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1986. 7. 11. 금새벽

 

본문: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 읽어 보면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에 대해서 아주 차이가 심히 엄격한 것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이 삼위관이,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관이 참 바로 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삼위일체에 대한 이 해석이 제일 어렵다 이랍니다. 또 삼위 일체에 대한 해석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해석이다 또 이렇게들 말합니다.

이러니까 다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이 어렵다는 그 점에 있어서는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입니다. 다 어렵다. 이러니까 어려운 것을 말하는 그 말은 공통입니다.

모두가 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요 자존하신 분이요 우리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지음을 받은 우리들이, 유한한 우리들이, 불완전한 우리들이 우리를 무한히 탁월한 그분을 우리가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분인 것을 우리가 다 바로 해석하지는 못한다 해서 그만, 삼위일체에 대한 극히 어려운 비밀, 또 해석에 아주 어려운 난점 그런 거는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석할 수 없다 하는 그 한 마디 가지고서 그만 다 대충을 해 버리고 마는 것이 오늘까지 그대로 다 신학자들의 통계입니다.

그래 오늘 아침에 하나만 잠깐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어 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그 격위가 아주 엄격합니다. 이래서, ‘성부가 제일 높고 크신 분이고 성부와 성자의 차이는 굉장히 있고 또 성자와 성령의 차이는 굉장히 있어서 다 차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 교리가 처음에는 시작하기를 한 교파 두 교파 시작했는데 점점 이것이 늘어 나가서 이제는 차이 있게 그렇게 사람들 주관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뭐 거의 다가 돼갑니다.

그래서, 오늘 이 가운데 여기서 믿는 사람들도 ‘성부라면 제일 어른으로서 존재의 시기도 같이 동시에 존재한 것이 아니고 존재의 순서도 다르다. 첫째가 성부, 그다음에 성자, 그다음에 성령으로 삼위의 존재 순서가 다르다. 또 그뿐만 아니라 권위 순서도 다르고 지혜 순서도 다르다. 권위와 지혜와 능력의 순서도 다르고, 또 일을 맡은 순서도 다르다.’ 이래 가지고서 자꾸 다르다는 이것을 말할 때에 인간 지식을 가지고서 해석하는 사람으로서는 과연 다르다 하는 그 다르다는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지금도 뭐 한 팔십, 똑똑히는 모르지마는 팔십프로 이상입니다. 앞으로는 백프로가 다 그렇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실은 존재도 같이 존재했고, 또 크기도 꼭 같고,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영광과 존귀와 위엄이 꼭 같고, 또 모든 크심이나 그런 순서도 꼭 같다 이렇게 믿는 것이 장로교 교리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장로교 교리가 제일 바르고 옳습니다.

이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자꾸 차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차이가 있다고 해야 마음에 인정이 돼지고, 차이가 없다고 동등이라 이렇게 말하면 인정이 잘 안 되어지는 그 이유가 뭐이냐? 어데서 그런, 사람들에게 의문을 가져오게 됐느냐 하면은, 성자가 그 직책을 이행할 때에 성부에게 절대 복종입니다. 절대 복종이고 하나도 거게서 그 앞에서 당신의 그 주장이나 권세나 또 능동이나 그런 것이 전혀 없고 피동적이고 복종적입니다. 또 성부의 것을 성자가 발표했지 당신의 것을 발표하지 안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한 말은 곧 아버지의 말이요 내 안에서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지 내가 단독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성령도 주님의 것을 가지고 하지 성령님의 독단으로서나 능동으로 성령님께서 무엇을 발언해 가지고 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꼭 성자의 것을 가지고서, 성자가 성부에게 한 거와 꼭 같이 성령은 성자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게서, 보라 이 차이점이 있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 그것을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것은 여게서 뭣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느냐 하면은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한 분이십니다. 한 분이요 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맡은 그 직책에 대해서는 그렇츰 엄격하고 털끝만치도 거게서 월권하는 일이 없고 그렇게 정확 무오하게 그렇게 엄격하게 하는가 하는 이것을 우리가 보고서 깨달을 것은, 내나 한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어떤 사람은 나무로 비유해서 뿌리, 둥치, 가지, 이렇게 ‘한 나무에도 뿌리 있고 둥치 있고 가지 있다’ 이렇게 비유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그 비유는 좀 사람들이 약하다 하고서 그리 인정을 잘 안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태양이 있다, 태양이 있는데 태양에서 빛도 나오고 열도 있다, 열도 있고 빛도 있으나 그것이 내나 한 태양에서 나왔다.’ 이렇게도 또 비유해서 말하는데 오늘까지에 비유 가지고 말하는 데는 그 비유가 모든 사람이 제일 유력하다 그렇게 긍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게 대해서 비유를, 이렇게 했으나 이것이 그 맞는 거는 아닙니다.

왜? 이 책상 위에 만일 이 책상 위에 백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 책상 위에 백 가지 종류의 물품이 있다 말이오. 백 가지 종류의 물품이 있는데 이것을 탁월한 어떤, 사람을 하나 말할라고 하면은, 사람은, ‘자, 사람이라는 게 하나 있다.’ 이라면 어떤 사람이 있다가, ‘사람이라는 게 있다면은 네가 사람이 있다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말고 사람은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 그런 것을 하나 인용해서 이와 같다 그렇게 말을 해 주면 똑똑히 알겠다. 그러니까 뭐와 같은고 봐라. 자, 여기 지금 백 가지가 있으니까 이거와 같나 이거와 같나?’ 백 가지를 다 말하면서 ‘이와 같으냐?' 하면은 거게 이와 같다 그렇게 말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책상 위에? 예? 책상 위에 ‘이거와 같다’ 하는, 이거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책상 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있을 수가 없지요.

왜? 여게 없는 것 이것을 탁월한 여게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여게 있는 것 가지고는 이와 같다 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천상 천하에 모든 피조물과 다른, 피조물이 아닌 피조물과 다른 그 무한히 크시고 무한히 완전하시기 때문에 이 피조물 가지고는 이런 거와 같다 저런 거와 같다 그렇게 비유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맞습니까? 비유할 수 없다 말이 맞습니까? 녜, 맞습니다. 비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비유하기를, 인용하기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맞다고 하는 거는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격위가 셋이다.

호주라는 격위를 가지고 있고 남편이라는 격위를 가지고 있고 또 아버지라는 격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지마는 자기의 직책이 각각 다르다. 남편 직책은 다르고 아버지 직책 다르고 호주 직책 다르고 다르지마는 사람은 하나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그 본체가 하나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 그러나 그 한 분이 맡은 직책이 각각 다르다. 격위가 다르고 직책이 다르다.

그래서, 내나 그 직책을 떠나면, 그 직책을 떠나면, 직책을 떠나서, 직책 속에 들어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뚜렷하지마는 만일, 영원히 떠날 수 없지마는 직책을 떠난다고 하면 성부가 성자요 성령이요, 성령이 성자요 성부요, 내나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나 그런 한 분뿐인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 분뿐인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자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본체시나” 이래. 성자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체이니까 성부의 본체라 말 아니요? 성령의 본체라 말 아닙니까? 이러나 직책에 대해서는 이렇게 엄격했습니다.

여게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한 하나님으로서 한 분인 영원 자존하신 한 분인 하나님, 둘이 아니라 한 분인 하나님이시지마는 하나님이 각각 직책을 맡은 그 직책에 대해서 엄격했습니다.

그 직책에 대해서 그 직책을 혼합하거나 혼돈하거나 이렇게 뭐, 내나 하나가 하는 것이니까. 우리 사람은 나 한 사람이 이 일도 맡고 이 일도 맡고 이 일도 맡고 서이를 맡았다고 하면은 다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과 이 일에 대해서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하지 안하고 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한테 혼합을 시켜서 할 때도 있고 뭐 내가 내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그렇게 가릴 게 뭐 있느냐 이래 가지고서, 아무리 구별해서 한다고 해도 그 구별에 대해서, 이 직책을 내가 세 가지 직책을 맡았는데 일, 이, 삼으로 만일 삼의 직책을 맡았다면은 삼의 직책을 맡은 내가 내나 일호의 직책도 맡았고 이호의 직책도 맡았고 삼호의 직책도 맡았으니까 삼호 직책 맡은 내가 일호 직책을 또 내가 맡아 가지고 있고, 일호 직책을 또 내나 내 한 사람이 맡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삼호 직책과 이호 직책과 일호 직책을 서로 혼합할 수도 있고 혼돈할 수도 있고 또 이렇게 서로 그렇게 구별하지 안하고 이렇게도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내나 자기 혼자하기 때문에. 자기 혼자하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뭐 우리는 참 그것이 그저 윤곽적으로는 이렇게 자기가 이 회사의 사장이고 이 회사 사장이고 이 회사 사장이고 이러면은 윤곽적으로는 이 회사는 이 회사대로 따로 독립을 하고 이 회사는 이 회사대로 독립을 하고 이 회사는 이 회사대로 독립을 해서 자기가 세 회사에 다 사장이 됐다 할지라도 그 회사와 회사의 서로 경제라든지 권세라든지 의무라든지 책임이라 하는 그런 것은 윤곽적으로는 엄격하게 따져서 각각 구별하지마는, 그래도 내 한 사람이 내나 이 회사 사장이고 저 회사 사장이고 저 회사 사장이고 하기 때문에 직책을 감당할 때도 혼돈하기 쉽고, 또 모든 사건이나 모든 자원이나 이런 것도 서로 혼돈해 가지고서 이렇게 그것을 서로 타 가지고 이걸 똑똑히 그렇게 구별하지 안하고 타 가지고서 그렇게 하기 쉽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뭐 천 명이 만 명이 있다 할지라도 다 그럴 것입니다. 다 내가 한 사장이기 때문에, 내나 내 회사요 한 사장이기 때문에 이거와 이것의 구별을 그렇게 엄격하게 가지지 안하고 서로 어떨 때는 합할 때도 있고, 탈 때도 있고, 섞을 때도 있고, 또 이렇게 양보할 때도 있고 저렇게 양보할 때도 있고, 이 힘을 이리 또 돌려서 할 때도 있고 저 힘을 저리 돌려 가지고서 이렇게 해서 이것을 메꿔 나갈 수 있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라 그거요.

그러나, 하나님이 성부의 직책이나 성자 성령의 직책에 대해서는 아무리 성경에 봐도 거게 대해서 털끝만치라도 그게 혼잡한 일이 없습니다. 또 이렇게 혼돈한 일이 없습니다. 또 이렇게 서로 타협하고 이래 한 일이 없어. 어떻게 철두철미하게 참 절대로, 우리가 볼 때는 절대를 붙일 수 있는 그런 그 구별성을 가지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거요.

여게서 하나님은 당신 자체가 자체끼리, 당신 혼자, 당신 혼자 자기 혼자, 자기 혼자가 이거 저거 맡아 있는 내나 한 분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 이것 저것을 맡아 가지고 있지마는 직위와 직위를 혼돈하지 안했다. 직위와 직위를 혼돈하지 안했다. 이러니까 그 감당에 대해서도 혼돈하지 안했다. 언제든지 권세에 대해서도 혼돈하지 안했고 절대성으로 구별을 가지고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셨다.

이 말하는 걸 내가 말 발표력이 좀 모자라서 여러분들이 잘 알아듣는지 몰라도 요걸 자꾸 이래 말할 때에 여러분들이 속에 ‘그거다’ 하는 것을 그걸 잡아야 됩니다.

내가 말하는 그 말에서만 있지 말고, 내가 말하는 것은 마치 꿀먹은 벙어리가 말을 못 하니까 뭐 어떻게 발표를 못 해도 그 벙어리가 말을 못 하면서 뭐 어떻다고 형용을 하고 으야 이래 쌓고 손짓을 이 어찌 하는 가운데에서 ‘저거는 아마 이것은 되게 참 맛이있다 하고, 맛이있고 달다는 말인가보다. 또 이거는 쓰고 안됐다는 말인가보다.’ 말로 벙어리가 표시 못 하는, 벙어리가 가지고 있는 그 생각, 가지고 있는 그 비판, 평가, 생각하고 가지고 있는 그 생각을 자기가 발견해서 붙들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내가 벙어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거기 때문에 벙어리가 하는 이 말을 벙어리 말과 같은 이 말 가운데서 자꾸 하는 가운데서 인간의 방언으로 발표할 수 없는 그 속에 있는 그 알맹이 그걸 여러분들이 잡아야 한다 그거요. 그것 때문에 자꾸 말하는 것입니다.

한 설교를 자꾸 거듭거듭 하는 것은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가 없는 그 속에 이념, 그 속에 사상, 그 속에 모든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그 교리와 신조, 신학 이런 것을 발견해서 붙들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그 속에 있는 능력을 자기가 거게서 발견해 가지고 그 능력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 그 능력보다 더 깊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 속에 있는 진리 그 진리를 또 발견해서 잡으라고 지금 자꾸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이 능력이라든지 진리라든지 이거는 말로 표시를 못 합니다. ‘뭐 능력이 거게 참 많이 들었다, 여기 전능의 능력이 있다, 전지의 지혜가 있다’ 이래 암만 말해 봤자 그건 또 말이지 그 속에 있는 그 실상은 그걸 보여 줄 수가 없다 그말이오.

보여 줄 수가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볼 수가 있느냐?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그만치 변화가 되고 변화가 된 것만침 진리를 알게 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모양으로 그 말씀과같이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거게서 이 말씀을 긍정하고, 자기가 확실히 믿고, 믿을 때에, 믿을 때 고다음에 방언으로 표시할 수 없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능력과 능력 속에 들어 있는 그 진리를 자기가 잡을 수가 있는 것이지 확신을 가지지 안한 사람은 만 번 들어 봤자 그 들어도 인간의 방언을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인간의 방언을 뚫고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알겠습니까? 인간의 방언을 뚫고 들어가지를 못해요.

역사에,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부활한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 하는 그것은 이 아브라함 이전에는 아무도,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일 수도 있고 다시 살릴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런 길이 있다.’ 하는 그것을 아브라함 전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 전에는 아무도 인간의 부활이라 하는 그걸 몰랐습니다. 몰랐는데, 아브라함이 그걸 먼저 발견했습니다.

발견한 것은 어떻게 발견했느냐?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번제로 드리면 번제는 불에다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다른 제사는 뭐 그 기름을 떼고 각을 떼고 머리를 떼고 또 뭐 껍데기를 떼고 뭐 이렇게 하는 일 있지마는 번제라 하는 것은 뭐 껍데기, 털, 창자, 뼈 전부 다 한목 몽땅 불에다 태워 가지고서 드리는 것이 번제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니까 이삭을 재로 만들라는 그 말씀입니다. 그 재로 만들라 할 때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재로 만들면 이제는 재가 뭐 되겠느냐? 부활을 못 한다.’ 이렇게 안 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재를 만들어 가지고 이 재를 가지고서 다시 아이 낳을 수 있는, 이 재를 가지고서 동침해서 아이 낳을 수 있는 이런 이제 이삭을 하나님이 만들어 내겠구나. 재로 사람 만드는 그런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로구나.’ 그러면 거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이라 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았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활시킨다, 죽였다가 재를 만들었다가 부활시킨다.’ 하는 그 부활 시킨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알았느냐? 확실히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안 그것을 어떻게 해 가지고 아브라함이 알았습니까?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그걸 알았습니까? 어떻게 해서 알았지요? 누가 한번 말해 봐요. 양성원 학생 중에 한번 말해. 예? 큰 소리로 한번 해 봐. 그겁니다. 이삭을 통해서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을 많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이삭이 재가 무슨 사람을 만듭니까? 재가 무슨 아들을 낳소? 재가 아들 못 낳으니 하나님이 아들 낳아서 그렇게 자손이 많게 하겠다고서 하나님이 약속했으니 그 약속 변치 않다.

하나님의 약속을 변치 않는 확신을 가지다가 보니까 필연적으로 재가 사람된다 하는 것은 믿게 됐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그거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됩니까? 이러니까,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죽은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신다’ 하는 그 지식을 가진 그것은 아바라함이 이삭으로 자손이 많게 하겠다고 하는 약속 그 약속을 의심치 안하고 그 약속을 확실히 믿는 그 믿음이 들어서 그걸 낳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 외에 딴거는 아브라함에게 그걸 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자기 속에 있는 믿음이 이 말씀도 믿고 이 재로 사르라는 이 말씀도 믿어서 재로 사를라고 자기가 생각하고 재로 사르라 하니까 의례히 사뤄야 될 줄 알고, 그러면 재로 사르니까 이삭이 재가 될 것을 알고, 또 후손이 그렇게 많겠다 하니까 자연히 필연적으로 둘을 합하면은 재가 다시 살아나 사람이 돼 가지고서 아이 낳는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게 알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것은 요 믿음을 가지고서 그 지식을 발견했지 믿음이 아니면 그 지식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안 이것을 자기가 실행을 함으로, 실행을 함으로 알 수 있는 그 진리, 자기가 하나님의 진리를 그 진리를 실행할 때에 실행하면은 일차적으로 자체가 변화되고 또 이차적으로, 변화되면 자기가 실행한 그 진리가 어떤 진리라는 것을 자기가 다시 새로 깨닫게 된다. 깨닫게 되는 그것이 뭐냐 하면은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행함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알 수가 있다.

알맹이가 뭐이 들었느냐? 알맹이 든 것이 뭐이 들었습니까? ○○○선생, 알맹이가 뭐이 들었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라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그 말씀 속에 알맹이가 무슨 알맹이가 들었지? 무슨 알맹이가 들었어? 저 ○조사님? ○조사님? 실상, 무슨 실상? 예? 성화? 그래도 발표가 맞았다 해도 그거 점수 백 점 안 줘요. 다른 이 한번 말해 봐. 그 뒤에 사람 말해 봐. 그 뒤에 사람. 예?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거룩은 안 들었고? ○장로님, 이거 봐, 이렇게 통통 모르니. 자, 저 뒤에, 집사님인가 조사님인가, 저? 바로. 지금 졸음이 와서 자꾸 막 눈을 이라며 애를 먹고 하는 분, 저 저분 말이요. 자기 말이요, 자기. 그래, 이라는 사람. 이래 머리 이라는 사람. 어? 내가 이름을 몰라서, 바로 여기 ○○○집사님 사위 옆에 있는 사람 흔들어 봐. 그래. 말해 봐요, ○○○집사님 사위. 아닌가? 옆에 그분을 말해 보라 말이오. 그래, 옳지. 자꾸. 어? 진리, 그속에? 그것도, 예? 영감? 여게 백 점 말했어. “참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라. 그거 내나 성화라 하는 그 말 맞기는 그 말을 했는데 발표가 말이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 속에 제자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제자가 들어 있어. “제자가 되고” 또 그 속에 뭣 들었어? 새로 아는, “진리를 알지니” 또 진리가 들어 있다 말이오. 그것은 행함으로만 그 안에 제자되는 것이 들어 있는 줄 알지 그전에는 아무도 몰라요. 아무리 제가 뭐 천 번 만 번 외운다 해도 몰라. 꼭 행해야 고 순서가 된다 그말이오.

그리고 진리를 아무나 말 듣고서 발표한 말, 예수님이 말씀했지마는,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듣고 행했지마는, 예수님이 설교 얼마나 잘했겠소? 이렇지마는 그 속에 있는 진리를 모른다 말이오. 예수님의 가르친 그 진리는 아무도 몰라. 어떤 사람이 아느냐? 행하니까 행함 속에 “참 내 제자되고” 자체가 성화되는, 그 말은 성화란 말은 말은 맞기는 맞았는데. 그 성화되고 성화 속에 진리가 들어 있다 말이오. 성화 속에 진리가 들어 있어. 이러니까 그게 아니면 몰라요.

이것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 말씀은 말하자면 이 삼각과 같습니다. 이 삼각과 같아 삼각이 이 끄트머리는 뾰쪽하게 마치 그 바늘 끄터리같이도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삼각 끄트머리는? 그런데 이 속에 들어가면 차차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겉은 바늘 끄트머리만한데 들어가면은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커집니다. 이 진리를 바늘 끄트머리만한 그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어가면은 그 속에는 이 삼각 모양으로 무한이라 말이오. 모든 존재가 다 들어 있어. 한없이.

그러니까, 이 깨닫는 것이 천층 만층이라 그거요. 그런데 이 깨닫는 것은 자꾸 자기가 깨닫는 방편은 딴거 없고 아는 대로 행하고 나니까 성화되고 성화되니까 또 알고 또 안 거 그것 또 행하고 나니까 또 그 안에 또 더 성화되고 또 더 성화되니까 더 알게 되고 자꾸 이렇게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알고 확실히 인정하고 그다음에 실행하고 이것으로 자꾸 걸어서 들어가고 들어가고 들어가서 무한으로 들어간다 그거요.

이런데,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 말해도 지금은 잘 들었는지 그거는 모르겠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당신이 한 분이신 당신이 성부노릇 하고 당신이 성자노릇 하고 당신이 성령노릇 합니다. 알겠습니까? 당신이 성부노릇 하고 성자노릇 하고 성령노릇 하고, 성부의 일하고 성자의 일하고 성령의 일을 하지마는 그 일하는, 들어가니까, 들어가니까 한 분이신, 일체이신 한 분이지마는 거게서 나와 가지고서 삼위로 이제, 격위를 가졌다 말은 지위를 가졌다 말이요, 지위 가졌다 말은 의무와 책임을 가졌다 그말입니다.

격위와 의무와 책임이 하나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는, 이 사람이 누구냐? 그거는 시장 위치에 있지 않느냐? 시장 지위를 가졌어.

시장 지위를 가졌다 말은, 시장 지위를 가졌다 말은 뭘 가졌다 말입니까? 시장의 의무와 책임과 권세와 모든 심판과 통치 그것을 가졌다 그말이오. 그러면 암만 시장이지마는 그거 다 내놔 그거 없으면은 그거 시장 아니오. 그거 아니면 시장 아니라. 묵은 시장이라.

우리 교회 여기 시장 부인 여기 한 분 와 있는데 오늘 아침에 나왔는가 모를러구만. 그 남편은 죽었지마는, 시장이지마는 그거 다 직책 다 내놓으면 시장 아니라 말이오. 반드시 위라 하는 것은 자기의 의무와 책임과 그 권세, 의무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그 권세, 실력 그것을 가리켜서 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삼위라 말은 그 위가 셋이라 그말이고, 격위가 셋이라 말한 것은 의무와 책임과 본분이 셋이고 권위가 각각 셋이라 그말입니다. 내나 한 분이시지마는, 한 분이신 일체인데, 일체인데 거게서 이 일 맡고 저 일 맡고 맡아 가지고 떡 나오고 난 다음에는, 나오고 난 다음에는 이 엄격해서, 나와 가지고서, 나와 가지고, 셋으로 나와 가지고, 한 본체가 셋으로 갈라져 나와 가지고 이와 같이 일할 때에는 이 혼돈이 절대 없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이 혼돈이 절대 없어. 절대 없고 절대 구별입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그것만 보고서 이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이 아니고 제일 크신 분이 성부고 그다음에 둘째로는 성자가 크고 그다음에 성령이 제일 말단으로 작다’ 이래 가지고서 ‘지위도 권세도 존재의 순서도 다 차이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오늘 지금 이 신신학들 인본주의 신학들이 자꾸 헛소리들을 하니까 나중에 이와같이 자꾸 범벅 타령이 돼 가지고 들어간다 그말이오.

내가 여기, 우리는 그 칼 발트를 이단자로 보고서 그 발트의 신학을 인정 안 합니다. 안 하는데 내가 말 들어 보니까, 언제 보니까 감리교 목사님이 그 설교를 하는데 저게 ○○금식 기도원에서 설교하는데 그래 발트 그런 이가 아주 위대한 이라고 그런 이가 말하는 데도 이렇게 이렇게 그 사람은 이런 주장을 했다, 그 주장에 대해서 대단히 존경하고 아주 그 교리를 심히 아주 존대하는 것으로 그렇게 발표하는 걸 봤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에서도 발트 사상을 가장 높은 신학으로 보고 알고 그렇게 가르치고 행하고 있는 교파가 있고, 세계에서는 지금 발트 신학이 현재 차차 차차 권리를 잡아서 세계에 제일 양적으로는 제일 권리를 많이 잡고 있습니다. 많이 잡고 있고, 뭐 칼빈주의라 하는 거는 차차 차차 축소가 돼 가지고서 이제, 점점 무사하게 지나갈수록이 칼빈주의는 자꾸 파묻히게 되고 밟히게 됩니다. 밟히고 이라다가 만일 어떤 세계 대 환난이 나오면은, 환난이 오면은 칼빈주의는 일어서서 칼빈주의만 남고 나머지기는 다 무너져 버리고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한국도 그렇습니다. 한국도 이렇게 평안 무사할 때는 막 서로 돈 많고 지위 많고 권세 많고 숫자 많고 이래 가지고 모두 다 이렇게 뭐 떠들어 쌓았지마는 무슨 환난이 척 와 버리면 다 눈 녹듯이 싹 녹아져 버리고 무너져 버리고 오직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무한하신 영영한 완전 전지 전능의 이 능력의 요소로만 되어진 그 신앙만 살아난다 말이오. 그 신앙만 살아 남아 있어요.

이러니까, 환난 후에는 가짜가 다 불타 버리고 진짜만 남는 것이 금을 불로 연단하면은 거게서 잡철은 다 타 버리고 순금만 남는 거와 같이 그렇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여기 순금 말이 나왔는데, 불로 연단한 금 말했는데 불로 연단하면은 정금이 남고 정금도 그것 또 나중에 가서 없어지고 맙니다. 정금은 영원히 있는 것 아니오. 정금도 세월의 제한을 받아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없어지는 것이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그것보다, 우리가 지금 연단받아 가지고 얻는 이 구원은, 사람들은 금은 영원히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금 같다 이랬지만 금 같다 말이 아니고 금 그거는 없어지지마는, 금을 연단해서 잡철에서 정금이 나오고 정금 나온 그것도 또 없어지지는마는 우리가 믿음으로 만들어 가지고 연단받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이것은 지금 금을 잡철 태우는 것 그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세밀히 잡것을 태우고 태우고 태워서 이래 만드는데 태워 가지고 만들어진 이것은 영원히 영원히 가도 털끝만치도 변질되지 않는 그런 것을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다 하는 그것을 여게 비유해서 금을 인용해 가지고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런데, 오늘 아침에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것은 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삼위의 직책이 이래 직책할 때 어떻게 뚜렷하게, 성자와 성부의 그 위치가 천층 만층 이렇게 말할 수 없어. 무한히 층어리 있어 거기서, 말을 못 합니다. 꼭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만 움직였지 하나도 뭐, 내나 한 본체는 하나기 때문에 그저 아들이 말하나 아버지의 말이지만 그 혼돈하고 섞지를 안했습니다.

그 격위, 한번 직책 맡은 그 직책을 하는 데 대해서는 그 지위가 뚜렷하고, 의무와 책임이 뚜렷하고, 거게 대해서 권세가 뚜렷하고, 한 하나님이시지마는 외부에 직책을 감당할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게서 우리가 뭘 배울 것이냐?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니까 본체가 하나인 자체 아닙니까, 자기 아닙니까? 자기가 이 의무와 이 책임과 이 직책과 또 저 직책과 이렇게 계획과 이렇게 작정한 그 작정한 것을 조금도 털끝만치도 혼돈하지를 못하고 또 정해 놓은 의무와 책임을 조금도 혼잡하고 혼돈하지를 못하고 가감하지를 못하고, 이렇게, 당신이 당신의 혼자 하는 일도 요거는 요거다 요거는 요거다 요렇게 구별하고 요렇게 꼭 그걸 구별하고 그것을 판정하고 그 가치나 권위나 의무나 책임이나 종류나 그런 것을 털끝만치라도 혼잡하지 안하고 이렇게 혼탁하지 안하고 이렇게 잡류하지 안하고 조그만치라도 그 선을 넘어가지 안하고 그것이 정확 무오하게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라 하는 요게서 여러분들이 발견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발견할 것이 뭐이요? 하나님, 당신 그 본체 안에, 당신이 당신 혼자 당신이 작정해 놓은 것을 변동 못 한다. 당신이 이렇게 정해 놓은 것을 변동 못 한다. 이런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는 당신은 창조주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당신과 우리의 관계에 이렇게 정해진 이 모든 선포된 약속이라든지, 정해진 것이라든지, 이 제도라든지, 이거 위치라든지, 이 구별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혼돈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혼돈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이렇게 여게서, 당신은, 당신 자체는 자체를 털끝만치도 범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자체가 자체를 털끝만치도 범하지 못한다. 일체지마는 당신이 한번 선포해 놓은 것은 변동하지를 못한다. 가감하지를 못한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정해 놓은,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당신이 죄의 값으로 죽지 않고 그 벌을 털끝만치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정확하게 그렇게 받지 않고는 이 죄 문제가 사죄가 안 됐다.

그러면, 하나님의 여게서 지공을 찾고, 하나님의 지공을 찾고 지성을, 지성이라 말은 지극히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요, 지공이라 하는 것은 지극히 공변되다는 것이요, 지성이라 하는 것은 지극히 거룩하고 거룩하다는 하나님의 지공 지성,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 또 이렇게 하나님이 혼돈하지 안하고 하시는 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찾아봐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을 범하지 못한다. 털끝만치도 범하지 못한다.

그러면 성자가 성자의 위치와 성부의 위치를 혼잡해 가지고서 성자가 성부의 위치도 혹 가다가 가끔 가다 하나씩 할 수 있다고 하면은 그것은 뭐이 됩니까? 당신 자체가 내놓은 것을, 작정해 놓은 것을 범하는 것 아닙니까? 그 범하는 그런 일이 없다 그말이오. 범하는 일이.

이것은 여러분들이 좀 알기 어려운 말이고 이것은 잘 별로이 많이 나타나지 않는 말인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위는 삼위니까 하는 일은 각각 따로 있다. 위라 하는 것, 할 의무와 책임이기 때문에 의무와 책임은 각각 따로 있다. 그런데 의무와 책임을 행하는데 조금도 혼합하지 못하고 월권이나 뭐 이렇게 남용이나 무슨 공의가 없이 사가 있어서, ‘뭐 내가 했기 때문에 잘못해도 또 이리 하면 한가지 아닌가?’ 거게서 심판도 엄격하고, 심판도 엄격하고 또 비판도 엄격하고 평가도 엄격해서 털끝만치도 그거, 그거는 아주, 원수와 원수끼리 이렇게 무슨 법을 지키는 거와같이 그렇게 냉정하게 혼잡 혼혼이 전혀 없이 이와같이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럴 때에 여기 삼위일체에서, 하나님 본체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성, 지공, 변치 않는 그 불변 이것을 우리가 여게서 찾아 볼 수 있어. 하나님은 변치 않는 하나님, 또 하나님은 지극히 구별하시는 하나님, 지극히 공평된 하나님, 또 지존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여게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여게서, 그러면 우리 믿는 신자들이 어떻게 구별해야 되느냐 하는 이것을 깨닫는 데에 자꾸 깨닫는 데에서 성도들, 우리는 성도들이라, 우리는 구별하는 무리들이라.

이래서, 거룩이라는 것은 무엇을 찾아가는 것이 거룩입니까? 거룩은 진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이라면은, 거룩이라면 진실에 도달했을 때, 뭐 이것 저것 찾다가 진실에 도달했을 때에 비로소 거룩이라고 말하는데 거룩이라고 하는 말과 진실이라는 말이 다른 게 뭐입니까? 진실이라 말은 이제 그 둘이 없는 완전한 그 하나인 고것을 발표할 때에 이제 진실이라고 요렇게 말했고 거룩은 수많은 잡탱이 가운데서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서 이제 진실이 되는 요 진실을 찾아낸, 찾아낸 그 과정과 진실을 합해서 말할 때에 거룩이라고 말하고 찾아내 놓은 고것만을 말할 때에, 온전만을 말할 때에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요렇게 요 진실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러니까, 늘 그게 그 말이라. 교리가 둘이면 행동이 둘 된다. 교리가 삐뚤어지면 행동이 삐뚤어진다. 이래 그거는 생명과 같이 귀중히 여겨야 된다 하는 그런 말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래도 되고’ 이 사람은 이래도 된다 하면 이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도 정통이고 이것도 정통이고, 정통인데 그 둘 다 정통이다.’ 이래 말하면 그 사람한테 하나 물어 볼 일이 있습니다. ‘둘 다 정통이라니? 그러면 둘 다 맞다 말입니까 그러면 어떻다 말입니까?’ 맞기는 하나가 맞는데 이 정통이라 말은 모든 사람들이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사람, 이것도 모두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사람 있고, 이것도 모두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사람 있는데 ‘그러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게 정통입니까 이게 정통입니까?’ ‘이것도 정통이고 이것도 정통이고 나는 둘 다 좋다고 나는 둘 다 옳은 걸로 이렇게 깨닫고 있다.’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거룩이 있는 사람입니까 없는 사람입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사람입니다.

요렇게 하나씩 요것 하나만 여러분들이 구별해 나가도 벌써 이거 없는 데 가 가지고서 사 년이고 십 년이고 공부한 것보다 요거 하나만 구별해 나가도, 요렇다 요거 하나만 구별해도 그만하면 많이 배웠어.

이런데 부산에 있는 여기 학생들이 제가 새벽기도 가서 인도한다고 집구석에 가 자빠져 편안하게 자빠지고 집구석에 뭐 이거 저거 볼 것 뭐 자기 할 일 뭐 이거 지금 못 해서 학생노릇 반 하고 지금 가면서 그 뭐 새벽기도 인도한다는 그래 빛 좋은 개살구로 그렇게,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놓는 거와같이 그따위 행세하고 말이지.

여게서, 새벽기도 제가 나와 가지고 여게서 배워야, 내가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기 때문에 여기 양성원 학생들이 많으면 거기서 주시는 것이 다를 거라 말이오.

그러면 이런 것 들어서 그랄 건데 여기 안 듣고 제가, 새벽기도 인도 못 하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고 여기 공부할 동안에는, 여기서 자꾸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니까 새벽기도 배우는 이게, 여러분들이 새벽기도에 참석해 가지고서 배우는 이게 내나 그 양성원에 내나 시간 내내 배우는 것보다 많습니다.

여게서 얻은 수입을 얻어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돼. 뭐 여기 뭐하러 옵니까? 성경 공부하러 온 것 아닙니까? 성경 공부, 이제, 여기에서 오늘 아침에 가르치는 이것도 하나님은 이러하신 하나님이라 하는 데에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니 이 구별 없으면 안 된다. 구별하는 데는 반드시 거룩이 돼 가지고 참에 진실에 나아가야 되지 진실 아니면 주님 만나보지도 못한다.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면 화평과 거룩이 하나입니다. 잘못하면 ‘화평을 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거룩해야 되지 화평하기 전에 안 된다’ 화평과 거룩이 하나요. 거룩함과 화평함이라 해도 되고 화평함과 거룩함이라 해도 되고 뭐 이래도 저래도 꼭 같습니다. 그 화평이 거룩이 돼야 됩니다. 그게 아니면 소용 없어. 이런데 사람들은 거룩이 되지 못할 그 화평을 가지고 하는 그거는 내나 배암의 사랑이요 배암의 화평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 시간 많이 갔는데 오늘 아침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인데 삼위는 하나님이시지마는 그 삼위가 역사할 때는 그 격위가 뚜렷하고 털끝만치도 변하지 못했다. 월권하지 못하고 거게서 혼합시키지 못하고 혼돈시키지를 못했다. 삼위는 이렇게, 한 분이 내나 그리 하지마는 이 격위의 의무와 직위와 본분에 대해서 뚜렷한 그 구별이 그게 뚜렷했다.

그러면, 이분의 모양을 입는 것이 우리라 말이오. 이분의 형상을 입는 것이 우리들이라.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돼야 될 것인가? 자기 일이지마는 내나 내 일이지마는 이 일하고 저 일하고 혼돈시킬 수 없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서 이런 사람이 되니까, 이러니까 자꾸 대쪽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믿으면은 자꾸 대쪽 같아서 이 막 구별구별 이라니까 사람들은 듣기 싫어한다 말이오.

그러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는 비빔밥을 좋아합니다. 혼잡, 혼돈을 좋아하고 요걸 구별하면 반드시 거게서는 끊겨 나갈 것이 있고, 깎여 나갈 것이 있고, 살라질 것이 있고, 버릴 것이 있기 때문에 다 싫어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제일 싫어한 사람이, 제일 싫어한 사람이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때가 온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대개, 세상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때가 오는데 예수님의 재림 심판 오면은 제일 좋아합니다. 무궁세계에는 제일 좋아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하늘나라에 제일 가치 있는 사람 될 사람이 무슨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 크게 말해 봐. 틀리면 틀린 줄 알면 안 잊어버려. 크게 한번 말해 봐. 진실한 사람. 틀렸어. 또? 또 어떤 사람이요? 선지자. 선지자.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상급을 줄 때에 선지자 상을 제일 먼저 말했습니다. 선지자 상을 제일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모두 다 다른 상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자도 선지자로 순교한 사람이 제일 상이 많아요. 선지자로 순교한 사람이.

그러니까, 선지자가 뭐이냐? 요거는 틀렸다 틀렸다 자꾸 구별해서 구별해 가지고서 말해서 구별해서 말하니까 너는 이거 틀렸다, 너는 이거 고쳐라, 너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 사람이 제일 미워서 선지자를 죽여 놓고 사흘 반 동안 장례 지내지 안하고 길가에 시체로 뻐들트려 놓고서 나중에 하늘에서 생기가 와 가지고서 살려 가지고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는 그것이 땅위에 선지자들의 그 모든 광경을 넓은 범위에서 말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 나와요, 또. 인제 오늘 아침에도 또 지금 시작했는데 아직 아직 진짜를 아직 다 배우지 못했어. 자꾸 나와서 배워야 돼요.

이제 여러분들이 전도하는데, 전도하는 사람 뭐 전도가 뭐요?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고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도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새벽기도 나와서 그게 알아야 예수를 참 믿지. 자, 새벽기도 나오라고 자기가 지금 누구한테든지 계속 전화로든지 자꾸 말로든지 새벽기도 나오라고 믿는 사람에게 새벽기도 나오라는 전도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새벽 기도 나오라고 전도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없네. 새벽 기도 나오라고 전도하는 사람 손 버뜩 들어 봐요. 이제 앞으로는 새벽 기도 나오라고 누구든지 권면하겠다고서, 새벽기도 나오라고 믿는 사람에게 새벽기도 전도할 사람, 이제는 전도할 사람, 지금 앞으로 전도할 사람 손 들어 봐요. 인제 이건 다 들어야지, 앞으로 전도. 이거 다 해야 돼요. 이래서 점점 온전한 데 나아가는 것 아닙니까? 양성원 학생들은 지난밤에 저 양산동 가는 그 공동 묘지 가 가지고서 그 비 오는데 기도하고 왔어요. 내가 저 뒤에 ‘옷 다 안 젖었느냐?’ 하니 비니루 가지고 가 옷 다 안 젖었다고. 그 비가 그렇츰 많이 왔는데 비 안 오는 비 사이로 왔구만. 옷 안 젖었어? 올 때는 비가 고때 안 오던가, 잠깐? 천막 안에 들었다가 이거 나오면 뭐 비 다 젖었을 것인데, 뭐 그렇츰 많이 왔으면? 가서 기도했어.

○○에 있는 어떤 직공 하나 와서 그라기 때문에 너 그라면 단식해라. 너가 할 수 있겠나? 닷새만 하라 했더니만 인제 오늘까지가 닷새인데 제법해요. 오늘 인제 흰죽을 끊여 줘야 될 건데 토요일날 끓여 달라 하더래요. 아주 좀 그거는 뭐, 단식 못 하지만, 하루 하고 나니까 그만 늘어져서 그만 메어다 놨어. 메어다가 놨는데 하루 더 하니까 힘이 나오고 하루 더 하니까 힘이 나오고 그래 뭐 어제 가 가지고 ‘내일 아침에는 내가 흰죽을 쑬 터이니까’ 하니까 흰죽 토요일날 쑤어달라 하더래.

여러분들, 들어가면 돼요. 저 사람 저렇게 어떻게 지금 막 저 고문과 고형을 당해서 저렇게 맞는고 해도 주님이 맞아 주시니까 맞은 자마다 다 기적을 봤어.

주님의 말씀을 들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험한 데 가면은 기적 더 큰 기적 보고, 천하 인간이 아무도 갈 수 없는 거기 가면은 천하 인간이 아무도 갈 수 없는 거기에 보지 못한 그런 큰 기적 봅니다. 주님은 이렇기 때문에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는 것을 여기 오늘 공부할 것인데 지금 공부 미처 못 했어요.

다 나와서 자꾸, 인제 전도해 가지고 여기 뻑뻑하게, 우리 교회가 바로 될라면 낮으로 여게 다 꽉 차고 저 밑에도 차는데 새벽으로도 여기 다 차고 삼층 일층에도 다 차야 돼요. 그래야 이 서부교회 교인이 진짜 교인이고 세상 축복 하늘나라 축복을 막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거라.

이것 되면 되는 것만치, 하나님은 어누리 안 해요. 된 것만치 하나님은 딱각딱각 해 주십니다. 우리가 되기가 지금 시간이 걸리지 당신이 해 주시는 것은 시간 안 걸려요. 즉시 해 주시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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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60711금새 선지자 201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