 일이든지 두려워질 때는 벌써 옛사람으로 돌아갔다 두려움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늘에 속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는가 그  두려움이지 그 두려움 외에는 딴 두려움이 없어 뭐 나라가 두렵다, 정권이  두렵다, 공산주의가 두렵다, 뭣이 두렵다 그런 두려움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 진리 두려움 그 둘뿐입니다. 그게 하늘에 두려움이고 그  외에는 하늘에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런데 두려움이 있을 때에는 벌써 옛사람화된다. 새사람을 벗고 옛사람을 입게  된다. 그럴 때에는 구원은 멸망으로 보고 멸망은 구원으로 보여진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돼라' 정반대로 네가  생각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어떤 그 사건을 대할 때에 이 두려워하는 이것이 내 주관이  들어서 두려워하는지 믿음의 사람들이 들어서 두려워하는지 그것 구별하고 또  이런 비판이 되는 이 비판이 내 주관이 비판하는 것인지 내 주관 아닌 이거 참  하나님께 피동되는 신앙의 비판인지 그것을 잘 분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랬는데 그들이 '내로라 안심하라' 이러니까 벌써 '안심하라 내다' 하는 주의  음성을 들을 때에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마라'  주의 음성을 들으니까 그만 그 제자들에게 모든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안해졌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안해졌습니다.

 그뭐 풍랑에 이제 죽겠다고 지금 그렇게 야단이지마는, 그들은 어부 노릇을  했기 때문에 그런 풍랑에서 배가 파선되면 죽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소. 이러니까 저들의 과거의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경험, 체험 그것은 똘똘 뭉쳐서 이 제자들을 두렵게만 만들었지 백해무익입니다.

해뿐이지 유익은 하나도 없어.

 이랬는데 주님이 '안심하라' 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니까 그만 그들에게는  염려와 두려움은 다 없어졌고 펑안해졌습니다. 평안해졌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있거든 그때 자꾸 어려움을 가지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이 어려움이 어찌 되느냐?' 어려움을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면 저는  어려움 속에 더 빠져들어갑니다. 그저 자살은 못 할지라도 죽을  고비를ㅋㅋㅋㅋㅋㅋ 넘깁니다. 자꾸 빠져들어갑니다.

 그럴 때에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벗는 그 길은 뭐이냐? 그 길은 주의 음성 듣는  그것이 두려움 물러가는 방법이요 또 평안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럴 때는 그만  성경 말씀을 읽는, 자기가 묵상할 수가 없으면 성경 말씀을 읽어요. 읽으면서 그  말씀을 자꾸 읽는 가운데서, 못 읽거든 어떻게 해서라도 뭐 녹음을 해 들어도  성경 말씀을 자꾸 읽고 듣고 그러면 성경 말씀 주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에서  두려움은 자기도 모르게 물러가고 평안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두려울 때에 두려움을 제거하는 방편은 주의 음성을 듣는 것 그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고 '내니 두려워 마라' 이러니까 음성을 듣고는 그들이 그만 기뻐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어데 있느냐?' 이래 보니까 그 유령이 주님이 내라 이러니까  주님의 형상이 새로 나왔어. '같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이 물 위로 또 걸어오시는구나.'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니까 그때에 그만 담력과 욕망이 생겨졌어. 그때 그만 담대한 욕망이  생겨졌어. '아, 이제!'  그만 그때에 담대한 욕망이 생겨졌는데 그 욕망이 어떤 욕망이 생겨졌느냐?  주와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졌어. '주여, 주시어든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시옵소서. 나도 주와 같이.' 주님과 같이 되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  그거니까, 그러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두려움이 물러가고 평안이 왔고 주님의  안면을 바라볼 때에, 주님 안면을 바라볼 때에 주님을 바라볼 때에 그때에  담력과 욕망이 생겨 졌어, 담력과 욕망이 생겨져.

 우리 믿는 사람들이 환난 앞에 두고 그때에 저게서 이길 만한 그 담력을 갸지는  것은 자꾸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에게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면 그만  담력과 욕망이 나옵니다. 소욕의 욕망이 나와요. 주님의 안면을 보면 담력과  욕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소. 뭐 이거는 영원한 요 방법 외에는  없소. 주님의 안면을 바라보면 주님을 바라보면 담력과 욕망이 생겨집니다.

 담력과 욕망이 생겨지니까 그 무슨 일이라고, 그거는 얼토당토 안한 소리를  욕망합니다. 배를 타고도 지금 풍랑이 일어서 빠져 죽을 지경 인데 거게서  '주시어든 나를 오라 하십시오. 물 위로 오라 하십시오' '오라' 이러니까 그만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저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물 위에  배에서 척 뛰어내렸다 말이오. 내리니까 그 물이 베드로를 삼키지 못하고 물은  딴딴한 길바닥같이 베드로를 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쩌뻑쩌뻑 걸어서 가다가 그 풍랑을 보고, 바람을 보고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들어갔습니다. 이제, 그러니까 주님이 나중이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했어.

 믿음이 적다 말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나섰는데 그만 믿음이 끝장났다 말이오.

믿음의 밑천이 떠났다 말이오. 믿음의 밑천이 끝장났어. 믿음의 자본이 다 됐어.

이러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주님만 바라보고 주의 명령 순종, 자기가 주님을  바라보니까 욕망이 생겨서 '이제 명하시옵소서.' 뭣이든지 주님이 명하면 그대로  해 볼라 하는 그런 욕망 가지고 나섰는데 그만 주님 바라보던 것이 풍랑을 보는  것으로서 바꿔졌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풍랑을 보는 거로 바라보는 것이  바꾸어졌고 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던 그 순종이 풍랑이 저를 두렵게 하니까  풍랑이 두렵게 하니까 제가 두려워서 '무서워' 한 그것은 풍랑에게 벌써  순종입니다. 주님 바라보던 것이 바라보는 그 대상을 바꿨고 또 자기가 피동의  그 능동을 바꿨습니다. 주님에게 피동되는 걸로 했는데 이제는 풍랑에게  피동입니다. 이러니까 바꿨을 때에 그때에 자기는 물 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요렇게 된 것이 요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요런 형식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야' 네가 나만  바라보고 내 명령 순종의 그 믿음을 가지고 오다가 네 믿음이 끝나니까 이 꼴  되는 것 아니냐? 그다음에 해석을 하기를 '왜 의심 하였느냐?' 의심은 믿음의  반대라. 바꿨다 말이오. '의심하였느냐?' 하는 것 의심은 믿음의 반대입니다.

바꿨어.

 주님과 풍랑과 바꾸고 또 주의 명령과 풍랑의 그 위협과 바꿔 버렸어.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던 사람이, 거게 풍랑이라 하지 안하고 바람이라 이랬는데.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만 세상 운동을 바라 보면 헛일입니다. 그만 주님을  바라보던 사람이 세상 운동 바라보면 그때부터서는 내려갑니다.

 그러기에 지금 현재 교회들이 자꾸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할라 하는 그런 것을  '왜 그거는 좋은 건데 왜 반대하느냐?'하지마는 그 바라보는 대상이 다르면 안  되기 때문에 그걸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보니까 어떤 무슨 대학 교수인데, 서울대학 교수던가? 교수인데  ○○○목사하고 서로 대화를 하는데 그 사람은 기독교를 기독교 사회주의로,  사회주의의 기독교를 만드려고 말하는 것이라, 보니까. 서로 대화를 하는데.

 이래 가지고서 자꾸만 '이 사회와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되는데 사회와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답하기를 '우리 교회가  대교회가 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대교회가 돼야 사회의 요구도 들어 줄 수가  있고 사회도 다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건축한 이런 것도 앞으로  사회에도 필요있게 쓰여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말 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어.

 그럴 때는 '우리 기독교는 창조주 자존자이신 그분만 바라본다. 그 분만  바라보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는 그것이 우리의 사상이요 주의요 우리의 생활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변하지 안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에게 순종만 하는데 이  세상이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의 생애와 대립되는 나라도 있고, 대립되는  시대도 있고, 대립되는 정부도 있고 대립되는 정치도 있고, 대립되는 운동도  있다. 그 대립이 될 때에 그 대립 안 되려고 우리가 돌아서서 같이하지 않는다.

자꾸 그럴수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소망하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는 이  길만 걸어간다. 이 길만 걸어가면 우리에게 일치가 돼서, 일치가 돼서 방해하지  안하고 따라오면서 협조를 하고, 뭐 협조받을 것도 없다. 따라오면 흥하고  반대하면 나라도 깨진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와 정치는 분리해야 되지  일치되면 안 된다!' 이래야 될 터인데 뭐 앞으로 필요한 뭣이 된다는 좀  위험성이 있고 염려성이 있었습니다. 제가 들을 때에.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한 바라보고 주님이 명령하는 그 명령만 복종하는 것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요 둘만 요동치 안하면 요 둘만 요동치  안하면 제가 이렇게 이 사회가 이리 된다 뭣이 된다 하는, 이런 어려움이라는  그런 것이 염려할 필요도 없고 그거 있거나 말거나 더 주님 바라보고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요동치 안하면 그 움직일수록 쭐렁거릴수록 '좋다. 아따 군대 몇내  버리니까 좋다. 재미 있다. 주님이 하시는 솜씨 보겠다. 또 왜정 말년에 이제  승리하고 깃발 든 것처럼 또 인제 한번 또 승리의 깃발 들겠다. 6·25 때 깃발  든 것 같으면 또 한번 승리의 깃발을 들겠다.' 이렇게 뭐, 다니엘이 벙굿벙겠  웃으면서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를 하고서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 거는ㄴ 돼지지  다른 거 없는데, 우리가 꼭 요렇게 나가던 요 걸음에서 타락해 가지고서 시험에  드는 것, 고통스러운 걸음을 걷게 되는 것은 뭣이냐 주님만을 바라보던 그것이  그만 바람 바라봅니다. 세상 이런 운동 저런 운동 바라보면 헛일이오. 이런 운동  저런 운동.

 이런 운동 저런 운동을 바라보면 제가 기쁨이나 담력이나 소망이나 욕망이나 그  모든 것이 다 땅에 속한 그런 것들 되면 땅의 것 혼들리면 제가 흔들리지 안  흔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에게 복종하는 그 두 가지는  세상을 지었고 세상으로 인해서 흔들리지 안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것이라야 돼지지 이거 아니고 땅의 것 가지고서 이런 것 저런 것  담력이나 뭐 용감이라 하는 그까짓 거 다 땅에 속한 복음이기 때문에 언젠가  깨지고 말아집니다.

 그러기에 그럴 때에 주님하고 바람하고 바꾸지 말아라. 주님하고 세상 운동하고  바꾸지 말아라. 네가 주님에게 피동되는 그 피동과 바람에게 피동되는 그,  바람이 무서워하게 하니까 두려워하는 바람 피동 이제 세상 피동과 주님에게  피동되는 말씀 순종 이것을 바꾸지 말아라 안 바꾸면 그대로 물위에 다른 사람은  빠지지마는 언제든지 걸어다닐 수가 있습니다.

 이런데 그래 빠져들어가니까, 그럴 때에 지금 있으면 저는 죽는 건데 세상에  빠져서 완전히 세상 것 되고 마는데 그럴 때에 필요한 거는 뭐이냐? '주여, 내가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구원하소서.'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구할 때  주님은 지체 안 하고 즉시, 거기 즉시라 말 있어. 즉시 손을 내밀어서  붙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에게 간구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지제하지  아니하시고 즉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원수가 뭣입니까? 우리를 빠져들어가게 하는 것이 뭣입니까?  바람이오. 빠져들어가게 하는 것이 뭣입니까? 바람 운동입니다. 바람 운동. 세상  운동 그것에게 복종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알아서 세상 운동에 능숙하고 세상 운동에 맞추어서 하는  그자가 잘 갈 줄 알아도 목회는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숫자만 모아도  나중에 쭉덩이요, 다. 다 날아가 버리고 없습니다.

 이러니까 주님 안면을 바라보고 그의 명령 순종으로만 움직일 때에 배가 잘  갔고 배가 잘 가는 그 뱃놀음 하는 데에서 그만 주님이 희미해져서 주님이 차차  흐미해져서 사라졌고 주의 명령이 자기들 마음에서 자기 행동에서 '이거 주의  명령 순종이라' 하는 것이 없이 주의 명령이 흐려져 버리고, 흐려지니까 세상은  저들의 신앙 걸음을 방해 했고 방해할 때에, 방해할 때에 옛사람으로 돌아가니까  방해됐다 그 말이오. 신앙 생활이 옛사람으로 돌아갈 때에 방해되고 방해를  세상에게 방해를 받고 있을 때에 그때에 구원이 오는 구주는 저희에 정 반대로  보여졌다. 반대로 보여졌다.

 그러나 그때에 무서워하니까 주님이 내로라 하면서 말씀하실 때에 안심하라  하는 그 음성을 들으니까 이제 그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고 평안해졌다. 또  주님의 안면을 바라보니까 '내라' 하는, 유령인 줄 알았는데 '아,  주님이시로구나.' 주님을 바라보니까 뭣이 생겼습니까? 담력과 욕망이  생겼습니다.

 담력과 욕망이 생겼는데 이거는 뭐 한없는 담력이요 한없는 욕망입니다. 바다  가운데 풍랑이 이는 바다 가운데에서 물 위로 걸어간다는 그것이 한정이 있는  욕망입니까 담력입니까? 인간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초자연적인 담력과  초자연적인 욕망을 가졌습니다.

 욕망을 가졌는데 어떤 욕망 가졌느냐? 주와 같이 되기를 욕망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물 위로 걸어오시니까 나도 물 위로 한번 걸어 가겠습니다. 한번  걸어오게 하십시오.' 당신이 명령하면 된다는 걸 했기 때문에 '오라' 이러니까  그만 턱 내려서 걸어가니까 됐더라 그거요.

 이러다가 잘 걸어가다가 주님 보는 거는 그만 주님은 또 바라보지 안해. 주님만  바라봤으면 문제없어. 주님 안 바라보고 옆눈 떠 가지고서 바람 바라보니까,  바람 그놈이 저한테 순종 안 하면 안 된다고 바람이 바라보라 하니까 바람이  위협을 주니까 '아이고 무섭습니다.' 하니까 세상에게 종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게 종이 됐어.

 그전에는 주님 바라보고 순종 요 믿음만 가졌을 때에는 세상이 종이 됐는데  가려고 하니까 술술 잘 가게 했고, 물 위에 뛰어내려도 육지같이 딱 받들어 줬고  이렇게 세상이 잘 받들어 줬는데 주님 바라보는 것과 이 세상 운동과 바라보는,  주님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바꾸고 능동을 바꿔서 순종을 바꾸고 이래  버리니까 그만 그다음에는 세상에 종이 됐습니다.

 그게 세상에게 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떠나면 세상에게 지는 것 이기  때문에 세상에 종이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게서 가르쳐 주는 요 구원 도리를 밝히 잡읍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어찌 되느냐? 어려움을 당할 때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신앙 걸음 걸어갈 때에 두려움이 오는 '아 어렵다 이거는 참 어렵다.

두렵다.' 어려움이 자기에게 오고 두려움이 오는 것 그러면 어려움이 안 온다 말  아니오. 어려움이 와도 어려움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안 됩니다. 어려움이 안  되고 두려움이 와도 그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려움과 두려움이 올 때에는 자기라는 사람이 바꾸어졌습니까 안  바꿔졌습니까? 어때요? 어려움과 두려움이 올 때는 어째 그렇습니까? 한번  대답해 봐요. 어려움과 두려움이 올 때에는 어떻게 해서 그 어려움과 두려움이  생겨졌습니까?  자, 간이 작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옛사람과  새사람이, 새사람과 옛사람이 바꾸어져서 옛사람이 됐기 때문에 그렇다 하는 걸  그렇게 아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요걸 놓지 말아요. 놓지 말아요.

놓지 말아요. 사람이 바뀌었음으로써 어려움과 두려움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그 시험을 닥칠 때  우리가 어려워지고 두려워지는 그것은 사람이 바뀌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구원으로 오는 구원은, 바꾸어졌으니까 구원이 올 때는  자기에게는 구원으로 보입니까 멸망으로 보입니까? 멸망으로 보여지지요? 멸망이  올 때는 구원으로 보입니까 멸망으로 보입니까? ○○○조사님? 멸망이 을 때는  구원으로 보이고 구원이 올 때는 멸망으로 보이고 꺼꾸로 보입니다. 꺼꾸로  보이요.

 이러니까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에 구원이 을 때는 반드시 정반대로 보인다는  그것을 아예 예비 지식으로 딱 가지고 있으면서 그럴 때 '내가 벌써 두렵고  어렵다.' 전능하신 주님이 가라 하는데 어려울 게 뭐 있습니까? 그분이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했는데 어려울 게 뭐 있겠소? 두렵고 어려움이 올 때는  반드시 우리가 옛사람으로 바꾸어져 그렇지 믿음의 사람으로 있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꾸어졌으니까 거게서 살아나는 길은 죽는 길로 보이고 죽는 길은 사는 길로  보이니까 죽는 길을 택하면 사는 길이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목숨을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버린 자는  찾으리라'  이런데 우리가 갈릴리 바다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데에 평안하게 무사하게 잘  구원을 이루어서 점점 향상으로 점점 전진으로, 가는데도 주님 바라보고 주의  명령 순종 그걸로만 가게 되고 또 우리가 두려워 떨려 견디지 못하는 데에도 그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안으로 바꾸어지는 데도 뭣입니까? 두려움 없어지고  평안으로 바꾸어지는 데는 뭣이지 요? 뭐라요? ○선생! 이거 안 들으면 소용  없어.

 자 그러면 우리가 막 어렵고 '이 태산 같은 일을 어짜노? ' 어려움 두려움 이거  있을 때에는 뭘로 어려움과 두려움을 그것을 없앨 수가 있습니까? 어려움과  두려움을 평안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 뭐입니까 저 ○조사님? 예? 그거  해야돼. 그거 하면 ○조사님, 획 달아나 버려, 그까짓 거 다. 그거 뭘.

 이러니까 읽을 힘이 없거든 여기 신구약 성경 녹음을 해 놓은 그런 테이프를  사다가서 놓고 자꾸 들어. 그저, 앉아 못 듣거든 누워 듣고, 자꾸 듣는 가운데서  두려움도 다 평안으로 바꿔지고 염려가 기쁨으로 바꿔지고 그러는 가운데에서  이제 주님을 바라보니까, 주님만 소망하니까 딴거 아무 소망 없고 주님만 딱  소망하니까 뭐가 나왔습니까? 나온 것 뭐 나왔지요? 담력 나왔고, 또? 욕망  나왔고, 욕망은 무슨 욕망 나왔소? 뉘만한 욕망? 대통령만한 욕망? 녜, 주님같은  욕망이 나왔습니다. '주여! 명하시옵소서. 나도 할 수 있습니다.' 하니까 '오라'  하니까 배 위에 척 내려 가지고서 걸어갔다 말이오. 되지 안했습니까?  이런 초자연의 능력으로 우리가 목회하고 신앙 걸음 걸어가는 것인데 창조자의  이 능력 가지고 하는 것을 어떤 뭐 '이거 사회를 의지해야 된다. 국가를  의지해야 된다. 정부를 의지해야 된다. 정권을 의지해야 된다. 이거 안 하면 안  된다.' 거게 배경을 가지고서 거기 뭐 청와대 드나들면서 그 배경을 가지고서  뭣이 뭐 어짠다 어짠다 하면서 와 가지고, 제가 하나님 배경이 아니고, 거기  한번 갔다 나오면 배가 이래 나옵니다. '내가 청와대 들어갔다 나옵니다.'  청와대는 누가 있는데? 가증스러운 것. 하나님은 요런 자들을 다 멸하십니다!  이렇게 절대자인 그분으로만 되는 그걸 '세상에 내가 지식이 이만치, 이 지식  가지고.' 어림도 없는 놈의 소리! 그 지식이 뭣인데? 그게 음행의 포도주인데.

그걸 잘 이용을 해야 종이 되지. 그걸 종으로 삼으면 참 필요합니다. 아주  편리해요. 편리하고 그걸 종으로 삼지 못하고 그것 가지고 뭣 하려고 하니까  그게 하나님 아닙니까? 그게 우상이오. 그 때부터 망하는 거라.

 그러기 때문에 지식 있는 사람들이 다 망하고 약간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 있지.

그러니까 '지식 많은 사람들이 많지 못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자, 주님만 바라보고 주의 명령만 순종하면 잘, 갈릴리 바다  이 세상을 잘 건너갈 수가 있고, 건너가다가 주님 잊어 버리고 주의 명령  잊어버리고 저거가 뭐 한다고 날뛰면 그만 세상이 우리를 반대해서 우리는  세상에게 방해를 받게 되고, 그전에는 방해를 안 받아. 방해를 받게 되고.

 방해받을 때에, 방해 받을 때에 얼른 주님 말씀 찾고 주님 찾으면 그 방해가  변해져서 이제 도움이 되어질 터인데 그렇지 안하고 자꾸 방해하는 그것만 자꾸  바라봅니다. 자기 주관으로 돌아가요. 그러니까 사람이 바뀌어져 버려. 사람이  바뀌어지니까 두려움과 고난이 읍니다. 두려움과 고난이 올 때는 두말 할 것  없이 사람이 바뀌어져서 온다 그것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그러면 새사람으로 가면 두려움도 고난도 없느냐? 고난이나 두려움이 있지마는  그 사람에게는 고난과 두려움이 되지 안하고서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욕망이 돼지지요.

 이러니까 네가 바꾸지 못하고 있거든 그럴 때에 두렵고 어려움이 올 때에 네게  대한 참 구원은 네 적으로 보여진다. 적으로 보여진다. 너는 그만 완전히 견해가  모든 평가가 꺼꾸로 돼 버린다. 그러니까 그럴 때에 네가 네 정반대인, 반대인  그 구원의 길을 네가 택하지 못하면 주님에게 부르짖으라. 부르짖으면 즉시 손을  내밀어 건지신다.

 그런데 인간이 순조롭게 가는 것도 주를 바라보는 것과 주의 명령 순종으로만  갈 수 있고 멸망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주의 음성 듣고 주님 바라보면  그것이 완전히 바꿔진다. 또 바꿔지고 큰 욕망 가지고서 주님 바라보고 주의  명령 순종으로 가면 초자연의 능력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걸어가다가 또  옛사람으로 돌아가면 또 빠진다 또 세상 바라보고 거게 피동되면 또 너는 물  속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이러니까 우리 일생 걸음이 항상 이 놀음입니다.

 이러니까 요것을 단단히 알고, 우리가 오늘 아침에 제가 증거하고지 하는 것은  '따로 산에 가서 한적한 곳에 계셨다' 가야 됩니다. 아무래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게 제일 급선무입니다.

 여기 평신도들도, 보면 어떤 사람들온 여기 꽃마을이 얼마 되지 안 하는데 거게  한번도 안 가요. 어떤 사람 보니까 내가 보니까 아침 일찍 먹고 가 가지고서.

집에 할 일 뭐 부지런히 해 놓고 일찍 먹고 가 가지고 또 기도 실컷 하고 또  서너시 되니까 또 내려오고.

 그런데 그 사람을 내가 보니까, 하나 내가 눈여겨 봤는데, 그 사람이 내가  대면은 못 해도 '누가 왔던가?' 물으면 내가 아는데 그 사람은 많은 식구에  식모도 없고 또 주부로서는 제일 알뜰한 주부고, 제일 참 좋은 현처고 또  어머니로서는 제일 현모고, 현모 현처 알뜰한 주부 그런데도 그 시간을 내 그리  가고, 또 그 사람은 거지냐? 저거 지내기도 하니까 사업도 하니까 복잡할  사람이오. 이런데도 그런데,  그래 또 어떤 사람 내가 말 들어 봤어. 들었는데, 그분은 이상해요 그분은  말하면 항상 '시간이 없습니다. 바쁩니다.' 그 소리를 못 들어 봤다고. 뭐  주님의 뜻인 것 말하면은 '그래 하지요' 이러지 '시간이 없어 바빠서' 하는 것  없는데 생전 게을배기로 빌어먹는 그 인간들이 말하면 '시간이 없고 뭐 바쁘고'  대단히 너는 다른 사람은 밥 먹고 사는데 너? 금덩이 먹고 사나? 그것 다 자기  마음 단속 몸 단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좀 산에 가서 기도 좀 많이 해요.

 그리 안 하면 앞으로 패전합니다. 왜정 말년에도 승리한 사람들은 다 산에 많이  가 있는 사람들이 승리했고 6·25 때도 산에 많이 가 있는 사람들이 다  승리했습니다. 그때 그런 일 있을 때에 '아이구 기도해야 되겠다' 하고서, 내가  말 들어 보니까 한상동 목사님도 그때 같은 동기들이 많았는데 '아, 이거 지금  신사참배 문제가 차차차 다가오니까 우리가 기도하러 가야 되겠다.' 이러니까 이  기도하러 가는 게 아니라 무슨 세상에 이러니까 다른 방비 준비한다고서  야단지긴 사람들 있고 그때 몇 사람들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고. 산으로 기도하러  간 사람이 신사참배 다 이겼어. 여기 뭐 세상에 이러니까 교회를 단속해야  되겠다 뭐 단속해야 되겠다 하는 그자들은 전부 다 패전 다 해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요는 우리가 한적한 그 생활을 좀 많이 해야 되겠다. 그  산에 가서 밤이 새도록 산에서 밤도 지내고 저 개명교회 ○○○조사님은 거기  좋은 산이 있습니다. 요새 보니까 내가 보니까 살이 띵띵 쪘는데 살 띵띵 찌면  교회 내려가. 어찌 됐던간에 산으로 기어을라가요. 가 가지고 거기서 밤으로  가서 밤에 가슴이 도근도근 하다가 또 하나님 만나면 기쁘고 즐겁고. 그래  두려움이 턱 고개가 넘어가고 나면 평안합니다. 평안하고 '야, 혹 나도 한번  호랑이가 한번 왔으면 한번 등이나 한번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다. 또 뭐이  왔으면 좋겠다.' 그 이상한 사람으로 바꿔져 버려. 그때에 이제 이 세상 사람은  아닌 새사람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 교회는 부흥돼요.

 그런다고 해서 또 인제 내가 그러니 빼짝 마른 게 좋은 줄 알고 마르면 안 돼.

내가 좋아서 그랍니다. 살이 찌고 뚱뚱하게 이래 되니까? '건강 체다' 말라  놓으면 고생이라. 그런다고 해 가지고 뭐 짜다라 고행주의로 밥만 안 먹고 몸만  약해지면 좋은 줄 알고 그래 가지고서 제때 밥도 안 먹고 삐삐 말라 가지고서  그거 큰 두통거리요.

 이러니까 그래 하되 오늘 아침에 한적한 곳, 또 우리가 세상을 평안히 신앙  생활로 담력 있게 담대하게 용감스럽게 6·25가 오든지 뭐 이래도 걸어가는 것은  뭣이냐? 두 가지.또 세상에 고난과 고통이 오는 것은 두 가지 버렸기 때문에. 또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가 사는 길은 꼭 원수로 보인다. 그러기 때문에 반대로  해라 그럴 때에 살아나는 길은 뭣이냐? 두 가지 도로 찾을 것. 주님이 주요,  제가 찾는 게 아니라. 줄 때 받으면 돼.

 찾으면 근심이 변하여서 기쁨이 되고, 공포와 비겁이 변하여서 담대가 되고,  절망이 변해서 큰 욕망이 됩니다.

 그럴 때에 이제 그 욕망을 달성하는 거는 뭐이냐? '주여, 명하시옵소서 주님의  명령이면 뭐이든지 내가 순종하겠다.' 하고 그 현실에서 주님의 명령이면 가릴  것 없이 딱 순종하면 그만 바다 위로 걸어가는 거라. 초자연의 능력이 나타나요.

그러다가 또 이 둘을 바꾸면 또 헛 일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 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모입니다.

 주님과 주의 명령 차지한 사람이 제일 복있는 사람이요, 제일 부자요 제일 복된  사람이요, 그까짓 거 인간적으로 지저분히 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 있어,  있기를?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명령만 복종하는 요 두 가지만 가지면 다 됐는데,  뭐.

 두 가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주의 피공로가 있는데, 우리가 실수해도 좋소.

실수해도 주의 피공로가 있지 않습니까? 실수 했으면 '주여 사해 주옵소서.'  하면 다 돼 버렸습니다. 그만. 이러니까 성령과 진리와 피가 이 셋이 보증이 된  것입니다. 그럴 때 필요해요. 우리가 실수할 때 그만 바라보면 돼 버려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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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 산믿음 죽은믿음/ 신명기 28장 1절-6절/ 851209월새 선지자 2015.11.03
815 산제사를 드려야하는 이유와 방법/ 로마서 12장 1절/ 800418금새 선지자 2015.11.03
814 살리는 반사직/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840408주새 선지자 2015.11.03
813 살리는 방편/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20509주전 선지자 2015.11.03
812 살리는 복음/ 베드로전서 1장 24절-25절/ 820704주새 선지자 2015.11.03
811 삶의 가치/ 누가복음 12장13절-21절/ 800108교역자회 선지자 2015.11.03
810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6월새 선지자 2015.11.03
809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전 선지자 2015.11.03
808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1수야 선지자 2015.11.03
807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4토새 선지자 2015.11.03
806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새 선지자 2015.11.03
805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후 선지자 2015.11.03
804 삼 단계 믿음/ 히브리서 11장 7절/ 810225수새 선지자 201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