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의 생활

 

1987. 7. 15. 새벽 <수>

 

본문:요한일서 3장 1절∼5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 신구약 성경 이 계약 말씀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시고 나라로 임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통일된 그 나라에 왕으로 임하실 그때는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나니” 우리가 그와 같은 그런 자가 됩니다.

다만 그는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이요 그는 하나님과 사람이 한 격위를 이루신 분이요 우리는 한 격위는 이루지 못하지마는 하나가 되어서, 언행심사의 전행동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서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말도 그분과 같은 말 하고, 행동도 같은 행동하고, 능력도 같고, 마치 몸에 모든 기운이 그 지체에 다 가는 것처럼 주님은 원인자시라면 우리는 주님과 꼭 같은 모형자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지금 우리를 뭐인지를 모릅니다. 우리를 뭐인지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이것을 세상은 모르고 또 믿는다고 하는 저희들도 믿음이 있는 것만치 알지 없는 것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이 존귀한 소망을 우리가 가졌으니 이 소망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실력을 갖출라고 애를 쓰지 땅위에 썩어지고 없어질 그런 실력 갖출라고 애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 권위 있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은 이 세상에 사람들이 탐하고 있는 것과 비중을 단다면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것이지마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의 지극히 큰 것보다 없어질 것, 썩어질 것, 이 피조물로 말미암아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보이나 보이지 안할 것, 있으나 없어질 것 이런 것들의 가치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그 마음이나 정성이나 힘이 땅의 것을 위해서 기울어지는 사람 많습니다.

땅의 것을 가치를 그보다 더 크게 여긴 사람은 다 땅에 기울어지고 하늘의 것에 가치를 크게 여긴 사람은 하늘에 기울어지고 반반이 되는 사람은 반반이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러면 세상에 있지 안하고 세상을 떠나 사는가? 하늘에 소망을 가진 그것을 믿는 그 사람의 준비를 세상에서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세상에서 그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를 어데서 하는가? 이 세상 모든 언행심사 행동하는 각각 자기 분야에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위치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위치에서 하니 사람 보기에는 꼭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하늘에 소망 가진 사람은 그 일 하는 그 일에서 하늘에 소망을 지금 연습하고 이루고 있고, 하늘에 소망을 모르는 사람은 땅에 보이는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한 자리에 같이 누워 자나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또 매를 같이 같이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둘이 꼭 같은 학원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둘이 꼭 같이 이 세상에서 정치를 하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하늘의 소망을 자기가 확실히 믿기 때문에 하늘에 소망을 이 세상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 거게서 하늘에 소망을 연습하고 연성하고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볼 수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그 생활은 하늘의 소망을 이루는 장소요, 이루는 그 모든 운동들이요, 활동들이요, 방편들인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찌끼, 배설물. 찌끼요 속에는 하늘의 소망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만을 소망하고 하늘나라 소망하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을 소망하고 사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세상 것 그것을 위해서만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가리켜서 껍데기 생활한다, 그 사람을 외식하는 자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땅위에 사는 그 생활에서 자기를 깨끗게 한다, “그의 깨끗하심같이 깨끗게 한다” 했는데 깨끗이 한다 이라니까 물론 물로 씻어서 깨끗한 것도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땅의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로 씻어 깨끗하는 그것도 깨끗하게 하고 또 하나님의 이 법칙을 가지고서 깨끗게 할 것은 법칙을 가지고 깨끗게 해야 됩니다.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죄를 없이 할라고 나타나셨다” 그러면 죄를 없이 할라고 나타나셨다 그말은 무슨 말씀인가? ‘삐뚤어진 것을 없이 할라고 나타나셨다’ 하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에게는 삐뚤어진 것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기를 깨끗게 하는 것은 삐뚤어진 것이 없이 하는 것이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것이 없이 하는 것이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또 더 달리 다른 말로 깨끗게 하는 게 뭐인가? 깨끗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옳게 바르게 만들었는데 만드신 그대로 변질되지 안한 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사람은 깨끗한 사람은 어떤 게 깨끗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질된 것은 어떤 게 변질된 건가? 하나님의 그 신성, 하나님의 인격성과 다른 것이 그것이 변질된 것이요 하나님의 신성과 꼭 같은 인격성을 가지는 그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깨끗게 하는 것은 지식으로 깨끗해야 되고, 지식이 깨끗한 것은 어떤 건가? 지식이 깨끗한 것은 하나님의 지식만이 옳고 바르지 땅에 있는 지식은 전부 다 삐뚤어지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지식을 깨끗게, 또 지혜를 깨끗게, 지혜를 깨끗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지혜를 깨끗게 하는 것인가? 지혜라 하는 것은 미래에 속한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인데 하나님이 미래를 아심같이 나도 미래를 그렇게 아는 것이 지혜가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깨끗한 것은 주님에게 피동돼서 주님이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를 권고하시는 대로 우리를 교훈하신 대로 그렇게 주님에게 피동되어서 행동하는 그 행동이 깨끗한 것이기 때문에 지혜도 하나님과 같은 지혜, 지식도 하나님과 같은 지식, 같은 지식이면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지식을 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은 근본적인 원형 지식이요 자기는 모형 지식이기 때문에 같은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식도 하나님과 한 지식, 같은 지식, 한 지식, 하나님의 지식은 원형인데 마치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거와 같이, 그림자는 꼭 실체와 같습니다.

그것도 잘 비유는 안 되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은 실체라면 우리 지식은 그 실체에 그림자와 같습니다. 개 그림자는 개 같을 것이고, 사람 그림자는 사람 같을 것이고, 소 그림자는 소 같은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원형 지식 가져 있는 그 원형 지식을 내가 닮는 것이 꼭 내나 모형이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형이요 우리는 모형입니다. 지식도 하나님의 지식에 모형 지식이요, 지혜도 하나님의 지혜를 닮은 모형 지혜라, 선도 하나님의 선을 우리가 닮은 하나님의 선과 꼭 같은 모형 선이라. 또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모형 사랑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닮는다면 어떻게 닮을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모형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걸 미워하고, 하나님이 또 사랑을 인해서 어떻게 참으시고 어떻게 권하시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나와 하나가 돼 가지고서 할 때에 하나님의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과 나와 하나돼 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피동돼 가지고 내가 하지마는 내가 하기 때문에 그거는 모형 사랑이요 사람이 가진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실이나 거룩이나 의나 또, 우리는 앞으로는, 앞에는 모든 것이 다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불변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은 다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은 뒤로 돌아볼 때에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변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도 더러워질 것은 없습니다. 다 깨끗하고 거룩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존성, 완전성, 영원성, 단일성 이런데 영원성은 내나 그 불변성이라고도 말합니다. 변치 않으니까 영원하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속성은 우리가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만 가졌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는데 이 네 가지는 자존성은 영원히 가지지 못합니다. 자존성은, 스스로 있는 이 자존성은 영원히 가지지 못하지마는 이 세 가지는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세 가지는 어떻게 가지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만들어 놓은 것, 하나님께 피동으로 만들어 놓은 것, 하나님께 순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다 이 세 가지, 완전성, 영원 불변성, 단일성 이것이 돼야 사망이 없습니다. 이게 완전히 영생하고 사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는 다 안 됐기 때문에 이것을 고치고 고쳐서 일단 믿음으로 고쳐 놓은 것 만들어 놓은 건 다 그게 완전한 것입니다. 다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감과 진리대로 행동하는 그 행동은 변하지 않는 행동이요 완전한 행동이요 영원한 행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에는 내 앞에 있는 것은 다 불완전하지마는 일단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서 만들어진 것은 다 영원한 것들이요 완전한 것들이요 불변한 것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다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이 소망 가진, 무슨 소망인데? 주님과 같이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은 지금 부활하셔서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마는 그 인성 가지고 계시는, 인성 가지고 계시니까 예수님은 영도 있고 육도 있고 또 신성도 있고 이런데 그것이 한 격위로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하고 나시니까 인성이 완전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데 들어와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인제 문을 닫고 있는데 문 열지 안하고 들어온 그것이 신령한 몸으로 예수님이 변화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빌립보 3장 끝절에 보면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지고서 우리의 이 천한 몸을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광스런 몸으로서 다 변화시키시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사람들에게 서로 교제할 수 있고, 손을 잡고 만날 수도 있고, 당신의 몸을 보일 수도 있고, 또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몸은 부활하신 지 후 벌써 근 이천 년이 다 돼 가지마는 아무 식물을 자시지 않습니다.

뭐 떡도 물도 아무것도 먹지 않지마는 또 자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 몸은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바다에서도 떡을 자셨고 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로 더불어 같이 들어가서 그날 밤에 유하면서 떡도 자셨고 생선도 자셨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령한 몸이라 하는 것은 이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간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지금은 배가 불러서 기운이 있지마는 한 열 시간 지나가 놓으면 허준하게 그만 기운이 없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만일 누가 사십 일, 그런 것은 단식 한다 하지만 사십 일 단식하는 그것도 물을 먹으면서 단식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마는 안 먹고는 안 됩니다. 또 안 먹고 사십 일 단식한다 해도 사십 일을 단식한다 할지라도 사백 날은 단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시간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은 지낼 수 있으나 두 시간 지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또 우리의 이 모든 몸에 있는 이 지체는 한 십 분 같은 것은 안 썩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 분을 만일 숨을 쉬어서 십 분 동안을 호흡을 해 가지고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산소가 청소해 가지고서 더러운 것을 내버리고 자꾸 새로 소생시키는 그 일을 하지 안하면 공기를 산소를 마시지 안하면 우리 몸은 십 분 있으면 벌써 그 썩어집니다.

제일 약한 부분이 썩어지고, 그 사람이 숨이 딱 끊어지면 산소 호흡을 못 하게 되는데 그 산소 호흡을 시키면, 숨이 끊어진 사람이라도 산소 호흡을 시키면 그 산소 호흡을 뗄 때까지는 그 속에 육체가 상하지 안하고 그냥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산소를 딱 떼버리면 그만 즉시 썩어서 썩은 냄새도 나고 썩은 물도 나오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뭐이냐? 한 십 분은 지내나 이십 분 못 지내는 것도 있고, 한 시간 지내나 열 시간 못 지내는 것도 있고, 또 한 며칠은 지내나 더 많이 못 지내는 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십 일은 단식을 할 수 있지마는 사백 날은 단식을 못 합니다. 그것이 시간에 제한을 받는다 말입니다.

시간에 제한을 다 초월하고 공간에 제한을 초월하는 거, 공간이라는 것은 우리 몸뚱이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되면 그리 통과할 수 있지마는 우리 몸이 들어갈 수 없는 우리 몸보다도 작은 구멍이면 우리는 그 구멍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또 우리 몸뚱이보다 큰 구멍이라면 그 큰 구멍에는 우리가 하나되지를 못합니다.

작으면 비좁아 못 들어가고 큰 구멍에는 그 구멍에 한쪽 구석만 채우지 전체를 채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한 몸은 그 몸을 얼마든지 크게 해서 우주에 가득 채울 수도 있고 또 아주 무쇠 속에도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그래서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넓어도 상관 없고 좁아도 상관 없다. 그런 몸이 신령한 몸이요 모두 다 신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생명이 되는 것은, 우리는 지금 백 년 지내면 이 육의 생명은 끊쳐지고 뭐 많이 요새도 잘 살아봤자, 요새는 몰라, 백오십 년까지 사는 사람 있는지 모르겠지마는 그렇지마는 천 년이나 그렇게 산 사람은 역사 이후에 하나도 없습니다. 태초의 사람들은 좀 오랬지마는 그것도 다 무한한 장수는 못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것은 영원 무궁토록 가도 우리의 생명이 변치 않고 우리의 건강이 변치 안하고 우리의 이 모든 이목구비의 우리의 전신과 전지체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뭐이냐 하면 신령한 몸으로 다 변화받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우리가 가졌기 때문에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 그러면 우리 사람에게 비유컨대는 만일 열 가지 면을 가졌는데 아홉 가지 면이 깨끗하다 할지라도 한 가지 면이 깨끗하지 못하면 한 가지 면 그것 때문에 깨끗한 것이 다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독촉해서 ‘너는 이 면은 깨끗하나 이 면이 깨끗지 못하다.’ 그러기 때문에 며칠 전에 우리가 늘 지난번에도 공부한 것은 자기의 잘못된 점, 자기의 단점을 찾아서 고치자 그말은 자기가 깨끗지 못한 그점을 찾아서 고치자 그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깨끗한 것은 어떤 것이 깨끗한 것이냐? 깨끗한 것은, 자기의 깨끗한 것은 뭐이 자기의 깨끗한 것입니까? 자기의 깨끗한 것은 모든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그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면은 깨끗한데 저런 면은 깨끗지 못하다. 깨끗지 못한 그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그것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것을 비유해서 어떤 사람이 나무를 가지고 동글동글한 그 공을 만드는데, 공을 만들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보니까 아주 이 아름되는 나무가 있습니다. 또 나무가 요 그저 팔뚝시만한 나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보니까 큰 공을 만들면은 가치가 많고 작은 공 만든 거는 가치가 없다. 그런데 동글동글 만들어야 되는데 그 만들라고 재료를 가서 선택할 때에 이 사람이 보니까 한 군데 구멍이 뚫혔습니다, 하나는 보니까. 큰 나무인데 보니까 구멍이 뚫혔습니다. 그 구멍을 이거 뭐 쇠꽂이나 이런 거 가지고서 재어 보니까 그 구멍이 바로 그 나무의 중심을 지나갔습니다. 중심을 지나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가지고 흠없는 동글동글한 것을 만들라고 하면은 얼마나 큰 걸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한번 말해 보이소? 얼마나 큰 걸 만들 수 있습니까? 남반은 그런 걸 잘 아는데 목수들은 잘 알 건데 여반들은 모를지 모르는데.

얼마나 큰 걸 만들 수 있습니까? 한번 여반에 한번 대답해 보이소. 큰 나무로는 이렇게 큰 걸 만들 수 있다 말이지? 또 너는 어떤 거 만들 수 있어, 너? 뭐라 하노? 작게 만들 수 있어? 작게 만들 수 있다? 너는? ○ 너는? 만들 수 없어? 동글동글한 거 조그만한 것도 만들 수 없어? 조그만한 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왜? 구멍이 벌써 중심을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구멍 없도록 깎아내야 되니까 깎아내다 보면 나중에 꿀밤만한 것도 못 만듭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러나 조그만한 나무라도 구멍이 뚫히지 안한 것은 깎으니까 그 나무의 둥치만치는 동그란 걸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다른 점이 다 좋아도 어느 한 점이 나쁜 점이 있으면 나쁜 점 그것 때문에 좋은 점이 다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나쁜 점 그거 하나만 빨리 고치면은 다른 것 다 고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건 빨리 고치면은 자기는 원만한 사람이 자꾸 되어져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잘못된 점 못쓸 점 그 점을 가지고 찾아서 고치는 것이 마치 둥근 공을 만들라고 나무를 재료를 찾다가 구멍 뚫힌 그걸 구멍을 메우는 거, 구멍을 만일 본살같이 메운다고 하면은 그거는 큰 공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다. 그 구멍을 채워 올려서 구멍이 없어야 돼지지 구멍이 있으면 딴거 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을 깨끗게 하자. 자신을 깨끗게 하자. 깨끗게 하는데 우리는 깨끗게 하자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더러운 것을 없앤다 그말입니다. 더러운 것을 없앤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삐뚤어진 것을 없앤다 하는 그말입니다. 삐뚤어진 것을 없앤다 그말입니다.

삐뚤어진 것은 뭐이 삐뚤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신 그대로 본질대로 있지 안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신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 있지 안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변해서 그 사람이 변질된 사람을 더럽다 하고서 변질된 것을 다 고치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질된 그것을 말하기를 옛사람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옛사람을 죽여버리고 자꾸 새사람으로 이래 고쳐지는 그것이 자기를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 깨끗은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 사람 깨끗이오. 왜? 사람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사람은 개같이 만들었습니까? 사람은 뭣같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꼭 같은 것,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깁니까 동급니까 짜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뭐이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하나님의 뭣이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 열두 가지 속성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면 열두 가지 속성,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그 인격성을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성을 따라서 나도 자꾸 하나님 신성과 같은 그런 사람을 자꾸 만들라고, 만들라면 지식에 온전해야 되고, 지혜에 온전해야 되고, 사랑에 온전해야 되고, 진실에 온전해야 되고, 거룩에 온전해야 되고, 의에 온전해야 되고, 주권에 온전해야 되고, 그 모든 것이 완전해야 되고, 영원해야 되고, 불변해야 되고, 만들어 놓은 건 다 완전해야 됩니다. 영원해야 됩니다. 변치 않는 것이라야 되어집니다. 다 이것은 여러가지나 단일성의 것이라야 됩니다. 꼭 같은 단일성의 것이어야 되니까 이것이 사람 더러운 것을 사람을 깨끗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행동은,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하면 깨끗합니까? 우리 행동은 어떻게 하면 깨끗하지요? ○○○씨? 우리 행동은 어떻게 하면 깨끗해집니까? 어떻게 하면 깨끗해지지요? 어? 나는 귀가 어두워 안 들려. 어? 뭐? 하나님의 속성대로 사는 것, 행동이. 그 말은 맞기는 맞은데 알아듣기가 어려워. 하나님의 속성대로 살면 완전한 사람으로 사는 게 행동이 깨끗한 것이라 그말이야 맞지. 완전한 사람, 완전한 사람 행동하는 것.

행위 깨끗은 우리에게 행위의 법칙을 줬습니다. 행위의 법칙을 줘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라, 말은 어떻게 해라, 네가 성질은 어떻게 써라, 생각은 어떻게 해라, 또 손은 어떻게 놀리라, 또 물질에 대한 건 어떻게 해라, 그런 데 대해서 옳고 바르게 우리에게 법칙을 주신 게 있으니까 그 법칙이 뭐입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행동하면 행위가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면 자신이 깨끗해진 것이고 우리가 또 욕심은 깨끗하게 하면 깨끗한 욕심은 어떤 것이 깨끗한 욕심입니까? 성경 말씀이 가지라는 욕심만 가지면 깨끗한 욕심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다 깨끗한 욕심입니다. 우리의 욕심 중에 깨끗한 욕심은 육체의 욕심은 다 죽고 망하고 성령의 소욕하는 것은 하나님이 욕심 품는 것은 우리도 욕심 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 우리도 원하고 그러면 그것은 욕심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욕심 닮는 것이 깨끗한 것이요 하나님 욕심 닮을라면 어떻게 합니까? 신구약 성경에 욕심을 품으라는 거는 품고 품지 말라는 것은 안 품으면 우리 욕심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무슨 소망?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하는 말씀,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와 같이 될 것 이것이 우리 소망이기 때문에 이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니까 어짜든지 자신을 깨끗게 해야 됩니다.

상대방이 어떻다고 자기를 더럽히지 맙시다. 자기를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나쁜 욕심 더러운 욕심 물욕 때문에 물욕 그놈에게 미혹받아 가지고 자기를 더럽히고, 또 감정 그놈에게 피동돼 가지고서 자기를 더럽히고,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못할 일 한다고 그 상대방이 나에게 못할 하니까 나도 분개해 가지고 날뛰다 보면은 자기를 더럽히기 쉽습니다.

자기를 더럽히는 것, 더군다나 더 남자는 여자로 더럽히지 말 것, 여자는 남자로 더럽히지 말것, 그러면 이거는 꼭 다른 사람만 그런가? 부부간도 아내로 남편이 더러워질 수 있고 남편으로 아내가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부는 하나님이 다 동침을 허락했지마는 그것이 지나치면, 하나님에게 바쳐 일하는데 지나치면 다 그것이 음란이 됩니다. 음란이라는 것은 부부간에 있는 것이 많지 다른 사람과는 그거는 음란이 아니고 벌써 간음입니다. 그래 간음이요 음행인데 음행이라는 것은 부부간에 지나치게, 사람들이 요새 타락하니까 그 중심으로 살고 그 위주로 살고 그 재미로 사는 그 모든 것이 다 그것이 다 음란이요 자기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러나 한쪽의 욕심대로 하지 못하고 결혼하면 벌써 아내는 남편이 주관하고 남편은 아내가 주관하기 때문에 거게 따라서 피동 안 되고 자기 주장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잘 기도하고 힘쓰고 노력해 가지고서 그런 면을 깨끗하게 해서, 그래서 “나뉠 때에는 다문 며칠이라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하루고 열흘이고, 일 년이고 이태고 몇 해고 그렇게 나뉠 때에는 둘이 의논해 가지고서 기도 생활 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 기도 기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다시 합하라 분방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면으로 우리는 깨끗하게 하는데 이 면은 깨끗하다 보이는데 저 면에 사고가 생기고, 저 면에 깨끗해도 이 면에 사고가 생기기 때문에 모든 면이 같이 깨끗해져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결혼한 사람과 결혼 안 한 사람이 다르다. 결혼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기 자유대로 못 하기 때문에 “남편을 기쁘게 할까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되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저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만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타락한 세대가 돼 놔서 나는 그걸 반대합니다. 독신 생활 하는 사람을 반대하고 동정녀로 사는 사람을 반대합니다. 동정녀로 사는 게 나빠 그런 게 아니고 동정녀로 깨끗하게 살면 그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요 하늘나라에서 존귀해지지마는, 왜? 일생 동안 자기 마음을 나누지 않고 주님만 향했기 때문에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 보기에는 처녀라고 살고 속으로는 처녀가 아니고, 또 무슨 육적 범죄는 안해도 자기가 마음에 항상 결혼 안 하니까 마음이 텅 비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공허심을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그것보다는 차라리 하나 정해 놓고 마음이 흔들리지 안하는 게 좋다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면으로 우리는 자기를 깨끗게 하는 이 일을 항상 힘쓰는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왜? 주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래 자녀로 나타나는데, 그때는 딸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뿐입니다. 여반도 전부 아들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날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심이 되면 하나님의 아들과 꼭 같이 될 이 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를 하나님 아들과 같이 깨끗게 하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돈이 없어도 깨끗하면 성공이요 아무리 천하를 차지해도 자기가 더러우면 성공은 아니고 실패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하나님을 향한 지식 13가지를 잘 외워 가지고 이번에 하기아동 성경학교도 이것으로서 공과가 돼 가지고 있으니까 어짜든지 다 외워야 됩니다.

외우도록 해 가지고 가르치도록 그렇게 합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잊으면 안 됩니다.

지하철 위해서도 기도를 끊임없이 하도록 합시다.

또 하기아동 성경학교가 곧 시작되니까 이 하기아동 성경학교를 위해서 그날 무슨 교통의 사고도 없도록 또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은혜롭게 잘 되어지도록 그렇게 하기아동 성경학교 위해서 기도하고 또 곧 열려질 팔월 거창집회를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합시다.

그 기도로 하고 자꾸, 물론 걸음도 걸어야 되지마는 걸음만 가지고는 안 돼.

기도하고 걸음해야 되지 자꾸 가서 가자고만 조아 붙이면 그 권태나 가지고 그 사람 피해서 도망칩니다. ‘요 시간에 또 심방 올 터어니까 어라 나는 피해야 되겠다.’ 피하고 숨습니다.

이러니까 기도하고 또 그렇게 권면하고, 기도하고 권면하면, ‘내가 기도하고 권면하면 된다’ 이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지나치게 하면 일이 안 됩니다. 지나치게 하면 일이 안 돼. 지나친 사랑으로 사랑하다, 내가 여기 그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학생을 자꾸 이걸 지나치게 책임을 지고 사랑하고 권유하고 참 자기의 낳은 자녀와 같이 꼭 그런 사랑을 가지고 이래 하다 보니까 이게 말 안 들으니까 사랑이 뜨거우니 돕는 것도 뜨겁고 간섭하는 것도 뜨겁고 또 책망하는 것도 뜨겁다 말이요, 나쁜 일 하는 데 대해서도 뜨겁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 그만 그 아이를 이렇게 손을 잡아 댕겨서 손이 그만 힘줄이 늘어졌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치료비도 물어주고 나중에 그게 도로, 사랑으로 그래 하기는 한 건데 이놈이 그만 너무 지나치니까 손해갔다 말이오.

“무엇이든지 옳은 것을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만 하라 이에서 더 지나치면 악으로 좇아나느니라” 그말은 자기 욕심으로 나왔다 그말이고 자기 사욕으로 나왔고 중심으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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