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1987. 2. 16. 새벽 (월)

 

본문:요한복음 1장 1절∼18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더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에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과 다릅니다. 신구약 성경 하나님 말씀은 진리요 1절에 말씀이라 한 이 말씀은 곧 성자를 가리켜 말합니다.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이 태초는 천지를 창조할 때의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다” 하는 그 태초와는 다른 태초입니다. 그 태초는 창조하기를 시작하는 그때를 가리켜서 태초라고 말했고 여게 태초라고 하는 것은 영원 전을 가리켜서 태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 전.

영원 전에 계셨으면 하나님이 존재하게 되는 그때를 말한 것인가? 그때를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피조물이 없을 때에 피조물을 지으실라고 나타나신 그때를 가리켜서 태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태초에 이 말씀이 계셨고 또 이 말씀이 계셔 가지고 제일 처음에 하신 일이 뭐인고 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하신 그 일을 하셨는데 그 그리스도는 누군고 하니 그리스도는 곧 이 말씀이시요 또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이십니다.

이래서 예택하신 일을 하시고 그 다음에 예정하신 일을 하시고 또 그 다음에 예정대로 창조하신 일 하신 뒤에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하게 됐읍니다.

그러면 예정도 택함도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홀로 계셔서 당신이 이제 이 당신 뜻 안에서 이 선택 일을 하시려고 나타나신 그때를 가리켜서 태초라 그렇게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태초는 하나님이 존재케 된, 존재케 된 그 시작의 때를 가리켜서 태초라고 말한 것 아닙니다. 시작의 때는 그 시작의 때가 없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 전인데 이 태초는 시작의 때가 있은 지 후를 가리켜서 태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에 영원 전 자존하셨고, 영원 전 자존하신 하나님이 태초에 나타나셨고, 태초에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는 그 하나님의 목적을 세우셨고, 목적 세우시고 난 지 후에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예정하시고 난 다음에 창조하셨는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다” 하는 창세기 1장에 태초를 말한 것은 예정 후 창조를 시작하는 그때를 가리켜서 태초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이 진리인 말씀이 아니고 신격을 가지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씀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는 함께 계셨다는 여게서부터 이 단수로 나타나지 안하고 복수로 나타났읍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말은 어떤 하나님을 말하는고 하니 성부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으로 그때부터 나타났읍니다.

삼위의 하나님으로 나타난 그때를 가리켜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하는 것을 말하고, 함께 계셨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데 하나님이 우리라고 하는 때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라고, 천지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이 사람을 어떻게 지을까” 하신 그때부터는 우리라고 한 것에는 복수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라고 하신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하는 걸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계셨고 삼위일체 하나님 때부터 벌써 하나님이 하실 일을 경영하시는 그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이신데 한 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그때부터가 곧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역사하시기를 시작하는 때니 역사하실 때에는 성부로 역사해야 될 일이 있고 성자로 역사해야 될 일이 있고 성령으로 역사해야 될 일이 있고, 이러기 때문에 그때부터 삼위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읍니다.

삼위의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본체도 하나시요, 하나님은 본체도 하나시요 또 권능과 지혜와 모든 능력도 하나신데 다만 그 위가 셋입니다, 위. 그래서 삼위, 위라 하는 것은 곧 격위를 말합니다, 격위. 인격의 격위를 말하고 격위를 말하는 것은 벌써 지위를 말하고 또 그 분담된 책임을 말하고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삼위로 나타나실 때부터 성부의 직위 성부의 격위가 있고, 성부의 격위라는 것은 지위 위에 성부의 그 신격의 격위가 있고, 성자의 신격 격위가 있고, 셩령의 신격 격위가 있는데 그 격위는 곧 지위요 지위는 곧 책임을 부담한 그 책임의 위치요, 이래서 삼위로 나타났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위는 본체는 하나시요 한 하나님이신데 한 분뿐이십니다. 한 분뿐이시요 그 본체도 하나입니다, 셋이 아니고. 하나인데 다만 위만 셋입니다.

이래서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나 그 권위도 같고 또 지혜와 능력도 같고 또 모든 속성도 같은데 그 속성은 곧 삼위의 속성이 있는데 삼위의 속성은 곧 한 속성입니다. 한 속성이 삼위의 속성이니 삼위 다 한 속성, 성부의 속성이나 성자의 속성이나 그 하나입니다.

그라면 다만 사람들이 요렇다 똑똑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은 그분은 무한하신 분이요 이 땅위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라든지 모든 존재의 범위라 하는 것은 다 유한하게 되어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무한의 존재이니까 유한의 존재를 가지고 이렇다 그렇게 표명할 것이 없고 비유할 것이 없고 그렇게 표현할 것이 없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는 세상의 이것 같다 그렇게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가지 상징하기를 햇빛으로 상징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나무를 한 나무지마는 뿌리 있고 둥치 있고 가지 있는 거와 같은 그런 걸로 이렇게 상징하는데 그런 것도 하지만 맞지 않습니다. 다 어째 알도록, 하나인데 여럿으로 나타났다 하는 걸 알릴라고 하는 것뿐이지 모릅니다.

또 저는 한 사람인데, 사람은 한 사람인데 그 위로 말하면 호주의 직위도 있고 남편의 직위도 있고 아버지의 그 직위도 있다 하는 그런 것으로 말했지만 그것도 그저 유한한 것을 가지고 무한한 분을 무엇을 요렇다 요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인데 다만 {알도록} 아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이 책상 위에는 지금 이 마이크가 있고 책이 있고 시계 있고 또 여게 또 초인종이 있고 또 여게 종이 있고 이 줄 있고 이거 또 베쪼가리 있고 이것밖에 없읍니다. 요것뿐입니다. 요거뿐인데 예를 들어서 여게 없는 어떤 만일 우리 한국에 무슨 대통령이라면 ‘그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은 어떤 거냐? 이거 같으냐? 이거 같으냐? 이 시계 같으냐? 뭣 같으냐?’ 해도 ‘그런 게 아니다.' 여게는 없읍니다. 없으니까 그런 것 가지고 `이와 같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무엇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분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요 그분은 완전이기 때문에 이 피조물 중에는 완전한 게 하나도 없는고로 요런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읍니다.

다만 그분은 한 분이십니다. 한 분이시요 본체도 하나인데 이 격위만 셋으로 나타나 가지고 성부의 역사를 했고 성자의 역사를 했고 성령의 역사를 했는데, 성부 안에는 성령 성자가 같이 내주하고 계시고, 성자 안에도 삼위일체가 내주해 계시고, 성령 안에도 삼위일체가 내주해 계시고, 성자가 일하는 데에도 삼위일체가 같이 일했고, 성부가 일하는 데도 삼위일체가 같이 일했고, 성령이 일하는 데도 삼위일체가 같이 일했읍니다. 같이 일했으나 이 일은 성자가 했고, 이 일은 성부가 했고, 이렇게 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이랬는데 이분의 이름을 가리켜서 말씀이라 이랬읍니다. 이분의 이름을 가리켜서 말씀이라 이랬는데 우리가 알기 쉽도록 한 것인데 말씀이라는 것은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발표하는 것이 말입니다.

발표하는 것이 말인데 이분의 성호는, 성호라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서 성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성자의 성호는 그리스도라고도 했고 말씀이라고도 했읍니다. 또 독생자라고도 했읍니다.

이랬는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래서 성자가 지었고 또 성령이 지었고 성부가 지었고, 그래서 어떨 때에는 성부가 창조했다, 성자가 창조했다 이렇게, 또 성령이 지으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짐작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요 유한돼 있는 사람들이 유한이라는 그 유한 가지고 자기 유한에 딱 들어맞도록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그것이 벌써 실수로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이 유한은 무한을 알 수가 없고, 유한은 무한을 잡아 삼킬 수가 없고, 그것을 다 파악하고 확실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게는 피조물을 초월한, 유한을 초월한 무한성의 존재라는 것을 언제든지 바라보고 믿는 것밖에 없읍니다.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에서 이런 분이시다 했기 때문에 믿는 것으로만 알지 딴것으로써는 자기가 알 수 없읍니다.

이런데 과학자들이 대개 실패하는 것은 뭐 때문에 실패하느냐? 과학자는 꼭 자기가 무엇으로 보든지 꼭 봐야 인정하지 보기 전에는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보는 그것으로 자기는 한계를 지워 가지고 자기가 보고 자기가 아는 그 범위 내에 것이라야 인정하지 자기가 모르는 거 자기가 볼 수 없는 것은 인정치 안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몇억만 배의, 억만 배로 크게 보이는 어떤 그런 돋보기가 있다고 그런 현미경이 있다고 하면 그 현미경으로 봐도 봐야 그 인정하지 보기 전에는 인정을 않는 것이 과학자들인 것입니다.

이러니 보이지 안하는 데 인정 안 하는데 내나 피조물 뭐 원자니 어떤 뭣으로 가지고 본다 할지라도 그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내나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게 보이지 안하고, 그런 것에게 싸이지 안하고, 그런 것들에게 완전히 파악이 되고, 완전히 이해가 되고, 완전히 분석이 되고, 완전히 지식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랬는데,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은 예수님 되기 전에, 예수님 되기 전에는 무엇입니까? 예수님 되기 전에는 무엇이지요? 여게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그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제 말씀이 육신되어 왔읍니다. 말씀이 육신되어 왔다 말은 사람이 사람되어 왔다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요 육신은 그때 왔으니까 예수님이십니다.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말씀했읍니다.

그러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인성을 입기 전에 인성되기 전에 모든 만물을 창조했읍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도 그분 없이는 존재된 것이 하나도 없읍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은 곧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데 성자라고 말하면 거게 한 격위만 딴 격위로 성자 격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창조했고, 또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를 살리는 능력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곤충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뭐이든지 살리는 생명, 그러면 이 물질 생명 영의 생명 모든 살리는, 피조물을 살리는 이 생명은 그분에게 있었읍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분이 생명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면 이분이 생명 가지고 있으면 성부는 안 가져? 성부도 가지고 있고 성자도 가지고 있고 성령도 가지고 있고, 생명은 한 분이신 이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데 한 분이신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이 생명, 성자의 격위도 이 생명 가졌고 성령의 격위도 생명을 가졌읍니다. 그러면 생명은 그분에게 있읍니다.

어제도 말했지마는 어떤 여게 식물, 풀 한포기의 사는 것도 그분의 주신 그 생명으로 그것이 살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만유라” 만유라 말은 일만 만자 있을 유 자인데 그 만유라는 뜻은 뭐인고 하니 모든 존재,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라. 그러면 개미 한 마마리가 있는데 개미 한 마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계시는데 그러면 개미가 주님이라 말인가? 하나님이 개미에 계십니다.

그러면 계시면 뭘로 계시는가? 그 안에 계신다 했읍니다. 또 그 안에 계신다. 그 안에 뭘로 계시는가? 그것을 창조한 창조로 계시고, 그것의 생명으로 계시고, 그의 지능으로 계시고, 그의 모든 움직이는 힘으로 계시고, 그의 존재로 계십니다.

창조로 계십니다.

이러니까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하는 골로새 3장에 말씀했는데 그리스도는 만유시라는 이것을 잘못 알면 ‘그 주장은 백 목사가 그리스도는 만유라는 해석을 이렇게 한다’ 이라면은 알지도 못하고 그 근방에 오지도 못하고 저 유치한 그런 심령을 가지고 ‘이 풀 한포기에도 이제 그리스도는 계신다 이라면은, 그 안에도 계신다 하면은 그게 똑 범신론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닌가? 하나님인데 풀 속에도 하나님 계신다 했기 때문에 풀도 하나님 뭐 개미도 하나님 모두 다 만물이 다 하나님이라고 그래 가지고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 모든 게 신이라, 범신론이다.’ 하는 그런 것으로 또 유혹을 해 가지고 정죄하기 쉽다 말이오.

범신론이라 하는 것은 그런 벌써 범신론 주장이나 그런 학설이 나서 가지고 크게 넓게 있읍니다. 있는데 그걸로 떡 부딪히면 그만 사람들은 무식하면은 쏠리기 쉽다 말이오. 쏠리기 쉬운데, 그러면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또 쉬워. ‘성경에 그러면 너는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했는데 그러면 너는 성경을 이 성구는 어째? 이게 성경 아니냐?’ 또 이라면 그거 거석하고.

그거 또 성경에 이렇게 문서계시로 나타낸 것은 외곽이오. 외곽이요 그 속에 문서계시 안에 세상에다 다 기록하면 둘 곳이 없을 만한 많은 양을 가진 것은 문서계시 안에 내재하는 영감계시를 말한 것이오. 영감계시는 더군다나 더 모르고 말하는 사람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네들이 이렇게 뭐 정죄해서 ‘그는 무슨 주의다’ 이렇게 주장을, ‘뭐 로섹트주의다 뭐 무슨 주의다' 이렇게 말을 했다가도 나중에, 처음에는 그말 하다가 뒤에 실실 그만 까뭉케져 버리고 말 안 하고 맙니다. 그게 뭐이냐?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그래 한 말 한 마디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고 말 한 말이면 ‘나는 모르고 했다’ 하면 그만 되는 게 아닙니다. 꼭 심판이 있읍니다.

심판이 있고 거게 대한, 그것으로써 그 말 한 마디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보였으면 손해보인 그 배상을 제가 해야 되니까 영원한 나라에 그 모든 것을 배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을 쿡쿡 할 말도 안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는 사람들은 ‘뭐 밑져 봤자 본전인데, 말해 봤자 안 되면 그만이지, 말해 봤자 안 되고 말고 그 손해갈 거 뭐라? 말하고 말에 돈이 드나? 그러니까 말하고 그만 뭐 안 되면 안 되고 되면 되고, 되나 안 되나 한번 말해 보지. 밑져 봤자 본전 아니가?’ 하면서 요 마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말해 가지고 안 돼도 말하는 거야 무슨 소용 있고 무슨 손해갈 게 뭐 있느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몰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서에 보면은 심판하실 때에 “경건치 아니한 말과” 먼저 말 심판이 있어. “경건치 안한 말과 그 경건치 안한 모든 행동” 하나님을 위하는 그 동기와 목적에서, 또 하나님 위하는 방편이 된 그것을 가리켜서 경건인데 그거 아닌 것은 다 심판받습니다.

먼저 말을 심판받고 그 다음에는 행위 심판받고 하면은 그 다음에 이제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은 되나 안 되나 말합니다.

여기 신고함에도 안 될 말을 써 넣어 놨읍니다. 안 될 말을 써 넣어 놨는데 그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좀 불쌍한 것은 자꾸 자기를 정죄해서 자기를 자꾸 어두움 가운데에,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에, 저주 가운데 자꾸 자기를 파묻고 있으니까 그게 문제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야고보서에 “너희는 말에나 행실에나 장차” 뭐라 했읍니까? “장차” 뭐라 했소?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로 알고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해라” 이랬어.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줄 알고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했읍니다.

말이 심판이 없다고, 하나님은 말만 심판하시느냐? 말 그것은 오랫 동안 다 나온 겁니다. 말이 있기 전에 사람이 생각이 있읍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뜻, 마음의 뜻과 생각을 하나님이 뭐라고 했읍니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하시고, 행위가 뭐인데? “사람의 마음과 뜻을 아시느니라” 이랬어. 그러면 행위가 곧 생각과 뜻이 행위입니다.

이래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으러 갈 때에 이새의 장자를 보고 인물이 훌륭하고 키가 크고 멀꿈하게 잘 생겼읍니다. 아주 미남이고 훌륭하게 생겼읍니다. 이러니까 사무엘도 그만 녹아 버렸어. ‘아이쿠, 하나님이 기름 부으실 이 참 아주 이스라엘 왕이 여게 있구나’ 하고 좋아서 이라니까 하나님께서 ‘이는 내가 버린 자다. 너는 사람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만,’ 키가 크고 미꿈해, 요새는 모두 뭐 키만 크면, 키가 작으면 중매할라 해도 중매도 안 돼. 실상은 여러분들, 키 큰 사람 중에도 아주 훌륭한 사람 있지마는 키 큰 사람한테 외나 훌륭한 사람은 가끔 가다가 있고 드물고 조그만한 사람 가운데 위인이 있읍니다.

여게 뭐 온 세계에 위인이라 하는, 정치적으로나 모든 학적으로나 위인이라 하는 사람들 모두 조그마이요. 모두 큰 사람 없어. 등소평이를 말하니까 ‘아이구, 등소평이 되게 큰갑다.’ 하지만 크지 안해. 키가 조그만하이 땡땡합니다.

‘사람은 그 외모와 신장을 보거니와 나는’ 그 사람의 뭘 본다 했읍니까?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은 마음 본다 말이오. 마음이 어떻게 마음과 생각과 뜻과, 그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마음의 움직임을 본다 그것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의 움직임이 하나님에게만 향하여 있지마는 다른 것들은 다 땅위에 이런 것 저런 것 대해서 다 움직이고 있지 하나님에게 대해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거는 내가 버렸다 이랬어.

그러면 하나님만, 그분만 향하여서, 그분만 중심해서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으로 동하고 정하는 그것만 하나님이 잡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 외에 딴것으로 동하고 정하는 자는 하나님에 다 버림받은 것이라. 아주 버림받은 데서 하나님께 아직까지 들어가지 못했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래 들어갈라고 애를 쓰는 것은, 들어갈라고 애쓰는 방법이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 한 분을 중심하고 상대하고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만 믿고 그분만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받고 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의 빛이라” 그러면 그분이 와야 사람에게 빛이 있고 그분이 와야 생명이 있지 그분 없는 데는 생명이 없읍니다. 그렇기에 안 믿는 사람들은 그분이 안 계시기 때문에 생명이 없읍니다. 또 안 믿는 사람에게는 그분이 없기 때문에 빛이 없읍니다.

이랬는데 여게 말씀하시기를 8절에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닙니다. 9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참빛이 세상에 있었나니” 모든 것을, 이 빛이라 말은 살게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그는 도성인신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기 전에 그분은 세상에 계셨읍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에 언제부터 계셨읍니까? 언제부터? 세상이 언제부터 시작됐읍니까? 세상이 언제부터 시작됐읍니까? 창조로부터 시작됐읍니다. 창조로부터 시작됐는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물 위에 운행하시다” 그 운행하셨는데 그때 운행한 분이 누굽니까? 그때 운행한 분이 누구요? 그때 운행한 분이 곧 말씀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신성이십니다.

또, 그라고 창조하실 때 창조해 놓고 난 다음에 에덴동산에 아담 하와를 인도한 이가 누굽니까? 그 하나님이 누구요? 그 하나님이 내나 제이위 성자 예수님 하나님이오. 또 범죄했을 때에 탄식하시면서 찾아오셔 가지고 아담을 찾던, 숲속에 있는 것을 찾던 하나님이 누구요? 그 찾던 하나님이 내나 그 세상에 계셨다는 분 곧 말씀이신 주님이십니다.

또, 사람들이 범죄했을 때에 가죽옷을 지어서 입힌 이가 누굽니까?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이십니다. 그때부터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 곧 남을 죽이고 죽이고 살아야 되지 죽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것, 짐승을 죽여서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힌 것으로 그때부터 그 대속을 말씀하신 것이고,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을 말씀하신 것이 곧 도성인신하실 메시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을 지었다는 것은, 세상을 지었다는 것은 천지 만물 창조를 지었다는 말뿐 아니고 “세상을 지으셨고”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 다음에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그 다음에 사람을 지으시고 이 모든 피조물들이 움직이기를 시작하는 그런 것이 다 전부 세상입니다. 움직이고 하는 그런 게 다 세상이오.

이런 거, 그러면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과 만물들이 서로 조화를 맞춰 가지고 이렇게 서로 협조하고 살도록 이래 하고 하는 그 모든 것, 살다가 잘못됐으니까 그거는 또 하나님이 벌하시고, 또 인간을 통해서 법을 세우시고 법을 세워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모든 옳은 것은 권면하고 나쁜 것은 징계해서 이렇게 모두 다 하는 애써서 자꾸 이렇게 해 나오신 그분이 곧 주님이십니다.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이 알지 못한다 말은 모든 인류들이 그분에게 지음 받았지, 주님에게 지음 받았지마는, 김일성이도 주님에게 지음 받았지마는 저 주님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은 그거는 지금 욕심에 끌려서, 남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자꾸 이런 죄 저런 죄 제가 하고 싶어서 짓고 욕심 부려서 짓고, 욕심 가지고 죄 짓는 거, 모두 다 주님에게만 욕심을 품는 게 아니고 성령의 욕심만 가진 게 아니고 온갖 욕심을 가진 것은 하나님을 알지마는 욕심을 못 이겨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이라.

김일성이도 하나님은 알고 있읍니다. 그 사람이 주일학교 다닌 사람이요 주일학교 학생이요 또 그 사람이 뭐 주일학교 반사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읍니다. 이런 사람인데 알아도 욕심에 끌려서 못 견뎌서 지금 무신론을 말해야 자기가 뭐 될 것이기 때문에 방편을 쓰고 있는 것이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김일성이도 주일학교 학생인데 그것도 인제 언제 회개하고 예수 믿을란지 모른다.’ 모릅니다. 그 사람 지옥 갈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이 욕심에 끌려서 지금 그런 재를 저지르고 자기 심판거리를 만들고 있읍니다.

그러면 김일성이 동생이 얼마나, 여게 있는 사람들이 다 김일성이 동생 같은 사람들이오. 그와 같은 사람. 우리가 다, 우리도 이 악령 악성 악습 그놈에게 미혹을 받아 가지고 원치 안하는 고의가 아닌 그런 일을 자꾸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도 택한 자라도 그런 짓 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저주받아 멸망받을 사람이라고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이 알지 못했다 말은 모든 인류들이 모른다 그말이오.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백성이, 자기 땅에 온다 말이오. 이거 자기 땅,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땅에, 자기가 지어 놓으신 자기 땅에, 자기가 건설해 놓은 이 세상 속에 왔지만 이 세상도 모르고 자기 땅도 모른다 그말이오. 자기 백성들이 몰라.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백성이, 자기는 누굽니까? 자기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 자기 백성은 누굽니까? 전인류. 자기 백성은 전인류라 말이요, 자기 백성은 전인류. 택한 자만 아니라. 전인류가 자기 백성이라.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영접하는 자가 따로 있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자들. 이제 여기서부터 구별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자기 백성 가운데에서, 여게서부터 창세 전에 선택 받은 사람들이 구별돼 가지고 인제 그 이름을 믿게 돼.

“그 이름을 믿는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그 이름을 믿는다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말은, 그 이름이라고 말한 것은 그분의 모든 역사를 믿는 자라 말이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 그분의 이름만이 아니고 그분의 역사를 믿는 자라.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 이름이 커진다 말은 역사가 커진다 말이요 그 사람 이름이 간 곳이 없다면 역사가 없어졌다 그말입니다.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역사, 그분의 역사가 뭐인데? 도성인신하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시고 또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이 역사의 이 우리의 대속을 믿는 거라. 그 이름을 믿는다 말은 그 이름 예수라는 두 자의 이름만이 아니고 이름과 그 모든 역사를 믿는 걸 가리켜 말합니다.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실력을 주셨으니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는데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이것은 이 세상법으로 된 게 아니라 말이오. 이거 무슨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순전히 되어진 것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 그 다음에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말은 독자라 이렇게 말하는데 아들이 한 분뿐이라는 그 뜻도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나타나신 아들은 한 분뿐이라는 뜻도 있지마는 이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말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은 오셨지 다른 걸로 오지를 안했읍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서만 나왔지 무슨 다른 피조물의 무엇으로 오지 안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성령이 오셔 가지고 당신이 지으신 마리아의 몸을, 당신의 지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가지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이분이 하나님을 나타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을 그대로 나타냈기 때문에 곧 예수님이 나타나셔 한 행동은 아버지의 행동이요 성령님의 행동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다 봤읍니다. 아버지가 이거 어떻게 생각할까 하거든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사고를 할 때에 생각하고 연구하고 할 때에 성경 가지고 연구하는 거 좋고 원만하고 그 다음에는 간단하고 쉬운 것은 ‘예수님이면 이 일을 어떻게 했겠느냐?’ 좋습니다. 예수님이면, 이 사건을 만났을 때에 ‘이 일을 어떻게 지금 처리해야 될까,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셨겠느냐?’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셨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간단 명료하고 쉽습니다.

그 다음에는 만일 옳은 교역자가 있다면은 ‘이 일은 우리 목사님이면 어떻게 처리하시겠느냐 ?’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라면은 목사만치는 할 수 있읍니다. 또 ‘우리 구역장 권찰님은 어떻게 처리했겠느냐?’ 하는 거 생각하면 가까워집니다.

이러니까 말씀하시기를 “장로된 자들아 너희들이 양무리의 본이 돼라” 본이 돼라 말은 양무리들의 표본 인물로 양무리들이 따라오고 양무리가 장로 너 닮으면 되도록 그렇게 해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제 이 말씀 들으면 요 말씀뿐이고 저 말씀 들으면 저 말씀뿐이니까 자꾸 들은 말씀을 속에다 넣어 가지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기를 우리가 힘쓰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서 그로 인해서 내가 그로 인해서 말도 하고 행동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분에게 언행심사가 피동되고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가 움직여야 됩니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랬읍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이래 하면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 가지고 우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주관하면 거게는 다 영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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