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

   선지자선교회

198018교역자회의

 

본문: 누가복음 1213-21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여기에 예수님 오신 그 목적이 무엇인 것을 밝히십니다. 당신이 하지 아니하실 일과 당신이 하시는 일을 여기 밝혀 암시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이런 사건이 있는 것을 여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이 계시기관으로 쓰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그 경륜을 따라 때가 되매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지마는 여러모로 자기의 소용대로 예수님을 이용할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는 단연코 거부합니다.

 

오늘도 믿는 사람들이 구주 예수님을 어떤 분이신 것과 그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사욕, 그 욕망을 달성하는 데에 이용할려고 하는 자가 일반적으로 다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거기에 포함되지 아니했다고 생각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가 다 이 길을 걷습니다. 이 길에서 깨닫고 돌아선 사람이 있고, 끝까지 이길을 걷는 사람이 있으니 걷는 것은 실패입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있는 것. 형의 유업을,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있는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자기도그와 같이 가지는 자가 되게 하려는,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소유를 빼앗고 나누고 해서 가질려는 이것이 안믿는 사람의 생활인데 안믿는 사람의 생활 이것을 대표해서 이런 걸로 나타낸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의 생활인데 안믿는 사람이 하는 이 생활을 예수님을 믿으므로 그의 도우심을 입어서 이일이 되게 하려는 이런 성질의 신앙을 평생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주관적으로만 경영도 하고, 위로도 받고, 감사도 하고 반면에 불평도 하고 하지마는 저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나 그 생활에 있어서는 완전히 상관없는 획선이 그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도를 자기를 위하여 이용할려는 이것은 완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이 방향은 사망을 향하는 방향입니다. 이제 새벽에 말한대로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 이것이 영생이요 여게서 떠나는 것은 다 사망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인간의 구원과 복음,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그것도 냉정스럽게 심각하게 비판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비판할만한 빛을 마련하기가 힘듭니다. 비판할만한 빛을 마련하기가 힘듭니다. 비판할 만한 지혜를 마련하기가 힘듭니다. 이 비판은 천하에 통계나 지식을 인용해도 안됩니다. 다 그것이 사망 안에 삐뚤어진 것들이요. 좁은 범위에서 그 범위 안에서는 옳지마는 그 범위를 넘어 긍극적으로 조물주에게까지 연결될 때에 전체는 삐뚤어졌습니다

 

자기와 자기 생애를 바로 비판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가르쳐서 착한 양심이라 성경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은 벌써 미혹을 받은 마음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미혹을 받기 전에는 양심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 한마음 뿐이었는데 타락한 후에 양심이 생겨졌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가꾸어야 하고 길러야 합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자유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데든지 붙들린데가 있는 종된 마음은 그는 그 상전으로 인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비판과 평가는 상전에게 복종적이요 능동의 자유비판은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사정을 두는 그 마음은 여전히 악심입니다 여전히 사욕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이 얽혀있는 모든 줄을 다 끊어서 붙들리는데가 없어야 이 마음은 자타를 초월하고 시공과 종별을 초월한 피조물로서는 영 다음의 권위를 가진 이 명철이 됩니다. 그럴 때에 마치 지남침이 충격없는데서 지남하는 것처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을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라. 그 때 그 한국에 나온 스톡 박사는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하나님의 사자라. 그는 양심론을 그래 가집디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파송하는 인간의 사자라.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라. 그들은 다 이 양심의 이 권위성과 그의 정확하게 그 가치성을 자기가 느끼는데로 표현한 것입니다. 양심은 분명히 인적 요소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의 빛이라, 혹은 신학술어로는 자연의 빛이라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렇게 얽혀서 어떤 사람은 물욕에 얽혀서 그 마음은 항상 비판이 물욕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의, 무엇보다도 자기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이용할려고 하는 자기중심의 사람은 언제든지 그 마음의 비판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주인이 하나 둘 뿐만 아니고 많은데 지방정실, 혈육정실, 동류정실 이 또 정실을 정실에게 붙들려 매인 그 마음은 언제든지 그의 비판이나 평가가 정실적입니다. 뭐 그 매여 있는 줄은 많습니다. 이것을 먼저 하나님의 성문계시의 말씀으로 하나씩 둘씩 정리하는 것이 이것이 회개입니다. 정리하는 것만치 자유합니다. 자유하는 것만치 그는 정확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필연적으로 피조물 어떤 것에게 붙들려 있던 것이 놓임과 동시에 조물주에게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생과 접선되어 붙들리는 이것을 가르쳐서 영감이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럴 때에 그 빛은 똑똑히 보입니다. 내 눈에 들보를 뽑고 형제의 눈에 티를 자세히 보고 그말은 자기가 여게 저게 붙들려 매인 이것을 끊기 전에는 상대방에게 대해서 비판할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문들을 열고 들어오라' 하는 그것도 영감이라야 이 사죄의 그 크심을 압니다. 영감된 것 만치 압니다. 누가 예수님의 이 사죄의 크심과 칭의의 크심과 이 결합의 크심을 알대로 아는 자 하나도 없습니다 . 영원히 알고 알아도 끝을 못봅니다. 우리가 다 여기 저기 붙들려 종이 되어서 그 세력에게 매여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 원수적으로 움직이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 두신 것은 정금만 남게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이비한 가득찬 유혹속에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로 중생된 자로 영감된 그것으로만 달음질하고 그 밖에 것은 다 헛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금만이 남게하는 불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생명책에 녹명되지 아니한 사람은 다 경배치 않는 자 없다 했습니다. 사는 자는 모시지 않을 자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내 유업을 좀 나누게 해 주옵소서' 하는 이 사랑으로 예수님을 대하는지, 이미 당신 것이니 배반해서 멸망가운데 있는 것을 다시 피로 사서 당신 것 삼으셨는데, 또 이 분을 이용할려고 하는 망상을 분명히 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모르니까 망령인줄 모르고 이용할려고 달려드는 이것이 신약교회의 성도들이라는 것을 여기에 표박아서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하나의 대표입니다. 주님, 내 욕심대로 이렇게 해주옵소서. 그걸 욕심이라는 것을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탐심을 물리쳐라' 그렇게 했습니다. 네 탐심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영감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내가 이용하는지, 이제는 다시는 이 짓 하지 아니하고 내가 주님에게 이용당해서 어쟀든지 다 당하는 것이니까 그 속도는 빠르든지, 더디든지, 어떻게 이용당하든지, 뭐 살리려 이용당하든지, 당장에 당하든지 어쨌든지 나는 나를 위해서 있지 아니하고 당신을 위해서 다 쓰여져 없어질 것이라는 요것을 확고히 가져야 됩니다. 이게 신앙이요. 이것이 신앙의 터전입니다

 

이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암만 주님을 불러도 저 혼자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도 저에게 상관 없고 저도 주님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않는다.' 없수히 여기심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용 당하지 아니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것을 가려서 구별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지금 이용할려고 한다는 그것을 보고 그것을 대항해서 죽이는 그때가 주를 위해 사는 때입니다. 사는 줄 아는 때는 벌써 자기를 위한 때입니다. 이런 투쟁은 쉴 새 없는 계속되는 투쟁입니다.

 

'내 형의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예수님은 이 세상 이것을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더주시고 저렇게 하면 더주시고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 일을 위해서 오신 것 아닙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버지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한 후에 다시 와서 내가 너희들을 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 그렇치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말은 세상 것이, 세상 것을 인해서 주를 바라고 따랐다가 주님이 떠나시니까 모두가 근심입니다. 이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만일 이것 때문에 왔으면 내가 너희들에게 벌써 여게 대해서 말을 했을 것이라 하셨소.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무궁세계에 이 영원함을 마련하는 이용물로 주셨습니다. 이것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여게서 규정지웁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을 규정지어야 됩니다. 이것 가지고 내가 하나님에게 피동된다는 것을 규정지웁니다

 

이것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친교도, 모든 인류와의 만물과도 친교도, 하나님과 만물 사이의 자기 지위의 기능도 숙달시키는 이것이 재세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탐하는 것은 이것은 전혀 불신의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 교역자들이 교세가 흥한데 큰교회, 부자교회, 일하기 쉬운교회, 이런 장소 저런 장소 가린다는 것은 이것은 성경에 입각한 새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생각 못하는 일이요 또 정 반대의 일입니다

 

이는 양심은 거기서 죽었지. 양심이 역사하는 역사는 아닙니다. 이러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내가 올 때에 믿는 것을 보겠느냐' 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그렇게 거리 멀고 이상한 말 아닙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이세상 것을 표준해서 세상 것을 목표로 삼아서 세상의 이해로, 세상의 정오, 진가로 이것 가리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 그것 정오, 그 사람의 무궁세계의 빈부귀천, 이해, 이것 때문에 오셨지, 죄 아래 있는 이것을 욕망삼아서 오신 것 아닌 것을 밝힙니다. 내 이런 것을 목표로 표준으로 삼아 시비곡절을 가릴라고 온 것 아니다. 물건 나누는 자로 온 줄 아느냐? 이 세상 것은 평등, 동등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든지 적든지 거기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인류와 모든 존재와의 영원한 관계. 이 조화의 자기 활약을 숙달하기 위한 이것 때문에 오셨지, 너는 많이 가졌고 너는 적게 가졌으니 안됐다 갈라가지라. 이것의 공평이나 소유나 낙이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 오시지 아니한 것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여게서 똑똑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별되면 목회도 문제 없고, 우리 이 공회서 교역자 이동도 뭐 문제없습니다. 누가 말할 것 없이 스스로 자기 갈길을 자기가 다 주님의 인도대로 찾아야 될 것이요. 또 거기에서만 평강은 있습니다. 권능도 있고 참 수입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욕망에서 세상이 모르는 전법으로 투쟁하여 세상이 모르는 승리, 세상이 모르는 저축, 이렇게 변하는 세상에서 세상이 모르는 영원 불변의 것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이러기에 아버지도 모르고 주님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니 우리의 생애를 그들이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오늘 교회들이 잣대를 세상으로 삼습니다. 세상이 이러니, 통계가 이러니, 과학이 이러니,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해서 대우하니, 세상이 교회의 기준이요 잣대가 되어졌으니 이것을 가르쳐서 소돔 고모라성이라, 멸망한 바벨론이라, 귀신의 처소라, 각종 더러운 것들이 모인 곳이라, 아무런 그의 주장이나 주체가 없는 기회주의의 새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그렇게 모형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탐심을 물리쳐라' 탐심은 자기가 가지지 아니해야 될 욕심, 자기 욕심 아닌 것을 가지는 것이 탐심입니다. 자기가 가질 욕심 외의 욕심이 탐심입니다

 

종류적으로 탐심도 있고, 가지지 아니할 욕심 가진 그것이 탐심입니다. 양적으로도 탐심이 있습니다. 안가질 욕심을 가졌으면 그것 탐심이요, 마땅히 가질 욕심이라도 그 양이 맞지 아니하면 탐심입니다. 그 양이 미달되면 그는 안일의 탐심입니다. '탐심을 물리치라' 그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 욕심을 물리쳐라 그말입니다. 인간욕심을 물리쳐라. 네가 뭐 가족욕심이고, 네 위신욕심이고, 명예욕심이고, 내 뭐 생활욕심이고, 안일욕심이고 그 다 인간욕심을 버리라 그말입니다

 

왜 자기는 어떻게 하고?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그는 미쁘신 자로서 높일 때 되면 높이고 낮출 때 되면 낮추고 다 조절하신다고 했습니다.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복종하라 탐심을 버리고, 우리가 가진 욕심은 성령의 소욕입니다. 하나님의 욕심이 우리 욕심이요. 하나님이 무슨 욕심 가지는데?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살도록 이래야 영생하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뜻도 요소도 재료도 전부 하나님의 것으로 거게 믿음입니다

 

그런고로 탐심을 물리쳐라. 하나님의 욕심을 네 욕심으로 삼았으니 하나님의 욕심으로 삼아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사람의 생명이라 이 말은 사람의 생명은 이미 우리가 받았는데 사람의 삶이란 말입니다. 삶의 가치. 사람의 사는 그 실력이나 삶의 가치나 삶의 결과는 그가 땅에 있는 이런 환경, 저런 조건, 이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에게 기인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좌우되는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욕으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움직이는 여기에서만 영생이 된다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 이 말은 요 생명이라는 요것은 영생이라는 뜻입니다. 영생이라는 뜻을 더 많이 가졌습니다. 사람이 죽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는 참 가치 있는 생활. 영원히 남아 있을 생활. 자기가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나 산 그것이 헛되지 아니한 자기 참 생애 이것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에 근거되지 않다 그것을 다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뭐 우리가 이래 살다가 공산주의가 밀고 내려와서 공산주의 속에 들어간다고 우리구원 결단코 손해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단시일에 급속히 이루게 하시면 급속히 이루어지고 더디게 하시면 더디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암만 그래봤자 불미 속에 타지 않는 것과 같이 그 안에서도 자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자 하시는 대로 합니다

 

우리가 걷는 걸음은 여기에 소속하고, 여기의 모든 재료들을 가지고 여기를 향하여 갈 때만 평안하도록, 갈때만 향기를 나타내도록, 갈 때만 빛을 발하도록, 갈 때만 자타의 생명과 평강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게 아니고는 견딜수 없도록 다 장애물들을 주십니다.

 

많이 주면 녹아버릴 것이니까 조금 주나 진실로 그 속에, 깊은 속에 평강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속속들이 아무리 찾아봤자 생명과 평강과 기쁨 이것만 가득 찼지 그 외에 딴 것이 있을 때에는 우리는 거게 대해서 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 해를 당하는 것은, 해를 당할 만한 요소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리는 것이요 또 그게 해 받습니다. 그게 해 받소. 하늘에 속한 것은 해를 안받습니다. 그게 받지. 고거는 받을 뿐만 아니라 녹아 죽어야 됩니다.

 

'사람의 사는 것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삶의 요소도, 삶의 목적달성의 가치도, 삶의 누리는 평강도, 권위도 거기에 근거되어 있는 것 아니다. 권위도 위로부터 내려온다. 평강도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맺어진 열매도 위의 것으로 맺어진다 하시고 그 다음에 이제 비유했습니다.

 

넉넉하니까 넉넉하니까 분발하는 것이 더 넉넉하게 할라하는 그리만 분발하지 이용할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나도 이용 못했습니다. 요거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권위가 올라가니까, 다른사람의 인정이 올라가니까, 지위가 올라가니까, 무대가 넓어지니까, 교회가 커지니까, 자기의 실력이 올라가니까, 주님이 주신 것이니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거둔다고 했으니까 이것 가지고 더 주님을 많이 위해서 써야 될 줄은 모르고 이것을 곡간 헐고 더 저축해서 더 부강해질려 합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의 정죄를 우리가 벗어야 됩니다. 우리가 강팍합니다. 우리가 굉장히 강팍하요. 굉장히 완고하요 .소련에서 그렇기 때문에 은사교권에 있는 사람은 다 몰살시켰습니다. 하나도 못 살았어요. 다 죽었어요. 우리의 강팍은 하나님께서 특수한 자유성을 주었기 때문에 종이 되어야 할 자가 자유성을 가졌으니까 마음 놓고 얼마든지 자유합니다. 그 자유에는 반드시 심판이 옵니다. 자유 주었으니까 뒤에 조사가 오요. 검사가 오요. 자유만 가졌지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지 아니하니까 점점 강팍해지고 완패해집니다

 

예례미아23장엔가 25장에 보면은 그 목자들의 비참을 거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여기만 목적을 두고 항상 다시 말하면 땅의 것이라 말이요. 땅의 것만 목적 둬. 땅의 것을 써가지고 하늘의 것을 마련할려고 하지 아니하고 땅의 것만 목적, 땅의 것으로써 자꾸 부강해지기만 목적 둬. 우리가 요것을 살펴봐야 됩니다. 자기가 땅의 것을 지금 목적두고 땅의 것을 지금 부강케 부요케할라고 하는 것인지 이것을 써가지고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기업의 이것을 지금 이루기 위해서 목적으로 노력하고 이것 위해서 쓰여질 때 땅의 것은 저절로 오고 이렇게 된 사람은 목회는 저절로 됩니다

 

목회는 저절로 되고 교회는 저절로 커지고 이것 가지고 자기 구원에만 쓰고 구원 거게 이용할려고만 전력을 기울이고 이래야 될 터인데 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요렇게 살기 쉽습니다. 그러면 탐심, 하나님의 욕심이 아닌 인간욕심, 그 욕심이 언제 끝났는가? 그날 밤에 하나님이 부를 수 있는 바로 하나님이 세상 떠나라는 그 시간에 끝났어. 그시간에 이 자기 아닌 자기. 악령과 악성으로 되어 있는 요 악습의 것이 요것이 이제 기회 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석방입니다

 

석방해봤자 할 일이 있어야지, 할 기회가 있어야지 죽는 날까지 땅의 것만 소유하다가 죽을 때가 되니까 그때사 급하게 서둘러가지고 이랬을걸 저랬을걸 하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제물을 쌓아두고, 이것은 물질계에 있는 그것들을 쌓아두고 그말입니다. 제물 돈만 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요, 하나님의 것이 풍부히 되었고, 하나님을 위함이 풍성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아 움직임이 풍성한 이것이 우리 사는 것인데 이것으로 부요할 줄은 모르고 두고 갈 땅의 것으로 부요할라고만 생각하는 이거 오늘 교역자들도 거저 어쩌든지 땅의 것만 좋아합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끌어낼 진리라도 꾸중하는 것은 싫어하요. 자기의 먹고 죽을 사약이라도 달콤하게 인정으로 붙여주면 좋아합니다.

 

아 서부교회에서만 나간 교역자의 숫자가 나는 누가 나갔는지도 모르요. 또 그분들이 아무 정리가 없어. 오히려 다른 데 나간 사람들이 나하고 가깝지. 다른데서 다른 교회서 내보낸 그 교역자는 어찌 그리 그 인연이 두껍고 깊고 큰지 환하게 다 알아져. 좋지 못한 것입니다. 병아리가 새끼를 뗄라하면은 자꾸 대가리를 쪼아서 땔라고 하는 모양으로 여게 지금 서천석 김병춘 이 둘이서 나가는데 요새 지금 내가 자기네들이 어떻게 하는고 왜 이렇게 하는고 싶어서 오해를 할 만치 냉정합니다. 아주 정을 싹 끊어 보내야 됩니다. 과거에도 정 없지마는 다른 교인들보다도 왜? 그게 살리는거라. 어리석지 말아야 됩니다. 회개를 해야 빛이 나옵니다. 회개 아니하면 빛이 안나와요. 줄을 얽어 매어가지고는 안 돼.

 

그러기에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자유케하려고 불렀는데 이 자유를 악으로 쓰지 말라 이랬습니다. 참 자유를 주었는데 이 자유를 이제 뭐 예수 믿고 나니까 아무 걸리는 것 없어. 아무것도 없어. 제멋대로라. . 이제는 예의에 걸려요? 체면에 걸려요? 도의에 걸려요? 약속에 걸려요? 아무데도 걸리는 게 없어 이거는 참 자유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을 보면서 살아야지 그것 보지 아니하고 살진데 뭐할라고 예수믿기는 믿어. 세상에서 자기 비위대로 솜씨대로 한번 해보고 말지, 하필 다른 사람이 조롱하는 종교를 의지해가지고 그래 몹쓸 중놈들 모양으로 그렇게 살게 뭐 있겠습니까 있기를.

 

기도합시다.

이 시간도 우리를 새롭게 깨워주심을 감사합니다. 평생 주의 말씀으로 씻고, 삣고, 깍아서, 깨끗게하는 이 일을 쉬지 않게 해 주옵소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 시간에도 저희들이 다시 의논할 때에 함께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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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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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가치/ 누가복음 12장13절-21절/ 800108교역자회 선지자 2015.11.03
810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6월새 선지자 2015.11.03
809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전 선지자 2015.11.03
808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1수야 선지자 2015.11.03
807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4토새 선지자 2015.11.03
806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새 선지자 2015.11.03
805 삼 계급의 우상/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870405주후 선지자 2015.11.03
804 삼 단계 믿음/ 히브리서 11장 7절/ 810225수새 선지자 201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